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10) - 또 다른 희생자들
- 관리자
- 1291
- 0
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10)
- 또 다른 희생자들
글쓴이: 코람데오
유동근 목사는 릴리 슈의 위 책을 소개하는 마지막 유튜브 소제목을 “지방교회 창립 멤버인 두 명의 여성 동역자(이연여, 왕페이진)”이라고 했습니다(그러나 성경에 따른 소위 지방교회 창립 멤버는 최초의 신약교회였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성도들이지(행 8:1), 이연여, 왕페이진이 아님). 이것은 외견상 이 책 부록에서 위 두 분이 중국 공산당의 회유로 믿음을 포기했다는 내용을 다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릴리 슈와 유동근 목사는 왜 그들이 믿음을 포기했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합니까? 그것은 과거에 중국 공산당이 의도했던 것과 이 두 사람의 목적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중국 공산당과 릴리 슈와 유 목사의 어두운 커넥션이 시간을 초월하여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편 같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통치 방식은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즉 스탈린은 반대 세력들을 즉결처형하는 식의 공포정치를 했다면, 마오쩌둥은 선전선동과 회유로 상대의 영향력을 무력화하거나 자기편으로 만든 것입니다. 전언에 따르면, 마오쩌둥 당시에 중국 상하이에만 만 명 이상의 선동원이 활동했다고 합니다. 심리전에 능숙했던 이들은 워치만 니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을 그들의 성도들과 분리시키거나 아예 매장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인도자가 간음 같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고 조작하는 것입니다. 릴리 슈도 자신의 책에서 이 점을 인정했습니다. “정부의 주된 무기는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할 뿐 아니라 워치만 니의 충격적인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이었다”(357쪽). 사실은 릴리 슈 자신도 이 전략을 통해 회유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그 당시 제시한 증거물들에는, ‘(당사자를 알 수 없게) 여인의 머리 부분은 잘린 포르노물’ ‘워치만 니 자필 자백서의 필적 위조’, ‘증거물들 위의 워치만 니 서명 위조’, ‘결핵으로 워치만 니가 생사를 오가는 투병 중에 죽을 힘을 다해 <영에 속한 사람> 세 권을 쓰는 동안, 그것도 10년 연상의 동역자 자매를 반복적으로 간음’ 했다는 주장 등등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릴리 슈와 같은 보조를 취하던 장시캉 형제는 후에 이런 점을 간파하고, 워치만 니와 관련 된 부도덕한 내용 일체를 자신의 초고에서 삭제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둘째, (위 어두운 커넥션 당사자들이 지금 위 유튜브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부인했다고 널리 선전하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워치만 니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그가 신앙을 버렸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따라서 그가 15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려고 할 즈음, 신앙 포기 서류에 공개 서명을 요구했습니다. 워치만 니가 이런 제안을 거부하자, 그들은 형기를 늘리고 더 열악한 감옥으로 그를 이송시켜 죽게 했습니다. 심지어 왕명도 목사도 이런 회유에 굴복되어 주님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풀려나기도 했습니다(뒤에 그는 회개하고 다시 수감됨).
