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들은 삼위일체를 균형있게 믿고 있다. 따라서 양태론자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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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들은 삼위일체를 균형있게 믿고 있다.
따라서 양태론자가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누가 다뤄도 어렵고,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진리이다. 그 결과, 모두 정통 신학자임에도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삼위’(三位)의 방면을 강조하다가 ‘삼신론’시비에 연루되었고, 어거스틴은 ‘하나’의 방면을 강조하다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삼위일체 토론에서는 어느 특정 표현만으로 성급히 정죄하기보다는, 전반적인 틀에서 성경적인 삼위일체의 요건들(삼위, 동일 본질, 삼위께서 구별되나 분리 불가하심 등)을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합당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지방 교회측과 김홍기 목사는 삼위일체에 관해 주로 다음 세 방면에서 치열하게 토론해 왔다.
첫째, 성육신의 주체는 당연히 ‘제 2격’ 아들 하나님이시다(갈4:4). 그런데 이 분은 또한 구별되나 분리 불가하신 성부와 성령도 포함되신 ‘온전한 하나님’(fully God), 즉 ‘삼위 전체’이시기도 한 것인지(골2:9, 딤전3:16)(지방 교회측), 아니면 성부와 성령은 제외되신 ‘제2격만’(1/3 하나님)이신지(김홍기 목사)에 관한 대립이다. 사실 이 점이 가장 근본적인 쌍방의 입장 차이이다. 그런데 웨인 그루뎀의 바른 지적처럼,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후자라고 오해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삼신론적인 경향을 갖는다.
둘째, ‘구별’되신 세 위격들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를 유지하시는 방법이 ‘동일 본성’의 공유만인지(김홍기 목사), 아니면 ‘세 위격들 간의 상호 내주’(페리코레시스)(요14:10-11)가 더 필요한 것인지(지방 교회측)에 관한 대립이다. 참고로 김 목사는 자신도 상호 내주를 믿지만, 지방 교회들처럼 위격들 간의 내주가 아닌 신성한 동일 본성 간의 내주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위격들’ 간의 상호 내주와 ‘본성’ 간의 상호 내주와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 목사의 주장은 ‘상호’(mutual)(내주)라는 단어의 뜻을 고려해 볼 때, 최소한 신성한 본성이 둘 이상이라야만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셋째, 또한 성경 본문 자체가 ‘성자가 성부이시고’(사9:6), ‘성자가 성령이시다’(고후3:17)라고 위격을 동일시 할 때, 그것을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로 볼 것인지(지방 교회측), 아니면 세 위격 간의 ‘동일 본성에 따른 동일시’로 볼 것인지(김홍기 목사)에 관한 대립이다. 그런데 ‘동일 본성을 공유하니 성자는 성부’라는 식의 김 목사의 주장은 ‘본성과 위격의 혼동’이라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낸다.
위와 같이 그동안의 관련 토론 쟁점들을 최대한 쉽게 요약했어도 사용된 전문 용어 자체가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은 어느 쪽이 맞는지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 있다. 따라서 어떻게 제한된 지면에 그동안의 쟁점들을 좋은 순서와 쉬운 표현으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인지가 우리가 당면한 약간의 어려움이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토론 당사자는 물론 모든 독자들에게도 계시의 영과 영적인 지혜와 총명을 주사, “(삼위) 하나님”(엡1:17)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해 주시기(골1:9-10)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묵직한 주제에 대한 재재반론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1. 지방 교회측은 정통 삼위일체의 명제들인 ‘구별된 세 위격들’과 ‘동일 본성의 공유’를 확실히 믿고 고백한다.
초대 ‘성경 문답자’(Bible Answer Man)인 월터 마틴 시절부터 CRI 저널 편집장을 맡아 오고 있는 엘리옷 밀러는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자신의 특집 논문에서 한 마디 솔직한 말을 했다. 그것은 CRI가 과거에 지방 교회들을 양태론이라고 공격할 때도 지방 교회측이 진짜 양태론자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는 것 때문에, “자신은 개인적으로 편치 않았다.”라고 고백한 것이다(우리가 틀렸었다, 16쪽).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들이 그들이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는 증거라고 같은 지면에서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셋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히 동등하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시고, 동시에 존재하신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한국복음서원, 2001, 42쪽).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세 위격이시지만 오직 한 본질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위격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본질은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위격에서는 셋이나, 본질에서는 모두 하나이시다(위트니스 리, 위의 책, 25쪽).
양태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양태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이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멈추었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자들은 신격 안의 세 분이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 각기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과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믿는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1991, 37-38쪽).
위에서 보듯이 위트니스 리는 그의 저술 여러 곳에서 1. 영원히 구별되시는 삼위(성부, 성자, 성령)가 계심, 2. 이 삼위는 동일 본질을 공유하심이라는 정통 삼위일체론의 기본 명제들을 고백하고 있다. 이 점은 심지어 현재 지방 교회측을 공격하고 있는 김홍기 목사 본인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지방 교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 정통 삼위일체론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어져서는 안 되고 본질이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시다”[진술 #1].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진술을 접할 때 누가 리와 지방 교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김홍기, 5번 토론글)
그렇다면 김홍기 목사가 위와 같이 자신의 입으로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진술을 접할 때 누가 리와 지방 교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실토해 놓고도 자꾸 다른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트니스 리 혹은 지방 교회측의 신론이 틀려서가 아니다. 오히려 김홍기 목사의 삼위일체 관련 몇 가지 핵심 개념 이해에 문제가 있고, 그 결과 그의 판단 기준에 치명적인 하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홍기 목사는 “신격의 셋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다른 믿는 이들을 향해 “일위 일체”를 믿는다거나 “경륜적 양태론”이라고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김홍기 목사가 왜 이러한 무리한 정죄를 하게 되었는지 위 세 가지 쟁점들을 중심으로 그 근본 원인들을 하나씩 다룰 것이다. 아울러 끝 부분에서 김홍기 목사의 문제점을 다루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말들 중에서 그동안 오해되었던 내용들을 간략하게 재차 해명하고자 한다.
2. 김홍기 목사는 ‘신격’ 개념(神格, 데오테스)에 무지하여 위트니스 리를 오해했다.
김 목사는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신격’ 개념에 무지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실토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한 본성’ 때문이며, 성경이 말하는 ‘한 신격’(골2:9, 데오테스, 스트롱번호 2320)도 ‘한 본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골로새서 2장 9절에 언급된 ‘한 신격’의 바른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바로 파악하는 것은 본 토론을 지켜보는 독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다.
“삼위 전체가 포함된 한 신격?” 이런 표현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정통신학이 삼위를 하나로 묶어서 ‘한 인격’ 혹은 ‘한 위격’ 혹은 ‘한 신격’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가? 이와 같이 삼위를 아우르는 개념은 하나님의 ‘본성’이지, 한 인격 혹은 한 신격 개념이 아니다. … 성경의 하나님을 ‘하나’로 표현하려면 한 인격의 하나님이 아닌 ‘한 본질의 하나님’으로 표현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성경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를 말하려면 ‘위격’이 아닌 ‘본질’이 되어야 한다(김홍기, 9번 토론글).
