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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8)

 

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8)

 

 

이미 7편의 글로 반박글을 마감했지만 이인규님의 비판글 내용이 좀 더 남아 있고 하는 김에 마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번외편(?)'의 의미로 반박글을 마저 적어 보았다. 기회가 된다면 이인규님의 다른 비판글도 반박글을 적어 볼까는 현재 생각중인데, 주님의 인도하심과 상황을 봐서^^

 

 

[이인규님] 3) 지방교회의 신일합일

 

지방교회의 신일합일의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한 수준을 드러낸다.

 

- 우리가 또한 삼일적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위트니스 리, 새 예루살렘, 396쪽)

 

---> 아마도 이인규님은 회심 전의 사울과 같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이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귀함을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는 아마 '교리적'으로만 알 뿐이고 실제적인 '체험'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체험은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당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한 죄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온 세상이 반대하는 예수...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행 9:21).

 

이인규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가치와 영광스러움을 알고 있는가? 온 세상이 반대해도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더 크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위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핍박을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핍박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행 9:14).

 

그리고 이인규님이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와 같은 언급을 오해할 수 있는데 삼위일체를 바울과 같이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않고 신학책에서 사변적으로 추구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인규님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 세 위격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들이 오셨을 때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시며(사 9:6) 그분이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고전 15:45) 또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접촉할 때 '주의 영'이 되신다(고후 3:17).

 

그러므로 위 언급은 우리의 체험에서 너무나 성경적이다. 다만 교리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은 결코 '주의 영'이 되지 못하시는 것이다. (참고 http://www.localchurch.kr/35007)

 

 

[이인규님] -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준비가 되셨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도착하신다. 우리의 영은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이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 주님은 이미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셨고(행 2:17),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된다(행 2:21). 이것은 성경 말씀이다. 그리고 요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순간이고(욜 2:28-32) 베드로가 한 오순절 날의 첫번째 메시지이다. 이인규님은 이것이 '유치한 것'으로 보이는가?

 

 

[이인규님] -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 설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 '오 주 예수'를 세 번만 말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불신자가 해야 할 것은 입을 열고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믿을 의도가 없다 할 지라도 그들은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의도가 있든 없든, 그들이 창문을 여는 한 공기는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Lee Stream magazine, 교회와 신앙에서 발췌)

 

---> 출처를 정확하게 조사해서 알려 주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다. 어떤 사람의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앞 뒤 문장들을 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인규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비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좀 우려스럽다).

 

다만 '짐작'만으로 답변을 드리면, 우리는 복음 전파에 우리의 관념이 있을 수 있다. 복음 전파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꼭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영리'나 '다리 예화' 혹은 지방교회 측의 '인생의 비밀' 같이 짧은 메시지만으로도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 '설교'는 논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 해도 충분하다.

 

지방교회 측의 복음 전파의 특징은 이러한 짧은 메시지를 전한 후에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롬 10:8-13에 언급된 사도 바울의 권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인규님] - 교회가 그분의 이 한 영을 마시며 그 분과 한 영이 됨: 우리가 "오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 성령을 마셔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부르는 것은 주님이지만 받는 것은 성령이다. 예수는 그 분의 이름이요, 성령은 그분의 인격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오게 된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이 온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9쪽)

 

--->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출 16:1-36) 깨어진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셨다(출 17:1-7). 이것은 하나의 예표로 교회인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고(요 6:35)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셔야 함을 의미한다(요 7:37-39). 그럴 때 우리의 조성이 변화되어 우리가 그분을 더 닮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고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시는 많은 길 중에 '한가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외에도 찬송을 통해,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고 복음전파와 양육을 통해, 그리고 소그룹 생활과 다양한 집회들을 통해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누리고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시고 있다.

 

우리는 장래 영원 안에서 여전히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누리고 생수의 강인 그 영을 마실 것이다(계 22:1-2).

 

이인규님은 어찌하든지 지방교회를 사이비 이단처럼 보이게 하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왜곡하고 있지만 이 실행은 성경에 많은 근거와 본이 있으며(http://www.localchurch.kr/2607)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과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이인규님은 어쩌면 주님과의 많은 대화 없이 신학책만을 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인규님] -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생명을 분배하는 영이 되심은 그 분이 사람에게 오시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제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 분을 믿는 것이다. 그 분을 믿는 길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분은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는 그 분 안에 들어 간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분을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인 우리의 영 안에 모셔온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오순절 날의 장면은 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첫번째 말씀을 전한 순간이었다. 그 때 베드로는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리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선포했다(행 2:17, 21, 회복역).

