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과 경륜: 위트니스 리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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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경륜: 위트니스 리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소개
Michael M. C.Reardon, and Brian Siu KitChiu,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 <신학 저널> 2025년 판(제 76권 1호, 238-269쪽)
영문 출처: https://academic.oup.com/jts/article/76/1/238/8046240
영어 원문 - Essence and Economy: An Introduction to
Witness Lee’s Doctrine of the Trinity
초록
중국과 중국계 미국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저명한 인물인 위트니스 리(1905–1997)는 비서구권의 신학과 교회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저술에 대한 동료 연구가들의 평가가 부족하여 서방 신학자들에게는 덜 알려져 있으며, 여러 경우에 심각하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본 논문은 리(Lee, 이하에서 리)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학문적인 빈틈이 있는 것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우선 그의 삼위일체론의 전반적인 틀을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하되,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 모두에 대해 그가 기술한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할 것이다. 이후 리가 주장한 신성한 ‘위격들’의 영원한 동시 존재와 상호 내주 교리를 초기 교부들과 현대 신학자들의 관점에서 논의한다. 그 다음에,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설명을 그의 저술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다음의 여섯 가지 상호 연관된 관점을 통해 분석한다: (1) 신성한 경륜(oikonomia), (2)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3) '복합되신 영', (4)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 (5)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6) 라틴어 명제인 ‘삼위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분리되지 않는다(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 마지막으로 삼위일체에 대해 리가 전념하여 연구한 바를 종합하고, 현대 삼위일체 사상에 대한 그의 독특한 기여를 논의하며, 그의 사상적인 지형이 정통 니케아 삼위일체 교리와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최종 평가함으로 이 논문을 마무리한다.
키워드: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들; 주님의 회복; 삼위일체; 내재적인 삼위일체; 본질적인 삼위일체; 경륜적인 삼위일체; 성령론; 경륜(oikonomia);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1905–1997)는 중국과 중국계 미국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저명한 인물로, 비서구권의 신학과 교회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서방 신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 세 가지이다. (1) 그의 사역이 학문적인 연구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일반 기독교인들을 훈련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2)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신학과 영향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부족했으며 (3) 그에 대한 공식적인 영문 전기가 출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 학계가 리에 대해 이렇게 아는 바가 부족했지만, 그의 신학은 1960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광풍처럼 몰아친 사이비 저항 운동의 절정기에 평신도 변증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 변증가들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그 중에서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과거에 내렸던 평가를 철회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월터 마틴의 지휘 아래 '반-리'(anti-Lee) 선봉에 섰던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는 2000년대 중반에 6년 동안 리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 연구의 결과, 리의 신학이 정통임을 지지하는 일련의 출판물들이 발간되었으며, 그중에는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Christian Research Journal)이 2009년 '우리가 틀렸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지방 교회” 운동에 대한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낸 특별판이 포함된다. 풀러 신학교 또한 리의 가르침을 검토하고, 18개월 간의 연구 결과를 2006년에 발표했다. 그들의 결론 중 다음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리의 신학이 (1) '명백하게 정통이며’, (2)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며, (3) 전반적인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특별히 '복음주의자들로 분류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오해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성향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런 진술들이 학계에서 의미 있는 연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비서구권에서는 리의 신학이 미친 큰 영향은 오랫동안 인정받아 왔으며, 두 쪽 분량의 선언문이 2014년 미국 의회 기록에 수록되기도 했지만, 이에 대한 동료 연구가들의 평가는 최근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더욱이 그의 저술을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반세기 전의 사이비 대책 변증가들이 펼쳤던 주장은 디지털과 인쇄 매체를 통해 여전히 계속 유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학자인 고든 멜튼(J. Gordon Melton)은 리에 대한 가장 신랄한 공격 중 하나인 더디(Neil Duddy)의 (현재는 절판된) 저서인 <갓-멘>(The God-Men)에 대한 응답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갓-멘>이 위트니스 리를 다루었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나는 <갓-멘>과 거기서 비롯된 지방 교회에 대한 다른 공격들을 무시해버리고, 좀더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다른 기독교 학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검토하고 조사하는 일을 착수할 것을 제안한다.
이어서 멜튼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편 제안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방 교회의 신앙 고백을 모두 수용하자는 것이다. 그 신앙 고백은 본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정통이다…." 본 논문은 리의 신학, 적어도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검토하라는 멜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의 저술을 직접 다루고 '정통 니케아 전통'과 비교 검토하여 이를 수행하고자 한다.
1. 방법론과 목표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의 2009년 보고서는 리의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이전 조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다른 의미에서 [‘경륜’에 대한 이해에 관하여]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구별을 놓친 우리에게도 당연히 동일한 책망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진술은 본 연구에 특별한 적절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리에게 있어, 기독교인이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삼일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삼일 하나님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단어들’은 ‘본질과 경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논문에서 리의 저술을 분석하기 위해 리의 명시적인 접근 방식을 따라서 본질-경륜이라는 틀을 사용한다.
리의 삼위일체론에 관해 과거 연구자들이 제기한 질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그의 관점이 정통 니케아 전통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양태론 혹은 삼신론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가? (2) 그의 진술들, 특히 반사이비 사역들에 의해 오해받았던 진술들이 니케아 전통으로부터, 즉 초기 교부들의 저술 및/또는 현대 저술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3) 리의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현대 삼위일체 논의에 어떤 통찰, 교정, 혹은 기여를 제공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먼저, 우리는 리의 본질/경륜 이분법의 용례를 조사하고 이를 광의로 해석한 니케아 전통과 비교 검토해 본다. 다음으로, 본질적 삼위일체에 대해 리가 기술한 것의 내용을 이루고 또 그 본질을 이루는 개념인 동시 존재(coexistence)와 상호 내재(coinherence)의 교리에 대해 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초기 교부들과 현대 사상가들과 비교 대조하는 가운데 살펴본다. 그 다음으로, 리의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묘사를 그의 저술에 스며들어 있는 여섯 가지 상호 연관된 개념의 렌즈를 통해 분석한다. 끝으로, 리가 삼위일체 교리의 면에서 전념하여 연구한 바를 종합하고 현대 삼위일체 논의에 대한 그의 잠재적 기여 중 하나를 논의한다. 즉, 신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가 단지 지적인 이해에 국한되지 않고, 믿는 이들의 주관적 체험에 영향을 주어야 하며, 리가 사용한 용어들로 표현하자면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며 참여하도록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의 전기를 간단하게 소개하도록 한다.
2. 위트니스 리
리는 1905년에 중국 북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남침례교의 3세대 신자였다. 리는 남침례교 중국 소학교와 치푸(Chefoo)에 있는 장로교 영어 선교대학을 다녔다. 19세에 그는 여성 전도자인 피스 왕(Peace Wang)이 인도한 복음 집회에 참석해서 역동적인 회심을 경험했다. 그는 7년 반 동안 (벤자민 뉴턴 분파인) 형제회의 집회에 참석하다가 1934년에 상하이로 이주해 워치만 니와 함께 동역하게 되었다. 이후 리는 6년 동안(1934-1940) 워치만 니의 정기간행물인 『기독도보』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지방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1949년까지 워치만 니와 리는 중국 전역 30개 성에 걸쳐 400개 이상의 지방 교회들을 세웠다.
정세 변화로 인해 워치만 니는 리에게 중국을 떠나 대만에 정착할 것을 권유했다. 이것은 선견지명이 있는 제안이었는데, 왜냐하면 새로 수립된 중국 공산 정권이 3년 후에 워치만 니를 투옥하고 이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 리는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일본, 한국에 수백 개의 지방 교회들을 세웠다. 그는 1962년에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여 출판사를 설립했고, 이후 이 출판사는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Living Stream Ministry)가 되었다. 리는 1996년까지 6개 대륙에 2,300개 이상의 교회들을 세웠다. 그는 성경의 66권에 대한 주석 시리즈인 성경의 《라이프 스타디(Life-study of the Bible, LS)》를 완성했으며, 그의 신학적인 관점을 주제별로 정리하여 설명한 일련의 메시지들을 《신약의 결론(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CNT)》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는 1997년에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약 150만에서 200만 명의 믿는 이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통해 세워진 교회들에서 모이고 있으며, 수천 만 명의 중국 지하 교회 신자들이 그들의 저술에 의해 계속해서 도움을 받고 성장하고 있다.
리의 60년에 걸친 사역의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방대한 저술들이다. 그의 주석서들과 《신약의 결론(CNT)》 외에도 최근 완간된 《위트니스 리 전집(CWWL)》은 138권이고 총 78,000쪽이 넘는다. 이제 리의 사역물 전체가 출판되고 디지털화되었기에 리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포괄적으로 철저하게 재검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3. 본질적/경륜적 구분
삼위일체를 본질적인 측면과 경륜적인 측면으로 구분하는 것은 니케아 전통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내재적인 또는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로도 알려진 본질적인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계시거나 '자체적으로(in se)' 계시는 것을 가리킨다. 즉 사람, 창조, 공간, 시간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반면에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외부를 향해(ad extra)’ 계시거나 ‘우리를 위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구원의 경륜(oikonomia)을 성취하시기 위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 두 방면은 시간과 사회 언어학적인 배경과 신학적인 전통을 초월하여 신학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지만,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본 글의 범위를 고려할 때, 이 둘의 관계를 규명하는 모든 학술적 변천을 다 추적할 필요는 없다. 대신에 주요한 가능성을 세 가지로 나열하면 충분할 것이다.
(1) 역사적으로 '고전적인 모델': 이 모델에 따르면,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cognition)의 기초이고,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존재(being)를 위한 기초'이다.
