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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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틀렸었다―제 2부, 공개 서한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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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틀렸었다―제 2부, 공개 서한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공개 서한에 제기된 문제에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지방 교회의 역사 외에,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지방 교회의 가르침들, 그리고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교단들의 정당성도 포함되었다. 그러한 가르침들에 대해 그 서한은,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과 모순되거나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우리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지도부와 ‘지방 교회들’이 이러한 선언들이나 유사한 선언들을 출판하는 것을 철회하고 중지할 것을 정중하게 요구한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공개 서한은, 그러한 진술들이 왜 정통에서 벗어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그들이 비정통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서 뽑아낸 발췌문들을 제시한다. 아마 그들은 신학적으로 교육받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그 진술들 자체에서 이단성을 분명하게 볼 수 있으리라고 가정한 것 같다.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그 서한을 작성한 쪽과 그 서한에 서명했던 쪽 모두에게 심각한 실수였다. 서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서한 작성자들이 그들에게 제공한 인용문들을 읽기만 했을 뿐 지방 교회에 대한 추가 조사는 거의 하지 않은 것 같다.


공개 서한의 형식은 짧고 간결하므로 그 문제를 제기한 진술문 전문을 여기에 다시 소개하기 쉽다. 나는 공개 서한 내용 전체를 한꺼번에 소개하기보다 한 번에 한 단락씩을 소개하고, 다음 자료를 소개하기 전에 각 단락에 있는 자료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공개 서한이 지방 교회의 자료에서 발췌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용문의 첫 번째 시리즈는 ‘하나님의 본성’ 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며,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문을 담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이심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은 아버지라 불리시지만 진짜 아버지는 아니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이 아버지라 불리시지만 아버지가 아니실 수 있는가?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에 계시는(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나오셨을 때 그분은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신다.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로 이 아들이 바로 그 아버지이시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의 만유를 포함한 영
(1969년 스트림 출판사 발간) 영문판 4-5쪽.


“신격 전체,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신약 경륜
(1988 한국복음서원 발간) 235쪽.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매우 부적합하며 삼신론에 아주 가깝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연결되실 때,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시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시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뒤에 남겨지시고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 계신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또 다른 위격이신 아들을 보내어 구속을 성취하시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격이신 영을 보내신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보좌에 계시는 동안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믿는 이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배웠다. 신격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위트니스 리, 생명 메시지 제3권
(1999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220-221쪽.


“아들은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아들은 또한 영이시다…아들이신 주 예수님은 또한 영존하신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주님은 아들이시요 또한 아버지이시다. 할렐루야!”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
(1973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발간) 영문판 18-19쪽.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분은 또한 주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아들, 영,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이시다.”

위트니스 리, 삼일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성경 계시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responses/booklets/triune.html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분리된 세 위격이나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위격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1993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52쪽.


액면 그대로 보면 이러한 말들이 21세기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란을 줄 만하다. 그것들은 분명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방 교회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거의 없는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이 글만 읽고 난 후, “어디에 서명할까요?”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CRI가 역사적 정통 교리를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는 것을 잘 아는 복음주의자들에게도 동일한 혼란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앞뒤 문맥을 볼 때 나는 “위 진술문은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양태론을 정통 교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나 지금이나 오순절 연합 교회(the United Pentecostal Church)가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은 양태론을 CRI는 이단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의 위 진술문이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때는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단 변증 분야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가르침들의 문맥을 이해하거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게 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지방 교회의 가르침 전모를 주의깊게 연구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위트니스 리가 아들은 아버지이시자 그 영이시라고 가르칠 때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런 가르침이 정통 교리와 일치될 수 있는가? 지방 교회 문서들에서 인용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을 동일시하는 것에 관한 성경 근거들은 곧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1) ‘경륜적’ 삼위일체에서의 세 위격의 ‘활동(activity)’과 (2) 본질적 삼위일체에서의 세 위격의 ‘상호 내재(coinherence)’이다. 그들이 이처럼 세 위격의 동일시를 강조하는 ‘목적’은 서방에 만연된 삼신론적 관점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것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지방 교회의 비정통 교리처럼 보이는 빈번한 주장들을 좀더 분명히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건전한 정통 교리적 확증들을 자주 말했다’는 점을 먼저 확고히 해야만 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지방 교회의 정통적인 확증들


