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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3)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3)

 

 

[이인규님]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 그를 보내신다고 하셨을까?

 

성경은 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분 예수라고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왜 자기 자신인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을까? 삼위일체가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위로부터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을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에 예수가 아버지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며(행7:55), 다윗은 시편110:1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내 주’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마22:43, 눅20:43-44. 행2:34-35에서 시편110:1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재성을 직접 말씀하셨다.

 

---> 이인규님은 '아버지'가 '하늘'에 계셔야만 구별이 되고 예수님 '안에' 계시면 구별이 안 된다고 보시는 것 같다(너무 영적인 사실을 물질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우리 역시 마 3:16-17의 침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과,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성령님과,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다 믿는다.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도 계시다고 하지 않는가(요 14:10-11)? 이인규님은 이 말씀을 어디에 두겠는가? 우리의 답변은 '둘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어거스틴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앞으로 세워서 어거스틴의 등 뒤에 숨어서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속이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무엇일까? 고전적 삼위일체에서 “상호내재”는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윤무(輪舞)를 말한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이 상호내재라는 주장은 초대교회에서 종속론(오리겐)이 등장하였을 때에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주장으로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에 의하여 주장된 것이다. 즉 초대교회에서 고전적인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잘못된 주장이 등장하였는데, 즉 성부가 가장 크고, 성자예수와 성령은 좀 열등한 신성을 가졌다는 소위 ‘종속론’이라는 주장이 오리겐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예수는 열등한 신적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소위 상호내재라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 상호내재는 서로가 동등하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주므로서 종속론에 멋진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호내재라는 이론은 종속론을 반격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삼위의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된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상호내재)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IVP, 186-187쪽)

 

---> 결국 이인규님의 주장은 "상호내재라는 이론은 종속론을 반격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삼위의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자신은 '상호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리고 인용해 주신 글을 보면 상호내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내재는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에 대해 설명을 필요로 하는데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그 점에서(아마도 휘포스타시스들을 '현존양식'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데 지방교회 측은 상호내재에 관한한 어거스틴과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어거스틴은 캅바도키아 교부들과는 달리 휘포스타시스들을 신위(神位) 안에서의 '존재 양식'으로 정의함) 왜 캅바도키아 교부들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제시하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상호내재(coinherence)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99쪽).

 

 

[이인규님]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은 종속설을 반격하기 위한 용어였다. 또 상호내재는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개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에서는 동적인 개념으로서 ‘상호침투, 상호순환’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 정통신학은 인격이 구별되며, 상호교류가 가능한 상호내재의 개념을 안전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고전적 삼위일체를 슬쩍 끄집어 내어,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닌 것처럼 조작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교회사적인 배경은 언급하지 않고 감추면서 단지 초대교회 교부들과 어거스틴도 이런 주장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는 교회사적인 조작을 하는 것이다.

 

---> 이인규님은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라고 말한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 속에 아버지께서 계시다고 그러셨는데, 최삼경 목사는 자신도 '상호내재'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결국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은 믿지 않는다. 이인규님은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예전에 쓴 글에 의하면,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최삼경 목사를 옹호해 주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인규님은 성령의 '내주'를 믿지 않는가?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간구하셔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 주시는 진리의 영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14:17), 이 성령이 이인규님 안에 있는 것은 '장소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상호 교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은 이인규님이라는 인격 안에 있는가, 아니면 인격 안에 인격은 있을 수 없고 그렇다면 '구별이 되지 않으며' '상호 교류'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인규님의 인격 안에는 '없다'는 것인가? 거듭나고 성령의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성령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고전 6:19, 약 4:5)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구별이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믿는 이들이 '직감' 안에서 성령님과 교통하고 있는데(고후 13:14, 요일 1:1-10) 이러한 교통은 이인규님의 말에 의하면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상호 교류가 가능한 것인가? 이인규님은 이러한 체험이 없는가?

 

이인규님이 고전적인 삼위일체라며 폄하하는 어거스틴의 상호내재 관점은 예수님의 말씀과 비교했을 때(요 14:10-11)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잘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점이 틀렸고 잘못된 것인가?

 

 

[이인규님] 양태론자들은 자신을 양태론이 아니라고 감추고 위장한다. 그 이유는 양태론이 기독교 2000년 교회사에서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태론자들이 가장 변명을 하는 단골 메뉴가 바로 “자신들은 어거스틴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고전적 삼위일체는 현재의 삼위일체와 다르며, 삼위일체가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항상 이단적인 주장이 먼저 등장하고, 그것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전적 삼위일체는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한 과정이었다...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본질을 의미하였는데, 나중에 예수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며 성령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가 되므로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거스틴이 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단어가 “가면‘이라는 뜻도 갖고 있었다. 즉 연극에서 배우가 가면을 바꿔 쓰고 일인다역을 하는 개념으로서, 양태론의 의미가 풍기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어거스틴이 양태론자였다는 내용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번역한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칼케톤 회의에서는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를 동의어라고 선언하게 되므로서, 양태론적인 오해를 종식시킨다.

