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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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가 본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자신의 구속을 완성했다. 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구속은 하나님의 순수한 역사이다. 이제 문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 속으로 역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와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역사하게 하여 그리스도와 생생한 생명의 관계를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질이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같은 구절의 말씀을 여러번 반복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서로가 서로 안에 있는 것이 연합의 실제요, 본질이다. 오직 이 연합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적하신 바를 완성할 수 있다.
더 완전한 연합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켰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 안으로 역사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의 연합은 실제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그 때만이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역사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와 같은 관계야말로 가장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연합이다.
어느날 나는 대장장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큰 쇳덩어리를 불 속에 집어 넣고 불에 달군 후 빨갛게 달아오른 그 쇠를 망치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 옆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불을 좀 얻으려 했다. 그 사람은 종이쪽지를 말아서 불에 넣지 않고 빨갛게 달아오른 쇠에 댔다. 즉시 그 종이에 불이 붙었다. 나는 쇠에서 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이 쇳덩어리는 이제 다른 쇠와 달랐다. 당신은 그것을 쇠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불덩어리로 생각할 수도 있다. 불이 쇠 안에 있고 쇠가 불 안에 있다. 그 쇳덩이에는 철의 성분과 불의 모양이 있다. 종이 쪽지를 그 위에 대면 불이 붙는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 그리스도가 쇠와 불처럼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하셨고 우리의 옛사람을 끝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서 멈추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쇠와 불이 하나되는 것처럼 우리와 그리스도가 완전히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쇠의 모든 분자(分子)가 불과 연합되고 불의 모든 특징이 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 편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우리 쪽에서 해야 할 것은 잠시 접어 두고, 하나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나되게 역사하시는지 보기 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연합의 역사를 볼 것이다. 이 역사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가지 매우 실제적인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이 단계가 바로 이 장에서 설명하려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은 예수
우리는 모두 나사렛 예수가 성육신(成肉身)된 하나님임을 알고 있다. 바꾸어 말해서 예수는 인성(人性)을 입은 신성(神性)이시다. 만일 하나님이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면 결코 구속(救贖)을 이룰 수 없으셨다. 이 구속을 위해 하나님은 성육신 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입는 순간, 두 면에서 제한을 받으셨다. 첫째로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제한을 받으셨고, 둘째로 공간 안에서 제한을 받으셨다. 만일 그분이 단지 하나님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성을 입는 순간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묶이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이 되셨다.
육신은 어떤 모양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천진(天津)에 있다면 그 사람은 같은 시간에 북경(北京)에 있을 수 없다. 만일 그 사람이 중국에 나타난다면 영국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당신의 몸이 하나인 이상 거리에 제한을 받는다. 당신은 한 시각에 한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은 몸의 제한을 받는다.
우리도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음
더욱이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당신은 서로 다른 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다만 현재의 당신을 알 뿐이다. 나는 당신이 내일, 혹은 내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종종 나는 어떤 사람과 잠시 동안 이야기하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지 않다. 나와 이야기하는 그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그 사람은 한 순간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으나 다음 순간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육신에게 주는 제한이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은 모든 인간 관계에 마지막을 부여한다.
나사렛 예수, 사람의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 또한 두 개의 우주적인 상황에 묶여 있었다. 하나님은 그 당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포함되었다고 여기실 뿐,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길은 아직 없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기 위하여는, 그리스도가 단순한 육신아닌 다른 형태로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완전히 하나 되기 전에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않음
고린도 후서 5장 16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계시했다.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는 열두 제자가 갈릴리에서 알았던 사람과 다르다. 그 당시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다녔고, 그들과 함께 먹었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여행했다. 그들은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의 손을 만졌다.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의 이적(異蹟)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육체대로 알았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놀라운 구절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육체적인 관계는 더 이상 합당치 않다.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면 제한을 받게 된다
왜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을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여전히 육신 안에 있다면 시간과 공간의 방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한정된 시간 동안만 접촉할 수밖에 없고, 한정된 장소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계시는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그를 접촉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 말씀을 주의하라. 만일 우리가 오늘 전하는 그리스도가 여전히 육신 안에 있는 분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라. 만일 이 순간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다면 천진(天津)에 있는 우리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천진에 오신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을 만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공간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분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움
만일 그리스도가 영원히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원하신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우리는 때때로 교통비를 마련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 된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와 가까이 머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순간 또다시 그분과 헤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물질적 종교가 될 것이고, 기독교는 땅 위에 우주적인 중심지가 있어 그 곳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을 관리하고 다스릴 것이다.