심지어 지방 교회를 비판하는 몇몇 사람들도 지방 교회 측 책자의 많은 곳에서 지방 교회 측이 삼위일체의 정통 교리를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1] 예를 들면, 위트니스 리 자신이 말한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삼위일체적 명제들을 보라.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히 동등하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시고, 동시에 존재하신다.[2]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세 위격이시지만 오직 한 본질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위격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본질은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위격에서는 셋이나, 본질에서는 모두 하나이시다.[3]


우리 CRI는 위트니스 리가 그러한 진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방 교회의 신학을 ‘이단적’(heretical)인 것으로 분류하지 않고,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고수한 ‘정도’를 벗어난 것에 관한 신학적 정의에 따라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분류했다. 정도를 벗어난 신학도 정통 교리를 긍정하지만 나중에는 정통 교리와 모순되고 타협하며 훼손시키는 확신들을 추가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지방 교회가 두 가지 모순된 명제가 동시에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 전에 우리는 정통 교리 신학에 대한 그들의 분명한 확증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지방 교회와 대화에 임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비정통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정죄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이 편치 않았다. 나는 양태론자로 분류되는 단체 가운데에는 이렇게 삼위일체론 정통 교리에 대하여 유사한 세부적인 신앙 고백을 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지방 교회의 가르침 중에서 이러한 것에 대한 답을 명확히 밝혀 줄 어떤 것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러 번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었다. 그런데 CRI에 있는 우리가 정말로 놓치고 있던 어떤 것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이단 대책 분야에 있는 우리의 동료들 모두도 그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아마도 여러분은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 빌 클린턴의 정치 참모였던 제임스 카빌(James Carville)이 선거 운동 메시지를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기발한 선전 문구인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를 기억할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동일한 책망이, 지방 교회 측 문서에서 빈번히 거론된 본질적인 삼위일체(또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재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구별을 놓친 우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정통 신학에서 폭넓게 사용된 구별이고, 우리 CRI가 늘 믿고 가르쳐왔던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세 위격의 영원한 본성과 상호 관계, 그리고 창조시 그분들의 관계에서 맡은 일시적인(말하자면, 시간과 상황에 따른) 역할의 구별이다.[4]


양태론처럼 들리는 지방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오래 전부터, 나는 성경이나 정통 신학에서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묘사될 때에는 종종 양태론처럼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의 세 위격의 영원한 본성과 불변하는 관계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양태론이 아니다. 그러나 양태론자들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구별을 혼동하고 두 개념을 하나로 섞음으로 경륜적 삼위일체의 특성을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돌린다.


만일 우리 비평가들이 지방 교회들에 관해 충분히 철저하게 연구하고 대화하면서 주목했더라면, 이 논점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입장은 보다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는 많은 곳에서 본질적/경륜적 삼위일체를 주의깊게 설명했고 삼위일체에 대한 지방 교회들의 관점과 양태론을 뚜렷하게 대조시켰다.


양태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양태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이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멈추었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자들은 신격 안의 세 분이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 각기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과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의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를 믿는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본질적으로 모두 동시에 같은 상태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신성한 경륜에 있어서 그 세 분은 연속적인 세 단계에서 각기 역사하시며 나타내신다. 그러나 그분들의 경륜적인 역사와 나타나심에 있어서조차도 그 셋은 여전히 본질에 있어서 동시 존재하시며 상호 내재 하신다.[5]


