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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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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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거짓말(5)

 


지방교회와 신인합일론 (이인규님의 원글 제목)


한국에서 지방 교회측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썼던 분이 몇 사람 있습니다. 그들의 거의 대부분은 다른 일들에도 많이 바빠서 워치만 니(60여권)와 위트니스 리(약 400여권)의 방대한 자료를 미처 다 소화하지 못하고 일부 책들(주로 경륜적인 관점을 다루는)을 읽고, 자신들의 기준을 따라 임의로 판단했습니다. 그 결과 사실 왜곡이 심하고, 본인들의 판단기준 자체도 검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인규님의 경우도 큰 틀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아래에서 보듯이 1차 자료를 비교적 많이 인용 소개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이 있고, 소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골라 소개하고 다른 면을 함께 말하는 부분을 생략하여 결과적으로 거짓된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 내용에서도 그러한 실상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인규님의 원문 밑에 간략한 의견을 다는 식으로 그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리고자 합니다.

 


(이인규님) “신일합일, 지방교회, 몰몬교 등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것을 신일합일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지방교회의 신인합일설은 사람과 하나님의 구별이 없는 "똑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지적하면, 지방교회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은 직위를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며, 연합적인 개념이라고 변명을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론,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지방교회는 항상 자신의 사상을 위장하고 감춘다. 이것을 상세하게 밝혀보자. 만일 사람이 하나님같이 경배를 받는 직위가 된다면, 그것은 이단이 아니라 사이비가 되고만다. 우리가 비판하자는 것은 그 직위에 대한 비판이 결코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위 이인규님의 말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방 교회측은 하나님과 사람이 “구별이 없는 똑같이 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자체가 심각한 거짓말이자 사실왜곡입니다. 두번째는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지방 교회측이 처음 한 말이 아닙니다. 이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를 포함한 정통 교부들 대부분이 이런 가르침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현재 동방교회에는 구원론의 최종 목적으로 초기부터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만일 이인규님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자체를 비판하려면 정통 교부들과 동방 교회측부터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자신이 모르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태도는 교만일 뿐입니다.


(이인규님) “먼저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견해가 무엇인지, 그의 책을 보자.


(인간이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같은 부류라는 글)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모두 성경에 근거한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각기 다 그 종류대로 지음 받았으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습니다(창1:26). 성경은 ‘주님과 연합하는 자(사람)는 한 영’이라고 말합니다(고전6:17).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그릇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그 안에 보배이신 하나님을 담기 위한 것입니다(고후4:7).


(인간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는 주장)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이 된다는 주장)


# 바로 그 때 그들은 안팎으로 - 생명과 본성과 기질과 몸의 형태에서 -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4쪽)


역시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말입니다.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도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으며(요일5:12, 골3:4)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내재합니다. 주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죽고 부활하심으로 ‘많은 밀알들’인 그분의 형제들을 산출하셨습니다(요12:24). <한 알의 밀알과 많은 밀알들>은 “생명과 본성과 기질과 몸의 형태”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그분은 삼위의 제 2격으로서의 경배받는 지위가 있으시나 우리는 그러한 그분의 고유한 지위를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로마서 8:29는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맏아들의 형상과 똑같이 되도록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고 말하고, 요한일서 3:2는 ‘그분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것’(if He is manifested, we will be like Him)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와 같은 종류라는 주장과 주님이 첫 번째 하나님-사람이라는 주장)


#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인가? 자녀들과 아버지는 같은 종류가 아닌가? 요한복음 3장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한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모두 같은 종류, 육신의 종류이다. 6절은 또 말하기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두 영은 같은 종류이며 또한 같은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많은 하나님-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따르는 우리의 주님, 또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40쪽)


역시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언급입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같은 종류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버지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이인규님이 지금처럼 주 예수님이 첫번째 하나님-사람이 아니심을 주장하려면 그렇다면 누가 첫번째 하나님-사람이신지를 답변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체현으로 똑같이 된다는 주장)


# 우리는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 바로 그 분이 우리 모두로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 분의 맏아들과 똑같게 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결국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체현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8쪽)


