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우리가 틀렸었다―제 3부, 공개 서한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첨부 1

 

우리가 틀렸었다―제 3부, 공개 서한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공개 서한의 다음 단락은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며 아래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인용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도 동일하다. 우리는 인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성으로 덮여 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 그분은 금으로 덮인 나무로 만든 언약궤이시고, 우리는 금으로 덮인 나무로 만든 널판들이다. 우리는 수에 있어서 다르지만, 본성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하다.”

위트니스 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1994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27쪽.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나는 신성하고 인간적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고, 그분의 믿는 이들은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하고 인간적이며, 우리는 인간적이고 신성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2007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79쪽.


“나의 부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은 그분 자신이 사람이 되셔서 그분의 피조된 존재들인 우리를 ‘하나님’이 되게 함으로써 그분이 ‘사람화’(man-ized)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화’(God-ized)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그분과 우리, 우리와 그분 모두가 하나님-사람들이 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
(1990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발간) 영문판 54쪽.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위의 책 영문판 53쪽.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삼일 하나님은 이제 ‘하나 안의 넷’(four-in-one)이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넷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고, 하나 안의 넷 또한 분리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

위의 책 영문판 203-204쪽.


이전 단락에서와 같이 공개 서한의 현재 단락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아무 주석이나 해설 없이 비정통적인 것으로 보이는 위트니스 리의 일련의 인용문들로만 구성돼 있다. 나는 누구든지 철저한 조사를 수행하기 전에는, 공개 서한 작성자들의 이전 단락에 공감하여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추정하기가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위트니스 리의 이 두 번째 범주의 인용문은 그 어떤 거짓된 가르침과도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그 의미를 입증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표현은 뉴 에이지나 힌두교 지도자들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비기독교적이거나 우상 숭배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몰몬 교도들이나 암스트롱 교도들도 그러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에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이거나 이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이나 늦은 비(Latter Rain) 교사들이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가장 우호적으로 말해서 정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교회 교부들과 동방 정교회 신학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정통 교리의 범주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의 전후 관계와 용어의 정의를 제공하지 않은 채 이러한 인용문들을 정통이 아니라는 증거로 공표한 것은 학자답지 않고, 감정적이며, 무책임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비판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지방 교회의 실제 가르침과 관련이 없다.


그 서한의 작성자들은 이 문서가 단순히 지방 교회들에 대한 공개 서한이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의 진술에 대한 문맥의 전후 관계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대답은 공개 서한이 아니고 개인적인 서신인 경우에나 적용된다. 그 서한은 공개 서한이었을 뿐 아니라, 작성자들이 그 존재를 언론에 알렸고, 웹사이트에 올렸으며, 복음주의 단체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유포시켰고, 지방 교회들에 대한 논쟁의 일부로 분명하게 이용했고, 또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참으로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지방 교회 측의 가르침을 문맥에 따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이 오해되고 잘못 대표되어 왔음을 보았던 이전 단락에서 우리가 직면했던 것과 상당히 유사한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위트니스 리가 이 주제에 관해 가르쳤을 때 반복해서 거론했던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핵심적인 구별이 또다시 완전히 누락되고 무시된 것이다. 더욱이, 사람의 신화(神化)에 관한 지방 교회 측의 가르침은 동방 정교회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다른 예들과는 전혀 유사성이 없다. 결론적으로, 존재론적/경륜적 구분 그리고 동방 정교회와의 유사성이라는 이러한 요인들은 결정적으로 위트니스 리가 이단의 범주와는 거리가 멀고 확고하게 정통 교리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이에 관해 동의하든 안 하든, 그들을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본질적-경륜적 구별을 다시 놓쳐버렸다!


이단 변증/감별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에 큰 유익을 제공하지만, 이 일에 관여한 우리는 변증과 분별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단 사냥’의 정죄와 늘 싸워야 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채, 어떤 종교 지도자나 그의 단체에 대해 일반인들이 등을 돌리게 하려고 그 종교 지도자의 이단처럼 보이거나 언어 도단인 것 같은 진술의 충격적 가치를 이용하기 위해 그런 진술들을 찾는 일을 할 때, 그러한 이단 변증 연구는 참으로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이 된다. 나는 공개 서한에 관여한 많은 분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과거의 일을 ‘이단 사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위트니스 리의 신화에 대한 가르침을 취급한 방법에 관한 한, 그것이 이단 사냥이었다는 정죄에 맞서 그들을 변호하기가 어렵다.