위트니스 리는 여기서 양태론에 ‘연대기적’ 양태론과 ‘기능적’ 양태론이라는 두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기능적 양태론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의 같은 시점에서 세 양식이나 역할 중 하나 이상의 기능을 발휘하실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에서 위트니스 리가 하고 있는 구별을, 기능적 양태론자들은 연대기적 양태론자들이 구별하는 것 이상으로 구별하지 않으려 한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볼 때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별된 세 의식과 의지의 중심들 또는 사랑의 주체-개체 관계로 영원히 연관된 ‘(복수의) 나들(I’s)’로 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장 30절(‘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에 대한 주석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지만, 그분들 사이에는 여전히 ‘나’와 ‘아버지’의 구별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이 점을 무시한다면 양태론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라고 썼다.[6] 그 외에도, 왜 영원(eternity)히 삼일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는지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잘 설명한 글에서 위트니스 리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영원 과거에 아버지와 아들이 교통하고 계셨을 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을 때, 아들이 삼일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졌을 때, 그 영도 또한 거기 계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한 영, 만대(萬代)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 23절은 그리스도께서 [삼일] 하나님의 결정된 의결에 의하여 넘겨지셨다고 말한다… 신격의 세 분 사이에 회의가 있었고, 이 회의에 의해 의결이 이뤄졌다…
…따라서 영원 과거에 삼일 하나님은 교통하시고 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시고 일하시고 선택하고 계셨다.[7]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언론 홍보 이사인 크리스 와일드(Chris Wilde)는 우리의 독자적인 조사 연구가 전적으로 맞다고 논평한다. “삼위일체에 관련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거의 모든 비평은 삼일 하나님의 경륜적 운행을 강조한 그의 책에서 일부만을 골라서 떼어 내어 만든 것이다. 그러한 비평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의 저술의 다른 부분에서, 그리고 종종 같은 단락에서 충분히 균형을 잡은 내용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8]


위트니스 리는 아들을 아버지와 그 영과 동일시하지만, 양태론자들처럼 무차별한 방식으로 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과 행정적인 안배와 경륜 안에서, 아버지는 첫번째 단계를 취하시고, 아들은 두 번째 단계를 취하시며, 그 영은 세 번째 단계를 취하신다. 아버지는 계획하시고, 아들은 성취하시며, 그 영은 아버지가 계획하신 것에 따라 아들이 성취하신 것을 적용하신다… 이[아버지의] 계획이 세워진 후, 아들은 이 계획을 성취하러 오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그 영에 의해 성취하셨다(눅 1:35, 마 1:18, 20, 12:28).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아들께서 성취하셨으므로, 그 영은 아들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적용하시기 위해 세 번째 단계 안에 오시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적용하신다(요 14:26, 15:26, 고전 15:45하, 고후 3:17). 이러한 방식으로 신성한 경륜이 수행되고 있는 동안, 신성한 삼위일체의 신성한 존재, 즉 그분의 영원한 동시 존재와 상호 내재는 완전히 보전되고 파괴되지 않는다.[9]


더 나아가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성부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다는 그들의 암묵적인 믿음 때문에 성부 고난설 주장자들이라고도 불리던 이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 아들은 모든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역사를 이루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하여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역사를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셔서 이 땅에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10]


그러므로 지방 교회가 아들을 아버지와 그 영과 동일시하는 것의 대부분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운행을 말하는 문맥에서이고, 성경에 언급된 유사한 동일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예들은 복음서 전반, 특히 요한복음에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4장은 삼위일체 안의 세 위격이 구원의 역사에서 각기 특별한 역할들을 하는 동안 결코 다른 둘의 활동적인 임재와 참여를 떠나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9절).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 모두에 전적으로 연관되어 계셨다(10절).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그분과 아버지가 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실 것이다(13-14절, 비교 요 15:16).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실 때, 거기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역할로 그 영께서 아들을 분명히 승계하시는 것, ‘그리고’ 그 영의 일 안에 있는 아들의 분명하고도 활동적인 임재가 ‘다’ 있다(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것은 앞에서 그 영께서 아들의 일에 활동적으로 임재하셨던 것과 같다(17절,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현재-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거하심이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시겠다는 약속이 그분이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는 것이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 중 하나를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동일시가 요한복음 14장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내가 14장에서 세 위격의 긴밀한 동일시에 대해 말하는 논점을 뒤집지는 못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오심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 같다. 이것이 이 대목 바로 앞에 있는 구절에서의 주제이다. 그리고 22절에서 유다(가룟 유다가 아닌)가 예수님께, 어떻게 자신을 제자들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시려는지(19절에서 예수님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다시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 하신 말씀을 가리킴)를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것을 그분이 부활하시고 나타나시리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시기보다, 그분과 아버지께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오셔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대답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내주하심이다.


