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엔 성부였으나 지금은 성령이시네”
-
관리자 - 523
- 0
“이전엔 성부였으나 지금은 성령이시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네 번째 큰 비밀을 볼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비밀을 교통하기 전에 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를 자세히 교통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느낀다. 이 진리를 보아야만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안에 들어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살아 낼 수 있다. 이 진리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내용과 표현이 또한 교회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만 있고 주관적인 체험이 없다면, 이 비밀은 공허한 교리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진리를 알아야만 미혹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진리를 교통하기 위해 나는 우리의 ‘가족 역사’에서 몇 가지 일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들은 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다.
“이전엔 성부였으나 지금은 성령이시네”
1925년부터 나는 니 형제님과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 니 형제님이 내 고향에서 특별 집회를 가질 때 나는 비로소 니 형제님을 직접 만나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 나는 직장을 내려놓았는데, 니 형제님은 내가 직장을 내려놓고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확증해 주는 한 통의 서신을 나에게 보냈다. 그래서 직장을 내려놓은 후에 나는 특별히 니 형제님을 만나 보려고 상하이에 갔다. 그리고 1933년부터 시작해서 1949년에 중국 대륙의 정세가 바뀌기 전까지 나는 니 형제님과 함께 동역하게 되었다. 1949년에 중국 대륙의 정세가 바뀌자, 니 형제님은 긴급 동역자 집회를 열어 어떻게 변화에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두 차례의 동역자 집회에서 니 형제님은 내게 중국 대륙을 떠나 해외로 갈 것을 권했다. 그리하여 나는 1949년 4월인가 5월에 대만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니 형제님은 홍콩에 와서 부흥을 가져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에게 홍콩에 와서 동역자들과 장로들과 집사들과 관련된 교회의 모든 봉사를 안배할 것을 요청했다. 나는 그곳에 한 달 반쯤 머문 후에 대만으로 돌아왔다. 내가 대만으로 떠나기 직전에 니 형제님은 중국 본토로 돌아갔다. 1952년에 니 형제님은 투옥되어 이십 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72년에 주님 품에 갔다.
나는 거의 이십 년간 니 형제님과 동역했고, 우리는 주님의 일 안에서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니 형제님은 한 번도 나와 한담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늘 진리와 주님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니 형제님이 마음속에 주님을 위해 어떤 부담을 갖고 있고, 교회에 대해 어떤 조망을 갖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니 형제님은 삼일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찬송가 368장은 니 형제님이 직접 작사한 것이다. 이 찬송에는 “이전엔 성부였으나 지금은 성령이시네”라는 소절이 있다. 이 찬송은 상하이에서 처음 인쇄되었고, 니 형제님이 수감되기 전에 출간한, 1,052곡이 실린 찬송가에 포함되어 있다.
1933년 말에 우리는 중국내지선교회 출신의 설(薛)씨 성을 가진 순회 전도자를 우리 모임에 초청하여 말씀을 전하게 했다. 그는 “결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분리된 세 분이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이 성령이 아니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이 바로 성령 자신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니 형제님은 맨 뒤에 앉아서 듣고 있다가 그 전도자의 말에 “아멘!”이라고 했다. 그 소리는 앞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도 들렸다. 집회를 마치고 나는 니 형제님과 함께 산보를 했는데, 니 형제님은 “우리는 주 예수님이 바로 성령이심을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니 형제님 때부터 지금까지, 삼일 하나님과 관련하여 우리가 믿는 바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분이시며 나누어진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1954년에 나는 홍콩 교회로부터 특별 집회를 열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적어도 칠 일 동안 이 진리를 전했다. 내가 메시지를 다 전한 후에는 단상 위에서 나와 같이 앉아 있던 형제가 집회를 끝맺는 기도를 했다. 그의 기도는 내가 전한 것을 완전히 확증했다. 나는 삼일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영이 되신 것을 강조하며 말씀을 전했다. 또한 특별히 이 주제와 관련된 찬송을 회중에게 부르게 했다. 그러나 단상에서 내 옆에 앉았던 그 형제는 니 형제님이 투옥된 후 변절하여, 그것을 이단이라고 말하며 논쟁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분열을 일으켰다.