위에서 보듯이 김 목사는 전혀 다른 두 단어인 ‘한 위격’(persona)과 ‘한 신격’(theotees)을 뒤섞어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성경은 물론이고 정통 신학자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조까지 언급하고 있는 ‘신격’ 개념에 낯선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지방 교회측이 ‘세 위격들이 다 포함된 개념으로서의 한 신격’을 말하면 그것을 ‘일위 일체’라고 오해한다. 또한 그가 신격 전체가 성육신 하신 것을 말씀하는 골로새서 2장 9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삼위 중 오직 한 위격만 다른 두 위격들과 ‘분리되어’ 육신을 입으셨다고 착각한다. 이처럼 삼위의 동일 본성의 공유만 알고 삼위께서 또한 ‘한 신격’이심에 무지할 때, 김 목사의 신론은 웨인 그루뎀의 경고처럼 자기도 모르게 삼신론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약점을 갖게 된다. 이제 아래에서 ‘신격’(theotees)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곱 가지로 설명해 보겠다.
1) 성경: 골로새서 2장 9절은 성육신 하신 아들 하나님을 가리켜, “그분 안에는 ‘신격’(theotees)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For in Him dwells all the fullness of the Godhead bodily)라고 했다. 여기서 사용된 ‘신격’은 스트롱 번호가 2320이며, 신약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따라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Godhead를 사용한 다른 두 곳(행17:29, 롬1:20)의 원문은 ‘데오테스(theotees)’가 아니다. 참고로 위 구절에서 사용된 ‘신격’(theotees)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다 포함된 삼일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나, 사도행전 17장 29절의 ‘thios’(2304)와 로마서 1장 20절의 ‘thiotees’(2305)는 그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벧후1:4)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이 두 다른 용어들인 ‘신격’과 ‘본성’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 의자’는 나무(본성)로 되어 있지만, 저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을 때 그것을 가리켜 ‘나무’라고 하지 않고 ‘나무 의자’ 혹은 ‘의자’라고 말해야 어법에 맞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나무 의자’(한 신격)라고 해서는 안 되고, ‘나무’(한 본성)라고 해야 한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핵심 개념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2) 영어 사전: 김 목사는 “Merriam-Webster 사전에서 Godhead는 “divine nature or essence”(신적인 본성 혹은 본질)라고 정의한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영어 사전은 ‘Godhead’가 ‘신적 본성’을 가리키지만, 대문자일 경우에는 하나님(God)을 의미하고, Full Definition of God에서 그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 또는 통치자로 경배받으시는 … 지존자”를 가리킨다고 했다. 참고로 dictionary.com에서도 ‘Godhead’를 ‘우주의 최고 주권자, 성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성령의 거룩한 삼위 일체’라고 했다.
3) 헬라어 성경용어 전문 학자들: 헨리 알포드(Henry Alford)는 <Alford’s Greek Testament>(Vol.III) 골로새서 2장 9절 ‘데오테스’ 설명에서, 신격, 신성을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218쪽). 바인(W.E. Vine)도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p.p.330-331에서, ‘신성’(divinity)(롬1:20)과 신격(Godhead)(골2:9)은 구별(distinguished) 되어야 한다.’라고 하고, 덧붙여 “사도바울은 이 ‘theotees’를 아들의 신격(神格)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라고 했다.
4) 김석환 박사: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석환 박사는 본인의 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인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서, ‘신격’ 개념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혼란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신도게요서에 적힌 ‘Godhead’를 차영배 박사는 ‘신성’으로, 김길성 박사는 ‘신격’으로 각각 번역했는데, 본인은 “본 논문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Godhead를 헬라어 ‘theotees’에 상응하는 ‘신격’으로 번역했다”라고 말했다(341쪽). 같은 맥락에서 김 박사는 웨민 신조 2장 3절의 ‘Godhead’를 신성이 아닌 신격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5) 캅바도키아 교부들: 김홍기 목사는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Godhead를 신성으로 이해했다.”라고 주장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석환 박사는 위 책 241-245쪽에서 “신성과 신격의 구분”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닛사의 그레고리 등의 관련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소제목 자체가 김 목사의 위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어진 글에서 김 박사는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성(Deity)과 신격(Godhead)을 구분한다”고 전제한 후 아래의 닛사의 그레고리 말을 소개한다.
“우리는 신성은 모든 이름 위에 있으며, ‘신격’은 하나의 이름이다. 라고 말한다. 자. 동일한 것이 하나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242쪽).
김 박사는 이에 대한 설명에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격이 ‘본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지시한다고 생각한다. 즉 신격은 지정(appointment)의 문제인데, 본성은 지정의 방식에서 생겨나지 않으므로 신격과 본성이 구분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43쪽).
6)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 김홍기 목사는 재반론글에서, “본래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본성)의 단일성 안에 하나의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가 계시다 라고 번역하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이것을 자신들의 불법적인 ‘신격’ 개념을 따라 ‘단일하신 신격(神格)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라고 번역하고 개념을 바꾸어 버렸다.”라고 주장했다(김홍기, 재반론 #5).
그는 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영어 표현(Godhead)은 ‘하나님’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말하고, 영어 사전들이 그 단어를 ‘신적인 본성 혹은 본질’로 정의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사전적 정의가 ‘신적인 본성’이라면 그대로 번역해야 하고 ‘하나님’(God)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해당되는 단어는 ’God’이지 ‘Godhead’가 아니다. 또한 Godhead를 ‘하나님의 본성’으로 번역해도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의 번역을 따른다면, 해당 신조는 ‘하나님의 본성 안에, 하나의 본질과 삼위가 계신다’가 되는데, 김 목사는 ‘본성’과 ‘본질’을 동의어로 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 역시 문제가 있는 번역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느 모로 보나 김 목사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정확한 것일까? 아래와 같이 Godhead를 ‘신격’으로 번역한 것이 정확한 번역이다.
“단일하신 신격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동일하시다”(지방 교회측).
“신격의 단일성 안에 삼위께서 계시니 곧 한 실체요 한 권능이요 한 영원성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김석환 박사, 위의 책, 341쪽).
“단일한 신격(神格)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서 동일하시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박윤선 박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영음사, 23쪽).
김 목사의 주장과 달리, 위에서 보는 것처럼 박윤선 박사와 김석환 박사 모두 ’Godhead’를 지방 교회측과 동일하게 ‘신격’으로 번역했다. 그럼에도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Godhead를 ‘신격’으로 잘못된 번역을 하여” “이단 교리로 둔갑시켜 놓고” “박윤선 박사도 그렇게 번역했다며 후안무치한 교리 사기를 치고 있다”라고 적반하장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김 목사의 이런 표현은 결코 합당한 말이 아니다.