열 두 제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을 때 그리스도는 여전히 육체를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세 사람과 얘기할 때 다른 아홉 사람은 동참하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열 한 제자와 걸을 때 한 사람은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어떤 제자는 다른 제자보다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있었다. 열 두 제자가 다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울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육체를 벗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그리스도가 오늘 육신 안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열 두 제자가 알던대로 보기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만일 나사렛 예수가 오늘 여기에 있다면 그가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도 그의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의 육신과 함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나의 일부가 될 수 없고, 나의 육신도 그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한가지 중대한 필요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벗어나야 한다.
죽음은 그의 육체를 벗게 함
그리스도는 어떻게 육신을 벗었는가? 죽음으로 벗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우리의 죄와 우리의 옛사람을 위한 것만이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자신의 육신을 벗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더 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육신을 벗고, 이제 영 안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한 그리스도에게 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부활한 후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영과 혼과 몸이 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영에 속한 것이다.
영 안에
육신 안에 있는 것과 영 안에 있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육신 안에 있는 것은 옷을 입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땅 위에 있을 때 육신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옷을 벗고, 부활함으로써 다른 옷, 즉 영을 가진 새 몸을 입었다. 오늘의 그리스도는 과거에 사람의 육신으로 옷 입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영을 입은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두 가지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거나, 영으로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우리도 그의 안에 있을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와 우리는 완전한 연합을 이룰 수 있다.
지금은 우리 안에 계실 수 있음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삼이일(三而一)이심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과거에 육신을 입고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령을 입고 있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은 모두 한 분이다.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는 여러 면으로 제한을 받았지만 성령을 입은 그리스도는 지금 어디에든지 계신다. 그는 당신 안에도 거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원하는 사람은 그를 얻을 수 있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를 영접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와 하나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것이고, 기독교는 죽은 종교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단순한 교훈이요, 이론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부터는 우리 안으로 아무 것도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손
나는 많은 글을 썼지만 아직도 나의 필체는 좋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어릴 때 글씨 쓰는 법을 올바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나의 아버지께서는 나이 많은 가정교사를 두고 나에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내내 그분과는 반대로 나갔다. 나는 올바로 앉아서 배운 적이 없었다. 결국 그분은 나에게 몹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네 형들과 누이들을 봐라. 그 애들은 다 예쁘게 글씨를 쓰지 않니? 너만 그렇게 못쓰는구나. 자, 내가 네 손을 붙잡을테니 함께 써 보자.』 그 분의 큰 손이 내 손을 잡고 지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고집을 부리며 그분이 하는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분이 멈추면 나는 일부러 더 써나가려고 했고, 그가 반듯이 쓰려고 하면 나는 손을 왼쪽 오른쪽으로 비틀려 했다. 결국 그분은 나와 함께 글씨를 잘 연습하지 못했다.
어느 날 그분은 내가 잊지 못할 뼈 아픈 말을 했다. 『내가 네 속으로 들어가서 네 대신 글씨를 쓰고 싶구나. 그렇지 않으면 넌 도저히 글씨를 잘 쓸 수 없겠다.』
우리 안에 들어와 생명이 되심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밖의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앞뒤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하고 안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벗었을 때, 그는 성령 안으로 들어갔고 이제는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고 우리를 통해 나타날 수 있다. 그 나이 많은 가정교사가 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은 성령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실현되었다.
보혜사
그리스도는 어떻게 성령 안에 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에 있는 구절을 세밀히 살펴 봐야 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 보혜사는 성령으로서,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이다. 이 단어는 두 어근으로 되어있다. 앞 부분의 「파라(para)」는 옆이라는 뜻이요, 뒷 부분의 「클레토스(kletos)」는 돕고 구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당신 옆에서 당신을 돕는다는 뜻이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은 보혜사를 위안자로 번역했는데, 그 뜻은 당신 곁에서 당신을 돕고,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을 받쳐 준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당신을 돕고 받쳐 줄 보혜사를 보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영
요한복음 14장 17절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보혜사는 실제의 영이다. 「진리」는 「실제」로 번역되어야 한다(원문참조). 그것은 모든 영적 실제가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을 소유할 때 실제를 갖는다. 그러므로 성령은 실제의 영이다.
