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형제님의 질문에 대한 간략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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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형제님의 질문에 대해서 간략하게 제가 이해한 바를 적어보겠습니다.
그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좀 더 교통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1.워치만니 형제님도 건축에 대한 계시를 보셨는지요?
‘건축’이란 말은 개역성경에는 단 한번 발견됩니다.
‘내가...남의 터 위에는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그외에 대부분은 ‘짓다’ 혹은 ‘세우다’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네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는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건축된다’(혹은 세워진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혹은 인성) 안에 하나님(혹은 신성)이 들어오셔서 연합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건축= 신성과 인성의 연합 혹은 건축=사람 안에서의 신성한 생명의 자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 질문으로 돌아가서 워치만 니 형제님이 ‘연합’ 혹은 ‘생명의 성장’에 대한 계시를 보았는가?
답변은 당연히 ‘그렇습니다’가 되겠지요.
2.교회 건축은 주님이 하시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도 건축한다고 할 수 있는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건축은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건축하십니다.
성경근거는 고전 14:4입니다.
이 역시 개역성경은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덕’이란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건축하나니’가 원문의 바른 의미입니다.
신언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주님의 즉각적인 말씀을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 건축됩니다.
이 일에 믿는 이들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3.워치만니 전집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주님은 교회 문밖에 계심)의 모습이 마지막 교회들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건축하고 새길 실행해서 빌라델비아로 회복할 수 있는지?
원칙적으로 마지막 교회들의 모습은 라오디게아 교회만 아니라, 두아디라 교회(변절한 교회), 사데 교회(종교 개혁의 교회), 빌다델피아 교회(회복된 교회)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타락한 교회) 이렇게 네 유형이 거의 끝까지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과 건축 혹은 새길 실행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건축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연합을 특정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 체험하고 또 확대하도록 하는 것이 새길 실행이니까요.
4.심판이 임박하여 미지근함을 떠나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생명의 체험도 없는 미지근한 이들과 계속 건축이라는 구호?와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지? 주님은 교회 밖으로 나가셨는데...
이기는 자는 교회 안에서 건축의 실재를 경험하고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미지근한 자들이나 생명의 체험이 없는 자들은 그처럼 깨어 있는 소수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가야할 목표를 거듭 상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기는 자였지만 홀로 떠나 주님께 가기를 바라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그렇지 못한 자들 앞에 본을 보이고, 생명으로 목양함으로써 주님의 몸이 건축되도록 자신의 분깃과 위임에 충실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본입니다.
5.성막의 예표에 의거 교회를 건축한다고 했는데..이미 건축된 일곱교회에 대하여 일곱편지를 통해 책망과 칭찬의 평가가 정확히 내려지고 우리의 행동지침 또한 명확한 계시로 주어 졌는데, 아직도 구약의 예표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건축 건축... 시간을 허비하는지?
구약을 포함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 2-3장의 언급이 귀하지만, 교회 건축의 자세한 식양과 내용에 대한 예표는 출애굽기 등 구약에 있는 말씀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을 다루더라도 상당 부분이 신약의 말씀과 연계되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개요에서 언급된 수 많은 말씀들을 읽고 또 먹는다면 성경 66권이 다 우리의 영의 양식이요 생명과 빛을 공급하는 원천임을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6.일곱편지에 대한 니형제님의 메세지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실행과 완전 반대라고 할 정도로 노선이 다른데 선견자와 계승자가 맞는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요?
워치만 니 형제님이 보신 것은 1)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성과 우주성이시고, 2) 그분의 확대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3) 이 그리스도의 몸의 최종 완성이 새 예루살렘이고, 4) 그외의 것들은 다 지엽적인 것이다. 4) 이 계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지방 입장이 필요하고, 성직자 제도를 버리고 모든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서 니 형제님은 계시는 보셨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리 형제님 때에 와서 더 많이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회복에 온지 3년 되었는데 최근 40일 정도 취침시간외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여 추구한 결과 나온 생명의 느낌인데 너무 잘 못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해서 문의 드립니다.
그동안 추구하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한 가지 권면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아무리 추구를 많이 해도 생명의 분량만큼만 참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실재는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추구만 많이 한다고 얻어지지는 않습니다.
