구속의 더 깊은 목적을 관심함
- 새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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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 더 깊은 목적을 관심함
성경에 ‘구속’(redemp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엡1:7, 롬3:24, 8:23, 눅21:28, 고전1:30, 14, 4:30, 골1:14, 히9:15, 11:35). 이 ‘아폴뤼트로시스’(629)라는 말은 속전을 지불하고 속박에서 풀려나는 의미를 가집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지만, 타락 후 잃어버린 바 되어 율법의 저주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사오셔서, 다시 소유하시게 된 것을 뜻합니다. 즉 <소유-잃음-값지불-재소유> 이 네 단어가 구속의 핵심개념입니다.
- 구속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보통은 구속의 의미를 죄들을 용서받음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속 곧 죄들(sins)의 사함’(엡1:7)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개념을 ‘첫언약 때 범한 죄(transgressions)을 속하려고 죽으사’(히9:15), ‘모든 불법(iniquity 혹은 lawlessness)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딛2:14)라는 말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러한 죄사함에 더하여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됨’을 구속의 분깃으로 누립니다(갈3:13). 이런 인식이 있으면 ‘안식일 준수’ 니 뭐니 하면서 이런 저런 율법의 속박 앞에서 전전긍긍 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 구속의 더 깊은 목적에 대한 이해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읽어본 분들은 알고 계시듯이 구속은 소위 죄사함받고 의롭게 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대신에 그것은 죄사함을 통한 의인됨을 출발선으로 해서 이미 구속받은 사람들이 휘오데시아 즉 ‘아들의 명분’ (갈4:5)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엡1:5) 또는 ‘아들의 자격’(sonship)을 갖는 것이 최종목표입니다.
이 점은 다음 갈4:4-5본문을 볼때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엑사고라조, 1805) ‘아들의 명분’(휘오데시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미국표준역과 킹제임스 성경은 이 ‘아들의 명분’을 ‘the adoption of sons’라고 번역함으로 세속적인 양자삼음의 개념을 연상케 하여 이 본문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참고로 다아비 역은 헬라어로는 한 단어인 이것을 ‘sonship’으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의미는 상속받을만큼 (영적 생명이) 장성한 아들을 가리킵니다. 즉 거듭났을 뿐 아니라 변화받고 마침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된 단계의 아들들을 가리킵니다(요1:12, 롬12:2, 갈4:19, 롬8:29).
따라서 구속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죄사함 받고 이제 의인되었다고 기뻐할 뿐아니라 그것에 기초해서 영적 생명이 성숙하는 생명의 좁은 길을 신실하게 가야합니다(마7:14). 또한 우리가 율법의 저주는 물론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망령된 행실'로부터도 구속(뤼토로오, 3084)받은 사실을 늘 기억하고, 이런 저런 열매없는 헛된 일들에 공연히 얽혀서 세월을 낭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히12:1). 그 대신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휘오데시아’에 있음을 늘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도 넉넉히 들어 갈수 있을 것입니다(마7:21, 딤후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