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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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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죄인', '의'(righteousness)와 '불의'(unrighteousness)는 반대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이론상으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자기는 의인이면서 죄인'이라고 하고 '의인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불의(죄)를 자백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성경은 칭의에 대해 두 방면 즉 '위치적이고 객관적인 칭의(롬3:24)와 '성분적이고 주관적인 칭의'(요일1:9) 를 함께 말하나 우리는 앞의 것만을 관심하고 뒤의 것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의롭게 되는 방법이 '오직 믿음' 인가 아니면 '믿음+행위'인가 에 대한 구교와 신교사이에 입장차이도 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러한 양측의 갈등은 '율법의 행위'(롬3:20)와 '믿음의 행위'(약2:24, 갈2:20)를 구분하지 않음으로 야기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칭의에 대한 진리를 재검토하려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신학이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장차 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과 그 이후의 생활과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교와 개신교의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입장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평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신 구교 측의 주장들을 살펴봄

 

그 동안의 교회역사와 최근의 신학자들의 동향을 관찰해 볼 때 '칭의'에 대한 양측의 이견은 아직도 타협점을 얻지 못하고 팽팽하게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로마 천주교는 의롭게 되는 길은 '믿음+ 행위'라는 전제아래,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에 더하여 선행 즉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미사, 헌금, 면죄부 구입 등이 요구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나 칼빈 등의 종교 개혁가들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의거하여 '오직 믿음'으로 만 의롭게 된다며 카톨릭 측의 인간의 행위로 인한 칭의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필립 입슨, 칭의론 논쟁,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97-103쪽 참조). 이처럼 사람이 의롭게 되려면 '오직 믿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믿음에 더하여 인간의 행위'가 필요한가 하는 것은 지금도 논쟁 중인 예민한 문제입니다.

 

외견상 위 내용들만으로는 신 구교 양측은 영원히 어떤 일치점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대립은 영원 전부터 가지셨던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바로 이해할 때 더 승화된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1:4-5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갈4:5, 엡4:13 참조). 그리고 이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인이 예수의 구속의 피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객관적인 칭의) 아니라 주님자신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을 먹음으로 매일의 생활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 의로운 생활의 표현(주관적인 칭의)을 가져야 합니다(요6:57, 마16:24, 빌1:21). 만일 이러한 노정에서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살지 못하고 육체를 따라 살았다면 즉시 돌이켜서 보혈의 효능을 믿고 자신의 불의와 죄들을 철저하게 자백하므로 다시 깨끗게 함을 받고 의로운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서 하나님의 뜻인 아들의 명분(휘오데시아)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측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한계들이 지적될 수 있습니다.

 

우선 로마천주교에 대해서는, 성경이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약2:24, 살전1:3, your work of faith)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타락한 옛사람에게서 나온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낸 표현 즉 '믿음의 행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간과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어떤 행위일지라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의 의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더러운 누더기'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롬3:20). 따라서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의 표현이 아니라면 로마천주교에서 관찰되는 많은 종교적인 의식들은 그 자체로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면에 있어서의 개신교 측의 천주교에 대한 분별은 전적으로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신교 측이 주장하듯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데 '오직 믿음'만 필요하고 '행위'는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그 정당성을 거부하는 '행위'는 로마서 3:20, 28, 갈라디아서 2:16 이 말하듯이 '율법의 행위' 일뿐 '믿음의 행위'(약2:24)까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음의 행위를 도처에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1:17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라는 로마서14:23의는 말씀을 함께 두고 볼 때, 한 번 의인이라는 '법적선언'을 선고 받은 이후에라도 믿음으로 살지 못하여 죄를 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활 중에 믿음으로 행치 못하여 명백한 죄를 지은 경우에도 그 사람을 여전히 의인(의롭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경우에는 자신이 불의함을 시인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요일1:9). 이처럼 성경은 칭의에 대해 객관적인 방면과 주관적인 방면을 말하고 있으나 개신교 측은 객관적인 방면만을 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신교 측에 대해 구속의 피를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바르게 가르치나 바울처럼 생활 중에 그리스도 자신을 살아낸 표현으로서의 의인됨을 강조하는데는 부족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의 행위들

 

이제 우리는 구속을 믿음으로 영 단번에 얻는 객관적인 칭의(이신 칭의) 뿐 아니라 거듭 난 후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믿음의 행위'(주관적인 칭의)를 요구하는 몇 부분의 성경말씀들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만일 우리가 개신교가 의미하는 '칭의'를 얻은 후 일상생활에서 '빛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자백해야 할 죄가 있게 되며 결국 우리는 "불의"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이미 얻은 칭의만 강조하고 이러한 실생활의 불의를 외면한다면 서서히 양심이 무디어 질 것이고 도덕적인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할 것입니다.

