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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믿음,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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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믿음, 체험

 

 

오늘날 은혜의 시대에서 「은혜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은혜로 말이암아」라는 뜻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행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이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롬 4:4).

 

하나님은 은혜로 사람을 대하시기 때문에 「사실」을 산출해 내셨다.

 

「사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해 낱낱의 일들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한다. 사실이 되었다면 이미 이루어진 것을 다시 성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은 다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운 은혜이다. 여기에는 사실이 필요할 뿐 아니라 사람의 동역이 필요하다. 이 동역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그분이 「이루신 것」에 사람이 무엇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들을 참된 것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 :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이루신 역사를 참된 것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은행에서의 「인출(引出)」을 믿음에 비유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수표 한 장을 주었다면 그것은 은행에 돈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 돈을 인출하기 원한다는 것은 곧 은행에 수표에 적힌 금액의 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출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있다면 인출할 수 있다. 인출한 후에는 돈을 쓸 수 있다. 돈을 쓰는 것은 바로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은행에 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인출하는 것은 「믿음」이며 돈을 쓰는 것은 「체험」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으로서 이것은 이미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한 사람의 체험이 필요하다.

 

「체험」 : 체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하려면 마땅히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그를 위해 이루신 사실들을 취해야만 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사람에게 불가결한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체험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나 믿음은 하나님의 사실을 사람의 체험이 되게 한다.

 

성경에 나타난 것은 「사실, 믿음, 체험」일 뿐이다.


요약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 된 분으로서 모든 거룩한 미덕의 총체가 되시고 모든 이루어진 사실들이 되셨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생활은 곧 하나님의 생활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미 구원을 이루셨다. 진심으로 주 예수를 주와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바로 믿은 그 순간에 주 예수를 영접한 것같이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다. 그때 주 예수님의 거룩한 미덕과 완전하심은 믿는이들 위에 임하였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상태는 마치 주 예수님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와 같이 보신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와 그분이 이루신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것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얻은 「사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성취해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믿는 이가 주 예수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분의 믿는이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한 사실로서 어떤 믿는이도 자기 힘으로 이것에 참여할 수 없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어 특별히 간단 명료한 비유를 사용했다. 9장 15절부터 17절까지에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들은 유언을 남기는 어떤 사람으로 비유된다. 유언은 유언을 받은 사람에게 「기업」을 준다는 약속이다. 유언을 남긴 사람이 죽지 않을 때 그 유언은 무효이나 일단 그가 죽으면 유언을 받은 사람은 기업을 얻을 수 있다.

 

주 예수님이 바로 유언을 남기신 분이시다. 그분이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약속은 즉시 우리의 이름으로 돌려졌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얻은 사실들이다. 비록 우리가 체험상 일시적으로 이 기업을 얻지 못하고, 이 기업으로부터 유익과 공급을 누리지 못했다 해도 그 기업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게 속하며 우리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누구도 변개시킬 수 없는 사실이다 기업을 누리는 것과 기업을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기업을 누리는 것은 「체험」이고 기업을 소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기업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유언자로 인함이지 우리로 인함이 아니다. 이 사실을 얻는 것이 먼저이며 누림은 그 다음이다.

 

이 비유적인 가르침은 간단 명료하다. 주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그분의 모든 의로운 행실과 거룩한 미덕과 완전하심과 승리와 아름다움 등을 우리에게 돌리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분같이 되게 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영접하듯 우리를 영접하셨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부터 이것들은 이미 사실이 되었다. 사실상 우리는 주 예수님과 완전히 같다. 그러나 체험상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이란 다름 아닌 주 예수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모든 은혜를 뜻한다. 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함으로 인해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기업을 승계받은 사실을 소유하고도 이 기업을 누리는 체험을 갖지 못할 수가 있다. 사실과 체험은 크게 다르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은 다 믿는이들의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사실에 있어서 많은 믿는이들은 가장 풍족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풍성을 사용하고 누리지 않았기 때문에 체험상 가장 궁핍한 사람일 수가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맏아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좋은 본이다. 맏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한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체험상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이다. 그가 부잣집 아들인 것은 그의 위치(이는 사실임)를 말하지만 그의 상태(이는 체험임)는 염소 새끼라도 누린 적이 없을 수가 있다.

 

우리는 사실과 체험의 구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 둘은 분명히 두 방면의 사실을 말한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를 말하며, 후자는 우리에게 적용된 바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우리의 누림을 말한다.

