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죄의 처리와 생명의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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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죄의 처리와 생명의 성숙
제 관찰이 맞다면, 한국교회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서방의 어거스틴 그리고 존 칼빈의 가르침을 많이 의존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한 상태 특히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반면에 동방교회 구원론은 타락 이후의 죄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관심합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라는 문구로 압축된 정통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신화(神化)교리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신화교리는 다소 생소하지만 동방교회 내에서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http://www.bringyou.to/apologetics/a124.htm). 만일 우리가 성경을 균형있게 읽는다면 위 두 방면 모두가 성경 안에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타락한 죄인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전인 ‘창세 전에’ 하나님이 세우신 뜻인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엡1:4-5).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두 가지 접근방법 모두에 익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에 비록 소수이지만 서방교회적 신학배경을 가졌으되 동방교회적 관점에도 열려있는 분들이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유해무, 개혁교의학, 4쪽).
이 글은 위 양 방면 모두를 감안한 관점을 토대로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구원’(롬5:10)에 관련된 몇 가지 핵심 진리 항목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 죄와 죄들 그리고 적용 상의 문제들
어떤 성경교사는 죄를 [복수의 죄들](sins)과 [단수의 죄](sin)로 구별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서 1장부터 5:11은 [죄의 열매들]에 해당되는 복수의 죄들을 말하고, 5:12부터 8장까지는 [죄의 본성]에 해당되는 단수의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구분은 ‘죄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지만, 죄의 본성 즉 ‘죄’는 보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 ‘옛사람이 죽음’으로 해결되었다는 각기 다른 사실 때문에 필요합니다.
1. 죄들 (sins)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해 아래 의인은 없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들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었고,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과 심판과 불못이 그들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죄들이 용서받으려면 의로운 피가 흘려져야 했습니다(히9:22).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의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고전15:3, 롬4:25). 이처럼 영원한 효능이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습니다(히10:12, 엡1:7). 그 결과 유월절에 문설주에 발라진 어린양의 피를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들을 다 용서하신 사실을 믿는 사람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5:1).
제가 아는 한 분은 아내를 따라 천주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늘 죄의식에 억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죄를 짓고 신부님께 고해성사 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 먼저 복음을 깨달은 대학다니는 큰 딸의 부탁으로 한 형제가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함께 성경공부 하는 중에 자신의 죄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영 단번에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분은 죄의식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혈을 근거로 용서받은 대상은 엄밀히 말하면 ‘죄들’(sins) 이지 죄(sin)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눅24:47, 행2:38, 5:31, 10:43, 13:38, 히8:12, 10:17등 [죄들의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를 언급한 모든 성경구절들은 일관되게 복수의 죄들이 용서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개역 성경은 번역시 원문의 단 복수 구별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2. 죄 (Sin)
로마서 5장 12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sin)’가 세상에 ‘들어 왔다’(enter)고 말합니다. 또한 19절은 한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다아비 역은 죄인이 ‘되다’(카디스테미, 2525)를 ‘죄인으로 조성되었다’(constituted sinners)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 곧 자기 육체에 이 죄가 ‘거한다’(오이케오(to dwell), 3611)고 말합니다. 이러한 단수의 죄는 로마서 7장에서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속이고, 죽이며’(11절), ‘죄 아래 팔리게’ 하고(14절),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하고’(19-20절),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게 하는’ (25절)등 매우 활동적이고 힘이 있는 주체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지금도 매우 활동적인 단수의 죄(Sin)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편의상 이것을 ‘죄의 본성’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성경교사는 이 죄의 본성을 ‘범죄 공장’에, 죄들을 그 ‘생산품들’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공장이 가동되면 생산제품은 언제든지 산출됩니다.
‘죄들’은 어린양의 보혈로 해결되었다면, 바울이 자기 속에 여전히 거한다고 고백한 단수의 죄 (Sin) 는 주 예수님이 어떻게 해결해 주셨을까요? 그것은 죄인 자체인 우리 옛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심을 통해서 입니다(롬6:2). 성경은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말합니다(롬6:7, 11).
특히 6절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카타르게오(2673), 무력하게 되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 엔진](죄)이 여전히 힘차게 돌아가고 있지만 그 힘을 바퀴에 연결하는 [트렌스 미션] (옛사람)을 무력화 하여 [바퀴들](죄 들)이 굴러가지 못하게 하는 것에 견줄 수 있습니다. 엔진 자체를 없에 버리거나 꺼버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죄들’과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완전한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것은 보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이미 다 용서하신 사실(fact)과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실을 영적인 눈이 열려 보고 믿는 것입니다.
3. 믿는 이가 죄를 범하면 어찌되는가?
하나님께서 구속을 근거로 자기 죄들을 영 단번에 용서하신 것을 보고 죄사함의 기쁨을 체험했던 분들이 이곳에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그러한 기쁨도 차츰 사라지고 과거에 죄사함 받았던 사실이 현재의 죄의 유혹을 뿌리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태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좆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롬14:23). 비록 죄사함의 확신은 있지만 지금 다시 이런 저런 죄스러운 상태에 연루되기도 한다면 이제 그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요한은 자신도 포함하여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일1:8).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 죄를 자백’하는 것을 그 대책으로 제시합니다. 이처럼 죄들의 자백을 통해 거리낌이 없는 선한 양심(딤전1:5, 행24:16)을 갖는 것과 믿음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딤전1:19). 참고로 자백의 범위는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코이노니아) 중에 양심에 거리낌이 느껴지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백할 때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예표된 영원히 효능 있는 그분의 보혈이 우리의 죄들을 씻어 정결하게 합니다(요일1:9, 민19:2, 9).
