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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사람'이라는 이상은 어떤면에서 그 와 반대되는 적용을 통해 성취됩니다

신앙은 진보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사람을 외치며 앞으로 전진하면서 어느 정도 신적인 부분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 아닌 낮아지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않고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종교와 눈먼 인도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높은 하늘의 선행을 해야 한다는 진보의 관점에서 신앙 생활을 바라보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 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 은혜의 총체성에 사로잡히는 법, 인간이 되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경적 신앙입니다

어리석은 인도자의 한 예는 율법주의자 입니다 우리는 자꾸 매일 뭔가를 구호로 만들어 실행하려 애쓰지만 복음의 중대한 핵심은 "너희는 이미 죽었다" 는 순전하고 무조건적인 공표이며 무조건적이고 총체적인 은혜 앞에 할일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믿음마저 조건이 아니며 들음에서 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각종 선행은 사회를 돌보는 수단이지만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참다운 신앙은 우리의 행위에 아이에게 상처가 났을때 뛰어오는 어머니와 같은 자발성을 줄 것 입니다 여기에는 계산이나 망설임 도덕성이나 선행 의식이 없습니다

잘못된 인도자들의 또다른 형태는 신비주의자들 입니다 그들은 언어적으로는 성령과 자기 부인, 죽음, 항복을 강조하지만 스스로의 자신의 언어에 속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했지만 만약 자기를 부인한 결과가 나쁘면 어떻하나요?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처럼 겸손, 항복, 자기 버림도 사랑도 인내라는 노력도 큰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결국 은혜를 탓할 수는 없어서 내 잘못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의 언어를 사용할때는 다릅니다 옛 자아가 죽어라고 요구하지 않고 죽었다고 선포할 뿐입니다 사랑을 불러오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하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은 약속의 확실한 힘을 통해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진압해 황량한 삶에 밀고 들어와서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여기에 있다고 단호히 말할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쩐일인지 종교를 극렬히 적대시 하셨고 반면에 종교 역시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다 알다시피 못 박기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는 정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율법을 자신이 이용하고 다루어서 자신과 타인에게 스스로의 방식대로 나님 일을 요구하는 종교 지도자는 당시 바리새인들만이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 종교인들인 우리도 이러한 위험에 빠집니다

우리의 종교적 관념은 인간의 타락이 아래쪽으로 낮아져서 downward corruption 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이 높아짐으로서 upward corruption 으로 타락이 진행되는 것을 성경은 생생히 보여줍니다

도덕적 체계에 맞춰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사회인으로서는 필요하겠지만 율법의 준수나 도덕적 진보를 통해 스스로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방식은 결국 자신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 성화의 삶은 우리가 율법을 놓고 추구하는 것이 아닌 주님으로 부터 우리의 분주한 삶 가운데 주어지는 비밀한 것입니다 오직 죽음과 거듭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부분이 아닌 총체성의 문제입니다 총체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며 동시에 총체적으로 의롭다고 여겨지는 사실을 우리는 단순히 믿을때 구원이 있습니다

실제적이고 총체적인 죄인이 잠잠히 서서 하나님께 경청할때 비로소 한 분의 거룩하신 분으로 경배 받으십니다 부분적인 수리 작업을 요구하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 분 손에서 처음 만들어졌을때 처럼 다시 완전히 새롭게 되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참으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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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3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1:31
삼분설, 이분설에 관해 지지의 글을 쓰셨기에 참고로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본문에 사용된 '마음'과 '생각의 뜻'을 나눌 수 없듯이 비유적인 의도로 쓴 위 구절을 근거로 혼과 영을 나누는 것은 전혀 삼분설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교리적 진술이 아닌 기도에 불과하며 형용사 '홀로클레론'과 동사 '테레테이에'(보전 되기를) 가 모두 단수형이므로 전인격을 강조하는 이 본문 구절을 삼분설의 근거로 이해한다면 아래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 인간을 네 부분으로 나눈다는 주장과 동일한 수준의 억측입니다.

