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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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의 글에 대해 반박을 해볼까?(7)
[이인규님] 다시 말하여 ‘육신에 있다’는 말의 뜻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상징적이며 상태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며, ‘영에 있다’는 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신(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 로마서의 문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후에(롬 3:21-5:11) 어떻게 하면 성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그의 글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롬 5:12-8:13). 그런 그가 롬 8:9 후반부(삽입부)를 제외하고 갑자기 '거듭남'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특히 롬 8:7-9은 롬 8:6의 연속으로 회복역 롬 8:6은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롬 7장의 싸움과 연속된 것으로 비록 우리 안에 '생명의 영의 법(롬 8:2)'이 있지만 우리의 생각을 육체가 아닌 영에 두어야 생명의 영의 법이 작용함을 알 수 있다(무조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선택권'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하는데 우리의 실지 체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알려 주고 있다. 즉 거듭난 믿는 이라 하더라도 그의 생각을 육체에 둔다면 '사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인규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이인규님의 주장대로 육신에 있지 않고 항상 영에 있는 그런 사람인가? 그래서 성화될 필요도 없이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그런 놀라운 사람이란 말인가? 물론 이인규님의 주장처럼 '육신(육체)'이 전인적인 면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므로(가령 갈 5:17) 우리는 분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을 외면하고 성경에 제시된 한 방면의 진리로 성경에 제시된 다른 방면의 진리를 배척하고 외면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신실하지 않은 것이고 결국 '생명의 성장'에 손실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인규님]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고깃덩어리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외면하는 전인적인 인간 자체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은 문자적으로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혼에 속한 사람’(헬, 푸쉬기코스)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영과 혼은 실제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의미상 혹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 영은 인간성의 특수한 방면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을 결합케 하는 방편으로, 혼은 인간에 내재한 속사람의 세속적 행동과 관습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 이인규님은 인간론 맨 처음에 "정통교단에서도 어느 교단은 이분법을, 어느 교단은 삼분법을 가르친다. 물론 필자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언급을 했었다. 아마도 자신은 안토니 후크마와 같이 '전인설'을 주장하는 것 같은데 정통교회에서 실제로 이분설이나 삼분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그런데 미국 기독교심리학 협회 회장이었던 안토니 후크마는 이인규님과는 다르게 워치만 니의 내적 성찰에 대해 높이 평가한 바가 있다. 이인규님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인규님의 논리 전개를 보면 두 군데를 빼고는 거의 '전인설'에 입각해서 비판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다. "정통신학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봅니다.", "영혼과 육체가 따로 따로 주를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이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성경은 그들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뜻을 언급한다.", "물론 성경에서 바울은 육체와 영을 구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은 인간의 육신적 부분과 영적 부분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언급만으로도 이인규님이 '전인설'을 믿는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인규님이 두 가지 실수(?)를 하게 된다. 그 첫번째는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라고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자신은 '전인설'을 믿지만 성경에 '이분설'의 근거도 있다고 인정(?)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더 놀랍게도, "다시 말하여 영과 혼은 실제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의미상 혹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 영은 인간성의 특수한 방면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을 결합케 하는 방편으로, 혼은 인간에 내재한 속사람의 세속적 행동과 관습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이것은 그가 전인설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분설도 믿고 이제는 삼분설도 믿겠다는 의미인가? (심지어 '영'과 '혼'의 차이에 대해 설명까지 해 주고 있다.)
교회 역사가 지속되면 지속될 수록 과거에 오해받았던 단체가 '정통'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개신교' 전체가 그러했고 침례교가 그러했고 감리교가 그러했으며 오순절 교회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런 많은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이인규님은 '자신의 신학'이 있는가? 이인규님의 신학은 정통 카테고리 안에 있는 모든 단체의 신학과 동일한 신학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정통처럼 보이지만 '신앙'과 '체험'은 없는 죽은 카멜레온 신학일지도 모른다.