“오 주님 지금 그 영일세”
1963년에 나는 한 미국인 형제의 도움을 받아 영어 찬송가를 편집하기 시작할 때, “오 주님 지금 그 영일세”라고 하는 찬송과 “오 주는 생명 주는 영 참 친근하시니”라고 하는 찬송을 썼다. 1964년에 나는 뉴욕에서 특별 집회와 훈련 집회를 인도했는데, 그때 그 미국인 형제도 함께 갔다. 그 미국인 형제가 그 찬송들의 가사를 다듬고 있었는데, 의견을 달리하는 어느 한 형제가 그것을 보고는 그에게 “이 찬송들은 찬송가에 포함시키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며칠 후에 나는 의견을 달리하는 그 형제와 교통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고 말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형제님이 이것에 대해 말씀을 전하신다면 기독교의 반대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오늘 나의 주된 부담은 바로 그 영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전할 말씀이 없습니다. 나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우리가 반대를 두려워한다면 주님의 회복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르틴 루터 시대에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여 가톨릭교회에게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가 사람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그것을 전하기를 멈추었습니까? 그가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종교 개혁이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주님의 회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반대가 두려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영원부터 구속자이심
이사야서 9장 6절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 한 아들께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는데 / ··· / 그분의 이름은 / 놀라우신 조언자 / 전능하신 하나님 / 영원하신 아버지 / 화평의 왕이라 불리리라.”라고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아버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면에서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다른 면에서는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영원하신 아버지’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서의 다음 부분을 보아야 한다. 성경의 각 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가 필요하다.
이사야서 63장 16절은 “아브라함이 저희를 알지 못하고 / 이스라엘이 저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 오, 여호와님!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시며 / 영원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저희 아버지’와 ‘우리의 구속자’를 같이 배열했다. 우리의 아버지와 우리의 구속자는 다 여호와를 가리킨다. 구약의 여호와는 곧 신약의 예수님이다. ‘예(Je)’는 여호와를 가리키고, ‘수(sus)’는 여기에 더해진 것으로서 ‘구주’를 가리킨다.
구주가 되신 여호와께서 바로 예수님이시다. 여기서 “오, 여호와님!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시며 / 영원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절에서 여호와는 예수님이다. 여기서는 “오, 하나님! 하나님은 저희 아버지이시며”라고 말하지 않고, “오, 여호와님!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시며”라고 말한다. 이 아버지가 바로 여호와 우리 구주 곧 예수님이시다. 이사야서 9장 6절에서는 한 아버지 즉 영원하신 아버지를 말하고, 63장 16절에서는 또 한 아버지 즉 여호와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사야가 우리에게 두 아버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사야서 64장 8절은 “그러나 이제 여호와님,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하고, 63장 16절은 “오, 여호와님!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시며 / 영원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함축한다. 여호와께서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영원부터’는 영원토록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영원하신 아버지는 곧 영원부터 계신 구속자이시고,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신 분이시다. 그러고 나서 64장 8절은 “이제 여호와님, 주님은 저희 아버지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여호와는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이제도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사야서 전체의 기록에 따라, 우리는 9장 6절에서 말한 ‘영원하신 아버지’가 바로 여호와이시자 예수님이시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 9장 6절은 비록 그분께서 아들이시지만, 그분의 이름을 ‘영원하신 아버지’라 칭하고 있다. 이것은 그분께서 아들이시고 또한 아버지이심을 말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부근에 우리를 반대하는 한 단체가 있는데, 그들도 이사야서 9장 6절을 연구했다. 그들의 연구 기록에는 이러한 대화 내용이 있었다. “한 사람이 ‘이사야서 9장 6절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이심을 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저촉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출판한, 반박하는 책에 이러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지금까지 적어도 오륙 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우리가 출판한, 반박하는 책을 재반박하는 어떤 책도 내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반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진리이다.
아들이 바로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라는 것에 대해 이사야서 9장 6절에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이 절의 시적인 예언은 대구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히브리어에서, 대구 형식은 동일한 것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 한 아들께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는데”. 이 두 구(句)는 대구를 이룬다. 계속해서 6절은 “그분의 이름은 / ··· / 전능하신 하나님 /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말한다. 아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것과 아들을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또한 대구를 이룬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한 것은 다만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아버지가 시적으로 한 쌍을 이룸을 의미한다. 이는 영원하신 아버지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앞에서 아기가 곧 아들이고 아들이 곧 아기인 것과 같다.
그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분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구유에 뉘어지신 아기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해 말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아기이시자 아들이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은 아기이시고 아들이시므로,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구유에 뉘어지신 아기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아기와 아들은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아버지 역시 한 분이시다. 아기이든지, 아들이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든지,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든지 다 한 분이시다. 이 모두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위트니스 리
[성경의 다섯가지 큰 비밀, 제4장 그리스도의 비밀, 한국복음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