인간 전체를 지칭하는 경우에도 사용되는 soul (nephesy) 은 포괄적 단어로써 영과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떠한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위적인 구분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영혼이지 영만이 아님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구원파와 동일하게 영,혼,육의 구원을 따로 전개하여 거듭남을 영의 구원으로 성화를 혼의 구원으로 부활을 육의 구원으로 보는 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전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그 결과물은 가시적, 공적, 역사적, 사회적, 물리적, 신체적, 감정적 요소들이 결여된 삶의 실재가 부족한 신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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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3:45
PROVIDENCE
이분설, 삼분설도 해묵은 논쟁주제입니다. 섭리님은 장로교단 내에서도 이분설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혹시 아시는지요? 유명한 개혁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가 한 예입니다. 이분설로는 로마서 8장 6절이 결코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영과 육체가 다름은 자명하고 그 사이에 생각 역시 영 혹은 육체와는 별도로 보아야 풀리는 문맥입니다. 만일 생각이 항상 영과 붙어있다면 장로교인들은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맞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4:19
PROVIDENCE
육신을 육체로 해석할 때 오는 오류입니다. 후크마는 일원론적 전인격주의자라는 사실은 유명하며 설득력이 있고 적용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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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05
PROVIDENCE
육신으로 하든 육체로 하든 그것은 영이 아니지요. 그리고 육과 영은 (영적) 사망과 생명으로 갈릴만큼 일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생각'이 일종의 캐스팅 보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이 육체와 영을 여러번 대비하여 말하고 있고, 믿는 이들이 참된 삶의 증거로 나타나기 위해서 그들의 생각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어떤 상태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오한 내용을 영혼을 뭉뜽그려 보는 이분설로는 결코 설명하기도 적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분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특징은 관념의 세계에서 조직화 체계화에는 강점이 있으시나, 그것을 주관적인 체험 안으로 가져가고, 자신이 체험한 것을 성경의 용어로 남에게 설명하는 방면에서는 많이 약한 것이 흠이라면 흠입니다. 그런데 체험조차도 신비주의로 몰아가버리면 간단히 해결되니 본인들에게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일단 생명의 체험을 가진 분들은 자신들이 본 계시와 체험을 삼분설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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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08
PROVIDENCE
위 섭리님의 반론은 삼분설의 근거로 흔히 인용되는 히브리서 말씀을 대상으로 하신 것인데, 저는 롬8:6으로 삼분설을 입증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이분설에 입각한 반론이 있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1:21
PROVIDENCE
그리스도인을 두종류로 나누는 오류는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결국 구원론에서 틀리면 종말론 인간론까지 성경 전체를 재구성하는 메트릭스가 필요한데 만들어서 그러한 구조 안으로 피신하거나 갖혀 있게 됩니다 육신을 좇는 자 육신의 생각은 신자가 영에속한 것과 사이에서 선택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불신자에게 해당 되는 문구입니다 로마서 8장을 그렇게 읽어보십시요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3:15
PROVIDENCE
명백히 사람은 두종류 밖에 없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입니다 신자는 생각을 영에 둔자이고 불신자는 생각을 육신에 둔자입니다 실제 거듭남이 결단주의에 의존하는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범주를 넓히고 그들의 혼이 육에 둘지 영에 둘지를 결정하는 성화관을 갖게 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언제나 영적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비록 순종하지 않는 순간에도 성령은 생명안에서 통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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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3:32
섭리님, 여기서 이런 글들을 올리시는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만일 지방교회측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것이라면, 1)본인의 기준이 성경적이라는 점을 좀 더 충분하게 이해시켜 주시고(블러그나 본인의 글들이 올려져 있는 공간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2) 지방 교회 성도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좀 더 탐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두 편의 글을 올려 주셨는데, 위 두 가지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저희와 무관한 '훈계'입니다. 왜 그런 내용이 지방교회 교회마당 공간에서 다뤄져애 하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저부터 그런 생각이 듭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5:23
새예루살렘
그렇지 않고 대구에 변형된 이현래 교까지 등장하는 것은 지방교회 내에서도 일반 신도 가운데에는 그러한 신화 사상을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충분히 오해하여 적용할 소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파 신도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높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지방교회의 회복이라는 방향은 높이 삽니다. 근본주의 교회 진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점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LA 와 같이 도시는 광역형 도시이다 보니 범위가 혼란스러워서 LA 안에도 여러개의 지방교회가 등장한 기형적인 사실을 존맥아더 목사의 설교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어권 컨텐트를 자주 접하다 보니 지방교회의 미국 내 분열 소식은 국내의 지방교회 신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국내외 적으로 한도시에 두개의 지방교회가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우기는 상황도 있더군요. 그래도 워치만니의 지방 입장은 형제회의 소위 '조합 교회 주의' 보다 현실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신화 사상은 교리적 설명으로서 채택은 찬성합니다만 적용은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드리며 제 생각에는 루터교 신학자인 Gehard Forde 교수의 서적들을 추천 드립니다. 국내에서 원서들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화 사상과 경륜을 관심한 동방 정교회의 신앙적 열매에 대해 고민해 보신다면 이런 신학으로는 변하는게 없다는 것을 발견하실 겁니다.