 

오늘날 믿는이들은 대부분이 한 극단에 떨어진다. 어떤이(가장 많은 수를 차지함)는 주 예수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모르고, 주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것이 이미 그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계획과 계략으로써 은혜를 얻으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자아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와 그의 새 생명의 취향에 응할 많은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또 어떤이(수가 적지 않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므로 주 예수께서 이미 자기를 들어 올리셨고 그를 비할 데 없는 위치에 두셨기 때문에 그는 이로 인해 자족하고 다시 체험에 있어서 주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를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두 극단에는 모두 오류가 있다. 체험을 중요시하고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율법에 매이게 되고, 사실만 중요시하고 체험을 소흘히하는 사람은 은혜를 방자히 행하는 기회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서 주 예수님 안에서의 자기의 위치가 얼마나 탁월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의 빛으로 부르심받은 은혜에 합당한가에 대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가장 탁월한 위치에 두셨다. 우리가 주 예수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그분이 성취하시고 승리하신 모든 것들은 우리의 것이다. 이것은 사실적인 면에서의 우리의 위치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시고 승리하신 것들을 어떻게 해야 체험하는가이다. 사실과 체험(사실을 체험으로 화함)-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람 되심의 성취-사이에 믿음의 역사가 있다.

 

이 믿음의 역사는 다름아닌 「사용」과 「기업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업은 그분이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유언이 효력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우리가 얻은 기업의 축복을 누리도록(체험)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우리의 것이다(고전 3:21-23). 우리는 그 맏아들과 같이 헛되이 약속만 받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어리석음과 불신 때문에 그는 아버지께 간청하지 않았고 기업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기업을 누리지 못했다. 만일 그가 아버지께 간청하여 아들의 권리를 사용했다면 염소 새끼뿐 아니라 천만의 염소도 다 그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사용하고, 하나님이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유언을 받은 사람은 두 가지 절차를 거쳐야만 유언을 누릴(체험)수 있다. 첫째 이 유산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둘째는 전일하게 이 유산을 관리해야 한다. 이 유산이 있음을 믿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이 유산을 관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하나님이 진정 주 예수를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게 하셨다』 (고전 1:30)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주 예수님이 성취하시고 승리하신 것들이 우리의 성취와 승리가 되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영원히 영적 체험을 갖게 될 소망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요, 그분의 역사를 의심하는 것이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힘으로 그들의 기업을 관리한다. 그러나 영적인 기업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영적인 능력-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믿음으로써 주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기업을 취하여 이것을 사용하고 관리한다면 영적 기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사실과 믿음과 체험의 관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적(事蹟)이 구약에 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역사이다. 하나님은 옛적부터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것을 말한 바 있고, 출애굽했던 수십만 회중에게 이것을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시고 모든 원수를 이기게 하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과 가나안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하나의 사실이었다. 물론 이때 사실은 성립되었지만 체험은 아직 없었다. 사실적으로 그 땅은 그들의 것이었지만 체험적으로 그들은 한 치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능히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곧 올라가서 곧 취해야』 했다(민 13:30).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없는 고로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땅을 주셨지만(사실) 그들은 (체험)을 얻지 못했다. 한 세대가 지난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수 1:3)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마땅히 그들의 발바닥으로 하나님이 이미 주신 땅을 밟아야 했다. 후에 그들은 올라가서 그 땅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온전히 체험하는 비결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그분이 「소유하신 것」과 그분이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여기셨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어떠하심과 소유하신 것과 이루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체험하는 길은 다름 아닌 가나안을 좋은 땅으로 시인하고 믿음의 발바닥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땅을 실제화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 우리의 소유임을 볼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고 우리가 믿을 때 사실과 믿음과 체험을 갖게 된다.


정의

 

「사실」 :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구속과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것들이다.

 

「믿음」 : 이는 세상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와 구속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는 방법이다. 즉, 하나님의 사실을 체험으로 화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일종의 작업과 태도이다.

 

「체험」 : 이는 믿는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생활이다. 즉, 믿는이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모든 성취와 승리를 적용하는 것이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실을 취하고 나타내며 생활해 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사는 모두 이런 부류이다.