그 후 우리는 복음서에서,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일은 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 하며, 그러한 동일시는 동일한 일에서 다른 둘의 포함을 결코 배제하지 않고, 때로 다른 둘 중 하나나 둘 모두가 특별히 그 일과 동일시 되는 것을 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 아들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심, 그 영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심과 같은 독특한 역할들은 예외이다.)


우리는 또한 종종 서신서들에서 신성한 한 위격이 다른 위격들의 구별된 역할과 동일시되는 것을 본다. 다음 인용문은 지방 교회 측이 풀러 신학교를 위하여 준비한 논문에서 나온 것으로서 바울의 본문 중 몇 군데를 인용하고 있고, 지방 교회 신학에서 동일시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위격들 간의 그러한 동일시를 위한 성경적인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위트니스 리나 존경할만한 신학자들 모두의 글에서 폭넓게 인용하고 있다.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나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해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오시며,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또한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을 수행하신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유로 신약의 서신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분명한 동일시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세 위격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 안에서 세 위격이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른 것이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Irenaeus), 터툴리안(Tertullian), 어거스틴(Augustine),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그러한 언급들은 그가 이단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물’로 출판된 책자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그의 온전한 관점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이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지금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그분은 주님으로서 하늘에 계신다. 그분은 그 영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통치권과 머리의 권위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이 주님으로서 수행하시는 모든 것은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95쪽)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호흡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지 않는가?” 물론 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인 내적이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번째 보혜사이신 그 영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호흡이시다. 따라서 내적인 방면을 조망할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은 하나이시다. (요한복음 강해 속편 제3권 273쪽)


많은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에는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신약 서신서와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사역의 커다란 강조점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종종 생명 주시는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언급을 추가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거나 심지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위트니스 리 외에도 그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사람은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하나로서 위트니스 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성경 구절 중 일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영적인 존재, 또는 영적인 범위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며,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 영 제1권 기독론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98] 164-165쪽)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관해 자주 인용한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역시 이러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해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고 뛰어난 요약을 다음과 같이 제공한 바 있다.


이러한 진리의 양면 모두를 주의하며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영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위격의 특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그들의 임재는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것이다. (성령 [Grand Rapids, MI: Kregel, 1986; reprint of The Holy Spirit of God, 4판,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3] 144쪽)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이러한 인용문을 읽는다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스웨트(H. B. Swete)도 동일한 사상을 아래와 같이 확증했다.


그 영은 그분의 일에 있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럴 때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영이신 주(the Lord the Spirit, 즉 그분의 영화롭게 된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실제로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신약 안에서의 성령 [London, New York: Macmillan, 1912], 306쪽)[11]


우리는 성경이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많은 나타남에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명백히 동일시하는 것을 보았다. 지방 교회를 비평하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성경적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이 외에도, 상호 내재 교리(신학자들에게는 ‘상호 침투’(interpenetration)가 더 익숙한 용어임)에는 세 위격의 경륜적인 동일시를 뒷받침하는 삼위일체 안의 존재론적인 토대가 있는데, 이것도 역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놓친 것 같다. 이 부분을 이해한다면, 지방 교회들이 정확하게 언급한, 오늘날 서방 교회 안에 있는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장기적인 길을 이 진리가 열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상호 내재 교리로 전진할 것이나, 먼저는 이 문제에 대해 좀더 다루어야 한다.


