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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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5)
[이인규님] - 비록 그분의 인간의 부분(필자 주, 혼 + 육)이 죽었지만, 죽지 않는 그분의 신성한 부분(필자 주, 영)은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신 안에 신성한 요소 곧 거룩의 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44-45쪽)
지방교회는 예수의 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신성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분리를 시키는 것이다.
---> 인용문에 이인규님이 '추가'한 부분에 대한 답변은 앞 글에서 충분히 드린 것 같다. 이인규님의 풍부한 상상력과 신학 지식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픽션(fiction)이라고 느껴진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출 20:16) 이 소설은 앞 글에서도 말한 것처럼 '재판(reprint)'이 되지 않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인규님이 자주 인용하는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중)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모든 속성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삼위에서의 영원한 성자의 신성을 확증한다."(은성, 50쪽)고 되어 있는데, 이인규님은 '예수님의 인성'도 위 인용문에 해당된다는 주장인가? 그럼 예수님은 신성만이 있는 분이 되시는데,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비판함으로 유티키안(Eutydhians)과 같은 단성론자가 되려는 것인가?
그리고 앞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인규님은 "어느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거나 서로 대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 후술하겠지만 인간론에서도 비성경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그래서 이인규님이 영과 혼과 몸의 구별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이인규님은 "대외적으로는 정통 신학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쓰고 있는 구별과 분리 등의 용어는 정통 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아니다. 그는 아폴리나리우스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폴리나리우스는 구별한 것이며 오히려 양성의 분리에 대해서는 '대항'한 사람이다.
이런 이인규님의 이중적인 성향이 왜 문제가 되는지 본 글에서 좀 더 증명해 보도록 하겠다. 특히 위 지방교회 측의 인용문을 비판한 것은 그의 삼신론 만큼이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 온다.
[이인규님] - 그 분이 육체 안에 사셨을 때에 그분의 한 부분은 다만 사람, 곧 다윗의 씨였다. 그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정됨을 통해서이다(같은 책 45쪽)
-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 이전에 그분은 그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 분의 성육신으로 그분은 인성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 분의 존재의 부분으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인성은 그분이 부활할 때까지는 아들화 되지않은,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았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23쪽)
---> 두번째 인용문의 소주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요 1:14, 3:16)'도 되시고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 히 1:6)'도 되시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기본 진리의 기초 위에서 더 깊은 진리를 논하는 방면이지 이인규님의 오해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그런 단순한 문제를 논하는 장이 아니다.
이인규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와 '맏아들'에 대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독생자란 아들이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분은 어떻게 '맏아들'도 되실 수 있는가? 그분은 '독생자'이시면서 '맏아들'이신가? 아니면 독생자였으나 이제는 '맏아들'이 되신 것인가? 바로 이런 부분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 위의 설명이 있는 것이다.
[이인규님] - (골1:15-18의 구절)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67쪽)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육신으로 볼 때에는 다윗의 혈통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신(사륵스)과 성결의 영(프뉴마)은 대조되는 단어로서, 육체적으로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영으로 보면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과 같이 그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가, 부활 후에 바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인가? 결론적으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신성은 일반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셨고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라는 뜻), 영으로 보아도 부활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정되다"는 단어는 헬라어 "호리조"로서 "공표하다, 선언하다. 결정하다"는 해석이 보다 분명하다. 영어로는 "be declared"(NIV, KJV)와 "to define correctly" 의 뜻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보아도 다윗의 혈통으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으며, 영적으로 보아도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 골 1:15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s://www.localchurch.kr/29686
그리고 롬 1:3-4에 대한 이인규님의 해석은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해석처럼 보인다. 그리고 만일 이인규님이 지방교회 측을 비판하는 데 이 내용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큰 문제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을 비판함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이인규님의 이러한 주장이 왜 문제가 되는지 간략하게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다.
먼저 이인규님의 주장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침례 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과(마 3:17) 높은 산에서 변형되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마 17:5), 그리고 부활 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에 큰 차이점이 없게 된다. 즉 그분 안의 ‘신성’이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난 것으로 여전히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내신 것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의 부활 시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은 독생자 방면이 아니라 '맏아들' 방면이라는 것이다. 즉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 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함께 거듭남으로(벧전 1:3) 그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기 때문에(요 20:17, 히 2:10-12) 그분은 ‘독생자’가 아닌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롬 8:29, 히 1:6).