유동근 목사는 릴리 슈의 책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서두에 소개한 제목으로 그의 마지막 유튜브를 제작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 ‘당신들이 존경하던 이런 자매들도 주님을 부인했으니, 이제 그런 형편없는 지방교회를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자신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것 같습니다. 유 목사가 이처럼 공산당에게 회유되었던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을 기정사실로 못 박아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 측을 공격하는 것은, 현재 그의 영적 분별력이 어떤 상태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릴리 슈가 이연여(Ruth Lee), 왕페이전(Peace Wang) 두 분을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내용을 재검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릴리 슈가 이 두 사람이 믿음을 버렸다는 미확인 내용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워치만 니가 부도덕한 행위로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고, 자신도 같은 이유로 믿음을 버린 것이었다는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주장과 논리는 아래와 같은 심각한 허점들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1) 먼저 릴리 슈가 주장한, 워치만 니가 이연여 자매의 친한 친구인 모 여자 동역자에게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는 시기가 여러 차례 수정된 점입니다. 이런 경우 증거 능력이 의심받습니다. 2) 그녀는 결국 1926-1927년으로 최종 특정 했지만, 그무렵은 워치만 니가 극심한 폐결핵을 앓으며 생사를 오가던 시기였습니다. 마지막 진액까지 짜내어 <영에 속한 사람>을 집필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3) 또한 상대녀라는 그 여자 동역자는 이연여 자매(1894년생)의 친구로서 워치만 니보다 거의 10년 연상입니다. 당시의 사회 통념상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릴리 슈는 또한 워치만 니의 감방 동료였던 우요치 형제도 이연여 자매가 주님을 부인한 것을 확인해 주었다고 주장하나,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먼저 그녀가 다른 책에 실린 우요치 형제의 증언을 자기 책에 재인용 소개한 부분(352쪽)에도 허점이 많습니다. 4) 거기서 우요치 형제는 자기가 본 사람들이 이연여, 왕페이전이라고 단 한 번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5) 그는 또한 1965년에 워치만 니 공개 비판장에 나온 여인들이 50대로 보였다고 했지만, 당시 이연여 자매(1894년 생)는 71세이고, 왕페이전 자매(1899년 생)는 66세였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은 보통 더 늙어 보이게 하지, 이처럼 무려 20여 년이나 더 젊어 보이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릴리 슈는 위 증언을 인용할 때 ‘그들이 써 온 원고를 더듬거리며 읽었다(stammer)’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생략했습니다. 우리는 위 증언자들이 ‘워치만 니에게 속았고, 믿음을 부인한다’는 말 앞에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교육받아 온 결과”(352쪽)라는 말을 덧붙인 것과, 다른 증언자들과는 달리 써 온 원고를 더듬거리며 읽은 것을 통해 그들이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7) 왕명도 목사의 예에서 보듯이,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이 공개적으로 믿음을 부인하라고 회유할 때는 즉각 석방을 당근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릴리 슈 책도 이연여 자매와 왕페이진 자매가 그 후에도 수년을 더 갇혀 있다가 감옥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8) 릴리 슈는 또한 자신이 2004년 7월에 우요치 형제를 만나서 위 내용을 확인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현재 애너하임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그를 직접 만나 이 사실을 물어본 사람에 따르면, 그는 릴리 슈의 책에 자신이 언급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고, 책 뒤 표지에 실린 릴리 슈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그런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다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릴리 슈가 자신 마음대로 우요치 형제를 위 두 여자 동역자들이 믿음을 포기한 것을 확인해 준 “두 번째 증인”(a second witness)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녀가 하나님과 교회의 증거를 손상하고 중국 공산당만 이롭게 하는 이런 주장을 고집하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셋째, 이외에도 중국 정부는 간첩 행위나 심지어 살인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소위 반제국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런 유사한 불명예를 안고 추방되었습니다.
이제 아래에서 소개할 두 사례는 예전에 천풍(天風)에 기사화된 것으로서, 중국 내 교회 인도자들을 간음행위를 했다며 공개적으로 매도한 사례입니다. 첫째 기사는 상하이 예수 가정(耶蘇家廷, Jesus Family)모임의 설립자인 찡 디엔잉((敬奠瀛, 1890-1957)에 관한 것이고, 둘째 기사는 자베이 교회 목사인 황위신(Huang Yushen)에 관한 것입니다. 독자들은 아래 내용에서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이 종교 지도자들을 매장하기 위해 내부자들을 회유하여 인도자를 공개적으로 고발하게 하고, 특히 부도덕한 일로 매도하게 하는 패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추적이 가능한 예수 가정(http://jehoooshua.blogspot.com/2012/09/1_2141.html?m=1)에 관한 객관적인 기록들은 아래 천풍 기사가 묘사한 내용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
