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사람'이라는 이상은 어떤면에서 그 와 반대되는 적용을 통해 성취됩니다
- PROVIDENCE
- 24078
- 33
신앙은 진보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사람을 외치며 앞으로 전진하면서 어느 정도 신적인 부분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 아닌 낮아지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않고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종교와 눈먼 인도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높은 하늘의 선행을 해야 한다는 진보의 관점에서 신앙 생활을 바라보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 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 은혜의 총체성에 사로잡히는 법, 인간이 되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경적 신앙입니다
어리석은 인도자의 한 예는 율법주의자 입니다 우리는 자꾸 매일 뭔가를 구호로 만들어 실행하려 애쓰지만 복음의 중대한 핵심은 "너희는 이미 죽었다" 는 순전하고 무조건적인 공표이며 무조건적이고 총체적인 은혜 앞에 할일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믿음마저 조건이 아니며 들음에서 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각종 선행은 사회를 돌보는 수단이지만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참다운 신앙은 우리의 행위에 아이에게 상처가 났을때 뛰어오는 어머니와 같은 자발성을 줄 것 입니다 여기에는 계산이나 망설임 도덕성이나 선행 의식이 없습니다
잘못된 인도자들의 또다른 형태는 신비주의자들 입니다 그들은 언어적으로는 성령과 자기 부인, 죽음, 항복을 강조하지만 스스로의 자신의 언어에 속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했지만 만약 자기를 부인한 결과가 나쁘면 어떻하나요?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처럼 겸손, 항복, 자기 버림도 사랑도 인내라는 노력도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결국 은혜를 탓할 수는 없어서 내 잘못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의 언어를 사용할때는 다릅니다 옛 자아가 죽어라고 요구하지 않고 죽었다고 선포할 뿐입니다 사랑을 불러오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은 약속의 확실한 힘을 통해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진압해 황량한 삶에 밀고 들어와서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여기에 있다고 단호히 말할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쩐일인지 종교를 극렬히 적대시 하셨고 반면에 종교 역시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다 알다시피 못 박기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는 정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율법을 자신이 이용하고 다루어서 자신과 타인에게 스스로의 방식대로 나님 일을 요구하는 종교 지도자는 당시 바리새인들만이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 종교인들인 우리도 이러한 위험에 빠집니다
우리의 종교적 관념은 인간의 타락이 아래쪽으로 낮아져서 downward corruption 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이 높아짐으로서 upward corruption 으로 타락이 진행되는 것을 성경은 생생히 보여줍니다
도덕적 체계에 맞춰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사회인으로서는 필요하겠지만 율법의 준수나 도덕적 진보를 통해 스스로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방식은 결국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 성화의 삶은 우리가 율법을 놓고 추구하는 것이 아닌 주님으로 부터 우리의 분주한 삶 가운데 주어지는 비밀한 것입니다 오직 죽음과 거듭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부분이 아닌 총체성의 문제입니다 총체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며 동시에 총체적으로 의롭다고 여겨지는 사실을 우리는 단순히 믿을때 구원이 있습니다
실제적이고 총체적인 죄인이 잠잠히 서서 하나님께 경청할때 비로소 한 분의 거룩하신 분으로 경배 받으십니다 부분적인 수리 작업을 요구하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 분 손에서 처음 만들어졌을때 처럼 다시 완전히 새롭게 되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참으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댓글 33
결론적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지방교회의 회복이라는 방향은 높이 삽니다. 근본주의 교회 진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점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LA 와 같이 도시는 광역형 도시이다 보니 범위가 혼란스러워서 LA 안에도 여러개의 지방교회가 등장한 기형적인 사실을 존맥아더 목사의 설교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어권 컨텐트를 자주 접하다 보니 지방교회의 미국 내 분열 소식은 국내의 지방교회 신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국내외 적으로 한도시에 두개의 지방교회가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우기는 상황도 있더군요. 그래도 워치만니의 지방 입장은 형제회의 소위 '조합 교회 주의' 보다 현실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신화 사상은 교리적 설명으로서 채택은 찬성합니다만 적용은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드리며 제 생각에는 루터교 신학자인 Gehard Forde 교수의 서적들을 추천 드립니다. 국내에서 원서들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화 사상과 경륜을 관심한 동방 정교회의 신앙적 열매에 대해 고민해 보신다면 이런 신학으로는 변하는게 없다는 것을 발견하실 겁니다.
