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 형제님의 글을 모아 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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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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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

 

Ⅰ. 금욕주의의 유래

 

구원받기 전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다. 그가 죄 안에 타락하였을지라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거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도달할 수 없으면서도 만일 그 표준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이 거룩한 생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생활 속에 죄와 정욕이 가득한 사람까지도 자기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거룩한 생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날 자신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이 거룩함이요 고상함이요 고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사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상적인 거룩한 생활에 대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식이 낮고 교육 수준이 상당히 낮은 사람들까지라도 어떤 단계에 이르는 것이 좋고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A. 세상적인 것이지 기독교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이런 관념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과거에 이루지 못한 이상적인 생활을 이제는 이루어야 겠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전에 자기가 죄 안에 살고 정욕 안에서 자랐으며 육체의 연약함을 이길 능력이 없었지만 이제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런 이상적인 생활을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의 기본적인 문제는 그런 이상적인 생활을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는 이런 이상이 그리스도인의 이상이 아닌 세상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의 표준을 가지고 있고 생활 속에 여전히 이방인의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런 사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상당한 괴로움을 당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 철학을 교회 안으로 가져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갓 믿은 형제들은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 놓아야 한다.


B. 사람은 정욕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벗어나기를 사모한다

 

그런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생활은 대체 어떤 상태인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세상에 살면서 죄의 묶임을 받을 때, 사람은 본래 각종 정욕과 탐심으로 가득 차 있고 무능하면서도 자신의 정욕을 넘어서기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물질적인 것들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기를 사모한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이상을 이룰 수 없다. 사람은 어떤 것에 속박을 받을수록 그것과 상반되기를 바란다. 정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정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물질적인 욕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물질에서 벗어나기를 사모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자연히 일종의 금욕사상을 갖게 된다. 이 세상의 금욕주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준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에게 어떤 이상(理想)을 줄 뿐이다. 이는 사람이 이런 이상을 가질 때 자연히 스스로를 위로하고 어떤 목표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단 사람이 이런 이상을 가지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준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수준과 목표를 정해 놓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이 단계에 도달하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금욕주의의 유래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거의가 다 정욕에 속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은 마음 속으로 정욕에서 구원된 사람을 존경한다. 그들은 마음 속으로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는 주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둔 어떤 표준이자 이상이다.


Ⅱ. 기독교 안에는 금욕주의가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주님을 믿은 후 부지불식간에 이 금욕주의를 교회 안으로 가져온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금욕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금욕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이방인들은 정욕을 방종하는 반면에 정욕을 극복한 사람을 존경한다. 이방인들은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는 반면에 물질에서 벗어난 사람을 존경한다. 그들 자신은 도달하지 못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이들은 주님을 믿은 후에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바 금욕주의를 교회 안으로 가져오고 또한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는 마땅히 금욕주의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 금욕은 물질을 경멸하고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다

 

금욕주의란 무슨 뜻인가?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금욕주의는 바로 밖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금욕하는 것이다. 이들은 밖의 물질적인 것들이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킬까봐 물질적인 것들을 적게 사용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금욕주의자들은 정욕 즉 각양 정욕이 사람 속에 있음을 인정한다. 식욕부터 성욕(性慾)에 이르기까지 각종 정욕들이 사람 속에 들어 있고 또한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실행하는 것들이다. 또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정욕들을 이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는 겉으로는 물질을 경멸하고 속으로는 자기의 정욕을 극복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또한 정욕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B. 그리스도인은 결단코 금욕주의를 제창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시종일관 결코 금욕주의를 제창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도 금욕주의를 제창한다면 그것은 얕은 것이다. 성경을 약간 읽어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음식이나 정욕이나 다른 물질적인 것들에서 자신을 억제하는 이것이 기독교이고 기독교의 이상적인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 안에 금욕주의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Ⅲ. 함께 죽은 사람은 세상 철학에서 벗어났다

 

골로새서 2장 20절-23절 :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혹은 철학)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A. 함께 죽은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다

 