7) 고넬리우스 반 틸: 우리는 지난 토론에서 저명한 변증가인 고넬리우스 반 틸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전체를 포함한 개념으로서의 ‘신격’(또는 한 인격)을 언급했다는 것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신격 전체가 한 인격이시다'라고 단언한다. ...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하나의 수적인 동일성을 현시함을 신앙으로 간직해야만 한다. 심지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내에서 조차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숫자적으로 하나이시다 라고 주장해야 한다(Cornelius Van Til,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229).
위 내용은 위 출처 229쪽에서 인용한 것인데, 김홍기 목사는 자신의 반론글에서 엉뚱하게 100쪽도 넘게 차이 나는 348쪽의 내용을 가져와 “코르넬리우스 반 틸을 악용한 지방교회의 교리 사기”(김홍기, 토론글 9)라는 제목으로 반론했다. 우리는 김 목사가 왜 이처럼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변증하고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참고로 우리가 반 틸이 ‘신격 전체’를 ‘한 인격’으로 말하고 있다며 인용 소개했던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do assert that God, that is, the whole Godhead, is one person. … Over against all other beings, that is, over against created beings, we must therefore hold that God’s being presents an absolute numerical identity. And even within the ontological Trinity we must maintain that God is numerically one. He is one person. When we say that we believe in a personal God we do not merely mean that we believe in a God to whom the adjective "personality" may be attached. God is not 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27
위 영어 원문을 볼 때, 반틸은 분명히 “신격 전체(the whole Godhead)가 한 인격(one person)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 교회측이 “교리 사기”를 치고 있다는 김 목사의 말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또한 반 틸이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한 본질(본성)이 아니시다”라고 한 말은 하나님을 한 본성이라고 지칭해야 한다(예를 들어, ‘나무 의자’를 ‘나무’라고 해야 한다는)는 김 목사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이제 반틸이 말한 “신격 전체가 한 인격이시다”(God, the whole Godhead, is one person)라는 표현이 ‘신적인 본성’(김 목사)을 가리키는 말인지 아니면 ‘세 위격이 다 포함된 존재인 신격 전반’(지방 교회측)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런데 이것은 김 목사가 존경한다는 가이슬러의 아래 말이 그 해답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선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원칙을 적용하여, 반 틸이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주장 하는 것은 삼중 인격적인 존재(a tri-personal being)인 신격 전반(the Godhead overall)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이해하거나,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한 분(as on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와 세 분(as thre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가 정확히 똑같은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가이슬러의 ‘오픈 레터’ 반론문 중에서).
위 가이슬러의 말은 더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이 명백하다. 즉 반 틸이 위에서 한 말은 “삼중 인격적 존재인” “신격 전반”을 가리키거나 “세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홍기 목사는 가이슬러의 위 말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지방 교회측을 향해 “교리 사기” 운운한 것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참된 믿는 이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상에서 우리는 골로새서 2장 9절이 말하는 ‘신격’(theotees)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 전체를 포함하는 성경 용어임을 보았다. 따라서 김홍기 목사가 이 한 신격을 ‘일위일체’라고 오해하고 더 나아가 양태론이라고 정죄한 것은 큰 실수이다. 또한 해당 본문은 아들 하나님의 성육신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삼위를 포함한 신격이 육체 안에 표현되신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증거한다. 이 점은 또한 다음에 다룰 ‘세 위격간의 상호 내주(페리코레시스)’ 개념으로도 중첩적으로 뒷받침 된다.
3. 김홍기 목사는 ‘세 위격’ 간의 상호 내주(perichorsis)를 ‘동일 본성’ 간의 내주로 착각하여, 위트니스 리를 오해했다.
어거스틴과 달리, 삼위의 셋을 강조하는 신학 구조 위에 삼위일체론을 구축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성부만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세 하나님들이 계신다는 말인가?’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교부들은 이런 도전에 대해 현재의 김홍기 목사처럼 삼위께서 ‘동일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논리로 대응하지 않고, 아래에서 보듯이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주) 이론으로 후대에 지칭된 논리로 반박했다.
‘co-inherence’ 교리는 삼신론의 발발에 대한 정통신학의 응답이었다. … 이 교리는 사실상 4세기의 신학자들에게로 소급된다. ... Prestige는 또 “그것이 원래 기독론적인 용어였는데, 그것을 채택한 다메섹의 요한 때에 삼위일체 분야에로 전이되었다”라고 말한다(김석환, 위의 책, 249쪽).
위 짧은 인용문은 두 가지 사실을 전달한다. 첫째는 캅바도키아 교부들처럼 삼위께서 동일 본성의 공유하심을 믿어도 삼신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페리코레시스 이론이 “원래 기독론적인 용어”라는 말은 이것이 원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각기 다른 두 본성들 간의 ‘상호 내재’를 설명하는 용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를 삼위일체에도 원용하려면 기독론에서처럼 최소한 둘 이상의 대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볼 때 김 목사처럼 삼위의 한 동일 본성이 서로 안에 내주한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일 그가 기독론에서처럼 세 위격들 안에도 다른 두 본성이 서로 내주하심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이단교리이다.
이제 이런 기본 배경을 토대로 김 목사의 ‘동일 본성 간의 상호 내주’ 주장이 왜 억지에 불과하며 잘못된 것인지를 네 가지 방면에서 살펴보갰다.
1) 성경은 성부와 성자라는 ‘위격’ 간의 상호 내주를 말하고, ‘본성’의 상호 내주를 말하지 않는다.
소위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 내주 이론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는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라는 요한복음 14장 10절 등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안에 내주하시는 ‘주체’가 김 목사의 억지 주장처럼 동일 본성(nature)이 아니라 ‘내가’ 혹은 ‘아버지’와 같은 위격들(Persons)이시라는 점은 더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자명하다. 위 문맥에서도 성자가 말씀하심은 어떤 모호한 ‘본성’이 아닌 ‘성부’라는 분명한 ‘위격’이 성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상호 내주’는 ‘동일 본성의 내주’라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은 설 땅이 없게 된다.
2) 본성의 내주를 말하려면 기독론에서처럼 두 본성이 전제된 내주이어야 한다.
‘제임스 우맥’(James Womack)은 ‘제임스 기포드’(James D. Giffoed)의 페리코레시스를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에 소개된 내용에서, “그레고리의 때부터 다마스커스의 요한 때까지 ‘페리코레시스’에 대한 신학적인 용법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들에 관한 것이었다”라고 했다(From the time of Gregory until John [of Damascus] each theological use of perichorsis was in reference to the two natures of Christ)(Womack, “comparison”, 37). 그러나 ‘유사본성’조차 허용되지 않는 삼위일체론을 논하면서, ‘위격들’이 아니라 ‘동일 본성’이 ‘서로’(mutual) 안에 내주하신다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은 삼위 안에 기독론에서처럼 ‘복수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이것은 심각한 이단 사상인데 아마도 김 목사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이 든다.
