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신화 논문(전문)―미국 복음주의신학자협의회(ETS) 연례모임에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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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논문은 아랫 글(https://www.localchurch.kr/29290)에서 소개해 드린 "지방교회 관련 ETS/EPS 논문들" 중 첫번째 것으로 한글 번역은 영어 원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최소한의 이해를 위해 보조 수단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비공식적인 번역이므로, 정확한 원문의 의미는 An open Letter 사이트(http://an-open-letter.org/)에 올려진 영어 원고(http://an-open-letter.org/ets-2015-in-life-and-nature-but-not-in-the-godhead)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Witness Lee’s Contribution to a Biblical Understanding of Theosis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신화(Theosis)의 성경적 이해에 대한 위트니스리의 공헌
“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With these few words, Witness Lee (1905-1997) both clarified and enhanced Athanasius’ memorable statement, “For 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Αὐτὸς γὰρ ἐνηνθρώπησεν, ἵνα ἡμεῖς θεοποιηθῶμεν”). Over time, evangelical scholars have become familiar with the fourth-century aphorism, and many now recognize theosis[1] at least as an alternative historical understanding to the nature of salvation. Outside the usual circles, this growing interest has led to fresh engagement with the writings of church fathers and of Eastern Orthodox theology.[2] Some have engaged in a quest for a specifically evangelical doctrine of theosis[3] and others for a reconsideration of evangelism itself in light of its implications.[4] Others have looked for traces of theosis in the writings of Protestant standard-bearers like Martin Luther, John Calvin, Jonathan Edwards, and John Wesley.[5]
위트니스 리(Witness Lee, 1905-1997)는 이러한 짧은 말로 다음과 같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기억에 남을 명제를 분명히 하고 강화하였다. “그분이 사람 되심은 우리로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Αὐτὸς γὰρ ἐνηνθρώπησεν, ἵνα ἡμεῖς θεοποιηθῶμεν”).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 4세기 금언(金言)에 익숙해졌고, 많은 이들은 신화(Theosis)를 적어도 구원의 본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대안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테두리 밖에서 이 신화(Theosis)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교부들과 동방 교회의 저술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부는 특별히 복음주의 신화 교리를 탐색해 왔고, 다른 이들은 복음주의 자체를 신화 사상의 조명 아래서 재고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요한 웨슬리 같은 개신교 중심인물들의 저술 속에서 신화의 사상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Thus far, the presentation of theosis as found in Witness Lee’s ministry has gone largely unnoticed. His statement that “God became a man so that man may become God in life and in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6] may still elicit a sense of misgiving, especially if unfamiliar with its professed scriptural and historical underpinnings. Yet, regardless of one’s stance, it may at least be evident that Witness Lee’s statement shows an attempt at specifically defining what theosis is (“in life and in nature”), what it is not (“in the Godhead”), and seeks to establish definite boundaries as to its scope.
지금까지는 위트니스 리가 그의 사역 중에 제시했던 신화 진리는 큰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라는 그의 진술은 이 선언의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토대에 특별히 익숙하지 않다면 여전히 불편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이것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든지 분명한 것은 위트니스 리의 진술이 신화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생명과 본성에서는”) 무엇이 신화가 아닌지를(“신격에서는 아니다”) 명확히 하려고 했고, 신화 개념의 범위에 대해 일종의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Throughout his ministry, Witness Lee paid much attention to the believers’ personal and corporate experience of the Triune God. In doing so, he often referred to this relationship in terms evocative of theosis such as “union” and “mingling.” In later years, he embraced more overtly theotic language, including his refinement of Athanasius’ iconic saying quoted above. Yet, Witness Lee was not limited to the aphorisms of the early church. Building upon his realization of “union” and “mingling,” Witness Lee went on to describe the issue of man’s divinization as a corporate entity, a “universal, divine-human incorporation,”[7] a mutual coinhering with the coinhering Trinity.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사역 동안에 믿는 이들이 개인적이고 또한 단체적인 방식으로 삼일 하나님(The Triune God)을 체험하는 것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종종 이러한 관계를 ”연결(union)”과 “연합(mingling)”과 같은 신화 사상을 상기시키는 용어들을 써서 설명했다. 후기 사역에서 그는 특히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적인 문구를 개선하여 새로 만든 위에서 인용한 명제(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를 포함한, 좀 더 명백한 신화적 용어를 채택했다. 그렇지만 위트니스 리는 초기 교회의 문구들에 제한받지는 않았다. 그는 “연결”과 “연합”에 대한 자신의 통찰에 근거하여, 인간의 신화의 결과는 하나의 단체적인 실체이며, “우주적이며 신성하고 인간적인 합병체”이고, 상호 내재하시는 삼일성과 상호내재 하는 것(a mutual coinhering with the coinhering trinity)이라고 더 진전된 방식으로 묘사했다.
When considering these statements, it bears mentioning that Witness Lee engaged mostly in spoken ministry of a homiletical style and that his spoken addresses form the basis for his published writings. To understand properly Witness Lee’s teaching concerning the union, mingling, and incorporation of God with man, it is important to apply the glossary he uses to set the scope and limitations of deification. Imposing definitions from other theological perspectives may lead to misunderstanding. As his teaching concerning theosis is presented here, Witness Lee’s own definitions of key words and phrases will be provided.
이러한 진술들을 대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트니스 리(Witness Lee)는 주로 설교 형식의 말로 하는 사역(spoken ministry)에 전념했고, 그것을 근간으로 하여 그의 활자화된 저서들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결(the union), 연합(mingling), 합병(incorporation)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합당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신화의 범위와 경계를 세우려고 사용한 어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신학적 관점들에서 유래된 정의들을 무작정 덧씌우는 것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이 논문은 위트니스 리의 신화 가르침은 물론 주요 어휘와 구문들에 대한 위트니스 리 본인의 정의들도 아울러 제공할 것이다.
This paper will begin by offering a brief survey of theosis as taught by several leading theologians from the second through the fourteenth centuries. This will demonstrate that the early church did hold the conviction that salvation itself is the process of deification. Such a historical consideration will lay the groundwork for a review of Witness Lee’s understanding that, through salvation, believers experience a union with God in His life, a mingling with God in His nature, and an incorporation with God in His Person. In so doing, this paper will contend that Witness Lee’s view of theosis is not only worthy of serious consideration by theologians and scholars but is distinctive in presentation and application, offering a comprehensive approach in both theology and experience, while fully respecting the boundaries of the truth as it has long been understood.
이 논문은 2세기에서 14세기까지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신학자들이 가르쳤던 신화 사상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이는 초기 교회가 구원 자체가 신화의 과정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예증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이해는 위트니스 리가 믿는 이들은 구원을 통해 그분의 생명에서는 하나님과 연결을, 그분의 본성에서는 하나님과 연합을, 그분의 인격에서는 하나님과의 합병을 체험한다고 이해한 것을 재음미해 볼 토대를 놓게 될 것이다. 이 논문은 그렇게 함으로써 신화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관점에 대해 신학자들과 학자들이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며, 그 제시와 적용에서도 특색이 있으며, 오랫동안 이해되어 온 진리의 경계들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신학과 체험 모두에서 포괄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The Focus of the Incarnation: “That We Might Be Made God”
성육신의 초점: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In their writings, a number of the church fathers directly relate the believers’ deification to the incarnation of Christ. Deification, from their perspective, is the focus of the incarnation, the overarching end in view, the purpose for which Christ took on the flesh of humanity. Irenaeus (c. 130-c. 200) writes: “Jesus Christ our Lord, the Son of the Most High God…would become the Son of man for this purpose, that man also might become the son of God” (Against Heresies III.10.2). Elsewhere, he refers to “the Word of God, our Lord Jesus Christ, who did, through His transcendent love, become what we are, that He might bring us to be even what He is Himself” (Against Heresies V.pref), a pronouncement that Jeffrey Finch calls “the most compelling and often-repeated form of the perennial cur Deus homo question [“Why did God become human?”] for generations to come, even until today.”[8]
많은 교부들이 그들의 저술에서 믿는 이들의 신화(deification)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직접 연결지어 설명한다. 그들이 볼 때 신화는 성육신의 초점이자, 가장 중요하게 의도된 결과이며,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으신 목적이다. 이레니우스(Irenaeus, c.130-c. 200)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Against Heresies III. 10. 2)고 말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초월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의 어떠하심이 되셨는데,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그분의 어떠하심으로 이끌기 위함이다”(Against Heresies V. pref)라고 말하는데, 제프리 핀치(Jeffrey Finch)는 이러한 선언,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는 모든 세대에 걸쳐 심지어 오늘날까지 “가장 강력하고 자주 반복되는 형태의 질문”이라고 부른다.
Athanasius (c. 296–c. 373), frames deification similarly: “For 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and He manifested Himself by a body that we might receive the idea of the unseen Father; and He endured the insolence of men that we might inherit immortality” (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54). Context indicates that Athanasius was not principally concerned with systematically defining theosis, but rather with defending the first part of his equation: that God—and not something less than God—became man. While fighting against the Arian heresy that Christ was not eternally God, Athanasius defends the divinity of the God-man in this way: “The Son is not such by participation” but is Himself the “deifying and enlightening power of the Father, in which all things are deified and quickened.” (De Synodis 51). “For the Alexandrian doctor,” contends Jules Gross, “the divinization of the Christian is not a more or less secondary and casual element…but the central thought of his theology,” even to the extent that “Athanasius bases upon it one of his principal arguments for the perfect divinity of the Son of God.”[9] It may thus be considered that the greater miracle is not that man becomes God, but that God began the process of man’s divinization by Himself becoming what man is in creation.
아타나시우스(c. 296-c. 373)도 유사한 방식으로 신화를 말한다. “그분은 우리로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갖게 하려고 하나의 몸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우리가 불멸성을 유업으로 얻게 하려고 사람의 무례함을 견디셨다”(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54). 문맥을 볼 때 아타나시우스는 신화를 체계적으로 정의하는 것에 주로 관심을 두기보다는 뒤에 이어지는 그의 명제의 앞부분을 방어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하나님–하나님보다 열등한 그 무엇이 아니라–이 사람이 되셨다. 그리스도가 영원히 하나님이 아니라는 아리안주의 이단에 대항하여,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사람의 신성을 방어한다: “아들은 참여(participation)에 의해서가 아닌 그분 자신이 아버지의 신성화하고 빛을 주시는 능력이시며, 그 능력으로 모든 것들을 신성하게 하고 생명을 주신다”(De Synodis 51). 쥴스 그로스(Jules Gross)는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편에 서서”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신화는 이차적이고 인과적인 요소가 아니며 그의 신학의 중심 사상이며”, 엄밀히 말하자면, “아타나시우스는 신화 사상의 토대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완벽한 신성을 지지하는 그의 주요한 논지 중 하나로 배치하였다.”라고 옹호한다. 그러므로 더 큰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신화하는 과정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Gregory of Nyssa (c. 335–c. 395) is referred to by Gross as “the witness par excellence of the Greek doctrine of divinization”[10] with whom the “physical conception of divinization outlined by Irenaeus and developed by Athanasius reaches its most accomplished expression.”[11] Like his forebears before him, Gregory presents theosis in light of the incarnation, writing in The Great Catechism: “He was transfused throughout our nature, in order that our nature might by this transfusion of the Divine become itself divine” (The Great Catechism XXV) and later, “The God who was manifested infused Himself into perishable humanity for this purpose, that by this communion with Deity mankind might at the same time be deified” (The Great Catechism XXXVII).