공개 서한에 인용된 세 권의 책 중에서, 두 권은 신화에 대하여 짧게 인용했을 뿐이므로 한 번 이상 인용된 책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세 번 인용된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 주제에 관한 지방 교회의 총체적인 가르침을 제시하므로 서한 작성자들이 다른 여러 출판물처럼 이 책을 참조할 수 있었고, 또한 참조했어야 했다. 공개 서한이 보다 깊은 연구에서 가져온 세 인용문 중 하나를 포함하는 아래 인용문에서, 그들은 위트니스 리가 이단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내용 '바로 직전에서' 인용을 멈췄다는 것을 주의하라. 나는 그들이 인용하기로 선택한 부분은 굵은 글씨로 처리하고 그들이 빼기로 선택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처리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사람에게서 난 것은 사람이며,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분명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위격을 공유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경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하나님의 위격을 가지시고, 사람의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1]


불행히도 공개 서한에 이름을 빌려 주었거나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에게 상황은 더 불리하게 된다. 공개 서한이 인용한 단락의 ‘직전’ 단락에서 서한 작성자들은 아래의 중요한 단서들(파란색)을 무시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넣는 일을 하심으로써 어느 날 우리가 그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신격의 일부분이 될 수 있고 유일한 하나님과 동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집과 그분의 권속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주권이나 위격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으로서 경배받을 수 없다.[2]


만약 서한 작성자들이 사람의 신화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연구했다면 동일한 종류의 단서들을 반복해서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몇 가지 예들을 더 제시해 보겠다.(위트니스 리의 단서들에 대해서는 파란색 처리함)


초기 교회 교부들이 사용한 ‘신화’(deification)라는 용어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신격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우리 사람은 신화되고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신격에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큰 이단이다. 우리는 신격에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 본성, 요소, 본질, 형상에 있어서 하나님이다.[3]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영적 호흡을 할 때 우리는 신성한 본질, 신성한 요소, 신성한 표현과 더불어 신성한 실질을 누리고 받아들이며 흡수한다. 이것이 우리를 신화하도록, 즉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과정인 믿는 이들의 신화를 말할 수 있다.[4]


신약은 한 면으로는 신격이 유일하며 홀로 신격을 가지신 하나님만 경배를 받아야 함을 계시한다. 다른 한 면으로 신약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어가고 있지만 결코 그분의 신격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계시한다.[5]


이것을 얼핏 본 회의론자는 당연히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한다면 왜 신격에는 참여할 수 없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문맥에 따라 읽고 그가 쓴 용어의 정의를 이해할 때 분명해진다. 위트니스 리는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분명히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 안의 넷’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삼위일체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전혀 바뀌지 않듯이 믿는 이들의 신화로도 본질적 또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위트니스 리가 여기서 신격이라 부르는 것)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지방 교회 측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 또는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과정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육신 되신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 영으로 실재화 되시고, 궁극적으로 삼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된 교회 안에서 표현되시는 점진적인 단계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본질적 본성 또는 신격 안에서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서 볼 때 이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며, 그는 많은 곳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삼일 하나님께서 과정을 통과하시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과정은 경륜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경륜적으로 바뀌실 뿐 본질적으로는 결코 바뀌시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바뀌실 수 없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분은 그분의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그러나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삼일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신다는 의미에서 변하셨다.”[6] 만약 이처럼 분명하게 말한 신학적인 구별들과 단서들을, 역시 그 서한에 서명한 전문 자격을 갖춘 신학자들이 간과한 것이 아니라 그 서한에 서명한 평신도 이단 변증가들이 간과했다면 이해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추정컨대 그 저명한 신학자들 중 일부가 서한 작성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한 작성자들의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는 이런 치우친 인용들은 학자들 그룹 전체의 오점으로 남는다.