그러므로 역(易)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인성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함께 못박힘으로 한 면에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새로운 나로 다시 산 것처럼(갈 2:20, 엡 2:5) 그분 역시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신성’ 방면이 아닌 ‘인성’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인규님처럼 그분의 인성이 아닌 신성 방면이라고 오해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가? 우리는 독생자의 많은 형제들이 되어 그분의 신격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인규님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신격의 4번째 위격이 되어 참으로 (신격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삼하 7:12-14, 시 2:7 등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예수님이 부활 시에 그분의 인성이 높여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을 증명해 드릴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글이 길어질까봐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인규님은 너무도 성경적인 지방교회 측을 잘못 비판하다가 그의 이단적인 기독론의 실체만 폭로되고 말았다.)
[이인규님] ➀ 예수(장소적인 삼분법으로 분리) = 지방교회 교인(장소적인 삼분법으로 분리)
즉 지방교회의 교인들에게 양태론적인 영이 내주하면, 그들은 곧 예수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에게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 즉 하나님의 실재가 들어오면 그들은 예수와 동일한 구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인규님의 상상력이 무르익어 이제 그의 '소설'이 완성되는 지점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지방교회 측의 진리에 대해 충분히 변호하겠지만 동시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왜곡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인규님을 통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그의 주장이 '모순되는 부분'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이런 부분은 그의 소설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부분인 것 같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권면의 말도 드리고 싶다. 그럼 인간론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변론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위의 짧은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 우리는 사람의 '삼분설(영과 혼과 몸)'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의 영은 어디로 가고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 즉 하나님의 실재"가 우리 안에 들어 온다는 것인가? 혹 "예수의 영은 곧 성부 하나님 자신의 양태론적인 개념으로 본 것... 성부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영’이 되고"로 정의했기 때문에 지방교회 측 성도들도 '사람의 영'은 없고 예수님처럼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이 대신 들어 온다는 것인가?
[이인규님] 그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됨으로서 그들은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수의 재림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재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해서 지방교회는 사람도 장소적인 삼분법(영 + 혼, 육)으로 분리하고, 예수도 삼분법(영 + 혼, 육)으로 분리를 시킨 것이다. 이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이해가 갈 것이라고 본다. 더 자세한 설명은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읽어보면 그들의 전모를 알게 될 것이다.
---> 지방교회 측의 재림관에 대해서는 앞 글에서 약간 설명드렸고 더 자세한 것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www.localchurch.kr/2854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님에게도 '사람의 영'이 있고 우리에게도 당연히 '사람의 영'이 있다. 이 영 안에 우리가 거듭날 때 '생명 주는 영'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난' 이후부터 '생명의 성장'이 시작되는데 어린 아기에서 영적인 사람(고전 3:1), 즉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될 때까지(엡 4:13)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느 날 하늘에서 오시겠지만(행 1:11), 그분은 그분께 걸맞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오신다(고후 11:2, 계 19:7-9). 물론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는 등 그 외 많은 일들이 발생하겠지만... 그분의 관심은 그분께 어울리는 신부를 맞이하는 것이고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우리가 생명이 성숙해야(그분의 신부로 단장되어야) 그분이 오실 수 있다는 역(易)도 성립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이 오셨는데, 신부가 준비되지 않은(너무 어린) 결혼식이 되지 않겠는가? 즉 그분이 다시 오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이 자라야 하고 지방교회 측의 글은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329쪽)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셨으며,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계신다. 그분의 오심은 이러한 변화시키는 역사의 완성이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 아니라 우리로부터 오실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329-330쪽)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우리로부터 오실 것이다."가 우리 안에서 생명의 성장이 있어야 하고 변화되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 그분의 신부로 단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성장'에 의해서 오고 계신다", 같은 책, 330쪽). 물론 우리는 '생명의 성장' 방면 외에 그분이 실제로 하늘에서 오시는 것도 믿는다(이인규님이 우리의 '두 방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지방교회는 예수의 가시적(可視的)이며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며", "별도의 예수의 재림은 없게 된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재림이 아니다", "지방교회는 예수의 재림도 다르고, 예수의 부활도 다르며, 사후의 천국도 부정한다."고 확신에 찬 소설을 쓴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인규님에게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요일 3:2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와 어떤 점에서 '같게' 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구절에 의하면 '요한'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게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한가지 더 질문을 드리면, 롬 6:5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무슨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장래 주님과 같이 '부활한다'는 의미인가? 혹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지방교회 측에게 한 것처럼 바울에게도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 아니다... 부활도 다르며"라고 말해주지 않겠는가?
