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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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수호―사람의 본성에 관하여

첨부 1

 

‘사람의 본성에 관하여’


인용문 7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인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성으로 덮이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씌워진 나무로 된 법궤요, 우리도 금으로 씌워진 나무로 된 널판들이다. 숫자상으로는 다르지만 본성은 똑같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27쪽)

 

인용문 8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이 되신 하나님, 55-56쪽)

 

인용문 9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그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인화’되시고 우리가 ‘신화’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은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72쪽)

 

인용문 10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같은 책, 71-72쪽)

 

인용문 11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시므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이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하나 안의 넷도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 (같은 책, 267쪽)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본질적 교리라는 문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


인용문 7부터 11은 세 권의 책자에서 골라 내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목표, 즉 하나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서 하신 신성한 일의 온전한 결과와 관련된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달아 편집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매우 주의깊게 잘라내어 함께 둔 인용문들을 통해 거짓된 인상이 재차 만들어졌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인상은 다시 한번 충격을 주고 있지만 문제시 된 교리에 대해 위트니스 리가 실지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례와 관련해서 편집된 인용문들은 공개 서한의 독자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사람을 신격의 위치로 끌어 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원히 그분만이 소유하시는 하나님의 위치에서 끌어 내렸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우려한다. 그 이유는 공개 서한이 그리스도인 독자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시다는 합당한 인식을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체 문맥을 무시한 채 발췌된 인용문 내용에 놀란 독자들은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독자들에게 바라던 대로,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은 끌어내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히 똑같이 끌어올린 이단이라고 주저없이 낙인 찍을 수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위트니스 리가 믿고 합당하게 가르쳤던 것은 사람의 신화(deification)에 관한 진리였는데, 이것은 2 세기 이래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서 많은 정통 성경 교사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관한 허용 가능한 이해로 간주해 온 것이다. 물론 모든 성경 교사들이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사람의 신화에 관한 합당한 이해는, 비록 그러한 견해가 폭넓게 지지되거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정당한 지위를 가진 사상이요 가르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공개 서한에 서명한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신화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해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소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이 2세기 경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아왔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 줄 의무가 있다. 우리는 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교사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오늘날 이러한 관점을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도는 이러한 관점이 옳다는 것을 그들이나 독자들에게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다.[21] 그보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관점이 수세기에 걸쳐 명망 있는 많은 정통 성경 교사들에게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과,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불공정하고 전문가답지 않게 주장하려던 것처럼 이단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하여 자신들이 가진 복음주의적 관점만이 유일한 정통 견해이고 위트니스 리는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단적이라고 강변하고 싶어한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전반에 대하여 모두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의 주장을 그런 식으로 떼어 내어 그러한 이해를 타당한 대안이기보다는 이단적인 관점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런 것이 얼마나 학자답지 못한 행동인지를 알리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사상 안에 있는 신화


역대로 인정받는 교사들이 신화 교리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담아 발표한 연구물이 많이 있다.[22] 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이라고 밝힌 사실을 감안하여,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 협회 연구 자료를 소개하는 최고의 출판물인 복음주의 신학 협회 저널[23]에 로버트 라키스트로(Robert V. Rakestraw)가 수년 전에 발표한 신화 교리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고찰을 참고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 잡지의 신조를 공감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 잡지가 가진 명성을 잘 알고 있다. ‘복음주의적인 테오시스(신화) 교리’가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최고라고 인정하는 신학 잡지에 발표된 사실은 신화(神化)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합당한 이해에 있어서 아주 생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키스트로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한다(각주가 포함되었고 번호는 다시 붙여진 것임).

 

4 세기의 신앙의 변호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그의 한 서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신화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24] 그의 역작인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에서도 그는 유사하게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썼다.[25] 이것은 테오시스(theosis)의 교리인데, 신화(deification), 신성화(divinization), 또는 일부가 선호하는 표현인, 하나님께 참예함(participation in God)으로 알려진 것이다.[26]

 

테오시스(theosis) 개념은 니케아 시대 이전에 그 뿌리를 두지만, 이 개념은 낡은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 구속받은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인 이 신성화 개념은 비록 서방의 주류 기독교인들(심지어 대다수 신학자들)에게는 생소하지만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놀랄만한 정도로까지 발견된다. 테오시스 개념은 [동방] 정교회 신학에서는 중심이 되는 교리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신성화가 [동방] 정교회의 중심 주제요 주된 목표이며 기본적인 목적 또는 으뜸 되는 종교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27] 동방 정교회와 복음주의 진영의 화해에 대한 높아져 가는 관심과 함께, 테오시스에 관한 연구는 꼭 필요한 일이다. 복음주의 진영은 그 교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별력 있는 수용을 통해 상당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를 병들게 하는 거짓된 영성들의 범람을 반박하고 대체하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신학을 정립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라키스트로(Rakestraw)는 신화(神化)는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오랜 기반을 가진 가르침으로써 “니케아 이전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고”(즉 주후 325년 이전), 동방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구원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일반적으로 신봉되고 있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28] 그는 이어서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는 두 절(창1:26, 벧후 1:4)을 신화에 대한 성경적인 최소한의 골격 기초로 제시한다.[29] 그 다음에 그는 교부들 중 일부의 저서에서 발견되는 고대 교리를 제시한다. 라키스트로가 제시한 교부들의 저작물은 간략하지만 잘 선별된 것들이다. 디오게네스에게 보낸 서한(The Epistle to Diognetes) 의 저자인 이레니우스(Irenaeus), 포이티얼스의 힐러리(Hillary of Poitiers),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참조문으로 인용된다. 이러한 인용문들만으로도 신화가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존경받은 성경 교사들이 수용하고 가르친 것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그러나 우리는 라키스트로가 제시한 이러한 짧막한 명단에, 신화 진리를 믿었거나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면 최소한의 이해라도 했던 저명한 성경 교사들로서 어거스틴,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 토마스 아퀴나스, 말틴 루터, 존 칼빈, 존과 찰스 웨슬리를 추가할 수 있다.[30] 이러한 명단은 인상적이며, 라키스트로가 신화 진리는 “낡은 역사적 유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재차 확증한다. 따라서 사람이 신화된다는 가르침이 서방 기독교 사상 내에서는 강조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묘사한 것처럼 기독교 사상 심지어 서방 기독교 내에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be made God)고 위트니스 리가 가르친 것은, 비록 공개 서한에 서명한 70 명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대한 이해로 오랫동안 입지를 가진 노선에서 전혀 빗나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개 서한의 두 번째 단락에서 현재 논쟁 중인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과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는  위트니스 리의 말’이 아니라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가진 신학적 입장을 괴롭히는 말들이다. 이것은 그들이 허용 가능한 다른 의견을 받지 못하는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상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이 잘 인식하게 되기를 참으로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자들이 소망한 것처럼 독자들이 신화 진리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을 갖기를 원치 않는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했던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라는 말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정서에 타격을 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불행하게도 요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 지난 세기들에 교회가 충분히 가르친 것에 현저히 못미치는 수준에도 만족해 한다. 개탄스럽게도 요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신화를 포함한 구원의 더 깊은 관점을 비웃고 심지어 반대한다. 그러한 반대의 이유를 역설할 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이 홀로 초월해 계시고, 공유할 수 없으시며, 피조물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시며, 결코 사람의 신화로 범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것이 라케스트라우가 “하나님과 피조물의 가장 중요한 질적 차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역사적인 이해”라고 부른 것이다.[31]

