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사는 문제
- 새예루살렘
- 60
- 0
죽고 사는 문제
‘죽었다’ 또는 ‘살았다’라는 한국말이 같아도 그 영적 의미에는 ‘뉘앙스’가 있는 구절들이 성경에 더러 있습니다. 이 죽고 사는 문제를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눅9:59-60)
위 말씀에서 ‘자기의 죽은 자들’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앞의 ‘죽은 자들’은 영적 생명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모든 불신자들>은 다 하나님의 눈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1).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죄사함 만으로는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에 더하여 추가적으로 생명을 영접하는 구원을 받아야 <영적으로 산 자>가 됩니다(롬5:10).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6:6)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란 말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옛사람이 이미 죽었음을 보는 것은 큰 구원입니다. 그런 사람이 침례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침례는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같은 침례의 사실 위에 서서 구원받을 때 받은 새 생명을 날마다 사는 생활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8:6)
거듭난 사람도 생각을 육신에 둘 때 영적으로 죽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무능하게 됩니다. 불신자는 늘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도 육신의 생각때문에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오늘날 죄 짓는 것을 관심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사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드문 것같습니다. 성경에서 사망은 죄보다 더 엄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민19:7, 11).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위 ‘죽이면’은 적극적이고 영적인 개념입니다. 이것은 그영이 모든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음에 넘기고자 하실 때 우리가 동역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 말씀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눅9:23)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한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이미 한번 죽었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날마다 죽는 것이 필요합니다.즉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못박힌 것은 이미 성취된 사실(fact)입니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효능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을 유지할 때만 우리에게 체험됩니다. 우리, 특히 아직 변화되지 못한 혼이 이러한 연합에서 떠나는 그 순간 이미 죽은 그 옛사람 또는 몸의 행실이 우리를 주관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그 실재에서 떠나게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그영 안에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갈5:16).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영적으로 산 자가 되고, 옛사람이 못박힌 실재 안에 있게 되고, 사망을 가져오는 육신의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게 되고, 날마다 죽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이 남게 됩니다. ‘ 그 영 안에서 행하는 것’(Walk in the Spirit)은 과연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