지극히 성경적인 언급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합니다(요14:20). 또한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로 이뤄진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살후1:1). 이 땅 위의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따라서 몸의 머리이신 주 예수님은 그 몸(의 지체들)을 박해하는 다소의 사울을 향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9: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맏아들과 똑같이 된다는 주장)


# 이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거듭난 후로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해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이 될 때까지 그 역사를 계속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인 우리 모두는 거룩케 됨, 새롭게 됨, 변화, 형상을 본받음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온 존재의 영화롭게 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8쪽)


이인규님이, 이런 지극히 성경적인 말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교리로만 그리스도를 알뿐 주관적인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많은 아들들이 맏아들의 형상과 똑같이 되는 것은 창세 전에 예정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롬8:29).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의 왕국과 영광 안으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살전2:12).


(이인규님) ”위트니스 리는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사람(God-Man)이라고 부른다. 지방교회는 자신의 주장을 감추고 위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방교회의 주장을 더욱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올린 지방교회의 양태론과 인간론을 알아야만 한다. 인간론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인간을 영과 혼과 육의 삼분법으로 날카롭게 구별하여 분리시킨다. 그러한 삼분법을 염두에 두면서,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단주장이 등장한다.”


지방 교회측 진리는 전 세계에 모두 무료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누구든지 아래 사이트를 통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모든 책을 볼 수 있습니다. http://www.ministrybooks.org/ 따라서 “지방교회는 자신의 주장을 감추고 위장한다”는 위 말은 이인규님의 무책임하고 상투적인 거짓말일 뿐입니다. 아울러 양태론은 지방 교회측과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또한 거듭 밝혔지만 지방 교회측은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연합된 분임을 굳게 믿습니다.


(인성과 신성을 가진 예수와 사람이 똑같다는 주장)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므로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는 그분과 똑같다. 그러나 그분의 인성에는 죄가 없으며 결코 이전에 타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간의 부분은 구속될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높여질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인성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분이고, 다른 한 부분은 타락되고 부패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5쪽)


예수님과 우리가 한 근원에서 태어난 형제지간임을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주 예수님)과 거룩케 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분(성부)에서 났으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와 한 실제, 한 인격으로 연합되었다는 주장)


# 하나님의 성육신 안에서는 신성이 인성 안으로 들어왔고, 인성에 더해졌다. 이 하나님-사람의 부활 안에서는 인성이 신성 안으로 가져가졌고 신성에 더해졌다. 이것을 놀라운 왕복교통이다. 사람의 본성과 신성한 본성, 이 두 본성이 서로 더해졌을 뿐 아니라, 한 실제, 한 인격으로 제삼의 성분을 산출하지 않고 서로 연합되었다. (새 예루살렘, 237쪽)


역시 성경적인 언급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요1:14), 부활 안에서 주 예수님의 인성은 죽을 인성에서 죽지 않을 인성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계1:18). 그러나 그분은 승천 후에도 여전히 ‘인자’ 혹은 ’사람’이십니다(행7:56, 딤전2:5). 그분은 부활 승천 이후에도 참 하나님, 참 사람이시고 제삼의 본성으로 변질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지극히 성경적인 설명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지에 대해 그는 침묵합니다.


(이인규님) ”이들은 인간을 부분으로 분리시키며, 마찬가지로 예수를 인성과 신성으로 분리시킨다. 이미 설명하였듯이 이들의 기독론은 초대교회의 이단적인 주장의 종합적인 견해인데, 이러한 주장을 살펴보자.


1) 예수는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의 결합이라는 일부 그노시스파


2)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한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사벨리우스파의 양태론


3) 그리스도의 일부는 피조물, 일부는 창조주라고 하는 반신으로 만든 아리우스파


4) 인간이 육체와 혼과 영의 세부분이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육체와 혼의 두 부분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영으로 들어온다는 아폴로내리스파의 견해


5)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신복윤 교수의 기독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 그(아폴로내리우스)는 사람이 신, 혼,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영의 자리는 로고스가 채웠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축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영이 없는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 (신복윤교수.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 102쪽)“