 

2) 요일2:1, 6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저(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그대로 자기도 "행할지라" (ought himself also so walk, even as he walk) : 만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행치 않는다면 위 말씀의 명령을 어겨 "불의"한 것이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은 이 말씀의 기준으로도 의롭습니다(갈2:20). 바로 이것이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이 요구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3) 요일2:27, 29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치며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every one that doeth righteousness is born of him) : 만일 이미 "칭의"를 입은 우리가 우리 안의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거슬려 행동한다면 그것은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불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름부음을 거역한 모든 것들이 죄임을 인정하고 보혈을 의지하여 불의를 자백함으로 용서함과 깨끗케 함을 받아야 합니다.

 

4) 요일3: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이 구절에 의하면 아무리 롬3:24이 말하는 칭의를 얻은 자라 할지라도 미혹을 받아 '의를 행함'에서 떨어진다면 그는 '사실상 불의한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를 행하는 자" 와 "의를 행치 않는 자" 모두를 의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5) 요이4, 6, 요삼3, 4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 : 위 말씀들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계명을 좇아 행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진리를 벗어나서 행하고 계명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불의한 것입니다.

 

영단 번에 '칭의'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난 표현"(빌1:21)을 요구하는 성경구절들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도 의로워야 한다는 거듭난 자들에게 대한 성경의 의의 요구 앞에 '아 그것은 칭의 와는 별개인 성화의 문제'라고 피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설사 이것이 '성화'에 속한다고 해도 이러한 '성화의 외적 표현으로서의 의'(우리는 이것을 앞의 '객관적인 칭의'와 구별하여 '주관적인 칭의'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임) 까지를 성경은 요구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소홀히 한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빛과 소금의 간증'이 흐려질 것이며 장차 우리 모두가 서게 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엄중한 징계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가 처해 있는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의인이 불의한 삶을 살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지금까지 개신교 측은 영 단번에 얻은 "칭의"(justification)를 강조하고 구원받은 이후의 의로운 생활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신학의 입장을 자극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즉 칭의에 관련하여 '행위'라는 말만 나오면 즉시로 거부감과 심지어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합니다. 위 '칭의론 논쟁' 책자가 소개하는 크롬웰 군대의 군목이었던 리처드 백스터 목사, J. I. 패커, 영국의 역사신학 전문가인 알리스터 맥그라스 등의 활동에 대한 개신교 측 신학자들의 반응은 그 좋은 예입니다(위 책 11, 143, 195, 246 -251쪽 참조). 그러나 이러한 개신교측 신학자들의 긴장은 종전처럼 구속의 피를 믿음으로 칭의(객관적인 칭의)를 얻고 '율법의 행위'는 철저하게 거부하되 이에 더하여 '그리스도를 살아낸 결과인 믿음의 행위인 의로운 삶(주관적인 칭의)을 추구함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는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칭의와 함께 놓고 볼 때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믿으면 다 천국간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7:21은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하늘에 계신)아버지 뜻대로 행함'을, 마 5:19-20은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함으로 둘 다 '믿음의 행위'를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산상수훈 뿐 아니라 마태복음 다른 곳에서 묘사된 천국비유들에서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천국에 들어가도록 경주하는 자로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살려 했던 바울의 태도로도 확증됩니다(고전9:24-27, 빌3:7-9, 딤후4:18).

 

다시 강조하건대 여기서 말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의로운 행위'는 로마천주교가 말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5-7장 내용을 포함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살아 나타난 '믿음의 행위'이며 그로 인한 의로움입니다(마7:24, 고후5:21). 그리스도만 항상 의로우시고 우리는 늘 불의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위치적으로 의롭고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살 때 주관적으로 의롭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2:20에서 사도 바울이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글의 제목인 '의인이 죄를 지으면 어찌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답변은 이것입니다. 로마서3:24에 근거한 "의인"도 생활 중에 믿음으로 생명 되신 주님을 살지 못하여 죄를 지었을 때는 "철저한 자백"을 통해서만 그러한 "불의"가 용서받고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롬14:23, 요일1:9). 만일 이러한 일을 게을리 했을 경우는 그 사람은 즉시 주님과 친밀한 교제가 중단될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각한 일에 직면할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제시한 마태복음에 의거 천국(천년왕국)에 못 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고후5:10, 롬14:10-13, 고전3:13-15, 마5:20, 7:21, 18:23-35, 22:11-13, 25:11-12, 30).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성도들의 생명의 성숙을 격려하는 하나님의 지혜일 뿐 믿는 사람도 행위에 따라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 갈 수 있다거나 연옥교리와 관계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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