바울은 골로새의 믿는이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기본 사실로 삼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다. 신약 전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로마서 6장은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갈라디아서 2장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은 또한 우리의 육체와 육에 속한 모든 것들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해서 골고다의 십자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점은 십자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삼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가 된다. 십자가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실을 자기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이미 그분 안에서 죽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실에 대해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변론의 근거로 삼았다. 그의 뜻은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결과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저기 앉아 있는 나이든 정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확실하다. 『당신의 성(姓)이 정씨입니까? 그렇다면 이 사실에 근거하여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만일 그의 성이 정씨라면 이어서 그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B. 세상 철학에서 벗어남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철학)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무덤 안에서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철학은 살아 있을 때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이 십자가에서 끝났고 죽어 마땅하며 완전히 끝났음을 보아야 한다. 정욕과 물질에 관한 것들은 모두 철학의 범위 안에 있다. 사람들은 정욕이 어떻고 물질이 어떻다는 것을 주의한다. 내가 거룩케 되기 위하여 물질에서 벗어나야 하고 내 속에 있는 정욕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상은 모두 세상의 철학이다. 여기서 바울은 너희가 세상 철학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세상 철학은 이미 끝난 것이다.


C.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같이

 

바울은 그 다음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철학)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같이』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죽었고 또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위치는 바로 죽음이다.

 

만일 당신이 죽지 않았다면 왜 침례를 받았는가? 사람은 먼저 죽는가 아니면 먼저 장사되는가? 물론 먼저 죽고 그 다음 장사한다. 만일 장사가 먼저 있고 죽음이 다음이라면 이것은 생매장이다. 오직 죽은 사람만 장사할 수 있다. 여러분이 받는 침례는 바로 매장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가서 장사지내는 것이다. 함께 죽은 것은 사실이다. 장사는 우리 자신을 묻는 것이다. 죽음은 주님이 나를 그분의 죽으심 안에 포함시킨 것이고, 장사는 내 자신이 죽은 사실을 보고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를 장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보았기 때문에 가서 자신을 매장시키려고 침례받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죽고 장사되었다면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같이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금욕주의를 실행하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금욕주의자들의 주창하는 바임을 기억하라.

 

그들은 많은 것들을 맛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며 만지지도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 속에 있는 정욕을 두려워하여 많은 것들을 붙잡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며 맛보지 못한다. 골로새 지방에서는 금욕주의가 상당히 심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많은 규례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욕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물질과 정욕을 분리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욕을 격동케 하는 것들에 대해 붙잡지 말고 만지지 말고 맛보지 말며, 듣지 말라는 등의 엄격한 규례들을 정해 놓았다. 정욕과 물질을 분리함으로써 욕심을 극복하려는 것이 당시의 철학이었다. 그들은 만질 것들이 없다면 욕심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같이 의문(금욕의 규례들)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런 규례들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만일 당신이 이미 죽은 사실을 믿었다면 어찌 금지할 어떤 것을 구하는가?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붙잡지 말고 맛보지 말며 만지지 말라는 규례들을 이행하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에게나 필요하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금욕주의는 불필요하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우리의 육체와 정과 욕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만일 당신이 물질에서 탈피하고 정욕적인 사상을 피함으로써 자신을 묶으려 한다면 당신을 죽지 않은 위치에 두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다. 죽지 않고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자신을 십자가 안에 포함시키지 않은 사람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은 교리를 전하고 있지만 함께 죽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1919년부터 함께 죽은 사실을 전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1923년에 다시 함께 죽은 사실을 말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죽은 것이 교리가 아니라 사실임을 보게 되었다. 함께 죽은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함께 죽기를 추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함께 죽은 것이 우리의 종착지가 아닌 기점임을 보아야 한다. 함께 죽는 것을 종점으로 삼아 추구하는 것은 신비파의 행위이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함께 죽은 것은 우리의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죽는 것을 추구할 수 없다. 함께 죽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요 그 안에는 빛이 조금도 없다. 만일 사람이 빛을 얻어 함께 죽은 진리를 보았다면 다만 찬미할 뿐, 그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볼 때 추구하지 않고 다만 찬미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으로서 세상의 철학과 금욕의 모든 규례들에서 해방된 것을 보여준다. 이에 관한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가령 당신이 도둑질을 하던 어떤 사람을 무덤 속에 묻었다 하자. 무덤 앞에서 당신은 그가 다시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함께 죽은 사람은 도둑질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에서도 해방되었다. 말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 되었다면 당신은 말 많은 데서 해방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죽지 않았다면 금욕주의는 필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를 못 박았다면 금욕주의는 너무 늦게 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 철학에서 해방된 나는 또한 세상의 모든 금욕주의에서도 해방되었다.