지방 교회측은 이인규님의 거짓말처럼, 예수님의 신성 인성을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양성의 구별마저 부정한다면 이인규님의 기독론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다는 자백일 뿐입니다. 이인규님은 양성의 ‘구별’을 ‘분리’로 왜곡시키는 식의 비판을 자제해야 합니다. 또한 위 신 교수님의 기독론 인용은 양성분리를 지적한 내용이 아닙니다. 양성 중 인성의 완전성을 부인함으로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참 사람되심을 부인한 한 이단을 다룬 내용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육체를 입으신다는 것은 말이 안됨으로 그 접촉점인 사람의 영은 진짜 사람의 영이 아니라 ‘로고스’라고 함으로 결국 좋은 의도로 말한 것이 참 사람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인규님은 미처 소화되지 못한 신학서적을 지금처럼 인용하여 마치 자신이 많이 아는 것처럼 위장하는 일을 그쳐야 합니다.


(이인규님) ”이 초대교회부터 기독론의 이단적인 모든 다섯가지 주장을 지방교회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위의 신복윤 교수의 설명과 같이 특히 아폴내리우스파의 주장에 주목하여야 한다.


인간을 육체와 혼과 영의 세부분으로 분리하여 구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켜, 인성은 다시 육체와 혼으로 분리시키고, 신성을 영이라고 하여 세부분으로 구별한다.


물론 지방교회가 말하는 영은 구약과 신약(부활전)의 성령과 다르다. 양태론적인 견해로서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예수가 부활의 영으로 과정을 거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지방교회의 교인들에게 부활의 영이 내주하면, 그들은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됨으로서 그들은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수의 재림이라고 부른다.


이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말들은 심각한 사실왜곡이자 거짓말입니다. 이인규님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이해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신성을 영이라고 하여 세부분으로 구별한다.” 이런 말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예수가 부활의 영으로 과정을 거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일종의 횡성수설일 뿐입니다. 이인규님은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셨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고, ‘예수가 성령으로 되셨다’라고 거짓말을 하여 억지로 자신이 만든 양태론 공식에 꿰어 맞추는 식의 비양심적인 억지주장을 그쳐야 합니다. 지방 교회측 누구도 “부활의 영의 내주를 …예수의 재림”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거짓말들을 근거삼아 지방 교회측이 양태론이니 뭐니 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것입니다.


# 그러나 그분의 인성에는 죄가 없으며 결코 이전에 타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간의 부분은 구속될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높여질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인성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분이고, 다른 한 부분은 타락되고 부패한 부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8쪽)


만일 이런 기독론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면, 이인규님은 예수님의 인성도 타락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인간 부분도 구속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이것이야말로 기독론에 있어서의 심각한 이단 사상을 본인이 소유했다는 고백일 뿐입니다.


# 하나님의 성육신 안에서는 신성이 인성 안으로 들어왔고, 인성에 더해졌다. 이 하나님-사람의 부활 안에서는 인성이 신성 안으로 가져가졌고 신성에 더해졌다. 이것을 놀라운 왕복교통이다. 사람의 본성과 신성한 본성, 이 두 본성이 서로 더해졌을 뿐 아니라, 한 실제, 한 인격으로 제삼의 성분을 산출하지 않고 서로 연합되었다. (새 예루살렘, 237쪽)


위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 비록 그분의 "인간의 부분"이 죽었지만, 죽지 않는 "그분의 신성한 부분"은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신 안에 신성한 요소 곧 거룩의 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책, 44-45쪽)


만일 이런 기독론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면 이인규님은 예수님의 신성의 부분 즉 참 하나님도 죽으셨다는 궤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양성의 ‘분리’가 아니라 양성의 ‘구별’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 그 분이 육체 안에 사셨을 때에 "그분의 한 부분"은 다만 사람, 곧 다윗의 씨였다. 그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정됨을 통해서이다. (같은 책, 45쪽)


이 역시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다룬 것이지 분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칼케돈 신조는 양성의 분리를 금지할 뿐 이인규님처럼 ‘구별’까지 부정하지 않습니다.


# 이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과 "변화된 세부분으로 된 사람과의 연결과 연합" 곧 한 총체로서의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6쪽)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살전5:23).