3) 정통 신학자들이 말한 ‘페리코레시스’는 ‘본성의 상호 내주’가 아니라 ‘위격 간의 상호 내주’였다.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김석환 박사는 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년)에서 교부들의 ‘상호 내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상호 내주 개념: 독자들은 아래 내용이 각 위격 상호 간과 위격과 실체간의 공동 내재성을 모두 말하고 있는 점을 유의해서 보기 바란다.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간에 한 동일 실체가 전부 다 들어 있다. 각 위격 상호간에, 또 위격과 실체간에 공동내재성(immanence) 또는 상호 상통성이 있다.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그 성경적인 근거는 요한복음 14:10이다(29쪽).
둘째, 아타나시우스의 상호 내주 개념: 김 박사는 “아타나시우스가 요한복음 14:10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 하느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일곱 번 이상이나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라고 했다(위의 책 113쪽). 아래에서 언급된 ‘하나’ 혹은 ‘다른 것’이 동일 본성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떻게 하나가 다른 것 안에 포함될 수 있으며, 또 그 다른 것이 그 하나 안에 포함될 수 있는가? 또는 도대체 어떻게 더 크신 아버지가 더 작으신 아들 안에 포함될 수 있으신가? 또는 우리에 관하여 기록된바,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또 우리의 존재를 갖느니라(행17:28)는 말씀을 생각할 때, 만일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112-113쪽). … '성 삼위일체의 제 2격은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Whole or entire God)이시다'(114쪽) … 성자의 존재가 성부에게서 오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 안에 계심을 안다'(115쪽).
셋째, 불(Bull) 주교의 상호 내주 개념: 김 박사는 불 주교의 상호 내주 개념을 '삼신론을 비롯한 이단들의 교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리된 이론체계’로 설명하는 연장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셋’ 혹은 ‘서로 안에’라는 표현을 김 목사처럼 ‘동일 본성’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셋이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시고,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시며 서로를 관통하신다'(Defensio Fidei Nicaenae II, 9. 23)(세 위격의 이러한 불가분리의 행위에 대해서 훗날 신학자들이 ‘페리코레시스’라는 전문용어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어로 ‘co-inherence에 해당된다.)(250쪽).
넷째, 아우구스티누스의 상호 내주 개념: 김 박사는 위 책 299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일성과 삼위성을 논하면서 위격들의 ‘상호 내주’의 관점에서의 삼위일체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역시 ‘위격들’의 상호 내주이지 동일 본성 간의 상호 내주가 아니다. 본성을 가리켜 ‘그들’이라거나 ‘하나’ 혹은 ‘다른 하나’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만 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시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시다'(299쪽).
다섯째, 다메섹 요한의 상호 내주 개념: '...각 위격은 다른 위격 안에서...존재를 가지신다'(위의 책, 300쪽).
위에서 본 것처럼 캅바도키아 교부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다메섹 요한 등 정통교회 삼위일체 수립에 공헌한 정통 교부들의 상호 내재 개념은 한결같이 ‘위격들 간의 상호 내주’이지 ‘동일 본성 간의 상호 내주’가 아니었다. 동일 본성은 ‘공유’하는 것이지 결코 ‘상호’ ‘내주’하는 것이 될 수 없다.
4) 김명용 박사의 상호 내재 개념: 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김명용 박사도 아래와 같이 세 위격이 동일한 하나의 본질(우시아)을 공유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추가하여 ‘페리코레시스’(상호침투)를 “세 하나님이 하나 되심”의 안전 장치로 소개하고 있다. 김홍기 목사는 삼위의 동일 본질을 믿는 정통 신학자들 사이에서 왜 이처럼 추가적으로 ‘페리코레시스’ 이론이 진지하게 논의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이 세 하나님은 상호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 이 상호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요14:7-11 참고)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김명용,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페리코레시스’(상호 내주)는 동일 본성의 상호 내주라는 김홍기 목사의 주장과 달리, 세 위격들 상호 간의 상호 내주 혹은 상호 관통임을 보아 왔다. 이러한 상호 내주는 위 김명용 박사의 언급처럼 1) 성자와 성부의 동일시, 2) 성자와 성부의 경륜적인 사역의 동일시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효과는 3) ‘페리코레시스’를 통하여 정통 삼위일체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인 ‘세 위격들은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음으로 하나의 신격(one God)을 가지실 수 있다’는 것이다. 4) 또한 ‘상호 내주’하시는 특성으로 인해 세 위격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심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다른 두 위격도 성자 안에서 함께 오심으로 성자는 ‘삼위 전체’이시기도 하다. 이 점은 다음에서 다룰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와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4. 김홍기 목사는‘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무지함으로, 위트니스 리를 오해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일반 독자들은 이런 전문 용어들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토론 주제 자체가 불가피하게 전문 용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 이 점 미리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이 단락을 시작하겠다. 백충현 박사는 자신의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새물결 플러스, 2015) 서문에서, 위 두 개념을 “일반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일체 내의 내적인 관계들을 가리킨다. 반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 구속, 완성의 활동을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21쪽)라고 각각 정의했다. 이제 이렇게 정의된 주제가 연관된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해 서론적인 언급을 한 후에 이어서 관련 성경 본문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1)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정의에 대한 약간의 보완 설명
우리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위 백 박사의 정의에 조금 더 사족을 붙여 보겠다. 내재적(혹은 본질적) 삼위일체(the Essential Trinity)는 하늘과 땅과 사람(슥12:1)을 포함한 그 어떤 피조물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계셨을 때 그분은 어떤 존재(Being)이신지를 다룬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공인된 명제는 1) 한 신격(神格)이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영원토록 구별되나 분리됨이 없이 존재하신다(삼위가 상호 내주하심). 2) 삼위께서는 동일 본성을 공유하시며 존재하신다(본질적으로 어떤 ‘종속 관계’도 없음)라는 것이다.
반면에 경륜적 삼위일체(the Economical Trinity)는 본질적 삼위일체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신 뜻을 성취하려고 일(Work)하시는 방면을 다룬다(엡1:9-10). 참고로 그분의 일은 크게 볼 때 창조(창2:2), 구속(요19:30), 그리고 그분의 몸이자 하나님의 거처인 교회의 건축(마16:18, 고전14:4)이다. 이에 대한 성경 근거는 에베소서 1장 4-5절인데, 그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한 단체적인 아들들 즉 ‘휘오데시아’(5206)로 만드시는 것이다(갈4:4-5, 롬8:23). 정통 교부인 아타나시우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게 하기 위함”(https://www.localchurch.kr/2663)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2)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관계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설명하는 이러한 두 개념 간의 관계는 무엇일까? 위 백충현 박사는 지금까지의 관련 자료들을 철저하게 수집(책 뒤의 도서목록 참조)하여 분석한 후, 양자의 관계를 총 일곱 가지(상호상응, 동일, 종말론적 일치, 더 큼, 침지, 흡수, 상호포월)로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위의 책, 22쪽). 우리는 여기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추가적으로 강조하고 싶다.