그로스는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c. 335-c. 395)를 “헬라의 신화 교리를 가장 뛰어나게 증거한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그 이유는 이레니우스가 윤곽을 잡고 아타나시우스가 발전시킨 신화의 실제적인 개념이 그레고리에 의해 가장 세련되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는 선배들처럼 성육신의 관점에서 신화를 제시하면서 대교리서(The Great Catechism)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 곳곳에 주입되셨고 이는 신성한 분의 주입으로 우리의 본성 자체가 신성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The Great Catechism XXV).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인간이 신격과 이러한 영적 교감을 통해 신성화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죽을 운명의 인성 안으로 주입하셨다”(The Great Catechism XXXVII).
Although the light of deification did not shine as brightly in the ensuing years, there remained, in Gross’s terms, “occasional attestations.”[12] The writings of 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c. 500) and Maximus the Confessor (c. 580–682) “prove that the doctrine and, perhaps even more, the mysticism of theopoiesis were indeed playing a role of the first order in the theological thought and piety of the Greek church of the sixth and seventh centuries.”[13] Both, according to Gross, “agree in seeing deification through the mystical union with God as the goal of creation and of the incarnation, as well as of the moral activity of humankind.”[14]
비록 후대에는 이러한 신화 진리의 빛이 이전처럼 밝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그로스의 표현처럼 “가끔의 증언들”로 명맥을 유지했다. 아레오바고의 성 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c.500)와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 c. 580-682)의 저술은 “6세기와 7세기의 그리스 교회의 신학적 사유와 경건에서, 하나님으로 만들어짐(theopoiesis)의 교리와 그에 따른 신비주의가 아마도 교리보다 더 중대한 방식으로 첫 번째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음”을 증명한다.” 그로스에 따르면 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과 신비로운 연합을 통한 신화가 창조와 성육신의 목표이자 인간의 도덕적인 행동의 목표라는 관점에 동의하였다.”
Then, in the eighth century, John of Damascus (c. 675–749), in common with many church fathers, “presents the deification of the Christian as a return to original perfection,” referring to “the divine likeness” as “a gift of God for our first parent, the result of a ‘divine participation’ which consisted in the contemplation of the Creator.”[15] “Along with the majority of the Greek fathers,” contends Gross, “Saint John of Damascus sees divinization as the pinnacle of salvation” and “testifies clearly to the vitality of the Christian ideal of θέωσις in the Greek church of the eighth century.”[16]
또한 8세기 신학자인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은 많은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원래의 완전함으로의 귀환으로 제시하였고”, “신성한 닮음(divine likeness)”을 “우리의 인류의 시조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창조주에 대한 묵상으로 이루어진 ‘신적 참여’의 결과”라고 했다. 그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대부분의 그리스 교부들처럼 신화를 구원의 정점으로 보며”, “8세기의 그리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신화(θέωσις)에 대한 궁극적 목적의 생동성을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The Palamite Light at the Top of Mount Tabor
다볼 산(Mount Tabor) 정상에서 비췬 팔라마이트의 빛(The Palamite Light)
During the fourteenth century, deification theology advanced significantly through the polemical writings of Gregory Palamas (1296-1359). A prominent monk of Mount Athos, Palamas was a leading proponent of hesychasm, a tradition of prayer that developed among fellow Athonite monks who pursued mystical experiences. When hesychasm came under attack from Barlaam, a Calabrian monk and a contemporary of Palamas, there “erupted,” in the words of A.N. Williams, “a dispute over the foundations of theology, and especially, the rightful role of spiritual experience in theology.”[17]
14세기 동안에 신화 신학(deification theology)은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 1296-1359)의 논쟁적인 저술들을 통해 의미있는 진전이 있었다. 아토스 산(Mount Athos)의 저명한 수도자였던 팔라마스는 신비 체험을 추구했던 동료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도 전통인 헤시카즘(hesychasm)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칼라브리안 수도사이자 팔라마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발라암(Barlaam)이 헤시카즘을 비난한 그 때, “신학의 기초들 그리고 특히 신학에서 영적 체험의 적법한 역할에 대한 논쟁”이 A.N 윌리암스(A.N Williams)의 표현에 따르면 “촉발되었다”.
This theological dispute then set the venue for Palamas’ unfolding of the possibility for divinization. As Williams points out, Palamas presents deification not as an “end…to attain” but as a “warrant and datum in a dispute about the nature and sources of Christian claims to know God.”[18] He does not “defend his fellow monks by pointing to their experiences as evidence of divine favor. Instead, he uses the bare fact of such experience as a counter to the Barlaamite epistemology, which seemed to envisage little possibility of knowledge of God at all.” Thus the notion of theosis is not itself at issue; instead, it appears in defense of the possibility of a real knowledge of God.
이 신학적 논쟁은 팔라마스가 신화의 가능성에 대해 논지를 펼칠 기회를 제공했다. 윌리암스의 지적처럼, 팔라마스는 신화를 “도달해야 할 … 끝”이 아닌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본질과 근원들을 다투는 보증과 논거”로 제시했다. 그는 “동료 수도사들을 변호할 때 그들의 체험을 하나님의 호의의 증거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발라함적 인지론(the Barlaamite epistemology)에 대한 반론으로 그들의 체험을 가감 없이 제시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신화의 개념이 현안이 아니었다. 대신에 논쟁의 중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실제로 소유할 가능성이 있는가였다.
In Palamas’ view, it is the practice of hesychastic prayer that bears the fruit of deification, exemplified in the light of Christ emanating to His disciples at the top of Mount Tabor. There the Lord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and His face shone like the sun, and His garments became as white as the light” (Matthew 17:2). Palamas applies this experience to “the deifying gift of the Spirit” as the “mysterious light” that “transforms into light those who receive its richness.”[19] Palamas understands the Son, who became a “single body with us,” as personifying the hypostatic union of God with man, to then “illuminate those who worthily commune with the divine ray of his body…by lighting their souls as he illuminated the very bodies of the disciples on Tabor.”[20] In other words, says Williams, “what one encounters” is “what one becomes.”[21]
팔라마의 관점에 따르면, 신화의 열매는 다볼 산 정상에서 그리스도의 빛남이 그분의 제자들에 발산된 예처럼 ‘헤시카적 기도’(hesychastic prayer)의 실행으로 얻어진다. 거기에서 주님은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마 17:2)”는데, 팔라마스는 이러한 경험을 “그 영의 신성하게 하는 은사”이며 “그 빛의 풍성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신비한 빛”이라고 말한다. 팔라마스는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하여 단일한 몸”이 되신 성자를, 그분께서 다볼 산 위의 제자들에게 비추심으로 그들의 영혼들을 빛나게 하시는 방식으로 … 그분의 몸의 신성한 빛과의 교감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에게 비추어 하나님과 사람의 위격적 연합을 체현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 달리 말하자면, 윌리엄스의 말대로 “사람이 조우하는 그것(what one encounters)”이 “그 사람이 된다(what one becomes)”는 것이다.
Barlaam of Calabria forcefully opposed this mystical emphasis. He argued that any claim for a direct encounter with the Divine constituted a violation of the principle of God’s essential unknowability, pushing Palamas into deeper inquiry into the nature of the Trinity and of God’s relationship with His creation. Amid the resulting controversy, Palamas more clearly delineated the Cappadocian distinction between God’s incommunicable essence and His communicable energies. While the light from Christ at Mount Tabor was indicative of an energy radiating through Christ that is accessible to man’s experience, God in His essence remains essentially impenetrable to human participation or engagement.
칼라브리아의 발라암은 이처럼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다는 어떤 주장도 하나님의 본질적 불가지성(God’s essential unknowability) 원칙에 어긋난다고 논평했고, 이로 인해 팔라마스는 삼일성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물과의 관계의 본성에 대해 더욱 깊이 고찰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논쟁에서, 팔라마스는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그의 공유적 에너지들을 구별한 것을 더욱 정교하게 기술했다. 즉 다볼 산 위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빛은 인간이 체험하기 쉬운, 그리스도를 통해 방출된 에너지의 표시였다면, 본질 안에 계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참여하거나 관여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The distinction, according to John Meyendorff, is “a real distinction…which implies a ‘participation’ of created man in the uncreated life of God, whose essence remains transcendent and totally unparticipable.”[22] In other words, there is a reality in God that allows for theosis (and for the incarnation, for that matter), while still preserving His fundamental transcendence. God’s “energies,” writes Vladimir Kharlamov, “reveal God himself without revealing God-in-himself. Energies simply make the reality of God present to human participation and understanding, placing an ontological differentiation within God that renders the interiority of God imparticipable and absolutely incomprehensible.”[23]
존 메옌도르프(John Meyendorff)에 따르면 이 구별은 그분의 본질에서 초월적이고 참여 불가능한 분으로 남아 계시는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에 피조된 인간이 ‘참여’함을 내포하는 … 실제적인 구별”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 안에는 신화(그리고 신화를 위한 성육신)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그분의 근본적인 초월성을 여전히 보존할 수 있는 실재(Reality)가 있다는 것이다. 블라디밀 칼라모프(Vladimir Kharlamov)는 하나님의 “에너지들은 하나님을 계시하긴 하지만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God-in-himself)을 계시하지는 않는다. 에너지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사람에게 참여하고 이해하도록 제시하면서도 참여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내면성을 구성하는 존재론적인 차이점을 하나님 안에 보존한다.