(이인규님) ”그래서 지방교회에서는 예수는 부분적으로 피조물이 되어지며, 그렇기에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영) + 사람(혼 + 육)이 되어지며 삼분법으로 해부되고 분리되어지고 만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면에서는 창조주이시나, 참 사람인 면에서는 우리가 피조물이듯이 그분도 살과 피가 있는 피조물이십니다(골1:15). 즉 그분은 창주조이시자 피조물이십니다(아리우스는 그분의 창조주이심을 부정함). 이것은 그분의 양성(신성, 인성)을 믿는다면 당연한 고백입니다. 만일 이인규님과 같은 논리라면 그분은 참 하나님의 면에서도 피조물이셔야 하는데 이것은 참람한 말입니다. “지방 교회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영) + 사람(혼 + 육)이 되어지며..” 이런 말은 근거없는 거짓말입니다. 굳이 도식화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영)+ 사람(영+혼+육)이십니다. 이인규님의 말에는 ‘사람의 영’ 부분이 빠져서 ‘아폴로네리안’처럼 참 사람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 이전에 그분은 그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 분의 성육신으로 그분은 인성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 분의 존재의 부분으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인성은 그분이 부활할 때까지는 "아들화" 되지않은,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았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23쪽)


사도행전 13장 33절, 로마서 1장 4절, 요한복음 7장 39절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 (골1:15-18의 구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 (그리스도, 67쪽)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전제한 균형잡힌 기독론입니다.


(이인규님) ”즉 지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와 지방교회 교인의 구별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며, 똑같은 것이다.”


거짓말입니다. 지방 교회측은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시며, 경배의 대상이시지만, 모든 믿는 이들은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을 가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전후 문맥을 무시한 채 오해 될만한 내용만 떼어내어 현재와 같이 비판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인규님) 2.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든지 "예수를 닮는다"는 견해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등의 주장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성경적이다.


지금부터 간단하게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을 올린다. 과연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 이유는 지방교회는 신알합일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정통신학의 연합개념과 같다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학적인 면뿐 아니라, 뒤(3번 항목)에서는 지방교회의 주장이 얼마나 비성경적인가를 증명할 것이다.


그들의 삼분법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적으로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하였고, 3번의 항목에서는 그들의 하나님화의 주장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증명할 것이다. 정통신학은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든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켜서 믿는 성도와 똑같다고 하거나, 한 인격, 한 실제가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즉 지방교회는 양태론적 삼위일체, 비성경적인 영과 혼과 육의 삼분법, 빗나간 기독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앞에서 그리고 다른 글 반박문에서 다룬 내용일 뿐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정통 신학자이나 ‘사람이 하나님이 됨’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구별됩니다. 만일 이인규님처럼 이런 양성의 ‘구별’까지 무시한다면 그는 자신이 기독론에서 이단임을 자백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지방 교회측은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이 머리와 몸으로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지방 교회측은 양태론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성부만 하나님이시라는 이인규님의 이단적인 신론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인규님의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이런 식의 억지 비판은 자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인규님)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네가지 개념적인 분류(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2-567쪽)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2)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는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다양한 개념을 갖는다.


a.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b. 지상에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c. 현재 우리의 생애 동안


둘째,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엡3:17, 고후13:5)을 말하며 지속적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갈2:20, 롬15:18, 빌4:13)과 예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는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을 반영함으로써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빌1:30) "그분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히12:2)이다.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a.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든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마18:20, 요16:7, 17:11, 행1:9-11)


b. 성부와 성령과의 연합...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성부와의 연합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령과의 연합을 의미하기도 하며, 이 관계는 우리의 독자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성부 하나님, 우리와 성자 예수님, 우리와 성령과의 맺는 관계를 말한다.


본인이 정통신학을 인용하는 이유는, 정통신학의 "연합"이라는 개념과 지방교회의 "이단적 신인합일"이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지방교회의 신인합일이 정통신학의 연합과 같다고 주장한다. 물론 위장과 조작이다.