 

하나님은 참으로 공유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공유할 수 없기만 하신 분도 아니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의 또 다른 비밀한 방면이다. 사람의 구속 즉 성육신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단계에서 그분은 그분의 존재의 또 다른 방면, 즉 그분이 인성을 가지시는 그분의 광대한 공유성도 전람하셨다. 이것은 그분이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기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시도록 보호해 드리고 싶어하는 동안, 하나님 자신이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심으로 그분의 정체성에 큰 위험 부담을 안기신 것처럼 보인다. 신약은 비우심(빌2:7)인 육체 되심과 그분의 낮추심(행8:33)인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분의 이러한 비밀한 공유성에 의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을 그분의 어떠하심 즉 하나님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독립된 신격들(deities)이나 그분을 홀로 하나님이시게 하는 비공유적 속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구별은 중요하고 심오하다. 즉 그분은 그분 자신의 존재에 의해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어떠함에 의해 하나님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단지 사람의 고귀함이 영원한 지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라 더 의미있게는 인성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화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확대한다. 따라서 사람의 신화는 하나님의 공유적인 방면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그분의 신격의 유일함이 합당하게 존중되는 한, 하나님의 완전무결하심을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화는 그분이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키고 영광스럽게 하신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통해 그분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도록 그분 자신이 선택하신 수단이다. 한 면으로, 그분의 신격 안에 있는 비공유적인 속성을 존중하고 그분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우리는 그분이 노하실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그분이 구원을 위해 충분히 공급하신 것을 무시하고 그분의 공유적 속성을 극도로 누리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은혜와 경륜을 모욕할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볼 때, 그분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그분의 구원의 완전한 선물을 받는 데 실패하는 것은 그분을 크게 언짢게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 교회 내에서 오랫동안 견지한 신화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 안에 있는 비공유적 방면과 공유적 방면을 존중한다. 이 주제에 관해 고대의 저술가들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 하나님으로서 계심을 가리키는 본성에 의한 하나님과  믿는 이들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은혜에 의한 하나님을 구별했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그들의 용법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우리가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인 것의 차이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서 오직 삼일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의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즉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에 의해서만 하나님이다. 오늘날에도 신화에 관한 합당한 가르침에서 그런 용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개념상 이러한 구별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균형잡혀 있음


위트니스 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휘두른 것과 같은 종류의 거짓 진술의 가능성을 익히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이해한 신화(神化)의 의미가 아닌 것에 관해 분명하고 강조된 문장들로 반복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제한시켰다.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이 긍정적으로 신화되는 것에 관한 진리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되지 않는 것도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유업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한 안에 정확히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안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이 무시한 이 균형은, 하나님께서 공유적 속성(예를 들어 사랑, 빛, 거룩함, 의)과 비공유적 속성(예를 들어 전지하심, 전능하심, 무소부재) 모두를 가지고 계신다는 점을 존중한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 홀로 소유하시는 유일성과 탁월한 ‘다르심’을 유지하시면서 인성 안에서 그분 자신의 충만한 표현을 가지시려는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발췌문들이 이러한 균형을 입증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신격 안에서 하나님이 된다거나 사람의 경배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큰 신성 모독이며 철저히 이단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났으며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한 성경적 사실이다(요1;13, 요일 5:11-12, 벧후 1:4). 우리 모두는 사람에게서 났기 때문에 사람이 된다. 개에게서 난 것은 다 개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났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과 사람의 본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뜻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신격을 가진 경배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이단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과 같으며(요일3:2)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신성한 계시에 따른 진리이다.


신약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주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사람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한 이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교부들은 ‘신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신성화(deification)’라는 단어를, 당신 자신이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이단이다. 다른 면으로, 당신이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영접하여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안전하며 성경적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놀라운 사실을 시인해야 하며 이 사실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받았고, 지금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 이들이며, 신성한 본성을 매일 누리고 있다. 우리와 우리 하나님은 한 실체로 함께 연합되었다.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이다. 다른 면으로 그분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시고 우리는 경배자들이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450쪽)

 

이러한 하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지는 않지만 그분과 명확히 구별된다.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요소와 본질과 조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이다. 우리는 또한 목적과 목표와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그분과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하나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신격을 공유하지 못하며, 결코 공유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남아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그분은 그분의 신격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홀로 자신을 위하여 신격을 보유하고 보존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여전히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여전히 유일한 신격을 소유하신다.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애가 라이프 스타디, 103쪽)

 

비록 믿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조성된다 하더라도,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신격을 지닌 하나님이시며, 우리 믿는 이들은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같지만, 신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신격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분의 충만으로서 그분의 증가와 그분의 확장이 된다. (예레미야와 예레미야 라이프 스타디, 216쪽)

 

사람은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될 수 없지만,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본성과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그러나 신격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지위나 신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유기적인 연합, 48-49쪽)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와 하나 되시는 것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기독교는 대부분 표적을 놓쳤다. 그들은 구속과 거듭남은 잘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 자신과 하나 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신격화 되어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격이 아닌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신격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 87쪽)