구원론은 Lordship Salvation 에 대해 지방교회가 관심 가지고 연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맥아더 목사의 GTY.org 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거나 변경하기 힘든게 조직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된 하나는 지방 행정이나 교리의 일치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 참 된 신자간의 사랑안에서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Uniformity 가 아닌 Unity 이겠지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회복' 안에만 갖혀 있지 마시라는 뜻에서 많은 글들을 적었군요. 성실히 토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6:05
새예루살렘
주되심 구원 관련 링크 하나 소개합니다
m.gty.org/resources/articles/A114/an-introduction-to-lordship-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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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14
새예루살렘
신화사상은 성경전체을 배경으로 나온 결론입니다. 물론 적용과 그 실재 안에 온전히 들어가려면 많은 시간과 심지어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속에 근거한 칭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심지어 유기적 구원의 기초단계인 '거듭남'의 개념조차도 설왕설래하는 개혁신학적 구원론으로는 성경 특히 서신서를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거듭남 이후에 전개되는 '생명의 자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요3:6처럼 명쾌한 거듭남의 정의를 개혁신학은 결코 따를 수 없습니다. 이유는 피조물과 창조주를 떼어 놓아야 하는 태생적인 구도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피조물과 창조주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연합된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그 연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고 질문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개혁신학의 거듭남은 우리가 새 창조물이 된 부분만 강조하지 그릇인 우리 안에 창조주께서 보배로 들어오셔서 내주하신다는 성경의 진리를 또렷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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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19
새예루살렘
그리고 지방교회측의 진리의 방향과 깊이는 이상과 계시는 물론 지난 90여년 동안의 수 많은 시행착오가 체험의 산물입니다. 또한 지난 20여년 동안 이러한 진리들은 <확증과 비평>(A&C)이라는 신학잡지에 의해 개신교 용어와 틀을 감안한 서술들을 한 논문 형태로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방 교회들 일선에서 일부가 이 중심 빛에서 잠시 빗나갔다가 돌아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그 중심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 기존 신학계의 비판과 지적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우리와 무관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 혹은 반박한 자료들이 상당부분 축적되어 있습니다. 섭리님이 영어가 되시니까 그 둘 싸이트를 이곳에 소개드립니다. 한번 들러서 올려진 글들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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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30
새예루살렘
LA 카운티 안에는 여러 개의 city들이 있으니 당연히 여러 개의 지방교회들이 있지요. 그러나 LA city 안에는 the Church in LA 하나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주일날 신언하는 일을 위하여 여러 곳에서 주일 집회를 하고 있으나 행정은 하나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이 엘에이 지방교회를 언급하셨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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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35
새예루살렘
신화를 어떻게 이뤄갈 것인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반복하면 생명의 성숙으로 신화는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성장은 자아부인과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이 필수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전을 중시하고 그것을 주요수단으로 삼은 동방교회식은 한계가 있음을 저도 인정합니다. 추천해 주신 Gehard Forde 교수님의 서적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풀러의 벨리마티 커캐년 교수님의 One with God 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분도 핀란드 분이시고 루터교 배경을 가진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신화교리 특히 루터의 칭의론 재검토를 통한 서방과 동방의 접점 찾기가 헬싱키 대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 중이지요. 관련 논문들이 벌써 몇 편 나와서 서방 신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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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35
새예루살렘
존맥아더 목사의 GTY.org 도 참고해 보겠습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0:29
새예루살렘
토론토에는 LSM 의 행정을 따르지 않는 이유로 지방교회 다시 세운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0:31
새예루살렘
루터파의 칭의론 재검토를 통한 동서방 교회 접점 찾기는 진작에 제가 느낀바여서 그러한 성격의 글을 올린것입니다 아시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0:46
새예루살렘
개혁주의의 율법의 제3용도는 율법을 coddle 인위적인 변경을 가하려는 한계가 있는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루터파의 접근이 맞습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0:52
새예루살렘
그래서 지방교회는 동방 정교회, 루터파 뿐 아니라 개혁교회 주되심 구원론에도 겸손히 열려 있기 바랍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5:52
새예루살렘
네 읽어 보겠습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7:47
새예루살렘
저 위에 글들도 난데 없는 훈계가 아니라 칭의에 바탕을 둔 루터주의적 관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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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3:34
섭리님은 지방교회측이 말하는 하나님-사람의 이상과 그 실현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아시고 이런 제목과 글을 쓰고 계시는지요? 본인의 막연한 추측과 섭입관으로 이런 글을 쓰신다면 글을 쓰시기 이전에 좀더 연구를 해 보실 것을 진심으로 권해드립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5:30
새예루살렘
나름 알고 있는 바가 있어서 말씀 드립니다. 수련회나 단체 모임등을 통해 하나님-사람 관련 플랫 카드를 붙이고 구호를 외치며 목표 지향적으로 해나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얘기가 나와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cessationist 은사 중단론자이며 예언은 구약에서 infallible 무오류의 성격을 갖는데 신구약에서 어떤 단어든지 연속성을 가지므로 신약의 예언도 무오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예언은 정경 완성으로 끝났다는 리차드 개핀 교수 의견에 동의합니다.

