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3) - 공산정부-릴리 슈-유동근 목사의 어두운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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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3)
- 공산정부-릴리 슈-유동근 목사의 어두운 커넥션
글쓴이: 코람데오
유동근 목사는 릴리 슈의 저서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내용에 기초해서 만든 자신의 일곱 번째 유튜브에서, 릴리 슈가 워치만 니가 투옥될 당시에 그의 변호사의 인턴과 나눈 내용 일부를 소개했습니다. 즉 워치만 니를 자주 접견했던 변호사의 인턴의 증언에 따르면, 워치만 니는 유일한 희망이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고, “제발 저를 총으로 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유 목사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워치만 니가 속 다르고 겉 다른 부분이 있다.” “굉장히 단호해 보여도 속은 한없이 물렀다.” “예민하고 센스티브하고 겁이 많았다 이런 뜻이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유 목사의 의도는 워치만 니가 홍콩에서 중국 대륙으로 돌아갈 때 순교를 각오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감방 동기이자 그를 통해 거듭난 우요치 형제를 통해 전해진, 워치만 니의 감옥 생활에 대한 좋은 간증들을 뒤집으려는 속셈도 엿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워치만 니 투옥 당시의 변호인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임명된 정부 공무원, 즉 “공소변호인”이었고(법무법인 지평, ‘중국의 변호사 제도’라는 칼럼 참조(2010. 1. 5 일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변호사가 아님을 감춘 간교한 사실 왜곡일 뿐입니다. 그 당시 이런 변호인들의 주된 임무는 요즘처럼 의뢰인의 권익 보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주로 정부 정책을 따르도록 죄수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동정을 파악해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워치만 니의 평판이 깎이고 그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어떤 말도 지어내어 퍼뜨릴 수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릴리 슈가 중국을 떠나 미국에 와 있는 현재에도 이런 중국의 친정부 인사들과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즉 그녀의 정체성이 여전히 무신론자들인 중국 공산당의 기조와 맞닿아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습니다. 삼자교회 고위 지도자 중 하나인 曹圣洁는 자신이 쓴 <구술 역사(口述历史)>(상해 도서 출판사, 2016년)에서, 릴리 슈의 위 책을 읽었다며 그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대학생 때 워치만 니를 고소했던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볼 때) (릴리 슈는) “매우 정직하고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다”(说明她是真诚的人, 值得敬佩)”(70쪽). 이런 그녀의 모습은 아래 소개할 장시캉(張錫康) 형제와 대조됩니다.
유 목사는 이런 배경의 저자의 책을, 자기 아들 소유인 벧엘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판하여, 한국 교계에서의 워치만 니의 평판에 일격을 가하겠다고 공언합니다. 여기서 중국 공산당에서 릴리 슈로, 릴리 슈에서 유동근 목사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어두운 커낵션일 뿐입니다.
한편 마오쩌둥의 공산 혁명이 성공하면서 상하이 지방교회에 파도처럼 밀려온 시련의 기간을 기록한 사람은 위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저자인 릴리 슈만이 아닙니다. 워치만 니가 심하게 폐결핵을 앓을 때 자기 집에 있게 하고 극진히 간병했던 장광영 형제의 아들인 장시캉(張錫康)도 자신이 겪은 일들을 ‘상해 지방교회 60년을 돌아보며’라는 부제를 달아 회고록으로 남겼습니다. 장시캉 형제 역시 워치만 니를 공개 비난했던 10명 중 한 명이었지만, 그 후 깊이 회개했습니다.
장시캉 형제는 자신의 회고록에 “내가 아는 워치만 니”를 부록으로 첨부했습니다(507-517쪽). 그 내용에 따르면, 그는 일곱 살 때인 1928년부터 워치만 니가 부친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답니다. 워치만 니가 폐결핵을 앓다가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일어서서 진땀을 흘리며 계단을 내려오자 즉시 치유를 경험했다는 그 집이 바로 장 형제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분주했던 워치만 니가 자기에게 온 서신들에 대한 답장을 부친에게 부탁했다고도 증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릴리 슈가 쓴 위 책의 상당 부분이 장시캉(張錫康) 형제의 회고록 초고에 기반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장 형제는 초고를 작성한 후에 워치만 니를 비난하는 “증거들”을 재검증했고, 자신의 초기 평가를 뒤집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초고에 기록했던 워치만 니 관련 부도덕한 사건들이 조작에 의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고 후에 출판된 책에서 모두 삭제했습니다.