 

교사들과 믿는이들은 이 세 가지 교리의 연관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생활과 가르침이 불투명할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 안에 상반된 많은 것들이 있고 거의 모든 것이 모순된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기술한 것이 성경 교리를 명확히 나타내지 못할까 두렵다. 그래서 나는 성경의 몇 가지 큰 교리들을 근거로써 기재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고 그분의 속죄의 효력을 얻은 사람들이다. 속죄는 죄인이 얻은 체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미 속죄함을 얻은 사람들이다. 속죄함은 우리에게 지나간 체험이라서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사실과 믿음과 체험 이 세 가지의 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먼저 우리가 이미 얻은 체험을 사례로 들겠다. 이를 통해 이 세 가지의 연관성과 중요성을 보기 바란다.


속죄

 

속죄는 우리가 마땅히 이해해야 할 매우 중대한 교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이를 증명해 준다.

 

요한복음 1장 29절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하고, 또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요한 일서 2장 2절은 『저는... 화목제물이니...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한다. 디모데 전서 2장 6절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라고 말하고, 4장 10절은 또 『(그가) 모든 사람...의 구주시라』고 말한다.

 

이상의 구절들을 볼 때 예수님의 속죄하심이 모든 사람을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속죄하심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바이다. 만일 사람이 「믿음」의 도리를 모른다면 그는, 주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어도 구원받고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겉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지만,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인데 믿음을 가지나 안 가지나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죄인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말살하게 되며, 믿는이들은 더이상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지만 성경은 또한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음 구절들이 이에 대한 증거이다.

 

요한복음 3장 15절은 『저를 믿는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한 3장 18절은 『저를 믿는 자는... 믿지 아니하는 자는...』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한다. 로마서 3장 22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말하고, 또 26절은 『예수 믿는 자』를 말한다. 요한 일서 2장 12절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한다.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 있지만 여기에 인용한 몇 구절들은 사람이 믿어야 함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 사람을 위하여 죽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분(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취할 필요가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기의 죽음으로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와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 비록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했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 곧 모든 사람...의 구주시라』(딤전 4:10). 그분께서 자기 아들을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도록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에 그분은 능히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될 수 있으시다.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는 믿는이는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체험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사실을 믿었다면 사실에 대한 체험이 뒤따른다 다음 구절들을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3장 18절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하고, 5장 24절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하며, 3장 16절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로마서 5장 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이 사실임을 믿음으로 취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


주와 함께 못박힘

 

이제 더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못박힘의 주제를 가지고 「사실, 믿음, 체험」을 설명하고자 한다. 믿는이들이 주님과 함께 죽은 사실을 아는 것은 죄인이 구속의 사실을 아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단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도 그분 안에서 죽게 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분은 다만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더욱 죄인을 죽게 하셨다. 죄인이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은 하나님의 사실이다. 다음 구절들은 이것을 증명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롬 6:6).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롬 6:2).

 

이 구절들을 볼 때 하나님의 시야에서 믿는이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믿는이는 자기를 못박으려고 계획하고 날마다 자신을 못박지만 못박혀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임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못박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써 그분의 죽으심을 우리의 죽음으로 취하고 여기는 것이다.

 

침례는 믿음의 표시와 승인이다. 이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승인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6:4). 이것은 믿음으로써 죽음의 표명과 승인을 취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미 죽었고 그분과 함께 죽은 것이 다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라고 명한다. 「여기는 것」은 일종의 믿음의 행위이다. 이것은 자기를 죽은 자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죽은 자로 보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자신을 죽은 자로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신을 보면 볼수록 아마도 자아가 더욱 살아날 것이다. 우리는 아주 죄를 잘 범하며 또한 죄 범하기를 좋아한다. 오직 믿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곧 우리의 죽음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은 체험을 갖게 된다.

 

성경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 중 좋은 본인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또한 그는 『내가...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함에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말한다. 믿는이들이 주님과 함께 죽은 체험, 곧 생명의 체험을 가지려면 반드시 자기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사실, 믿음, 체험」을 사용해야 한다.

 

믿는이가 그리스도와 합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사실이다. 당신은 이 사실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가? 믿는 사람은 바울과 같은 「함께 죽은」 체험을 갖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모든 교리는 바로 「사실, 믿음, 체험」의 이 세 가지 순서가 있다.

 

하나님이 이루신 것은 모두 완전하다. 그분이 세상을 다루시는 방법은 바로 그분이 세상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심으로 그들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은혜로 사람을 대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이 필요없다(롬 4:4). 「거룩케 함」, 「승리」 등의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거룩케 됨

 

거룩케 됨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룩케 됨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이다. 성경은 그분이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3:12, 10:14)고 말한다.

