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양태론 이단성 비판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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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양태론 이단성 비판에 대한 반박
- 지방교회 양태론 관련 포도가지(차영위)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 -
인터넷 안에는 검증 안된 글들이 많이 떠 다닙니다. 아래 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진리가 왜곡되는 것과 성도 간에 불필요한 장벽을 막도록 최소한의 해명 또는 반박을 해 보겠습니다. 편의상 <차영위> <지방교회측 반박> 이렇게 구분하겠습니다.
<차영위>
“아래의 글은 이인규님이 지방교회와 토론할 때 인용했던 위트니스리의 글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내가 위트니스리의 글이 의미하는 바를 밝혀 놓았으니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으면 위트니스리의 글이 양태론자들의 말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의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우기면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말하려면 양태론자들이 하는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는 양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위트니스리가 과연 양태론자가 아닌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아래에 인용된 위트니스리의 글이 왜곡된 것이거나 조작된 것인지 (지방)교회 사람들이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 항의가 없으면 사실기록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고 어느 한 부분만 떼어내어 소개하다보면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가 크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로도 이단과 정통이 판가름나는 삼위일체론은 특히 그러합니다. 정통 교부인 바실 (Basil)은 그런 식의 비판을 통해 삼신론자로, 역시 정통 교부인 어거스틴은 양태론자로 오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상쇄할 다른 부분의 언급을 통해 ‘정통’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아래 포도가지/차영위 님(또는 이인규님)이 위트니스 리가 말했다며 인용한 글들은 유감스럽게도 오해살 만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도드라지게 보이게 했고, 앞뒤 쪽의 ‘전제조건’, ‘추가설명’ ,‘그런 말이 나오게 된 성경본문과 배경’ 등은 의도적으로 생략되었습니다. 참으로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든 이단 만드는 것이 목적인 분들이 뽑아 낸 본문들이라 그렇습니다.
<차영위>
1.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 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비밀. 18-19쪽)”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 이 부분입니다. 위트니스리의 이 말은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구분)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가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아들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고 이렇게 혼동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2번을 볼까요?“
<지방교회측 반박>
위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라는 말은 차영위 님의 오해처럼 2격(아들)을 1격(아버지)이라고 부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2격으로 대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위 문장에서의 ‘그분’)는 기도 시에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라는 의미입니다.
각 위격을 1/3씩 나누어 생각하는 이단 신론을 가진 분들(대표적인 사람이 한기총에서 삼신론 이단으로 공식 규정된 OOO 목사 그리고 그의 옹호자인 OOO씨임)은 ‘아들’은, 전체 하나님 중에서 아버지와 성령은 제외된 제 2격만(1/3)이라고 크게 착각합니다. 사실은 한국교계 이단감별사들 상당수가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위에서 보듯이, 어느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 삼일 하나님 전체라는 정통 교부들의 신앙관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삼위는 각각 1/3로 분리된 셋이라고 오해할 때, 아들(제2격)=아버지(제1격)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양태론 오해가 생겨납니다. 즉 이단기준으로 보니, 정통이 이단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는 다음과 같이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언급하는 아버지가 제 1격만을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세 위격 전체 즉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예에서처럼, 우리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것은 배타적으로 삼일성의 첫번 째 위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p. 107
삼위를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으로 보는 분들은 아래와 같은 정통 삼위일체 고백을 잘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시각조정 차원에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조금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 (어거스틴)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299쪽).
•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 “신적 존재양태들(the divine modes of being)이 상호간에 서로 서로를 아주 완전하게 조건지으며 스며들어서 하나가 항상 다른 둘 안에 계신다.”(Karl Barth, CD 1/1, p 370).
• (다마스커스 요한) ”각 위격은 각각 다른 위격 안에서 어떤 연합(coalescence) 없이 존재(being)를 가지신다.”(Elwell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843-844).
• 『위격 간의 상호내재 :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격의 위격들이 시간 안에서, 장소 안에서, 직무 안에서, 또는 활동 안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김석환, 위 책, 228쪽)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삼위의 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가 다 들어 있다.”(김석환, 위 책, 29쪽).