D.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아

 

22절 :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아』. 이 규례들과 금욕주의의 요구들은 모두 사람의 행위요 사람의 가르침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들이요 온전히 사람에게서 나온 것들로서 교회와 무관하고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바, 먹지 말고 만지지 말라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교리요 명령일 뿐 하나님의 교리나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다.

 

여기서 바울은 한 마디 엄숙한 말로써 이런 명령들과 교리들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들은 인간의 이상적인 생활이요 관점이요 규례일 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확실히 금욕을 좋아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다 먹는 것들을 안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실로 놀랍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다 물질의 지배를 받는데 여기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고 그것들을 사용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얼마나 고결하냐고 말한다.

 

금욕주의는 천연적인 종교일 뿐 계시의 기독교가 아님을 주의하라. 천연적인 종교는 사람의 가르침과 사람의 명령이다. 이 교리는 사람 속에 온전한 비춤과 계시를 주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는 정욕적인 것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은 정욕적인 것들이 더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금욕으로 반응한다. 이런 교리들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요 천연적인 것일 뿐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아니다.


E.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이어서 바울은 철학의 기능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얼핏 들을 때 금욕주의는 선하고 논하기에 썩 좋은 철학과 같다. 그러나 한번 사용해 보라. 이것은 마치 집에서는 펑크 나지 않은 자가용이 도로로 나가는 즉시 펑크 나는 것과 같다. 또한 옷장에 둔 보기 좋은 옷이 몸에 걸치자마자 여기저기 구멍 나는 것과 같다. 한번 시험해 보라. 금욕주의로 말미암아 정욕을 제거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당신이 금욕할수록 더 정욕 있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도피할수록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조차 두려워하고 대화하기를 두려워한다. 나는 오늘날 소위 고결하다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그들이 입으로는 말하지 않으나 그들의 담화 속에서 그들이 정욕적인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도피한다. 심하게 도피할수록 그의 속에는 느낌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광야로 달려가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자신을 어디엔가 감춘다. 세상의 능력이 그렇게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산으로나 도망가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세상은 그를 좇아 산으로, 광야로 가게 된다. 내적으로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피하려고 해도 피할 길이 없다. 여기서 바울은 한 마디 특별한 말을 했다.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욕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들은 정욕이 나올 때 즉시 넘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규례들을 정해 놓고서, 만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피하고, 세상적인 것에서 격리되고, 멀리 떠나 있고, 자신의 정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그 자신이 그것들에서 참된 구원을 얻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F. 사람으로 지혜 있는 모양을 갖게 한다

 

23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이런 것들은... 지혜 있는 모양이나』라고 말한다. 무릇 금욕하려는 사람, 즉 금욕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의 모양만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지혜 있는 모양은 모든 면에서 일리가 있고 지혜가 가득한 것 같다. 또한 확실히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람에게 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G. 자의적 숭배

 

여기서 바울은 직선적으로 금욕주의를 「자의적 숭배」라고 비평하며 판단한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실상은 자의(自意)적인 숭배이다. 「자의」는 「의지」로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이 규례들이 금욕주의에서 나온 숭배로서 의지 안에 있는 숭배이지 주님으로부터 온 숭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경배)하는 자는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들은 영이 없이 자의로 자신을 다스리고 의지를 사용한다. 바울이 말한 자의적 숭배는 바로 의지에 속한 종교라는 것이다. 이 종교는 의지에 근거하여 산출된 것이다. 나는 먹지 말고 만지지 말며 듣지 말고 말하지 말아야 하므로,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하고 의지로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영으로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우리의 특징은 우리의 강한 의지로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특징은 영이 강건해져 하나님의 은혜를 만지는 것이다. 우리의 경배는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을 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배는 의지로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는 완전히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또 하나는 완전히 사람에게 속한 것임을 보았는가? 자의로 숭배하는 것은 의지에 속한 종교이다.