[이인규님]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자아가 죄를 짓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 이인규님은 여전히 '전인설'을 주장하고 있고, 죄(생명)와 죄들(행위)의 차이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육체에 거하는 것은 죄들(행위)이 아닌 죄(생명)이며 이 죄는 바깥의 낱낱의 범죄들이 아닌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게 하고 그런 자연스런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힘인 것이다. 이인규님은 이 힘이 자신의 전인적인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인가?
이인규님이 '마음'을 언급해 주셨으니 사람의 타락 과정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영'에는 '직감', '교통', '양심'의 세가지 기능이 있고, '혼'에도 '생각', '감정', '의지'의 세가지 기능이 있다. 그리고 '마음'은 혼의 세가지 기능에 영의 '양심'이 더해진 것이다(자세한 것은 '영에 속한 사람' 참조).
사람이 타락한 후에 그나마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죽었지만(기능을 상실했지만) '양심'은 오히려 깨어났기 때문이다(창 3:7, 롬 2:15). 만일 사람이 이 양심을 주의한다면, 그렇게 '악인'은 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의 죄에 굴복하고 영의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여 혼의 의지로 죄를 계속 선택할 수록 '양심'은 화인맞게 된다(딤전 4:2). 즉 감각이 없게 되어 더 이상 경고의 음성을 발하지 않게 된다.
이 시점이 되면 혼의 생각은 갈수록 죄를 '정당화' 하는 이론의 견고한 요새가 있게 되며(고후 10:4-5) 감정은 갈수록 자극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며 의지는 죄를 선택하는 데 빨라지게 된다(이 배후에는 우리의 혼을 차지하려는 '영적 전쟁'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반대되는 위의 예수님이 언급하신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되면 죄를 짓는 것이 '전인적'으로 보이게 된다.
'죄'와 '죄들'에 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링크를 참조해 보실 수 있다. https://www.localchurch.kr/21853
[이인규님] 즉 (1) 이단적인 신론인 양태론 (2) 이단적인 아폴로내리우스의 기독론 (3)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삼분법적인 인간론과 이원론이 혼합되어 “하나님 = 예수 = 살려주는 영”의 공식을 만들어내고, 예수를 “신성(영) + 인성(육 + 혼)”으로 분리시킨 다음에, “예수그리스도 = 지방교회 교인 = God man"이라는 공식을 만들어서 신인합일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부활이며 천국이며 재림이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유일하고 참교회이며, 기독교는 사탄의 왕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오해이다” 혹은, 자신들이 “복음주의이다”라고 거짓 조작을 하는 자들이 바로 지방교회의 정체인 것이다.
---> 이인규님의 모든 오류의 근원은 그의 '인간론'에 있다. 성경이 '구분'해 놓은 것을 구분하지 않을 때 결국 기독론에도, 그리고 신론에도 오류가 있게 된다. 이인규님은 왜 삼신론을 믿게 되었는가? 사람을 전인적으로 보다 보니 성령님은 외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해 주시는 분이고 그의 안에 거하시는 분은 아니게 되며(요 14:17, 롬 8:9) 이런 관점이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는 성경적인 상호 내재를 믿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삼위일체는...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삼신론 이단자가 된 것이다.
반면 지방교회 측은 사람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는 성경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기에(살전 5:23), 그리고 체험적인 면에서도 자신의 영 안에 주님께서 계시는 것을 늘 '체험'하고 있기에 요 14:10-11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전인적으로 보는(이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균형잡힌 관점을 갖고 있기에 마 3:16-17과 같은 말씀도 부인하지 않고 성경대로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와 대화 하면서 동시에 영 안에서 주님과 교통하는 것도 가능한 '전인적'이면서도 셋으로 구분된 인간론을 이론이 아닌 날마다의 체험으로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적인 인간론을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를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이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독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한 사람은 아니며 이인규님이 '전인설'을 믿고 있기에 분리라고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이인규님이 '영'과 '혼'의 구별을 말해 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인규님도 자신이 정죄한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을 믿으려는 것인가? 그리고 지방교회 측은 누구보다도 '사람의 영'의 존재를 인정하고(롬 8:16) 삼분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 사람의 영이 없는 아폴리나리우스의 기독론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소설을 써도 너무 쓴 것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요한 웨슬리의 주장이 더 의심스러운 것은 아닌가?