균형 잡힌 삼위일체론
복음주의자들이 위트니스 리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우리가 지방 교회들에 관한 공개 서한에서 제시된 인용문에서 이미 보았듯이, 위트니스 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에 오신다는 것이 전통적인 생각이다. 믿는 이들은 기도할 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고 배운다. 신격을 이러한 분리된 위격으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


확실히 할 것은, 위트니스 리는 그의 우려하는 바를 좀더 주의깊게 말해야 했다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아들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격려하신 것이며(요 16:23), 위트니스 리도 이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그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12]


그러나 공개 서한이 제공한 제한된 자료에서조차도, 위트니스 리가 참으로 우려한 것은 삼신론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공개 서한이 이것을 인용하여 위트니스 리가 비정통적인 것을 가르친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공개 서한을 작성한 사람들과 서명자들은 참으로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께서 보좌에 남겨지셨다고 말하고 싶은가? 참으로 그들은 신격을 ‘분리된’ 세 위격으로 쪼개는 것이 성경의 계시라고 주장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우려해야 한다.


지방 교회 측의 입장을 보다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신학자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이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이라고 부른 원칙을 믿는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특성상 양면이 있는데, 그 두 방면 모두를 충분히 신봉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13] 이런 이유로 위트니스 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적절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만 극단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 진리의 한면(예를 들어, 하나님의 하나의 면)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반대 방면(예를 들어, 하나님의 셋의 면)으로 균형 잡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러한 균형은 종종 다른 기회에 잡았다.


지방 교회 측은 까다로운 서방 사람들에게 그들의 논쟁적인 가르침의 미묘한 차이를 좀더 주의깊게 설명할 수 있었고, 또 설명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스스로 모순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격의 세 위격이 ‘분리’되지는 않지만 영원토록 ‘구별’된다는 것을 일관되게 확증해 왔다.


만일 이러한 말이 아무 차이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영어 사전이 이 두 용어를 동일하게 정의한다 해도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데, 그것은 ‘지방 교회들’이 그 용어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AHD)은 이 두 용어가 형용사로 사용되는 경우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방 교회 측과 일치된 관점이다.


1. ‘구별(distinct)’에 관한 AHD에 있는 첫 번째(단지 이 용례에 적용될 만한) 정의는, ‘다른 모든 것과 쉽게 구별될 수 있는, 따로 따로의’이다.
2. ‘분리(separate)’에 관한 AHD의 처음 두 정의는 다 상대적이다. (a) ‘따로 두거나 유지되는, 분리된’(b)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는’.


그들의 용어로 된 지방 교회들의 글들을 이해하기 위해 주의깊은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종종 강한 양태론적 어감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료들이 서방에서 접한 삼신론적 경향에 대한 반응이며 또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실제로 일부 서방 신학자들은 현대 복음주의에 대하여 동일한 관찰을 해왔다.[14] 공개 서한에 연관된 신학자들과 이단 변증가들조차도 ‘구별’과 ‘분리’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서방 그리스도인들 대다수는 완전한 삼신론자들(삼위일체가 분리된 세 신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에 대해 삼신론을 암시하는 신앙을 모순되게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유지하면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적인 진리를 합당하게 간직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양면을 다 간직해야 한다. 성경에 있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는 양태론과 삼신론이라는 극단의 중간에 있다.”라고 가르쳤다.[15] 위트니스 리가 생각하기에 지방 교회들은 균형을 유지했지만 복음주의 진영의 상당수는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양태론자들이 건전한 삼위일체설을 삼신론으로 해석하고 있듯이 삼신론자들은 건전한 삼위일체설을 양태론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 때문에 지방 교회들은 그러한 균형잡히지 않은 가르침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외치는 것이다.