경륜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삼위의 존재와 본질은 변치 않으심: 위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특성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심으로 경륜적인 단계인 성육신, 죽음, 부활 등을 거치더라도 결코 손상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부께서 성자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서로 안에 거하시는 상호 내주의 특성이 깨지고 성자가 성부와 ‘분리되어’ ‘홀로’ 오시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분리 불가인 다른 두 위격들은 아들 하나님 안에서 함께 오신다. 이러한 이유로 주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께서(경륜적 삼위일체 방면)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본질적 삼위일체 방면)”(요8:29, 16, 16:32도 참조) 라고 하시고, 또한 지상 사역시 “내 안에 아버지가 거하신다”(본질적 삼위일체 방면)(요14:10)라고 말씀할 수 있으셨다. 김홍기 목사는 위 ‘내 안에 아버지가 거하신다‘라는 말씀을 ‘본성’의 상호 내주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 안에 내주하시는 ‘아버지’는 ‘본성’이 아니라 ‘위격’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것은 상식이다.
존재의 동등성, 역할의 종속성: 웨인 그루뎀은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존재론적인 동등함과 경륜적인 종속” 혹은 “존재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역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노진준 번역, 361쪽). 또한 그는 “놀랍게도 최근에 삼위 간의 종속적인 역할을 부인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부에 대한 영원한 종속을 솔직히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 종속은 질서와 직분과 기능의 종속이지 본질의 종속은 아님을 믿는다”고 한 A.H. 스트롱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위의 책, 362쪽). 이런 말은 하나님을 이해할 때 위 두 방면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삼위일체 진리 인식에 큰 혼란이 있게 될 것을 암시해 준다.
교회와 신앙측도 최근에 이 문제와 관련된 앨버트 몰러 박사(남침례교 신대원 총장)의 글을 기사화 했다(2016, 7.8일자). 우리는 삼위일체의 위 두 방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을 때, 김홍기 목사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바른 신앙의 소유자들을 부당하게 비판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
3) 경륜적인 삼위일체 관련 성경 본문들에 대한 검토
지금부터는 그동안의 토론 과정에서 쟁점이 되어 왔던 성경 본문(사9:6, 고후3:17)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성취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몇 개의 본문들(요1:14, 골 2:9, 7:39, 고전15:45, 계5:6)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구절과 뒤의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성경 본문 자체가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한 대표적인 구절이다. 노먼 가이슬러를 포함한 다수의 신학자들은 금기사항처럼 여기는 ‘위격간의 동일시’를 피하려고 이 구절에 대해 전후 문맥을 무시하고 무리한 해석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진리 왜곡일 뿐이다. 우리는 본 토론 중에 일관되게 이 본문을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라고 주장해 왔다. 자세한 내용은 지방 교회측이 펴내는 ‘확증과 비평’(A&C)에 소개된 케리 로비쇼우(헬라어 박사)의 ‘성경적 삼위일체의 몇 가지 난제들’(http://www.btmk.org/proof/?mode=proof_lst&p=1&i=69&f=&w=)이라는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둘째, 고린도후서 3장 17절: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의 본문이다. 즉 이 본문은 주님과 그 영께서 ‘기능적으로 동일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의 ‘주님’은 구약의 ‘야훼’이며 신약의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 가이슬러를 반박하며, 여기의 주님을 지방 교회측처럼 ‘예수 그리스도 ’로 보고 있는 다수의 정통 신학자들을 소개했다(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responses/Geisler-Rhodes/scholars-on-Christ-being-the-Spirit.html). 그리고 같은 취지로, 주님을 ‘야훼’(Dunn의 견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 회장을 역임한 박형용 박사의 논문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럼에도 김홍기 목사는 이러한 쟁점에서 크게 벗어나서, “박형용 박사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를 말하면서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지방교회는 ‘위격의 경륜적 동일시’라는 말을 사용하나 실제로는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전환(轉換)’ 및 ‘위격의 동일함’을 말한다”(김홍기, 재반론 #6)는 등 엉뚱한 말로 반응했다. 그러나 “위격의 진화” 운운은 뒤에서 보겠지만 사실이 아니며, 단지 김 목사 혼자의 착각이요 오해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박형용 박사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본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문맥을 통해서 증명하였다. 문맥의 뜻에 비추어 생각할 때 퀴리오스는 여호와를 가리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https://www.localchurch.kr/23379)라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였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의 성육신의 주체가 ‘아들 하나님’(갈4:4)이시며, 동시에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한 신격(골2:9)이심으로 이 분은 ‘삼위 전체’이시기도 하다.’라고 말해 왔다. 이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쟁점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로레인 뵈트너: 칼빈주의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 역시 다음과 같이 삼위 중 ‘특정 위격’(성부)을 가리켜 ‘삼위 전체’(Triune God)이시라고 지방 교회측과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주기도문의 예에서처럼, 우리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것은 배타적으로 삼일성의 첫 번째 위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Phillipsburg, NJ: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47), p. 107)
그런데 이에 대해 김홍기 목사는 뵈트너가 아버지가 삼일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위격’이 아닌 신성한 ‘본성’을 가리킨다고 반론했다. 그러나 김 목사의 이런 주장은 “Father … refer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라는 영어 원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금방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참고로 여기서 ‘one God’은 ‘한 신격’(골2:9)의 의미이며, 김 목사의 오해처럼 ‘한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뵈트너는 또한 위 책 바로 다음 장(p.109)에서 아래와 같이 ‘특정 위격은 삼위 중 한 위격임과 동시에 세 위격 전체이기도 하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지 않으신다’라는 취지로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의 같은 주장을 지지해 주고 있다.
The singular pronouns I, Thou, He and Him are applied to each of the three Persons; yet these same singular pronouns are applied to the Triune God who is composed of these three persons. Hence too much stress must not be laid on the mere term.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can be distinguished, but they cannot be separated.
장막을 치심: 위 요한복음 1장 14절에 따르면, 주 예수님께서 육체가 되신 것은 그분 자신이 이 땅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집’(장막)이셨음을 말해 준다. 즉 개역 성경이 위 구절에서 ‘거하시매’라고 번역한 단어는 원문이 ‘스케노오’(4637)로서 계시록 7장 15절의 ‘장막을 치시리니’와 같은 단어이다. 이 외에도 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신 사실은 “성전된 자기 육체”(요2:21)와 “이 예수를… 화해 장소로 세우셨으니”(롬3:25)라는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특히 개역 성경이 ‘화해 제물’로 오역한 로마서 3장 25절의 ‘힐라스테리온’(2435)은 같은 단어가 쓰인 히브리서 9장 5절처럼 ‘속죄소’(시은좌) 혹은 ‘화해 장소’로 번역되어야 한다(변종길 박사도 동일한 이유로 이 본문의 오역을 지적했다(https://www.localchurch.kr/2638).