이 실제의 영은 다만 믿는 자들과 관계를 가질 뿐, 세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 세상은 실제의 영을 받지 않는가? 첫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둘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저를 아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알 수 있다.
오늘도 성령은 항상 믿는 자들과 함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말씀을 눈여겨 보자. 『계시겠음이라』는 말은 미래 시제를 가리킨다. 주님의 의도는, 『성령이 너희 안에 들어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한 것이다. 이점에 관하여 성경을 한 구절 더 읽고 알아보자.
14장 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했다. 고아란 무엇인가? 고아는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자녀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들은 음식이나 책 같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받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모든 것을 해준다. 반대로, 아버지가 없는 자녀는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를 모든 영적 일을 혼자 처리해가는 고아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우리를 보살피고 공급할 것이다.
두 대명사
17절과 18절에 사용된 두 대명사를 주목하라. 17절에서는 「저가」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지만, 18절에서는 「내가 」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한다. 17절의 「저」와 18절의 「나」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저」와 「나」는 두 분인가, 한 분인가? 이 두 구절을 다시 읽고 17절과 18절에 있는 「저」와 「나」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가령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하자. 『어떤 사람이 시청 앞에서 방금 택시를 세웠다. 그는 운전사에게 오달러를 지불하고 그를 이곳까지 데려오도록 했다. 나는 도착해서 방으로 들어와 여러분 모두가 여기 앉아있는 것을 보고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와 나는 무슨 관계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다. 단지 같은 분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8절에 있는 「나」는 17절의 「저」와 같은 분이다. 주님은 아버지에게 구하고, 아버지는 보혜사를 여러분 가운데 보낼 것이다. 성령, 곧 이 보혜사는 여러분 안에 거할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은 더 이상 고아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이 말씀은 성경의 가장 귀중한 부분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있을 때 보혜사인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거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에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 거한다. 그리스도가 땅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때 성령도 이미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지금 성령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인하여,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오고 있다. 당신은 성령이 지금 제자들 안에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제자들 안에 있는 분은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앞 부분에서는 『저가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하지만, 뒷 부분에서는 「내가 너희 안에」(20절)로 바뀐다. 「나」는 「저」 안에 있다.
장갑 안에 있는 손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 있는 것에 관하여 개봉(開封)에 있는 한 친구와 이야기를 했다. 그 때 우연히 내가 아는 외국인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악수를 하려고 장갑을 벗으려 했다. 나는 그녀를 말리면서, 『장갑을 벗지 않아도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돌이켜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장갑을 잡고 있는 건가, 손을 잡고 있는 건가? 자네는 내가 이분의 장갑을 쥐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분의 손을 잡고 있는 걸세.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바로 이와 똑같은 것일세. 자네가 밖으로 성령을 쥐고 있을 때 안으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네. 성령을 영접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일세.』 친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이제 알겠네』라고 말했다.
이것은 앞에서 나사렛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해 말한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그를 하나님이라 말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를 사람이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의 신성을 접촉할 때 그의 인성도 만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의 인성이 나타날 때 그의 신성도 동시에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그리스도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성령은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성령 안에 있다.
그 날에
14장 19절과 20절을 읽어보자.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에서 주님은 그가 육신을 벗고 성령 안으로 들어온 목적을 말한다. 그 목적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 즉 충분하고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 믿는 자들이 아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날에」, 즉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그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그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하나임을 알 것이다.
이 연합은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한 모든 것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로 연합된다.