상하이 예수 가정 개혁 과정
천풍 제366호 (1953년 5월 18일)
(287페이지)
4 내가 알고 있는 찡 디엔잉의 과거와 현재
나는 원래 직업이 타월 직공이었다. 찡 디엔잉은 나를 설득하여 예수 가정의 일원이 되게 했다. 그는 예수 가정은 완전한 자립 자족 교회이고, 하늘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한 종말 때의 방주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소유를 팔았다면, 이 시대에 백 배로 받고 오는 시대에는 영생을 얻는다고도 했다. 그때 나는 찡 디엔잉이 단지 하나님의 종일뿐만 아니라 거의 하나님과 같다고 여겼다. 나는 그가 말하고 전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간주했다. 나는 기꺼이 그의 영적인 아들이 되어 그를 공경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에게 경청했다. 나는 거의 17-8년을 그의 지배아래 있었다. 산동성 마쭈앙에 있는 옛날 예수 가정이 개혁된 이후, 찡 디엔잉 등의 범죄 자료가 상하이 전시관에 전시되었다. 나는 모든 전시물을 보았고 보고서를 들었지만, 내가 너무나 찡의 가르침에 깊이 중독되어 있어서 찡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지 않았다. 상하이 예수 가정이 개혁되기 전에 나는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혁은 다만 한 사람을 인간 이하로 낮추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말은 했던 것은 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개혁 기간 동안 나는 Zhao Bicheng 형제와 Li Xiuwen 자매에게 난징 예수 가정으로 가서 Li Lien 자매에게 결혼을 설득하도록 권면했다. 예수 가정은 이런 식으로 흩어져서 개혁을 피하고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35일간의 교육을 받은 후에, 나는 찡 디엔잉이 이전에 했던 것과 말한 것을 깊이 재고하게 되었다. 나는 예수 가족의 찡 디엔잉과 내 자신이 매우 나빴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처음부터 찡 디엔잉은 결코 예수를 참되게 믿지 않았다. 그가 마쭈앙의 예수 가정 개혁에 참여했을 때, 미 제국주의자인 Lin Meili를 추종하려고 예수를 믿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또한 Zhang Fengyun와 간통을 범했고, Zuo Shunzhen과는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 종종 관계를 가졌다고 시인했다. 그의 행동은 동물과 같았다. 그가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개인적으로 사악에 탐닉한 것은 지역의 자객들이나 지주들보다도 더 나빴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의 침공 수단과 매국노들과 간첩들과 지주들의 소굴로서 예수 가정을 창설했다. 찡 디엔잉은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개이자 피 없이 죽이는 사형 집행자이다.
그는 수년 동안 나를 모함했고, 80세 된 모친을 포기하고 자기를 숭배하라고 했다. 나는 그를 뼛속까지 미워한다. 예수 가정 같은 봉건적 착취와 반동조직은 결코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나는 우리를 호의로 대해 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돌봐 주신 마오 의장님과 인민 정부와 삼자 준비 위원회에 감사드린다. 여러분은 상하이의 예수 가족이 재교육되고 혁신을 수행하도록 돕는 일꾼들을 보내주어, 우리를 어두운 진흙 구덩이를 뚫고 나와서 해방되게 했다. 나는 이제부터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고, 나의 비참함을 강함으로 바꾸겠다. 조국을 사랑하는 교육을 받아서 스스로를 쇄신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상하이 예수 가정을 해체하고 찡 디엔잉은 교계에서 추방해 줄 것을 만장 일치로 요청한다. 우리는 또한 인민의 정부가 찡 디엔잉을 엄히 처벌해 주기를 요청한다.
더러운 것을 쓸어버리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라
천풍 364호(1953년 5월 4일)
(253페이지)
우리는 이 잡지의 이번 호에서 중국 기독교 협회(ACCC) “관보” 25권 5호에 올라온 세 개의 기사를 재인쇄한다. 이 세 개의 기사는 상하이 중국 기독교 자베이(Zhabei) 교회 목사인 황위신(Huang Yushen)의 처신을 폭로했다. 황위신은 20년 이상 동안 여성들을 모욕하고 농민을 억압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이 기사들은 또한 중국 기독교 협회(ACCC)와 상하이 지구 및 북부 지부가 함께 참여하여 철저하고 상세하게 조사한 결과도 보도했다. 이 조사는 황위신이 저지른 심각한 범죄행위와 ACCC가 황위신을 엄격하게 처리했음을 확증했다. 이 사건은 전국에 있는 모든 동지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황위신이 여러 장소에서 여성들을 모욕한 행위는 참으로 충격을 준다. 우리는 황위신이 설교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신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굴욕감을 준 처신을 참을 수 없다. 황위신의 나쁜 행위는 고의적으로 반복되어 죄를 범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그의 악행을 교회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 중국인 교회들은 과거에 제국주의자들의 영향과 통제아래 있었기에, 그런 범죄행위에 맞서 싸울 의지가 없었다. 황위신의 범죄가 지난 20년 이상 드러나지 않고 또 처리되지 않아서, 그의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행위로 피해를 본 이들은 필요한 지원과 구제를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반대로 황위신은 지난 20년 동안 “영성 있는” 설교자로 처신하며 여러 교회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옳고 그름,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자들이 성전을 더럽히도록 방치한 우리 교회들의 과거 상황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참으로 안타깝게 했다.