따라서 지상 사역시의 하나님의 장막(성전)이셨던 주 예수님 특히 그분의 인성 안에는 성자 하나님만 아니라 하나님 전체, 즉 성부와 성령이 다 포함되신 삼위 전체가 내주하셨다고 보아야 한다. 즉 주기도문의 성부께서 제 1격이시자 또한 삼위 전체(로레인 뵈트너)이신 것처럼, 성육신하신 주 예수님도 제 2격이시자 삼위가 다 포함되신 ‘완전한 하나님’(fully God)이시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 영도 제 3격이심과 동시에 삼위 전체이시다. 왜냐하면 한 신격의 하나님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세 위격들이시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개념은 김홍기 목사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일관되게 제시된다. 즉 그가 어떤 한 위격을 언급할 때 그 위격은 김 목사의 착각처럼 1/3하나님이 아니라 삼위 전체를 가리킨다. 이 점을 바로 이해한다면, 현재 김 목사가 말하는 소위 ‘위격의 진화’ 혹은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전환’은 구조적으로 생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왜 김홍기 목사는 이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에서 다룰 요한복음 7장 38-39절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 전달하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그에게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넷째, 요한복음 7장 38-39절: 나를 믿는 사람은 …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위 말씀이 다루고 있는 내용인, 우리가 믿을 때 어떤 영을 영접했는가 하는 문제는 언뜻보면 쉬운 질문같다. 그러나 사실 위 구절은 대표적인 난해 구절 중 하나이다. 즉 사본학적인 논쟁도 있고 해석도 다양하다. 결론은 위 본문이 말하는 ‘그 영’(the Spirit) 혹은 그 영(Spirit)은 제 3격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은 세 위격 전체와 영광스럽게 된 예수님의 인성이 포함된 ‘복합적인 영’이다(빌1:19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 출 30장의 ‘거룩한 관유’ 참조). 이 점은 뒤의 고린도전서 15장 45절 설명에서 조금 더 보충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구절을 심도있게 검토한 두 믿을 만한 신학자와 김병국 교수의 견해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앤드류 머레이: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이 쓴 <그리스도의 영>(기독교문서선교회, 2000년) 제 5장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에서 위 해당 본문을 깊이 다뤘다. 그가 한 말들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 아들이 하늘로 되돌아가셨을 땐 하나님의 독생자로서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이미 예전과 같은 존재는 아니셨다”(41쪽). “마찬가지로 오순절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영도 실상 새로운 존재이셨다”(42쪽). “그는 영광 받으시는 예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인자의 영이시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렇게 되실 수 있었다”(42쪽). “그래서 성령은 신인(神人)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임하실 수 있었다”(43쪽).
변종길 교수: 고신대 총장인 변종길 교수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즉 그는 교부들과 개혁 신학자들이 이 요한복음 7장 38-39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최대한 원출처를 참고하여 소개하고, 본인의 의견도 결론적으로 제시했다. 그의 해당 논문은 현재 <성령과 구속사>(개혁주의신행협회, 2006)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김병국 박사: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구절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the Spirit was not yet)라는 말이 ‘그 영의 ‘존재’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영의 어떤 ‘기능’의 유무를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선입관을 떠나 본문 자체만을 고려할 때, 이것은 앤드류 머레이처럼 ‘존재’ 의 유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네덜란드 캄펜 신학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김병국 박사(백석대)도 자신의 “요한복음 성령론의 새로운 해석:역사적 배경을 기초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동일한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필자가 본 바로는 모든 주석가들은)이 부분(요7:38-39)을 성령의 역사의 ‘정도’의 차이로 해석한다. 즉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 당시에도 성령은 있었으나 오순절 이후의 성령과는 그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7:39은 ‘성령의 역사가 아직은 미약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말씀한다. 즉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는 것이다(김병국, (백석대) 진리논단 제13호-기독교 학부 편, 140-141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영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 7장 39절의 성취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의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그 해답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의 ‘the Spirit’처럼 ‘holy’라는 말이 원문에 없어도 개역 성경처럼 무조건 ‘성령’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것이 제 3격만을 가리키는 영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그 영’은 제 3격이 아니라 위 요한복음 7장 39절이 말하는 ‘복합적인 영’이다. 킹제임스 흠정역은 이것을 ‘성령’으로 번역하여 ‘성’자를 이태릭체로 표시했다.
다섯째,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위 구절에서 ‘생명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과연 무엇인지는 역시 난해 구절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 영은 마지막 아담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후의 영이시다.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은 누구이신가? 그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성육신하셨던 주 예수님(성부, 성자, 성령)이시다(요1:14). 그렇다면 ‘마지마 아담’(요1:14)과 ‘생명주는 영’(고전15:45)의 같은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같은점은 두분 모두 삼위 전체(성부, 성자, 성령)이시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주로 인성(humanity)에 있는데, 전자는 죽음 전의 인성의 상태라면, 후자는 그 인성이 죽음과 부활 후 ‘죽지 않는 인성’(계1:18) 즉 ‘영광의 몸(인성)’(빌3:21)의 상태가 되신 것이다.
여섯째: 요한계시록 5장 6절: “한 어린양이 섰는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더라. 그(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5:6).
김홍기 목사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위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답변했다(김홍기, 재반론 #5). 그렇다면 그리스도라는 “일곱 영”은 누가 언제 이 땅에 보내셨는가? 그리고 제 3격 성령과 ‘일곱 영’의 관계는 무엇인가? 김 목사는 이러한 추가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이상에서 압축적으로 요약한 내용들이 위트니스 리가 이 구절들(요1:14, 고전15:45)을 토대로 삼위일체의 어떤 경륜적인 국면의 전환를 언급할 때의 참된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기본 개념을 염두에 두고 김홍기 목사가 말한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전환(轉換)’ 및 ‘위격의 동일함’이라고 오해한 부분들을 하나씩 해명 또는 반론해 보도록 하겠다.
(1) “…위에서 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 되셨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위격의 진화(進化)’ 혹은 ‘위격의 탈바꿈’ 혹은 ‘위격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김홍기)
반론: 위 내용은 위트니스 리가 고전 15:45에 관련하여 언급한 것의 비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본질적 삼위일체의 제 2격이 제 3격이 되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마지막 아담’을 삼위 전체로 보고 ‘생명주는 영’도 삼위 전체로 보고 있음으로 이런 구조에서는 위격이 ‘진화’하거나 ‘탈바꿈’ 하거나 ‘전환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되셨다’는 말은 ‘위격의 진화’와 무관하고 주로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인성’이 부활 후에 ‘영화롭게 되신 것’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앤드류 머레이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거듭날 때 받은 영은 바로 이러한 영이시다. 단지 제 3격 성령만이 아니다.