 

이인규님은 위 인용문이 이 선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방교회 측의 다음 글을 보라.

 

"죽음과 부활의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할 일이 없다. 다만 입을 열어 한마디 할 때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 아마 당신은 어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게 있어서는 한 번 외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어찌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일이 이렇게 빨리 우리 몸에 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도행전 2장 17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과는 무엇인가? 21절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을 보았는가? 17절과 21절은 서로 연결되고 상통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육체 위에 일하신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것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지도 모르고, 주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이심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분명히 말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성령을 부어 주셨고, 성령은 벌써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다만 부르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워치만 니, 하나님의 복음, 191-192쪽)

 

 

[이인규님] 그들은 "오 주여"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양태론의 마지막 단계인 생명의 영이며 부활의 영인 삼일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실재인 그 영이 그들에게 들어오고,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성숙하게 자라나면 그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소위 신일합일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주문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소설이 완성된다. 엘리 제사장이 영적인 눈이 멀어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술에 취한 것으로 본 것처럼(삼상 1:14), 오늘날 거대 교단들의 핍박으로 인해 주님 앞에 마음을 토로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지방교회 측 성도들의 실행이 이인규님에게는 한낱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겉으로 내색을 안 해서 그런가?).

 

만일 이인규님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예레미야라는 한 청년의 체험을 소개해 주고 싶다. 예레미야는 그의 시대 때 아주 어려움에 처했었고 심판받은 그의 백성들을 향해 아픈 마음이 있었다.

 

"주님께서 저희를 민족들 가운데 쓰레기와 배설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희의 모든 원수들은 저희를 향해 입을 벌렸습니다. 저희 위에는 두려움과 구덩이, 황폐와 멸망이 임하였습니다. 제 눈에서는 제 백성의 딸의 멸망으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릅니다. 제 눈물은 그치지 아니하고 쉼 없이 쏟아지니 여호와께서 하늘들에서 내려다보시고 살펴보실 때까지 그러합니다.

 

제 눈은 제 성의 모든 딸들 때문에 제 혼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제게 까닭 없이 원수 된 이들 저를 한 마리 새인 양 사냥하였습니다. 제 생명을 구덩이에서 끝내 버리려고 그들은 제게 돌을 던졌습니다. 제 머리 위로 물이 넘쳤기에 저는 '이제 끊어지고 마는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애 3:45-54, 회복역)

 

만일 우리에게 예레미야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이인규님은 무엇을 하겠는가? 여전히 웨인 그루뎀의 신학책을 추구하겠는가? 혹은 '예레미야 이단 연구소' 홈페이지에 반박글을 올리겠는가? 아니면 간절히 기도를 하겠는가? 심지어 애 3:44은 "주님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두르시어 기도가 도달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바로, "오, 여호와님! 저는 아주 깊은 구덩이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애 3:55, 회복역)."라고 말한다. 때로는 기도도 통하는 것 같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이것이 예레미야라는 한 청년이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폄하하는 이 시대에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인규님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그만 핍박하고(행 9:14) 바울과 같이 누군가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추구하십시오."(딤후 2:22, 회복역)라고 권면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인규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에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면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신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주장일 따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 이인규님의 말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의 '교리'만을 알 뿐 체험은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은혜롭게도(?) 이인규님이 어려움을 당하게 하심으로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깊은 구덩이 안으로' 인도하고 계신다(이인규님이 이단을 정죄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자신이 이단이 된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곳에서는 오직 한가지만이 통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애 3:55).

 

그리고 그럴 때 위 성경 구절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회심 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침례를 받을 때'(행 22:16) 경험했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실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 회복역)

 

 

[이인규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다. 부활, 천국, 거듭남, 구원등은 모두 기독교와 다르며, 그들이 말하는 용어는 결국 신인합일을 뜻한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새 창조 안의 부활한 나를 말한다. 이 부활한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우리의 인성과 연합시키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부활한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3쪽)

 

---> 충분히 설명 드렸지만 좀 더 언급하면, 롬 6:4-5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장사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 그분과 연결되어 자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회복역).

 

여기서 5절의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은 4절의 '침례'를 말하고, 5절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도'는 4절의 '생명의 새로움으로'를 의미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장래 우리가 실제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하고 침례 받은 후에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롬 6:6-23에 나오는 것이다.

 

이인규님은 이러한 부활을 들어 보았는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다."고 그랬는데 이인규님이 그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성경을 잘 알기에 성경의 용례도 모르고 감히 단언하여 말하는가?