Palamas’ conception of theosis and the praxis he attached to it differ substantially from those of Witness Lee. However, the classic distinction between God’s communicable energies and His incommunicable essence is useful as a bridge to understand Witness Lee’s teaching that regenerated man is made God in His communicable “life and nature” but not in His “Godhead,” which is incommunicable. This distinction between the communicable and incommunicable attributes of God has been confirmed and maintained by a number of contemporary theologians including Karl Barth, Vladimir Lossky, Jürgen Moltmann, Catherine Mowry LaCugna, and others, in their discussions of the economic and immanent aspects of the Trinity.[24]
팔라마스의 신화 개념과 거기에 그가 부여한 실행적인 측면은 위트니스의 이해와는 실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유적 에너지들과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에 대한 고전적인 구별은 중생한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생명과 본성”에서는 하나님이 되나 그분의 비공유적 “신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과 비공유적 속성들의 차이는 칼 바르트(Karl Barth), 블라드밀 로스키(Vladimir Lossky),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캐서린 모우리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와 같은 신학자들이 확증하고 지지했다. 그러한 경향은 특히 삼위일체의 경륜적이고 내재적인 방면들에 대한 논의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Much More” Salvation: Paul’s Appeal to the Seeking Christian
“더욱”(much more) 구원: 추구하는 그리스인을 향한 바울의 호소
In his epistle to the Romans, the Apostle Paul presents the broad scope of God’s salvation. “For if we, being enemies, were reconciled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we will be saved in His life, having been reconciled” (Romans 5:10). For Paul salvation incorporates a participation in the grace of God encompassing two aspects—reconciliation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and salvation by God in the life of His Son. “Having been reconciled,” Paul tells us, there is still “much more,” a further salvation “in His life.” Speaking on this verse, Witness Lee asks, “Have you been saved? Are you sure that you have been saved? If you have been saved, why does this verse say that we shall be saved?”[25] Romans 5:10 compels the question: What is this “much more” salvation?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넓은 범주의 하나님의 구원을 제시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면, 이미 화목하게 된 우리는 더욱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롬 5:10).” 사도 바울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두 방면을 합병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와 화목하게 됨과 아들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원됨이다. “사도 바울은 화목하게 되었다면” 뒤에 “더욱”을 덧붙임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서의 그 이상의 구원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이 구절을 말하면서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만약 당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한다면, 이 구절은 왜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로마서 5장 10절은 이 “더욱”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Witness Lee understood the “complete, eternal redemption of God judicially” to be a foundation but with a further need for something “organic…the saving in the life of Christ.”[26] In other words, the believers’ redemption, of which reconciliation forms a part, is the “initiation of God’s salvation,” but salvation in the life of Christ is an “organic matter.” Justification through the death of Christ, while complete, perfect, and eternally effective, is the gateway, an essential prerequisite, but not the goal. Salvation in the life of Christ is the “completion of God’s salvation,”[27] a progressive “much more” that is built upon the foundation of redemption. Witness Lee referred to these complementary elements of God’s salvation in Romans 5:10 as “judicial redemption” and “organic salvation.”[28] This distinction is critical to understanding Witness Lee’s perspective that deification would be impossible outside of an organic aspect to salvation.
위트니스 리는 “법리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을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 유기적인 구원”을 추가로 필요로 하는 기초로 이해했다. 달리 말해서, 화목하게 함(Reconciliation)을 한 부분으로 하는 믿는 이들의 구속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구원은 “유기적인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칭의가 비록 완전하고 완벽하며 영원히 효력이 있지만, 그것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자 시작일 뿐 목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며 구속의 기초 위에 놓인 점진적인 “더욱”인 그 무엇이다.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 5장 10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런 상호 보완적인 요소들을 “법리적 구속”과 “유기적 구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구별은 신화가 구원의 유기적인 측면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위트니스 리의 관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While regeneration and sanctification are certainly aspects of deification, these notions (and others) do not encompass the total thought of it. Stephen Finlan and Vladimir Kharlamov refer to the tendency among some Protestants to make such terms synonymous with theosis as an “attempt to supplant Patristic theology with standard reformation language.”[29] When this is done, the meaning of divinization, instead of being clarified, is actually obscured.
거듭남과 성화가 확실히 신화(Deification)의 방면들이긴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그리고 다른 개념들도)이 신화 사상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스테픈 핀란(Stephen Finlan)과 블라디밀 칼라모프(Vladimir Kharlamov)는 일부 개신교인들이 이러한 용어들을 신화의 동의어로 취급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교부 신학을 표준화된 개혁 신학의 언어로 대치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신화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보다는 사실상 모호하게 만든다.
Many theologians, including certain church fathers, suggest that deification entails a progressive behavioral replication of godly characteristics. Finlan and Kharlamov, for example, describe deification as “imitation of God” that “leads to a reception of the character traits of God.”[30] Witness Lee, however, taught that human beings do not experience the grace of God to make them better persons merely, but to enable them to live God out as His expression and representation. In his view, deification is not based on imitation but is organic, sourced in God, based on the divine birth with the divine life, and is the issue of a “metabolic process…an organic change” in the inward life and nature of the believer.[31] Although the outward appearance in terms of behavior may be similar, the inward source is fundamentally different.
어떤 교부들을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은 신화가 신적인 특성들(characteristics)의 점진적인 행동의 반영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핀란과 칼라모브는 신화를 ”하나님을 모방”한 결과 “하나님의 성격적 특성들(the character traits)을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다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그분의 표현과 대표로서 하나님을 살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 따르면, 신화는 모방에 근거하지 않고 유기적이며 하나님을 근거로 한다. 즉 그것은 신성한 생명으로 시작된 신성한 출생에 근거하며 믿는 이의 내적인 생명과 본성 안에 있는 “신진대사적인 과정 … 유기적인 변화”의 결과이다. 비록 밖으로 나타난 행동은 유사할지 모르나 그 내적 근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The way you think when you consider any matter will bear the stamp of the Lord Jesus. The way you love people and the way you decide any matter will also be the same as that of the Lord Jesus. This means that in your practical living you will bear the image of the Lord. This is not an outward improvement, nor is it an outward imitation. Rather, it is that you are inwardly being possessed by the Lord and permeated with the Lord, and His element is permeating your mind, emotion, and will.[32]
당신이 어떠한 문제를 고려할 때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은 주 예수님의 흔적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을 사랑하고 어떠한 문제를 결정하는 방식은 결국 주 예수의 방식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실제 삶에서 주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만 외적인 개선과 외적인 모방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이 내적으로 주님에 의해 소유되고 있고 주님으로 적셔져서(permeated), 그분의 요소(element)가 당신의 생각, 감정, 의지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The Spirit Himself Witnesses with Our Spirit”: Union in the Life of God
“그 영 스스로가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연결(Union)
In a commentary on Romans, Witness Lee refers to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is believers as a “spiritual, practical, and experiential union…of the Spirit with our spirit, the regenerated spirit of the believers in Christ indwelt by the Spirit.”[33] He develops this understanding based on Romans 8, particularly verses 11 and 15-17. The latter verses, according to Witness Lee, indicate that “the all-inclusive Spirit of the Triune God” and “our regenerated human spirit” are “one; they live together, work together, and exist together as one mingled spirit.”[34] The designation “heirs of God…joint-heirs with Christ” indicates that the believers inherit God and know God in the way of intimate family relations, not only as their Creator but also as their Abba Father. The spontaneous cry of sonship, originating from the Spirit of the Firstborn who indwells the believer, is itself an indication of the Christian’s intimacy with the Triune God:
로마서 주석에서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를, “그 영이 우리의 영과 영적이고, 실제적이며, 체험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의 거듭난 영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내주하심”을 입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그는 로마서 8장, 특히 11절과 15절부터 17절을 근거로 이러한 이해를 발전시킨다. 위트니스 리에 따르면, 15절부터 17절은 “삼일 하나님의 만유를 포함한 영(the all-inclusive Spirit of the Triune God)”이 “우리의 거듭난 사람의 영”과 하나 된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살며, 함께 일하며, 하나의 연합된 영으로서 함께 존재한다. “하나님의 상속자들…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이라는 칭호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유업으로 얻고 또한 하나님을 그들의 창조자로서뿐 아니라 친밀한 가족적인 관계 안에서 아바 아버지로 알게 될 것을 의미한다. 믿는 이 안에 내주하는 장자의 영에서 비롯된 아들의 자격(sonship)의 자발적인 부르짖음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삼일 하나님과 친밀함의 표시이다.
Such an affectionate cry implies an intimate relationship in life between a genuine son and a begetting father. After being regenerated, we are no longer merely God’s creatures; we are His children. Because we have now been born of God and are related to Him in life, it is very normal and sweet for us to call Him Father. When we cry, “Abba, Father,” there is the witnessing of the Spirit. Such a witnessing testifies to us and assures us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who possess His life; it also limits us and restricts us to a living and walk that are according to this life, in keeping with our being children of God. The Spirit witnesses to our most basic and elementary relationship with God, namely, that we are His children. Therefore, this witnessing of the Spirit begins from the time of our spiritual birth, our regeneration.[35]
그러한 애정어린 부르짖음은 참된 아들과 낳으시는 아버지 사이에 생명 안에서의 친밀한 관계를 함축한다. 거듭난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만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들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으로 태어났고 그분과 생명의 관계를 맺음으로,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정상이고 달콤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분의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해 주고 확신시켜 준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됨에 걸맞게 이러한 생명을 따라 살고 행하도록 제한하고 규제한다. 그 영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관계, 즉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임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의 증거하심은 우리의 영적 출생의 때인 우리의 중생부터 시작된다.