H. 인위적인 겸손

 

『겸손한 체하며』(원문참조). 이런 사람은 아주 겸손한 사람같이 자신을 향하여도 겸손하다. 많은 것들을 만지지 않고 붙잡지 않으며 듣지 않고 보지 않으니 아주 겸손한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겸손들은 자신에게서 나온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겸손으로서 스스로 만들어 낸 겸손이지 영에 속한 자발적인 겸손이 아니다.


I. 몸을 괴롭게 함

 

자신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몸을 괴롭게 한다』. 자기 몸에 대하여도 어떻게 먹고 입어야 하는가를 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몸으로 어떤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만지지 못하게 하며 듣거나 붙잡지도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금욕주의자들은 몸을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이스에서 인도, 인도에서 중국에까지 이런 사상이 전해졌다. 이런 사상에 있어서 중국인은 인도사람보다 심하지 않고 더우기 그리이스 사람같이 심하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그리이스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이스 사람 중의 한 파로부터 이런 사상이 인도에 전해졌고 후에 중국에까지 전해졌는데, 그 파의 사상은 육신을 죄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육신을 벗어날 수 있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 사상이요 세상의 철학이다.

 

그들은 몸이 죄의 근원이요, 몸에서 벗어날 때 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몸에서 이 많은 죄악들이 산출되었기 때문에 몸을 괴롭게 하고 많은 고통을 거치게 해야 죄를 적게 범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몸으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몸으로 낙을 누리게 할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당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몸으로 고통을 느끼게 해야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의 의지적 종교가 하는 일이다. 즉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J. 유익이 조금도 없다

 

주님을 믿은 사람의 위치에서 볼 때 이것은 어떤가? 바울은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정욕을 금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준비를 하셨는데 곧 우리의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서 십자가에서 이룬 역사를 붙잡고 우리 육체의 정욕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사람의 정욕을 다루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님이 이루신 사실을 시인한다.

 

사람이 죄 사함 얻는 것이 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듯 자신의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도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다. 피 흘리심이 주님께서 이룬 역사이듯 십자가도 주님이 이루신 역사이다. 우리는 피 흘리심을 믿고 십자가를 영접한 후에 즉시 침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못 박았기 때문에 나는 자신을 묻어달라고 사람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침례는 바로 주님이, 당신이 죽었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내가 가서 묻겠다고 답하는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못 박고 다시 살 수 없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죽은 사실에 대해 아무 의심을 품지 않고 다만 묻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침례는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인다는 표시이다. 오늘 만일 내게 아직도 금욕주의가 있다면, 나는 아직 죽음의 위치에 서 있지 않은 것이다.


K. 위엣 것을 찾으라

 

3장 1절부터 3절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바울은 십자가에서 시작하여 부활로 마친다. 여러분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므로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만질 수 없는 것들과 맛볼 수 없는 것들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주의한다면 당신은 땅엣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어서 너희는 부활한 사람으로서 하늘의 것들을 찾으라고 말한다. 만일 하늘의 것들을 상관한다면 땅의 문제들은 다 해결되리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영에 속한 것들을 생각해야지 먹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며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Ⅳ. 금욕은 귀신의 가르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왜 이런 금욕주의를 중요시하지 않는가? 이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들어온 잘못된 이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처리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디모데 전서 4장 1절부터 3절을 읽어보자.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이것 역시 금욕주의이다. 세상 끝날에 금욕주의가 크게 부흥할 것이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물질만 주의하는 경향이 있으나 다음 세대에 가서는 물질을 경멸하는 금욕주의를 주의하게 될 것이다. 금욕주의란 무엇인가? 바로 혼인하지 않고 식물을 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금욕주의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곧 음식과 성욕을 버리려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이 모든 것이 재현될 것이다.


Ⅴ. 천성과 정욕의 차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천성과 정욕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먼저 이 두 가지를 같이 언급해보자.


A. 욕구(慾求)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식을 주시기로 정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식욕을 주셨다. 식욕은 그 때에 아직 죄가 아니었고 정욕에 속하지도 않았다. 사람에게는 식욕이 있어서 먹음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되 그저 무미하게 먹게 하지 않으시고 먹기를 좋아하게 하셨다. 먹기를 좋아할 때 우리는 양육을 받고 생명이 보존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욕(性慾)을 주신 목적도 생육하고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기를 좋아하는 욕망을 주셨다. 식욕이든 성욕이든 창세기 2장에서는 아무런 죄가 아니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죄가 아니다. 우리는 욕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들이다.