•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있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요14:10)라고 선언하신 바와 같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1권, p169)
세 위격을 세 사람들처럼 각각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다음과 같은 지적도 새겨 들으면 좋습니다.
•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으로는 셋이나 실체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님의 실체를 아담과 하와와 셋에 비교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역시 잘못된 것이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 241쪽, 원출처: Gregory of Nyssa, QNTD(5:334)).
•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 없으시다. 그분들은 마치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이 그런 것처럼, 서로 나란히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1947, p109).
• “신적 실체는 각 사람의 경우처럼 개체적 부분의 한 종류로 간주될 수 없다”(김석환, 삼위일체에서 ‘페리코레시스’ 이론에 관한 분석)
다시 반복하지만, 위 위트니스 리 본문은 포도가지/차영위 님의 오해처럼, 2격(아들)=1격(아버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포도가지님이 자신의 삼위일체관을 위 정통 신학자들의 그것과 일치시킨 후, 본문을 다시 읽어보시면 비로소 위트니스 리가 말한 것이 정통 신학자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차영위>
2.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은 영원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이것은 히브리어에 따른 합당한 번역이다. 아버지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의 아버지이시다.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은 영원 안에 계신 바로 "그 아버지"이시다. 저쪽 영원 안에서 "그 분은 아버지"셨고, 이쪽 시간 안에서 우리의 시대에 "그분은 아들"로서 주신 바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비밀. 18쪽)”
“-- 위트니스리의 유추해석은 이것입니다.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우고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니,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이것이 그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여기서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오류 때문에 그는 혼돈에 빠지고 양태론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우고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니,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라는 말는 차영위 님의 주장처럼 위트니스 리의 ‘유추해석’ 아니라 아래에서 보듯이 ‘성경본문’ 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9:6,개역)
<차영위>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구별(구분)합니다. 인성으로 볼 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신성으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이 양성은 혼합되지 않으며 구별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첫째, 그 둘이 합해져 제3의 어떤 존재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이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성’이 합해졌지만 구별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이런 뜻으로 본다면 이사야서 9장 6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을 때 아들 혼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라 불릴 뿐 아니라 아버지라 불리운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위트니스리는 ‘아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불리우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쪽 영원 안에서 그분은 아버지셨고, 이쪽 시간 안에서 우리의 시대에 그분은 아들로서 주신 바 되는 것이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들은 영원 안에서도 아들이시고 아버지는 영원 안에서도 아버지라고 구별하여 말하지, 아버지와 아들을 혼동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아들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을 양태론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오해한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말씀은 어떤 물질적인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기도 하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아들과 아버지를 영원히 구별하며, 혼합하거나 혼동하지 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말씀도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일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이지 아들이 곧 아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한 번도 ‘내가 곧 아버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자신과 아버지를 혼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제 3번을 봅시다.”
<지방교회측 반박>
포도가지님은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 그래서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라 불릴 뿐 아니라 아버지라 불리운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가지님의 이 말 자체도 삼위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결국 아들이 아버지라는 말임으로 위격간의 혼동을 가져오는 양태론 이단 주장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의 엄격한 구별은 어떤 경우에도 ‘성자=성부일 수 없다’라는 말임으로 두 위격이 아무리 ‘안에’ 그리고 ‘함께’ 계신다고 해도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이지, 아들이 아버지로 불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도가지/차영위님은 본인이 파 놓은 함정에 본인이 빠지고 있는데, 이 점을 어떻게 해명하실지 궁금합니다.
사실 위트니스 리(또는 지방교회측)은 이 구절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는 본문에 근거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로 이해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방교회측의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지에 별도 논문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http://www.affcrit.com/pdfs/1996/01/96_01_sc.pdf (영문) 참조).
<차영위>
3.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 위트니스리의 혼동을 보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동을 넘어 혼돈입니다. 그는 말로는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증거를 대면서 말하는데도 자신은 그래도 아들과 아버지를 구별한다고 말하면 그는 ‘구별’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충고했지만 그는 그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차영위 님이 비판하시는 위 내용은 스가랴 2:8-12에서 ‘만군의 주께서 ‘보내신 자(He)’와 ‘보내심을 받은 자’ (I) 둘 다 이심’을 지적한 바로 다음 문장입니다. 그리고 인용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글은 “앤드류 머레이는, 가장 좋은 기도는 내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께 기도한 것이라고 말했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위트니스 리는 “이 문제를 교리상으로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서는 참으로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문맥 전체의 흐름을 무시하고 오해살만한 부분만 떼어내어 비판을 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고 일종의 비겁한 이단 감별일 뿐입니다.