Witness Lee understood Paul to say that fallen man has two main problems. First, because he is sinful, he needs redemption and the forgiveness of sins through the death of Christ (Romans 3:24; 1 Corinthians 15:3; Ephesians 1:7; Colossians 1:14). Second, because he is alienated from the life of God (Ephesians 4:18), he also needs a new birth. The trajectory of organic salvation begins when a person receives eternal life and is born of God (John 1:12-13; 1 John 5:12). Through a lifelong process of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 (2 Peter 1:4), the redeemed and regenerated child of God grows in the divine life until that life is manifested (Romans 8:19) and he is glorified (Romans 8:17; Romans 8:30; 2 Thessalonians 1:10) to be “even as He is” (Matthew 5:48; 1 John 3:2-3, 7; 1 John 4:17) for all eternity. Regeneration marks the beginning of this organic process, the point at which the believer in Christ is born of the Father through a “divine birth” that imparts to him the life of God with the nature of that life, the divine nature. “Once we receive the Lord,” Witness Lee writes, “God’s life enters into us, and we immediately have a union with God in life. Our believing into the Lord is for our being begotten of God, that is, for God to come into us to be our life.”[36]
위트니스 리의 바울 이해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은 주로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먼저 죄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과 죄의 용서들을 필요로 한다(롬 3:24; 고전 15:3, 엡 1:7, 골 1:14). 둘째, 그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었기에(엡 4:18) 거듭남이 필요하다. 유기적인 구원의 여정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여 하나님에 의해 거듭날 때 시작된다(요 1:12-13, 요일 5:12). 구속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일생의 과정을 통해(벧후 1:4) 신성한 생명이 표현될 때까지(롬 8:19)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그는 영원히 “심지어 그분과 같이”(마 5:48, 요일 3:2-3, 7; 요 4:17) 영광스럽게 된다(롬 8:17, 8:30, 딤후 1:10). 중생은 이러한 유기적인 과정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가 “신성한 출생”을 통해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지점이다. 또한 이러한 신성한 출생은 하나님의 생명을 그 생명의 본성, 즉 신적 본성과 함께 그에게 전달한다. 위트니스 리는 “우리가 주님을 믿은 그 순간,”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는 즉시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된다. 우리가 주님 안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려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For John Calvin, repentance embodies the significance of regeneration. “Therefore, in a word, I interpret repentance as regeneration, whose sole end is to restore in us the image of God that had been disfigured and all but obliterated through Adam’s transgression.”[37] Witness Lee would counter that regeneration is not merely an act of restoration necessary “because our life is bad and cannot be improved. This concept is wrong. I say once again that even if Adam in the garden of Eden had never fallen, he still would have needed to be regenerated, to be born again, that he might have another life, the life of God.”[38] This is a view shared by certain of the early church fathers. Archibald T. Robertson writes that for Irenaeus, man was “created for a destiny which he had never realized; the interruption in the history of our race introduced by sin was repaired by the Incarnation, which carried back the race to a new head, and so carried it forward to a destiny of which under its original head it was incapable.”[39] In other words, salvation is not merely a “restoration to,” but an “advance upon,” something far beyond the innocence of Eden. Man was created “not so much in a state of perfection as with a capacity for perfection…and with a destiny to correspond with such capacity.”[40] The incarnate Christ—and not Adam—is the living manifestation of God’s model for manhood.
존 칼빈에게 회개는 중생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단적으로 말해 나는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하며, 그것의 유일한 목표는 아담의 범죄로 손상되고 말살된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Witnss Lee)는 중생은 “우리의 생명이 나쁘고 개선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필요한 회복의 행위가 아니라고 반론한다. “이러한 관념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다시 말하겠지만, 심지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또 다른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일부 초기 교부들도 가지고 있었다. 아키발드 T. 로버스톤(Archibald T. Robertson)은 이렇게 썼다. 이레니우스에게 “인간은 그가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운명을 위해 창조되었고, 죄로 인해 야기된 우리 인류 역사 속의 단절은 성육신에 의해 보수되었고, 그것은 인류를 새로운 머리로 이끌었는데, 이러한 운명은 인류의 원래의 머리(아담-역자 주) 아래에서는 성취될 수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구원은 단지 “-에 대한 복원(restoration to)”일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의 무죄 상태를 넘어서는 “전진 된(advance upon)” 그 무엇이다. 인간은 창조될 때 “완전함 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벽을 위한 수용 능력을 가지고 창조되었으며 그러한 수용 능력에 부합하는 운명과 함께 창조되었다.”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아담이 아니라-께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본(model)의 산 체현이시다.
Witness Lee observes that, “We have received eternal life through our divine birth.”[41] By this birth, according to 1 John 3:9, a “seed” is implanted in the believers. As he remarks, “With any seed there is life and in that life there is the nature which is going to be developed,”[42] a biological principle that is applied in Scripture to illustrate the spiritual:
위트니스 리는 “우리가 신성한 출생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요한일서 3장 9절에 따르면, 하나의 “씨앗”이 이러한 출생으로 믿는 이들 안에 심겨졌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씨앗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 안에는 발전되려고 하는 본성이 있는데”, 이것은 영적인 예증을 위해 성경 안에 적용된 생물학적인 원칙이다.
A grain of wheat is a seed of wheat. When this seed is sown into the earth it develops in life with its nature. The full development of the life of the seed with its nature issues in a stalk with many grains, many seeds. The development of the grain of wheat comes out of the nature of that grain or seed. The same thing is true of a carnation seed. If a carnation seed is sown into the earth, it develops with its nature into a beautiful carnation blossom.
밀알은 밀의 씨이다. 이러한 씨가 땅에 심겨질 때 그것은 그 본성을 소유한 생명 안에서 발전한다. 그 자신의 본성을 소유한 씨가 가진 생명의 충만한 발전은 많은 낱알, 즉 많은 씨앗을 포함한 밀 이삭이다. 이러한 밀알의 발전은 그 낱알 또는 씨앗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같은 것이 카네이션 씨에도 적용될 수 있다. 카네이션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그 자체의 본성을 가진 아름다운 카네이션 꽃으로 필 때까지 발전한다.
We have received the divine life through the divine birth and this divine life has a nature which is the divine nature of God. John 1:13 tells us that we have been born of God, 1 John 3:9 says that since we have been born of God we have the divine seed in us, 1 Peter 1:3 says we have been regenerated by God through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nd 2 Peter 1:4 indicates that since we have received the divine life we are now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We are not receiving the divine nature, but partaking of, enjoying, what we have already received.[43]
우리는 신성한 출생을 통해 신성한 생명을 받았고 이 생명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소유한다. 요한일서 1장 30절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태어났다고 말하며, 3장 9절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났으므로 우리 안에 신성한 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났다고 말하고,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받았으므로 이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참여하며 그것을 누린다.
Some may demur at the suggestion that “genetic” relatedness to God is within the bounds of possibility and, like Calvin, equate new birth with restoration to a pre-fallen, Edenic condition. Yet, not all evangelicals agree. For example, Lewis Sperry Chafer points to the breadth of biblical support, “upwards of eighty-five New Testament passages referring directly to this fact of a new imparted divine life,” for the assertion that the divine life is “none other than the indwelling Son of God”:
아마도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유전적으로 관계맺음(genetic relatedness)이 가능하다는 제안에 이의를 제기하며 칼빈처럼 중생을 타락 이전 에덴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복음주의자가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루이스 스페리 체퍼(Lewis Sperry Chafer)는, “신약에서 80구절 이상이 직접 새롭게 심겨진 신성한 생명을 언급”하는데 이 신성한 생명은 “다름 아닌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광범위한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He that hath the Son hath life; and he that hath not the Son of God hath not life” (1 Jno. 5:12); “When Christ, who is our life, shall appear” (Col. 3:4); “Christ liveth in me” (Gal. 2:20); “Christ in you the hope of glory” (Col. 1:27). This indwelling One being the Son of God and eternal, the life is eternal. “I give unto them eternal life; and they shall never perish” (Jno. 10:28);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Rom. 6:23).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 5:12);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골 3:4);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 2:20).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인데,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골 3:4). 이러한 내주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원하시기에, 그 생명이 영원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요 10:28).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This is the great supernatural fact of regeneration. By this regeneration legitimate children of God are formed who are by all right and title the true sons of God, and if sons, heirs of God and joint-heirs with Jesus Christ. They form a “new generation” or species, and their destiny is, in consonance with their new divine nature, in the eternal glory of the household and family of God.
이것은 중생의 위대한 초자연적 사실이다. 이러한 중생에 의해 적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권리와 직함에서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 되며, 아들이면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이다.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세대” 혹은 “종(species)”을 형성하며 그들의 운명은 새로운 신적 본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권속과 가족의 영원한 영광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The practical value of knowing this relation to God, or to be able to say, “Christ liveth in me,” is but to be impelled to go on to the place wherein it may also be said, “and the life I now live,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As certainly as a member is vitally joined to the body, so certainly the life of the Head flows into that member, and by this new vitality it is alive and in possession of every vital power. It also follows that such a member should be wholly submissive to the mind and will of the head. How imperative, reasonable and blessed it is to be wholly yielded to Him that every thought of His great heart may find instant and perfect expression through every member in His own body!”[44]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는 것 혹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실제적인 가치는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 지체는 그가 속한 몸에 활력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확실히 머리의 생명도 그 지체 안으로 들어가고, 이러한 새로운 활력에 의해 그 지체는 살아있게 되고 모든 생동적인 힘을 갖게 된다. 그러한 지체는 또한 머리의 생각과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의 모든 위대한 생각이 그분 자신의 몸 안에서 모든 지체를 통해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표현될 때까지 그분에게 굴복되는 것은 얼마나 긴요하고 합리적이며 복된 일인가!
Witness Lee calls it “the greatest wonder in the universe that human beings could be begotten of God and that sinners could be made children of God.”[45] As children of God, begotten of God, the believers in Christ possess the life and nature of God. The Apostle John invites believers to “behold what manner of love the Father has given to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1 John 3:1) and emphatically affirms—“and we are!”—as though anticipating their susceptibility to circumvent this truth or doubt its reality.
위트니스 리(Witness Lee)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인해 낳아지고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 우주에서 가장 크고도 놀라운 일”이라 말한다.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인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다. 사도 요한은 믿는 이들이 “아버지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도록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보아야(요일 1:31)” 한다고 강하게 권유했고, 마치 그들이 이 진리를 회피하거나 쉽게 그 실재를 의심할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라고 강조하여 선언한다.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Mingling in the Nature of God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연합함
Theologians continue to grapple with the significance of the Petrine appellation,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2 Peter 1:4). To apprehend Peter’s meaning requires that we understand what it means to partake and what is being partaken of. Apparent unease over the implications of 2 Peter 1:4 is often expressed as questions over the authenticity of the epistle itself or as allusions to its alleged similarities with pagan notions of apotheosis.[46] The prevalence of such controversies to the context of scholarly appraisals of 2 Peter 1:4 would seem to betray a skittishness to the very idea conveyed there.
신학자들은 베드로가 사용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벧후 1:4)이라는 호칭의 의미를 놓고 계속 고심한다. 베드로가 한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참여하는 행동(partake)과 무엇에 참여하는 것(being partaken of)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이 함축하는 내용에 대한 명백한 우려는 종종 서신 그 자체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 혹은 그것이 갖고 있는 이교적인 신격화(apotheosis) 개념들과의 유사점들을 암시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베드로후서 1장 4절 내용에 대한 학문적인 평가를 놓고 그토록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 구절이 전달하는 사상 자체를 만지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In an essay on this subject, James Starr tentatively asks his readers, “Does 2 Peter 1:4 Speak of Deification?” While Starr accepts the validity of deification, he proposes that “‘sharers in divine nature’ should be read as theological shorthand for a constellation of ideas: knowledge of Christ producing escape from passion and decay to divine moral excellence and divine immortality, both of which are in the process of being realized already now.”[47] He defines the divine nature as that which is “contrasted with its opposite: this world corruption” or “that which is ‘incorruptible or eternal,’”[48] unenumerated “specific divine attributes or qualities.”[49]
이 주제에 관한 소논문에서 제임스 스타르(James Starr)는 그의 독자들을 시험하듯 이렇게 묻는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이 신화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스타르가 신화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신성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말이 수많은 신학적 개념들에 대한 축어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한다. 정욕과 썩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신성하고 도덕적인 탁월함과 신성한 죽지 않음으로 이르게 함은 모두 이미 실제화 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그는 신적 본성을 “그것의 반대 개념인 이 세상의 썩음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의하거나 “’썩지 않거나 영원한’ 것, 즉 열거되지 않는 “구체적인 신적 특성들 혹은 자질들”이라고 정의한다.