B. 정욕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정욕이란 무엇인가? 만일 오늘 내가 배고파서 먹는다면, 그것을 맛있게 느끼는 것은 정욕이 아니라 식욕이다. 그러나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이 먹는 것을 보고 훔쳐 먹거나 빼앗아 먹거나 제멋대로 먹는 것은 정욕이다. 먹고 싶은 것은 식욕이다. 그러나 훔쳐서 제멋대로 먹는 것은 정욕이다. 식욕과 정욕에는 차이가 있다. 식욕은 먹고 싶은 것이고 또한 먹을 때에 쾌감이 있다. 정욕은 훔쳐서 먹는 것이요 빼앗아서 먹는 것이요 제멋대로 먹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먹을 것이 있을 때 먹고 없을 때에는 먹지 않아야 한다. 나는 자주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빼앗지 않고 훔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느낀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의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5장의 가르침은 정욕이 있는 것이 불가(不可)할 뿐 아니라 그런 느낌까지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볼 때 먹고 싶거나 먹을 때 아주 입맛이 있는 것은 식욕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서 조금도 죄가 아니다.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먹기 전에 음식을 보고서 훔쳐 먹으려고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식욕으로 인해 산출된 정욕이다. 우리가 남에게 먹을 것이 있는 것을 보고 훔쳐서 먹으려 하거나 빼앗아서 먹으려고 하는 것이 정욕이다. 이것은 식욕에서 나온 정욕이다. 식욕이 있을 때 훔쳐서 먹거나 빼앗아서 먹는 것이 바로 정욕이다.

 

구약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인은 배고파서 무언가 먹고 싶으나 먹지 못할 때, 도적질할 수 없고 강탈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조차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의 원칙이다. 구약은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신약은 그런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적질과 강탈함뿐 아니라 도적질하려는 생각과 강탈하려는 생각도 정욕이다.

 

성욕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세상의 상태를 위한 것이다. 음식은 개인의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한 것이고 성(性)은 인류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은 탈취하거나 도적질 하며 혹은 탈취하고 도적질하려는 생각을 갖는다. 때로 그들은 방자하고 방종하며 때로는 마음껏 먹고 마신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모두 정욕이라고 한다. 우리는 식욕도 성욕도 모두 정욕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C . 십자가가 정과 욕심을 처리했다

 

성(性)은 본래 선한 것이고 먹는 것도 선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정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바로 과다한 욕구나 다른 생각이 있을 때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하셨다. 그분은 이미 우리의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처리하셨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놀라운 복음이다. 십자가가 우리의 정과 욕심을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도적질하고 탈취하려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 모든 사람은 행위에서 깨끗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생각에서도 깨끗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육체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생각에서와 행위에서 청결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이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D. 하나님의 생명은 지극히 적극적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욕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께서 새 영과 새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새 영은 우리로 하나님을 만질 수 있게 하고 새 생명은 우리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게 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소극적이지 않고 지극히 적극적이다. 우리가 정욕을 처리함은 다만 정욕을 처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게 하는 새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만지게 하는 새 영이 있다. 이 적극적인 것들이 우리를 만족케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먹지 못하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과 맛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규례들을 주의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소극적인 것들을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것들과 영광스런 것들을 많이 만지고 영광의 영과 생명을 계속 만질 필요가 있다. 이 적극적인 것들을 만질 때 먹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것은 극히 작은 것으로 변한다.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육신에 금욕주의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다(이것을 주의하는 그리스도인 무리도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적극적인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금욕주의를 가져가 버리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그들은 하루 종일 이것을 보지 않거나 저것을 붙잡지 않거나 이것을 먹지 않거나 저것을 만지지 않거나 이것을 듣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들에게서 이것들을 가져간다면 그들의 온 세계가 다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천지요 세계이다. 이것이 그들의 우주이다. 이 우주가 파괴될 때 그들에게는 세상이 없고 모든 것이 다 끝나게 된다.