빛이 비취는 만큼 우리의 존재와 옛 사고 방식, 옛 생활 방식에서 십자가로 제해지는 체험이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시면서 말씀과 사역의 메시지를 지금처럼 꾸준히 추구하시고, 안의 그 영의 음성도 귀를 기울이시고, 지금처럼 몸 안의 지체들과 교통하고 점검 받으시면서 은혜 안에서 자라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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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라이프 스타디의 일곱편지에서 리형제님은 지금의 라오디게아 교회로 형제회를 지칭하고 회복은 빌라델비아 교회로 확신을 가지시는데, 니형제님은 전집에서 그당시 회복의 실행이 없을때 임에도 오늘의 회복의 모습을 발람의 교훈,니골라당의 가르침,이세벨의 가르침,사탄의 깊은 것들등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아도 지금 회복의 실행이 우리가 비평하는 교파의 모습과 완전 일치한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진리와 예표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졌다는 우월감. 구약과 신약의 체계적인 짝맞추기등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답변)스티븐 형제님과 이런 교제를 할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 개인은 다른 지체들과의 건축이 필요한 '한 규빗 반'의 널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통이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 목양하는 차원의 대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대화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같습니다. 하나는 '사실' 관계가 정확한가? 둘째는 하는 말이 과연 진리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답변을 드리는 것은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한 것임으로 다소 사무적으로 느껴지시더라도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네요.
리 형제님은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 "빌라델피아 교회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19세기 초 영국에서 주님께 세우심을 받은 형제들에 의해 이루어진 합당한 교회 생활을 예시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보급판 요한 계시록 라이프스터디1, 191쪽). 이어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회복된 교회들(회중들)중 일부가 타락되었다....라오디게아 교회는 타락한 회복된 교회의 상징임에 틀림없다"라고 적고 있습니다(208쪽).
또한 니형제님 전집 제 1집 16권 <계시록 연구>는 제 2장에서만 일곱 교회를 다루고 있는데(16-32쪽), 16-17쪽에서 "일곱 교회는 교회의 일곱 시대를 대표한다" 고 하면서도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라고 했고, "사도 후의 교회의 상태 역시 나머지 여섯 교회의 상태를 겸하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위 형제님의 언급을 살펴 보면, 리 형제님은 빌라델피아 교회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주의 회복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빌라델피아 교회의 상태를 얻고 또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빌라델피아 교회 안에도 '이기는 자'가 있는데 이들은 참으로 그 교회의 상태의 실재를 사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 숫자가 그렇게 많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우리가 어느 특정 교회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다른 여섯 교회를 말하는 성경 구절들은 우리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용도로만 써먹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사역의 메시지들 중에서 얼마나 많이 에베소 교회의 '첫 사랑을 잃은 것'을 가지고 우리를 깨우고 있는지 형제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오늘날 믿는 우리들에게 공급이 되고 또 경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기계적으로 이 말씀은 누구에게 저 말씀은 누구에게..이렇게 적용하기 보다는 모든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 안에서 생명과 빛을 얻는 방식으로 영을 사용하여 읽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2.제사장체계라는 표현이 회복역에 있고 우리가 이 체계를 이루어 봉사하고 섬기고 건축해야 된다고 하는데,흠이 있고 허물이 있어 폐하고 새언약의 중보이신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 계시는데 또 제사장 무리가 있어야 하는지..개인과 하나님사이에 주님외에 어떤 인도자,권위도 체계도 없어야 하는데 제사장체계에 사례받는 전시간자/책임형제가 성경에 부합하는지요? 니형제님은 사례받고 봉사할려면 직업을 바꾸고 성실한 밥한그릇을 구하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답변) 세 가지 요점이 들어 있는 단락이군요.
1) 신약시대에 또 제사장 무리가 있어야 하는가? 답변: 회복역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벧전2:5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지요. "여러분 자신도...거룩한 제사장 체계가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거듭난 모든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아닙니다. 단지 이들은 구약의 제사장과 달리, "영적인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영적인 희생 제물은 1)구약의 모든 제물들의 실재이신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 2) 우리의 몸(롬12:1), 3) 죄인들(롬15:16), 4) 우리의 찬양(히13:15-16), 5)빌4:18이 말하는 '에바브라디도 편에 전달된 것'(헌물?)을 가리킵니다.