우리는 어떻게 신성한 위임을 무시한 황위신을 처리하였나?
(254페이지) 우리 협회는 최근에 자신의 신성한 위임을 무시하고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목사 한 명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처리했다. 우리 협회의 상하이 지부 자베이 교회 목사인 황위신은 45세이며, 안후이성 펑타이 현 출신이다. 그는 지주 집안 출신이고 어려서부터 사치와 매춘의 삶을 살았는데...
(1) 지속적으로 여성에게 굴욕감을 줌
그는 스무 살에 결혼한 뒤에 고향인 펑타이에 있는 한 교회의 설교자로 고용되었다. 그는 봉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여동생의 급우와 교제를 이어갔다. 그의 태도는 경솔하고 천박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에게 감금되어 자유를 잃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황위신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독립적인 자립 교회라는 미명 아래 "믿음과 사랑의 회사"라는 직조 공장을 세웠다. 그는 5, 6 명의 여자 종업원을 고용할 자금을 마련했다. 공장 사장의 신분을 이용해 그는 아무런 제한도 없이 여자 종업원들과 대화하고 시끄럽도록 소리 내어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소문이 성안에 무성하게 퍼졌고 마침내 누군가가 그에게 그것을 알렸다. 결국 그는 사업을 접고 성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그의 첫 실패였지만, 이 실패는 그에게 교훈을 주지 못했다.
그는 1936년에 광저우로 가서 성경학교 교사로 일했다. 1년도 못 되어 온갖 일들이 발생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자백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여자 동료 혹은 여학생과 혼자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입을 맞추거나, 껴안거나, 애무 하는 등, 그들에게 나쁘게 행동하곤 했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추근대다가 한 여인에게 얻어맞고,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거의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이런 일로 며칠 동안은 조심했지만, 그가 예전과 같이 행동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0년에 쇼우 군 교회는 그가 “전도가 유망한 젊은이였고, 현재는 약간 부적절한 행동을 했어도 나이가 들면 점점 나아질 것으로 여겨" 목사로 임명했다. 만일 그가 회개하여 과거의 모든 오명을 씻었더라면, 이것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만해졌고 다시 예전처럼 처신했다. 두 여인과 사건이 다시 불거졌고, 그는 강제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쇼우 군을 떠나 보후(Bohu) 타운으로 이사했다.
(255쪽)
1946년에 그는 상하이에 오자마자 자베이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인들을 심방하는 동안 두 명의 여성 신자를 모욕했는데, 그중 한 명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른 두 명의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그가 자백한 바에 따르면, 그가 모욕한 여성은 무려 18명이라 하는데, 실제 숫자는 더 많다. 위 내용은 모두 본인이 자백한 것이다. 그가 드러내길 원치 않은 몇 가지 심각한 사례들이 더 있었는데, 그것들도 결국엔 폭로되었다.