동방 정교회의 신화에 필적하는 개신교의 신화


궁극적으로, 신화에 대한 지방 교회 측의 교리는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들어온 믿는 이들의 성화와 영화롭게 됨에 관한 좀더 신비주의적인 관점일 뿐이다. 이러한 교리는 교회 역사에서도 많은 선례가 있고, 처음에는 지방 교회 측의 비관례적인 용어 선택이 낯설지만, 이 교리는 이 주제에 관한 복음주의 주류 신앙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분명 신화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관점보다는 훨씬 더 ‘개신교에 친숙하다’.


이 하나님과의 연합 또는 신화는 그리스도의 법리적 구속에 근거를 둔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한 오직 은혜에 의한 칭의와 성령의 받으심을 포함한다. 믿는 이들은 내주하시는 그 영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주입받아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합되고 그분의 비밀한 몸인 교회의 지체들과 유기적으로 연합된다. 이 유기적인 연합은 ‘거듭남, 성화, 새롭게 됨, 변화, 같은 형상을 이룸, 영화롭게 됨을 수반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7]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성취에 관한 지방 교회의 관점이(동방 정교회의 관점이 그런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익숙치 않거나 불편한 요소와 강조점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또한 이 주제에 관하여 표준이 되는 신학적 사역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느 면으로도 지방 교회의 관점은 건전한 그리스도인 신학(즉, 정통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과 상반되는 것이 없다.


지방 교회 측은 풀러 신학교를 위해 준비한 논문에서 사람의 신화의 본질과 한계들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그것을 역사적 조망 속에서 제시한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때 신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본질과 그분의 경륜적인 행동이 구별된다는 것을 존중한다. 그분은 홀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존재에 의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유일하게 하나님이신 그분과 연결되고 그분 안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되어간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으로 인해, 사람은 결코 신격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삼일성의 네 번째 위격이 될 수 없고,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창조물로서 갖고 있는 속성들을 결코 잃을 수 없으므로, 결코 창조주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사람의 형태와 사람의 본성을 소유할 것이며, 그러므로 결코 무소부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 능력은 창조된 그대로 영원히 제한 아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영역 안팎에서 항상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사람은 오직 창조물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하나님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초대 교회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고전적인 개념인 신화(deification)이다. 아타나시우스(d, 373)가 남긴 “그분이 사람이 되심은 우리로 하나님이 되게 함이라”(Inc. 54.3)라는 유명한 금언은 이 개념을 격조 높게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화라는 개념은 서양 기독교에서 무시되어 왔는데, 이 때문에 이 개념을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며, 로마 천주교만 다소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신화가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결과라는 사상을 결코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와 달리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신화가 성찬 의식이나 성례전이나 그 밖의 종교적 의식의 결과라고 이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되는 것은 은혜가 역사한 결과이며, 이러한 은혜에 참여하는 길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기도하고, 교회의 다양한 모임에서 믿는 이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매일의 교회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삶으로 하나님이 된다. 일부에서는 구원을 신화(deification)로 간주하는 우리의 관점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우리의 출판물을 읽는 독자들은 비록 우리의 관점이 현재로서는 개신교 사상 체계의 주류에 속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이 귀한 진리에 대해 지극히 정통적인 관점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8]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요구


지방 교회 측이 출판한 최근의 신학 논문들을 읽는 중에 분명해진 것은 그들의 현 지도부도 위트니스 리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그 운동의 교리적 특성들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개 서한이 “리빙스트림과 ‘지방 교회들’ 지도부는 이러한 것들 및 위트니스 리의 유사한 선언들을 출판하는 것을 거부하고 중지하라”고 요구한 것은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그들의 지도부는 성경적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모임을 풍성하게 하고 잠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의 나머지도 풍성하게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의 교리적 특성들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래야 하는가?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본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는 이단적인 것이 전혀 없다. 바로 이러한 분야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나머지 부분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나 개인적으로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이 된다거나 하나님-사람들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편치 않다. 그러나 나는 지방 교회가 대부분의 전통적인 기독교보다 영화롭게 됨의 본질과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에 관해 더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기도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침례교인들은 침례에 대해, 장로교인들은 오늘날의 교회 내에서의 언약의 지위에 대해, 감독파 사람들은 사도적 승계에 대해, 오순절파 사람들은 성령 침례에 대해, 웨슬리 교인들은 성결의 중요성에 대해,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 성경 해석에 대해, 가정 교회들은 몸의 생활에 대해 자신들이 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듯이, 지방 교회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이러한 방면에 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믿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파렴치한 이중 기준