지방 교회는 성경에 1,2명이면 좋고 혼선을 막기 위해 3명까지만 하라고 한 예언을 사도가 정해 준 숫자의 의미는 무시한 채 전 교인이 돌아가며 실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분명히 제한되어 있는 여성의 가르침이 성경에 여성의 예언이 있다는 이유로 가르침 성격의 예언을 여자가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브레드린 교회들에서는 앞의 이유들로 철저히 제한되고 있는 내용들 입니다.

사실 지방교회가 실행하는 방식 - 물론 이러한 접근은 지방교회 뿐 아니라 웨인 그루뎀이나 존파이퍼 등을 포함한continuationist 은사 지속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긴 합니다.- 의 예언(신언)은 가르침의 성격이며 따라서 여성의 예언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전히 가르침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혼선은 신구약에 공통으로 쓰여진 예언에 대한 용어 정의를 성경적 지지나 사도적 명령 없이 자의적으로 변경한 것에서 초래된 혼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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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6:57
새예루살렘
고전 14장 본문 자체가 특징지워주듯이 '신언'(prophecy)은 1) 교회를 건축합니다(4절)...그렇다면 교회건축에 남녀 구분이 필요할까요? 엡4:16에 따르면 모든 지체들이 분량껏 기능을 발휘함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2) 신언은 건축하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3절). 이런 기능이 은사중 하나인 예언(장래일을 미리 말함)에 있는지요? 장래 일을 미리 말하면 격려와 위로가 되나요? 그리고 이 부분도 남자만 격려하고 위로해야 하는지요? 3) 신언은 책망하고 판단하여 드 마음에 숨은 것을 드러냅니다(25절). 4) 29절의 신언을 둘 또는 셋이서 말하라는 것은 2-3명만 말하라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왜 31절에서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씩 신언 할수 있다' 라고 했지요? 5) 신언은 배우고 격려받게 합니다(31절)......................결론적으로 신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님 혼자 설교하시는 것을 짐을 덜어드려서 모든 지체들이 나누어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이 모든 지체들을 온전케 하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비성경적이고 주님이 미워하신다고 하는 니골라당의 행위 즉 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계2:6)를 대신할 대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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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3:40
위 제목에 대해서 기왕에 쓰셨으니 간략하게 소개들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이 사람되심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아타나시우스의 신화론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인성'(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셨던 것처럼, 택자들도 단체적으로 그들의 '인성' 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초대교부들은 이 신화교리를 성육신의 목적과 함께 증거했지요. 2. 위트니스 리의 경우 이러한 신화는 거듭남, 거룩케 됨, 새로워짐, 변화, 형상을 본받음, 영화롭게 됨이라는 과정을 통해 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이 모든 신화(구원)의 과정은 로마서 5장 10절에서 보듯이 "화목된 자들이 더 나아가 생명 안에서 구원받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요한복음 10:10에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시면서 "내거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4:28
새예루살렘
네 설명과 신학으로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제로 성경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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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3:41