 

위트니스 리는 성경에 계시된 신화에 대한 제한들을 분명히 존중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이 고지식하게 신화의 진리를 평가절하하거나 단호하게 부인함으로써, 신성화 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을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큰 손실도 알고 있었다. 위트니스 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성화 하시는 구원을 믿는 이들이 완전하고 합당하게 체험하는 신화의 진리가 오늘날에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합당하게 이해된 신화의 진리는 교회들이 존재했던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로서 널리 인정되었지만, 우리 세대의 교회에서는, 일부에서 예외적으로 관심 표명이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널리 평가절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교부들이 합당하게 인정한 신화(神化)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신화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그의 관점도 아니고 그가 새롭게 도입한 사상도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인의 신화가 초기 교회 시대에 한 때 널리 가르쳐졌고 그후로 모든 믿는 이들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수용했었다는 것을 아마 자신을 반대하며 공개 서한에 서명한 70 명의 학자들과 사역의 인도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책에서 그것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초기의 교회의 어떤 교부들은 믿는 이들의 신화에 관해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는 이들이 신격화 되거나 하나님으로서 경배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이 의미한 것은 하나님께로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듭난 사람들인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지만, 신격의 지위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같지 않다. (신약의 결론-하나님, 86쪽)

 

주후 325년에 교부들의 가르침 아래 있었던 한 젊은 신학자로서 니케아 신경을 작성하는 데 조력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 진술은 기독교에서 오랫동안 금언(金言)이 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백 년 동안에는 기독교 문헌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53쪽)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사람이 하나님 됨”은 고대에서 아주 성행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325년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2세기에는 이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32] 나중에는 점점 감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결국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낳아 그분의 생명과 성품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과 성품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종류인 것이다. (이상의 최고봉과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54쪽)

 

사실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이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은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했던 말이다. 당시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이 한 마디는 교회 역사에 명언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 후에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을 말할 담력까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이상의 최고봉과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20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한 ‘인용문’에 포함시키지 않고 독자들에게 숨기고 싶어했다고 우리가 결론내릴 수밖에 없던 것은 다음 항목들이다. 1)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합당한 방법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교회에서 많은 저명한 교사들이 적어도 2세기 이래로 그 방법을 견지했다는 것. 2)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기독교 사상 안에 있는 동일한 전승을 알고 존중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채택했다는 것. 3) 여러 세기 동안 믿어 온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자신의 가르침의 일부로 주의깊게 채택한 위트니스 리는 신화에 대한 합당한 가르침을 위해 필요한 균형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동료 교사이자 더욱 심각하게는 그리스도 안의 동료 믿는 이인 위트니스 리를 거짓 진술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충심으로 우리의 이러한 결론이 틀렸고 그들의 거짓 진술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었다면, 서명인들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는 아홉 번째 계명을 범하여, 거짓 증거로 우리 구주의 죽음을 가져온 옛날의 산헤드린처럼 되고(마 26:59), 유사한  행위로 스데반의 순교를 유발한 사도행전에 있는 시기하는 종교인들처럼 된 것이다(행 6:8-13).


믿는 이들의 실지적인 거듭남에 근거한 신화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특별한 이해


공개 서한이 포함시키기 위해 선택한 인용문들의 내용을 볼 때,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은 믿는 이들이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영접한다는 명제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신화에 관한 합당한 제시들은 거의 모두가, 믿는 이들이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된다”(1:4)는 베드로의 두 번째 서신의 선언을 믿는다. 자신보다 앞서 신화를 가르친 사람들처럼, 위트니스 리 역시 이 절을 자신의 가르침의 주요 근거로 삼는다.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거듭남이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인간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들 자신 안으로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받아들임으로써 문자 그대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위트니스 리에게 거듭남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개종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단지 양자들이라는 관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한 그는 대부분의 신약 번역이 헬라어 단어인 ‘휘오데시아’(huiothesia)’를 ‘양자 됨(adoption)’으로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절이 확증하는 것처럼, 믿는 이들의 신성한 출생과 그들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함을 인정한 신약의 저자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올바르게) 인식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책에 있는 핵심 개념이자 신화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실지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생명과 본성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신성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지 단지 명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조된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입양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낳으심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 사람이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그의 생명이 그 아이 안에 넣어져야 한다. 이렇게 넣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분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과정을 거친 삼일성의 분배와 초월한 그리스도의 전달의 결과, 22쪽)

 

비록 우리는 출생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출생과 관련된 기본 원칙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원칙은 출생이 전적으로 생명의 분배의 문제라는 것이다. 반대로 어린 아이를 입양(入養)하는 것은 생명과 관련이 없다. 그 대신 입양은 어떤 법적 요구들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출생은 생명의 문제이다. 특별히 출생은 생명의 분배를 통해서 온다. 아버지의 생명이 그의 아이 안으로 분배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출생의 이야기는 생명 분배의 이야기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하심, 340쪽)

 

아들의 자격은 입양과 다르다. 인간 사회에서 누군가를 입양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다만 아들의 자격이라는 위치를 주는 것일 뿐이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성한 아들의 자격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나누어 주신 것을 의미한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영을 우리 안으로 나누어 주시어(갈 4:6)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아들의 영은 신성한 아들의 자격의 영이시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도, 제3권, 서신서들에 있는 그 영이신 그리스도, 88쪽)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단지 그분이 우리의 창조자 되심 이상을 포함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양아버지나 의붓아버지나 장인이 되실 의도가 없으시다. 반대로 그분은 우리의 친아버지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했을 때 발생했다. (데살로니가서 라이프 스타디, 69쪽)

 

비록 우리가 민족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지만, 그분의 긍휼로 모두가 동일하게 된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 기독교에는 우리 믿는 이들이 출생이 아닌 입양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말하는 신학이 있다. 이 신학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입양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분의 아들들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를 낳은 분과 똑같다. 하나님께로서 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갖고 있다(요 3:15, 36상).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신성한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거듭난 사람들인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사람의 생명 외에 또 다른 생명인 신성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천연적인 생명은 우리를 천연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신성한 생명은 우리를 신성한 사람이 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신성한 생명에서 났기 때문에 신성한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에서 나서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확실히 우리는 신성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에서 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하다. 거듭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모른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그러나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에 더하여 또 다른 생명을 받았다. 이 생명은 거룩하고 하늘에 속할 뿐 아니라 신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신성하게 되었다. (하나님-사람들, 9-10쪽)

 

앞에 인용한 내용들에 비춰볼 때,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인용문 7부터 11까지 내용에서 위트니스 리가 사람을 신격의 수준으로까지 높이려 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합당한 기능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반대로 다섯 개의 인용문의 내용은 모두 삼일 하나님께서 인성 안에서 그분 자신의 완전한 표현을 갖기를 갈망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표현을 위하여 신성하고 인간적인 본성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인용문 7


인용문 7과 그 앞뒤 내용은 구약에서 언약궤로 예표된 개별적인 예수님과 언약궤가 놓였던 성막으로 예표된 단체적인 교회로 예표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을 살펴본다.