만약 ‘7 개 국가의 60 명 이상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학자들과 사역 인도자들이’ 달라스 신학교의 교무처 및 교직원들에게 ‘그들의 설립자가 한 비정통적 진술을 거부할 것’을 요청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면, 여러분은 이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분열적인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루이스 스프레이 쉐퍼(Lewis Sperry Chafer)가 가르쳤던 그러한 고전적인 세대주의가 정통교리를 위태롭게 한다고 믿는 것같이, 다른 복음주의자들 역시 신화에 대한 지방 교회의 가르침이 정통 교리를 위태롭게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감독파 교인들의 침례에 의한 거듭남의 교리나, 루터교의 성찬 ‘안에서, 함께, 아래’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지적 임재’에 대한 신앙이나, 나사렛파의 ‘두 번째 축복’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는 왜 문제 삼지 않는가? 그러한 특징들이 비성경적이고 본질적 교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그러한 단체들의 교리적 특성들은 기꺼이 관용하면서 왜 지방 교회들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대하지 않는가?


나는 그 답을 두 가지로 제시하겠다.


1. 지방 교회들은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을 이단 내지 이단적이라고 비난한 것에 반응하여 소송과 논쟁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많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지방 교회에 대한 보편적 적개심을 창출했고, 이것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지방 교회들을 다른 기독교 단체들과는 다르게 (더 비판적이고, 덜 자비를 베풀고, 더 부주의하게) 대하게 했다.


2.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지방 교회들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취급된다.


서방의 유산은 교회사를 지배해왔고, 오늘날 서방 사람들뿐 아니라 개종하여 기독교의 모든 것으로 제자화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그러나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나 오늘날 지방 교회의 많은 인도자들은 서방의 유산을 공유하지 않았다. 지방 교회의 인도자들에게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그들은 중국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고 지금도 계속 박해를 받고 있으며, 기독교 서적과 훈련을 제한적으로 접했다. 지방 교회의 많은 소속원들이 이곳에 다시 자리잡은 후 서방 기독교계를 새롭게 접했을 때, 양측 모두 그러한 조우에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방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계에 대한 지방 교회들의 독특한 중국식 접근법은, 심지어 지방 교회들 안의 서양 신도가 제시할 때조차도, 이단설이 있든 없든, 이단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색했었다. 지방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이단이고 자신들이 존경하는 교사가 이단의 인도자라는 모든 말이 심히 불쾌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적법한 지위와, 그들이 그리스도의 더 확대된 몸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특징적인 공헌들을 방어하기 위해 맞받아 쳤다.


대화를 시도했을 때, 종종 언어와 문화적 차이들이 진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위트니스 리와 다른 중국계 인도자들과 복음주의적 배경이 없는 그들의 많은 서방 개종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특정 단어와 어구들을 전에는 이단적인 문맥에서만 보아 왔으므로 전문 용어의 정통성을 확증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단 전문 지식을 가진 서방 복음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지방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으로 믿는 가르침에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용어도 변경하지 않았고, 그들의 통상적인 가르침을 균형잡힌 문맥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러한 완고한 태도가 복음주의 변증자들에게는 정통 진리에 대한 사수를 거부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다. 따라서, 지방 교회들은 때때로 그들의 길에서 거의 벗어나 이단처럼 보이는 것 같았고, 이단 변증 연구가들도 지방 교회들에 대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 철저하고 균형잡힌 태도를 보이지 못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양측 모두에게서 좋지 않은 느낌이 발전되어, 상황은 오늘에 이르도록 악화되었다.


지방 교회들의 다른 방면


그러나, 지방 교회들에는 많은 서방 그리스도인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방면이 있다. 지방 교회 측의 대화를 요청하는 제의에 긍정적으로 답변한 후, 행크 해네그래프와 그래첸 파산티노(‘행동하는 답변들’(AIA)의 이사이자 과거 CRI에서 지방 교회들에 관해 연구하고 글을 쓴 사람 중 하나인)와 나는 중국의 많은 도시들과 성들을 포함한 동양과 서양 모두에 근접하여 보다 유익한 방면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누구든지 지방 교회 측의 자료들을 전후 문맥을 고려하며 연구하고, 지방 교회 측의 인도자들이나 소속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생활과 단체적인 교회 생활을 살아 내는 것을 관찰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인다면,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일 뿐만 아니라 많은 방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본이 되는 단체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으로 대부분의 서방 기독교 단체들을 부끄럽게 할 제자 직분의 수준을 지닌 믿는 이들이다. 그들은 불 같은 핍박을 받으며 시험 받아왔고, 인내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감동스러울 정도로 새겨졌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은 압도적이다. 그들의 희생적인 삶은 마음을 굴복시킨다.


