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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를 세 사람의 유비로 설명하는 문제


제가 조금 있다가 또 나가 봐야 해서 이런 대화에 충실히 집중하기가 쉽지 않네요.

저의 현재 입장을  네 가지로 간략하게 요약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OO님과 홀OOO님께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바실이 세 사람의 비유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식의 뉘앙스를 제가 드린 것은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수년 전에 김석환 교수님의 책을 몇번 읽으면서 토론에 인용도 하고

했으나 최근에는 다시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홀OOO님이 227쪽을 언급하시길래 그곳 앞 뒤 한두 페이지를 보니 바실이 아니라

닛사의 그레고리의 견해를 말하는 것이길래 바실과 무관하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 점 저의 불찰이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2. 삼위를 세 사람의 유비로 설명하는 문제


물론 어떤 제한과 조건을 전제하면서 바실이 또 닛사가 세 사람의 유비를 사용했고 그 동기를

이해합니다. 즉 '휘포스타시스' 와 '우시아'의 구별도 모호하던 시절에 바실이 위격개념을

도출해 내는 과정에서 '제한적인 조건아래' 세 사람의 예를 든 것은 사실이고 또 그 취지와

동기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를 세 사람들로 설명하는 유비는 그 시절은 물론이고, 그후에도 어거스틴을

포함한 대다수의 성경교사들에 의해 권장되지 않는 비유였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9쪽)


그럴뿐 아니라 김석환 교수님 책에도 소개된 것처럼, 바실의 '세 사람식 삼위' 설명은 교회역사가인

필립 샤프와 김석환 교수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삼신론으로 기울기 매우 쉬운 예시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이 아버지, 교수, 집사' 라는 식의 예가 양태론을 떠올리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제 개인적으로는 이 유비는 아무런 제한과 전제없이 이 자체만을 사용하는 것은

추천하고 싶지 않은 내용입니다.


3. 바실의 신학에 대한 평가


물론 바실은 캅바도기아 3대 교부로서 정통 신학자입니다. 또한 세 위격과 본성간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점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저자인 김석환 교수의 바실에 대한 평가처럼-342쪽부터

이 부분을 두 분이 한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바실이 페리코레시스를 말했으나 '실체의 단일성'이

아니라 '공동본성' '동일본성'을 강조함으로 "'실체적 단일성'이 비교적 약하게 말해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아타나시우스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특징이었던 '분할불가한 동일실체'

개념이 약화되게 했고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바실의 신학은 늘 삼신론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신학구조입니다.


즉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은 "위격들의 공동체"식 삼위로 보이기 쉬운 신학구조임으로 "본인들도

이것을 피하려고 페리코레시스 원리를 도입했습니다." 그 내용은 <각 위격들이 다른 위격들을

상호 관통하고 서로 포용하며 언제든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각 위격들이 서로 포용한다' '각 위격들이 언제든지 함께 있다' 이런 표현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앞으로 우리가 여기서 더 검토하고 의견을 나누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4. 어떤 완벽한 교리도 성경본문 전체를 체계화 할 수 없습니다.-교리의 한계성


정통 교부들 사이에서도 어떤 부분은 교리정립에 공헌하고 또 어떤 부분은 약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는 어느 특정인 한 두 사람이 정립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받은 밝은 빛들을 종합하고 취합하여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다 인정합니다.


그와 같은 배경에서 우리는 통상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이론>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학과 교리들이 아무리 완벽하고 정통으로 평가받더라도 교리가 성경본문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볼때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토론시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입니다.


즉 바실의 주장, 또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절대적으로 붙들고 그와 모순되거나 대치되는

성경본문 (단 한 구절이라도)을 희생시키는 일은 할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홀OOO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십자가 상에서 성부가 성자을 버리신 것(hast thou

forsaken)(마27:46)이 신학교리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을 존재의 분리로 본다면 그후 언제 어떤 계기로 그 두 위격은 다시 분리 이전의 상태로

되 돌아오셨는지, 아니면 지금도 그 이후 계속 분리로 계시는지,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께서 시간상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존재가 분리되시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이런 부분들은 우리는 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단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존재의 분리가 아니라 경륜적인 분리라고 설명하긴 합니다만..)


또 다른 예는 계시록 5:6입니다. "보좌..어린양께서 서 계시는데..그분께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이 일곱 영이더라"

위 본문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 어린양의 눈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떤 신학 어떤 교리

어떤 신조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성령이 아들하나님의 눈 즉 존재의

일부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바실의 신학이론으로는 더욱 어렵습니다) 참 난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임으로 아멘으로 받고 있는 그대로

(as it is) 믿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상 토론의 연장선상의 글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제 관점에 대한 원칙적인 정리였습니다.

더 대화를 진행해 나가는 가운데 모두가 공감하는 진리를 발견하고 함께 기뻐하는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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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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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6.17. 09:24
세 위격들이 '실체적 단일성'으로 계신다는 위트니스 리의 해석을 양태론이라고 본 최삼경목사님의 판단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고 또 균형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역사상 그렇게 주장한 사람들이 더 많았고 가까이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반틸도 동일한 주장을 했습니다. 같은 잣대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그에겐 반팉도 양태론자일 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심지어 소위 정통교회의 잣대가 되어 온 개혁신학계 내에도 이 부분은 두 진영으로 나뉩니다. 즉 절대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삼경 목사의 악영향과 그 후유증이 다른 참된 믿는 이들을 몸 안의 지체들로 받는데 뿌연 연기로 시야를 가리우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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