워치만 니 제약 회사의 재정 담담 지배인이자 그의 개인 도서관 사서였던 장 형제는 워치만 니의 자필과 서명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회를 붙잡아 그 증거들을 자세히 보았을 때, 모든 증거들에 쓰인 워치만 니의 필체와 사인은 그의 것이 아니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즉 워치만 니는 일관되게 교회 관련 문서에는 ‘니토생’(Ni Tuo sheng)으로 적고, 교회와 무관한 세상 관련 문서들에는 ‘워치만 니’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이름인 ‘니 슈토’(Ni Shu tsu)라고 적어왔습니다. 하지만 위 증거자료들은 모두 ‘니토생’으로 서명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필체 또한 “마치 거미가 기어가는 것”과 같았고, 평소의 워치만 니의 필체와는 확연히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장시캉 형제는 워치만 니의 자백서의 필적과 불법 자료에 들어있는 “서명들”이 위조임을 인정하고, 1983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은, 자신의 과오를 감춘 채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주장을 반복하고, 의사가 되어 출세의 길을 갔던 릴리 슈의 삶과 비교가 됩니다.
아래 내용은 워치만 니가 자격도 없고 초청 받지도 않은 채로, 자신의 개인 유익을 위해 임의로 ‘옵저버’ 자격을 얻어 베이징 모임에 갔다는 릴리 슈와 유동근 목사의 주장을 뒤집는 좋은 자료입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외부인의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중국 공산당 정부 당국이 T 오스틴 스팍스 그리고 영국 형제회와 워치만 니의 관계를 의심하며, 워치만 니 본인이 직접 와서 상세히 설명해 달라는 공식 요청을 받고 베이징에 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젊은 대학생에 불과했던 릴리 슈의 주장과 판단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주관적이었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문제는 워치만 니에 대해 비판하는, 검증도 안 된 이런 자료에 고무되어, 임의로 추측성의 말을 보태는 유동근 목사의 태도입니다.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종이고 사역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일에 대해 지금과 달리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장시캉 형제의 회고록 중 관련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전문 번역이 아님으로 큰 흐름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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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장(Samuel Zhang, 張錫康) 형제의 <회고록>, 제 18장 ‘인민해방 이후부터 그의 투옥 전의 워치만 니 형제의 일’ 중에서(중국어판, 178, 180쪽).
(178쪽)
“워치만 니 또한 그 모임에 참석하려고 베이징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고, 그 또한 자신이 주목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 당시 정부는 우리가 인민의 편에 확고하게 선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었다. 난징 로에 있는 어셈블리 홀(Assembly Hall)은 워치만 니가 반대하는 Liu Liang-mo가 이끌고 있었다. 워치만 니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1922년부터 외국 선교사들 혹은 교단들과의 연대를 끊었고,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지원을 하는 지방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국주의와는 어떤 연관도 맺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워치만 니는 등록하는 용지에 “제국주의로부터 원조를 받음”이라는 항목을 공란으로 남기고, 그 용지에 “아니요”(문자적으로, 해당사항 없음)라는 말을 추가했다.”
“둘째, 워치만 니는 YMCA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느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나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이 육체로 오신 분으로 믿지 않았다. … 그는 우리가 그들을 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 그는 그들을 “불신자 모임”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용지를 공란으로 하고 제국주의를 비난하지 않은 채로 제출하자, 우리는 삼자교회 인도자들을 반대하는 이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종교국과 삼자교회가 우리를 의심하게 되었고, 우리가 저항하고 있고 뭔가 그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워치만 니에게 와서 대화를 하자고 했고, 1932년에 방문차 상하이에 왔었던 형제회 모임의 여덟 명의 외국인들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하게 말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또한 워치만 니에게 와서 1933년과 1938년에 T 오스틴 스팍스를 방문했던 두 번의 영국 여행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니 형제님은 그들에게 형제회 사람들은 우리를 방문하기 위해 왔었고, 우리에게 그들의 교단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으나, 우리가 그것을 거절했음을 말해주었다. 그는 편지 하나를 증거로 가져갔다. 오스틴 스팍스에 관해서는, 단지 그가 우리와 유사한 성경의 계시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며, 우리가 그들과 어떤 종속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삼자교회는 또한 그에게 대만으로 달아난 위트니스 리를 고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물을 빠져나간 반혁명분자이고, 심지어 많은 젊은 이들을 거기로 데리고 갔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제약회사 사무실에서 니 형제님이 나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위트니스 리 형제를 고소할 수가 있겠는가? [만일 내가 동의해서 그렇게 하면] 서로 사랑하는 형제일 수가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여러 다른 고소 사유와 함께 화살이 니 형제님에게 겨눠졌다.”