2008년 10월에 중국 동부 연안을 따라 9일간 여행했을 때, 행크와 나는 빛나는 성도들의 영과 간증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집회에 참석했다는 죄목으로 수년간(어떤 경우에는 24년간) 투옥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돌보아 주셨는지를 말했다. 심지어 우리가 거기 있는 동안에도 북경에서 청년 집회에 참석 중이던 대학생들과 장년 봉사자들, 항주(Hangzhou)에서 주일 집회를 참석하고 있던 교회 지체들을 포함한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고 심문받았다. 학생들은 곧 석방되었지만 항주의 교회 인도자 몇 명은 1년 내지 1년 반 동안 ‘재교육’을 받도록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지방 교회 측의 회중들은 일반적으로 말씀과 행동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변치 않는 신실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정확한 교리에 매우 관심이 많고, 이단들을 주의하고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제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 종파라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몹시 애통해 하는 것이다.


37년간(그 중 33년은 전시간 사역자였음) 이러한 일들을 연구해온 나의 신중한 견해로는, 지방 교회는 정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 가운데 세계의 핵심 지역인 중국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이들은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에 속한다.(중국에는 대략 백만 명 정도, 대부분이 아시아권인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는 이백만명 정도의 소속원들이 있음.)


행크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현재 중국을 휩쓸고 있는 부흥에서 지방 교회들을 강하게 쓰고 계신다. 그 한 예로, 우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계속된 주일 오전 집회에 참석했는데, (예외적으로 지방 교회 측만 집회하고 경배할 자유를 허락 받은 장수 성에 있는) 난징 교회에는 일층과 이층에 신자들이 가득했다. 주일 오전 집회를 마친 후, 대부분 그 인근 대학에서 와서 이층을 가득 채웠던 대학생 또래의 청년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행크는 통역자와 함께 이 그룹 중 하나에 참석했고, 나는 다른 그룹에 참석했다. 거수를 통해 알게 된 바로는 나의 그룹에 속했던 사람들 중 6년 이상 된 그리스도인은 없었고, 그 중 몇은 아직 개종도 하지 않았지만, 지방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과의 개별 접촉에서 느낀 영적 활력이나 인생에 대한 목적 의식에 이끌려 온 사람들이었다(장수 성에서도 교회 건물 밖에서의 복음 집회는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이 청년들은 공산주의 아래 살면서 경험한 영적인 공허함과, 특히 졸업 후에 실제로 취직되는 비율이 약 40 퍼센트인 상태에서 모든 희망을 그들에게 거는 두 분의 부모와 네 분의 조부모 사이에서 유일한 자식으로서 느낀 압력에 대해 말했다. 그날의 집회 후에는 40명 이상의 학생들이 침례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중에는 행크의 간증을 듣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학생도 있었다.


행크와 나는, 처음에 지방 교회들에 대해 얼마나 회의적이든지 간에, 우리가 그들에 관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지식을 갖는 선의의 모든 사람은 결국 지방 교회들이 진정하고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지방 교회들은 서방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배경에서 기독교를 추구하고 있고, 이것이 그들을 색다르고 수상하게 보이게 할 수 있다.


원래 기독교 문화라는 것은 없다. 기독교는 원래 이방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번성했고, 이것은 결국 기독교 사상과 전통의 발전에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로 인해 그리스-로마 문명은 교회에 크게 유익을 준 신학을 위한 지적인 도구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앞서 존재한 그러한 문화에 대한 인간의 죄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의 관점에서 발전된 맹점들도 있는 것이 틀림없다. 중국 역시 수 천년간 고도로 정교한 문화와 문명을 가졌지만, 모든 진보된 문명이 그러할 수 있듯이 서방의 세계관과 영향에서 동떨어져 있다. 중국 역시 보편적인 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죄의 영향이 있는 것이다.