2)개인과 주님 외에 어떤 중간의 권위나 체계가 없어야 한다. 답변: 한 면으로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각자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행정을 위해서 사도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명령합니다(행14:23, 딛1:5). 예를 들어 마18장에서 죄 지은 형제가 말을 안 들으면 최종적으로 교회에게 말하라(17절)고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깉이 여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을 포함한 많은 지방 교회의 행정적인 일들은 그런 것을 처리하도록 위임된 사람들이 성령과 다른 형제들과의 긴밀한 교통가운데 처리하는 것이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로 초대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도들은 이런 일의 처리를 위하여 일부를 택하여 맡긴 예도 있지요(행6:1-6).
장로의 자격이나 임명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장로치회>라는 책을 한번 시간나실 때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네요.
3) 전시간자가 사례를 받는 것이 합당한가? 답변: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즉 니 형제님은 그분의 믿음을 따라 평생을 자비량으로 주님을 섬겼지만, 모든 주의 종들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니 형제님의 경우에도 자신의 동역자들이 지원이 보잘것이 없어서 자주 굶고, 다수가 폐결핵에 걸려 죽고,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상황이 있을 때
본인이 동생이 하던 제약사업을 한 동안 맡아 하여 그들을 지원한 사례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곡식을 밟아 떠는 동안에 소에게 주둥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고전9:9).
3.새언약에서 십일조는 개념도 없고 중국/대만의 회복에서도 실행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감사헌금까지 실행하고 있습니다. 니형제님은 헌신되지 않은 사람은 헌금을 해서도 안된다고 하시는데 바울처럼 직접 일하시며 실행하신 니형제님의 권면이 합당해 보입니다.
(답변)원래 십일조는 구약의 개념입니다. 신약에서는 어찌보면 십일조 그 이상의 것이지요. 따라서 편의상 소득의 십분지 일을 주님의 필요를 위해 드릴 수 있다고 권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요즘 장로단 일부에서 시행하듯이 그 교단 성도가 되는 조건이 되는 식으로 실행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물론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십일조를 권하더라도
그렇게 강압적으로 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도 역시 어떤 특정인의 본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강요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닌 것같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도 본인이 자비량으로 일하여 생계를 유지한 경우도 있지만,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 편에 물질을 보내준 것에 대해 "달콤한 향기요..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빌4:18)라고 했습니다.
4.지방적 실행에 있어서도 관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시군단위로 하는 지역경계가 적합하다고 하는데 이집 저집에서 매일 떡을 떼기 위해 읍면동 단위가 걸어서 1시간내 도달 거리라고 보여지며 성경에서의 실행들도 그렇습니다.지금은 교단에서 나와 지방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마치 선민이 된듯한 자부심들을 가지고 집회소로 모이는데 이집 저집으로 가야 겠습니다.(관할을 용이? 어떤 의도가 개입할 여지가 있음)
(답변)성경에서 믿는 이들이 모이는 방식은 저의 이해한 바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집 저 집에서 모이는 것이 주된 실행이 되고, 집회소에서 모이는 것은 보조적인 것이 되는 것이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곳은 주차 사정이나 소음 등으로 가정에서 모이기가 사실상 곤란한 경우도 있을 것인데, 그 때는 집회소에 오되 여러 방으로 나누어 모일 수는 있겠지요.
5.대만의 신기빌딩,한국의 훈련센타등은 세상의 물질과 연합하여 복음을 전할려고 하는 것으로 니 형제님은 건물 짓는 것을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답변)니 형제님의 경우에도 훈련 등 특별한 필요를 위하여 어떤 건물을 소유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형제님은 사업할 때 벌어놓은 금괴를 중국 본토 고령산에 있는 훈련 센타를 구입할 때 아낌없이 내어 놓은 사례가 있습니다.
6.하나님의 공의의 충족을 위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인수 증가를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라오디게아의 부요를 위해 인수증가를 추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대만은 좁은문이 아니라 문이 너무 넓고 커져 버렸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극소수이며 외롭고 고난인데 겨자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교회 문밖에 계셔서 라오디게아 교회안에 계시지도 않는데 인수가 수백만이 된들 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요.