(2) 리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위(three Persons)가 아닌 세 가지 단계(three stages)라고 표현한다. … 위격의 진화(그리스도가 성령이 됨)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화와 동일시된다. 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라.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즐기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가지 단계’(three stages of one God)인 것이다. 예를 들면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된다. 한 본질이 세 가지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증기 단계가 될 때 그것은 우리가 들이마실 수 있게 된다.”(김홍기)
반론: 이 역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본질적인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께서 거치신 경륜을 말하는 것이지, 삼위의 존재 자체가 세 단계로 발전했다는 말이 아니다. “세 가지 단계”라는 말은 삼위께서 1) 육신을 입으시기 전, 2) 육신을 입으신 후, 3) 육신이 부활 후 죽지 않는 인성으로 변형되신 단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얼음-물-수증기’ 비유도 변치 않으시는 한 분 삼위 하나님께서 입으신 ‘육신’(인성)이 거친 단계를 설명한 것일 뿐, 신성한 위격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죽고 부활하신 과정을 ‘진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3) 워치만 니의 입을 빌려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일한 분이라고 말한다. 즉 이것은 ‘위격의 동일함’을 말하는 것이다(워치만 니는 찬송가 490장 5절에서 ‘주님, 당신은 전에 아버지로 칭함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칭함을 받으신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찬송에서 주님을 성령으로뿐 아니라 아버지로도 칭했다(김홍기)
반론: 김 목사가 위 영어 찬송가 490장의 5절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 앞의 3절은 “이전에 성부 오실 때 예수 안에서 오시듯 지금 주님 영 안에 왔네”라고 함으로써 본질적인 삼위일체 내에서는 세 위격들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위 5절에서의 위격의 동일시는 ‘경륜적인 동일시’(사9:6, 고후3:17)로 보아야 한다.
(4) 즉 그리스도는 삼위이시고 삼위는 그리스도이시다. 일위(一位)가 삼위(三位)이며 삼위가 일위라는 말은 결국 양태론의 개념이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리의 말에 의해 확증된다. ”하나님이 육체가 되셔서 여러 과정들을 거치시고 마침내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시기 위하여 부활로 들어가셨다. 그 생명을 주시는 영은 그의 신성과 인성 및 그의 성육신과 인간으로서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Witness Lee, Vessels Useful to the Lord, Chapter 12, Section 1)(김홍기)
반론: 이 역시 힐라리우스, 로레인 뵈트너 등의 정통 신학자들과 성경(골2:9, 요8:29, 고전8:6)이 가르치는, 어느 한 위격은 특정 위격임과 동시에 삼위 전체라는 점을 무시하고, 김 목사가 특정 위격은 1/3 하나님만 이시라는 자신의 이단 사상을 붙들어서 온 오해일 뿐이다. 김홍기 목사는 성급한 정죄를 그치고 요한복음 7:38-39, 고린도 전서 15:45가 전달하는 그 영 관련 논의들을 좀 더 시간을 들여 깊이 연구해 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5. 토론 중에 문제 제기 되었던 위트니스 리 본문 등에 대한 간략한 추가 해명
아래 내용들은 이미 상당 부분이 해명된 것들이지만 토론을 잠정적으로 매듭짓는 이 지면을 통해서 재차 간략하게 추가 해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1)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또한 성령이시다. ... 그리고 아들이실 뿐 아니라 영원한 아버지이신 주 예수님.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고, 그는 또한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할렐루야!(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73), pp. 18-19)
해명: 위 표현은 이사야 9장 6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이 말하는 경륜적인 방면의 위격의 동일시에 해당된다.
2) 성령이시고, 그분은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이시며 성령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다(Witness Lee, The Clear Scriptural Revelation Concerning the Triune God)
해명: 세 위격을 포함한 한 신격(골2:9)이신 분은 성부요 성자요 또한 성령이시다.
3) 그래서 그[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격만 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전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제 1위격이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제 2위격이신 아들이시다. 그리고 그는 제 3위격이신 성령이시다(So He is not only the second person of the Triune God; He is also the whole God. He is the first person, the Father; He is the second person, the Son; and He is also the third person, the Spirit.). (Concerning the Triune God—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 Chapter 1, Section 12)
해명: 위 말은 삼위의 ‘특정 위격’은 ‘삼위 전체’이시기도 하다는 명제를 믿으면 쉽게 해결되는 내용이다. 즉 로레인 뵈트너가 성부가 제 1격만이 아니라 삼위격 전부이시다 라고 한 말과 다를 것이 없다. 한 위격 안에는 삼위 전체가 내재하신다.
4) 아들은 아버지로 불리워진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이심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아버지로 불리워지시지만 참으로 아버지는 아니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로 불리워지심에도 불구하고 어찌 아버지가 아니실 수가 있는가? ... 아무도 그분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곳에서(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실 때 그분은 아들이시다. 그래서 한 아들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하신 아버지”로 불리워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바로 이 아들은 바로 그 아버지이시다(Witness Lee, The All-Inclusive Spirit of Christ, Chapter 1, Section 1)
해명: 이것 역시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의 동일시를 말한다. 따라서 이런 글은 다음과 같이 위트니스 리가 본질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는 자료와 함께 보아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셔서 이 땅에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위트니스 리, 장로훈련 제 3권, 한국복음서원, 1994, 112쪽).
5) 가이슬러 박사는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이 ‘경륜적 양태론’ 이단 교리라는 것을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충분히 증거했다. ‘아들이 역사하실 때에는 아버지도 되시고 성령도 되신다’는 지방교회의 말은 ‘경륜적 일위일체론’(一位一體)’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지방교회는 ‘경륜적 양태론’을 신봉하고 전파하고 있다(김홍기, 재반론 #7).
해명: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아들이 아버지이시라고 불리우시고’(사9:6), ‘주님이 그 영이시다’(고후3:17)라고 지칭되는 것은 성경 말씀 자체이다. 지방 교회의 말이 아니다.
6) 성경과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는 (그 정체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나 경륜적으로나 (영원히) 구별되신다 고 주장한다(김홍기, 재반론, #8).
해명: 위 이사야 9장 6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위격의 구별이 성경에 의해 무시된 대표적인 구절이다. 따라서 ‘경륜적으로도 구별이 유지된다’는 말은 맞지 않다.
6. 김홍기 목사의 판단하는 잣대는 과연 문제가 없는가?
김 목사는 세 위격을 분리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우리는 토론 과정에서 몇 개의 성경 본문들을 제시하고 그 내용은 각각 어떤 위격에 해당되는지를 물었다(지방 교회측 반론글#5 참고). 그러자 그는 자신의 재반론에서 아래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1)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를 의미한다”(김홍기, 재반론 #5).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냈으니”(요3:16)라는 말씀에서 독생자를 보내신 주체는 누구이신가? 성부이신가? 아니면 삼위 전부이신가? 김 목사의 말대로라면 ‘아버지’가 아닌 ‘삼위 전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God was manifested in the flesh(KJV), 딤전3:16)라는 말을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육신을 입으셨다고 하면, 양태론이라고 정죄한다. 한 마디로 뒤죽 박죽이다.