얀후 타운에서 강간당한 후에 죽은 여종 사건이 그 한 예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황에게는 Cuifang이라는 하녀가 있었다. 남편은 Zhang 씨 성을 가졌다. 1944년 5월 어느 날 밤에 그녀가 욕조에서 목욕하고 있었는데, 황이 그녀를 범하려고 몰래 들어왔다. 황의 아내가 현장에서 그를 붙잡았다. 하녀는 너무 부끄럽고 분하여 그다음 날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녀의 나이 20세였다. 이 사건은 후에 중재로 해결되었다. 황은 책임지고 장례를 치러주었고, 그녀의 남편에게 곡식 600근을 주었다. 황이 지역 유지였기에, 그 남편은 감히 다투려 하지 않고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일관되게 여성을 모욕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옷 입은 짐승 같은' 뻔뻔스러운 자를 어떻게 설교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중국어 원문:
天風
總號366 (1953年5月18日)
上海耶穌家庭革新經過
…
(頁287)
(四)我對敬奠瀛的認識過現在有何不同
我本來是一個以織毛巾為業的工人,敬奠瀛勸我入耶穌家庭,他說家庭是完全自立自養的教會,
是末日的方舟,是天國臨世,並且要變賣了一切所有的,今世可得百倍,來世得永生。那時我看
敬奠瀛不但是神的僕人,簡直是和神人一樣,凡他所說所講的,都以為是出於神,所以願甘心作
他屬靈的兒子,孝敬他、順服他、聽他的話,受他的統治十七、八年之久。自山東馬莊老家庭革
新後,在上海展覽敬奠瀛等的罪惡材料,我雖然看了展覽會,聽了報告,但因我受毒太深,對敬
奠瀛的罪惡不全相信。在上海家庭革新前,我還對人說:「革新無非將自己得不是個人了」。
這是因為我不明白革新的意義,所以才說這樣的糊塗話。在革新時,願意趙璧城哥、李秀雯姐去南
京家庭,勸李立恩姊妹嫁人,這樣不但分散了家,逃避了革新,還能多得產業。自從經過三十五
天的學習,我深深的回想以前的所作所為的和敬奠瀛所作所講的,因此也使我深深的認識到敬奠
瀛、耶穌家庭和我自己從根本上是壞的。敬奠瀛從當初就沒真心信耶穌,他在馬莊老家革新時,
自己親口承認為戀愛美帝分子林美麗才信耶穌。他親口承認和張鳳雲通姦,和左順真經常通姦,
這些年來如同夫婦,他簡直和畜類一樣。他的剝削人、壓迫人和私人的享受,比惡霸地主還厲害
。他辦耶穌家庭不是為傳道,是給帝國主義做侵略工具,給漢奸特務地主當窩巢。敬奠瀛是帝國
主義的忠實走狗,是殺人不見血的劊子手。他陷害了我這些年,叫我撇了八十多歲的老母親,來
孝敬這個畜類,真使我恨入骨髓。耶穌家庭這個封建剝削反動組織是根本不應當存在的。
現在我感謝毛主席,感謝人民政府,感謝三自革新籌備委員會寛大我們,關懷我們的痛苦,派了
工作隊來幫助我們上海小家庭學習,進行革新,將從黑暗泥坑裏救出來,使我們得到解放。從今
以後,我要決心痛改前非,將悲憤化為力量,在愛國愛教的教育下,改造自己,重新做人。
末後,我們一致要求取消上海耶穌家庭。
要求開除敬奠瀛的教籍。
要求人民政府將敬奠瀛嚴格的處治。
---------------------------------------------------------------------------------------------------------------------
天風 總號364 (1953年5月4日) 掃除污穢 潔淨聖殿
