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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6)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6)

 

 

[이인규님] ➁ 지방교회의 영과 혼과 육에 대한 잘못된 삼분법

 

정통교단에서도 어느 교단은 이분법을, 어느 교단은 삼분법을 가르친다. 물론 필자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살아있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된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는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에 대한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 영과 육의 대결, 선과 악의 대결의 이원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 롬 7장은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이 왜 실패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율법을 모르고 '선을 행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실패하고 곤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데(롬 7:18)" 그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17)"이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기(롬 7:21)" 때문이다. 이인규님은 이런 갈등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갈등은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성경적인 체험인가?

 

"살아있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된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본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가 영과 혼과 몸을 구분하는 것을 실제적이면서도 '영적인 의미'가 포함된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물질적인 의미로만 이해했기에 "살아있는 인간의..."라고 한 것인가? 그렇다면 안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성경의 용례를 따라 그렇게 구분한 것이고 '혼과 영의 분리'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히 4:12에 근거한다(물론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언급하는 것인데, 타락한 사람의 '영과 혼'은 마치 영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혼 안에 깊숙히 '파묻혀' 있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타락한 이래로 사람의 '혼'과 '영'의 구분이 모호하고 성경과 체험상 '동의어'처럼 보이기에 어떤 이들은 '이분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롬 7장의 체험이 없으면(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바울과 같이 극도로 의롭게 되려는 체험이 없으면) 사람을 '전인적인 존재(이것을 '전인설'이라고 한다)'로 인식하기가 쉽다). 즉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영을 따라' 살아야 되는데(롬 8:4-5), 비록 거듭나기는 했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 혼을 따라, 혼을 강화시키는 세상의 체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을 따라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믿는 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영의 느낌'을 읽을 수 있도록 영과 혼이 분리되는 것이 필요하다(이것은 성령의 계시(엡 1:17, 히 4:12)로 말미암는다). 바로 이런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꼭 삼분설을 믿지 않아도, 이분설이나 전인설을 믿어도 가능하다(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한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삼분설을 믿고 있는데 '지식'에만 만족하고 이러한 체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인규님] 이러한 주장이 한국교회에 소개된 것은 워치만 니로부터 우리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숱한 이단들(지방교회, 구원파, 베뢰아, 다락방등)이 나타났다.

 

심지어 정통교회에서도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살아서 분리되는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간주하여 아래와 같은 이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상당히 많으며, 또한 영성운동, 영성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영과 육이 분리될 수 있다는 이단적인 주장도 많이 있다.

 

---> 우리는 다른 단체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인규님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인규'님과 같은 분이 말하니 혹 우리와 같이 오해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다만 워치만 니가 영에 속한 사람 '서문' 및 '편집을 마치고서'에서 말한 것을 소개해 주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영적인 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이 책의 앞뒤에서 말한 것의 영적 생명의 수준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포기하지도 말고 억지로 머리로 연구하지도 않도록 부탁의 말을 드린다. 그 진리들은 당신보다 더욱 성숙한 생명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은 절대로 영적인 생명과 영적인 전쟁에 대한 이론의 책이 아님을 이해하기 바란다. 나 자신은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진리들을 여러 가지 고통과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간증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진리 속에 불의 화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한 부류만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낀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본래 많은 믿는 이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한 권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필요성이 없는 독자라면 이 안의 진리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이 안의 부당한 것을 판단할 것이다..."

 

 

[이인규님] 어떤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는 이단이지만, 워치만 니는 이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방교회 인간론은 워치만 니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그들의 양태론인 ‘삼일론’이라는 용어 자체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들의 배타적인 교회론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왔으며, 특히 단체구원론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관계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 부자관계와 같았다"고 진술하며,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워치만 니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존다비와 앤드류 머레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워치만 니는 존다비의 극단적 세대주의와 앤드류 머레이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며, 특히 존다비의 그의 독단적인 성경해석 때문에 형제교회의 지도자들과 많은 분쟁을 일으켜 많은 지도자들이 형제교회를 떠났다고 전해진다. 지방교회의 인간론은 삼분법을 공간적인 장소적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예수와 사람을 동일한 존재로 보기 위한 이론 전개에서 지방교회의 중요한 교리가 된다. 사람의 안에서 사탄(욱체)과 하나님(영)의 이원론적인 대결이 있으며, 이것이 지방교회의 성화교리가 되어지며, 베뢰아의 귀신론이 영향을 받게 된다.