만일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와 기독론이 정통신학과 동일하다면, 하나님과 한 인격, 한 실제로 똑같이 되어야 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음은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책을 참고하여 보자.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어감에 있어 각자의 개성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되지는 못하며> 그리스도에게로 흡수되거나 우리의 개성을 영원히 잃어 버리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자신으로 남아서(고전13:12)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요일3:2) 그의 얼굴을 대하며 그에게 경배를 드리고 이마에 이름을 가지고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성품에 있어서는 서로 정확하게 같으면서도 독립적인 위격으로 남아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도 다른 은사들과 기능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되어갈 것이다"(마10:39, 요10:3, 계2:17, 시37:4)(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63쪽)“


이인규님은 정통신학을 말하면서 오직 웨인 그루뎀의 의견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경 말씀과 다르게 가르치면 그의 가르침보다는 성경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요15:5)과 같은 연합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웨인 그루뎀의 위 설명처럼 “단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순종하는” 관계만이 아니라 상호적인 내재, 즉 존재를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실재가 부활 때 나타났으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요14:20).


2) 웨인 그루뎀이 연합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인격이 ‘구별됨’을 유지한다는 지적은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인 교회를 가리켜 주 예수님이 “나’(Me)라고 동일시 하신 ‘그 몸’(행9:4)에 대해서는 웨인 그루뎀이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한계일 수 있습니다.


(이인규님) ”아직도 이해가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하여 정통신학의 "연합"과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 살려주는 영과 성령이 다르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셋째: 양태론적인 주장, 하나님 자신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넷째: 한 인격, 한 실제를 주장하지 않는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이단적 기독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여섯째: 양자와 독생자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일곱째: 한분이시지만 상호관계가 가능한 구별되는 인격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여덟째: 연합이란 "유기체적인 영적결합과 관계"를 의미하며 몸과 지체의 관계, 뿌리와 가지의 관계로 비유된다.”


출처와 근거가 불문명한 요약일 뿐입니다. 한 예로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통 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 이레니우스 등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신화론을 오래 전부터 가르쳤고, 그 전통이 동방교회의 구원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인규님은 자기 개인의 생각을 함부로 ‘정통 교리’라고 동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인규님 자신이 이미 삼신론 이단으로 규졍된 바 있습니다.


(이인규님) “3. 그리스도의 개념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 구약에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었다. 단명기 9장24절에는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니...."라는 예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야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말한다.


요한복음 1장 41절을 보면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역시 히브리어 "메시야"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시는 선지자의 사역, 자기 백성의 사죄를 위해 간구하시는 제사장의 사역, 모든 권세를 위임받고 통치하시는 왕으로서의 사역, 이 세가지를 수행하시는 분이며 그 세가지의 사역을 곧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라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이인규님의 그리스도론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수많은 방면 중 극히 일부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와 달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엡3:8)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말 할 때, 그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는 것을 말합니다(엡3:18). 그리스도는 이 소위 삼중직 외에도 우리의 생명(골3:4), 몸의 머리(골1:18), 신랑(요3:29, 고후11:2), 우리의 음식(요6:57), 생수(요4:14), 기초돌, 모퉁이돌, 머리돌, 자라시는 돌이시며, 우리의 유월절(고전5:7), 둘째 사람(고전15:47), 마지막 아담(고전15:45),…”모든 것의 모든 것”(골3:11)이십니다.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신약의 결론-그리스도>(한국복음서원,1991)라는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성경예 계시된 그리스도의 인격(Perso)과 역사(Work)의 각 방면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인규님) ”지방교회의 주장은 "사람이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는 편견이며 대단한 착각이다. 그러한 주장은 사람이 곧 메시야라는 주장이 되고만다. 모세와 아론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으며 다윗왕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으며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을 "그리스도"나 "메시야"라고 언급한 적이 성경에 있었는가?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까지 예수 이외의 사람이나 존재를 한번도 그리스도나 메시야로 언급한 적은 없다. 오히려 거짓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가 있다하여도 너희는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광야에 그리스도가 있다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은 "지극히 거룩한 자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으며 구약의 모든 성경이 예언하였던 바로 그 "그리스도"(호 크리스토) 였으며 그 "메시야"였다.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눅1:15) 세례요한도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말했다.(요3:28. 4:25) 만일 하표사의 주장대로라면 세례요한도 메시야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한다.