Ⅵ.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융통성이 있다

 

우리의 음식 등에 관하여 성경은 매우 융통성이 있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이것들은 큰 것이 아니라 매우 작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안목에서 볼 때 이것들은 작은 것들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인 그리스도의 생명이 중요하고 큰 것이다. 이 영광스럽고 지대한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먹고 입는 것은 미소한 것으로 변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융통성을 보여준다.

 

당신이 주님 앞에서 옷을 초라하게 입어도 좋고 먹는 음식이 남보다 다소 좋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 누가 당신에게 음식을 많이 주어도 좋고 또 당신이 조금 많이 먹어도 좋다. 오늘 당신이 주로 인하여 시집가지 않고 장가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매우 좋다. 반면에 시집가고 장가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다. 어떤 사람은 속에 그리스도의 풍성이 없어서 그의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를 가져가 버리면 그의 세상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풍성이 있으므로 계속 전진할 수 있다. 시집가지 않고 장가가지 않는 것은 좋은 것이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좋은 것이다. 그 적극적인 것이 너무 크고 영광스럽기 때문에 이 문제들은 극소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만일 한 사람이 이런 일들을 지극히 큰 일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느낌이 어떤가를 알 수 있다. 혼인 문제이든 음식 문제이든 이것들은 모두 작은 것들이다. 그리스도인이 조금 더 먹고 덜 먹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요 기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영적인 실제가 우리 몸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 영광이 온전히 표현될 때 이것들은 자연히 합당한 위치에 놓여진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이 작은 것들은 모두 큰 것으로 변해 버린다. 이런 일들을 금욕주의로 처리하는 것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주님을 아는 사람은 이런 문제를 쉽게 통과한다.


A. 먹고 마시지 않는 것도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도 아니다

 

마태복음 11장 16절부터 19절 :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기서 당신은 주 예수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외적 생활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을 내리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요한이 왔을 때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으며, 그분 자신이 오셨을 때에는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한다고 말씀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 마셔도」 좋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좋다.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요한은 광야에 거했고 주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계셨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상을 완전히 바꾸어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 것을 주의하거나 참된 생활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요 먹고 마시는 것도 아니다.


B. 성령의 통치는 모든 일을 능하게 한다

 

빌립보서 4장 11절부터 13절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배부르거나 배고픈 것이 아니다. 또한 다 풍부하거나 궁핍한 것도 아니요 모두가 비천하거나 풍부한 것도 아니다. 풍부이든 비천이든 우리는 다만 성령의 통제를 받아들인다. 주님의 안배라면 배고픔도 좋고 배부름도 좋다. 주님이 우리로 궁핍하도록 안배하여도 좋고 풍부하도록 안배하여도 좋다. 바꾸어 말해서 어떤 일에서도 이쪽이든 저쪽이든 다 좋다. 어찌하든지 주님은 내 몸에서 능력 주시는 자가 되신다. 이것은 적극적인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작은 일이요 큰 일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융통성 있는 이 생활을 배우기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금욕이 아니요 방종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금욕하지 않고 방자히 행치도 않으며 생활에 항상 융통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외적 생활은 스스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령의 안배를 따르는 것이다.


C. 초월하는 것이지 금욕하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7장 29절부터 31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말을 한다.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말한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당신 안에 거하는 주님께서 이렇게 크기 때문에 밖의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억제하거나 금욕하는데, 이것은 그것들의 세력이 얼마나 큰가를 증명한다. 금욕하는 사람일수록 정욕으로 가득하다. 오직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에게만 금욕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아내 없는 자들은 아내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우는 자들은 그 우는 것에 상관치 않고 기쁜 자들은 그 기쁨을 관심치 않는 것이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금욕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Ⅶ. 기독교를 낮추지 말라

 

우리는 결단코 기독교가 금욕적인 것이라는 잘못된 사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결코 잘못 인식하여 기독교를 낮추어 금욕주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말아야 한다.