(2) 위르겐 몰트만과 에버하르트 융겔과 칼 라너 등이 발전시킨 '십자가의 신학': 이는 칼 라너의 유명한 원리인 '경륜적 삼위일체가 곧 존재론적 삼위일체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3) 삼위일체의 '순전히 경륜적인 모델': 삼위일체를 오직 경륜적인 삼위일체로만 이해한 헨드리쿠스 벌코프의 견해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주의할 점은 이 삼분법적인 도식이 매우 개략적이며, 사상가들 간의 중요하고도 미묘한 차이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범주에 따라 사상가들을 분류하려 할 때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라너의 규칙을 지지하는 많은 학자들(라너 자신을 포함)은 삼일성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전적인 모델'로 여겨진 것과 더 밀접하게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목적, 곧 리의 본질적/경륜적 구분이 그의 삼위일체 교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침이다.
리는 ‘본질적인 삼위일체는 삼일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한 그분의 본질(essence)을 가리키고,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삼일 하나님의 움직임과 관련한 그분의 계획(plan)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창조 세계 특히 인류와 관련된 그분의 행동 또는 행사를 위한 구원의 경륜이며, 이는 위에 언급된 역사적으로 '고전적인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리는 하나님이 영원히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불변하시고, 연속됨의 개념이 없으신 세 위격들 (three hypostases)(아버지, 아들, 영)로 나타나는 한 본질(one essence)이라고 주장한다. 리의 유능한 해석자인 란 캔거스(Ron Kangas)는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설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 안에서, 즉 그분의 본질에서 유일하게 한 분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시고, 항상 존재하시며, 불변하시고, 삼일(三一)이시며, 생명과 빛과 사랑과 의와 거룩함의 특징을 지니신다. … 유일하게 한 분이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항상 존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삼일이시다. 그분은 삼일 즉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유일하신 하나님, 삼일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다.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논할 때, 리는 삼일 하나님이 그분의 ‘오이코노미아’를 성취하시기 위해 성경에서 열거된 '과정들'을 통과하셨으며, 세 위격이 각각 개별적으로 행하신 외적 행동들이 신성한 삼위일체의 셋 모두와 공동으로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든 주장은 본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더 상세히 논의될 터이지만, 다음 두 단락은 본질적/경륜적인 구분에 대해 리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순간적으로 보여 주는 짤막한 진술이다.
본질적인 삼일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함께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신다. 첫째, 둘째, 셋째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행정적인 안배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아버지는 첫째 단계를 맡으시며, 아들은 둘째 단계를, 그 영은 셋째 단계를 맡으신다. 아버지는 계획하셨고, 아들은 성취하셨으며, 그 영은 아들께서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성취하신 것을 적용하신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가운데 분별은 있지만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분별되며, 아들은 그 영과 분별되고, 그 영은 아들과 아버지와 분별된다. 신격의 셋은 그 상호 내재 안에서 동시에 함께 존재하므로 그들은 분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삼일 하나님 안에는 분리가 없고 오직 분별이 있다.
이제 이러한 개략적인 조망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해 리가 설명한 것의 상세한 부분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4. 본질적인 삼위일체
초대 교회에서 삼신론과 양태론은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도전적인 이단으로 등장했다. 양태론은 하나님의 통일성(unity)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바람에 그분의 삼일성(trinity)을 훼손한 반면, 삼신론은 삼위 간의 분리를 과장하는 바람에 존재론적인 통일성을 해쳤다. 이러한 두 극단에 대응하여,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초기 교부들의 성찰은 신성한 위격들 사이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perichoresis [그리스어], circumincession [라틴어], 상호 침투)라는 상호 연결된 개념들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분석한 리의 관점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이러한 교리들이 역사적으로 발전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초기 교부들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 교리의 발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와 카파도키아 교부들—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Basil of Caesarea),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는 4세기 동안 니케아 삼위일체론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들이었다. 그들의 저술 이전에는 삼위일체는 종종 세 가지 동시적인 존재 ‘양식(modes)’을 가진 한 하나님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언어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의 범위 내에서 사용‘될 수’ 있지만(실제로 현대 신학자들, 예를 들어 바르트와 같은 사람들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음), 니케아 삼위일체론을 양태론, 사벨리우스주의, 그리고 성부수난설과 구별하기 위해 더 큰 언어적이고 개념적인 정밀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위격들(hypostases)’과 ‘본질(ousia)’ 사이에 들어갈 새로운 삼위일체 용어 도식(schema)을 제안했다. 바실리우스에 따르면, ‘위격들’은 ‘본질이라는 불확정적 개념이 아니라 구별을 드러내는 것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그는 위격들이 구별되는 것은 신성한 위격들의 존재 양식(tropos tes hyparxeos)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즉,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태어나셨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아오시며, 아버지는 어떤 원천으로부터도 태어나시거나 나아오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양식들(modes)의 영원성은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신성한 ‘위격들’이 영원히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에 계신다는 개념을 수반하기 때이다. 곧 그분들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항상 동시에 존재해 오셨다. 다시 말해서, 위격들 중 어느 한 분이 과거에 존재하시지 않았던 때가 없었고, 장래 더는 존재하지 않으시게 되는 때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신성한 ‘위격들’의 영원한 동시 존재에 대한 이런 명확한 설명은 신성한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한 방어막 역할을 했지만, 여전히 삼신론의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 이런 가능성을 간파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들의 진술에 항상 ‘위격들’의 영원한 상호 내재 개념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바실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의 모든 어떠함은 아들 안에서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모든 어떠함은 아버지께 속한다. 아들의 존재 전체는 아버지 안에 거하며, 그것에 의해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 전체를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 따라서 아들의 ‘위격’은, 말하자면, 아버지가 알려지도록 하는 형태와 표상이며, 아버지의 위격은 아들의 형태 안에서 인식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삼신론에 대해 더욱 엄격한 대응을 고안했다. 그는 심지어 세 사람(human beings)이 같은 본성을 지닌다고 해서 '세 인간'(three humans)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의 인간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비유를 하나님께 확장하면서 신성한 통일성의 기초는 세 위격들이 공유되고 통일된 행동에 참여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고 살리시며 위로하시는 일 등에서 협력하신다."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숫자 셋은 '사물'(things)의 양을 가리킬 뿐이지,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어떤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신성한 위격들(Persons) 각각을 하나(one)라고 지칭할 수는 있지만, 그분들을 더할 수는 없다고 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이런 견해를 매우 강하게 붙들고 있어서, 바실리우스는 최종적으로는 신격(deity)을 가리킬 때는 숫자들을 사용하는 것조차 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개념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저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 특히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의 삼위일체론 사유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에게 있어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증된 신적 위격들의 동일 본성(homoousia, 문자 그대로 '같은 본질')의 논리적인 결과(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라는 것)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확증된 결과(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시라는 것)는 페리코레시스였으며 , 따라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처럼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거주한다고 주장한다. 『정통 신앙의 정확한 설명(An Exact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OF)』 에서 요한은 위격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다양하고도 중요한 동사들을 사용하며, 페리코레시스가 신성한 위격들이 서로 '함께' 그리고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신성한 관계에 대한 이해가 신성한 위격들의 혼동(confusion), 융합(coalescence) 또는 혼합(mixture)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설명
위의 개요를 배경으로 삼아 이제 리의 저술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을 살펴보겠다. 일반적으로 리의 삼위일체론은 현대의 이론보다는 교부들의 관점에 더 가까운 편이다. 그가 현대 학자들보다는 역사적 기독교 사상가들을 훨씬 자주 인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라틴 전통에 서 있는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논의할 때 최소 296회 이상 '인격들(persons, 라틴어 persona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해 일부 현대 학자들이 '인격'이라는 용어를 정통성의 척도로 보는 것과는 달리, 그는 현대적 의미의 '인격'이 독립적이고 나눌 수 있으며 자율적인 존재를 가리킨다는 이유로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에서 '위격(hypostasis/hypostases)'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리는 이러한 선호와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형성한 다른 요소들을 다음 세 인용문에서 논의하고 있다.
신성한 삼위일체가 셋이라는 것에 관해 ‘프로소파’라는 또 다른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라틴어 ‘페르소나이’에 해당되며, 바로 여기서 ‘위격’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용어들의 의미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교회사 연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다른 용어를 제쳐 두고 ‘휘포스타세스’, 즉 받쳐 주는 실질들이라는 헬라어를 선호하였다. 휘포스타세스는 신성한 삼위일체의 셋의 방면을 말한다. … 삼일 하나님은 세 ‘휘포스타세스’를 갖고 계시지만 ‘우시아’는 오직 하나이시다.
신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의 역사를 볼 때, 먼저 ‘위격’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그다음에 ‘실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 신성한 삼위일체에 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진술이 있게 되었다. “삼일 하나님은 세 실질을 갖고 계시지만, 오직 한 본질을 갖고 계신다.” … 이것이 본질적인 삼일성이다. 본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이시지만, 실질(인격)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셋이시다. 사실상 우리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위격’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주님은 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천팔백 년 동안 이 진리는 점차 소홀히 여겨졌다. 그러나 초기의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심지어 ‘상호 내재’라는 신학 용어를 만들어 냈다. 이 용어는 여러분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여러분 안에 있으며 우리가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서 많은 사람이 삼일성의 교리를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동시 존재’라는 용어의 사용을 주장하지만, ‘상호 내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담대함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초기의 그리스도인 신학은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라는 두 용어를 모두 사용했다.