本刊這期轉載了中華基督教會全國總會「公報」第二十五卷第五期上載的三篇文章。三篇文章揭露了中華基督教會上海閘北堂師黃漁深二十多年來一貫侮辱女性、作威作福壓迫農的惡劣行為, 並報導了中華基督教會全國總會、上海區會、北堂會在經過週密詳確的調查研究, 證實了黃漁深確實犯了上述的嚴重罪行之後, 對黃漁深作的嚴正處理。這一事件應該引起各地同道的注意。黃漁深二十多年來在各地犯的侮辱女性的惡劣行為是驚人的。身為傳道人的黃漁深, 却一貫地侮辱婦女信徒, 更是我們不能容忍的。黃漁深的這種惡劣行為已經發展到一貫的、屢犯不改、明知故犯的地步。
過去, 他的這種惡劣行為, 顯然在我們教會中也有少數人知道, 但是, 由於過去的中國教會是在帝國主義分子的影響和控制之下, 對罪惡的行為沒有進行鬥爭的決心, 因此, 就使黃漁深的罪行在這二十多年來始終沒有得到揭露和處理, 就使受到黃漁深侮辱和壓迫的受害人始終沒有得到支持和伸訴的機會。
相反的, 黃漁深在這二十幾年中,卻以「屬靈」的傳道人出現, 在各地的教會中大大活動。過去, 我們教會中這種是非不分、善惡不辨, 讓那些偽善者玷污了聖殿的現象, 實在是使每一個主耶穌基督的信徒都感到萬分痛心的。處理褻瀆聖職的黃漁深經過 (頁254)本會最近在上海以嚴肅負責的態度,
處理了一個犯有嚴重罪行褻瀆聖職的牧師。本會上海區會閘北堂會前牧師黃漁深, 現年四十五歲, 安徽鳳台縣溝集人, 地主出身, 從小就過驕奢淫逸的「美滿」生活, …… (1) 一貫的侮辱女性. 他在廿歳結婚後, 就被他本鄉(鳳台)教會聘為傳道員, 那知他開始工作之後, 反而行為不檢起來。首先同他妹妹的一位同學(某)發生了感情,
進而態度輕薄,害得這位女士被她父親關了起來, 失掉了自由。 之後,為了滿足他更大的慾望, 竟巧妙的假藉籌辦教會自立自養美名,
辦了一個「信愛實業社」織布廠。由他本人出資,招收了五、六位女生工作, 他以老闆資格,同這些女生「天天說說笑笑,打打鬧鬧」, 放蕩輕狂, 肆無忌憚,因此弄得滿城風雨, 被人揭發,生意遂即垮台,他祗得溜之大吉。這是他第一次的失敗,但這次失敗,卻沒有使他接受教訓。 一九三六年,他到了廣州,任聖經學校教員,
祗一年工夫,卻花樣百出,他自己說:「在那一階段,我簡直人面獸心,如果只有一位女同事或女同學和我在一起的時候,我就會作出不規矩的行動來,
不是和她們接吻,就是擁抱她們,撫摸她們。」有一次在圖書館裏,調戲一位某女生,被人家打了一記,把眼鏡都打落地下,幾乎摔碎。他遭到這種恥辱,除了幾天擔心害怕外,但對他的惡劣行為,並沒有絲毫的改變。 以後,
他又回到家鄉。一九四零年,壽縣教會以為他「年輕前程遠大,縱有不檢之處,事稍長當可改正」,竟封立他為牧師。他若稍有覺悟,正可「一洗過去的污穢」,仍不失為生活上的一大轉捩。那知他反而「得意忘形」,故態復發。又在二位女生身上,謀為不軌,事發之後,被迫辭去壽縣牧師職務,遷居陌湖鎮,以避風頭。 (頁255)
一九四六年以後,他又來到上海,旋即被任閘北堂會牧師,竟利用探望教友之便,曾對兩位女信徒加以侮辱,以致其中一位告到公安局派出。經過這次打擊,他還不停手,又同其他兩位女士發 生不正當關係。據他自己檢討時,經他侮辱的女姓,有姓名可查的,有十八名之多,但事實上是不止此數的。
以上各條,都是經他自己承認了的,有很多較嚴重的事件,他卻想巧妙掩蓋,那知欲蓋彌張,陽湖鎮因姦逼死女僕一案,就是一個顯著的例證。事情經過是這樣:他有一個女傭人,名叫萃方(據黃叫瑞方),她丈夫姓張,在一九四四年五月裏的一個晚上,她在房間裏洗澡,黃竟偷偷摸摸的闖進去,施行非禮,不巧被他老婆撞見,這個傭人羞憤得不能見人,到第二天清早,就投土井死了(土井在前樓村東大塘土井窩),時年廿歲。這件命案經人調解,由黃負責埋葬(埋在葉台子家後老荒)並給了她丈夫六百斤糧食。由黃在地方上有些仗勢,死者丈夫不敢爭辯,祗好草草完結。對於這件事,現有當地農民鄧傳好、趙廷修等廿二人簽名蓋章,願為作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