Stephen Finlan asserts that the “necessary preconditions” for Peter’s “notion” of theosis are “ethical character and proper belief” and that “divinization commences” only with their presence within the believer. The perpetuation of divinization is then contingent upon the believer’s nascent ethics and orthodoxy stimulating the “enhancement of one’s ethical character, and establishment of one in proper belief.” Thus, “the means and the destination are quite alike.”[50]
스테픈 핀란은 베드로의 신화 “개념(notion)”에 대한 필수적인 선행조건들이 “윤리적인 성품과 합당한 믿음”이라고 단언하며, “신화의 시작”은 그러한 것들이 믿는 자들 안에 있을 때라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영속적인 신화는 “개인의 윤리적인 성품과 그 자신을 합당한 신앙 안에 세워주는 것”을 활발하게 하는 믿는 이의 초기 윤리와 교리적 정통성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수단들과 목적은 매우 유사하다.”
However, as Witness Lee reminds us, the word partaking—or participation—implies something continuous, something of experience, an involvement or enjoyment: “Although we have the divine life once for all, we cannot enjoy the divine nature once for all. During the entire course of our Christian life on earth and even in eternity, we shall be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 Just as we do not eat food once for all, so we do not partake of the divine nature once for all. We eat food daily, and for eternity we shall be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51] In other words, to partake of God’s nature is not a matter of ethical behavior and proper belief. To partake is to embrace a reality outside of oneself and to receive that reality inside of oneself, so that the object is assimilated and the two are merged together. Consistent with his view of God’s salvation in life, Witness Lee understood partaking as an organic matter.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준 것처럼, 참여하는 것 혹은 참여라는 단어는 연속적인 어떤 것, 체험될 수 있는 것, 참여 혹은 누림을 의미한다. “우리가 비록 신성한 생명을 단번에 소유하게 되지만,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단번에 누릴 수는 없다. 이 땅에서 만이 아니라 심지어 영원 안에서도 그리스도인 전체 삶의 기간 동안, 우리는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한 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듯이, 우리는 신성에 단번에 전부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으며 영원히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윤리적 행위나 합당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외부에 있는 실재를 포용하는 것이면서, 그 실재를 그 개인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결국 참여의 대상이 융화되고 그 둘이 함께 결합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참여하는 것도 유기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The object of this partaking, the divine nature, is for Witness Lee a profound simplicity. “The divine nature is what God is”[52] in His communicable aspect—Spirit (John 4:24), love (1 John 4:8, 16), and light (1 John 1:5). “To be a partaker of the divine nature is to be one partaking of God as Spirit, as love, and as light.”[53] God alone is incorruptible and eternal, the “incorruptible, invisible, the only God,” to whom be “hono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1 Timothy 1:17), and He regenerates His believers of an incorruptible seed (1 Peter 1:23) unto an incorruptible inheritance (1 Peter 1:4).
위트니스 리에게 이러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심오하면서도 단순하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은 그분의 공유적 방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영(요 4:24)과 사랑(요일 4:8, 16)과 빛(요일 1:5)이다.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영, 사랑, 빛으로서 계시는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부패할 수 없으며 영원하고 “썩지 않는, 볼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존귀와 영광을 영원히(딤전 1:17)” 받으실 분이고 그분은 믿는 이들이 썩지 않을 유업(벧전 1:4)을 얻도록 썩지 않을 씨앗(벧전 1:23)으로 그들을 거듭나게 하신다.
In 2 Peter 1:4, the believers’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 is based on their having received “all things” related to the divine life and godliness in the verse preceding. According to this view, the expression of God’s attributes, “godliness,” is the issue of partaking of the nature of the divine life. To partake is not to imitate God or to adopt a Christian ethic, but to “fellowship with the Lord” to “realize and enjoy the Lord as the Spirit” and God as love until love “saturates” and “even becomes” who the believer is.[54] For Starr, Finlan, and others, to imitate God’s attributes is to partake of the divine nature. Witness Lee, on the other hand, understands “godliness,” sourced in the divine life, to be the issue of the believers’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 Through this partaking, man’s human nature and God’s divine nature mingle together as the expression of the same two natures embodied in the God-man Jesus: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나타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이전 구절에 나타난 신성한 생명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믿는 이들이 받은 것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3절에서 말한 “경건”에서 하나님의 특성들을 믿는 이들이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본성에 참여함에 따라 산출되는 결과이다.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방하거나 기독교적 윤리를 수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러한 사랑이 믿는 이 자신을 “점유”하고 “그의 어떠함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스타르(Starr)와 핀란(Finlan)과 같은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모방하는 것이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경건”에 대한 이해는 신성한 본성 안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믿는 이들이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결과이다. 이러한 참여함을 통해 사람의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이 하나님-사람 예수 안에서 체현된 같은 두 본성이 소유한 표현처럼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Mingling is deeper than union. In the incarnation, God not only united Himself with man but also mingled Himself with man…When a branch from one tree is grafted into another tree, they are mingled together. In the same way, God was mingled with man in incarnation. Then in Christ’s resurrection, man was mingled with God. This is why the New Testament tells us that we were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a) and were resurrected with Christ (Eph. 2:6). Through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we were not only united to Christ, to God, but also mingled with Him.[55]
연합(Mingling)은 연결(Union)보다 더 깊다.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인간과 연결했을(united)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을 인간과 연합하셨다(mingled). 한 나무의 가지가 다른 나무에 접붙여질 때 그 둘은 연합된다.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성육신 안에서 사람과 연합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되었다. 바로 이것이 신약이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갈 2:20 상)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엡 2:6)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즉 하나님에게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연합되었다.
Witness Lee makes clear that his usage of the word “mingling” is not meant to suggest that the divine and human natures combine such that a “third nature” is produced. Instead, he uses the common definition of the word—“to bring or combine together or with something else so that the components remain distinguishable in the combination.”[56] He affirms, “Although the Lord has two essences, He is still a single complete Person, One who is both God and man.”[57]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연합(mingling)”이라는 단어가 신성과 인성이 섞여져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대신에 그는 그 단어의 일반적인 정의인, “다른 무언가와 합쳐지거나 결합할 때 구성 요소들이 그 결합 안에서 구별 가능한 채로 남아있는 것(to bring or combine together or with something else so that the components remain distinguishable in the combination)”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비록 주님께서 두 본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의 온전한 인격, 즉 하나님이자 사람인 한 분이셨다.
Just as God took on the human nature to become what man is in creation, so His children partake of the divine nature to become what He is in incorruptibility. God bridges the ontological gap—not once, but twice; not downward only, but upward also—first through Christ and then within His believers. Th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live with God as He lives in fellowship with man. God indicates His intention through the mingling of divinity and humanity in the incarnation, and He effects this same mingling in His children as they partake of Him. “As the living Father has sent Me and I live because of the Father, so He who eats Me, he also shall live because of Me” (John 6:57). On this basis, Witness Lee, evoking Peter, defines theosis as a “participation in the divine life and nature of God.”[58]
하나님께서 피조물 안에 있는 사람의 어떠함이 되시려고 인간 본성을 취하셨듯이 그분의 자녀들도 썩지 않는 본성 안에서 그분의 어떠함과 같아지기 위해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한번이 아니라 두 번에 걸쳐 이 존재론적인 간격을 좁히셨다. 그분은 다만 내려오심 만이 아니라 올라가심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다음에는 믿는 이들 안에서 그러하셨다.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사람과의 교통 안에서 사시듯이 하나님과 함께 산다. 하나님은 성육신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통해 그분의 의도를 나타내시며,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에게 참여할 때 같은 연합을 성취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요 6:57)”. 이러한 근거로 위트니스 리는 베드로서를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참여함”으로 신화를 정의한다.
The distinction between God in His communicable and incommunicable aspects is implied in the contrast made by the Cappadocian fathers between God in His “energies” and God in His “essence.” In a similar manner, Witness Lee’s use of “life and nature” points to God’s communicable aspect, and his qualifier “not in the Godhead” to His incommunicable aspect. As was his practice, Witness Lee uses the biblical term “nature,” the same term that Peter uses in 2 Peter 1:4, to indicate that of which the believers “partake,” suggesting God in His communicability.
공유적 방면들 안에 계신 하나님과 비공유적 방면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구별은 갑바도키아 교부들이 그분의 “에너지들” 안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본질” 안에 계신 하나님을 대조한 것에 함축되어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생명과 본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공유적 방면을, “신격에서는 아니다(not in the Godhead)”라는 한정적 수식어는 그분의 비공유적 방면을 가리킨다. 그의 관행으로 볼 때, 위트니스 리가 “본성”이라는 성경 용어를 사용할 때 그는 베드로후서 1장 4절에서 베드로가 사용하던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이며, 이것은 공유 가능함(His Communicability) 안에 계신 하나님을 시사하고 동시에 믿는 이들이 “참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리킨다.
“But Not in the Godhead”: The Limits of Theosis
“신격 안에서는 아니다”: 신화의 명확한 경계
Believers in Christ, in Witness Lee’s understanding, enjoy a union with God in God’s life and a mingling with God in God’s nature, resulting in an experiential, ever-deepening intimacy that ultimately issues in their becoming God in life and nature. In saying this, Witness Lee expressed caution that the word “deification” be applied only with proper qualification and used only in a “limited sense to convey the fact that we have been born of God to become sons of God.”[59] This “limited sense” is articulated in the phrase “but not in the Godhead.”