"인간의 자연적 구성요소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에서 한가지 흥미있는 주장이 있다. 모든 자연인은 이분설로 설명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영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살전 5:23에서 영, 혼, 육을 말할 때 "이 셋 중에서 뒤의 둘 만이 인간의 자연적 구성 요소이다. 첫째 것은 기독교인에게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부수적이며 초자연적 은사이다.""(한영태, 웨슬레의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76-77쪽) 이인규님은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이 신성(영)을 갖게 되면, 그들이 바로 God-man 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는데 혹시 위 요한 웨슬리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기독론에서 이인규님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형제들'로 만듦으로 신격의 제 4격이 되게 한 것은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엄중한 것이고 성경의 진리를 가리는 것이지만 기본 진리만을 아는 사람들이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심화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생자의 형제들이 아닌 하나님의 맏아들(그분의 '인성'이 거룩하게 되고 높여짐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의 형제들이 되었기에(롬 8:29) '신인합일론'과는 무관하고(이인규님이 주장한 것이 사실 신인합일론이다) 성경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요 11:25)라고 말씀하신 분과 연합되었기에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면 생명과 평안을 체험하고(롬 8:6)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게 되며(빌 3:10) 우리의 마음이 '천국'이 된다(마 5:3, 10). 물론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우리의 생명의 성장 안에서 기다리며(막 4:26-29, 빌 3:20) 모든 믿는 이들이 실제로 부활할 것과(고전 15:51-53, 살전 4:15-16) 장차 이 땅에 출현할 천국(천년왕국)의 보상에 참여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전 4:5, 고후 5:10).
그리고 우리는 배타적으로 보일지라도 성경에 없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고(계 17:1-6) 사람을 기쁘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갈 1:10). 그리고 우리는 균형 잡힌 관점으로 모든 믿는 이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들로 인정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를 지키기를 힘쓸 것이다(요 17:21, 23, 엡 4:3). 우리는 비성경적인 것에 배타적이지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에 대해 배타적이지는 않으므로 이인규님의 "자신들만이 유일하고 참교회이며"라는 주장은 우리와 무관하다(성경의 교회론은 '사람'에 대한 것인데 이인규님은 혹시 비성경적인 교회론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근거도 없이 "기독교는 사탄의 왕국이라고 주장"했다고 모함함으로((1)번 글을 보라) 믿는 이들 사이에 미움과 분열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믿는 이들과 교통을 추구하려는 지방교회 측의 낮은 자세에 대해 "자신들이 “복음주의이다”라고 거짓 조작"을 한다고 폄하하고 조롱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론에 대한 하나의 잘못된 이해가 또 다른 잘못된 이해를 가져오고 와이셔츠의 처음 단추를 잘못 끼웠을 때 결국 (위 이인규님의 주장과 같은) '완성된 소설'이 나오게 된다. 이런 소설이 '정통'의 입장에서 발매가 되면 인기리에 팔리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는 땅에 파묻히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살아 있고 그분이 하신 말씀은 결코 헛되이 그분께 돌아가지 않게 된다(사 55:9-11). 그분의 회복은 여전히 전진할 것이며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고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에 의해 높임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이인규님] 6. 신인합일론
1) 신화(신인합일론,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 : 부활, 거듭남, 재림과 동의어
지방교회는 자신들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는데, “자신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신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지방교회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격적인 위치가 된다고 가르친다고 비판한 적이 없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는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예수는 God-man의 첫 샘플이었으며, 지방교회 교인에게 그 영이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지방교회, 몰몬교, 신천지등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것을 신인합일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지방교회의 신인합일설은 사람과 하나님의 구별이 없는 "똑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 한 권위 있는 이단 연구 단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러나 CRI라는 단체는 2009년 처음으로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는 발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틀렸었다(I was wrong.)”라는 말보다 더 하기 힘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는 격언을 실천하는 사역으로서, 기꺼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2009년 제32권 제6호 특집판, 5쪽)