마23:10에는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딤전2:5에는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되어 있음으로 그리스도가 오직 한분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르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6)


즉 아브라함의 언약을 구속사적인 측면으로 볼때 "그 자손"이란 오직 그리스도 한분을 가르킨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7)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언제나 그리스도이며 메시야는 오직 한분이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요4:25)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말씀 하셨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다" (요4:26)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가 말하였도다."(마26:64)


사단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고 하는 존재"(사14:14)이거나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는 자"(살후2:4)이었다.


뱀은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창3:5)고 유혹하는 존재이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시113:5)“


이인규님의 위와 같은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일 뿐입니다. 즉 위에서 이인규님이 열거한 성경구절들은 개인적인 그리스도, 사람 밖에 계신 그리스도의 방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방 교회측도 이런 성경 구절들을 전적으로 믿고 아멘합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주님의 몸의 방면에 무지함으로 성경으로 또 다른 성경구절들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사도행전 9장 4절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 즉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믿는 이들을 박해하였던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ME)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주님께 누구시냐고 물으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5절)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혹은 주님의 몸의 지체들을 박해한 것이 어떻게 예수님 자신을 박해한 것이 되는지를 이인규님은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경의 기록이요 정통 기독론의 한 방면입니다.


이인규님은 지금처럼 어설픈 신학지식 혹은 성경지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균형잡힌 그리고 지극히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임의로 공격하고 비판하는 일을 자제해야 합니다.


(이인규님) ”4) 신일합일의 방법


지방교회의 신일합일의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한 수준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의 후계자들은 - 이중의 얼굴을 가진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갖고 있다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읽어보자.”


이인규님은 어떤 자료는 본인이 직접 읽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인터넷 안에 떠다니는 검증안 된 자료들을 마치 자신이 직접 조사 연구한 것처럼 가장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페이지(쪽수)도 틀리고, 어떤 것은 아예 원문에 없는 것도 있습니다.


지방 교회측은 전통보다는 성경본문에 더 신뢰를 둡니다. 따라서 아무리 이인규님이 정통교리라고 하는 것도 성경과 다르면 그것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참으로 검증된 정통교리임에도 이인규님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고 해서 함부로 ‘정통 교리가 아니다’라고 단정합니다. 신화진리가 그 한 예입니다. 이처럼 원칙도 없고 연구의 깊이도 없는 사람의 말은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면 안 될 것입니다.


# 우리가 또한 삼일적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 (새 예루살렘, 396쪽)


지극히 성경적인 말입니다. 성경은 ‘그 영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욕망을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갈5:17).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 영을 따라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실행 중 하나입니다. 또한 성경은 “한 분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고,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시다”고 말합니다(롬10:12).


#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준비가 되셨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도착하신다. 우리의 영은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이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28쪽)


이 역시 성경적인 언급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롬10:10). 또한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3절). 우리가 영이신 주님을 영접할 때 그분은 우리의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죽었던 사람의 영을 살리시고(엡2:1),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며(요3:6), 우리의 영과 주님의 영이 연합되어 한 영이 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고전6:17).


#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 설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 '오 주 예수'를 세 번만 말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불신자가 해야 할 것은 입을 열고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믿을 의도가 없다 할지라도 그들은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의도가 있든 없든, 그들이 창문을 여는 한 공기는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Lee Stream magazine, Ⅷ: 1,Feb.!, 1970,p.6)


바로 이런 것이 인터넷 안에 떠다니는 검증 안된 자료입니다. 이인규님은 이런 자료를 직접 읽어보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미 이런 앞뒤 자른 내용을 가진 비판에 대하여 상세한 반박을 한 바 있습니다. http://www.forthetruth.or.kr/booklets09.htm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위 이인규님이 인용한 내용은 “우리가 틀렸었다”라고 사과한 CRI의 옛날 자료입니다. 정작 원자료를 만든 쪽은 지방 교회측에게 사과하고 친구가 되었는데, 이인규님은 케케묵은 동일자료를 반복해서 인용 소개함으로 스스로 대적자의 위치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 교회가 그분의 이 한 영을 마시며 그 분과 한 영이 됨: 우리가 "오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 성령을 마셔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부르는 것은 주님이지만 받는 것은 성령이다. 예수는 그 분의 이름이요, 성령은 그분의 인격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오게 된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이 온다. (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9쪽)