위트니스 리는,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누리고,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리는데, 이런 누림은 체험적으로 친밀함을 점점 더 깊게 하고 궁극적으로 생명과 본성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이해했다. 위트니스 리는 이어서 “신화”라는 단어가 적절한 제한과 함께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는데,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한정된 의미”로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한정된 의미”가 “신격 안에서는 아니다.”라는 문구에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Godhead, in other words, indicates the incommunicability of who God is in Himself with His omnipresence, His omniscience, His omnipotence, His headship, His lordship, etc. God is. He is the “I AM.” Witness Lee recognized and affirmed that God existed apart from creation in eternity past and will remain distinct from His creation for eternity future:
신격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자신의 비공유적 속성을 말하는데 특히 그분의 편재성, 전지하심, 전능하심, 머리 되심, 주 되심과 같은 특성들을 소유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그분은 “나는 -이다”(I Am)이시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께서 영원 과거에 피조물과 분리되어 존재하셨으며 영원 미래에도 그분의 피조물과 구별된 상태로 계신다는 남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시인한다:
We worship God in His Godhead; we do not worship those who have His divine nature. We can be transformed into the image of God (2 Cor. 3:18), having the divine nature (2 Pet. 1:4), but we absolutely cannot become the Person of God or the Godhead. We can never share the Godhead…We are not transformed to be a part of the Godhead; rather, we are transformed to have the divine nature. Today we do have God’s divine nature within us, but we cannot share His Godhead. The Godhead is special and unique, but because of the divine life, we may have the divine nature in a general, or universal way. As I have said, Christ is the Head and the Body, but we are the Body and cannot be the Head; the Head is a matter related to the Godhead.[60]
우리는 신격 안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을 경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할 수 있고(고후 3:18), 신성한 본성을 가질 수는 있으나(벧후 1:4), 하나님의 위격(The Person of God)이나 신격(Godhead)이 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분의 신격을 결코 공유할 수 없다. … 우리는 신격의 일부가 되기 위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가지도록 변화된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분의 신격을 공유할 수는 없다. 신격은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나, 우리는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본성을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방식으로 가질 수 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그리스도는 머리이시자 몸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몸일 뿐 머리가 될 수는 없다. 머리는 그분의 신격과 관계된다.
Attention must be given, in any comparative study, to the glossary at hand. While Witness Lee’s usage of such phrases as “in life and nature” and “not in the Godhead” may differ from what is linguistically familiar in classical theology, these phrases themselves attest to the fact that he respected the distinction between God in His being and God in His economy that theologians in East and West have recognized for centuries. Theologically, the basis for theosis is a distinction in God that allows for His having been incarnated in the first place.
어떠한 비교 연구에서도 향후 사용할 어휘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생명과 본성에서”와 “신격에서는 아니다”라는 위트니스 리가 쓴 표현들이 고전적인 신학의 관점에 익숙한 언어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의 용례는 동방과 서방의 신학자들이 수 세기 동안 인정해 온 존재 안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 안에 계신 하나님의 구별을 존중한 것이다. 신학적으로, 신화를 위한 기초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과 성육신 될 여지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구별이다.
Just as there is no perfect term to fully describe any aspect of God, there is no perfect term to fully describe God’s otherness. Yet, theologians have formulated ways of making this distinction for millennia. The expression “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is simply one way of conveying the same idea—that there is a reality in God that allows Him to take on the humanity of His creation and to share His divinity, while still respecting His perfect transcendence and total otherness. To “become God in life and in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takes Athanasius’ well-known expression and clarifies it, refining it by conveying in a biblically precise yet accessible way the significance of the divine birth, the divine seed, union with God, mingling with God,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 and organic salvation.
하나님의 어떤 방면을 완전히 묘사할 용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타자성(God’s otherness)을 완전히 묘사할 용어는 없다. 그럼에도 신학자들은 수 천년 동안 이것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조심스럽게 만들어 왔다. “생명과 본성에서 그러나 신격에서는 아니다”라는 표현은, 하나님 안에는 그분께서 피조물의 인성을 취하시고 그분의 신성을 공유하도록 허락함과 동시에 여전히 그분의 완벽한 초월성과 전적인 타자성을 존중하게 하는 실재가 있음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아타나시우스의 잘 알려진 표현을 수용하여 명확히 하면서도 신성한 출생, 신성한 씨, 하나님과의 연결과 연합,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 유기적인 구원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정확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다듬은 것이다.
“That They Also May Be in Us”: Incorporation in the Person of God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하나님의 위격 안에 있는 합병
While Witness Lee affirmed all the essential truths concerning the Trinity, he placed particular emphasis on the coinherenc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in the Godhead. He taught, according to John 14, that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re an incorporation by coinhering mutually and by working together as one…by what They are and by what They do.”[61]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who are “distinct but inseparable,”[62] “not only coexist but also coinhere.”[63] As Kerry Robichaux describes, “When any one of the three of the Divine Trinity acts, all three operate…when any one of the three acts, He incorporates the operation of the other two in His action. What is manifest is the action of the one, but in that manifest action there is the incorporate operation of the other two.”[64]
위트니스 리는 삼일성(the Trinity)의 모든 본질적인 진리들을 인정하되 신격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상호내재(coinherence)를 특히 강조한다. 그는 요한복음 14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은 하나의 합병체인데, 이것은 상호내재 하여 하나로 일하심으로 그러하며 … 그들의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그러하다.” “구분되나 분리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공존하시고 또 상호내재하신다.” 케리 로비쇼(Kerry Robichaux)가 묘사한 것처럼 “신성한 삼일성의 셋 중 어느 하나가 행동할 때, 그분은 그 행위 안에서 다른 둘의 운행하심을 합병한다. 그러므로 나타난 것은 하나의 행동이지만 그 나타난 행위 안에 합병되신 다른 둘의 운행하심이 있다.”
In John 14:10-11 the Lord Jesus refers both to coinherence (“Do you not believ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and to con-joint operation (“The words that I say to you I do not speak from Myself, but the Father who abides in Me does His works…Believe…because of the works themselves.”). Although the disciples had seen the works of the Son before their eyes, in reality those works were the works of the Father working in and through the Son.
요한복음 14장 10절부터 11절에서 주 예수님은 ‘상호 내재’와 ‘공동운행’(con-joint operation) 둘 다를 언급하신다. 그분은 전자에 대해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후자에 대해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 내가 하는 일들 때문이라도 믿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아들의 일하심을 보았지만, 실제로 그 일은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일하신 아버지의 일이었다.
For Witness Lee, the eternal condition of the Father, Son, and Spirit is an interpenetrative relationship that characterizes everything related to Their being and Their working. This eternal, mutually coinhering condition is then extended to the believers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In that day you wi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In Witness Lee’s understanding, “that day” refers to the day of the Son’s resurrection.
위트니스 리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한 상태는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일하심에 관계된 모든 것을 특징짓는 상호관통의(interpenetrative) 관계이다. 이러한 영적이고 서로 상호내재하는 상태는 그다음에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까지 연장된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요 14:20).” 위트니스 리가 이해한 바로는 여기에서 “그 날”은 아들이 부활하신 날이다.
In resurrection, “the Spirit enters into us as the reality of the Son, who is the embodiment of the Father. In other words, He enters into us as the totality of the Triune God.”[65] The phrase, “you wi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suggests the incorporation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while “you in Me” suggests the incorporation of the believers into the Son and into the incorporation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Finally, the phrase “and I in you” suggests this incorporation within the believers. Such a mutual incorporation is made real by the Spirit of reality who “abides with you and shall be in you” (John 14:17).
부활 안에서 “영은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의 실재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달리 말하면, 그분은 삼일 하나님의 전체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내가 나의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된다”라는 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연합을 내포하며 “내 안에 너희”라는 말은 믿는 이들이 아들 안으로 연합하는 것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연합 안으로 연합해 들어가는 것을 내포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내가 너희 안에”는 이러한 합병이 믿는 이들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상호적인 합병은 “여러분과 함께 거하시고, 여러분 안에 계실(요한 14:17)” 실재의 영(the Spirit of Reality)에 의하여 실현된다.
While “union” and “mingling” are, to a limited degree, adequate to describe certain aspects of theosis, they are inadequate to convey the entire thought of it, particularly in light of John 14:16-20 and 17:21-23. As Witness Lee points out, “Humanly speaking we can have our physical father’s life and nature, but our father as a person cannot be in us.”[66] Yet, the Son is in the Father, the Father is in the Son, and the believers are in the incorporation of the Father and the Son. The Triune God, who lives in an eternal condition of incorporation, indwells His believers, and His believers indwell the Triune God: “In this universal, divine-human incorporation, persons indwell one another, that is, they coinhere.”[67]
비록 “연결”과 “연합”이 어느 정도는 신화의 특정 방면들을 묘사할 수 있지만 신화 사상 전반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한데, 특히.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20절과 17장 21절부터 23절의 빛 아래에서 볼 때 그러하다. 위트니스 리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지만,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의 인격으로 우리 안에 계실 수는 없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며, 믿는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합병 안에 있다. 영원한 합병의 상태로 계시는 삼일 하나님은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며, 믿는 이들도 신성한 삼일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 “이러한 우주적이고, 신성한 인간적인 합병 안에서, 인격들은 서로 안에 내주한다, 즉 그들은 상호 내주한다.”
James D. Gifford Jr. believes that many Protestants avoid interpreting such a “perichoretic soteriology” from John 14 because of their aspiration to preserve an “ontological gulf” wherein “God is God and humans are not.”[68] Gifford maintains that there are three types of perichoresis (referring to coinhering or mutual indwelling)—the first being the perichoresis of the Divine Trinity, the second being the perichoresis of the divine and human natures in Christ, and the third being the soteriological perichoresis that Gifford defines as “the mutual indwelling and active participation in the other between Christ and the believer” that “facilitates the Christian becoming a partaker of the divine nature.”[69]
제임스 D. 기포드 주니어(James D. Gifford Jr.)는 많은 개신교인이 요한복음 14장으로부터 이러한 “상호 내재적 구원론(perichoretic soteriology)”을 읽어 내기를 두려워하는데, 그 이유는 “존재론적 단절”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존재론적 간격을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기포드는 상호 내재(perichoresis)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상호 내재는 신성한 삼일성 사이의 상호 내재이며,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한 본성과 인간 본성 사이의 상호 내재이고, 세 번째는 구원론적 상호 내재이다. 기포드는 세 번째 상호 내재를, “그리스도와 믿는 이 사이에 있는 타자인 서로에 대한 상호적인 내주이자 활발한 참여”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상호 내재가 “그리스도인이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쉽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Gifford also maintains that there will always be some measure of “gulf” between Creator and created, given that the perichoresis of the Trinity is eternally “underived,” while the perichoresis of the believers is forever “derived.”[70] At the same time, Christ has already bridged the gap between the essential, underived perichoresis of the Trinity and the derived ecclesiological perichoresis of the believers through His hypostatic perichoresis in the incarnation when the “perichoretic divine life” was brought “into the world of human beings.”[71] “Therefore the human nature of Christ is deified (or experiences theosis) at the hypostatic union,” Gifford writes.