 

이인규님은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그랬는데 정작 이인규님 개인이 기독교의 용어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인규님] - 그와 같이 완결된 영을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완결된 영의 부활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부활은 어떤 능력이나 사물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분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더욱이 부활의 실제는 삼일하나님의 최종완결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론 -삼일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부활은 하나임-을 갖는다.

 

---> 우리가 침체되어 있고 사망 가운데 있을 때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면 주님을 접촉하게 되고 주님은 부활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지방교회 측에서 말한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부활이신 주님, 부활의 실재인 생명 주는 영을 접촉했기 때문이다(요 11:25, 마 22:32). 물론 우리는 '실제적인 부활'도 믿는다.

 

 

[이인규님]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의 왕국, 329쪽)

 

---> 본인이 인용한 내용이 본인의 주장을 뒤엎는 부분이 있는 것도 모른 채 지방교회 측의 재림이 기독교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대방과 진리를 논해야 된다는 것이 주님 앞에 안타까움이다.

 

 

[이인규님]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심으셨고,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익고 성숙할 때, 그것은 그분의 오심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닐 것이다.(왕국, 330쪽)

 

지방교회는 예수의 재림도 다르고, 예수의 부활도 다르며, 사후의 천국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오직 신인합일이며, 지방교회로 들어오는 단체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며 오해라고 조작을 하고 있다.

 

---> 깨어 있는 것은(마 24:42)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며(마 25:4)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되는 것이다(막 4:26-29). 그럴 때 주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도둑처럼 닥치지 못할 것이다(살전 5:4).

 

이인규님은 본인이 모르고 체험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틀린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이런 이인규님의 관점이 맞기 위해서는 그는 어느 정도 전지(全知)해야 하며 성경에 기록된 것 중 그가 하지 못한 체험은 없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어쩌면 그는 지방교회 측이 신화(Deification)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이인규님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영광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인규님] - 죽으면 천당(국)간다는 말은 이교도의 가르침입니다. 사탄이 한 최대의 거짓말 중 하나는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하늘 어디엔가 있는 집)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교도적인 거짓 사상이 버젓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믿음 생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을 변질시킴으로 참된 성도들 생각 속에서 말끔히 씻겨져야 할 누룩인 것입니다.(지방교회 게시판의 글)

 

-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죽으면 주 예수를 믿는 한, 그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들이 일단 죽으면 그들은 천당에 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여러분이 왕국의 비밀을 안다면 여기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왕국, 315쪽)

 

---> 앞에서 충분히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죽을 경우 혼과 영이 육체와 분리가 되고 '혼과 영'만 있는 채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벌거벗은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고후 5:3), 우리가 부활해서 하늘에 속한 몸을 입어야 비로소 '천국'에 (물론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거쳐(고후 5:10))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사후 천국'은 비성경적인 교리가 되는 것이고, '사후 낙원'과 '부활 후 천국(천년왕국)'이 성경적인 교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너무나 상식적인 것인데, 이인규님은 일일이 설명을 해 줘야 하니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다.

 

 

[이인규님] -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의 나라요, 하나의 민족이요, 하나의 단체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32쪽)

 

- 한 단체를 얻고자 하신다. 삼일하나님 그 분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 안으로 역사하게 하시어 그들을 한 무리가 되게 하고, 단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는 곧 성도 개인의 신령함이 아니라 온 교회들이 하나님께 얻은 바 되고 거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33쪽)

 

---> 개인을 얻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결국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 그분의 집, 그분의 거처를 원하신다. 그분은 몸 전체를 원하시지, '발'이나 '팔'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는가? 내게는 손과 발과 각 지체가 다 귀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합쳐진 '몸'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단체를 얻고자 하신다"는 것이다(우리가 어릴 때에는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지만 성숙하게 되면 '주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헤아리게 된다. 우리는 성숙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주님의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전 2:16)).

 

가령 그분은 성전을 원하시지, 돌이나 금으로 된 재료 한두 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돌'이나 '금'은 자신의 구원받은 것을 기뻐할지는 몰라도 주님은 '성전'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이러한 지방교회 측의 관점을 '단체구원'이라며 조롱하고 있다.

 

 

[이인규님] - 그러므로 천국의 실제와 외형은 교회와 함께 시작해서 교회와 함께 나아갔다. 천국의 실제와 외형은 교회와 함께 하며 교회에 달려 있다. 한편으로 천국의 실제가 교회 안에 감취어져 있고, 또 한편으로는 천국의 외형이 교회의 외양과 함께 한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교회 시대를 끝내실 때 천국의 실제와 외형도 끝날 것이다. 그 때 주 예수님은 천국의 외형, 즉 소위 기독교계를 불태우실 것이다. 동시에 천국의 실제는 천국의 나타남이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667쪽)

 

지방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은 비록 기독교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개념 자체가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 기독교에 수많은 분파된 이단들을 양산한 곳이다.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옹호하여 주는 목사들이 있다는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 우리가 어떠한 명칭을 붙이든 주님은 "내 하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식물마다 모두 뿌리째 뽑힐 것입니다"(마 15:13, 회복역)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성경에 있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라면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 3:10은 "각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라고 권하고 있다.