리의 신학적 관점의 세 가지 중요한 방면들은 다음과 같다. (1) 그는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를 인식하고 자신의 견해를 그것에 맞추고 있다. (2) 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본 주장인, 하나님이 '세 위격들(hypostases)'을 지닌 '하나의 본질(ousia)'이심을 인정한다. (3) 그는 동시 존재(coexistence)와 상호 내재(coinherence)의 교리가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바르게 묘사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고 믿는다.
리에게 있어서, 에큐메니칼 신조들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기본 교리를 위한 '신앙의 규범'으로서 역할을 하는 한에서 유용하다.
주후 325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통치 아래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 삼일 하나님에 관한 정통 교리가 확립되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만들어진 정통 신경은 시벨리우스가 제시한 양태론과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신론을 둘 다 부인했다. 시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심을 믿지 않았다. 시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환경에 따라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내시는 한 하나님의 세 단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시벨리우스는 그분들이 셋이심을 무시할 정도로 삼일성의 하나를 강조하는 극단에 치우쳤다.
그러나 리는 신조들이 신성한 삼일성을 포괄적이고 성경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조들에 담긴 간략한 선언과 일치하지 않는 성경 본문들이 있고, 신조들은 그 본문들을 소화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는 이와 관련하여 종종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한다. (1) 주님을 그 영과 동일시하는 진술들(고전 15:45하, 고후 3:17). (2)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아버지 안에 계신 분으로 말하는 구절들(사 9:6, 요 14:10, 20, 10:38, 17:21, 23). (3) 요한이 그 영을 일곱 영과 동일시하는 구절들(계 1:4, 3:1, 4:5, 5:6). 따라서 리는 성경에 충실한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신조의 범위를 넘어서야 하며, 신성한 위격들의 영원한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라는 강력한 개념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저술에서는 그가 현대 변증 및 복음주의 진영의 오류로 보는 것이 거듭해서 강하게 거부되는데, 그것은 신조를 정통성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성경과 교부들의 삼위일체 사유는 소홀히 하는 것이다.
리의 동시 존재 교리
리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동방의 헬라식이든 서방의 라틴식이든 그 표준적인 접근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군주권을 신격의 기초로 삼고 아들과 영으로 확장하는 방식(동방 기독교계의 접근)으로 시작하지 않고 신성한 본질(서방 기독교계의 접근)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의 접근은 세 구별된 위격들(hypostases)로 이뤄진 한 인격적인 하나님(one personal God)이라는 신약의 유일신(monotheism) 모델에 근거한다. 리가 이러한 접근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의 기독교(특히 복음주의) 전반에 널리 퍼진 암묵적인 삼신론을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성경적인 유일신론에서 출발하여, 그의 신학적인 과정은 먼저 동시 존재라는 렌즈를 통해 신성한 위격들의 독특성을 설명하고, 이후에는 상호 내재라는 렌즈를 통해 삼위일체의 존재론적인 통일성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리에 따르면, 영원한 동시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세 위격(hypostases)이 "동시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의 교리는 이 기본 전제를 넘어 세 가지 방향으로 발전한다. 첫째, 그는 신성한 위격들의 동시 존재를 그들의 완전한 신성과 연결하여, 동일한 신적 본질(ousia)이 세 위격들 사이에 실지적으로 공유됨을 가리킨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시에 공존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벧전 1:2, 엡 1:17), 아들도 하나님이시고(히 1:8, 요 1:1, 롬 9:5), 그 영도 하나님이시다(행 5:3-4).
두 번째로, 리는 신성한 위격들 각각이 영원하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영원히 존재하시고, 아들도 영원히 존재하시며, 성령도 영원히 존재하신다. 이는 논리적으로 그분들이 또한 동시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서, 리는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해 논의할 때, 신성한 위격들의 각각을 하나님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연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가능성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분은 삼일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가 영원하시고(사 9:6), 아들이 영원하시고(히 1:12, 7:3), 영이 영원하시며(히 9:14), 그분들은 동시에 공존하신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이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 첫 두 요소로 말미암아 리의 동시 존재 교리의 세 번째 구성 요소가 나타난다. 즉 그는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이단적으로 왜곡시킨 양태론을 거부한다.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에 따르면, 양태론은 "세 위격들을 한 하나님의 단순한 양태, 단계 또는 나타남으로 축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브룩스(F. F. Bruce)와 핸리 채드윅(Henry Chadwick)에 따르면, 양태론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내적 존재 안에서 삼일이심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신에 양태론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하시는 것이 신격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음을 주장한다고 브루스와 채드윅은 지적한다. 리는 부룩스와 채드윅의 견해에 동의하며,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입장을 같이 하여 동시 존재가 이단에 대한 안전장치라고 믿는다.
2세기와 3세기에 있던 양태론은 여러 번 변해 오다가 시벨리우스에 의해 극명하게 표현되었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다 영원하시지도 않고, 동시에 공존하시지도 않으며, 한 하나님의 일시적인 세 나타남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양태론은 아버지는 아들이 오실 때 끝나셨고, 아들은 그 영께서 오심으로 끝나셨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자들은 신격의 셋이 각각 연속되는 단계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공존과 상호 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심각한 이단이다.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의 영원한 공존과 상호 내재, 즉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동시에 같은 상태 아래 본질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 그분들의 경륜적인 일과 나타남에 있어서까지도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셋이 공존하시며 상호 내재하신다.
주목할 점은 이 인용문이 리가 양태론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예일 뿐, 모든 내용을 소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리의 저술에서 발췌한 진술들을 분석한 결과, 그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다음 네 가지 핵심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그 핵심에서 리의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가 제시한 삼위일체의 공리를 근간으로 한다. (2) 리의 동시 존재의 교리는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다마스쿠스의 요한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교리와 일치한다. (3) 리는 동시 존재를 신성한 위격들의 신성 및 동시적 영원성과 같은 성경적 진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 (4) 리는 양태론을 정통 삼위일체론을 왜곡하는 이단으로 거부하고 있다. 여전히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해 리가 이해한 것의 마지막 부분이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호 내재 교리이다.
리의 상호 내재 교리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세 위격들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Three Persons)』이라는 단행본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유추를 사용하며,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세 위격들 각자는 다른 위격들의 삶을 공유하고 [그리고] 각자는 다른 이들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리는 신성한 위격들의 ‘삶’을 이와 같은 ‘사회적’ 의미로 말하지는 않지만, 위격들 간의 공유와 상호 내주와 관련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언급한 것은 에릭슨의 설명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리는 삼위일체의 깊은 진리를 연구할 때 중요한 세 가지 관련 용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동사 ‘상호 내재하다(coinhere)’, 명사 ‘상호 내재(coinherence)’, 그리고 형용사 ‘상호 내재적인(coinherent)’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상호 내재하다’는 ‘서로 안에 존재하고 서로 안에 거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리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위격들의 상호 내재가 독립적인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동시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주장과 유사하게 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내재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시는 것의 논리적 결과라고 제시한다. ‘서로 공존하지 않고는 서로 안에 거할 수 없다’고 하며, ‘그분들은 상호 내재하는 방식으로 공존하신다’고 주장한다. 또한 요한의 페리코레시스 개념과 마찬가지로, 리는 상호 내재가 신성한 위격들 간의 혼합이나 혼동을 의미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럴 수 없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오히려 그것은 동시에 그분들이 구별됨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통일되어 계신다는 점을 확증한다고 본다. 예시로 든 다음 세 단락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진리에 의하면 신격의 셋은 구별되시지만 결코 분리되시지는 않는다. 그분들은 동시에 존재하시므로 셋이시고(마 3:16-17, 요 14:16-17, 엡 3:14-17), 상호 내재, 즉 서로 안에 상호 거주하시므로 하나이시다(요 10:38, 14:10, 17:21).
요한복음 14장 11절에서, 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절에서의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 곧 서로 안에 거함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구별이 있지만 분리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 셋이 동시 존재하시고, 상호 내재하시며, 심지어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모든 과정을 거치신 후에도 그러하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마지막 단락이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단락은 리에게 있어서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의 교리는 본질적인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경륜적인 삼위일체와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논의된다.
중세 시대 이후, 이른바 '삼위일체의 방패'(shield of the Trinity)는 일반 신자들이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삼위일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는 신자들이 양태론을 거부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신성한 위격들의 상호 내재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삼신론적인 삼위일체 관점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와 같은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의 개념이 포함된 더 정교한 방패를 소개했다.
상호 내재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그 교리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데는 이르지 못하지만, 테일러가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점은 본 논문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리의 삼위일체론은 1970년대 다양한 반이단 사역(대부분 '복음주의' 성향의 단체들)에 의해 강하게 비판을 받았다. 리의 상호 내재 개념은 이러한 비판의 주요 표적 중 하나였다. 위 다이어그램에서 테일러가 ‘아니다(is not)’ 선에 ‘안에 있다(is in)’를 덧붙인 것은, 역사적으로 정통적이었던 이런 관점이 적어도 복음주의 전통의 계열에 있는 일부 진영에서 현대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개정된 위 다이어그램이 복음주의적 사고틀 안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은 평신도 차원에서 리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상호 내재/상호 침투 교리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다른 표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림 1: 테일러의 수정된 ‘삼위일체 방패’ 도식
앞서 언급된 리의 상호 내재 개념과 관련된 논란의 대부분은 이사야서 9장 6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절과 같은 구절들에 대한 그의 해석적 접근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스코트 호렐(J. Scott Horrell)에 따르면, 상호 내재 교리는 성경에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과 ‘아버지의 영’과 동일시되는 것을 허용한다.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 또한 신약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로 간주되는” ‘존재론적 통일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아들과 그 영이 하나이심을 가르치는 구절들도 있다. 로마서 8장 9절과 10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면서, 누구든지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성령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모두 그들의 통일성을 시사한다.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고려해 보라. 앞서 본 것처럼, 이 구절은 주님이 그 영이시라고 말하며, 여기서 ‘주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여호와(yhwh)’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kyrios)’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의 ‘퀴리오스’를 예수님에 대한 언급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님은 종종 이 이름으로 불린다. 이 사례에서 이 구절은 아들과 그 영 사이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리는 상호 내재의 관점을 통해 이 구절들과 신성한 세 위격들을 동일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해석한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오시는 것(요 5:43, 14:10–11, 23, 16:32, 17:21, 요일 2:23 등)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이시고(요 10:30, 17:22), 심지어 영원한 아버지로 불리시는 것(사 9:6)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 리에 따르면, 아들은 또한 그 영(고후 3:17)과 생명 주는 영(고전 15:45b)으로도 언급된다. 리는 이렇게 말한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님이 그 영이시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 이 절들은 아들이 그 영이심을 계시한다(요 14:16-20).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삼일 하나님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즉 그리스도는 그 영과 하나이시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는 신격의 셋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인정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셋으로 구별되신다는 것을 함축한다. 삼일성의 셋은 또한 상호 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심을 함축한다.