구원론은 Lordship Salvation 에 대해 지방교회가 관심 가지고 연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맥아더 목사의 GTY.org 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거나 변경하기 힘든게 조직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된 하나는 지방 행정이나 교리의 일치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 참 된 신자간의 사랑안에서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Uniformity 가 아닌 Unity 이겠지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회복' 안에만 갖혀 있지 마시라는 뜻에서 많은 글들을 적었군요. 성실히 토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m.gty.org/resources/articles/A114/an-introduction-to-lordship-salvation
지방 교회는 성경에 1,2명이면 좋고 혼선을 막기 위해 3명까지만 하라고 한 예언을 사도가 정해 준 숫자의 의미는 무시한 채 전 교인이 돌아가며 실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분명히 제한되어 있는 여성의 가르침이 성경에 여성의 예언이 있다는 이유로 가르침 성격의 예언을 여자가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브레드린 교회들에서는 앞의 이유들로 철저히 제한되고 있는 내용들 입니다.
사실 지방교회가 실행하는 방식 - 물론 이러한 접근은 지방교회 뿐 아니라 웨인 그루뎀이나 존파이퍼 등을 포함한continuationist 은사 지속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긴 합니다.- 의 예언(신언)은 가르침의 성격이며 따라서 여성의 예언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전히 가르침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혼선은 신구약에 공통으로 쓰여진 예언에 대한 용어 정의를 성경적 지지나 사도적 명령 없이 자의적으로 변경한 것에서 초래된 혼란입니다.
http://affcrit.com/ 지방교회측 신학잡지 싸이트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ebooks.html 지방교회측 진리변증 웹싸이트
장로교와 개신교의 상태를 변호할 목적이 없습니다 여기 글을 쓰는 이유는 회복이라고 부르짖는 단체의 신학을 논하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의 오용은 신자가 아닌 사람을 신자라고 하고 교회가 아닌 무리를 교회로 자칭하게 하여 거짓 교회를 낳고 교회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지나치다고 하시는 것은 오늘날 교회와 관련된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일단 대화 중에라도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토론 서두에 실례를 무릅쓰고 꼬치 꼬치 여쭤본 것입니다. 그리고 1) 본인이 서 있는 위치(신학적, 교단적)를 밝혀주실 것과 2) 지방 교회측의 1차 자료들을 가급적이면 근거삼아 주실 것을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3)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로가 다 바쁜데 이렇게 지방교회 또는 회복이라고 부르짖는 신학에 대해 시간을 내어 토론할 어떤 특별한 동기나 계기가 있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본문에 사용된 '마음'과 '생각의 뜻'을 나눌 수 없듯이 비유적인 의도로 쓴 위 구절을 근거로 혼과 영을 나누는 것은 전혀 삼분설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교리적 진술이 아닌 기도에 불과하며 형용사 '홀로클레론'과 동사 '테레테이에'(보전 되기를) 가 모두 단수형이므로 전인격을 강조하는 이 본문 구절을 삼분설의 근거로 이해한다면 아래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 인간을 네 부분으로 나눈다는 주장과 동일한 수준의 억측입니다.
인간 전체를 지칭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soul (nephesy) 은 포괄적 단어로써 영과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떠한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위적인 구분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영혼이지 영만이 아님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구원파와 동일하게 영,혼,육의 구원을 따로 전개하여 거듭남을 영의 구원으로 성화를 혼의 구원으로 부활을 육의 구원으로 보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전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그 결과물은 가시적, 공적, 역사적, 사회적, 물리적, 신체적, 감정적 요소들이 결여된 삶의 실재가 부족한 신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