 

심지어 주님의 일꾼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건축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하고 있다(고전 3:12). 지금은 모든 것이 비밀 가운데 있어서 누가 건축한 것이 적합한지 알 수 없지만 "그날에 각 사람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 일이 불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전 3:13).

 

심지어 믿는 이들이 한 일도 이러하거늘 성경에 없고 이교도적인 실행으로 말미암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일이 어떠하든 주님을 영접한 믿는 이들은 "자신이 한 일은 불타 버릴 지라도" "그 사람 자신은 구원을 얻되"에 해당되게 된다(고전 3:15).

 

이것이 우리가 조직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보는 이유이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믿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위해 우리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듯이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   *   *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진리를 밝히려는 목적'으로 이인규님이 쓴 "지방교회의 이단연구보고서"에 대해 변증글을 작성해 보았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라고 기도했으며, 사도 바울은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라고 고백했다.

 

무엇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다운 일일까? 우리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옳다면 우리는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CRI의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의 고백 속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월터 마틴과 파산티노 부부는 하나님-사람들이 진술한 지방 교회 측의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범죄 혐의를 밝혀 줄 어떤 것도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비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북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출판물에서 지방 교회들을 다룰 때는 엄격한 신학적 접근을 취했다.) 그러나 SCP의 신학적인 결론이 우리와 유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다른 혐의에 대한 불신은 일단 접어두고 소송 문제에서 그들을 지지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공동의 대의와 동지애를 위해 진실을 억누름으로써, SCP가 지방 교회들에게 지은 죄에 참여했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참된 형제자매들을 거짓되게 이단으로 낙인찍는 죄를 지었다." (http://www.localchurch.kr/20553)

 

"믿음과 실행의 비본질적인 몇몇 문제에 관해 지방 교회들과 우리 사이에 아직도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전에 그들을 ‘정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로 평가했던 것은 우리가 그들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 비록 우리가 여기 서방에서 익숙하게 된 것들과는 다르지만, 이들은 확실히 믿는 이들의 정통 단체이다." (http://www.localchurch.kr/20582)

 

그리고 AIA의 설립자인 그레첸 파산티노 코번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나의 이전 연구(밥과 월터와 엘리옷과 칼과 함께 발전시키고 공유했던 연구)는 틀린 결론을 내릴 정도로 불충분했다. 나의 현재 연구(행크와 엘리옷과 함께 발전시키고 공유한 연구)는 이전 것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하며, 나의 이전 결론을 뒤집을 정도로 충분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개 서한에 서명했든지, 얼마나 여러 번 부적절한 출처가 동일하게 인용되었는지 간에, 이 저널의 특집 기사가 뒷받침하는 결론이 진리의 승부에 있어서 더 유력하다. 지방 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인 항목들을 믿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대적하기보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다른 이단 연구자들이 우리가 한 만큼 심도 있는 연구에 재착수하지 않을 것이라면 자신들이 한 정죄를 철회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형제를 잘못 고발하거나 이단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기로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 무슨 영적인 권리가 있어 이 문제에 대한 재고를 거절할 것인가?" (http://www.localchurch.kr/21535)

 

우리는 독자들이 지금까지의 지방교회 측의 변증과 이인규님의 글의 무게를 달아 볼 것을 요청드린다. 이인규님의 주장이 옳은가? 아니면 CRI의 엘리옷 밀러와 AIA의 그레첸 파산티노 코번과 같은 분들과 지방교회 측의 변증이 옳은가? 하나님은 우리의 영들의 무게를 달아 보시는 분이다(잠 16:2).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원한다.

 

끝으로 '보름스 의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한 고백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작은 성도

 

 

덧붙여: 우리가 성경 해석에 있어 근본주의 노선에서 철저함을 추구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으로 느껴지는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철저한 성경 해석 자체에 있고 이러한 태도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엄격'하고 그래서 우리도 힘들 때가 많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정말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배타적이지 않게 되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려지게 된다(마 5:13, 눅 14:34-35). 그리고 부끄럽지만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도 조롱받는 믿는 이들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비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맛'을 회복할 때 비판받는 것이 아닌 믿는 이로서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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