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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탐방(10) - 다비드 벤 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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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탐방(10) - 다비드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1948-1968년 재임)

 

 

오늘은 벤 구리온 묘지를 탐방했다.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의 국부로서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의 삶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다. 이스라엘 현대 시오니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벤 구리온은 1973년 서거하여 그의 유언대로 네게브 스데 보커에 묻혔다.


Ⅰ. 업적


A.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처음 5년 동안 벤 구리온은 총리로서 대규모 이주를 성사시킴으로써 유대인의 인구수를 2배로 증가시켰다. 그는 새로운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이주자들에게 투자하고 외곽 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하여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유대인 간의 화합과 융합을 확립했다. 또한 그는 통합된 공공교육 체계 속에서 광범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B. 벤 구리온은 또한 국방장관으로서 지하의 비밀결사대를 정규군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국가 수립 이전에 활동했던 정치적 성향의 의용군을 해산하고 군사적으로 단일화되고 탈 정치적인 IDF(the Israel Defense Forces: 이스라엘 방위군)를 창설하였다. 그의 능력과 영향력은 1948년 독립 전쟁의 승리와 그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6,373명이 전사하는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그는 예멘으로부터 유대인들을 공수하는 계획인 “요술양탄자 계획”(Operation Magic Carpet)과 물 운반시설의 건설 그리고 혁신적인 지역 개발 계획 등을 주도하였다.


C. 국제 분야에서 벤 구리온은 논란이 많았던 전후 배상 문제를 서독과의 협정 체결로 완결지음으로써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비동맹 그룹으로부터 이탈하여 친 서방 입장을 취하는 정략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전략적 조치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와의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유대 관계의 강화를 이끌어 냈다.


D. 벤 구리온은 1960년대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총리와 국방장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록 그는 2차례에 걸려 정치계로부터 은퇴하기는 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정치의 배후에서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Ⅱ. 벤 그리온 일대기


1886년 - 벤 구리온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폴란드에서 출생했다.


1900년 - 그는 종교 분야에서만 사용되던 히브리어를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사용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청년 단체인 에즈라(Ezra)를 결성하였다.


1903년 - 최초의 사회주의-시온주의 정치 단체인 포알레이 시온(Poalei Zion, 시온의 노동자들)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그의 지도력 하에서 수 십 년 동안 시온주의의 사회-정치 조직을 주도하였다.


1906년 -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기 위해 폴란드로부터 이주하여 제 1차 시온주의 정착민(1882-1903년)들에 의해 건설된 유대인 농업 정착촌 갈릴리에 있는 오렌지 농장과 포도주 저장소의 노동자로 일했으며, 그곳의 파수꾼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것만이 시온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며, 이 이외의 방법은 단지 자기 기만이며, 공허한 군말일 뿐이고, 말라리아와 기아 등 현실적 고통을 피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1906-1910년 - 벤 구리온은 시온주의 정치와 정책 확립에 헌신하여 유대인 자기방어 단체인 하쇼머(Hashomer)를 결성하였다. 또한 그는 포알레이 시온의 중앙위원회 일원으로서 정당정치(노동당의 전신)에 관여하고 있었다.


1908년 - 오스만 투르크에서 젊은 터키당(Young Turks) 혁명이 발생한 후, 벤 구리온과 일단의 포알레이 시온 행동주의자들은 이스탄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이 동안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시온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이듬해 그와 이츠하크 벤 즈비(Yitzhak Ben Tzvi, 제 2대 대통령)를 포함한 포알레이 시온의 행동주의자들을 추방하였다.


1910년 - 예루살렘에서 발행된 당 기관지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어 이 때부터 다비드 벤 구리온이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915년-1917년 - 벤 구리온은 미국에서 시온주의 노동당의 미국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이 후 그는 제에브 야보틴스키(Ze'ev Jabotinsky)가 창설한 영국 군대의 예하 부대인 유대인 재향군인회의 일원으로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왔다. 그는 원래 영국 군대 소속의 유대인 부대를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방식의 부대 편성이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공동체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7년 - 영국의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이후 입장을 변경했으며, 터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영국 군대 내에 유대인 부대를 창설했던 야보틴스키의 계획에 동참하였다.


1921년 - 벤 구리온은 1920년 창설된 히스타드루트(Histadrut: 노동자총연맹)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히스타드루트의 조직 강화 시기인 1935년까지 사무총장직을 수행하였다. 그가 통제하고 지배했던 기간 동안 히스타드루트는 단순한 무역연맹에서 탈피하여 향후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 사회, 경제 조직들과 문화 단체 그리고 협력 단체들을 창설하였다. 이렇듯 히스타드루트는 국가 수립들 준비하기 위한 경제의 하부구조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조직체를 제공해 주었다.


1930년 - 벤 구리온은 노동연맹과 젊은 노동자당을 마파이(Mapai, 노동당)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파이의 공식 명칭은 이스라엘 노동당(The Party of the Workers of the Land of Israel)이었으며, 이 당은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을 수립하여 초대 총리직을 맡은 위기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도하고 통치했던 집권당이었다. 마파이에서 벤 구리온은 민족주의적-사회주의적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1935년 - 마파이 이스라엘 노동당의 시온주의는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마파이에서 벤 구리온은 유대인 집행부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집행부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준 정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된 1948년까지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벤 구리온은 시온주의 역사의 과정과 자신의 위치, 그리고 유대인 국가의 성격을 정립하였다.


