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때 받는 영에 관하여
- 새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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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39절 연구서 소개 및 비평
- 변종길 교수의 성령과 구속사를 중심으로 -
1. 초대 교부와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
고신 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변종길 교수께서 ‘성령과 구속사’ (개혁주의 신행 협회, 2006)를 펴냈다. 이 책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는 말씀을 다룬, 저자의 네덜란드 깜뻔의 개혁 신학대학 박사학위 논문이다. 저자는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신데 왜 위 구절은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라고 하는지를 주목하고, 1, 2부에서 대표적인 교부들과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한 후 3부에서 본인의 주석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세부적으로 위 책1부에서는 요한복음 7:39 본문 또는 성령론 자체에 대하여 정통 교부들인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바실, 암브로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의 견해를 요약 소개하고 있다. 2부에서는 대표적인 개혁 신학자들인 존 칼빈,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호로쉐이드, 헤르만 리덜보스, 리차드 개핀의 같은 주제에 대한 언급들을 소개하고 비평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위 1, 2부에 언급된 정통 교부들과 개혁 신학자들 중에서 요한복음 7:39 본문을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이나 신약성경에 기록된 성령에 관한 연구들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성령의 사역과 구속사 사이의 관계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7:39에 대해 특별한 연구를 한 것은 아직 없다.“(17쪽).
2. 저자의 견해
한편 저자인 변종길 교수는 위 책 3부에서 요한복음 7:37-39 본문을 대상으로 ‘초막절’, ‘생수의 강: 구두점 문제’, ‘생수의 강: 인용문제’, ‘성령의 사역과 예수의 영광 받으심’이란 소 주제를 토대로 본문 주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셋째로 39절 하에 보면 이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 받으신” 후에야 비로소 주어졌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의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받으신 후에 주어진 성령”이다. ...따라서 오순절 날에 강림하셔서 그 후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우리가 “영광 받으신 예수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 성령은 이미 구약시대에도 계셨고 역사하셨지만, 그러나 아직 영광받으신 예수의 영으로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아직 영광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신약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영광 받으신 예수 (또는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 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221-222쪽).
“그러므로 요한복음 7:39의 “성령”은 “예수의 승천 후 오순절 날에 강림하셨고 그 후로 기독교회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며,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와 능력과 은사들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며,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225쪽).
3. 간략한 비평
1) 먼저 저자가 요한복음 7:39를 토대로 정통교부들이나 개혁신학자들도 간과한 “성령의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받으심 사이의 상관 관계”, “ 예수의 영광 받으심 이전과 이후의 성령의 사역의 차이”를 주목하고 박사학위 연구과제로 삼은 것은 매우 값진 접근 방법으로 보인다. 또한 저자도 언급했듯이 성령론에 관한 학적인 원본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여 각주에 원문을 최대한 반영한 점, 교부들의 성령론 관련 자료들을 발굴 소개한 점 등은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후학들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리라고 믿는다.
2) 그러나 우리가 이 논문을 비평적으로 읽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저자는 요한복음 7:39에서 언급된 영과 관련하여 많은 주석가들이 앞에 ‘ἅγιον’이 생략된 형태인 ‘πνεῦμα’를 원본으로 간주한다고 소개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어느 형태이건 그것들은 “삼위 하나님의 제 3위이신 성령”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고 있다(204쪽). 즉 오순절에 교회에 임한 영은 제 3위 성령이시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영으로 직접 교회에 오신 것이다(Christ’s personal coming to the church as the life-giving Spirit). 오순절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요,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라고 한 개핀(웨스터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의 저자와 상반된 견해를 아울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121쪽).
그렇다면 오순절에 교회에 임한 영은 제 3위 성령인가, 아니면 살려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인가? 같은 개혁 신학자들의 위와 같은 각기 다른 견해들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2) 저자는 제 3위이신 이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 받으신 이후 ‘더 풍성한 은혜와 은사들과 능력들을 주는 분’,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분’, ‘영광 받으신 예수의 영이라고 불리는 분’이 되셨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그것이 구약과 달리 신약에서의 성령 사역의 차이점이라고 했다(215쪽).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신약시대의 특징적인 성령사역이 왜 별개의 위격인 <예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과 연관성을 갖는 것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즉 저자가 위 책 23쪽에서 정의한 대로의 ‘구속사적인 사건’이 제 3위 성령에게 어떤 영향을 주어 신약적 특징을 갖는 성령이 되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신약의 성령이 구약의 성령보다 더 풍성한 은혜, 은사, 능력을 주게 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되었기 때문인가? 또한 오순절 이전 즉 예수께서 영광 받기 전에는 성령은 교회 안에 내주하실 수 없으셨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말한 ‘영광 받으시는 예수의 영’ 으로서의 성령과 그전의 성령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3) 요한복음 7:39의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본문을 칼빈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존재를 의미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사역, 현현 또는 선물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며 여기에서 사용된 관련 동사의 특성이 '사역'보다는 '존재 또는 인격' 쪽에 더 가깝다고 반박한다(204-205쪽). 즉 이 본문은 어떤 존재가 예수께서 영광받기 전에는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개혁 신학자로서 칼빈같은 저명한 사람의 주장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본문의 바른 의미를 찾아내려는 저자의 학자적인 양심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참고로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이 본문에서 언급된 영을 3위 하나님으로 보는 저자와 달리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시에 그의 인성도 영화롭게 되신 영이 되신 것-이 영은 사실상 위 개핀이 말한 생명주는 영과 동일한 영임-을 가리킨다고 본다.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표현은 기이하게 보인다. 그래서 ‘삽입된’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 (개역성경은 원문에 없는 ‘저희에게’를 추가해 넣음). 그러나 그 표현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서야 비로소 성령이 임하시라는 사실의 참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끌 것이다” (앤드류 머레이’ 임석남 번역, 그리스도의 영 The Spirit of Christ,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41쪽).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땐 그는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영, 즉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높이 들림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임하신 것이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성으로 짜여진 생명을 지니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그가 성령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것은 특별히 이런 능력에서이다. …그는 영광받으신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인자의 영이시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그렇게 되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볼 때 보내심을 받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가 하나님의 영이 아니시고 예수님의 영이시라는 이유를 더욱 더 밝히 깨닫게 된다”(42쪽).
“하나님을 찬양할진대, 이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제 영광받으신 예수님의 영이 계신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을 때 일어났던 위대한 사건은 이제 영구적인 현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성과 함께 육신을 입으신 채로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가셨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라고 말한 것이 성취되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인간이자 그 우두머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간성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神人)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임하실 수 있었다. 그는 영광받으신 예수님의 영으로 임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각 사람 안에서 계시면서 예수님의 인격적 생명과 현존의 영임과 동시에 신자의 인격적 생명의 영이 되신다.”(43-44쪽).
3)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7:39의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려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기 ‘분리된 세 사람들' 같은 분이 아니라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어느 한 위격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 다른 두 위격도 함께 내주하신다. 저자도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령 한 분만이 아니라 성자와 성부도 함께 역사하신다”(위책, 225쪽)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때로는 고후3:17처럼 성경본문 자체가 위격 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를 말할 때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점을 전제하고 '믿는 자들이 받을 영'과 '예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을 연계하여 말하는 요한복음 7:39 문맥을 고려한다면 저자처럼 제 3위 성령님이 아닌, 하나님-사람이신 예수님 자신을 주된 축으로 보고 바로 그분이 부활이후 영광받으셔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을 가리키는 것(고전15:45)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우리가 믿을 때 받은 영에서 아들 하나님 자신을 제외시키는 성경해석은 '아들(2격)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5:12 상)라는 성경말씀과 충돌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