2) “성부 자신만을 말할 때에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쓴다.”(김홍기, 재반론 #5).
그렇다면 “비록 하늘이나 땅에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의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5-6)라는 말씀은 성부만 참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된다. 이처럼 오직 성부만 하나님이라는 사상은 여호와의 증인들과 동일한 심각한 이단이다.
이와 달리 차영배 박사는 같은 본문에 대해, “아들이나 성령이 제외되지 않는 한, 성부가 유일한 하나님이다”(179쪽)라고 어거스틴이 한 말을 소개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총신대출판사, 1986, 179쪽). 또한 그는 같은 책에서, “성부만이 유일신이라는 말과 유일신이 곧 성부라는 말은 서로 다르다. 후자의 경우 성자가 제외되지 않는다”(154쪽)라고 한 정통 교부 힐라리우스(Hilarius)의 말도 소개했다. 정통 신학자인 로레인 뵈트너도 주기도문에서의 성부는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러한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는 ‘성부’는 ‘제 1격만’을 가리킨다는 김 목사의 주장과 다르다. 그렇다면 누가 이단인가?
이 외에도 김홍기 목사는 토론 과정에서 다음 두 가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했다.
3) 하나님을 단수로 말할 때는 언제나 ‘위격’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을 가리킨다(김홍기)
그렇다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라는 말씀에서 언급된 ‘나 여호와’는 신격이 아닌 신성한 ‘본성’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한 개의 나무 의자는 ‘의자’가 아니라 ‘나무’라고 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부 하나님만’으로,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알라’라고 읽는 것처럼 비진리이다.
4) 동일 본질을 가지셨으므로 성자는 곧 성부이시다(김홍기)
지방 교회측은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며 자신과 성부를 동일시하신 것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상호 내주를 토대로 하셨음을 제시했다(요14:8-11). 그러자 김 목사는 반론문에서, 아래 말을 근거로 ‘성자가 곧 성부’이심은 ‘상호 내주’가 아닌 ‘동일 본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김홍기, 토론글 #9).
성부와 성자의 ‘essentia’[본성]”가 서로 하나임은 요한복음 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 ... 그러므로 확실히 성부와 성자께서는 본성이 하나이시기 때문에 서로 하나이시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97).
그러나 이런 김 목사의 주장이야말로 위격과 본성을 혼동한 이단 사상이다. 왜냐하면 세 위격이 동일 본성을 공유하심으로 “성자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다’(요10:30)라고 할 수는 있어도 그러므로 ‘성자=성부이시다’ 라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동일 본성을 토대로 성자가 곧 성부라는 김 목사의 주장이야말로 부당하게 “위격의 동일함”을 주장하고, “위격과 본질을 혼동하는 이단 교리”이다.
엘리옷 밀러도 지적했지만, 위트니스 리는 김 목사와 달리 요한복음 10장 30절 주석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지만, 그분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나’와 ‘아버지’의 구별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점을 무시한다면 양태론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우리가 틀렸었다, 17쪽,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34쪽).
5)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은 본성을 분리시키는 삼신론 이단 경향을 갖는다고 정죄하는 김홍기 목사
김 목사는 자신이 직접 번역하여 소개한 다음과 같은 웨인 그루뎀의 말 중에 언급된 “분리되지 않는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 본성’으로 읽어야 한다 라고 고집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해 나가는 경향이 있는 지도 모른다”(p.248). 즉 웨인 그루뎀은 지금 삼위가 공유하시는 ‘본성의 분리’를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특이한 해석은 (노먼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를 포함한) “오늘날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삼위 일체의 동일 ‘본성의 분리’ 성향을 띤 삼신론적 견해를 갖는 이단이 되게 했다. 이것은 ‘being’이란 단어는 항상 ‘본성’으로 읽어야 한다는 그의 고집이 초래한 결과이다. 참고로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한 바 있는 노진준 목사가 번역하고 은성 출판사에서 출간된 해당 부분의 한국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비록 현대에는 삼신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지만,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의식중에 삼신론적인 견해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독특한 인격성은 인정하지만 나누이지 않은 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일성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상, 노진준 번역, 은성, 2009, 356쪽).
결론적으로, 웨인 그루뎀의 진단에 의하면, “오늘날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분(혹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본성’-김홍기목사 견해)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일성”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여 무의식 중에 “삼신론적인 견해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조직신학(한글 번역판), 356쪽). 또한 유해무 교수의 추천사 내용에 따르면, 위 백충현 박사는 자신의 책에서 “오늘날 부흥기를 맞은 삼위일체론이 여전히 해결해야 할 존재론적, 인식론적 과제는 “신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면에 와야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위 두 가지 진단에 공감한다. 또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갖게 되고, 인식론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이 소홀히 여겨지게 된 근본 원인이 김홍기 목사처럼 세 위격들을 각각 분리시켜 생각하는 신학 이론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오직 제 3격만 내주가 가능하고 1격과 2격의 하나님은 저 하늘에 남아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한분으로서의 통일성이 동일 본성의 공유 외에, 한 신격(골2:9), 삼위의 상호 내주(요14:10-11)에 따라 구별은 되나 분리는 불가능한 특성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을 무시한 데서 온 매우 애석한 결과일 뿐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 결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주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요일5:11)고 성경은 말하나,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은 저 하늘에 머물 뿐임으로 거듭남의 진리가 모호하게 된다(요3:6). 또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골1:27)께서 우리의 자기 부인을 통해(갈2:20, 마16:24) 사람의 거듭난 영(고전6:17)에서 마음에까지 거처를 확대하시는 것(엡3:17)이 성화 과정임에도 첫단추가 제대로 꿰어지지 않다 보니 이 부분 역시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이 결여된 채 단지 교리와 지식 차원에서 거론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들”(고전3:1)만 양산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생명되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골3:4, 엡1:23)이지만 충만되셔야 할 그리스도의 위격은 저 하늘에만 머물고 계심으로, 머리이신 주님께서 “나”(행9:4-5)라고 동일시 하신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새사람의 몸인 교회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비유”일 뿐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현재 김홍기 목사가 주장하는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심각한 후유증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우리는 이번 토론을 통해, 우리를 ‘구속주’(벧전2:24)와 ‘생명’(요11:25)과 ‘남편’(고후11:2)이 되시려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주는 영이 되시어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는 제 2격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삼위 전체, 즉 온전한 하나님(fully God)이시다(사54:5)라는 인식이 한국 교계 안에 새롭게 인식되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자신을 저 멀리 하늘에만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조에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서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충만케 해 가시는 하나님의 신약경륜의 알맹이를 쏙 빠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 신약 성경(특히 서신서, 계시록)의 가르침은 지식과 교리화 혹은 윤리적 교훈 차원으로 변질되고, 그리스도를 얻고 더 풍성히 얻는(빌3:8, 요10:10하)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믿는 이들의 신앙은 표류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