[이인규님] - 그러나 그 분의 인성에는 죄가 없으며 결코 이전에 타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간의 부분은 구속될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높여질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인성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분이고, 다른 한 부분은 타락되고 부패한 부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8쪽)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 첫번째 인용문은 왜 인용을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인성은 '구속될 필요' 없이 부활 시에 영화롭게 되심으로 높여질 필요만 있었다는 뜻이고, 우리는 창조되었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그분과 그 점에서 다르다는 것인데, 이 인용문에 동의가 안 된다는 것인가? 혹시 우리가 '구분해서' 말해서 '전적 타락'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다고 답변을 드리겠다(창세기 강해(보급판1), 257-271쪽).
두번째 인용문은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고 그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결국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분과 하나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내용인데, 아마 이인규님이 역대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이 말했는지 조사가 부족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 같다.
(도움을 드리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클레멘트, 아리우스의 이단을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아타나시우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네우스 등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가르쳤다. 이외에도 마르틴 루터, 존 캘빈, 존 번연, 마담 귀용, 허드슨 테일러, 존 넬슨 다비, 아돌프 사피어, 앤드류 머레이 등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가르쳤다. 특히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까지 했다.)
[이인규님]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 바로 그 때 그들은 안팍으로 - 생명과 본성과 기질과 몸의 형태에서 -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4쪽)
---> 이 인용문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아타나시우스의 말과 정확하게 같은 내용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주장하되, 사람은 예수님처럼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하나님의 '신격'은 없다는 의미임)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이 됨’은 고대에서 아주 성행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325년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God became a man, that man may become god)”라고 말했다… 내가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이 있을 뿐 하나님의 신격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 있는 어떤 교사도 반대할 수 없는 것이다"(이상의 최고봉과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62-63쪽).
[이인규님] - 이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거듭난 후로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해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이 될 때까지 그 역사를 계속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인 우리 모두는 거룩케 됨, 새롭게 됨, 변화, 형상을 본받음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온 존재의 영화롭게 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8쪽)
---> 이인규님은 혹시 '하나님의 독생자'와 '하나님의 맏아들'의 차이에 대해 연구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독생자는 그 용어 그대로 신격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유일한 아들)을 의미한다(요 1:18). 그리고 하나님의 맏아들은 그분이 부활 시에 그분의 '인성'이 높여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을 말한다(롬 1:4). 아마 지금쯤이면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 지방교회 측이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닌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과 똑같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지방교회 측이 주장하는 신화(Deification)는 하나님의 신격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성경적이고 안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의 이단적인 기독론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많은 형제들이 되어 제 4격 하나님이 되게 한다. 그런 사상이야말로 정말 문제인 것이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사람(God-Man)이라고 부르며, 예수는 그 God-man의 첫 샘플이었다는 것이다.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이 신성(영)을 갖게 되면, 그들이 바로 God-man 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단적인 양태론과 이단적인 기독론이 아니라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적인 인간론이 결합되면, 그들의 신인합일론이 완성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가증스럽게 정통교회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복음주의였으며, 오해였다고 말하면서 재검토를 부탁하고 있으며, 한기총 회장에게 서신을 보내며,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었다, 더욱이 몇몇 기독교 인사들은 지방교회 세미나에서 축사를 해주고, 그들의 책을 광고를 해주며,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선전해주고 있었다.
---> 2세기 말에 블란서 리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이단들이 성행하였고 또 기독교에 대한 큰 박해가 있었는데, 리용의 감독이 된 이레네우스(Irenaeus)는 어떻게 하면 이 두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을지 고심하였다.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바르게 이해할 때 이 두 가지 문제―박해와 이단―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레네우스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가 그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 (Irenaeus, adv.haer. 5권 서론).
그리고 그의 이런 사상은 약 백여년 후에 등장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레네우스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 (Athanasius, de incar. 54,3).
그러나 이런 초대교회 때의 풍성한 유산은 어느덧 상실되었고 이제는 이런 진리를 다시 회복하고 계승하려는 믿는 이들을 향해 (이러한 역사도 모른 채) 이단을 수호한다는 사람이 비난하며 조롱하고 있다.
초대교회 때는 「신화(Deification)」 진리로 박해와 이단을 이겼는데 지금은 「신화(Deification)」 진리를 주장한다고 하여 박해를 받고 이단으로 몰리고 있다.
이럴 때는 믿는 이가 무엇으로 이겨야 하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