그 영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그분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오시고 아들과 함께 오신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내주하시는 영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부활시키시는 분의 영이라고 불리신다.
이 구절들을 포함하여 기타 난해 구절들을 해석하는 리의 중요한 해석학적 원칙은 현대 삼위일체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구절들을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직접적인 의미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예: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많은 학자들이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 호칭은 은유적인 의미로 영원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해석함). 리가 이러한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은 놀랍지 않은데, 그의 신학적 방법은 신조의 진술보다 성경의 진술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리는 자신이 신조를 준수한다는 것을 나타내면서도(즉,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있음을 주장함), 동시대 일부 학자들보다 성경의 ‘이다(is)’ 진술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에 더 큰 편안함을 내비친다(주님은 그 영이시다. 아들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등). 신성한 위격들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가 모두 전제된 가운데 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명료하게 진술해도 위격들의 동시 존재에 대한 위협이 가해지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분들은 명확히 셋이시다”라는 것이 항상 진리라는 이유에서이다. 궁극적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가 아들께서 아버지(사 9:6)이시고 주님께서 그 영(고후 3:17)이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만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다. … 우리는 신격의 셋의 영원한 공존과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믿는다. 우리는 양태론이나 삼신론 둘 다를 이단으로 유죄 판결한다.
리의 상호 내재 개념에 내재된 다양한 세부 사항에 동의하든 아니든, 주목할 만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리가 위의 구절들을 해석함으로써 상호 내재 교리를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시 및 아들과 그 영의 동일시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시대의 저명한 유력한 복음주의 인물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정통적인 삼위일체 사상에 확고한 기반을 둔 해석이다.
둘째, 벨리-마티 케르케이넨(Veli-Matti Kärkkäinen)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신학의 문법은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is)’, ‘아들은 하나님이시다(is)’, ‘성령은 하나님이시다(is)’라는 문장에서 ‘is’라는 단어가 정체나 내포(inclusion)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predication)이나 속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케르케이넨에 따르면, 이러한 진술들에 담긴 의미는 정체 그 자체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각각이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심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리가 ‘아들이 영원한 아버지로 불린다’(사 9:6)거나 ‘주님은 그 영이시다’(고후 3:17)와 같은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그분들의 구별된 정체성이 없어질 정도로 아들이 아버지라거나 아들이 성령이라는 의미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진술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진술들은 신성한 위격들이 그분들의 영원한 상호 내재에 기반한 초자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버지께서 자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아들과 공유하시고, 아들도 자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성령과 공유하신다는 것을 함의한다.
5. 경륜적인 삼위일체
일반적으로 말해,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관련된 문제들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현대 정통 삼위일체 신학의 분석에서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리는 리의 삼위일체 관점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그것은 전문 지식이 없는 변증가들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를 고려하여,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해 먼저 논의했다. 그러나 현대 변증론계 내에서 이렇게 우선순위가 설정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변칙에 해당한다.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사유는 압도적으로 경륜적인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했고 그것을 우선시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 자신 내부의 작용에 대한 논의보다는 창조와 인간과 구원과 교회와 관련하여 계시된 삼위일체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에 따르면,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우선시하는 데에서 ‘사변적 또는 형이상학적 논증’에 의거하여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개념화하는 데로 옮겨가는 '위험한 추세'가 중세 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교부들의 동인(impulses)으로 서서히 돌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데이빗 코피(David Coffey)는 "삼위일체의 올바른 연구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연구이다"라고 주장한다. 리는 신성한 경륜의 수행이 성경의 주제임을 강조하는 데에 주로 관심했기 때문에 그의 저술에서는 본질적인 삼위일체보다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리의 저술을 깊이 다루기 전에,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사상가들의 설명은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개념들보다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훨씬 더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핵심 이유 중 하나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모든 설명은 사상가들이 신성한 경륜의 윤곽과 내용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경륜을 초자연적 은사들(예: 방언, 치유)을 강조하는 모델로 이해한다면,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사명(특히 영의 사명과 또한 아들의 사명)을 본질적인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속죄 모델들(예: 형벌적 대속, 승리자 그리스도, 만족 이론)도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어떻게 이해되는지에 변화를 가져온다. 아버지의 선택 안에서 예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도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영향을 미친다.
샌더스가 통찰력 있게 언급했듯이, 해석자들은 ‘경륜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계시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특정 사상가들의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신성한 경륜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리의 경륜적인 삼위일체 설명을 그의 신성한 경륜 개념과 비교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후 그의 저술에서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다섯 가지 추가 개념을 논의한다: (1)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라는 표현, (2) ‘복합적인 영’의 개념, (3)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의 개념, (4)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5) ‘삼위 하나님의 대외적 사역은 분리되지 않는다(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라는 라틴어 어구.
신성한 경륜
리의 신학적 관점에서 신성한 경륜이 차지하는 중심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출판물 중 최소 44개는 제목에 ‘하나님의 경륜’ 또는 ‘신성한 경륜’이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으며, ‘경륜’이라는 단어는 그의 저술에서 수천 번 등장한다. 리는 경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실용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이 헬라어가 두 단어 곧 집 또는 가정을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와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nomos)’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바울은 가정의 행정을 가리키는 오이코노미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 하나님께서 집, 가정, 가족을 갖고자 하셨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영원 과거에 하나님은 홀로 계셨다. … 그분께서 가정을 갖고자 하셨음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가정이 없으면 행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에베소서 1장 5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도록 창세전에 우리를 미리 정하셨음을 계시한다. 이렇게 미리 정하신 것은 아들들을 얻으시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아들들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많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셨음을 말해 준다. 이 아들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오이코노미아’를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가정을 이루시기 위하여 많은 아들들을 얻고자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리가 일부 현대 주석가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경륜적으로 나으시는 것을 은유적인 의미로 보지 않으며, 믿는 이들의 신성한 아들의 자격(sonship) 개념을 다만 법적인 혹은 법정 논쟁의 방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아들의 자격의 법적인 신분에 더하여 우리는 아들의 자격의 생명, 즉 하나님의 아들의 영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갈 4:6, 롬 8:2, 요일 5:11-12).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으로는 아들의 자격의 입지가 있고 내적으로는 아들의 자격의 생명이 있다.”라고 주장한다. 리는 그의 저술에서 ‘존재론적(ontological)’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참된 아들들로 태어남으로써 믿는 이들이 얻는 새로운 유기적 정체성과 지속적인 유기적 변화에 대한 그의 아래와 같은 이해는 그러한 설명을 정당화할 만하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분의 아들들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를 낳은 분과 똑같다. 하나님에게서 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사람들이다. …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인 하나님-사람들은 신성한 생명만이 아니라 신성한 본성도 갖고 있다.
위의 두 단락으로부터 우리는 리가 이해한 신성한 경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도출할 수 있다:
(1) 신성한 경륜은 하나님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2) 하나님의 가정은 하나님 자신, 그분의 독생자(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많은 아들들인 믿는 이들로 구성된다.
(3)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믿는 이들은 법적인 의미와 유기적인 의미 모두에서 신성한 아들의 자격(divine sonship)을 가진다. 즉, 믿는 이들은 언젠가 완전한 아들의 자격을 얻게 되겠지만, 거듭난 순간부터 이미 아들의 생명을 얻었다.
(4) 아들의 자격의 개념은 현대의 양자(adoption) 개념과 구분되어야 한다. 아들의 자격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5) 신성한 아들의 자격의 과정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는 것을 포함한다.
(6)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분과 똑같이 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점들의 종합은 리가 제시한 신성한 경륜의 목표인 믿는 이들의 신화(神化)를 뒷받침한다.
교부들이 2세기에 발견한 여러 진리 중에는 세 가지 큰 비밀이 있다. 그것은 신성한 삼일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 그리고 인간의 신화(神化)의 비밀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며 사람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신격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 가톨릭 교회 [『가톨릭 교리서(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 온전히 근본적이 되려면 우리는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명확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진리 말이다.
이 긴 인용문은 리의 신학적 관점의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측면을 잘 밝히고 있으며, 이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첫째, 리는 신화(神化)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부들(이레니우스와 아타나시우스)과 로마 가톨릭(토마스 아퀴나스)의 자료를 활용한다. 그의 저술들은 이러한 자료들이 그의 교리를 설명하는 주요한 근거는 아니지만, 그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제시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리의 이러한 호소는 그의 비평가들이 종종 그를 자신의 사역 밖의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이라고 비난했던 배경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하다.