그러나 만일 죄사함 받고 거듭난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양심의 소리를 거스리고 죄 문제를 합당하게 처리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가 있게 될까요?
먼저 그가 참되게 거듭났다면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가서 영원히 멸망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 (1)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가 끊어짐으로 어둠가운데 있게 되고, (2) 사탄과 세상 사람들에게 몸된 교회를 훼방할 뒷문을 열어 주며, (3) 생명이 성숙할 기회를 잃어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기 쉽고(고전3:1), 장차 (4) 그 리스도의 심판대(고후5:10, 롬14:10) 앞에 섰을 때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고후5:10, 롬14:10, 마12:36-37).
이상에서 보았듯이 어거스틴과 칼빈이 강조했던 죄와 죄들의 문제는 예수님의 보혈,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죽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초기 사도들이 그들의 복음 메시지에서 십자가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한 사실은 서두에 언급했듯이 구속을 넘어 서서 부활 또는 (부활)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한 동방교회 구원론을 상기시켜 줍니다(행1:22, 2:32, 3:13, 15, 26, 10:39 -40, 13:33, 17:3, 18).
- 생명과 생명의 성숙을 강조한 소위 신화(deification)교리
대표적인 장로교 신학자 중 한분인 이종성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교회론’(156-157쪽)에서 다음과 같은 동방교회 교회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우리에게 동방교회 교리의 전모를 다 알수 없으나 그들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힌트를 얻게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을 의미한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신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명이며 성령의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지는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연속이다.…새 존재라는 것은 은총에 의한 신화를 의미하며, 새 생명이란 영원의 생명을 선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동방 정통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므로 교회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이며, 따라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완성되고 예전을 통해 신도가 신과 하나되어 신적 존재가 된다.”
참고로 위에서 이미 인용 소개했던 한 개혁 신학자는 “고대 동방교회가 이해하고 실천한 대로의 신학을 해야 된다고 깨닫게 되었다”고 전제 한후, “그것은 우리 구원을 즐거워 하되, 그 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구원의 ‘삼위 하나님’께 나아가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송영의 신학’이다”라고 했습니다(위 책, 4쪽).
1) 원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나?
한국교계에 익숙한 서방교회식 구원론에 의하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정복하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엡 1:4-5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한 자들을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또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 (휘오데시아, 5206)이 되도록” 예정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아들의 명분](갈4:5)에 이르려면 다만 죄와 같은 소극적인 것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대신에 거기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들이고 또 그 생명 안에서 성장할 것이 요구됩니다.
2) 생명
만일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데시아)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위 전제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필요한 [생명]이 무엇이며 사람은 어떻게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I am the life)(요11:25) 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생명은 주 예수님 자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은 영원 안에서 말씀(로고스)이셨지만 어느날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후 인생을 사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 ‘생명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우리는 이 영이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요1:12).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안에) 있는 자가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요일5:12). 이 분은 오랫동안 감취었던 비밀이셨지만 지금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골1:27)이시자 ‘우리의 생명’(골3:4)이십니다. 성경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자신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빌1:21, 갈2:20).
3) 생명의 성장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에서 생명의 교제와 죄들의 처리를 언급한 후, 이어서 어린아이, 청년, 아비들을 언급합니다(요일2:14). 물론 이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이되 영적인 방면에서의 성숙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생명의 성숙도에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언급한 고린도전서 3:2, 영적 음식에 관련하여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말한 히브리서5:13-14,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비결을 말하는 베드로전서 2:2 등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특정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어리다 또는 장성하다는 말을 할때 그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대두됩니다. 보통은 믿음, 은혜, 영적인 능력, 신학지식, 영성 등등의 차이를 생각해 볼수도 있겠지만, 저는 골로새서 2:19를 근거로 그 사람 안에서 얼마나 ‘(생명이신) 하나님의 증가’(the increase of God, KJV)가 있는지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골2:19 후반부를 대부분의 한글 번역본들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란다’라고 하여 ‘하나님을 주격으로 번역했으나, 원문은 주격이 아니라 속격임으로 ‘하나님의 자라심으로 자란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무한하시고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이 자라신다는 말이 가능한가 하는 것인데, 물론 그분은 그 자체로서는 자람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 안에서는 자라실(증가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는 말씀과 우리 영 안에 이미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주님 (고전6:17)께서 더 전진해서 우리 마음에도 거처를 정하시길 원하시는 개념(엡3:17) 등과 특히 위 골 2:19 본문이 그 결정적인 근거로 고려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소극적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생명(조에, 2222) 이신 주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요1:12), 자라고 변화되어 맏아들이신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고(고전3:6, 롬12;2, 고후3:18) 마침내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까지 영광 안으로 이끌려 지는 것입니다(롬8:23, 빌3:21, 히2:10). 서방신학은 전자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동방신학은 후자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인 ‘휘오데시아’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의 성취에는 그 두 방면 모두가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매 순간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주님이 우리 모두 안에서 맏아들의 형상을 이뤄가시기를 (히12:2, 고후3:18, 갈4:19, 롬8:29)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