인용문 7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인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성으로 덮여지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요, 우리도 금으로 덮인 나무로 된 널판들이다. 숫자상으로는 다르지만 본성으로는 똑같다.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27쪽)

 

우리는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을 소유하신다.”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후 451년에 칼케돈에서 있었던 제 4차 공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합당한 이해로 확고하게 인증되었을 만큼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서명인들이 논쟁하려 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우리가 본성적으로 똑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라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우선 이러한 것들에 있어서, 성경이 확증하고 교회가 오랬동안 믿어온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이라는 본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확증하고 위트니스 리가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다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들 역시 그리스도 자신처럼 신성하고 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또한 성경이 분명히 말하듯이(롬8:14, 히 2:10, 롬 8:29) 하나님 아버지께서 많은 아들들을 소유하시고 맏아들인 그리스도께서 많은 형제들을 소유하신다면, 아버지의 아들들과 맏아들의 형제들이 본성 안에서 즉 신성과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하지 않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인용문에서 참조된 언약궤와 성막의 그림(출25:10-11, 26:15-30)은 믿는 이들이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이 인용문 7에서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의 요지이다. 개별적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인성을 상징하는) 나무에 (신성을 상징하는) 금을 입혀 만들었고, 언약궤의 확대이자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성막은 금으로 입혀진 마흔 여덟 개의 널판들로 구성되었다.[33] 그러므로 성막은 분명 언약궤와 동일한 기능을 가졌거나 동일한 존중을 받지는 않지만 본성에 있어서 언약궤와 똑같았다. 여기에서 위트니스 리의 요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표현(어떤 교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분의 대표가 아니다)이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마흔 여덟 개의 세워진 널판들로 예표된[34]) 믿는 이들은 (나무와 금으로 된 언약궤로 상징된[35]) 그리스도와 (인성을 상징하는 나무와 신성을 상징하는 금이라는) 동일한 본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분의 몸이기 때문이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무시한 인용문 7의 전체 문맥은 이것을 분명하게 한다. 공개 서한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부분을 괄호 속에 넣어본 인용문 7의 전후 문맥은 다음과 같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적셔져서 그분 안에서 함께 지어졌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인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성으로 덮여지게 되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요, 우리도 금으로 덮인 나무로 된 널판들이다. 숫자상으로는 다르지만 본성으로는 똑같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타남이시고, 금 속에서 하나로 묶여진 이 모든 널판들은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이 지점에 이를 때 영광의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우리 안에 충만케 된다. 이것이 간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남인 그리스도를, 우리를 통해 확장되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만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27-128쪽)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성경을 말 그대로 이해하는 데 반대하므로,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이 신성한 출생을 체험하고 신성한 생명을 갖고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고,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체험함으로 그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기 떄문에, 이러한 관점들을 믿고 담대하게 가르친다는 이유로 위트니스 리를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와 “우리가 본성에서 똑같다.”라고 주장할 때 신중을 기한다. 그리고 그의 책의 문맥과 인용문 7에서도, 앞의 수식어구인 본성에 있어서(in nature)는 그 말의 나머지 부분인 똑같다(are exactly the same)에 한정되도록 주의깊게 선택되었다. 위트니스 리가 다른 많은 곳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에서도 언급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똑같다고 말하는 데는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똑같다”고 위트니스 리는 말한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따로 떼어 놓음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정반대의 뜻으로 말하는 것처럼 암시했지만, 이 똑같다는 것은 경배나 존중이나 존경을 받는 인격이나 지위에 있어서 같다는 것이 아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또한 위트니스 리가 믿는 이들을 가리킨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반대하는 것 같다. 그들은 재차 인용문을 따로 떼어냄으로써 가능한 한 최고의 공격 효과를 주려 했다. 위트니스 리가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에 관한 자신의 전반적인  이해와 일치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용어가 의미하지 않는 것에 대해 특별히 지적했다. 공개 서한의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 용어를 통해 의미한 것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하여 오해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한다. 사람에게서 난 이들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God)에게서 난 이들은 하나님들(gods)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신격을 공유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위격이 없고, 우리는 하나님으로서 경배받을 수 없다. 그러나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서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생명을 갖는 것과 같다. 우리의 아버지는 사람이다. 아버지에게서 난 우리도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버지의 위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과 똑같고, 그분과 우리는 다 하나님-사람들이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23쪽)

 

그리스도인의 신화(神化)라는 말과 관련된 사례에서 늘 그래왔듯이, 하나님-사람들이라는 용어와 “하나님(God)으로 난 자들은 하나님들(gods)이다.”라는 진술은 합당한 조건 아래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것일 뿐 하나님의 위격과 신격이라는 비공유적 방면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제한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신화를 말한 다른 합당한 성경 교사들같이 위트니스 리도 자신의 책에서 자주 이러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공개 서한에 인용되어 제시된 내용은 독자들이 이것을 알 수 없게 했다.


인용문 8-10


인용문 8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5-56쪽)

 

인용문 9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그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인화’되시고 우리가 ‘신화’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은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72쪽)

 

인용문 10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같은 책, 71-72쪽)

 

인용문 8-10도 인용문 7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많은 말들을 제시하므로, 이에 대한 변호도 같다. 믿는 이들이 성경에 따라 실지로 신성한 출생을 하고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는 한, 그들은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본질상 그분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난 믿는 이들은 비록 그분의 유일한 위격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창조를 통해 인성을 소유하고 (거듭남으로 시작된) 새 창조를 통해 신성을 소유하였으므로,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고 그들 자신 안에서나 그분과의 연합에서 분리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해를 전제로,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내주하시고 또한 그들 속에서 은혜 안에 운행하시므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신성하고, 참으로 하나님이며, 참으로 하나님-사람들이다.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의 결과이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운행의 결과이다.