이제 이 지점에서 지방 교회 측이나 지방 교회를 비판하는 이들은 다 몇 가지를 고려하기 위하여 한 걸음씩 물러서야 한다. 양측은 ‘기우는 것’과 ‘견지하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정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양태론과 삼신론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에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 균형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사 전체에 걸쳐 정리하기 어려운 명제로 존재해왔다. 역사적인 정통 교리에 있어서 동방 정교회는 삼신론쪽으로 더 기울었고 로마 천주교는 양태론쪽으로 더 기울었지만, 사실 그 누구도 삼위일체론에서 이단이라고 정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방 교회가 양태론쪽으로 기울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양태론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이시고 그 영이시라는 위트니스 리의 선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많은 비판자들은 이러한 선언을 그가 양태론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것이므로 CRI는 지방 교회 측에게 그런 선언을 하지 말도록 조언했다. 어떤 단체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지방 교회 측은 우리의 조언을 무시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리다.’ 그리고 위트니스 리가 신격 안에서 영원히 구별된 세 위격의 존재를 확언했을 때, 그는 자신의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삼위일체를 한 위격이라고 단언했을 때, 그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쨌든 ‘위격’(person)이라는 말이 잠재적으로 전달하는, 존재의 분리를 내포하는 (삼신론)의 개념에서 지방 교회 측 신학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위트니스 리는 삼위일체가 구별된 세 위격으로 이뤄진다고 명백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그러한 용어 사용을 유보하는 듯한 표현을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16]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 위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세 위격’은 실제로 세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피스 토마스(그의 로마서 주석으로 유명한)는 그의 책 신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Theology)에서 신격의 삼위일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썼다. “위격(Person)이라는 말도 가끔식 반대를 당한다. 모든 인간의 언어가 그러하듯이, 그것이 부적절하고 심지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오류라고 비난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확실히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이를 것이다.”[17]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세 위격이라고도 감히 말할 수 없고, 세 위격이 아니라고도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참으로 비밀이기 때문이다.[18]


이 점에 대해서 이단 변증 분야에 있는 우리는 위트니스 리에게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 대중에게 쉽게 소화될 수 있고, 아리우스 주의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와 양태론 (예를 들어, 오순절 연합교회)의 오류를 신속하게 배제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정의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 ‘세 위격 안에 계신 한 하나님’이나 ‘한 본질 안에 계신 세 위격’이라는 간결한 정의만 너무 많이 의존했던 것 같다.


삼위일체에 관해 이 말만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화한 것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영역에 다른 사람과 분리된 개체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처럼 단순한 상투적 신앙 고백문만 제공하고서, 그들이 그들의 생각의 한부분에서라도 삼신론적으로 된다면 우리가 놀랄 수 있는가? 만일 그들 중 일부가 더 나아가 휘니아스 데이크(Phineas Dake), 지미 스와가트(Jimmy Swaggart), 케네트 코풀렌(Ke nneth Copeland), 베니 힌(Benny Hinn) 같은 성경 교사들처럼 삼신론을 완전히 신봉하게 된다면 우리가 크게 놀랄 수 있는가?


성경은 삼위일체를 그렇게 단순화된 용어로 말하지 않는다. 신격에 대한 성경 기록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처럼 분류하기 쉽지 않은 신비한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복음주의적인 이단 변증가들은 종종 여호와의 증인들과 변론을 할 때, 성경이 예수와 여호와를 동일시한다는 것과, 여호와 (또는 야훼)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들 중에서 성경이 ‘한’ 위격의 이름을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적용한다는 사실을 두고 씨름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가?[19] 그뿐 아니라 성경 (그리고 성경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삼위일체의 한 위격만이 아닌 삼일 하나님을 가리키면서 “그분”이라는 단수 인칭 대명사를 쓴다.[20]


성경에는 하나의 분명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단일한 신분을 공유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야훼를 적절하게 ‘그분’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영원하고도 경륜적인 구별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등하게 중요한 성경 진리, 즉 그분들이 하나의 영원한 존재로 구성되어 계신다는 진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분들을 ‘분리된’ 세 위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에서 빗나간 위태로운 것이다. 삼위일체의 위격을 구별하기 위해 ‘분리(separate)’라는 말을 사용해온 우리는 이것을 지적하는 위트니스 리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의 생각은 작고한 개혁주의 신학자 고네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의 관점과 매우 가깝다. 비록 반 틸이 그의 견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 왔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신학자 필 곤즈(Phil Gon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양태론과 삼신론을 피하기는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을 피하기만큼이나 어렵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체계적으로 공식화 할 때의 오류는 (성경보다) 너무 많이 말하려 하는 갈망에서 온다. 아마도 반 틸의 접근이 최상일 것이다. 그는 긴장을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내버려 두고, 비록 다른 의미들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한 위격이시자 세 위격이시라고 주장함으로 삼위일체의 완전한 비밀을 유지한다. 반 틸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공유하는 일종의 속성이라는 개념에 맞서 다투고 있다. 반 틸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요한] 후레임(John Frame)이 한 변론은 매우 통찰력이 있다. 반 틸의 체계화 된 교리는 우리가 양태론이나 삼신론으로 기우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하나(one)이시자 셋(three)이시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시다(그러므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분이 정확히 어떻게 하나이시자 셋이신지에 대해 우리는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21]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적으로 성경적인 교리인 상호 내재