그리스도와 한 영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지 않았다면 구원은 아직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직 우리와 연합될 수 없을 것이며, 단지 나의 가정교사처럼 어떻게 해서든 내 속으로 들어오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영의 형태를 취하셨다. 그분은 자유롭게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는 이제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영접할 수 있다. 성경은 또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영 안에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영을 소유하고 있다.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 안으로 영접할 때 두 영이 한 영이 된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가장 중요한 보석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생활과 아무 관계 없는, 일반 종교와 다름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이 없다면 내적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위한 가심은 우리에게 유익함
요한복음 16장 7절의 말씀을 읽어보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육신 안에 있는 한 보혜사는 올 수 없다. 그리스도가 육신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는 결코 성령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상해(上海)에 있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가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 좋지 않은 일이야. 만일 그리스도가 오늘도 땅 위에 계시다면 아무리 그분이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나는 꼭 가서 그분을 만날텐데... 나는 그 당시의 제자들처럼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생활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친구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결코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 외의 다른 제자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 그는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땅 위에서 알았던 그리스도보다 훨씬 나와 가까이 계시다는걸 아는가? 나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사람은, 우리의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만졌던 육신 안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네. 제자들이 알던 그리스도는 떨어질 수 있는 분이었어. 그 당시의 그리스도는 하루는 함께 있어도 이튿날에는 떠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시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도 거기 계시네. 심지어 나는 지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아. 내가 지옥에 간다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도 나와 함께 가실 테니까 말야.』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
베드로는 언제 그리스도를 밝히 알았는가?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다녔던 때가 아니다. 제자들이 그 당시 알았던 그리스도는 단지 나사렛 예수였다. 오직 예수님이 부활하고 성령 안에 있게 된 후에, 제자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기 시작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을 실제로 알 수 없다.
몇 년 전, 나는 이집트에 들린 일이 있었다. 우리와 같이 간 사람들 중에는 선교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나에게 팔레스타인에 가서 두달 정도 지내보라고 권했다. 그들은, 『가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골고다 산에 가 보시오. 예수님이 다니셨던 모든 장소를 찾아가 보시오. 그러면 당신의 믿음이 강해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나에게는 여행할 시간과 돈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곳에 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 곳에 간다고 해서 내 믿음이 강해질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더 아는 데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로 인해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나 나사렛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분과 하나이고 그분에 대한 나의 체험은 결코 밖에 있는 것들로 인해 좌우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잘 알려진 구유나, 십자가의 나무나, 못이나, 그밖의 유물들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기껏해야 그리스도를 더 육체대로 알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실제이고, 그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합니다.』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
우리가 앞에서 읽은 구절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지금도 우리가 믿는 것이 단지 밖의 종교라면, 우리는 성지나 메카(사우디아라비아의 홍해 연안에 있는, 회교의 교주 마호멧의 탄생지-역자 주)나 로마 같은 곳을 우리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일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기도 하다.
그는 창조주일 뿐 아니라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였다. 이제 그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끝났다! 이제는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사신다.
육신 안에, 아니면 영 안에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당신이 아는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계시는가, 아니면 서신(書信)에 있는 분인가? 물론 당신이 사복음서에 있는 그리스도를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사복음서에 있는 그분을 믿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밖에 안된다.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또 알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세 방면으로 보았다. 첫째로 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고, 둘째로 그는 이 땅에 오셔 사람이 된 하나님이며, 셋째로 그는 성령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 세 방면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세 단계를 구성한다.
워치만 니
[워치만니 전집 제 2집 제 7권, "영 안에 생명이신 그리스도",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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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 주신 대로 워치만 니의 메시지는 「영에 속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가 전한 메시지를 노트 필기한 것을 편집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위 메시지도 동일한 과정을 거쳐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동일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예를들면 고후 3:17) 이러한 동일시의 이유를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 계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비성경적인 것이 아닌 양태론을 배격하는 것이고 본질적인 관점에 대한 설명이며, 성경에 있는 표현이 경륜적인 관점에 대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메시지는 단순한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닌 영적 체험을 전제로 한 우리의 경험에 대해 이끌어 주는 내용이므로 생각 안에서 모든 것을 정리되게 할 때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 조차도 진리의 특성상 양면성이 있는 면이 있고 이것은 우리의 체험 안에서 조화되고 일치되게 될 것입니다.
양태론에 빠져들어가기에 너무나 위험한 해석이다.
워치만 니의 책들은 글을 읽으면 분명하고 정리가 잘 되는데 위트리스 니의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혼란과 미혹된 글들이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