위트니스 리는 특별히 인용문 8에서 그리스도인 교회가 오랫동안 인정해온 것, 즉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참 사람이 되셨고 그분께서 취하신 인성은 부분적이거나 환영(幻影)이 아니라는 점을 확언했다.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위트니스 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인성이 있다고 믿은 것으로 암시하려면 인용문 직전의 내용들을 떼어내야만 했다. 우리는 무시된 그 부분을 괄호로 묶어서 이곳에 소개하겠다.

 

[죽음을 통과하신 후 삼일 하나님은 부활 안에 들어가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서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만드셨다(벧전1:3, 요1:12, 롬12:5).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끄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가져왔으며, 그분의 부활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끌었다. 이런 종류의 왕래를 통하여 놀라운 연합이 발생했다. 이제 그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되시고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러한 연합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이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55-56쪽)

 

분명히 위트니스 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 인간 생활,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자세하게 밝힌 것처럼, 그분의 이러한 구별되는 행동에서도 삼일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다.


위트니스 리가 위에서 언급한 연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결합되어 함께 연결되지만, 이 연합은 결코 신성도 아니고 인성도 아닌 어떤 제 삼의 요소를 산출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성하고 인간적인 본성들은 결합 안에서 여전히 영원히 구별된다.[36] 이 연합의 결과는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인간적이고 신성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의 재생산인 많은 하나님-사람들의 산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신성화된 사람은 결코 신격을 침범하거나 하나님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성화된 사람은 영원히 피조물로서,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즉 하나님으로서 홀로 자존하시는 분을 영원토록 의지할 것이며, 하나님이신 그분을 영원토록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모든 찬송과 영광이 그분께 돌려지며, 그분 홀로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들에 근거하여, 인용문 9과 10은 위트니스 리의 책들의 보다 광범위한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인용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두 인용문의 인접된 내용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조금 길게 인용될 수 있다. 그러한 부분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는 인용문 10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이다”라는 선포를 특별히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런 말이 지금까지 말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독자들의 귀에 거슬릴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것을 존중하며, 제한들을 더 제시하지 않은 채 이 충격적인 말을 방치하고 싶지 않다. 사실 위트니스 리도 이런 용어가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말이나 그와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할 때 자신의 의도에 대하여 거듭 분명하게 기술했다. 아래에서 보겠지만, 인용문 9와 10의 전후 문맥은 그의 의도를 모호함 없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인용문 9와 10에서처럼 여기서 위트니스 리가 특별히 사용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위격이 아닌 종(種)의 의미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들을 낳으신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염소는 염소를 낳는다. 만일 염소가 염소를 낳지 않으면 무엇을 낳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지 않는다면 무엇을 낳으시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서 난 우리는 모두 하나님들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성한 종(種)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고봉 메시지, 제10권, 요한복음 결정 연구, 163-164쪽)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심에 더하여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 즉 공기 같으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더욱이 부활 안에서 그분은 모든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종류가 되게 하셨다. 성육신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인 그분의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였다.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셨고, 이제 우리는 신격이 아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하나님들(gods)이 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들이다. 그러나 신학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신성한 종류의 하나님-사람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심의 결과, 28쪽)

 

어떤 이들은, “위트니스 리는 그런 구절이 ‘신학적 오해’를 일으킬 것을 알고 있다면, 왜  구태여 그런 표현을 쓰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위트니스 리는 이런 표현이 믿는 이들이 신성한 종(種)으로 거듭나는 진리를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고,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런 표현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처럼 우리도 확신하는 것은, 그의 그러한 합당하고 근거 있는 말을 거부하는 소수의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 늘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런 거절이 악의에서 나온 것인지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는 우리의 판단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컨대 그러한 거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때로는 그들이 공개 편지에서 했던 것처럼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가 이 진리, 즉 우리가 하나님께 입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species)이고, 신격이나 위격이나 신분이나 지위에서는 아니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종류에 있어서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아주 편안함을 느낀다. 위트니스 리는 사람인 아버지들과 그들이 낳은 자녀들 간에 구별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동일한 제한이 있음을 밝혔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아들들인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아들들은 반드시 생명과 본성에서 그들의 아버지와 똑같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요일3:1). 결국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분은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만드실 것이다(2절).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도 경배의 대상인 신격에 있어서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가정에서는 오직 아버지만이 부권(父權)을 갖는다. 아버지의 자녀들은 부권을 갖지 못하고 많은 아들들을 가진 한 아버지만 갖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아버지이시며,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부권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의 어떠함과 똑같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189-190쪽)

 

신약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아들들이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어도 아버지는 아닌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공유하지만 하나님의 신격이나 부권(父權)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경, 특히 신약의 내재적인 계시이다. (소선지서 라이프 스타디, 467-468쪽)

 

하나님의 택함받은 피조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서 그분의 자녀들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이제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자녀들은 생명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나, 아버지 됨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지 않다. 아버지만이 아버지이다. 그들은 자녀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신격에서나 아버지 되심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내재적인 조망, 99쪽)

 

인용문 9와 10의 전후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주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 그분의 생명을 그분의 구속된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시어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본성을 지닌 진정한 하나님-사람들이 되게 하시어 인성 안에서 하나님을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개 서한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들이 포함된, 인용문 9와 10의 완전한 전후 문맥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갈망은 창조된 사람 안으로 들어가셔서 사람의 생명이 되시어 사람이 그분을 얻고 그분과 연결되고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활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은 먼저 사람이 되시고, 그분 자신을 “사람화”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후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시어 우리를 “하나님화” 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분과 우리는 하나 되고 한 생활을 공유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으시어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어 어느 날 우리가 그분이 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신격의 일부가 되고 유일하신 하나님과 똑같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그분의 집이 되고 그분의 가족이 되지만 그분의 주권이나 그분의 위격을 공유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으로서 경배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성경을 해석하던 어떤 교부들은 2세기부터 신화(神化)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2절-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한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위격에 참여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의 경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나님의 위격을 소유하시고 사람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신성한 분배가 믿는 이들을 하나님-사람들로 만듦


