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봉사를 보았습니다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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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회복에 들어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 드러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빛 가운데 계신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저의 상태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내 자신이 너무 사치스럽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세상적인 것을 깨달았고,
너무 죽어있으며 느슨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 받았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도 주의하게 되고,
최대한 영 안에서 말하려고 했었습니다.
그 분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분이 누리는 주님은 참으로 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느꼈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생활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마음 안에서 존경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나이로 보나 교회 생활로 보나 말 하는 것으로 보나,
무엇이든 저보다 나은 사람이지만,
내 안에 그 분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분이 말하는 것은 격이 떨어 집니다.
무게가 없습니다.
가볍게 느껴지고 한번쯤 의심하게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갖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훈련을 받을 때 였습니다.
훈련교사 중 한사람은 저 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가면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것을 결정하여 교통하든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적당한 시기에 합당한 인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나서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지적하고 교정하고 인도하였습니다.
어떤 때 너무 합당하게 교통할 때는 내 안에 눈물이 나며 감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동료 형제님이 계단을 내려오며 말하였습니다. '멋있다'
세상적인 용어 같지만, 또한 사람을 따르고 높이는 것 같지만,
그때 그말이 가장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인도와 훈련은 모든 훈련생들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생명의 봉사는 훈련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그때 그때 마다 지적하는 교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 규정에, 옷은 이렇게 넥타이는 통일하고.
손을 주머니에 넣지 말고,,등등
만날 때 마다 지적하고, 멀리서 보아도 부르며 지적합니다.
저도 이런 사람이므로 어떤 때는 그 분이 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였습니다.
물론 훈련이라는 특성상 가능합니다.
그 교사 앞에 가면 옷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먼저 무엇이 잘 못 되었나 점검해 봅니다.
외적으로는 단정하게 되고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안에서는 존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개념치 않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 훈련 받는 것입니다.
보일 때 만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부족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을 때도,
제가 무엇을 할 때 마다, 생각나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멈추게 하고,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저를 통제하고 제한 합니다.
이럴 때 그 형제님 같으면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 텐데..
훈련을 마치고도 그분은 저의 훈련 교사입니다.
지금도 내 마음에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훈련을 마치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봉사를 한다면, 우리 지방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방으로 돌아와 그런 봉사를 해 보려고 하였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본을 받아서 흉내를 내려고 하였지만 얼마 못 가서 밑천이 들어났습니다.
이런 봉사는 다만 흉내를 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 존재, 조성됨,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주님이 몇가지를 보게 하였습니다.
멈추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는 벌써 말하고 싶고, 지적하고 싶고,
교정하고 싶고, 인도하고 싶지만,
멈추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바르게 잡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돌이키는 시간보다
지적하는 시간이 앞서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말하지 않고 지적하지 않은 것이 더 효과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게 하는 것입니다.
집회를 하든, 어떤 봉사를 하든 교회 안에서 잘 하고 못 하고 차이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매끄럽게 자연스럽게 아주 높은 집회를 하였을 때와,
아주 죽을 쓴 집회를 하고 난 후와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아주 좋은 집회를 하였어도 사람들을 다 잃어 버리고
몇 사람만 기능을 발휘하였다면..
매끄럽지 못하고 침묵이 흐르고 살짝 힘든 집회를 하였어도
보다 못해 한번도 신언하지 않은 형제님이 기능 발휘를 하였다면
그것도 귀하다고 느껴집니다.
따라서 조금 기다리며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봉사가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다 하게 한 뒤 몇 가지만 보완 해줄 때 효과는 더욱 컸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을 관여한 전람집회와
그냥 훈련생들에게 맡긴 집회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봉사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간증 할 수 있습니다.
본인들이 깨닫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교통하였을 때,
또는 어떤 일을 허락 할 때 즉시 결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통하러 온 사람이 말하는 중에
자신이 안에서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전화로 교통하는 데,
대답을 하지 않아 끊었는지 재차 물어 봤을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내가 의도 한데로 빨리 결정을 하고
결론을 내기를 원하며 교통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가 있는 사람에게 간다면 빛이 비취어
내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하고 있는 지 스스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항상 영의 일을 생각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전하든, 어떤 교통을 하든, 신언을 하든, 어떤 대화를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쉽게 말하지 않고, 빨리 말하지 않고,
가볍게 말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우리 생각 안에는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주님께 물어 보고, 말해보고, 기도 해보고, 다시 생각 해보고,
적용해 보고, 체험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메시지를 듣고 조망을 잡든, 강의를 하든, 질문에 답을 하든,
신언을 하든 항상 거기에 들을 만 한 것이 있었습니다.
접근하고 풀어가는 것이 신선하고 핵심이 있었습니다.
어떤 말이든 거기에 생명과 부담이 녹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방법은 아닐 것이고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봉사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한 면으로,
주님의 임재를 늘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한 면으로는 훈련과 배움이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전혀 없지는 않은 것을 인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내 안에 여전히 여운이 남아 있기에 적어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봉사를 할 수 있기를 주님께 구합니다. 아멘...
글쓴이 : 순수한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