A. 몇 가지 이야기

 

(1) 침상에서 자지 않는 사두 썬다싱

 

사두 썬다싱은 인도인으로서 티벳에서 수년간 복음을 전했었다. 그는 영국의 케스윅으로 건너가 거기서 약 육 개월간 지냈다. 나도 그 지방에 가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그가 묵었던 집 주인을 상당히 난처하게 하였다고 했다. 그때 날씨가 상당히 추워서 주인이 그를 위하여 침대를 준비해 주었는데 그는 매일밤 실지 인도 사람과같이 마루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나는 성경적인 생활은 침상에서 잘 수도 있고 바닥에서 잘 수도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속에 든 것이 없기 때문에 침대에서 자면 기독교가 사라진다. 그의 기독교는 침대에서 자지 않는 것이다. 침대에서 잠을 잘 때 그의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진다. 중국에서도 이교적 사상이 계속 교회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침대에서 자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바닥에서 자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다. 땅바닥에서 자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요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다. 결코 이 외적인 것들을 주의하지 말라. 이 외적인 것들을 주의할 때 그리스도인의 수준이 낮아지고 영광스런 영적 생활을 규례에 떨어뜨리게 된다. 우리는 그 규례 안에서 맴돌 수 없으며 영광스런 것들을 보아야 한다.

 

(2) 약혼 후에 설교할 수 있었다

 

금욕주의를 믿는 사역하는 한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한 자매와 약혼을 했는데 이 이튿날은 주일이었다. 그날 내가 그를 만났을 때에 그는 매우 우스운 이야기를 했다. 『저는 설교를 마치고 아주 즐거웠습니다. 어제 약혼을 하고서도 오늘 설교할 수 있었으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 때 나는 그에게 『그럼, 당신은 약혼했으니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사람의 사상을 보라. 그는 어제 약혼했다고 해서 오늘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 가운데 상당히 좋은 형제였는데도 부지불식간에 금욕주의에 사로잡혔었다.

 

우리는 금욕주의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문지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영광스런 일에 의해 만진 바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지금 하늘 위에 앉아 계신다. 이런 빛들이 크면 클수록 금욕적인 것들은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큰 생명 아래서 그 일들은 매우 작은 것이다.

 

(3) 결혼한 지 이 개월 되었는데도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한 연로한 목사는 산동(山東)의 한 목사를 칭찬하면서, 그는 결혼한 그날부터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이 개월 동안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것은 금욕주의이다. 만일 구약을 읽어본다면, 사람이 결혼한 후 첫해에는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성경이 이런 날짜를 매우 중요시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절대로 정욕이 아니다. 기독교는 결코 금욕주의가 아니다. 기독교가 주의하는 것은 이런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다. 많이 먹고 적게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에 달렸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 먹지 않고 만지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세상과 접하는 것이요 전적으로 세상적인 일들을 주의하는 것이다.

 

(4) 코트를 입고 사역할 수 있는가

 

상해에서 강북으로 사역하러 간 두 자매가 있었다. 날씨가 추운 고로 그들은 코트를 입고 갔다. 강북에서 어떤 사람이 여자가 코트를 입고서 사역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리가 코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코트를 입고는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코트에 있지 않다. 그런 사람은 옷 입는 것에 만진바 됨으로 그의 전체 기독교가 코트에 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가련하다고 생각한다.


Ⅷ. 기독교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

 

성경에서 말한 고난받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만일 이것이 고난받는 것이라면 인력거꾼도 능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기 때문이다. 결코 이런 것들을 가져오지 말라. 이교적인 사상을 가져오지 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볼 때 마땅히 화를 내야 하고, 사람들이 우리 주의 영광을 진흙덩이와 잿더미 속에 던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의 영광을 엿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기독교가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주의하기 바란다.

 

만일 기독교가 단지 먹고 입는 것 곧 음식과 의복과 침대에만 있다면 우리가 기독교를 전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나는 산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외칠 수 있다. 『나의 기독교는 당신들의 입고 안 입는 것과 다르다. 당신들의 먹고 안 먹는 것과도 다르다. 당신들의 기쁨과 애통과도 다르며 당신들의 세상 물건을 쓰고 안 쓰는 것과 다르다. 나의 기독교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생명이 내 안에 거하므로 나는 매일 하늘에 이끌리어 보좌 위의 영광을 만진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하나님이 이 적극적인 것들을 우리 몸에 충분히 나타내실 때 이런 일들은 다 지나갈 것이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기독교가 금욕주의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생활임을 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분은 너무 크시고 영광스런 분이기 때문이다.


워치만 니
[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금욕주의",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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