기포드는 또한 삼일성의 상호 내재가 영원토록 “파생적이지 않고 근본적인 것(undervied)”인 반면에 믿는 이들의 상호 내재는 영원히 “파생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단절적인 간격”이 어느 정도 항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삼일성의 본질적이고 파생적이지 않은 상호 내재와 믿는 이들의 파생된 교회론적 상호 내재의 사이에 놓인 간격을 성육신 안에서 자신의 위격적인 상호 내재(His hypostatic perichoresis)로 이미 극복하셨다. 이때 성육신은 “상호 내재하는 신성한 생명”을 “인간의 세계 안으로” 가져오신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포드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은 그분의 위격적 연합(the hypostatic union)의 시점에서 신성화 되었다(혹은 신화를 체험하였다)”고 기술한다.
“Theosis for other human beings was therefore made possible because a real human nature, the human nature of Jesus Christ, was deified. Because it has happened to one human, it could potentially be passed to others. There is only one incarnation, and the deification of Christ’s human nature is due to the (perichoretic) hypostatic union. But the possibility is present for the deification of others too. Because of the incarnation and the deification of a real human, the possibility, though not the guarantee, of theosis has been opened to the rest of the human race.”[72]
“그러므로 참된 인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화되었으므로, 다른 인간들의 신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것은 잠재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오직 단번의 성육신이 있고,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의 신화는 (상호 내재적인) 위격적 연합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다른 인간들의 신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분의 참 사람의 성육신과 신화로 인하여 나머지 인류에게도 신화에 대한 보장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열려 왔다.”
At the end of John’s Gospel, the resurrected Lord returned to the disciples and “breathed into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John 20:22). The entire Book of Acts may then be considered a record of the actions of the ascended Christ in the Spirit living in and through the disciples, “the apostolic ministry incorporated with Christ’s heavenly ministry.”[73] God continued to be operative on the earth through the apostles’ living and working in the reality of the incorporation. This can be seen not only in the actions and activities of the apostles as recorded in Acts, but also in the New Testament epistles, in which the writers give repeated indication of their realization that they lived and served within the divine-human incorporation—in God and with God.
부활한 주님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돌아가셔서, “그들 안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요 20:22). 그렇다면 사도행전 전체는 믿는 이들 안에서, 믿는 이들을 통해 사시는 그 영 안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활동 기록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그 활동들은 “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사역과 합병된 사도적인 사역”이다. 하나님은 이 연합의 실재 안에서 사도들의 생활과 일을 통해 땅 위에서 계속 운행하셨다. 이것은 다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행위들과 활동들 안에서만 관찰되지 않고 신약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서신들이 그 저자들이 신성하고 인간적인 합병(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합병)의 영역 안에서 살고 봉사한다는 그들 자신의 인식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The Apostle Paul declares that his service is fulfilled “according to His operation which operates in me in power” (Colossians 1:29), referring to the operation of God within him and through him for his apostolic labor. Robichaux finds that a reading of Acts through Jude garners “85 instances of the incorporation of the Triune God by Christ, 61 by the Spirit, and 368 by the believers (all told, 514 instances),” all “supported by genuine textual material.”[74] While an analysis of these many instances is beyond the scope of this paper, even a cursory reading of the New Testament confirms that its pages are replete with such phrases as “in God,” “in Christ,” “in Jesus,” “in Jesus Christ,” “in Christ Jesus,” “in the Spirit,” “in Him,” “in the Lord,” “with Christ,” “through Christ,” etc. All of these are used to describe the believers’ actions, thoughts, feelings, opinions, and statuses as exemplified in the living and service of the New Testament apostles. “For to me, to live is Christ” (Philippians 1:21), Paul writes. “I am crucified with Christ; and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it is Christ who lives in me” (Galatians 2:20).
사도 바울은 그의 봉사가 “내 안에서 능력으로 운행하시는 분의 운행에 따라(골 1:29)” 성취됨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사도적 수고를 위해 자기 안에서, 자신을 통해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운행을 언급한다. 로비쇼우(Robichaux)는 쥬드(Jude)가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에 의해 삼일 하나님이 합병된 사례가 85개, 그 영에 의한 사례가 61개, 그리고 믿는 이들에 의한 사례가 368개(총 548개 사례)” 있으며, 이 모두는 “참된 문헌 사료에 의해” 지지된다고 한다. 이러한 많은 사례 분석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신약을 대강 넘겨보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 안에서”, “그분 안에서”, “주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표현이 가득함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용어는 신약 사도들의 삶과 봉사에서 나타난 믿는 이들의 행위, 생각, 감정, 의견과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 (빌 1:2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 :20).
Through such an incorporation of persons, the believers’ living becomes Christ’s living again on the earth. When Christ was living on the earth, “He was one with the Father, and when people saw Him, they saw the Father. This is the meaning of Christ being in us. This is God’s purpose in having Christ live in us. God wants all that Christ is and has to be fully expressed through us.”[75] Thus does Witness Lee draw the conclusion:
이러한 인격들의 합병을 통해 믿는 이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삶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었고 사람들이 그를 볼 때 아버지를 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의 의미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살게 하신 목적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과 그분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를 통해 완전히 표현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Union is concerning our oneness in life with the Lord. Mingling is related to the divine and human natures. The Lord has gone further to show us that our relationship with Him is not only one of union and mingling but also one of incorporation. John 14 stresses the word in four times. Verse 17 says that the Spirit of reality, another Comforter, would not only be with the disciples but also in them. The Spirit of reality, the person, is in us. Humanly speaking, we can have our physical father's life and nature, but our father as a person cannot be in us. But John 14:17 says that the Spirit of reality as a person would be in us.
연결은 우리가 주님과 생명 안에서 하나 됨을 말한다. 연합은 신성하고 인간적인 본성에 관계된 것이다. 주님은 더 나아가 우리와 그분의 관계가 단지 연결과 연합만이 아니라 합병의 관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요한복음 14장은 ‘안에서’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강조하고, 17절은 또 다른 보혜사인 진리(실재)의 영이 제자들과 함께 하실 뿐 아니라 그들 안에 있게 될 것을 말씀한다. 실재의 영인 그 인격이 우리 안에 계신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분은 인격으로 우리 안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17절은 인격체이신 진리의 영(실재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 것을 말씀한다.
Then in verse 20 the Lord said that on the day of resurrection the disciples would know that He is in the Father, that they are in Him, and that He is in them. The Son, the person, is in the Father, another person. Then we, the millions of persons, are in the Son, the person. Also, the Son is in us. Union and mingling refer to our relationship with the Lord in our life and nature but not in our person. Humanly speaking, no person can be in another person. But in the divine and mystical realm, the consummated God and the regenerated believers, the persons, indwell one another. This is an incorporation. In this universal, divine-human incorporation, persons indwell one another, that is, they coinhere.
그리고 주님은 20절에서 제자들은 부활의 날에 그분께서 아버지 안에, 그들이 그분 안에, 그분이 그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인격으로서 아들은 다른 인격인 아버지 안에 계신다. 그리고 우리 수 많은 사람은 인격인 아들 안에 있고 아들도 우리 안에 계신다. 연결과 연합은 우리가 생명과 본성 안에서 주님과 가지는 관계를 나타내지만 인격 안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떤 인격도 다른 인격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서, 완결되신 하나님과 거듭난 믿는 이들의 인격은 서로 안에 내주한다. 이것이 합병이다. 이러한 우주적이며 신성하고-인간적인 합병 안에서 인격들은 서로 안에 거한다. 즉 상호 내재한다.
In the whole universe, there are God, man, Satan, and the angels. The angels, including Satan and his fallen ones, are not considered persons. God and man are both corporate persons. God is not just a single person. He is three—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a corporate person. We, the millions of believers, are also a corporate person. These persons are now in one another. This is not a mingling but an incorporation.[76]
온 우주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과 사탄과 천사들이 있다. 사탄과 그의 타락한 추종자들을 포함한 천사들은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모두 단체적인 인격들(corporate persons)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인격이 아니다. 그분은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영인 하나의 단체적인 인격이다. 우리 수 많은 믿는 이들 또한 단체적인 인격이다. 이러한 인격들은 지금 서로 안에 거하고 있다. 이것은 연합이 아니라 합병이다.
Conclusion
결론
Despite its rich historical tradition and biblical basis, the idea of deification has largely been ignored by evangelicals. This appears, however, to be slowly changing. Deification was a universally accepted concept in the early church and remains a central doctrine, in some form, in both Eastern Orthodox and Roman Catholic theology. Recent years have seen growing interest in theosis as found in the writings of the early church, in Eastern Orthodox theology, and even in the theology and writings of leading Protestants.
신화의 사상은 그것의 풍성한 역사적 전통과 성경적인 근거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천천히 변하는 것 같다. 신화는 초기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개념이며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핵심적인 교리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초기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신학 서적들과 심지어 주류 개신교인의 신학 저작들에서 드러난 신화 사상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That the Greek fathers saw deification as the goal of forgiveness and salvation is evidenced in many of their writings, particularly in the first five centuries of the church. In that era statements on deification were presented without controversy, as universally accepted teaching in the context of refuting heresy. While deification is less emphasized in the Latin fathers, it remains a Catholic doctrine.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992) repeats Athanasius’ declaration, “For the Son of God became man so that we might become God.” Yet, within both Eastern Orthodox and Roman Catholic theology, deification is largely a sacramental exercise.
그리스 교부들이 신화를 용서와 구원의 목표로 본 것은 그들의 많은 저서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교회의 초기인 5세기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 시대에서는 신화에 관한 진술들이 논쟁의 여지없이 제시되었고 이단을 반박하는 문맥 속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드려진 가르침이었다. 비록 신화가 라틴 교부들 가운데서 덜 강조되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톨릭 교회의 교리로 남아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1992)는 다음과 같이 아타나시우스의 선언을 반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신화는 주로 성사적 실행(a sacramental exercise)으로 논의된다.
Witness Lee taught that “God became man to make man God in life and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understanding deification as God’s full salvation through the process of organic salvation, based upon judicial redemption, to gain the expression of God through humanity. Witness Lee would argue that to reject an organic aspect to God’s salvation is to reject that there is anything “much more” to salvation beyond redemption (Romans 5:10). Such a rejection would also suggest that God had no particular intention for man before the fall and would relegate so many biblical passages related to life, birth, growth, maturity, and expression to mere metaphor.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 되기 위한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는 신화가 법리적인 구속에 기반을 두고 유기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고, 인성을 통해 하나님이 표현되는 것을 얻는 것으로 이해했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기적인 방면을 거부하는 것은 구속(롬 5:10) 저 편의 “더욱(much more)”인 어떤 것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러한 거부는 하나님이 타락 이전에는 인간에 대한 어떠한 특별한 계획도 없으셨고, 생명과 출생과 자람과 성숙과 표현에 관련된 많은 성경 구절들을 격하시키는 것이다.