 

---> 오해를 받았지만 결국 오해가 종식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더구나 지방교회 측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어거스틴이 사용한 '인격(위격)'이라는 단어도 잘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더욱 문제(?) 없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인규님은 이제 지방교회 측이 오해의 여지가 있어 사용을 피하고 있는 인격(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또 비난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0쪽)와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즉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고전적인 삼위일체'라고 비판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과 반대되는 글이 나오면 자신이 뭘 비판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분 같다.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정통 삼위일체가 형성되어진 용어의 과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정통삼위일체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 헬라인 친구들은 한 본질과 세 실체라고 말했으나, 라틴인들은 한 본질(혹은 실체)과 세 인격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이 신비스로운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충분하겠다...... 세 인격이라고 말한다면, 왜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 각각을 유일한 한 인격이라 부를지언정, 세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다.(위트니스리 리, 성령, 51쪽)

 

---> 이인규님은 위 인용문을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으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위 인용문은 '어거스틴'이 말한 것이다. 다시 한번 책을 정확하게 살펴 보라. 그리고 '어거스틴'의 말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그는 정통삼위일체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사과하기 바란다.

 

 

[이인규님] 지방교회는 또 자신들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그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자신들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본질적 삼위일체는 결국 상호내재이며, 그들이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사역적 양태론을 뜻한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그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양태론을 의미하는 사역적인 삼위일체이며, 그들이 말하는 본질적 삼위일체는 위장된 상호내재인 것이다.

 

---> 이인규님은 자신이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세 위격의 '동일시'는 제외하고).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인규님은 명칭상으로만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믿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적으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속에 ('본질적인 삼위일체'가) '함몰되어' 있어서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삼신론자'의 양상을 띄고 있다. 이 점은 위에서 설명드린 '상호내재'와 관련된 지방교회 측의 반론을 보면 더욱 분명할 것이다.

 

익히 잘 알듯이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세 위격'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페리코레시스'의 원리를 통하여 '한 실체'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반대임). 마찬가지로 이인규님 역시 현상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방면(경륜적인 삼위일체)만을 주의하다 보니, 셋의 방면을 강조하고 심지어 세 위격이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 사상이 아주 문제이기는 해도 만일 이인규님이 캅바도키아 교부들과 같이 성경적인 '상호내재'의 원리를 받아들여 '한 실체'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인격 안에 인격이 있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면 '상호 교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이 직접 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는 말씀을 믿지 않는 (최삼경 목사와 동일한) 삼신론 이단자가 된 것이다.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글을 오해하여 "지방교회는 또 자신들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고 말했는데, 지방교회 측의 글을 인용까지 하고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지방교회 측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을 말하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삼위일체도 믿고 있으므로 비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위 인용문을 자세히 보라). 그리고 이인규님이 인격 안에 인격이 있는 상호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기 때문에) 지방교회 측의 상호내재가 '위장된 상호내재'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의 뜻을 파악하면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일 뿐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즉 그들이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으로만 구별되어진다는 것으로 양태론이라는 스스로의 고백과 같다. 동일한 한 하나님이 사역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으로서, 구약에서는 아버지로 사역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로 사역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 곧 사역적(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어떤 것인가?

 

---> 본질적인 삼위일체는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말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34, 257쪽). 지방교회 측의 글은 바로 이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실제적으로 안 믿고, 본질적인 삼위일체만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 지방교회 측이 주장하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일과 기능을 위해 세 위격이 구별되게 '보일 뿐이고' 이들의 본심은 본질적인 삼위일체만 믿는 것인데 그것도 위장된 '상호내재'라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마 3:16-17에서 침례를 받으시는 아들과,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성령과,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지방교회 측의 관점에는 '구별되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이 참되게 믿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상은 '참된 것'이 아니고 세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는(이인규님이 보기에는 인격 안에 인격이 있음으로 서로 구별도 안되고 상호 교류도 불가능한) (양태론적인) '한 하나님'이 이들이 믿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인규님은 마3:16-17의 '침례를 받으시는 아들과', '비둘기 같이 내려 오시는 성령과',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만 믿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삼위의 동시 존재와 구별(심지어 '분리')은 너무도 쉽게 인식이 되지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은 이 구절을 왜곡해서 "삼위일체는...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의 이런 시각이 조절되지 않는 한(정통 삼위일체로 돌아오지 않는 한) 지방교회 측의 주장은 영원히 이인규님에게 이단처럼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이인규님이 틀린 자(ruler)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측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틀린 자로 많은 틀린 사람들의 오류를 어느 정도 측정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의 자가 틀린 한 '정통'도 틀리게 된다는 것을 이인규님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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