기독교에 있는 전통적인 관념은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선하고 영적이고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관념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되시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놀라운 하나님-사람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고 계셨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도록 그분이 우리 안으로 나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벧후1:4).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이들인 우리는 다 하나님-사람들이다.]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이 그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드시어 그분이 ‘인화’되시고 우리가 ‘신화’되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마지막에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은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되거나 영적인 사람들이 되거나 거룩한 사람들이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개선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표현하고 살아 나타내는 목적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은 있지만 그분의 생명은 없는 사진과 같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 이 사진은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그분의 존재와 같은 ‘실재적인’ 인격이 되었다. 그분은 ‘인화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신화된’ 사람이다. 끝에 가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 다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이것이 성경의 신성한 계시이다.]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71-73쪽)

 

위트니스 리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며,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표현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화 된’ 존재들이라고 정확히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화’ 되는 것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그 인성을 벗어버리지 않으셨으며 부활과 승천 때조차도 그 인성을 가지고 계심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인성 안에서 하나님의 표현을 산출하도록 신성이 인성과 연합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과 사람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신격 안에 계신 하나님은 이런 과정에 의해 모독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위격과 신격에서 영원히 하나님이시고, 그분 홀로 영원토록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다.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9에서 사용한 ‘하나님’과 ‘하나님화 된’ 이라는 단어에 인용부호를 붙인 것은 그러한 용어들을 표준적인 의미로 쓴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7] 하나님은 그분의 구원의 경륜 안에서 창조물인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들고자 하시지만, 그분의 신격과 같이 만들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주입받음으로 하나님이 되어 우리 존재 안에 계신 그분을 살아냄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화 될 수 있지만, 이것은 오직 그분께만 해당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근거한다. 비록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를 정죄하려고 인용문 9를 따로 떼어냈지만,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인쇄 활자에서 그처럼 분명하게 표시할 정도로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것을 사려깊은 독자들이 알고 존중하리라 믿는다.


인용문 11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인용문 11을 근거로,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가 신성한 삼일성에 그리스도의 몸을 추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신격의 일부가 되게 한 것으로 믿게 하려 했다.


인용문 11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시므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이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하나 안의 넷도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 (같은 책, 267쪽)

 

이 두 번째 부분의 인용문들(7-11)을 변호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구원에 의해 침범당하지 않음을 위트니스 리가 알고 존중하고 반복해서 가르쳤음을 제시해왔다. 역대로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 있었던 다른 많은 이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위트니스 리가 확증한 것처럼 믿는 이가 하나님이 된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태어남(요 1:13; 요일 3:9; 4:7; 5:1, 4, 18),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됨(고전 6:17; 요 15:4-5; 롬 6:5; 11:17, 19), 그 영이 내적으로 사시고 충만하심(롬 8:9, 11; 엡 5:18)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떨어진 그들 자신의 미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그들의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가 이해한 이러한 핵심 방면들을 알기를 원치 않았고, 위트니스 리가 이단적으로 가르친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기 위해 따로 떼어낸 말만으로 그들의 진술을 구성하기 원했다. 그들이 인용문 11을 사용한 이유도 똑같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신격(Godhead)의 불가침성을 손상하지 않았고, 아래의 견본 발췌문이 증명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신격을 공유한다고 이해하거나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교회를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를 신격의 일부분이나 경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서(요1:12-13),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요일5:11-12), 하나님의 본성을 누리는 실체라는 의미이다(벧후1:4). 교회는 거룩한 실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모양을 지니며, 하나님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므로, 분명히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고, 매일매일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누리고 있다. (성경의 기본계시, 75쪽)

 

인용문 11이 들어 있는 동일한 책에서,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그분의 많은 자녀들의 생명 관계를 강조하고 있고, 이러한 관계를 떠나서는 교회가 될 수 없음을 아래와 같이 단언한다.

 

아버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자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기만 하고 그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남으로 우리는 그분과 생명 관계에 들어가고 유기적인 연결에 들어간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다음 우리를 낳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와 그분의 관계는 이중 관계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런 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당한 인간 존재들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태어났다. 이것이 교회이다. (신성한 분배에 관한 보다 깊은 연구, 266-267쪽)

 

인용문 11이 묘사하는 것에 인접한 내용의 중심은, 위트니스 리가 이 장(章)의 도입부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4장 4절부터 6절이 가리키는 것처럼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의 성경적인 관계를 아래와같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은 삼일 하나님 전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포함되며, 이 본문을 주의깊게 읽을 것을 주문한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님이시고, 이런 의미에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아래 내용은 문맥 전체를 포함한 인용문 11이며, 공개 서한에서 포함되지 않았던 부분들은 재차 괄호로 표시되었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삼일 하나님과 연합되고 삼일 하나님과 합병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시므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이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영과 그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 안의 넷 역시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 [이 비밀한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과 합병은 분배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이신 그 영은 계속해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동안 우리를 감싸고 계시며, 우리를 통과하시는 동안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동안 우리와 함께 머물고 계시며, 계속해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의 결과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실 때 유기체인 교회가 우주 안에 산출된다. 뿐만 아니라 삼일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그분 자신을 조금씩 모든 지체들 안에 그들의 요소와 본질과 누림으로 분배하고 계신다. (같은 책, 267-268쪽)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바란 것과는 반대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에 붙인 인용 부호는 이 용어를 액면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시함을 분별력 있는 독자들은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기껏해야 공개 서한의 독자들은 (서명인들인 생략하여 제공되지 않은) 다른 증거를 보기 전까지만,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신격의 일부가 되었다고 이해하고 가르친 줄로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증거를 보게 된다면,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보다 고상한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이해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음을 수긍할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들이 입증하듯이 또 다른 증거가 분명히 있다.