Witness Lee believed that the new birth is not the restoration of man to a pre-fallen condition but a new creation with the divine life, made possible through the resurrection of Christ. Through the divine birth with the divine life, the believers in Christ are children of God, begotten of God to share a union with God in the life of God. Thus, for man to be born of God is someth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man’s pre-fallen condition. By partaking of the divine nature, the believers in Christ enjoy a mingling of God with man in the divine and human natures. Not only so, the Triune God has become available to all His believers as an incorporation of God with man and man with God for their living and their working. In this incorporation, man can live out God for His purpose, and God is ever the source of this living. This is for man to become God in life and in nature, but not in the Godhead.
위트니스 리는 새로운 출생이 사람을 타락 이전의 상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가능해진 신성한 생명에 의한 새 창조라고 믿었다. 신성한 생명에 의한 신성한 출생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공유하는 하나님이 낳으신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난 것은 타락 이전의 사람의 상태와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신성과 인성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누린다. 또한 삼일 하나님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의 합병이 가능하게 되셨으며, 이러한 합병은 그들의 삶과 일을 위한 것이다. 사람은 이 합병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살아내며 하나님은 늘 이러한 삶의 근원이다. 이것은 사람이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기 위한 것이다.
Witness Lee would not claim to offer a final presentation of the meaning of theosis, understanding that no human thought or language could adequately convey the depth of God and of His work in the believers. Nevertheless, his presentation has much to offer to the ongoing discussion of deification. This review cannot summarize comprehensively all of his teaching on this or on any other point of Christian truth. However, if it serves to stimulate other lines of inquiry concerning deification and Witness Lee’s understanding of it, it has been worthwhile.
위트니스 리는 믿는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이 심오하기에 인간의 생각과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는데 부족이 있음을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이 신화의 의미를 최종으로 정의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제시는 신화에 관해 진행 중인 논의에 많은 것을 기여할 수 있다. 이 검토는 신화나 기독교의 다른 진리에 대한 그의 가르침 모두를 포괄하여 요약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이 논문이 신화와 위트니스 리의 신화-이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격려했다면 그 의무를 다했다고 본다.
—Defense & Confirmation Project
—변호와 확증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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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or the purposes of this paper, the terms theosis, deification, and divinization will be used interchangeably. (이 논문의 목적 상 theosis, deification, divinization는 동의어로 사용될 것이다.)
[2] Although theosis is not a point of emphasis in the Western church, it remains official Catholic doctrine: “The Word became flesh to make us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For this is why the Word became man, and the Son of God became the Son of man: so that man, by entering into communion with the Word and thus receiving divine sonship, might become a son of God.’ ‘For the Son of God became man so that we might become God.’ ‘The only-begotten Son of God, wanting to make us sharers in his divinity, assumed our nature, so that he, made man, might make men gods’”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992, 460). (비록 신화 진리가 서방 교회의 강조점은 아니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교리로 남아 있다.)
[3] See, for example, Robert V. Rakestraw, “Becoming Like God: An Evangelical Doctrine of Theosis,” JETS 40/2 (June 1997): 257-269. (“하나님처럼 되는 것: 신화에 대한 복음주의 교리”)
[4] See James D. Greear, “Theosis and Muslim Evangelism: How the Recovery of a Patristic Understanding of Salvation Can Aid Evangelical Missionaries in the Evangelization of Islamic People” (PhD diss., South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03). (신화, 무슬림, 복음주의…)
[5] See, for example, Tuomo Mannermaa, Christ Present in Faith: Luther’s View of Justification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Carl Mosser, “The Greatest Possible Blessing: Calvin and Deificatio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5 (February 2002): 36-57; Kyle Strobel, “Jonathan Edwards and the Polemics of Theosis,” Harvard Theological Review (July 2012): 259-279; Michael J. Christensen, “John Wesley: Christian Perfection as Faith Filled with the Energy of Love” in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Deification in the Christian Traditions, eds. Michael J. Christensen and Jeffery A. Wittung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 219-229. (마네마 투모의 …칭의에 대한 루터의 관점을 보라.)
[6] Witness Lee, Life-study of 1 & 2 Chronicles, Ezra, Nehemiah, Esther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5), 5. All titles by Witness Lee as cited in this paper are published by Living Stream Ministry, Anaheim, CA. All subsequent references will be cited as LSM followed by the year of publication.
[7] Witness Lee, The Issue of Christ Being Glorified by the Father with the Divine Glory (LSM, 1996), 44.
[8] Jeffrey Finch, “Irenaeus on the Christological Basis of Human Divinization” in Theosis: Deification in Christian Theology, eds. Stephen Finlan and Vladimir Kharlamov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06), 86.
[9] Jules Gross, The Divinization of the Christian According to the Greek Fathers, tr. Paul A. Onica (Anaheim: A & C Press, 2002), 163.
[10] Ibid., 176.
[11] Ibid., 184.
[12] Ibid., 190.
[13] Ibid., 254-255.
[14] Ibid., 254.
[15] Ibid., 256-257.
[16] Ibid., 263.
[17] A.N. Williams, The Ground of Union: Deification in Aquinas and Palamas.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8.
[18] Ibid., 104.
[19] Gregory Palamas, Triads (III.1.35) in A.N. Williams, The Ground of Union: Deification in Aquinas and Palamas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23.
[20] Gregory Palamas, Triads (I.3.38) in A.N. Williams, The Ground of Union: Deification in Aquinas and Palamas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16.
[21] A.N. Williams, The Ground of Union: Deification in Aquinas and Palamas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23.
[22] John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Historical Trends & Doctrinal Theme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74), 186.
[23] Vladimir Kharlamov, “Basil of Caesarea and the Cappadocians on the Distinction between Essence and Energies in God and Its Relevance to the Deification Theme” in Theosis: Deification in Christian Theology (Volume Two), ed. Vladimir Kharlamov (Cambridge: James Clarke & Co., 2012), 101-102. (하나님 안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한 가이사랴 바실과 갑바도키아 교부들)
[24] See Chung-Hyun Baik, The Holy Trinity—God for God and God for Us: Seven Positions on the Immanent-Economic Trinity Relation in Contemporary Trinitarian Theology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11).
[25] Witness Lee, The Indwelling Christ in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LSM, 1989), 61.
[26] Witness Lee, Crystallization-study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LSM, 1994), 61.
[27] Ibid., 63.
[28] See Witness Lee, Crystallization-study of the Complete Salvation of God in Romans (LSM, 1997), 9-13.
[29] Stephen Finlan and Vladimir Kharlamov, eds, Theosis: Deification in Christian Theology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06), 5.
[30] Ibid., 3.
[31] Witness Lee, The Subjective Truths in the Holy Scriptures (LSM, 2000), 80.
[32] Ibid.
[33] Witness Lee, Crystallization-study of the Complete Salvation of God in Romans (LSM, 1997), 23.
[34] Ibid., 24.
[35] Ibid., 23-24.
[36] Witness Lee, Life and Building in the Gospel of John (LSM, 2012), 65.
[37]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Ford Lewis Battles (Louisville: The Westminster Press, 1960), book III, ch. III, 601.
[38] Witness Lee, Life-study of John (LSM, 1985), 98.
[39] Archibald Robertson, “Prolegomena” in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t. Athanasius: Select Works and Letters (Grand Rapids: Eerdmans, 1891), lxxi.
[40] Ibid.
[41] Witness Lee, Life-study of 1, 2, & 3 John, Jude (LSM, 1984), 248.
[42] Witness Lee, God’s New Testament Economy (LSM, 1986), 326.
[43] Ibid.
[44] Lewis Sperry Chafer, Salvation (Chicago: Moody Press, 1947), 76-77.
[45] Witness Lee,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LSM, 1986), 1071. (원시 기독교 종말론 변증)
[46] See, for example, Ernst Käsemann, “An Apologia for Primitive Christian Eschatology,” in Essays on New Testament Themes, tr. W. J. Montague (London: SCM Press, 1964), 169–95; Ben Drewery, “Deification,” in Christian Spirituality: Essays in Honor of Gordon Rupp, ed. Peter Brooks (London: SCM Press, 1975), 35-62; Adolf Von Harnack, History of Dogma (Volume 2), tr. Neil Buchanan (New York: Dover, 1961), 318.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신화를 말하고 있는가?)
[47] James Starr, “Does 2 Peter 1:4 Speak of Deification?” in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Deification in the Christian Traditions , eds. Michael J. Christensen and Jeffery A. Wittung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84.
[48] Ibid., 82.
[49] Ibid., 90.
[50] Stephen Finlan, “Second Peter’s Notion of Divine Participation,” in Theosis: Deification in Christian Theology, eds. Stephen Finlan and Vladimir Kharlamov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06), 46.
[51] Witness Lee, Life-study of 2 Peter (LSM, 1985), 26-27.
[52] Witness Lee, God’s New Testament Economy (LSM, 1986), 327.
[53] Ibid.
[54] Ibid., 328.
[55] Witness Lee, The Christian Life (LSM, 1994), 133.
[56]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 s.v. “mingle.”
[57] Witness Lee, Life-study of Luke (LSM, 1985), 6.
[58] Witness Lee, The Christian Life (LSM, 1994), 134.
[59] Witness Lee, Life-study of Galatians (LSM, 1984), 175.
[60] Witness Lee, One Body, One Spirit, and One New Man (LSM, 2000), 47.
[61] Witness Lee, The Issue of Christ Being Glorified by the Father with the Divine Glory (LSM, 1996), 26.
[62] 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LSM, 2000), 35.
[63] Ibid., 33.
[64] Kerry S. Robichaux , “The Incorporation of the Triune God in the Character and Service of the Apostles (1),” Affirmation & Critique (October 2008): 47.
[65] Witness Lee, Crystallization-study of the Gospel of John (LSM, 1996), 145.
[66] Witness Lee, The Issue of Christ Being Glorified by the Father with the Divine Glory (LSM, 1996), 41.
[67] Ibid.
[68] James D. Gifford, Jr, Perichoretic Salvation: The Believer’s Union with Christ as a Third Type of Perichoresis (Eugene: Wipf & Stock, 2011), 37.
[69] Ibid., 190.
[70] Ibid., 24-28.
[71] Ibid., 27.
[72] Ibid., 80.
[73] Witness Lee, Crystallization-study of the Gospel of John (LSM, 1996), 133.
[74] Kerry S. Robichaux, “The Incorporation of the Triune God in the Character and Service of the Apostles (1),” Affirmation & Critique (October 2008), 48.
[75] Witness Lee, Christ and the Cross (LSM, 2013), 38-39.
[76] Witness Lee, The Issue of Christ Being Glorified by the Father with the Divine Glory (LSM, 1996), 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