(답변)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숫자가 증가되기를 추구하는 문제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이 인수 증가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영의 역사는 없고 인위적인 계획과 활동만 난무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인도가 아닐 수 있지만, 주님의 역사가 있고 없고를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는 것도 우리의 분량을 넘은 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때 실패를 통해서도 무엇을 배우게 하시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복음 전파와 좁은 문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7.구약의 족보와 예표를 보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요. 주님의 최종적인 명령은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극소수 이기는자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함이 좋아 보입니다. 니형제님도 구약을 많이 추구하면 구약은 믿음 없이도 수용하고 실행할 수 있어서 위험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회복이 구약의 족보를 쫓다가 이미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실행의 나타난 결과들을 볼때 말입니다.
(답변)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관찰과 성경의 예를 볼 때 이기는 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중간에 지치게 되거나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어떤 표준에 이르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런 길보다는 단지 주님의 몸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남아 있으면서 주님을 최대한 누려서 하나되고 약하고 못 누리는 다른 지체들에게 생명을 흘려보냄으로 몸의 건축을
관심할 때 마침내 이기는 자로 발견되는 것이지요.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만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남아 몸을 건축하고 다른 지체들을 목양하는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 그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구약 예를 들어 출애굽기를 다루지만 그렇다고 꼭 구약 말씀에만 국한된 경우는 한번도 없지요. 대신에 구약의 예표의 실재에 해당되는 신약의 말씀이 언급되고 또 그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하는 길이 제시됩니다. 제가 볼 때 스티븐 형제님은 아침부흥 책자 개요에 인용된 신약의 말씀들을 일일이 찾아서 그 본문과 각주를 읽어보시는 것도
위와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는데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8.많은 지체들이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누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출애굽기 중요합니다. 이것 붙들고 추구하면 일년 훅 지나갑니다. 생명 없는 지식이 쌓여 감에도 빛을 보았다고 쾌감인지 감동인지 좋아합니다.생활은 점점 하락되어 가는데 말입니다.십자가의 체험도 없이 지식만 쌓아 거짓 증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정말 애통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답변)출애굽기는 구약에 속한 책이지만, 그 안에 신약의 계시와 빛이 가득합니다. 구약이 말하는 성막의 실재는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상태는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워치만 니 형제님 생존시에도 가장 큰 교회였던 상해 교회의 상태는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기도집회때 그런 자신이 느낀 소극적인 방면의 기도를 하자, 니 형제님은 즉시 그 기도를 적극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기도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혹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교회의 상태가 다 양면이 있어왔습니다.
이처럼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이 문제가 없는 교회를 만들거나 그러한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하락의 징후가 있다면 그것을 내가 누린 부활생명으로 떠 받치므로 금등잔대의 간증이 유지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장로훈련 메시지 10권 제 5과를 추구했는데, 그 안에 성경에 언급된 교회들 안의 51가지 소극적인 사례들을 열거하여 평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위 책을 스티븐 형제님이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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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장년이 80명임에도 이런 교통을 할 지체가 1명도 없습니다. 교만하다 하실지 모르오나 생명과 지식은 교통이 불가함을 이번에 체험하고 분별하였습니다.
(답변)특정 지방교회의 상태는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늘 가변적입니다.
만일 교통할 사람이 없다면 머리이신 그분께 그런 사람을 붙여달라고 기도하시면 몸 안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서 그 필요가 충족될 길을 여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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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경대로 실행하는 모임에서 2년을 생활하다 회복으로 왔습니다.처음부터 옛적 다니던 교파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진리의 해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3년을 있었는데 갈수록 진리가 아니라 지식만 쌓아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복에서 제사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빌라델비아의 성질을 가진 이기는 자가 몇몇 사람이라도 지켜지길 바랍니다. 저 또한 이 몇사람에 포함되기 위해 주님께서 가신길을 노예되어 성경대로 실행하며 신실히 따라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아멘."
(답변)아멘. 스티븐 형제님. 주의 회복의 길을 가기로 하신 결정은 잘 하신 것입니다.