 

교회는 삼일 하나님의 산출물이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셨고, 아들은 그 영으로 실재가 되셨고, 그 영은 우리와 연합되셨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에는 아버지와 주님과 그 영과 우리, 곧 몸이 있다. 이것을 우리를 신격화하여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생명과 본성과 요소와 본질에 있어서만 신성할 뿐, 신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신격을 지니신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오직 한 분, 삼일 하나님뿐이시다. (주님의 회복의 다섯 가지 강조점, 77쪽)

 

그리스도의 몸은 먼저 구속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그 영으로 출생하여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이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몸, 곧 골격을 이룬다. 그들 안으로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께서 건축되셨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모두가 구속받고 거듭난 믿는 이들 안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므로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건축물 혹은 이러한 구조물이 있다. 인성과 그 영과 주님과 아버지가 함께 건축된다. 이것은 단지 하나 안의 셋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 안의 넷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분이 구속하신 우리가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 안에는 신격이 있지만, 우리가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여 하나님과 똑같아지더라도, 우리에게는 신격이 없다. (섞임에 관한 실제적인 요점, 46-47쪽).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따로 떼어 제시한) 인용문 11에서 위트니스 리가 공격받을 여지를 남겼다고 느낄지 모르나, 위트니스 리는 이 점에 대해 다른 곳(더 많지만 이것으로 충분)에서도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인가? 위트니스 리가 인용문 11에 거론된 세 문장에 대해 자신을 충분하게 보호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공개 서한의 서명인들이 의도적으로 다른 모든 내용들을 알지 못하게 하면서 이 세 문장만 악용한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독자들의 더 큰 정의감에 호소할 뿐이다. 물론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하나 안의 넷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후 문맥과 그의 전반적인 저술의 광범위한 문맥에서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영원하시고 침범당하실 수 없는 삼일 하나님의 신격에 이단적인 어떤 것을 추가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그런 용어에 특별히 인용 부호를 붙였고, 그 용어가 담긴 문장들은 원래의 문맥에서 따로 떼어낸 것이 밝혀졌는데 위트니스 리가 참으로 그런 의미로 말했는가?”라고 질문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그런 것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고 서명인들에게 잘못이 있음을 이제 위트니스 리의 다른 저술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공개 서한의 심각한 오류에 대하여


우리는 위에서 인용문 7번부터 11번까지를 다룸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믿는이들의 신화에 관해 가졌던 합당한 개념을 논증했다고 믿는다. 이 개념은 비록 그러한 해석이 오늘날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지는 않으나 여러 세대를 걸쳐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 많은 건전한 교사들이 믿어 왔고 성경에 대한 정당한 해석으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공개 서한에 서명한 이들은 문맥과 동떨어지게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함으로 이 문제에 대한 위트니스리의 충분하고 균형잡힌 이해를 은폐하고 결과적으로 전세계에 있는 자신들의 청중들에게 위트니스 리의 의도를 잘못 대변함으로 비전문적이고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분명해졌다고 우리는 믿는다.

 

인터넷 상에 엄선된 인용문들을 올려 놓음으로써, 공개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물에서 잘려나간 일부를 근거로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를 비난하도록 유도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건전한 학문의 원칙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자신들은 독자들을 기만했고, 독자들이 한 동료 믿는이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부추겼다. 그들이 수호 하려는 진리에 반대된다고 해서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그들을 우리는 과연 훌륭한 진리의 수호자들로 간주할 수 있는가? 우리는 독자들이 공개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이 가치있다고 판단하는 정통교리에 대한 신념과 평가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분별 있게 판단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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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화(神化)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최종 목표라고 보는 우리의 견해를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확증과 비평(Affirmation & Critique), 7:2 (2002)을 참조하라. 이 글은 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에서 볼 수 있다.


[22] 이에 대한 연구가 많이 행해졌다. 하지만 다음 글들이 (신성화, 테오시스 theosis 라고도 하는) 신화(神化)와 관련되어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글들이다: 테오시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신화,, Stephen Finlan과 Vladimir Kharlamov 편집, Princeton Theological Monograph Series(Eugene, OR: Pickwick Publications, 2006); Jules Gross, 그리스 교부들이 본 그리스도인의 신화, Paul A. Onica 번역(Anaheim, CA: A & C Press, 2002); Paul R. Hinlicky, ‘신학적 인류학: 테오시스 교리와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의 통합을 향해’,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34(1997): 영문판 38-73쪽; Tuomo Mannermaa, ‘루터교 및 동방정교의 관점에서 본 칭의와 테오시스’, ‘그리스도와의 연결에서’(Grand Rapids: Eerdmans, 1998), 영문판 25-41쪽; Steve McCormick, ‘크리소스톰과 웨슬리가 본 테오시스: 믿음과 사랑에 대한 동방의 패러다임’Wesleyan Theological Journal 26(1991): 영문판 38-103쪽; Michael McDaniel, ‘칭의와 테오시스로서의 구원 ‘, ‘그리스도 안의 구원: 루터교 및 동방 정교회 간의 대화 , Robert Tobias와 John Meyendorrf 편집(Minneapolis: Augusburg, 1992), 영문판 67-83쪽; John Meyendorrf, ‘동방 기독교 전통의 테오시스’, ‘그리스도인 영성: 종교개혁 이후 및 근대’, Louis Dupré와 Don E. Saliers 편집(New York: Crossroad, 1989), 영문판 470-476쪽; Frederick W. Norris, ‘신화: 합의에 도달할 수 있고 설득력도 있는’ 스코틀랜드 신학 저널 49(1996): 영문판 411-428쪽; Norman Russel, ‘그리스 교부 전통에서 신화의 교리’(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Anna Ngaire Willams, ‘연합의 근거: 아퀴나스와 팔라마스가 본 신화’(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3] 라키스트로 로버트 V(Rakestraw, Robert V). ‘하나님과 같이 됨: 테오시스의 복음주의적 교리’, 복음주의 신학협회 저널(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 40.2 (June 1997): 영문판 257, 269쪽.


[24] 아타나시우스, 서신(Letter) 60: 아델피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단락 4. 또한 단락 3과 8도 참조하라. NPNF2. IV 영문 575-578쪽.


[25] 아타나시우스, 성육신에 대해(On the Incarnation) 54, NPNF2, IV, 영문판 65쪽.


[26] A. M. 앨친(Allchin)은 테오시스에 대한 자신의 책에 ‘하나님께 참여함: 영국 국교의 전통에서 잊혀진 흐름’(Wilton, CT: Morehouse-Barlow, 1988)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27] 다니엘 B. 클렌드닌(Daniel B. Clendenin), ‘신성에 참여하는 이들: 테오시스의 정통적 교리’ 복음주의 신학협회 저널(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7:3 (1994): 영문판 365-379쪽.