(180쪽)
“[워치만 니가] 모임에 참석하려고 베이징에 가기 전에, 한 면으로 그는 자신이 이미 “삼자”를 실행하고 있고, “삼자”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면에서 그는 삼자에 대한 형제자매들 가운데 있는 저항감을 누그러뜨리면서 권위에 복종하도록 형제자매들에게 요구했다. … 종교국 상하이 지부는 워치만 니가 삼자교회의 리더십을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느꼈다. 오직 정부의 인도 아래 있는 삼자교회만이 참되고 완전한 삼자교회이다. 삼자교회의 워치만 니 [버전]은 제국주의를 대항하지 않고, 따라서 진정한 삼자교회로 간주될 수 없었다. 교단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삼자(三自)를 실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니 형제님은 형제자매들이 삼자교회에 가입하기를 원했는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삼자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동역자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모이는 한 집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정치적인 사고가 뒤쳐져서는 안 되며, 정부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가 인민의 편에 확고하게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잔과 쟁반을 예로 들었다. 잔이 믿음을 담은 것이라면 쟁반은 정치적인 입지이다. 우리의 “쟁반”은 인민의 편에 서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워치만 니에 따르면, 인민의 편에 확고하게 서는 것은 반제국주의라는 정치적인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지, 삼자회 가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부는 니 형제님이 1951년에 “어떻게 내가 돌아섰나?”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그가 삼자교회 가입에 동의함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돌아섬”은 인민의 편임을 인정하고 정치적으로 정부와의 협력으로 돌아섬을 가리켰다. 그는 결코 우리가 삼자교회와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su-fan운동(문자적으로 대척결)이 있던 1956년에, 상하이 종교국 수장인 Lo Ju-feng은 “만일 워치만 니가 더 일찍 삼자교회에 가입했었더라면, 우리는 그를 반혁명분자로 정죄하지 않아도 되었고, 상하이 기독교 모임(지방 교회) 안에서 su-fan운동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비록 워치만 니가 그의 생각을 전환했더라도 그가 체포되기 전에는 삼자교회 가입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가 삼자회 가입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어스틴 스팍스와 형제회 모임 사람들이 제국주의에 속했음을 인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화살이 그를 겨냥했다. 이것이 그가 오반 운동 기간 동안에 체포된 진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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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을 증언한 장시캉 형제와 릴리 슈는 둘 다 인민재판에서 워치만 니를 고소했던 사람들입니다. 말 년에는 둘 다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장시캉 형제는 워치만 니를 공개적으로 고소했던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풀려난 후에 미국 애너하임을 거쳐 딸과 사위 부부가 있는 샌디에고 지방 교회에서 생활하다가 주님 품에 갔습니다. 그러나 릴리 슈는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라는 장시캉 형제의 여러 차례의 간곡한 권고를 무시한 채, 93세인 현재에도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계속 고집하며 워치만 니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릴리 슈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 장시캉 형제처럼, 그녀가 눈으로 보았다는 워치만 니를 참소하는 그 증거 자료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의도적이고 강압적으로 조작되거나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을 만한 자료에 따르면, 그 무렵 중국 공산당을 위해 은밀히 활동하던 선동원이 상해에만 만 명이 넘게 있었고, 중국 공산당에 의해 조작된 거짓 증거로 억울하게 정죄되고, 투옥되고, 일부는 죽게 된 수 백만의 사례들이 보고되었습니다.
만일 릴리 슈가 자신의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워치만 니가 정말로 형편없는 사람이었다면, 그 내용을 다 아는 중국인들, 특히 중국의 추구하는 믿는 이들은 그 후에 다 등을 돌렸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 약 1억 명이 넘는 가정교회 성도들이 있게 된 것에는, 상당 부분 워치만 니와 적은 무리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것은 다수가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따라서 릴리 슈와 유동근 목사는 지금 이런 객관적인 사실과는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