이러한 지방교회측의 하나님-사람관과 님이 위에서 올린 글들이 어떤 연관 혹은 접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04:26
새예루살렘
글 내용 그대로 입니다. 이상은 적용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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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7:25
섭리님, 영어가 되시니까 아래 싸이트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바램은 아래 싸이트에 올려진 글들을 다 읽으시면 지금 쓰시고자 하는 내용들의 절반은 불필요하다고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http://affcrit.com/ 지방교회측 신학잡지 싸이트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ebooks.html 지방교회측 진리변증 웹싸이트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4:40
새예루살렘
네 참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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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16. 08:06
PROVIDENCE18 시간 전

장로교와 개신교의 상태를 변호할 목적이 없습니다 여기 글을 쓰는 이유는 회복이라고 부르짖는 단체의 신학을 논하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의 오용은 신자가 아닌 사람을 신자라고 하고 교회가 아닌 무리를 교회로 자칭하게 하여 거짓 교회를 낳고 교회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지나치다고 하시는 것은 오늘날 교회와 관련된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일단 대화 중에라도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토론 서두에 실례를 무릅쓰고 꼬치 꼬치 여쭤본 것입니다. 그리고 1) 본인이 서 있는 위치(신학적, 교단적)를 밝혀주실 것과 2) 지방 교회측의 1차 자료들을 가급적이면 근거삼아 주실 것을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3)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로가 다 바쁜데 이렇게 지방교회 또는 회복이라고 부르짖는 신학에 대해 시간을 내어 토론할 어떤 특별한 동기나 계기가 있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16. 15:47
새예루살렘
네 중요한 동기는 진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대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가 동방정교회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나름의 방식으로 연구했으니 루터주의의 성화와 개혁주의의 주되심 구원까지 소화한다면 내거는 모토인 회복의 방향으로 나갈수 있지 않을까 또 더 많은 그리스도안의 형제들과 동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게시 했습니다 신학이 원래 순서가 신론 종말론 교회론 뒤에는 구원론 할 차례가 맞기도 하구요 지금까지 그나마도 이 작업을 가장 균형 잡히게 잘 해오신 분이 존 맥아더 목사라고 생각하니 참고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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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4.05.20. 01:43
새예루살렘
그런 동기가 있으셨군요. 1. 루터주의의 성화 부분은 신화됨의 주제와 관련하여 전진된 연구가 한창 진행되는 분야이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사담이지만 제가 아는 어떤 형제님은 그 주제로 학위논문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2. 개혁주의의 주되심 구원..이 무엇인지는 소개해 주신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을 통해 저도 더 연구해 보겠습니다. 물론 그런 작업은 소개드린 확증과 비평 필진 쪽에서 지속적으로 해 왔고 또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개혁신학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부분(골1:27)이 약함으로 존 맥아더 목사님이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신 깊이와 그분의 글은 상관성을 가지게 될 것으로 추측됩니다. 밖에서 위에서 계시면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면은 아무리 깊고 풍성해도 그 자체적인 한계를 갖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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