본문 자체(슥2:8-12)가 두 위격을 동일시하는 내용을 해석할 때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이 역시 기도하시는 아들도 <삼위 전체>이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도 <삼위전체>라는 전제 하에 말한 것입니다.
-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아우구스트스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한편, 위트니스 리는 위에서 처럼 삼위 전체의 방면에서 어느 한 위격들을 말할 때도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삼위의 구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후 문맥을 잘 살펴서 인용하고 비판해야 할 이유입니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그분의 영으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 영, 아들 그리스도를 갖는다. 모두는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한 동안 존재했으며 그 다음 아들이 왔으며 그 다음 얼마 후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영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이 구절은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으며, 그 영은 성도들을 강화시키며, 아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진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304-305쪽)
미국의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드(CRI)는 지방 교회측이 참되게 믿는 바를 알고자 하였기에 위와 같은 언급들은 제대로 평가한 반면, 포도가지/ 차영위 또는 이인규님은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균형을 잡아 주는 언급들을 양태론을 감추려는 변명으로 함부로 폄하합니다. 참된 저자의 의도보다는 어떻게든 이단을 만들려는 것이 이분들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을 손바닥으로 영원히 가릴 수는 없습니다.
<차영위>
4.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48쪽)”
--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곧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양태론 이단자들과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의 사상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했는데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의 주장이 그러할 뿐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라거나 ‘주님이 그 영(성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라는 성경 근거는 이사야 9:6, ‘그리스도 주님이 성령이시다’라는 성경 근거는 고후3:17입니다. 특히 고후3:17에서 ‘주’가 그리스도이시고, 영이 성령이라는 해석은 수십명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동의합니다. 원하시면 이에 대한 상세한 자료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위격간의 기능적인 동일시’로 보는 관점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교수인 개핀 교수, 박형용 박사 등도 가지고 있습니다. 박형용 박사는 이 주제로 총신대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 논문도 발표했습니다(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 논문 전문은 http://www.djrecovery.or.kr 증거/변호와확증 7번글 참조). 이들이 ‘양태론 이단자들’이라면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개핀 교수 그리고 이분에게서 배운 후 한국내 장로교 보수 교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교수들 또 그들에게서 배운 신학생들 목회자들은 다 양태론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참고로 출처로 제시된 성령론 48쪽에는 위 내용이 없습니다.
<차영위>
어떤 지방교인은 위트니스리가 ‘주님이 그 영’ 즉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생명주는 그 영’이라고 말했지 ‘주님이 성령’ 즉 ‘아버지, 아들, 성령 할 때의 그 성령’이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같은 문장에서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같이 두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이라는 뜻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위트니스리가 ‘그 영’을 ‘성령’과 구별하여 말하기도 하고 구별하지 않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구별하지 않고 ‘성령’과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의 ‘주는 곧 영이시니’라는 말씀은 ‘아들이 곧 성령’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으나(고전15:45) 위트니스리의 주장처럼 ‘아버지, 아들, 성령’ 할 때의 그 ‘성령’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성령’이 되셨다면 그것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인데 위트니스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지방교회 반박>
이 역시 1격, 2격, 3격이 각기 분리된 분들이라는 선입관에 따른 지적일 뿐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삼위가 서로 상호내재하시는 삼위의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항상 전제합니다. 또한 위 이사야 9:6, 고후3:17은 두 위격 간의 ‘경륜적인’ 또는 ‘기능적인’ 동일시를 말하는 구절들입니다.