 

---> 위에서 답변을 드렸듯이 '전인적인 존재'로 롬 7-8장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분설로도 롬 7-8장의 체험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롬 7-8장에서 '하나님의 법'을 제외하고 3종류의 법이 나오는데 각각 우리의 존재와 관련되어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는 몇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인간론 외의 나머지 주제에 대해서는 앞 글에서 충분히 말씀을 드린 것 같다.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분들은 http://www.localchurch.kr/에서 검색을 통해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확인하실 수 있다.

 

 

[이인규님] - 죄는 사단의 체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이 두 체현들이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단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73쪽)

 

-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 좀 길지만,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http://www.localchurch.kr/1885)이라는 글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조금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탐하지 않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의 이 요구를 만질 때,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하며 더이상 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반대하여 일어나 내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많이 작정하고 결정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탐심은 더욱더 우리 안에 무성해진다. 밖에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 인해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즉시 우리 안에 악을 작용케 하여 우리의 선한 생각을 거스려 싸우게 한다. 더우기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교전에서 선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진다...

 

우리는 비록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위에 요구들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요구들을 실행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낼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죄의 법은 항상 선의 법을 반대하고, 선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방해하고 그 원함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강력한 힘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출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모든 요구들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구출되어 자동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이인규님] - 사람의 세 부분, 니 형제님은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 초기부터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살전 5:23). 그는 혼은 사람의 인격이고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바깥 부분이며 영은 영적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

 

정통신학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봅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된 인간론은 사람을 살아서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킨다. 문제는 인간의 영에는 양태론적인 하나님이 거하고, 인간의 육에는 사탄이 거하게 된다는 이원론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인간의 혼에는 인격이 거하는데, 그 인간의 혼을 빼앗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단이 싸운다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인용문의 출처가 빠졌는데, 아마도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일 것이다.

 

그리고 (5)번 글에서 이인규님이 "인간론에서도 비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그래서 이인규님이 영과 혼과 몸의 구별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해 드렸는데, 그 점에 대해 답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독자라면, 이분설이나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구별하고 구분한다고 하여 그들이 유체이탈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겠는가? 심지어 영과 혼의 분리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도 문맥을 읽어 보면 (자신이 아무리 체험이 없다고 해도) '영적 체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더구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별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 이상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 의하면 영혼을 육체와 조금이라도 구별하거나 구분한다는 말을 사용하면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의미로 보고 '곧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분설이나 삼분설에 대해서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람을 살아서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키는 곳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폴리나리우스가 비록 이단이기는 하지만 이인규님의 주장과 같이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는" 이단은 아닌데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주장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있는 건지 그의 주장까지도 왜곡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인규님은 자신의 관점을 객관화 하지 못했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글을 봄으로 자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만 드러냈다. 예를 들면, 구별은 구분과 다르고 구분은 분리와 다른데 이인규님은 구별이라고만 말해도 '분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는 이인규님의 인간론의 오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류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 교리에서 이단성은 거의 전반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의 정확히 교리를 파악하면 지방교회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➀ 신론(양태론, 승계론)

➁ 기독론(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는 아폴로내리우스 주의)

➂ 인간론(영과 혼과 육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 이원론)"

 

우리가 익히 알듯이 인간론은 이단 판정에서 상대적으로 좀 관대하지만 이인규님의 인간론의 관점은 기독론과 신론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에 심각한 것이다즉 '인간론'에서의 오류가 위 기독론에 대한 관점에서 반영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원리로 신론에서 이인규님은 정통 신학자들의 '구별'에 대한 관점을 '분리'로 인식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 같다.

 

"삼위일체는...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위로부터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을까?"

 

이런 이인규님의 관점에 동의하는 정통 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심지어 이인규님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다고 생각하여 요한 웨슬리의 주장을 인용했지만 과연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이인규님의 관점에 동의하고 있을까?