둘째, 리는 신화를 ‘신격(Godhead)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아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어구는 중요하다. 이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참여한다거나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킨다거나 믿는 이들이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리는 초기 교회가 명확히 밝힌 ‘세 가지 큰 비밀’인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람의 신화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 우리의 현재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리가 보기에 이 세 가지 진리는 모두 경륜적 삼위일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신성한 경륜은 두 가지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첫 번째 관점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즉, 신성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삼일 하나님께서 수행하신 행위나 단계들이다. 두 번째 관점은 인류에 관한 것이다. 또는 신성한 경륜에 참여하는 인간 존재들과 관련하여 이 신성한 행위들이 이루어내는 결과를 기술하기 위해 구원론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격언,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라”(for 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는 이 두 관점을 연결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라”는 두 번째 관점에서 나온 진술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성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첫 단계인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의 성육신을 묘사한다. 성경에서 이 행위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의 영광이었다.”(요 1:14). 이 신성한 행위는 모든 니케아 신자들이 예외 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리에 따르면, 이 초기 단계는 몇 가지 연속적인 단계와 더불어 ‘과정’(process)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리가 사용한 ‘과정’이라는 용어는 ‘과정 신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과 혼동하거나 이를 역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가 ‘과정을 거치셨다’는 것은 오직 신성한 경륜과 관련해서라고 리는 주장한다.
하나님께는 경륜적인 것만이 변화가 가능하다. 본질적인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분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삼일 하나님은 과정을 거친 의미에 있어서 바뀌셨다. 처음에 단지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하나님-사람이 되셨다. 그분이 하나님이셨을 때 그분께는 인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사람이 되심으로 바뀌셨을 때, 그분의 신성에는 인성이 더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분은 단지 그분의 경륜 안에서, 그분의 분배 안에서만 바뀐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바뀌셨으나, 그분의 본질 안에서는 결코 바뀌지 않았다.
이후의 단계들은 리가 ‘과정’의 일부로 제시한 것들이며, 거의 모든 초기 신앙 고백의 근간을 형성한다. 그것들은 (1)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 (2)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3) 그리스도의 부활, (4)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이 행위들의 총합이 리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리의 비판자들 중 일부가 문제로 삼는 부분은 그가 이 과정의 결과로 제시하는 ‘완결되신(consummated) 삼일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다. 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신체적으로 영화롭게 되었고, 동시에 '마지막 아담으로서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 즉, 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한 영화로운 몸을 가진 하나님-사람으로서 하늘에 존재하시며, 동시에 공기 같은 그리스도로서 거듭난 믿는 이들 안에 생명 주시는 영으로 내주하신다고 주장한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낮은 형태에서 높은 형태로 높여졌다. …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그분의 육체는 더 높은 형태, 곧 하나님의 영광으로 적셔진 몸(빌 3:21)으로 변형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은 살과 뼈를 지닌 영광스럽게 된 몸이다. 그분께서 돌아오실 때 우리의 천연적인 몸, 곧 우리의 비천한 몸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변형될 것이다. 곧 그분과 같은 형상이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고, 누가복음 24장은 그리스도께 살과 뼈를 지닌 부활한 몸이 있다고 계시한다. 어떻게 그리스도는 살과 뼈를 지닌 그분의 몸을 갖고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는가?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는 것은 영으로서이다(롬 8:9-11). 영광 안에 계신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다.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롬 8:10, 34, 골 3:1, 1:27). 이것은 비밀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비밀스러우시며, 우리가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분이시다.
그 영은 부활 안에서 아들에 의해 믿는 이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은 “그들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여기의 성령은 사실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이 영께서 그분의 숨이시기 때문이다. … 주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에 그분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제자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서 불어 넣으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숨이시다. 어떤 신학자들은 숨 즉 그 영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데에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과정을 완성하신 후에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는데, 이 생명 주시는 영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그 영과 경륜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잘 확립된 개념이다. 이그나티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이레니우스, 키프리아누스,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초기 교부들은 모두 아들을 그 영과 동일시하는 것을 지지했다. 헤르만 군켈(Hermann Gunkel),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 제임스 던(James Dunn)과 같은 성경 학자들도 경륜적으로 아들을 그 영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인식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개혁주의 사상가들인 찰스 하지(Charles Hodge)와 루이스 스미디즈(Lewis Smeades)는 그리스도와 그 영이 ‘동일하고(one and the same)’ ‘분리될 수 없다(inseparable)’ 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 W. H. 그리피스 토마스, A. B. 심슨, 앤드류 머리 등 수 세기에 걸쳐 여러 해석자들도 그리스도께서 경륜적으로 그 영과 동일시된다고 주장한다. 메흐르다드 파테히(Mehrdad Fatehi)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아들과 그 영을 동일시한 것을 특히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그 영의 역동적 동일시는 오늘날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적 구분을 사용해 볼 때, 단지 기능적인 동일성을 넘어서 존재적 또는 존재론적 측면을 포함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다시 말해, 그 영이 단지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하신다거나 그리스도를 대리하신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영을 통해 실제로 존재하시며 활동하신다는 점은 둘 사이에 존재적 또는 존재론적 연결이 있음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바울의 사상에는 그 영과 그리스도 사이의 역동적이지만 존재론적 동일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리가 친숙하지 않은 용어와 개념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체계적인 신학자가 아니었고, 통합적 사고를 하며 일반 대중에게 말씀을 전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경륜적인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을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라는 다소 낯선 표현에 담아 제시하지만,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 교리를 포함하여)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이해와 라틴어 어구인 “삼위 하나님의 대외적 사역은 분리되지 않는다(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는 원칙과 암묵적으로 상호 작용하며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용어가 현대 (대부분 서구의)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담긴 실제 교리적 주장들이 위의 기독교 해석자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적 관점은 정통적인 니케아 삼위일체 신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복합적인 영
리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과정들을 논의하기 위해 사용하는 두 번째 틀은 ‘복합적인 영’이다. 이 개념은 이 글에서 소개된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리의 전체 저술에 걸쳐 나타나며,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이에 관련된 모든 미묘한 차이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 글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복합적인 영에 대해 리가 제시한 해석적인 근거 및 성경 연구에 기초하여 그가 제시한 신학적 주장들에 논의를 국한할 것이다.
리는 출애굽기 30장 25절로부터 ‘복합적인(compound)’이라는 단어를 차용한다: “너는 그것들로 바르는 거룩한 기름을 만들되, 향 만드는 사람의 제조법에 따라 잘 복합된 향기로운 관유를 만들어라.” 리는 플리머스 형제회의 저술가인 C. A. 코츠(Coates)와 C. H. 맥킨토시(Mackintosh)와 입장을 같이 하여 관유를 영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표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리는 이 예표적 해석을 더 발전시켜, 연고의 각 성분이 맥킨토시가 제안하듯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단지 성령의 다양한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 영 안에 ‘복합된’ 신성한 특정 행동들 또는 그 행동들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다음 단락은 리의 주요 주장 중 몇 가지를 간결하게 담고 있다:
바르는 거룩한 기름을 만드는 데에, 올리브기름 한 힌에 네 가지의 향료—오백 세겔의 몰약, 이백오십 세겔의 육계, 이백오십 세겔의 창포, 오백 세겔의 계피—가 더해졌다. 이러한 복합된 바르는 기름의 성분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액체 몰약은 매장에 사용되는 향료(요 19:39)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죽음을 상징한다(롬 6:3). (2) 향기로운 육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달콤함과 효능을 상징한다(롬 8:13). (3) 향기로운 창포는 늪이나 진흙에서 위를 향해 자라는 갈대에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부활을 상징한다(엡 2:6, 골 3:1, 벧전 1:3). (4) 계피는 고대에 곤충과 뱀들을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상징한다(빌 3:10). (5) 올리브기름은 복합된 관유의 주성분으로서, 복합되신 영의 주성분인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위와 같이, 리는 그 영이 신성한 행동들과 그 행동들의 특성들로 ‘복합’되셨다고 생각한다. 그 영에 복합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몰약)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달콤함과 효력’(육계)도 포함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창포)뿐만 아니라 그 부활의 ‘능력’(계피)도 포함된다.
리는 이 ‘복합’의 원칙을 모든 (경륜적인) 신성한 행동들과 그 행동들로 인해 제공되는 모든 구원의 혜택에까지 확장하여, 이러한 포함이 삼일 하나님이 과정을 거쳐 완결되기를 선택하신 이유를 설명한다고 주장한다. 다음 세 가지 인용문은 이 관점이 리의 지적 지형에서 차지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은 아버지의 온 존재와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과 아버지께서 하실 수 있고 현재 하고 계시며 앞으로 하실 모든 것, 또한 아들의 인격과 일과 아들께서 성취하시고 도달하시고 획득하신 것들과 아들께서 거치신 모든 과정이 더해진 복합체이시다. 그 영은 모든 신성한 것의 복합체이시다. 이분은 능력이나 수단이나 도구보다 훨씬 더 뛰어나시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복합되신 이 영이 바로 신약의 복이시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음의 복이시다(갈 3:14).
