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균형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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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균형이 필요함
그리스도인 생활에는 그리스도인의 실행상의 완전함과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균형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에 두 어깨, 두 팔, 두 손, 두 다리, 두 발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에 균형이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균형잡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행상의 완전함에서 균형잡힐 필요가 있다. 야고보서에 대해 기록할 때 나는 적극적인 면으로 야고보서에는 그리스도인의 실행상의 완전함이 있고, 소극적인 면으로 경건한 사람도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관한 분명한 이상이 없을 수 있다는 경고가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균형잡히려고 노력했다.
야고보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기둥으로, 심지어 첫 번째로 여겨진 것은 그의 종교성과 그리스도인의 실행상의 완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갈 2:9).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는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전히 의식(儀式)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옛 유대 종교의 배경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것은 2장 2절부터 11절까지와 사도행전 21장 20절부터 24절까지에 있는 그의 말에 의해 증명된다.
사도행전 21장에 있는 상황
이제 사도행전 21장에 있는 상황을 보자. 18절은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문안한 후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했다』(19절). 그들이 이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천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고 말했다. 「수천」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사실상 일만(一萬)의 여러 배, 즉 「수만」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주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율법에 열심이 있는 수만 명의 유대 신자들에 대해 바울에게 말한 야고보가 모세의 율법을 전파하고 가르쳤음을 나타낸다. 그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율법을 지켰다. 사도행전 21장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 경륜인가, 은혜의 경륜인가? 이 장에는 혼합이 있다. 하나님은 율법 경륜이 은혜의 경륜과 혼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야고보의 무게를 재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척도, 즉 한 면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실행상의 완전함에 관한 야고보서에 있는 척도와 또 한 면으로는 사도행전 21장에 있는 그의 말에 있는 척도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두 면을 가질 때만이 야고보서에 대한 균형잡힌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만일 우리에게 야고보서 1장만 있고 사도행전 21장이 없다면 야고보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너무 높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에게 사도행전 21장이 있다면 우리의 관점은 보다 균형잡힐 것이다.
나는 야고보의 서신에 관한 몇 권의 좋은 책들을 조사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 관한 논평에서 어떤 책도 사도행전 21장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야고보에 관한 균형잡힌 관점을 가지려면 사도행전 21장의 배경에서 그의 서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사도행전 21장을 읽을 때 우리는, 야고보가 왜 그의 서신을 열두 지파에게 보냈으며 또한 2장에서 왜 그가 「회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야고보가 열두 지파와 회당이라는 말을 한 사실은, 유대교에 속한 것들을 그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른 그리스도인 생활에 속한 것들과 혼합했음을 가리킨다. 야고보 자신의 말이 그런 혼합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야고보는, 서원한 사람과 함께 성전에 가라고 바울에게 충고했고, 심지어 강요하면서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밀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절)고 말했다. 그때 당시에 바울은 율법이 끝났다고 말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이미 기록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행동했다.
바울은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던 예루살렘에 왔다. 사도행전 21장에 따르면, 그는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와 모든 장로들을 만났다. 의심할 바 없이 베드로와 요한도 거기에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역사하기 위해 어떻게 그를 사용하셨는가를 간증했고 그들은 모두 이것을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 후에 그들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에는 율법에 열심인 수만 명의 믿는이들이 있음을 지적했다. 심히 경건하다고 알려진 야고보가 사도 바울에게 그런 말을 했고 율법을 계속 지켰음을 유대인들에게 증명하라고 바울에게 강요한 것은 믿기 어렵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이 『네가 이방에 있을 때에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21절) 들었다고 말했다. 규모를 따라 행하는 것은 규례를 따라 행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가서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라고 말했다. 아마 그들이 했던 서원은 나실인의 서원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머리를 밀어야 했으며 칠 일 동안 매일 제물을 드려야 했다.
몇 년 전 나는 이 부분의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 바울이 야고보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을 믿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는 야고보의 말에 따라 다른 사람과 함께 성전에 가서 서원에 참여했다. 바울도 그런 혼합이 있는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행동이 가능했던 이유
그러나 바울은 그의 행동에 대한 근거를 가질 수 있다. 만일 그가 이것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면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한 그의 말을 지적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0-22). 더욱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쓸 때 나는 이방인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이방인들과 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있으므로 유대인들과 같이 행동한다.』 그러나 경우야 어찌됐든 바울은 야고보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서원한 자들과 합류했다.
사도행전 21장 26절부터 28절에서 우리는, 칠 일이 거의 찼을 때 어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사람들을 격동하여 그를 붙잡았음을 본다. 이것은 주님께서 바울의 행동에 찬성하지 않으셨으며 그가 체포되도록 허락하셨음을 가리킨다. 결국 바울은 직접 네로 황제에게 재판받도록 로마에 보내졌다. 바울은 그처럼 강한 사도였지만 여전히 사람이었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장로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새 것과 옛 것의 혼합
우리는 야고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계시에 있어서 강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경 안의 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야고보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약간 빗나갔다.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여전히 옛 유대 종교의 배경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전통과 배경이 유대교에 대한 야고보의 애착심과 함께 역사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새 경륜을 희생하게 했으며 옛 시대와 타협하게 했다. 이 타협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혼합을 산출했다.
신성한 원칙은 항상 하나님의 경륜을 독특하고 분별되게 보존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심지어 바울도 예루살렘의 구름낀 하늘, 즉 분위기 때문에 이 혼합에 약간 연루되었다. 전통과 배경에 대한 사람의 애착심은 항상 새 것과 옛 것의 혼합을 가져온다. 야고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그러한 혼합에 참여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관한 분명한 이상이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의시키는 것은 확실히 올바른 것이다.
위트니스 리
[야고보서 라이프 스타디, 제 5장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위한 실행상의 미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