<차영위>
‘살려주는 영’은 ‘성령’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살려주는 영과 성령을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오류입니다. 그가 분리하지 않는 것은 맞는데 구별하지 않는 것은 틀립니다.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가 오류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말이 교묘해서 그 오류를 보기가 쉽지 않고 지적하기도 어렵습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뱀장어 같아서 잡기도 어렵고 많은 사람이 쉽게 미혹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 그가 양태론자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5번을 보겠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먼저 ‘살려주는 영’과 ‘성령’은 우리의 체험과 적용에 있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차영위 님에게 생명을 주어 거듭나게 하신 분이 ‘살려주는 영’인지 ‘성령’이신지 교리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자신이 있으신지요?
차영위 님은 지금 반복해서 교리적이고 존재론적인 방면과 체험적이고 경륜적인 방면을 혼동하고 뒤섞어서 비판을 가하고 있으십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만든 틀에 자신이 갇히고 있습니다.
<차영위>
5.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하나님 297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얼음과 물과 수증기로 설명하는 것은 양태론자들이 가장 잘 쓰는 수법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이렇게 설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아들이 성령이 되어 결국에는 아버지와 아들은 이름과 역사(歷史)만 남고 실체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수증기는 과거에 물이었다. 물이었을 때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증기가 되어 더 이상 물이 아니다. 그리고 이 수증기는 물 이전에 얼음이었다. 얼음이었을 때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얼음이 아니다. 지금은 얼음도 없어졌고 물도 없어졌고 수증기만 있다’ 이 논리로 하나님을 설명해 보십시오.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분이 됩니다.
위의 예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사람은 아주 명백히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와 지방교회는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시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같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現存)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는 수증기가 된 ‘얼음’과 ‘물’을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다른 것입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 위트니스 리 설명은 세 위격의 존재론적인 방면을 설명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대신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삼위 전체가 과정을 거친 후 우리 안에 오신 것이지 일부의 오해처럼 삼위 중 1/3인 보혜사 성령만(성부와 성자는 제외되고) 오신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차원의 문맥입니다.
사벨리우스는 위트니스 리와 달리, 삼위의 존재론적인 구별을 부인한 채 위와같은 설명을 함으로 양태론자가 된 것입니다.
위 문맥의 소제목은 ‘하나님이 삼일이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고후 13장 13절이 말하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 이 셋이 어떻게 우리의 누림과 체험 안에서는 각각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입니다. 우리 중 누가 고후13:13이 말하는 내용에서 어디까지가 성부의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성자의 은혜이며, 또 무엇이 성령의 교통인지를 칼로 무우 자르듯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양태론자가 쓰는 예를 들었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될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 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위 글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또 성자가 성령이 된 후 성부와 성자는 사라지고 성령만 계신다고 믿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오직 삼위일체의 존재론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면 모두를 균형있게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그것도 최삼경 목사를 두둔하기 위하여 쓰여진 자신의 논문에서 ‘우리 안에는 성부와 성자가 제외되고 보혜사 성령만(1/3) 계신다’ 고 주장한 차영배 교수와 같은 분들의 오해된 신론을 바로잡는 목적이 있는 문맥입니다.
<차영위>
그들은 진리의 양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태론자라는 정죄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양태론을 주장하면서 겉의 말로는 정통삼위일체론 뒤에 가서 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정통삼위일체론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양태론자라는 정죄를 받지 않으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할 때 ‘얼음, 물, 수증기’ 논리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들의 술수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래의 수박 비유에서도 위트니스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트니스리는 위 인용문에 바로 이어서 “…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도 그 자체로는 이 실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물질적인 창조에서 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예를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이나 차영위(포도가지)님은 이런 경고의 말은 쏙 빼고 의도적으로 바로 윗부분까지만 인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래야 수증기 비유 등을 들어 양태론으로 몰아가기 쉬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고의적으로 왜곡시킨 것입니다.