그 영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복이시다. 복음의 참된 복을 제시할 때, 바울은 평안과 기쁨과 죄들의 용서 같은 많은 항목들을 나열하지 않고, 오직 한 분 곧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그 영을 말했다.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영 하나님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과정을 거치시고 그 영으로 완결되셨다. …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 구속을 성취하기 위한 십자가에서의 죽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부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승천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께서 거치신 모든 과정이, 복합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 안에 있다(롬 8:11, 고후 3:18). 우리에게 그 영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 우리에게 그 영이 있다면 하나님, 사람, 구속, 죄들의 용서가 있다. 그 영은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주님, 우리의 구속자, 우리의 구주, 우리의 목자이시다. 그 영께서 우리의 생명, 우리의 생명 공급, 우리의 의, 우리의 거룩하게 함, 우리의 변화, 우리의 구속이시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은 우리에게 복으로 주어지신,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복이신 그 영을 받아 영원토록 항상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한 복합적인 영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분배하심을 위해 신성한 삼일성의 넘치는 공급이 되신다. 빌립보서 1장 19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 헬라어로 「넘치는 공급」이라는 단어는 악단의 인도자가 그 단원의 모든 필요를 공급함을 의미한다. 그 그룹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것이 악기든, 옷이든, 유니폼이든, 음식이든, 혹은 약이든 그 인도자가 공급한다. 오늘 그리스도는 그러한 인도자이시다. 생명 주는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복합적인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넘치는 공급을 가지고 계신다. … 이 넘치는 공급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의 근원으로부터 온다. 이 완결은 복합적인 영이며, 이 복합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진술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리가 신성한 경륜 전체를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완결 안으로 통합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 과거에 있었던 모든 신성한 경륜적인 행위들, 현재의 신성한 활동들, 그리고 그 행위들과 활동들에 따른 미래의 혜택들에 참여할 수 있는 접근을 제공한다.
이전의 세 단락에서 많은 요소들이 소개되었으므로,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요약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신성한 경륜의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의해 수행된 신성한 행위들의 총합은 ‘과정’이며, 이는 ‘과정 신학’이나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3)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 인생,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 승천의 신성한 행위를 나타낸다.
(4) 이 경륜적인 ‘과정’에는 최종 결과, 곧 ‘완결’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영화롭게 되셨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5) 리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틀인 ‘복합적인 영’을 사용한다.
(6) 리는 이 용어들이 바꿔 쓰일 수 있다는 점, 즉 ‘생명 주시는 영은 복합적인 영이시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이해하지만, 복합적인 영에 대한 보다 깊은 분석을 통해 이는 신성한 경륜적 행위들만이 아니라 각 행위의 특성 또한 그 영에 복합되었다고 주장한다(예: 그리스도의 부활뿐만 아니라 그 부활의 능력도 포함됨).
(7) 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신성한 행위와 그 구원의 혜택들이 경륜적으로 그 영에 복합되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는 의, 거룩하게 됨, 변화, 구속이 포함된다.
(8) 리는 그 영이 신약의 궁극적인 축복이자 복음의 축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일한 축복이라고 말한다.
위의 요점들을 바탕으로 이제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세 가지 개념을 살펴보겠다: (1)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 (2)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3) 라틴어 어구인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삼위 하나님의 대외적 사역은 분리되지 않는다).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
지금까지 우리는 과정을 거치신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이해를 설명했으며, 그 결과는 생명 주시는 영, 복합적인 영, 혹은 간단히 ‘그 영’이다. 그러나 리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을 바탕으로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추가적인 과정을 한 번 더 거치신다고 주장한다. 완결된 삼일 하나님, 곧 생명 주시는 복합적인 영이신 그분은 그 과정을 통해 ‘일곱 영(the seven Spirits)’, 즉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 되신다고 설명한다.
요한계시록 1장 4절, 3장 1절, 4장 5절, 5장 6절에 나오는 ‘일곱 영’에 대한 해석은 성경 전문가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 해석들은 ‘일곱 영’이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즉, 주요 천사나 다른 반신적(semi-divine) 중재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부터, 성령과 명백히 관련된 것으로 보아 성령의 열매, 은사, 권능 등을 상징한다는 견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가능한 해석들 각각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우리 목적상 중요한 것은, 리가 ‘일곱 영’이 명확히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여러 가능한 해석들과 달리, 리는 이 명칭은 신성한 경륜을 이루기 위해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강화되신 것’(intensifying)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주님은 생명 주는 영으로서뿐 아니라 또한 칠 배로 강화된 영으로서 역사하고 계신다. 이 영은 이사야 30장 26절에서 말한바 해의 비췸으로 비유될 수 있다. 『해의 빛이 칠 배가 될 것이라』.
요한계시록에서 그 영은 일곱 영으로 불리시는데(1:4, 4:5, 5:6), 일곱 영은 교회의 타락에 대항하시기 위하여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시다. 1장 4절에 있는 일곱 영은 삼일 하나님 가운데 함께 나란히 계시기 때문에, 의심할 것 없이 하나님의 영이시다. 숫자 7은 하나님의 운행이 완전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수이므로, 일곱 영은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을 위한 분이심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은 그 본질과 존재에서는 하나이시지만, 운행하실 때에 그 강화된 기능과 일에서는 일곱 배가 되신다. 이것은 스가랴서 4장 2절에 있는 등잔대와 비슷하다. 그 등잔대는 존재의 면에서는 하나이지만, 기능의 면에서는 일곱 등불이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교회는 이미 타락했고 시대는 어두웠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 필요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삼일 하나님의 순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장 4절과 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세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로 열거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을 계시한다. … ‘일곱 영’이라는 칭호는 그 영께서 일곱 배로 강화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일곱 영은 그 영의 모든 요소, 즉 신성과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실재와 생명과 은혜를 강화하신다.
위 단락들에서 제기된 세 가지 문제는 간단한 논의를 요구한다. 첫째, 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이 기록될 당시 교회의 타락 때문에 그 영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교회의 타락이라는 개념은 사실 그의 저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둘째, 리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신성한 위격들의 순서가 바뀐 것이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의 중요성이 증가했음을 나타낸다고 믿으며, 이 점은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셋째, 이 강화의 결과는 ‘신성, 육체 되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실재, 생명, 은혜'를 포함하여 그 영 안으로 복합된 모든 요소가 믿는 이들을 위해 그 자체로 강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의 관점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은 그 영이 일곱 배로 강화되신 것은 믿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다른 경륜적 과정들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영’이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는 생각은 여러 해석자들의 지지를 받는다(예: 앨버트 반스(Albert Barnes), 로버트 마운스(Robert Mounce), 헨리 바클레이 스웨트(Henry Barclay Swete) , 헨리 알포드(Henry Alford), 리처드 트렌치(Richard Trench), 앨버트 반스(Albert Barnes)). 예를 들어, 리처드 보쿰(Richard Bauckham)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성령의 완전함과 일곱 교회에서의 성령의 전능한 사역을 가리킨다고 제안한다. 중세 사상가들 중 리처드 오브 세인트 빅터(Richard of Saint Victor)는 ‘성령의 일곱 배 은혜’가 예언적인 의미로 일곱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일곱 배의 성령이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현재와 미래 상태’를 섬기며, 일곱 교회 각각이 보편 교회의 특정 조건을 예언한다고 설명한다. 교부 주석가인 베자의 아프링기우스(Apringuius of Beja)도 이 명칭이 성령이 ‘이름은 하나이지만, 권능은 일곱 배이며, 눈에 보이지 않고 무형이며, 그 형상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켄달 술렌(R. Kendall Soulen)은 요한계시록 1장 4절과 5절에 나오는 삼일 하나님의 독특한 순서가 후대의 삼위일체 고백에서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하여 오신다'는 내용을 반영한다고 제안한다. 인용한 사상가들의 견해를 간략히 제시했기에, 해석에 있어서 서로 간에 있는 미묘한 차이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들 모두가 본질과 내용 면에서 리의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 개념의 핵심 쟁점들과 밀접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리의 주장은 일곱 영이 하나님의 영과 관련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칭호가 그 영의 일곱 배로 강화됨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이러한 강화가 신성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삼위일체관의 다른 요소(예를 들어, 그가 신성한 위격들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강조한 것)와 마찬가지로, 이 제안은 카파도키아 교부들, 특히 니사의 주교(Bishop of Nyssa)의 논리를 따른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영의 위격이 인과 관계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의 경륜적 사역을 완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설명한다. 브랜든 스미스(Brandon Smith)에 따르면, 그 영을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으로 보는 관점은 … 완전하고 온전한 일곱 배로 강화된 그 영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신적 능력을 행사하여 모든 창조물을 완성된 상태로 이끈다는 개념과 일치한다고 한다. 리와 그레고리우스는 일곱 배로 강화된 그 영이 신성한 경륜을 어떻게 성취하는지(혹은 다른 말로, 창조물이 어떻게 그 완전한 정점에 도달하는지)에 대해 세부 사항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들 모두가 이러한 성취/정점이 믿는 이들의 단체적인 신화를 가져온다는 똑같은 이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놀랍다. 아래 첫 단락은 그레고리우스의 “즉: 그러면 아들 자신도 복종하십니다(In illud: Tunc ipse Filius subjicitur)”에서, 둘째 단락은 리의 《신약의 결론》 시리즈에서 각각 인용한 것이다.
참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연결되므로 우리 모두는 한 몸, 즉 그분의 몸이 된다. 우리가 모두 온전하게 될 때에는 그분의 온전한 몸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교회인 그분의 몸과 연합(lit., ‘mingled’)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몸의 복종은 아들 자신의 복종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하나님-사람들이 되게 하여,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확대와 표현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갈 3:26, 4:7, 26, 31).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으로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되고 이러한 삼일 하나님과 연합된 하나님-사람들이다(요 17:22-23상, 엡 4:4-6). … 우리가 신화된다는 것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됨으로 영원토록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계 21:11).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조성해 넣으셔서, 생명과 본성과 조성에서 사람을 하나님과 똑같이 만드심으로 건축된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은 한 단체적인 실체가 된다.