수년 전에 워치만 니의 서적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와 중국에서의 복음의 진보에 관한 것을 읽고, 이제 실제로 그곳에 있으면서 수십 명의 중국 기독교인들과 상호 교류를 가진 후에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중국 민족에게는 진리와 영적 실재를 향한 특별한 열정과 굶주림이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사도 바울에 따르면 고대 크레타는 ‘거짓말쟁이들, 악한 짐승, 배만 위한 게으름쟁이들’을 배출하여 크레타 기독교인들이 엄하게 책망 받아야 했던 것(디도서 1:12~13)이 ‘실지적인 간증’이었던 것처럼, 중국은 진지하고, 독실하며, 완전히 헌신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넘치게 배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지방 교회 운동은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이다. 중국 지방 교회들에서 실시하는 높은 수준의 신학 훈련에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신약 교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후 그것을 살아 내려는 그들의 열망이 쉽게 감지된다. 이것이 수십 년이 넘는 모진 핍박에서도 그들을 지탱해 주었다.


종교적 분파들의 억압 가운데서
서방 이단 대책 문헌의 역할


그 운동은 공산 혁명 초기부터 가혹하게 핍박을 받았고 문화 혁명 동안에는 더 심한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그들이 겪은 수많은 핍박은 서방 복음주의 이단 대책 문서들 안에 있는 비판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것은 단지 지방 교회들이 주장하는 항변이 아니라, 우리가 그곳을 방문하는 동안 만났던 중국의 고위 당국자를 통해 CRI가 확인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서방의 복음주의 문헌을 모르지 않는다. 중국 내의 사건들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공산 정부가 사회 불안과 그것이 발생할 경우 이단들이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해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파룬궁 회원들과 티벳 승려들이 비인가된 시위에 돌입한 후 그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있었다.) 중국의 일부 성에서는 몇몇 기독교 단체를 포함한 등록된 종교 단체들이 60년간 비등록 종교 단체로 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만, 특히 이단 종파로 알려진 사람들은 계속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 관계 당국이 지방 교회 운동을 이단으로 보는 한, 지방 교회 사람들은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종교를 반대하지 않으며, 사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가 사회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증가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우려하는 것은 중국 밖에서 시작되어 밖으로부터 계속적인 인도를 받고 있는 모든 종교 단체들이다. 중국 정부는 모든 허가된 종교적 표현은 완전히 토착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중국 토속의 성공적인 기독교 운동에서 지방 교회라는 더 나은 예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 운동은 워치만 니에 의해 중국에서 세워졌고, 중국의 사역자들,[9] 특히 잘 알려진 위트니스 리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들은 정통이기는 하지만 독특하게 중국적이면서도 서방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다른 신학과 교회생활에 대한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본 것과 아래에서 더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가진 교회론 모델은 상당히 지방적(local)이므로 나라 밖은 물론이고 해당 지방 교회가 있는 도시 밖의 어떤 교회 조직의 통제도 거부한다. 더욱이 지방 교회들은 정치와 무관하다. 즉 그들은 혁명적이거나 선동적인 야심이 없다. 그들은 소속원들에게 정부 권위에 순종하고 모범적이고 생산적인 시민이 되라고 가르친다.[10] 바꾸어 말하면, 지방 교회는 중국 정부가 기독교 단체에서 보기 원하는 기준에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다.


따라서 여기에 크고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기독교계의 보편적인 진리들에 관한 지방 교회들의 특유한 중국식 접근법이 서방에서 오해받아 이단으로 잘못 분류된 데 일조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국 관료들은 서방에서 자신들에 대한 편견에 찬 반응에 직면한 이 토착 중국인의 기독교적인 표현을 지지하는 대신, 서방 문헌에서 사용한 ‘이단’이라는 선동적인 말에 반응했고, 통제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계속 그 단체를 탄압했다.