<차영위>
6.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위와 같은 비유도 양태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비유입니다. 아버지가 온전한 수박이고 아들은 조각난 수박이고 성령이 수박 즙이라면,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들과 성령이 계시지 않았고, 아들이 계실 때는 아버지와 성령이 계시지 않았고, 성령이 계시는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위의 문단에서 그는 분명히 ‘없어진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온 가족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소화된 수박은 더 이상 수박이 아닙니다. 통수박도 없어졌고 조각난 수박도 없어졌고 수박 즙도 없어졌습니다. 사람 속에 남은 것은 영양소와 배설물입니다. 그것을 두고 누구도 ‘수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배설물도 없어지고 양분은 사람의 일부분이 됩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성령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 후에는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어지고 사람의 영과 합해진 ‘한 영(고전6:17)’만 남습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입니다. 그의 이렇게 빗나간 ‘수박신학’에서 신성을 모독하는 참람한 ‘신화(神化)교리 -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사람을 하나님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신격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본성에서)’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 같은 그의 주장이 한 면으로는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것은 한 면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며 어떻게 보아도 맞지 않고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수박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양태론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7번은 성육신에 관한 글인데, 여기서도 위트니스리는 양태론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 포도가지님의 지적을 읽으면 무슨 대단한 문제가 있는 것같지만, 비유로 꼬투리를 잡은 후 불필요하게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위 비유 역시 전체 하나님이 아니라 1/3하나님만 우리 안에 계신다고 굳게 믿는 최삼경목사, 이인규님, 차영배 교수 같은 분들의 ‘분리된 삼위 사상’을 바로 잡기 위한 일종의 ‘충격 요법’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위트니스 리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비유가 아니라 평이한 말로 고백할 때, '우리 사람 안에 성부와 성자는 안 계시고 성령만 계신다'고 했다면 위 포도가지 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그야말로 공식에 맞아 떨어지는 양태론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다. 즉 위트니스 리는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우리 안에 계신다'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위트니스 리를 강하게 비판하는 분들의 글에서 제시함으로 위 포도가지 님의 과장된 확대해석이 기우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세분은 하나이시다(64-신약2, 175쪽).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생각은 순식간에 또 바뀌어 세분(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고 한다. "오늘날 세 분 모두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우리는 세분이 분리되어 하나가 아니시라고 믿지 않는다.(64-신약2, 176쪽)" (차영배, 위트니스 리의 삼일론 논박,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132쪽)
위 인용문의 요지는 '우리 안에 세 인격들의 하나님이 계시지만 이 셋은 '분리된' 셋은 아니며 우리의 매일의 체험에서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생각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성령 안에 아들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실 때 우리 속에는 세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즉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말처럼 '아들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만 계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 안에도 아들 하나님도 성령 하나님도 계시고...."(최삼경, 교회와 신앙 97년 8월호, 158쪽)
위 두 개의 반대자들의 증언 자료들은 ‘위트니스 리는 수박비유를 통해 성부, 성자가 우리 안에 안 계시고, 1/3위격인 성령만 계신다고 말한다.’는 포도가지님의 ‘가설’은 가설일 뿐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사실이 아닌 이런 저런 말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해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차영위>
7.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 여기서 위트니스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 그의 표현대로라면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성경을 얼마나 왜곡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위의 문장에서 그는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한다.’고 말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볼 때 ‘말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아들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인 하나님이 육신 된 그분에 대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합니다. 육신 된 그분이 ‘독생자’ 즉 ‘아들‘이 아닙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말씀’이 ‘아들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여기서 억지를 부립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부분을 첨가하여 ‘온전한(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함께 계셨던 것은 사실이나 이 사실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말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하며, 성경이 ‘아들 안에 아버지가 함께 계셨다.’고 말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리는 성경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아들이 육신이 되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도 육신이 되셨고, 성령도 육신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지 ‘아버지’가 육신이 되거나 ‘성령’이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구별이 없을 때 결국에는 ‘성부고난설’까지 주장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 8번의 그의 주장은 더욱 심각합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비판할 때는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인용해야 합니다. 위트니스 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고 말했지, 성부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성육신하셨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부와 성령이 제외된 1/3위격인 아들만이 아니라, 아들이 성육신하셨지만 그 아들 안에 구별되나 분리가 되지 않는 성부와 성령이 포함된 하나님 전체가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견해는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For in him dwelleth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 bodily)(골2:9)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성경은 신격의 일부(예를 들어, 아들)만이 아니라 신격의 모두가 육체로 거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육신의 주체를 말할 때는 다음과 같이 삼위의 제 2격이 육체를 입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단지 그 제 2격이 1/3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히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193 쪽)