리의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 개념은 그의 전체 저술에서 200회 이상 언급되는 주제로, 더 많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그의 주장이 정통적인 니케아 삼위일체론 내에서 잘 자리 잡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 (2) ‘일곱 영’이라는 칭호는 영의 운행(operation)의 측면에서 그 영이 강화되신 것을 의미한다. (3)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은 신성한 경륜의 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리는 자신의 사역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아들의 경륜적인 활동들의 관점에서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과정과 완결과 강화를 묘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이라는 또 다른 틀을 사용했다. 이 모델에서 다루어지는 명시적인 신학적 문제들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이 모델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사복음서에 기록된 연대기와 사건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땅에 속한 사역은 그분의 육체 되심으로 시작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끝났으며, 이것은 그분의 ‘충만한 사역’의 세 단계 중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리는 두 번째 단계를 ‘포함의 단계(the stage of inclusion)’라고 부르며, 이는 사도행전에서 유다서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의 사역을 묘사한다. 마지막 단계인 강화의 단계(that of intensification)는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으로서 설명한다. 1996년에 전한 메시지의 서문에서, 리는 다음과 같은 요약을 제공한다.
(1)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이루기 위해 세 단계로 수행된다.
(2) 첫 번째 단계는 육체 되심(incarnation)의 단계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가져오고,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며, 그분의 법리적인 구속을 이루는 것이다.
(3) 두 번째 단계는 포함(inclusion)의 단계로,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시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며, 그분의 몸을 위해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4) 세 번째 단계는 강화(intensification)의 단계로, 그분의 유기적 구원을 강화하고, 이기는 이들을 산출하며,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점은, 리가 이러한 단계들을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세 번의 ‘되심(becomings)’과 연결한다는 점이다. (1) 육체 되심의 단계에서, 말씀께서 육체가 되심. (2) 포함의 단계에서,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 (3) 강화의 단계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신 공기 같은 그리스도(the pneumatic Christ)께서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 되심(다음 단락의 차트를 참조).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말씀께서 육체가 되심,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 생명 주시는 영이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이 되심은 리에게 있어서는 모두 경륜적인 과정들이다. 이는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불변성을 훼손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신성한 경륜과 관련된 변화들은 경륜 내에 머물지만 반대의 경우는 늘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곧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핵심 방면들은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논의하는 데 계속해서 필수적인 요소로 남는다. 현재의 논의와 관련하여, 리는 영원한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의 교리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이 두 교리는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설명에서 쌍둥이 기둥 역할을 한다.
라틴어 어구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
라틴어 어구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는 “신성한 경륜적인 역사는 삼위일체 전체에 속하며, 창조와 구속과 육체 되심 등과 같은 특정 행동들은 신성한 위격들 중 하나에게 귀속된다"는 개념을 의미한다. 즉, 특정한 경륜적인 행위가 개별 위격에게 귀속되더라도(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아들이지 아버지가 아님),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수행한 모든 행위는 신성한 역사, 의지, 존재, 관여의 면에서 외적으로 공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이해는 점점 인기를 얻고 있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개념과는 상반되지만, 정통 니케아 삼위일체론에서는 잘 확립된 개념이었다. 심지어 사회적 삼위일체론과 흔히 연관되는 카파도키아 교부들도 신성한 위격들의 통일된 행동을 명확히 인정했으며, 이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교리 논문(Dogmatic Treatises)』과 바실리우스의 『성령에 관하여(On the Holy Spirit)』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와 바실리우스 외에도, 삼위의 경륜적인 행위들의 불가분성에 대한 합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코넬리우스 반 틸, 존 오웬에서 T. F. 토랜스까지 다양한 사상가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기독교 전통 내에서 이러한 광범위한 증언을 고려하여 카일 클런치(Kyle Claunch)는 다음과 같은 요약을 언급한다.
신성한 통일성에 대한 이러한 설명의 결과로 이해되는 삼위일체의 외적 불가분적 사역의 교리는 창조와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신격의 세 위격 모두의 사역임을 주장한다. 이 교리는 라틴어 어구 ‘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로 자주 표현되며, 정통 삼위일체 신학의 중요한 요소로 수 세기 동안 자리 잡아 왔다. 동방 교부들(예: 아타나시우스와 닛사의 그레고리우스)과 서방 교부들(예: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이 반아리우스 논쟁에서 이 교리를 진술하고 옹호했다. 이 교리는 후에 중세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표현되고 방어되었으며, 17세기 개혁 정통파에 의해 소시니안들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19세기의 개혁 정통성의 후계자이자 방어자들(예: 헤르만 바빙크와 찰스 하지) 또한 이 교리를 변함없이 지켰다.
이제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의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 원칙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신성한 위격들의 통일된 행위들에 대한 리의 개념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리가 그의 저서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정확한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1)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리고 그 영과 함께 행하신다, (2)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그 영에 의해 행하신다, (3) 그 영은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행하신다. 이 각각의 표현은 아래와 같은 그의 경륜적인 삼위일체 요약에서 설명된다.
삼일성의 경륜적인 방면에 따르면 아버지는 계획하셨고, 아들은 성취하셨으며, 영(Spirit)은 아들이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성취하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아버지는 우리를 택하고 예정하는 역사로 그분의 계획, 곧 그분의 경륜의 첫번째 단계를 성취하셨는데, 이것을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영(Spirit)으로 더불어 성취하셨다(엡 1:3-5). 이 계획이 수립된 후에는 아들이 오셔서 이 계획을 성취하셨는데, 이것을 아버지와 함께(요 8:29, 16:32) 그리고 영(Spirit)에 의해(눅 1:35, 마 1:18, 20, 12:28) 성취하셨다. 아들이 아버지가 계획하셨던 모든 것을 성취하신 후에 세번째 단계로 영(Spirit)이 오셔서 아들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적용하셨는데, 이것을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적용하신다(요 14:26, 15:26, 고전 15:45下, 고후 3:17). 이런 식으로,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경륜이 수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존재, 곧 그분의 영원한 상호공존과 상호내재는 손상되지 않은 채 있으며 위태롭게 되지 않는다. 신성한 경륜 안에서는 그 셋이 따로따로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서 역사하며 나타나신 바 된다. 그러나 삼일성의 경륜적인 역사나 나타남에서조차도, 셋은 여전히 본질적으로는 상호공존과 상호내재 안에 남아 계신다.
리는 『마가복음 라이프 스타디』에 신성한 경륜,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삼위일체의 외적인 사역의 불가분성을 설명하는 표를 포함한다.
이 차트와 함께 언급된 리의 진술로 말미암아 리의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그 과정이 마무리된다. 왜냐하면 위의 도표와 리의 진술 모두 신성한 휘포스테세스에게 차별화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경륜적 행위들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리가 동시 존재와 영원한 상호 내재 개념 둘 다를 사용한다는 점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영과 함께 선택하고 예정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행위들을 성취하시고, 그 영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도의 성취를 적용한다. 리의 경륜적인 삼위일체 설명의 이 마지막 요소에 대한 분석은 그의 신학적 관점과 정통 니케아 삼위일체론이 조화된다는 점을 더욱 나타내고, 어떤 면에서는 현대 기독교 담론에서 대중화된 삼위일체적 관점보다 그의 관점이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사유에 훨씬 더 부합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2: 리의 하나님의 신약 경륜 도표
6. 리가 삼위일체에 전념하여 연구한 결과 종합
이 논문의 서두에서 우리는 서구 학계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위트니스 리(Witness Lee)가 1970년대에 이단 대응 변증가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음을 언급했다. 과거의 일부 비평가들이 지난 20년 동안 그의 신학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의 검토 논문이 부족하다. 그 결과 반세기 전의 비판이 오늘날에도 그의 신학을 왜곡된 방식으로 묘사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이해와 관련해서 그러했다. 우리의 분석은 이런 학문적 빈틈이 남긴 문제를 다루면서, 정통 니케아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리의 지적 지형을 판단해 보려 했다. 앞서 다룬 많은 내용을 다시 논할 필요는 없지만, 리의 삼위일체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요약하고 전통 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를 최종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리가 삼위일체를 논할 때 사용하는 포괄적인 틀은 본질적/경륜적 이분법이다. 하나님의 본질, 즉 본질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리는 하나님이 불변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히 삼위일체인 분이시며, 니케아 용어를 명시적으로 인용하여 ‘세 실체 안의 한 본질(one ousia in three hypostases)’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리는 교부들이 제시한 두 가지 교리인 영원한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사용하여 삼위일체와 관련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며 양태론이나 삼신론과 같은 이단적 삼위일체 관점을 배제한다.
리에 대한 과거 비판에서 특히 상호 내재 교리는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리가 이사야서 9장 6절, 요한복음 14장 9절과 10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후반부와 같은 ‘난해한’ 삼위일체 관련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상호 내재 교리가 주요 해석학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리의 상호 내재 이해에 대한 과거의 비판들이 정당한 근거가 부족함을 발견했다. 리의 교리적인 관점은 교부들의 전통과 일치하며,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의 관점이 최근 복음주의적 관심의 부상과 관련이 있는 일부 사상가들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리의 언어가 비판자들에 의해 양태론적으로 보였던 부분도 사실은 그가 상호 내재 및 동시 존재 교리와 비교 대조하는 가운데 성경의 언어를 반복한 것임을 확인했다.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리의 이해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마지막 요소는 주로 비교적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리의 주장을,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삼위일체 사유의 발전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 즉 카파도키아 교부들, 아우구스티누스, 다마스쿠스의 요한, 아퀴나스, 칼뱅 등의 입장과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배치했다. 리가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대해 그가 이해한 바를 간단히 훑어보기만 해도 그의 견해가 니케아 전통의 삼위일체 사상과 본질적인 모든 측면에서 일치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글의 후반부는 리의 저술에서 여섯 가지 핵심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개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설명을 형성하고 이해를 돕는다.: (1) 신성한 경륜, (2)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3) ‘복합적인 영’, (4)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 (5)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 (6) 라틴 어구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 이 연구에서 도출된 주요 발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니케아 이전 및 니케아 교부들의 증언, 가톨릭 교회의 교리 요약, 동방 정교회,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는 신성한 경륜이 믿는 이들의 신화(deification)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2) 리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내용에서는 변화가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변화는 신성한 경륜과 관련하여서만 발생한다.