지방 교회들에 대해 계속되는 탄압 가운데서
신화(神化) 라는 교리의 역할


서방 사람들만이 중국 당국에 영향을 끼쳐 지방 교회들을 반대하게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부정확할 수 있다. 지방 교회들은 다른 중국인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뒤섞인 반응을 경험했다. 정부에 영향력이 있는 특정 개인들을 포함한 일부가 그들을 강하게 반대했다. 나는 지방 교회에 대한 전문가인 한 중국 고위 관료로부터 이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신화의 교리일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지방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들은 지방 교회의 신화 교리를 비기독교적 신화 교리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기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다소 자극적인 단어들이 들어 있다 하여 그것이 이단이나 우상 숭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지방 교회들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은 본질적으로 그분의 공유적 속성들 (예컨대, 도덕적 본성)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과 그분의 내주하심을 통해 그분과 친밀하게 ‘연합되는 것’(mingled)을 포함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배워 기대하는 것보다 더 근접된 하나님과의 연합을 포함하지만, 성경에 있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믿는 이들이 갖게 될 장래 모습에 대해 깊이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될 것(롬 8:29)이 현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요일 3:2) 이상이리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사람의 종이 되심으로 궁극적으로 그분이 우리를 높이시어 그분 자신의 영화롭게 된 인성에 참여하는 자들로 만드신다는 것(빌 3:20-21, 비교 엡 1:18~19, 히 2:10~12) 또한 성경적으로 매우 분명하다. 성경은 심지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적 구분을 희석함 없이(또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의 설명처럼, 신격에는 참여하지 않고), 최대한 친밀하게 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교회의 연합을 예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요 17:11, 20-23, 엡 5:31~32). 궁극적으로 지방 교회와 일반적인 복음주의의 구원론과 종말론 사이에서 어떤 본질적인 차이들을 찾기 어렵다.


내가 분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실제적 차이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지방 교회들이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energies)’에 참여함으로 신성화 된다는 동방 정교회의 교리와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서방 개신교인 속생명파 교사들에게서 배웠지만, 복음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익숙했던 것보다는 좀 더 신비스러운 개념들이다.[11] 그러나 동방 정교회와 지방 교회들의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에 참여하거나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분석을 보더라도 지방 교회들의 신화 교리는 충분히 정통 교리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다.

 

 

-------------------------------------------------------------------------------- 

[1] 위트니스 리, 신성한 분배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1990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발간) 영문판 53쪽.


[2] 앞의 책.


[3]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인의 생활(1995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90쪽.


[4] 위트니스 리, 욥기 라이프 스타디(1998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39-140쪽.


[5] 위트니스 리, 사무엘서 라이프 스타디(1998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89-190쪽.


[6]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제3권 성령(1989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93쪽. 위트니스 리 신성한 분배 54쪽, 위트니스 리 그 영과 몸(1984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05-106쪽도 보라.


[7] 편집자, 결정(結晶)-삼일 하나님과의 연합 확증과 비평 1, 3(1996.7) 영문판 64쪽.


[8] 풀러 신학교를 위해 준비한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한 성명서, 2006. 5, 영문판 25~26쪽.(이 문서는 http://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pdf 에 게시돼 있음.)


[9] 신약 교회와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말하는 ‘새 사람’을 실현하기 위해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그들은 상당한 정도로 성공했지만, 초월하는 영적 실재에 대한 이러한 추구조차도 특별히 중국적이고, 그렇지 않다면 유일하게 중국적이다.


[10] 지방 교회들의 신앙과 실행 http://www.contendingforthefaith.com/responses/booklets/beliefs.html 을 보라.


[11] 이러한 영향들은 아래 서적들의 초기 판들을 포함한다. Henry Scougal, 사람의 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Fearn, Ross-shire, Scotland: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1996); Ruth Paxson, 최고 수준의 생명(Grand Rapids: Kregel, 1996); Mary E. McDonough,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Anaheim: Living St ream Books, 1999); 및 T. Austin-Sparks, 사람이란 무엇인가?(Cloverdale, IN: Ministry of Life, 1939).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2

profile image
관리자 작성자 2015.09.11. 19:27
원문에는 '기울임체'로 되어 있는 부분을 가독성을 위해 '파란 색칠'로 변경했습니다.
작은감자 2015.09.12. 08:42
본인들의 의도에 끼워맞추기 위한 말들만 잘라서 쓰는 이 교묘한 사람들의 악한 생각들을 주님이 들추어 내시며 많은 믿는이들에게 합당한 진리의 말씀들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