<차영위>
8.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아래 문장들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 1)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해석할 필요도 없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합할 때도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과 합할 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를 떠나 믿는 사람에게 오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더 이상 보좌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 황당한 주장이며 성경 진리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난해한 어떤 부분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사실을 시인하는가 부인하는가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과 합해진 오늘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우선 지적할 것은, 원문에는 ‘전통적인 설명’ ‘삼신론’ 이란 말에 따옴표가 없습니다. 더구나 ‘(아래 문장들은)’ 이란 말도 원문에는 없습니다. 포도가지 님(또는 이인규님)이 임의로 써 넣은 다음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위 인용문의 소제목은 “삼일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입니다. 따라서 위 내용은 문맥이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삼일성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을 소개하는 문맥이지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한 가지 해명만으로도 마치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믿고 말한다고 착각하는 포도가지님의 위 비판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아래 위트니스 리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차영위>
“2) 위 문단에 들어있는 위트니스리의 다른 비판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요6:57, 14:16. 15:26).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위트니스리는 이 말씀을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다만 니케아 신조라고 말합니다. 그가 위의 예수님 말씀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그렇다면 그는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어떠한 악행입니까?“
<지방교회측 반박>
위 비판 역시 저자의 의도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말꼬리를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격입니다. 저자의 의도는 각 위격을 ‘삼위 전체’로 보지 않고 ‘각각 분리된 1/3씩’으로 보는 사상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라든지,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가 (하늘 보좌에 계심과 동시에) 이 땅에 오신 아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요8:29). 오늘날 대부분의 믿는 이들 특히 한국의 이단 감별사들은 이런 방면의 인식이 크게 결여되어 있음으로 이런 오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차영위>
“3)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5)’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타 여러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들이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성경의 계시가 아니고 니케아 신조란 말입니까?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지방교회측 반박>
위트니스 리는 위 글에서 포도가지님의 지적처럼 기도하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만 기도하고, 아들이나 성령님에게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이런 점에서 다른 두 위격들에 대해 대단히 미안해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단지 제 1격만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님이 다 포함된 삼일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 개혁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의 지적입니다.
이런 균형잡힌 삼위일체관이 전반적으로 특히 한국 교계 내에서는 크게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포도가지님부터 이런 관점이 결여됨으로 반복적으로 오해된 비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포도가지님보다 상식이나 영적 분별력이 없다고 전제하는 그 자체가 스스로 높은 위치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거나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악행’이니 ‘터무니 없다’느니 라고 비판부터 해 놓고 보기 보다는 이 부분은 어떤 의미인가 라고 상대방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들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차영위>
4) 위트니스리는 ‘구별’을 모두 ‘분리’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런 혼동 때문에 그는 양태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성경적인 실행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는 태도를 향해 ‘분리’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구별’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가 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향해 ‘삼신론에 가깝다’고 정죄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에는 이와 같은 오류의 체계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직접적인 말씀조차 무시하고 대항하는 위트니스리의 가르침을 무조건 옹호하는 지방교회는 과연 성경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인지
<지방교회측 반박>
위트니스 리처럼 ‘구별’과 ‘분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우선 그는 에베소서 1장을 설명할 때 선택과 예정을 성부에게 돌리지 성자나 성령께 돌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속은 성자의 일이며, 인침과 보증은 그영의 일입니다. 이 셋을 혼잡하지 않습니다.
또한 반대로 그가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받는 것은 삼위를 구별하되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분리 불가를 참으로 믿는다면 어느 한 위격(성자)이 성육신 하셨을 때 다른 두 위격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입니다. 또한 어느 한 위격(그영)이 우리 안에 내주하실 때 역시 다른 두 위격이 함께 내주하심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제 1격만이 아니라 <삼위 전체>라는 로레인 뵈트너의 지적은 삼위의 분리불가를 믿는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서두에서 소개드렸듯이 어거스틴을 포함한 정통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각각의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에 해당되는 삼위일체론이 한국에만 오면 최삼경목사, 이인규권사, 차영배 교수, 심지어 포도가지/차영위 님에 의해 반복적으로 ‘양태론’으로 정죄되는 이 현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차영위 님은 자신도 틀릴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로 서두에 소개드린 정통 신학자들의 말들과 자신의 현재의 삼위일체관을 비교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