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중심의 교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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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현대문학} 9호, 1955.9)
A flower
A mere gesture was he
ere I called his name.
When I called his name
that he came to me to be
a flower.
As I called his name,
Oh that one'd call my name,
a match to 'tis hue and odor of mine.
I'd also go to him
to be his flower.
We all want to be
something to someone.
You to me, and I to you
want to be a wink unforgettable.
부드럽게 한번 써 보았습니다 ㅋㅋㅋ(시 한편&영작연습 포함)
어떤 분이 저의 어느 글에 '관계중심'의 교회생활이라는 댓글을 달았더군요. 그것을 읽으면서, 정말 맞다는 생각이 재삼 들었습니다. 교회생활도, 인간살이도, 사회생활도, 다 그 핵심은 관계에 있습니다. 모두가 가난해도, 생활이 힘들어도 관계가 아름답다면 견딜만 한 것이고, 행복할 것입니다.
한국이라는 사회의 원형질은 아마도 농업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득한 농경사회에서의 추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그리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지요. 70년대와 80년대의 급격한 서구화와 산업화 도시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너무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가난을 벗어난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가치를 잃고 많은 세월을 방황하면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균형을 잡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귀농을 한다고 하더군요. 잃어버린 것이 소중했음을 깨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잃은 것일까요? 바로 관계입니다.
'자신의 색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관계를 해치는 요인들이 있다면, 바로 외적인 성취를 중심삼고 살아가는 것이 한 요인이요, 물질적인 것들을 위해서 대인 관계를 맺는 것이 한 요인이요, 사회적 관계인 계급관계를 사람들과의 관계인 대인 관계에 대입하려는 것이 또 한 요인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성취중심, 외적인 능력중심, 계급관계를 은연중에 가하려는 의도, ... 이런 것은 다 건강한 교회생활과 생명의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길 의무만 있을 뿐,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우리의 기대에 맞춰지도록 요구할 의무, 그렇지 못할 때, 압력을 가할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쉽게 이것을 잊어버리는지...그리고 얼마나 쉽게 관계를 해치는 사람들의 관념에 영향을 받는지...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자.'...자신의 방식대로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때, 하늘에서 불을 내려 모두를 살라버리고 싶어했던, 그래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님으로 부터 얻었던, 불같은 요한 사도는 주님의 본질의 본성인 사랑을 많이 많이 입어서, 이런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를 부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색깔과 향기에 어울리는 그런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이럴 때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이 되고, 꽃이 되는 그런 관계를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부터, 주님께 열어드리기 원하고, 주님의 사랑에 열어 드림으로, 주님이 나도 요한 사도처럼 사람을 '나에게 꽃과 의미가 되는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아멘.
글쓴이 : 빛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