 

거룩케 됨은 이미 완성된 사실이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다 거룩하게 되었다. 비록 이것이 사실이나 베드로 전서 1장 16절은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명한다. 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는가? 이는 비록 믿는이가 이미 거룩케 되었지만 이 거룩케 됨은 하나님의 사실일 뿐 믿는이의 생명의 체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케 되려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예비하신 거룩케 하심을 우리의 거룩으로 취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거룩한 생활이 있다.


세상을 이김

 

세상을 이기는 것도 그렇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역사-하나님의 사실-이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는 우리의 믿음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취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게 된다」. 이것은 믿은 후의 생명의 체험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이며, 체험은 생명의 영적 체험이다.

 

거룩케 됨과 승리 뿐 아니라 믿는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큰 교리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모든 사실은 인간의 분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다. 믿는이의 기도와 수고와 자기를 부인함과 성결과 구제와 계략이 하나님의 사실(거룩케 됨, 승리 등)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실은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분의 사업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두신다. 오직 믿음으로써만이 이 사실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이제 하나님의 사실과 사람의 체험이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해 주는 한 예를 들겠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사실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거룩한 자들(고전 1:2)이고 성령의 전(고전 6:19)이며 이미 씻은바 되었지만(고전 6:11), 그들의 체험은 「허물이 있고」 「속이는 것」(고전 6:7-8)이 있고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고전 8:12)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은혜(사실)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사실 면에서 우리가 얻은 위치는 결코 우리의 시도와 근면과 고생과 가식과 억지에 의해 실제적인 체험으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확실한 사실들을 체험하려면 다만 믿음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해 주신 것들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기만 하면 된다. 날마다 주님이 이루신 것들(사실)을 완전히 시인하는 이것이 진실된 믿음이다. 「취한다」는 것은 평상시에 주님이 성취하신 것들이 이미 이루어졌고 그분이 이루신 것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시험을 당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치(사실)를 이미 얻은 것으로 실행해 내는 것이다. 이럴 때 체험은 곧 뒤따른다.

 

영성이 높은 믿는이는 단순히 영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가 영적인 체험을 많이 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립된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체험은 근거가 있는 것이지 결코 저절로 생겼다 저절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중심 삼음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믿는이의 영적 생활의 체험은 하나님이 믿는이를 위해 이루신 사실에 근거한다. 사실은 근거이고, 체험은 성취이며, 믿음은 노정이다. 바꾸어 말해서 사실은 원인이고, 믿음은 방법이며, 체험은 결과이다.

 

믿는이의 영적 생활의 체험은 최종적인 결과와 최종적인 성취에 지나지 않는다. 믿는이가 높고 깊은 영적 생명을 갖기 전에 먼저 그 근원으로서 주 예수님의 온전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믿는이가 자기 노력으로 거룩케 되거나 승리하고 자아를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룩케 되고 승리하며 자아를 죽음에 넘기우는 일은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첫째,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케 되었고 승리했으며 자신이 죽었음을 시인함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실행면에서 당신이 주 예수와 생명의 연합을 가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당신이 주 예수님처럼 거룩케 되었고 승리했으며 자신이 죽었음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얻게 될 모든 체험은 주 예수님이 이미 거치신 것들이다. 믿음으로 취한다는 것은, 곧 주 예수님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믿는 태도와 행위로써 당신이 은혜로 여긴 것들을 적용한다는 뜻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결코 성령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실은 어떻게 해서 사람의 믿음을 통해 체험으로 변할 수 있는가?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사실들을 믿고, 믿음으로 그것을 취할 때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더하시고 그것들이 우리 생명 안의 실제와 체험이 되게 하신다. 시인함과 믿음으로 취하는 것은 성령이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들을 우리 생명에 더해 주시고 실제적으로 체험하도록 문을 열어 준다.

 

성령의 역사는 다 하나님의 사실에 근거한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어떤 사실도 이루어 주지 않는다. 성령은 다만 이미 이루어진 것을 우리의 생명에 실제와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이미 주 예수 안에서 사실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써 이 사실을 믿고 시인하고 취하기만 하면 된다. 성령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들은 우리 생명 안에 더해질 것이고 우리는 영적 체험을 갖게 된다.


워치만 니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영적 전쟁, "사실, 믿음, 체험",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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