 

"상호 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누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 된다." (김영선,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93쪽)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듯이 요한 웨슬리의 주장은 이인규님의 주장과 비교했을 때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 차이를 가지고 이인규님은 그동안 지방교회 측의 관점에 대해 이단 판정을 해 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인규님] - 사단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인격화된 죄로 거하고 있다. 오직 살아있는 인격만이 어느 곳에 거할 수가 있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있는 그의 근거지로부터 사단은 우리 혼을 차지하고 우리 혼을 그의 절대적인 통제 아래 두고 싶어한다.(왕국, 216쪽)

 

- 사단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리 몸으로부터 우리 혼에 대해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 이같이 사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역사한다.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역사하신다. 어느날 주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축인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위트니스 리, 왕국, 217쪽)

 

---> 우리의 육체 안에는 죄(롬 7:17-18)가 있고 죄의 법(롬 7:23)이 있다. 그리고 이 죄의 법은 우리의 마음(생각)의 법(롬 7:23)과 싸워 우리를 곤고한 자가 되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며(롬 8:16) '생명의 영의 법(롬 8:2)'으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기를 원하신다(엡 3:17). 그러므로 우리 안에 '혼'을 차지하기 위한 영적 전쟁이 있고 영적 전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주님이 우리의 혼을 점유하시는 정도가 곧 '성화'의 정도이다.

 

 

[이인규님] 그렇다면 육은 죄를 짓거나 사탄의 거처이고 영은 죄가 없으며 하나님의 거처일까? 육도 죄를 짓지만 영도 죄를 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거룩함을 온전하게 이루어 육과 영(spirit)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인간은 육체나 영적으로 모두 죄를 지으며 더러워진 것이다. 물론 성욕, 식욕같은 욕망을 육체적인 욕망이라고 표현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고깃덩어리 육체만의 욕망이 아니며, 결국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육체는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아래 본문은 영혼과 육체가 따로 따로 주를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 문맥을 보면 알겠지만 고후 7:1의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우상들과 같은 영적인 세계의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한 영(고전 6:17)'이 되었는데 이인규님은 이 '연합된 영'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주님이 우리의 죄에 함께 참여하시는가?)? 죄를 지을 때는 '영의 느낌'을 억누르고 '혼의 의지'가 '육체의 욕망'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인규님의 '영'은 '육체의 욕망'이 자극할 때 '혼의 의지'가 죄를 선택하라고 죄에 동참하시는가? 왜 죄를 지으면 영 안에서 답답한가? 그것은 '영의 느낌'을 억누르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즉 '영'은 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롬 8:7에 보면 "육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한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회복역)"라고 되어 있는데, 이인규님의 육체는 성경 말씀과 달리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 있는 육체인가? 우리의 육체는 변하지 않는다(요 3:6). 다만 우리의 '혼의 생각'을 '영'에 둘 때(롬 8:6)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를 굴복시키고 우리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며(롬 8:11, 회복역 참조), '의의 병기(롬 6:13)'로 드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육체를 신뢰할 수 없는(빌 3:3) 믿는 이들의 정상적인 체험이 아닌가?

 

그런데 이인규님의 말에 의하면, 이인규님의 '육체'는 혼의 생각을 영에 두지 않아도 항상 주님의 일을 선택하는 '신령한 몸(고전 15:44)'인 것 같아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시편 말씀은 시편 기자의 '시적 표현'도 고려해야 하고(가령 시 139:9은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라고 말하고 있는데 새벽에 '날개'가 있는가? 아니면 다윗은 '조류'가 되어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하려는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위 설명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인규님]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성경은 그들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뜻을 언급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 롬 6:5-6을 보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어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로서 섬기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회복역)"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혼이 영의 느낌을 따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위치, 죽음의 위치에 머무른다면(이것이 고후 4:11 전반부 말씀의 의미이다), 우리의 '죄의 몸'은 무력하게 되고 더 이상 죄의 노예로서 섬기지 않게 되며 (우리의 죽을 육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도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고(마 16:24)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다(빌 3:10). 이러한 부활관은 '성경적'이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체험도 부족한 이인규님에게는 얼마나 기독교의 부활관과 '다른' 것인지!

 

그리고 이원론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짧게 답변 드리면, 이원론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육체를 억압함으로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함으로 염세주의에 빠지거나 사람의 인간성과 이성을 무시함으로 신비주의와 반 이성주의에 빠지는 것 등이 있다.