[28] 하지만 Rakestraw의 논문 출판이 시사하듯이, 전체적으로는 서방 기독교에서, 좀 더 좁게는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이를 합당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증가되어 왔다. 사실 14세기 그리스 신학자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의 글 일부가 서방 영성 고전 총서(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에 수록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서방’이라는 말을 주목하라). 이 신학자는 신화에 대한 신학 체계를 포괄적으로 발전시킨 학자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이 저서가 총서에 포함된 것이 지니는 의미에 주의를 촉구하며 야로슬라브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하지만 이제 명백한 것은 Palamas가 서방 교회 내 점점 더 많은 지역에서 성자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성자로 선포된 것은 아니지만 아토스 산 출신으로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정도로 여겨져 박물관 한 구석의 기록으로만 남기에는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그레고리 팔라마스: 삼부작, John Meyendorff 편집 및 Nocholas Gendle 번역, 서방 영성 고전 총서 [Mahwah, NJ: Paulist Press, 1983] 12장에 수록).


[29]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벧후 1:4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30] 각주 22를 보라. 또 다른 예로 마틴 루터를 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처럼 육체가 말씀이 되는 것도 또한 분명 필요하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체가 되신 것은 정확히 육체가 말씀이 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능력 없이 된 것은 약함이 능력 있게 되기 위함이다.”(Weimar Aufgave 1:28, 25-32); 요한 칼빈: “이 점을 강조하자. 곧 복음의 최종 목적은 결국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곧 우리를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임을.”(사도 바울의 히브리서 주석, 존 오웬 번역 및 편집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영문판 372쪽; 찰스 웨슬리: “당신께서 자신의 인격 안에/인성과 신성을 연합시키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이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한 존재 되게 함 아닙니까/ 어서 빨리 당신의 본성이 알려지게 하소서/ 내 안에 계신 육체 되신 분이시여”(찰스 웨슬리, “전적으로 지혜로우시며, 선하시며, 능하신 주님(All-wise, all-good, almighty Lord),”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의 시 전집(The Poetical Works of John and Charles Wesley) 4권 [London: Wesleyan-Methodist Conference Office, 1869] 영문판 121쪽에 수록. 원래는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찬송집에 수록 편찬되었음 [London: William Strahan, 1745])


[31] Rakestraw, 영문판 266쪽.


[32] 예컨대 이레니우스는 기원 후 약 180년 경에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어떠함과 같은 분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 자신의 어떠함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이단에 대항하여, 5, 서문)라고 썼다.


[33] 위트니스 리처럼 다른 주석가들 또한 세워진 널판이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을 예표한다고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Joseph S. Exell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기서 예표로 하나님의 거처로 나타난다. 교회는 땅 위에 세워졌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과 분별된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고 견고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된다. 널판들이 금으로 덮여진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이들이 된다(벧후 1:4).”(성경 일러스트레이터, 제2권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8], 영문판 488-489쪽)고 말했고, Robert T. Ketcham는 “광야의 장막이 그리스도와 믿는 이 모두를 의미하는 이중 예표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곳에서 믿는 이들을 나타내는 그림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널판들에서 볼 수 있다. 널판들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믿는 이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표이다...믿는 이들이 지극히 거룩한 분을 위한 그런 거처라는 사실은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신약의 진리를 나타내는 구약의 그림들 [Des Plaines, Illinois: Regular Baptist Press, 1965], 영문판 22-25쪽)라고 말한다. C. A. Coates는 “’장막에 사용된 널판들’은 휘장과 덮개를 지지할 견고한 어떤 것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널판들이 로마서에서 보듯 성도들을 나타낸다고 믿는다...나는 성령을 소유한 성도들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 금으로 덮여진 널판들과 부합된다고 생각한다.”(출애굽기 개관 [Sussex, England: Kingston Bible Trust, n.d.], 영문판 192-197쪽)라고 말했다.


[34] 출애굽기 26:19-20, 22-23.


[35] 출애굽기 25:10-11.


[36] 위트리스 리가 ‘연합 (mingl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어떤 사람들의 반대를 받아왔다. 그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믿는 이들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두 본성을 혼동시키고, 두 본성의 구별을 없애버리며, 결과적으로 인간도 아니고 신성한 존재도 아닌 제 삼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두 본성을 혼동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확증해온 것, 특히 주후 451년 칼케돈 공회에서 확언한 것에 위배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여러 곳에서 이런 비판에 반박해왔고, 공개 서한이 이 점을 완전히 회피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우리의 반박이 더 주효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최근 펴낸 우리의 글들은 http://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html#two-natures에서 볼 수 있고, 책의 형태로는 복음의 확증: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해(A Confirmation of the Gospel: Concerning the Teaching of the Local Churches and Living Stream Ministry) (DCP Press, 2009), 24-29쪽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웹사이트에서는 http://www.contendingforthefaith.com/eBooks/Concerning Our Teachings.pdf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반박한 내용의 핵심은 간략히 다음과 같다. 영어에서 ‘연합’이라는 말은 연결된 것들이 혼합되어 각각의 독특한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전의 정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언어생활에서 확증되고 통용되는 용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결합된 성분들이 결합된 상태에서도 서로 구분되게끔 함께 두거나 결합하는 것”) [‘연합’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함께 섞거나 결합하여 함께 둠, 일반적으로 개별적 속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님 [‘연합’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연합은 개별적 특징들을 상실하지 않는 상태로 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경하는 마음과 놀라움이 뒤섞였다(Respect was mingled with surprise.)’’ [Sir Walter Scott]. ‘그의 동료들은 원주민들과 자유롭고 유쾌하게 섞였다(His companions mingled freely and joyously with the natives)’ [Washington Irving].” [“mingle의 유의어는 mix이다...”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4th ed.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2006)]). 이런 용례를 보면 위트니스 리가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그를 폄하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위트니스 리는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이 용어에 담긴 뜻과 다른 의미를 함축하지 않았다. 우리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잘못 규정하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바란다.


[37] 시카고 문체 교본(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판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영문판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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