매우 체험적이고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생명을 분배하는 영이 되심은 그 분이 사람에게 오시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제 오직 한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 분을 믿는 것이다. 그 분을 믿는 길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분은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는 그 분 안에 들어간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분을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인 우리의 영 안에 모셔온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28쪽)


이 역시 체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인규님)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양태론의 마지막 단계인 생명의 영이며 부활의 영인 삼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실제가 그들에게 들어오고,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성숙하게 자라나면 그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소위 신일합일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주문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에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면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신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주장일 따름이다. 이름만 부르면 주님이 들어오신다?


그렇다면 말을 못하는 장애자에게는 주님이 들어오지 못하는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주여 주여 라고 이름을 부르면 그들에게 영이 된 주님이 들어가고, 그들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인가? 그들은 이러한 신알합일을 부활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안에서 재림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방교회가 곧 그들에게 천국이 된다.”


위 내용 역시 머리로만 주님을 알뿐 체험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교리적인 비판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롬10:13). 또한 다른 곳에서는 “성령 안에 있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고전12:3). 이것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입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은 곧 영접하는 것임으로(요1:12), 머리 속으로 아무리 교리적인 내용들을 믿는다고 시인해도 정작 마음을 열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참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은 <구원이신 주 예수님 자신>(눅2:30)을 우리 존재 안에 모셔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이미 앞에서 해명한 내용입니다.


#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인가? 자녀들과 아버지는 같은 종류가 아닌가? 요한복음 3장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한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모두 같은 종류, 육신의 종류이다. 6절은 또 말하기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두 영은 같은 종류이며 또한 같은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많은 하나님-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따르는 우리의 주님, 또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40쪽)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설명입니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새 창조 안의 부활한 나를 말한다. 이 부활한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우리의 인성과 연합시키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부활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3쪽)


역시 전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설명입니다. 이인규님이 주관적으로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런 설명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 그와 같이 완결된 영을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완결된 영의 부활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부활은 어떤 능력이나 사물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분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더욱이 부활의 실제는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론-삼일 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부활은 하나임-을 갖는다.


전적으로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부활은 삼일 만에 죽음에서 일어나신 사건일 뿐 아니라 또한 인격이십니다(요11:25).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의 왕국, 329쪽)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재림의 두 방면을 말한 것입니다. 살후 1:10의 내용이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라는 설명의 근거입니다. 매우 깊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심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설명입니다. 이인규님은 교리만 알고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앎은 없는 상태에서 더 전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심으셨고,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익고 성숙할 때, 그것은 그분의 오심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닐 것이다. (왕국, 330쪽)


이 역시 지극히 당연한 그러면서도 성경적인 설명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안에 씨로 떨어지셔서 자라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요일3:9, 벧전1:23, 막4:26-29).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심으셨고,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익고 성숙할 때, 그것은 그분의 오심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닐 것이다. (왕국, 330쪽)


위 인용문과 동일한 인용입니다.


(이인규님) ”이것이 그들의 거듭남이며 부활이고 천국이며 재림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성경에는 부활이 한 방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부활이시고, 그분이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도 부활입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그 영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영에 들어오실 때 우리의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엡2:1) 역시 부활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재림도 주님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방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면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살후1:10). 천국도 장차 이기는 이들이 들어가는 천국(마7:21)의 방면이 있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천국이시고(눅17:20-21), 심지어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교회생활도 천국(혹은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인규님은 자신의 단편적인 성경지식으로 성경 진리의 양면성 혹은 더 깊은 부분까지 말하는 사람들을 마치 비성경적인 것을 말하는 것처럼 함부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교리적 지식만으로는 성경이 계시하는 삼일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교회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이인규님처럼 교리만 붙들고 성경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요15:5)로서 포도나무의 진액을 빨아들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이 비밀한 말씀이 이인규님에게도 믿어지고 누려지는 날이 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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