그리고 이인규님이 제기한 소위 「신화(Deification)」 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러한 표현은 뉴 에이지나 힌두교 지도자들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비기독교적이거나 우상 숭배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몰몬 교도들이나 암스트롱 교도들도 그러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에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이거나 이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이나 늦은 비(Latter Rain) 교사들이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가장 우호적으로 말해서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교회 교부들과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정통 교리의 범주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의 전후 관계와 용어의 정의를 제공하지 않은 채 이러한 인용문들을 정통이 아니라는 증거로 공표한 것은 학자답지 않고, 감정적이며, 무책임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2009년 제32권 제6호 특집판, 25쪽)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 초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의 선포에 반향하며 다음과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미국 복음주의신학자협의회(ETS) 연례모임에서 발표)
[이인규님] 2)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든지 "예수를 닮는다"는 견해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등의 주장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성경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이 무엇일까?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방교회가 신인합일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정통신학의 연합개념과 같다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인 그루뎀은 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어감에 있어 각자의 개성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되지는 못하며 그리스도에게로 흡수되거나 우리의 개성을 영원히 잃어 버리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자신으로 남아서(고전13:12)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요일3:2) 그의 얼굴을 대하며 그에게 경배를 드리고 이마에 이름을 가지고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성품에 있어서는 서로 정확하게 같으면서도 독립적인 위격으로 남아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도 다른 은사들과 기능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되어갈 것이다"(마10:39, 요10:3, 계2:17, 시37:4)(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63쪽)
---> 이인규님이 위 글을 올린 것은 지방교회 측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해 깊은 연구 없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함으로써 반론을 시도하고자 한다.
"...초기 교회가 구원을 신화로 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도에 있어 우리는 이와 동시에 구원에 관한 현대의 유력한 견해가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 나타난 진리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 시대에 사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고 단언한다. 역사 속의 나중 단계에 의해 진리가 더 진보해야 할 때, 우리는 최소한 구원의 내용과 목표에 관한 이해에 있어 보다 원시적이다. 인간이 신화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설계하신 것에 저항하고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범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화에 관한 초기 교회의 가르침을 주의해서 살펴봄으로써 최소한 함축적으로라도 이 진술을 증명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신화로 최종 완결된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관찰해 온 바대로 하나님 안에서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때문에 사람은 결코 신격에는 참여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삼일성의 네번째 인격이 될 수 없고, 결코 신으로 경배 받을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창조물로서의 속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결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토록 사람의 형상과 사람의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결코 편재할 수 없다. 사람은 창조시 부여받은 제한된 정신적 기능을 영원히 가질 것이고, 결코 전지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 안과 밖 모두에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은 기껏해야 창조의 제한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신화 개념을 수용하는 많은 현대 교사들은 이러한 전제들을 무시한다."(“…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케리 로비쇼우, https://www.localchurch.kr/2663)
위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신화 진리의 '전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위 이인규님이 인용해 주신 웨인 그루뎀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웨인 그루뎀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간다'고만 주장한다면 어쩌면 지방교회 측의 신화 진리와 접점이 있는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래 내용을 주의해서 읽어 보기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행동을 흉내내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는 더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본받으면서 점점 그와 같이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간다.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러"(고후 3:18)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 간다(엡 4:13, 15). 그래서 마지막 결과는 온전히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롬 8:29; 고전 15:49),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되도록"(요일 3:2)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온전히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살후 1:10-12; 요 17:10)."