1937년 - 필(Peel)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땅의 분할을 제안하였다. 이 위원회는 아랍인들에게는 1922년 트랜스요르단 창설 이후 위임통치 지역으로 남아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세계 유대인 사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벤 구리온은 시온주의 운동이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모든 영향력과 지도력을 동원하였다. 한편 시온주의 지도부가 마지못해 이 계획을 받아들이자, 이번에는 영국이 이 계획의 실행을 반대하였다.


1939년 -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이 이주하는 것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을 구입하는 것을 규제하는 백서(White Paper)를 발표하였다. 벤 구리온은 이를 벨푸어 선언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규정하였다. 유대인 이주와 정착 문제에 대한 영국의 제한과 영국이 나치 독일과 전쟁 중이라는 두 가지 상충된 사안으로 고심하던 벤 구리온은 시온주의 정책을 친 영국 노선으로 변경하였다. 그는 “우리는 마치 백서가 없었던 것처럼 영국을 지원할 것이며,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우리는 영국의 백서에 분연히 저항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 만 명의 유대인들이 영국 군대에 자원했으며, 영국의 백서에 상관치 않고 유대인의 이주와 정착도 계속되었다.


1942년 - 벤 구리온은 시온주의 운동의 새로운 방침인 빌트모어(Biltmore) 계획을 입안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계획은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를 추진하였으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의 창설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1945년 -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의 비극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백서의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영국과 이스라엘의 대결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1946년 - 벤 구리온은 유대인 준 행정부의 국방장관직을 맡았으며, 유대인의 대규모 이주 계획에 대한 영국의 봉쇄 조치에 대항하는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는 영국 정부에 불법적인 대규모 이주의 실행으로 도전하였으며, 팔레스타인의 모든 지역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함으로써 유대인 국가를 위한 사실상의 국경선을 설정하였다. 그는 유대인 정착 계획을 확대함과 더불어 유대인의 방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 무기의 구입을 추진하였다.


1947년 -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악화되자,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하였다. 11월 27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의결하였다.


1948년 -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자, 유대인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선언했으며, 유대인 망명자들의 대규모 이주 계획을 단행하였다.


1953년 - 벤 구리온은 건강의 악화로 2년 동안 정부 직책으로부터 사임하였다. 사임 후 그는 네게브(Negev)의 스데 보커 키부츠(Sde Boker Kibbutz)에서 생활하였으며, 이스라엘 젊은이들에게 모범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1954년 - 정보관련 대 실책인 라본(Lavon) 문제가 발생한 후, 벤 구리온은 다시 국방장관으로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다. 같은 해 실시된 선거에서 승리한 벤 구리온은 다시 총리직에 복귀하였다. 그는 국방 정책을 재평가한 후 국경 근처의 테러 활동에 대한 보다 단호한 대응을 주장하였다. 그는 프랑스와의 긴밀한 협조에 근거한 군사 전략을 수립하였으며, 양국의 관계는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1956년 - 시나이 전쟁에서, 비록 이스라엘은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이집트로부터 철수했지만, 그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유대인 정착지에 대한 아랍인들이 테러 공격과 파괴 행위를 중지시킬 수 있었으며, 홍해로 항해하는 이스라엘 선박에 대한 이집트의 봉쇄조치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1963년 - 벤 구리온은 1954년의 라본 사건이 다시 거론되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다시 한번 총리직에서 사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이스라엘 총리로서 13년을 포함한 거의 30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1965년 -그는 선거 제도 개혁과 새로운 정당인 라피당(Rafi)의 창당을 지지하며 새로운 정치 인생을 계획하였으나, 라피당은 크네셋(Knesset: 이스라엘 국회) 선거에서 10석밖에 얻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1970년 84세로 공직 생활에서 은퇴할 때까지 크네셋의 의원으로 남아 있었다.


1973년 - 이스라엘의 현대 시오니즘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벤 구리온이 서거하여, 그가 처음으로 공직에서 사임한 후 찾았던 네게브의 스데 보커에 묻혔다.


Ⅲ. 관광지


A. 네게브의 아인 아브닷 국립공원(The Ein Avdat National Park) 협곡의 상류인 남쪽 절벽 위에는 벤 구리온과 그의 아내의 묘가 있다. 이 절벽에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협곡과 아브닷 평원의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절벽 위에 세워진 묘 주변에는 사막 환경에 적합한 식물들로 가꿔진 정원이 있다.


1. 현재 아인 아브닷 국립공원은 염소과의 초식동물 아이벡스(Ibex), 개의 일종인 그리폰(griffon), 그리고 맹금류의 자연 서식지로 보존되고 있다.


2. 다비드 벤 구리온의 생가: 퇴임 후 생을 마감한 집, 작고 소박한 집이다.




벤_구리온.jpg

 

벤 구리온 초대 이스라엘 총리

 

 

벤_구리온_관광지.jpg

 

벤 구리온(1886-1973)의 무덤 유언대로 사막이 보이는 네게브
스데보커에 부인과 함께 나란히 안장되었다

 

 

벤_구리온_무덥.jpg


탐방팀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벤 구리온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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