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것이 내 길이라면
-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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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주님을 따르는 길을 고난의 길이라고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주님께 기도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주는 축복의 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 역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추구하고 때로는 고난 받으며 육체를 억압하고 많은 수행을 하는데 그것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1. 고난 받는 것이 내 길이라면 간고의 길 주가 정하셨다면
주님과의 교통 더욱 친근해 순간 순간 간격 없기 원하네
서양에서는 근대주의(모더니즘)가 시작되면서 사람의 이성(혼 안의 생각)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고, 발명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들의 장밋빛 희망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사람의 생각으로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동양에서는 사람의 존재 안에 중심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인 사람의 영(슥 12:1, 살전 5:23)이지만, 타락으로 인해 죽은 사람의 영(엡 2:1, 5)을 개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악한 영적인 존재와 접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는데 바로 사람의 타고난 육체를 억압함으로 사람의 혼 안에 있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창 2:19).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든지, 아니면 죽은 사람의 영을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혼적인 기능을 피동적인 상태에 두든지, 아니면 혼 안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억압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2. 땅의 즐거움이 감소될 때에 주여 내게 하늘 더욱 주소서
내 마음은 상해 아플지라도 영은 주를 향해 찬송하도록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을 때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엡 2:5), 우리의 영 안에 그분의 영이 내주하심으로(롬 8:9) 우리와 한 영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고전 6:17). 그리고 이러한 연합된 영이 우리의 혼의 각 부분을 적시심으로(롬 8:6)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그분과 같은 형상이 되고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롬 8:29, 창 1:26). 그리고 우리가 장차 주님이 오실 때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변형됨으로(빌 3:21)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그분의 완전하신 구원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살전 5:23).
비록 우리의 죽은 영이 주님을 영접했을 때 다시 살아났지만 우리의 혼은 타락으로 인해 여전히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혼의 변화를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안배하신 많은 상황들이 필요합니다(롬 8:28, 롬 12:2). 이러한 길은 우리의 이성을 신뢰함으로 그것을 단독적으로 사용하는 길도 아니며, 그러한 기능을 억제함으로 피동적이 되는 길도 아니며 더 나아가 우리의 육체를 억압하는 금욕주의와 같은 길도 아닙니다(골 2:20-22).
3. 주님 자신 더욱 얻기 위하여 이 땅과의 연결 끊어진대도
주님과의 사이 더 달콤하게 연결되어 주의 향기 누리리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덜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보다 비교할 수 없고 더 큰 누림이 되신 주님을 발견함으로써 입니다(아 1:2). 우리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에 제한을 주고 억압을 주는 어떤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환경을 안배하신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길은 다만 고난이 아닌 주님과의 교통이 더욱 친근해지는 길이며, 다만 땅의 즐거움을 거절하는 것만이 아닌 하늘의 풍성을 누리는 길이며, 이 땅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만이 아닌 주님과의 사이가 더 달콤해지는 길입니다. 이러한 누림 안에서 우리의 혼의 기능은 변화를 통과하게 되며 우리의 육체의 소욕은 죽임을 당하고 생명을 공급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영이 우리의 존재 안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 되며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주님과 함께 주님을 표현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4. 외로운 이 길에 주 내 동반자 웃는 얼굴로 날 격려하소서
주 은혜로 자아 벗어버리고 생명 분배하는 그릇 되도록
타고난 사람은 모두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번제가 되신 주님을 누림으로 저항하지 않고 변호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혼 생명을 잃는 것이 필요합니다(레 1:5-6, 마 16:24-26, 마 27:12-14). 우리가 많은 때 옳은 이유로 자신을 변호하지만 결국 우리가 한 것은 옳은 이유로 하나님의 경륜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자라지 않는 이유가 자신의 혼 생명을 잃어야 될 많은 상황 가운데서 자신의 혼 생명을 오히려 보존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는 길도, 자신의 혼의 기능이 피동적이 되는 길도, 그리고 우리의 육체를 억압하는 길도 가지 않지만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주님을 누림으로 우리의 혼 생명을 잃어야 되는 길이 남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해 주지 않고 우리를 알아주지 않으며 우리를 비난할 때 이 길은 한 면에서는 외로운 길이고 고난의 길이지만 또한 생명을 분배하는 주님이 동반자가 되시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플 때 우리의 영에는 찬미가 넘칠 것입니다.
기도 : 하루하루 무의미한 날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루하루 주님을 영 안에서 따르므로 우리의 혼 생명을 잃는 날들이 되게 하소서. 영 안에서 주님이 잠잠하실 때 저항하지 않게 하시고 자신을 변호하지 않게 하시며 주님 안에서 외로운 길을 가게 하소서. 사람들의 동정 보다는 주님의 기쁨을 구하게 하소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생명을 분배하는 주님의 귀한 그릇이 될 때까지…
* 이 찬송은 한국복음서원 찬송가 282장입니다. 가사는 마가렛 E. 바버 자매님에 의해 지어졌고 곡은 Thomas Hastings에 의해 붙여졌습니다.
* 17, 18세기만 해도 악보가 없는 찬송이 많았고 곡마다 운율(Meter) 표시가 있어서 그 운율에 맞는 곡이라면 그 가사와 함께 부를 수 있었습니다.
* 그러나 현재는 작곡에 대한 이해가 폭넓어졌고 보편화되었으며 가사 역시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시들이 많아서 운율(Meter)을 점점 사용하지 않는 추세가 되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무곡 찬송가 보다는 악보가 기입된 찬송가가 점점 더 보편화 되고 있습니다.
* 가사가 몸이라면 곡조는 그 가사를 아름답게 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주님이 체험하게 하신 진리와 통과하게 하신 공과가 더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도록 주님이 주신 영광과 아름다움을 위한 옷들이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 http://www.btm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