이 길은 특정인이나 어떤 상태를 보고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보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성경이 제시한 바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직 우리가 본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안에서 이뤄가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형제님은 주의 회복 안에 오셔서 어떤 이상(혹은 계시)를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위 열거하신 것들은 대부분 어떤 실행이나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우리가 더 추구하고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 그분의 인격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빛비췸과 긍휼히 여기심이 필요하며, 책을 많이 읽거나 , 세월이 흐른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스티븐 형제님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사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을 누리게 하시고, 참되게 몸을 건축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신언의 말을 해 낼수 있는 분량있고 건축될 수 있는 형제님으로 얻어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상 두서 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1.라이프 스타디의 일곱편지에서 리형제님은 지금의 라오디게아 교회로 형제회를 지칭하고 회복은 빌라델비아 교회로 확신을 가지시는데, 니형제님은 전집에서 그당시 회복의 실행이 없을때 임에도 오늘의 회복의 모습을 발람의 교훈,니골라당의 가르침,이세벨의 가르침,사탄의 깊은 것들등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아도 지금 회복의 실행이 우리가 비평하는 교파의 모습과 완전 일치한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진리와 예표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졌다는 우월감. 구약과 신약의 체계적인 짝맞추기등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2.제사장체계라는 표현이 회복역에 있고 우리가 이 체계를 이루어 봉사하고 섬기고 건축해야 된다고 하는데,흠이 있고 허물이 있어 폐하고 새언약의 중보이신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 계시는데 또 제사장 무리가 있어야 하는지..개인과 하나님사이에 주님외에 어떤 인도자,권위도 체계도 없어야 하는데 제사장체계에 사례받는 전시간자/책임형제가 성경에 부합하는지요? 니형제님은 사례받고 봉사할려면 직업을 바꾸고 성실한 밥한그릇을 구하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3.새언약에서 십일조는 개념도 없고 중국/대만의 회복에서도 실행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아직도 감사헌금까지 실행하고 있습니다. 니형제님은 헌신되지 않은 사람은 헌금을 해서도 안된다고 하시는데 바울처럼 직접 일하시며 실행하신 니형제님의 권면이 합당해 보입니다.
4.지방적 실행에 있어서도 관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시군단위로 하는 지역경계가 적합하다고 하는데 이집 저집에서 매일 떡을 떼기 위해 읍면동 단위가 걸어서 1시간내 도달 거리라고 보여지며 성경에서의 실행들도 그렇습니다.지금은 교단에서 나와 지방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마치 선민이 된듯한 자부심들을 가지고 집회소로 모이는데 이집 저집으로 가야 겠습니다.(관할을 용이? 어떤 의도가 개입할 여지가 있음)
5.대만의 신기빌딩,한국의 훈련센타등은 세상의 물질과 연합하여 복음을 전할려고 하는 것으로 니 형제님은 건물 짓는 것을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6.하나님의 공의의 충족을 위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인수 증가를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라오디게아의 부요를 위해 인수증가를 추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대만은 좁은문이 아니라 문이 너무 넓고 커져 버렸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극소수이며 외롭고 고난인데 겨자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교회 문밖에 계셔서 라오디게아 교회안에 계시지도 않는데 인수가 수백만이 된들 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요.
7.구약의 족보와 예표를 보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요. 주님의 최종적인 명령은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극소수 이기는자가 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함이 좋아 보입니다. 니형제님도 구약을 많이 추구하면 구약은 믿음 없이도 수용하고 실행할 수 있어서 위험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회복이 구약의 족보를 쫓다가 이미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실행의 나타난 결과들을 볼때 말입니다.
8.많은 지체들이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누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출애굽기 중요합니다. 이것 붙들고 추구하면 일년 훅 지나갑니다. 생명 없는 지식이 쌓여 감에도 빛을 보았다고 쾌감인지 감동인지 좋아합니다.생활은 점점 하락되어 가는데 말입니다.십자가의 체험도 없이 지식만 쌓아 거짓 증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정말 애통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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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장년이 80명임에도 이런 교통을 할 지체가 1명도 없습니다. 교만하다 하실지 모르오나 생명과 지식은 교통이 불가함을 이번에 체험하고 분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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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경대로 실행하는 모임에서 2년을 생활하다 회복으로 왔습니다.처음부터 옛적 다니던 교파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진리의 해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3년을 있었는데 갈수록 진리가 아니라 지식만 쌓아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복에서 제사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빌라델비아의 성질을 가진 이기는 자가 몇몇 사람이라도 지켜지길 바랍니다. 저 또한 이 몇사람에 포함되기 위해 주님께서 가신길을 노예되어 성경대로 실행하며 신실히 따라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