위 내용은 이인규님이 인용해 주신 글의 바로 위에 있는 문단으로 출처는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중권, 은성, 562-3쪽"이다. 그리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방교회 측의 주장과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처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인규님은 이 내용을 못봤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신학 이전에 정직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합당한 인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학을 말할 수도 있고 토론을 할 수도 있지만 상대방의 주장을 왜곡해서라도 입증해야만 되는 것이 '진리'라면 그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아닐 것이다. 이인규님은 무엇이 두려워서 신성한 무도회장에 웨인 그루뎀의 '신데렐라'는 오지 못하게 했는가? 왜 웨인 그루뎀이 연출한 무대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채 무도회를 시작하려고 한 것인가? 이인규님은 지방교회 측의 주장을 비판함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입증하는 데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정직한 이단 연구가가 되는 데도 실패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이인규님이 공정한 이단 연구가였다면 웨인 그루뎀이 주장한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으로 지방교회 측의 동일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지 찾아서 비교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웨인 그루뎀의 '하나님의 공유적인 속성'에 대한 내용은 감춘 채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대한 글만 인용을 하고 그것으로 지방교회 측의 '하나님의 공유적인 속성'에 대한 내용을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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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주님의 인도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인규님의 '지방교회의 이단연구보고서'에 대해 답변을 드려 보았다.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시고 미처 답변을 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더 나눌 수 있기를 원한다.
끝으로 이인규님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리고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작은 성도
이인규님께 드리는 글
이인규님은 자신이 신학책을 많이 보다 보니 자신이 신학을 잘 알고 있다는 '메타인지(meta-cognition)'의 오류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신학책들과 친숙한 것'을 '신학 자체를 잘 알고 있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메타인지'에 의해 자신이 속게 되면 그 친숙한 분야에 자신이 '전문가'라고 생각하게 되고 전문가다운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힐 수도 있다. 일반인들은 상대적으로 그 사람보다는 신학에 덜 친숙하기 때문에 그가 현란한 말로 '신학 지식'을 쏟아 내고 또 '정통 신학'을 사수한다는 '명분'까지 있으면 그의 행동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문가'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학'이 없다. 그는 책에서 읽은 정통에 속한 신학자들의 말은 다 자신의 사상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책에서 읽은 것이고 잠시 기억 속에 있을 뿐 논쟁이 시작되면 다시 찾아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주님은 항상 그분의 진리의 어떤 방면을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그것으로 전체 교회에 공헌하는 어떤 사람들을 일으키신다. 이런 사람의 신학은 기존의 신학의 기반 위에 있지만 그보다 더 전진된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의 신학, 자신의 체험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기존의 신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때로는 심한 반대를 받게 되는데 이럴 때 주님에 의해 부정적으로 사용받을 수 있는 사람이 소위 위에서 말한 '전문가'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악한 영'이 가장 부추길 수 있는, 망상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정도 체험이 있고 신학에 정통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때 쉽게 가말리엘이 취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가 쉽다(행 5:33-40).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 체험이 있어야만 '겸손'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체험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자신은 큰 태평양에서 다만 한 동이의 물을 길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저 바다보다도 넓을 수 있는 그분의 진리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인규님은 '이단 연구' 분야에 어느 정도 공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성공'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자신의 분량을 넘어서 결국 '망상'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이런 망상은 '성숙의 과정'에 이르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마도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겸손을 배우게 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이제는 나를 위한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게 하기 위해 때로 주님은 '악한 영'을 통해 우리로 망상에 빠지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아닌가?
주님 안의 연장한 성도들은 '망상'에 대한 많은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은혜는 그분의 빛 비추심과 함께 망상에서 돌이켰을 때 온다. 그분의 빛은 이유를 말하지 않으며 그분 앞에 쓰러지게 한다. 이것이 위협과 살기로 등등해서 교회를 잔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달려갔던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체험한 것이다(행 9장).
이인규님은 어쩌면 '하나님의 손길'을 못 보고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의 이 변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주님 앞에서 읽어 보라. 혹시 이인규님도 우리와 같은 '변론을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에 대해 알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밝혀져야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빛 앞에 엎드러진 겸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몫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인규님이 이 은혜의 몫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