(3) 하나님은 신성한 경륜을 이루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셨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 인간 생활,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 승천이 있다. 리는 이러한 단계들을 ‘과정(process)’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가 ‘과정 신학’이나 본질적인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4) 이 ‘과정’의 결과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완결(consummation)’이었다. 즉,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영화롭게 되셨으며 또한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b).
(5) 하나님이 거치신 모든 과정(예: 육체 되심부터 승천까지) 그리고 하나님이 거치신 과정의 단계들과 관련된 모든 혜택은 믿는 이들의 유익을 위해 그 영 안으로 복합되었다.
(6) 하나님의 경륜적인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가 일곱 배로 강화되신 것이다. 이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은 신성한 경륜을 이루기 위해 필요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영을 성령의 위격에 연결시키는 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잘 확립되어 있으며, 일곱 영을 신성한 경륜의 성취와 연결시키는 것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에게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7) 리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과정, 완결, 그리고 강화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한 또 다른 틀은 아들의 경륜적 사역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리는 이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이라고 부르며, 이는 육체 되심, 포함, 강화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각 단계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되심’ 중 하나로 특징지어지는데, 곧 말씀께서 육체가 되셨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으며, 생명 주시는 영이 일곱 배로 강화된 영이 되신 것이다.
(8)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 교리는 리의 본질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지탱할 뿐만 아니라,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견해를 형성(shape)하는 역할도 한다. 그 결과, 리는 라틴 격언 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ia sunt를 그 실제적 측면에서 확인한다. 특정한 경륜적인 행위는 개별 위격에게 할당되지만(예: 오직 아들만이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음), 그 행위들은 신적 사역, 의지, 존재, 참여 측면에서 신성한 삼위일체 전체에 의해 공동으로 수행된다. 리에 따르면, 이것은 신성한 위격 각각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영과 함께 행동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행동하시며, 그 영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행동하신다. 앞의 요점들과 마찬가지로,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카파도키아 교부들, 아우구스티누스, 존 오웬, T. F. 토렌스 등과 같은 사상가들을 포함한 기독교 전통에서 충분한 지지를 찾아볼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리가 천착한 여러 방면을 종합한 후에, 우리는 그의 신학적 관점의 마지막 방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이 리가 현대 삼위일체 담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제안한다. 그것은 리가 제시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이다.
7. 삼위일체 교리를 영적 체험의 매개(Vehicle)로 접근하기
리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리를 연구하는 목적은 객관적이고 지적인 이해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리에게 있어서 이 교리의 주요 기능은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의 생명을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누리며 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신성한 경륜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리는 신성한 명칭의 계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마 28:19)—의 주요 목적이 믿는 이들의 체험을 위한 것이며, 그들이 ‘신성한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고 신성한 삼위일체와 함께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대한 해설에서 이러한 동인(impulse)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을 말하는 것은 사실상 사랑은 하나님이고, 은혜는 그리스도이며, 교통은 성령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은혜이신 아들, 하나님과 교통이신 성령 하나님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누림이신 삼일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단지 그분으로부터 혹은 그분에 의해 받은 축복만이 아니다. 신약에 있는 참된 축복은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 근원이신 사랑과 과정이신 은혜와 전달이신 교통으로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생명의 공급과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도달하신다. ...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신격의 삼일성이 조직신학의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백성에게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강하게 증명한다. 성경에서 삼일성은 결코 단지 일개 교리로 계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특히 그분이 창조한 사람과, 더 나아가 선택받고 구속받은 그분의 백성과의 관계와 관련되어 계시되거나 언급된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의 분배(dispensing)’는 우리의 분석에서 중요하다. 이는 삼위일체 교리와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리의 주장을 요약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리는 신성한 경륜이 믿는 이들의 신화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화의 매커니즘을 개념화하는 것에서, 즉 믿는 이들이 어떻게 신화되는지를 개념화하는 것에서 많은 초대 교부들과 차이를 보인다. 초기 해석자들은 신화가 성례에 참여하거나 로마 교황이나 동방 교회와 같은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구조와 연관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종종 주장했다. 그러나 리는 신화가 침례나 주님의 만찬과 같은 가시적 상징과 연관되지 않고, 오직 그것들이 나타내는 영적 실재와만 연관된다고 제안한다. 리에게 있어서 (만찬) 떡은 믿는 이들을 위해 부서진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몸과 모든 믿는 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단체적이고 비밀한 몸(corporate mystical Body) 둘 다를 상징한다. 동시에 그는 이것이 또한 체험할 수 있는 영적인 실재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즉, 삼일 하나님이 믿는 이들에게 매일 심지어 매 순간 먹고 누릴 수 있는 음식으로 자신을 제공하신다는 것이다. 반면에 잔은 우리가 죄에서 구속받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주님을 먹을(eat the Lord)’ 수 있게 하는 실재라고 리는 주장한다. 믿는 이들은 기도 중에 죄들을 자백할 때마다 이 구속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본다. 요약하면, 이 두 상징은 믿는 이들이 매일 참여할 수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키며, 이는 각 지방의 에클레시아에서뿐만 아니라, 리가 더 중요시하듯 교회 모임 밖에서도 믿는 이들이 삼일 하나님을 접촉하고 누릴 때마다 이루어질 수 있다.
리의 신학적 관점에서는, 매일 그리고 심지어 매 순간 삼일 하나님을 먹고 마시는 이러한 영적 실재들이 신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이 된다. ‘당신은 당신이 먹는 그것’이라는 흔한 문구에 기초하여, 그는 변화를 ‘새롭고 살아있는 요소가 점차 우리 안의 옛 요소를 내보내고 대체하는 내적인 신진대사의 과정’(롬 12:2)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변화는 주로 ‘가르침이 아니라 먹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리에 따르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다만 하나님을 먹어야 하며(simply eat God), (그럴 때) 그분 자신과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이 당신 안에 분배된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남아 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먹을’ 수 있는가? 어떤 메커니즘이나 요소가 믿는 이들의 구속적 변화를 촉진하는가? 어떻게 삼일 하나님이 믿는 이들에게 분배될 수 있는가?
리에게 있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단일한 대답은 이것이다. 곧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과정을 겪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 복합적이고, 생명을 주시며, 칠 배로 강화되신 영으로 완결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먹을 수 있고’ 전달 가능하며 분배 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실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리가 ‘하나님의 분배’ 또는 그의 저술에서 흔히 사용되는 ‘신성한 삼위일체의 신성한 분배’라는 표현을 쓸 때, 그는 자신이 믿기에 삼일 하나님의 중심 사역이자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나타내는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한 경륜의 성취는 신성한 삼위일체의 신성한 분배하심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은 신성하시며 또한 삼일(triune)이시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속에 분배하시는 단계를 완성하시기 위해 삼일이시다. 그분 자신을 우리 속에 분배하시기 위해 그분은 세 단계, 곧 아버지의 선택하심과 미리 정하심과 아들의 구속과 그 영의 인 치심의 세 단계를 취하셨다. 이 세 단계는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하심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 계획을 위해서 하나님은 행정적인 안배를 하셨는데, 이 안배는 바로 그분의 행정적인 관리로서, 과정을 거쳐 최종 완성된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을 그분이 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고, 변화시키신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에 분배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신격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되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단체적인 나타남인 새 예루살렘으로 확장되고 건축된다.
리의 신학의 이 부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핵심 이슈는 다음과 같다: 리가 보기에, 성경과 정통 니케아 삼위일체 교리를 신실하게 고수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믿는 이들이 영적 생명에서 성숙해지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직 삼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과 참여만이 신성한 경륜, 곧 믿는 이들에 의한 삼일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성취할 수 있다. 이 믿는 이들은 현재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종국에는 새 예루살렘이 될 이들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이 삼위일체에 대한 현재의 사유에 리가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바라고 본다. 왜냐하면 리의 이런 관점은 평신도 및 신학자 모두 흔히 과도한 지적 도그마에 경도되는 데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의 실천적인 방면으로 전환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리가 1970년대 평신도 변증가들로부터 오해받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1) 그가 학계와 직접적인 교류가 부족했던 점, (2) 그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복음주의 전통에서는 강조되지 않았던 교부들의 교리를 포함한 점, (3) 그의 새로운 신학적인 용어 사용, (4) 중국어-영어 번역과 관련된 어려움, (5) 전통적인 서양 기독교의 배경을 갖지 않은 이민자에 대한 기존 이단 대응 단체들의 인종적 적대감 혹은 적어도 불편한 느낌. 이러한 문제들을 지나치게 제시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러한 추정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높은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리의 삼위일체 교리가 본질적이든 경륜적이든 (1) 성경에 충실하며, (2) 정통 니케아 삼위일체 교리 내에 명확히 위치하며, (3) 현대 기독교 담론의 일부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삼위일체 사유의 노선과 일치하고, (4) 삼위일체 사유를 지적으로 이해할 가치가 있는 교리로 다루는 것만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영적인 체험의 매개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학계에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기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