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 목사의 두 얼굴 - 앞에서는 칼빈을 두둔하고, 뒤에서는 칼빈의 비판자를 두둔하는 그의 이중성
- 관리자
- 1443
- 1
김홍기 목사의 두 얼굴 - 앞에서는 칼빈을 두둔하고,
뒤에서는 칼빈의 비판자를 두둔하는 그의 이중성
김홍기 목사와 지방교회 측은 아래 구절 속의 “영원하신 아버지” 해석을 놓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께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는데 통치가 그분의 어깨 위에 놓였고 그분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화평의 왕이라 불리리라(사 9:6).”
먼저 지방교회 측은 성경 해석의 원칙을 고려할 때, 동일한 문맥에서 다른 곳을 모두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영원한 아버지’도 문자 그대로 ‘성부’라고 보되, “우리에게 주어지셨는데”라는 말을 근거로, 위 본문을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위격들의 동일시라고 해석합니다(더 자세한 설명은 헬라어 박사인 케리 로비쇼우 형제의 다음 논문을 참조: https://www.localchurch.kr/theology/35007).
그런데 김홍기 목사는 삼위는 늘 구별되시며 결코 동일시되실 수 없다고 믿기에, 이런 자기 입맛에 맞는, 그러나 그들 안에서도 일치점이 없는 신학자들의 해석을 자신의 동영상에서 소개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칼빈인데, 칼빈은 ‘영원하신 아버지’를 문자 그대로의 성부가 아닌 “창조주”(원문은 Author)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김 목사 자신은 한 동영상에서, 지방교회 측이 ‘주 예수님을 창조주’이시라고 했다면서 조롱 섞인 비판을 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위에서 성자를 창조주라고 해석한 칼빈도 조롱한 셈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김홍기 목사가 칼빈을 위대한 신학자로 높이면서 동시에 칼빈의 핵심 가르침을 비성경적이라고 말한 노먼 가이슬러도 최고의 변증가라며 치켜세우는 것입니다. 참고로 노먼 가이슬러는 공개 강연에서 칼빈주의 핵심 교리인 ‘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이 비성경적인 구원론’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 https://www.localchurch.kr/defense/40738).
따라서 ‘존 칼빈과 장로교를 비성경적인 이단’이라고 정죄한 이는 지방교회 측이 아니라 노먼 가이슬러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단이라고 했으면 이단이라는 논리를 펴는 김홍기 목사 자신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그는 “칼빈과 장로교는 삼신론 이단임을 확실히 믿사오며”, ”지방교회의 존 칼빈 정죄”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만들어 마치 지방교회 측이 칼빈을 직접 공격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김홍기 목사는 이런 엉뚱한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이 칼빈을 지지하는지 아니면 칼빈을 이단시하는 노먼 가이슬러를 지지하는지를 한국 교계 앞에 분명히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애매한 처신은 “육체의 지혜”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것은 아닙니다(고후 1:12, 2:17).
또한 세 위격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심지어 분리)되신다는 김홍기 목사의 고집스러운 주장은 아래 본문들을 해석할 때도 심각한 왜곡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현재 김 목사처럼 교리를 성경보다 절대시하는 것은 발(성경)이 신발(교리)보다 클 때 발을 잘라 신발에 맞추는 식입니다.
첫째,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에 나오는 ‘성부’는 배타적으로 제1 격만이 아니며, 성부는 삼위 전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삼위가 상호 침투하시는 페리코레시스 원칙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김홍기 목사는 이것을 극구 반대합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많은 신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하나님 곧 아버지께서 계신다”라고 말합니다(고전 8:6). 어거스틴과 힐라리우스 같은 정통 교부들은 여기의 성부는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다고 이해합니다(차영배, 개혁 교의학, 총신대 출판부, 154, 179쪽). 그러나 위 김 목사의 주장에 따르면, 위 본문에서는 오직 성부만 하나님이시고 다른 두 위격들은 하나님도 아니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하게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셋째, 주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십니까?”라며 본인과 성부를 동일시하셨습니다(요 14:9). 정통 신학자들은 이것을 삼위의 상호 상통 혹은 상호 침투의 결과로 설명하지만, 김홍기 목사는 이 구절을 동일 본질이시기에 ‘성자 = 성부’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설명은 정통 삼위일체의 근간을 허무는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아마 본인도 ‘동일 본질을 소유한 성자는 곧 성부이시다’라는 본질과 위격을 동일시하는 이단적인 말을 해 놓고 속으로는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김홍기 목사는 이런 지방교회 측의 성경에 근거한 지적과 권면을 받을 때, 자신이 지금 발에 신발을 맞추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사람인지를 겸손히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