앞에서 제안한 것처럼, 삼신론의 경향에 대한 최상의 해독제는 ‘상호 내재(coinherence)’라는 중요한 성경적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이유는 그분들의 본성의 하나가 단지 동일 속성을 공유하는 것(인간이 속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실체로 존재함과 서로간의 상호 침투를 포함한다.


풀러 신학교에 제출한 그들의 논문에서, 지방 교회 측은 상호 내재에 대한 그들의 입장과 상호 내재를 주장하는 그들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믿는다.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한다. 성경이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상호 내재) 개념에 근거하여 설명했다.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하신다. 삼일 하나님에 적용된 ‘상호 내재’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 23절에서도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께서 동시에 서로 안에 계심을 가리킨다. 이 구절들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인 동시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차이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아버지의 운행(“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과 같다. 이와 유사하게, 구별되는 그 영의 행동에 세 분의 분리할 수 없는 유사한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된다.


삼일성 안에 세 분의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때로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무감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위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이시지만, 그 위격 간에는 상호 왕래(inter communion)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그분들의 분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지금 주는 영이시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스트롱, 조직 신학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의 상호 내재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신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에 원문 그대로의 충분한 위력을 줄 수 있기 바란다.[22]


이제는 공개 서한에 인용되었던 위트니스 리의 진술문인 "신격의 전체, 삼일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라는 말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공개 서한의 작성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위트니스 리가 성부고난설이 확대된 삼일 하나님(Triune God) 사상을 가르치면서 아들이 홀로 육체 되신 것은 부인하는 것으로 믿게 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아들만 육신 되셨고 하나님의 경륜의 "두 번째 단계"의 일을 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공개 서한에서 인용한 것은 심지어 완전한 문장도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하라.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작성자들은 240개 단어가 들어 있는 단락에서 8 개 단어만을 뽑아내어 소개함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사실상 말하고자 했던 요점을 독자들이 읽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단락의 내용은 분명히, 전적으로 삼위일체의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으며, 위트니스 리가 쓴 그 8 단어는 오직 이런 의미에서 쓴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의 존재이므로 어떤 위격도 다른 두 위격의 임재나 관련을 떠나 어디로 가거나 무엇을 할 수 없다. 저자가 불완전한 문장을 근거로 기소당할 때, 분별있는 독자라면 그것이 위험 신호임을 알아야 한다. 이 사례에서 더 전진된 조사를 통해 입증된 것은, 저자가 쓴 본문의 앞뒤 문맥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방 교회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이단이고 정도에서 벗어났고 이중적이고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혐의를 벗겨 주기 위해서 충분한 증거를 제시했다고 믿는다. 우리 CRI는 지방 교회가 양태론을 믿는다고 잘못 정죄한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지방 교회들을 비판하는 다른 복음주의자들도 편견없이 공정하게 사고하고 정정하는 데 열려 있다면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되리라 확신한다. 그것은 사사로운 역사들과는 무관하게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방 교회들이 말도 안 되는 거짓 정죄에 대해 때로는 논쟁적으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그 정죄들 자체를 덜 터무니 없는 것이나 덜 거짓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으며, 복음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도달하는 결론에 영향을 주어서도 안 된다.[23]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지방 교회 측 자료들을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공개 서한에서 지적한 신학적 오류로 추정된 다른 것들에 관해서도 정확히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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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아브기안(abuGian)의 ‘지방 교회(회복 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베뢰아인의 변증 조사 사역)을 보라.
http://www.thebereans.net/arm-wlee.shtml; ‘삼일 하나님 교리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Biblocality, http://www3.telus.net/trbrooks/TeachingsofLC3.html.나 콜린 한센의, ‘이단 변증가들의 재고-전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방하던 이들이 지금은 지방 교회들을 승인함’에서 칼빈 바이즈너의 언급들을 보라.
Bold Bible Teaching, http://www.boldbibleteaching.net/watchmanneeandwitness.html.