 

그런데 지방교회 측은 죄성이 있는 육체를 생명의 영의 법이 있는 영에 굴복되게 하여(롬 8:13) 의의 병기로 드리게 함으로(롬 6:13) 결국 금욕주의와는 무관하고 (참고 http://www.localchurch.kr/1880) 독수리처럼 속된 것을 벗어나는 초월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소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필요와 짐을 짊어지는 방면도 동시에 주의함으로(회복역 창 1:20 각주2, 1:24 각주1 참고) 염세주의와도 무관하고(이 두 방면을 균형있게 주의하지 못하면 염세주의나 세속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한 면에서는 초월하지만 또 한면에서는 그 초월의 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섬긴다. '초월함'이 없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섬기려 하면 결국 세상과 하나가 된다), 영을 강조함으로 한 면에서는 혼(의 생명)을 부인하지만(마 16:24) 동시에 영의 출로로써 합당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필요한 새로워진 혼의 기능을 주의함으로(딤후 1:7) 반 이성주의와도 무관하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결국 성경 보다는 사람의 감정과 비성경적인 성령 운동 등의 문제가 있는데, 지방교회 측에 대해 증언한 유진 반 네스 고에치우스 박사의 증언과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답변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지방 교회」 신학이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들에게 이 찬송가를 읽어 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의 찬송가는 제가 언급했던 어떤 교회의 찬송가들보다 훨씬 더 정통적이었습니다. 그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찬송시에 표현된 기독교 교리를 보는 것인데, 이는 교리들 중 어떤 것은 노래하기가 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가 찬송시에 들어 있으며 또 아주 분명합니다." (http://www.localchurch.kr/1280) (참고 http://www.praisenote.net/recommend)

 

"...지방 교회의 소속원들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들에게서, 오늘날 애석하게도 복음주의 공동체의 대다수가 놓치고 있는 교리적 정확성에 대한 예리한 관심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방 교회들은 광범위한 교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합당한 교리(정통성)와 합당한 실행(건전성) 모두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일치되고, 비본질적인 것들에서는 자유를 갖고, 다른 모든 것들에서는 자비를 베풀라.”는 격언대로 전진한다. 휘장의 이편에 있는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계속 토론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함께 자라가며 영원을 지내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http://www.localchurch.kr/21568)

 

 

[이인규님] 물론 성경에서 바울은 육체와 영을 구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은 인간의 육신적 부분과 영적 부분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는 표현이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영을 좇는 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영’은 ‘성령 하나님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다. 특히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 자체가 곧 성령을 거스리는 전인적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인간)의 소욕은 성령(하나님)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혼'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산 혼(창 2:7)'이라고 말하고 창세기에서도 종종 사람을 '혼(전인적인 의미로)'이라고 칭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창 12:5, 46:27 원문 참조). 이는 '혼'이 사람을 대표하고 사람의 존재와 특성과 생명은 혼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 사람은 전인적인 의미로 '육체'라고도 불리우게 된다(창 6:3, 갈 5:17). 이는 다만 혼만이 아닌 이제는 '육체'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요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육체'를 '전인적인 의미'로 사용한 부분이 있고 육체로 불리운다고 해서 삼분설이 틀렸고 사람을 전인적인 의미로만 봐야 되는가?

 

오히려 '육체'로 불리운다는 사실이 사람에게는 '육체'가 있으며 육체가 타락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므로 여전히 이 구절들은 '삼분설'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우리는 타락한 사람에서 원래의 모형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인규님도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다"고 실토하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이 있는데 왜 성경의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삼분설을 지지하지 않는가? 이인규님은 성경 해석을 '다수결'로 하는가? (그러나 원문을 보면, 전인적인 의미가 아닌 구분되는 의미로 영과 혼과 몸이 더 많은 것이 사실 아닌가?)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 자체가 곧 성령을 거스리는 전인적인 인간의 욕망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우리의 타락한 몸인 육체 안에 죄가 거한다는 의미이다(롬 7:17-18). 왜냐하면 죄는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대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을 우리에게 행하게 하는" 인격화 된 사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인규님은 이 '죄'가 혼에도 있고 영에도 있는 그런 '대마왕' 같은 사람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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