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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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하게도 베드로가 부르심 받아 주님을 따를 때에 그는 그의 형제 안드레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마4:18). 또한 바울의 본업은 ‘장막 짓는 자’이었으며(행18:3), 요한이 부르심 받았을 때에 그는 베드로처럼 배 위에 있지 않았으며 호숫가에 있었습니다. 말씀은 그와 그의 형제가 강가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마4:22)고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먼저 그물을 던져 삼천 명, 오천 명 불러 모았으며, 지혜로운 건축자인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하늘에 속한 이상에 따라 장막을 건축하였습니다. 바울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보자기는 이제 장막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기가 새어 나올 때 하나님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깁는 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깁는다’라는 단어는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성도를 ‘온전케 하는’에 사용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이 단어는 ‘온전히 합하라’(attuned)로 번역되었습니다. ‘믿음의 부족함을 완전케 하려 함이라’(살전3:10)에서 ‘완전케 함’도 동일한 단어이며, 갈라디아서 6장 1절의 ‘바로잡고’(restore)도 같은 단어입니다.
즉 준비하는 것, 보수하는 것, 완전케 하는 것, 완벽하게 하는 것, 고정하는 것, 함께 합하는 것, 바로잡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망가졌기 때문에 수선하고 있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물이 망가졌을지 모르지만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물을 맞추거나 장비하고 있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2) ‘깁는 사역’은 ‘생명으로 보수하는 사역’입니다. 영적인 그물은 생명으로만 구멍을 보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모든 틈을 메꿔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구멍을 메꾸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온전케 하고 완전케 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는 왕이신 그리스도, 마가는 노예이신 그리스도, 누가는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었다면, 요한복음은 생명에 초점을 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1:4), 그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10:10), 주님 자신이 생명이심을 계시합니다(11:25, 14:6). 더욱이 이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요(6:35), 생수요(4:14), 그분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5:21), 심지어 그분이 생명으로 사람 안에 살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14:19)
영적인 노정에 무엇인가 자꾸 새는 것 같고,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느낌이 드십니까? 요한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깁고, 보수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 안에 오신 생명을 관심해야 합니다. 생명이 자랄 때 모든 균열을 메꿔주고 달려가게 합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집회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한국 땅 안에서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이단들이 발흥하여 믿는 이들을 꾀고 구멍을 내곤합니까? 생명을 누리는 것이 부족하고 생명으로 온전케 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온 땅은 기근에 허덕이지만 요셉의 창고 안에는 생명이 있는 곡식이 가득합니다. 오늘날 요셉의 창고는 어디입니까?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생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글쓴이 : 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