[2]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2001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42쪽.


[3] 위의 책 25쪽.


[4] ‘관계’라고 할 때, 나는 창조주와 보존자와 재판관과 세상의 구속주로서의 삼일 하나님의 활동의 각 방면을 의미한다.


[5]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1991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37-38쪽.


[6] 위 책 34쪽.


[7]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1996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1-12쪽.


[8] 크리스 와일드, 몇 가지 핵심 교리적 문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 중 일부를 제시함 (2005년 10월 풀러 신학교를 위하여 준비한 논문 초안) 영문판 2쪽.


[9] 위트니스 리, 오늘날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의 중점 (1994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24쪽.


[10] 위트니스 리, 장로 훈련 제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994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112쪽.


[11] 풀러 신학교를 위하여 준비한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한 성명서, 2006년 5월 12-14쪽.
(이 자료는 http://www.lctestimony.org/StatementOfTeachings.pdf.에 올려져 있음)


[12] 위트니스 리, 기도 (1990년 한국복음서원 발간) 253-261쪽.


[13] 와일드, 1. 로버트 고벳의 신성한 진리의 이중성 제5판(Haysville, NC: Schoettle Publishing Company, 2003)을 보라.


[14] 예를 들면, 웨인 그루뎀, 조직 신학: 성경적 교리 입문 (Grand Rapids: Zonder van Publishing House, 1995) 248쪽, 필 곤즈, 당신은 실제로 양태론자인가 (PhilGons.com, Thoughts on Theology and Technology, 2009년 1월 19일) http://philgons.com/2008/01/are-you-a-practical-modalist/; Rev. 제임스 헤스팅스, M.A., ed., The Expository Times, 제7권 1895년 10월호1896년 9월호 (Edinburgh: T. and T. Clark, n.d.), 153쪽을 보라.


[15]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메시지 1-20, 29.


[16] 그의 신학이 삼위일체 중심적이었고 양태론을 거절했던 칼 바르트도 위트니스리가 표현한 것처럼 위격(person)이라는 용어 사용에 같은 우려를 가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서는 Carl F. H. Henry의 하나님과 계시와 권위 제5권 서 계시고 머무시는 하나님 제 1편 (Wheaton, IL: Crossway Books, 1982) 184쪽을 보라.


[17] 위트니스 리,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 (1976, 1994년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발간) 영문판 32쪽.


[18] 위트니스 리, 계시와 이상 25쪽.


[19] 증거가 될 수 있는 성경 본문은 많이 있지만, 이사야 44장 24절을 요한복음 1장 3절, 창세기 1장 2절과 비교해 보라. 만일 야훼 홀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창조에서 작용자로서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아들과 성령 또한 야훼이실 것이다.


[20] 예가 가득한 성경에서 신명기 4장 35절-39절을 보라.


[21] 곤즈, 앞의 인용문.


[22]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들에 관한 성명서 영문판, 911쪽.


[23] 이단이라는 정죄나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정죄에 대하여 대부분의 다른 단체보다 지방 교회 측이 더욱 공격적으로 반응한 것은 사실 그 정죄들이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이단들은 이단이라는 정죄 앞에 보다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그러한 정죄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거나, 어떤 면에서는 성경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고, 이단 정죄보다는 사회적인 평판을 더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속해 있는 건전한 정통 교회가 이단과 사이비 집단으로 정죄받는다면 애통할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정죄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당신이 복음주의적인 감수성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지방 교회들이 과거에 논쟁했던 것들을 좀더 동정어린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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