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e Hui 의 워치만 니 성령론 비판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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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e Hui 의 워치만 니 성령론 비판에 대한 반론
‘양무리 마을’ 카페지기인 홀리조이 님은 Archie Hui 박사께서 쓴 논문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The Pneumatology of Watchman Nee: A New Testament Perspective, The Evangelical Quarterly Journal, Jan. 2004)을 번역하여 자신의 카페에 소개하고 있습니다.(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cj/1542) 또한 그 글은 최소한 다음 두 곳, ‘편지쓰는 사람들’과 ‘전국 미자립교회돕기 운동본부' 카페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1. Archie Hui 박사의 비판 내용
Hui 박사는 워치만 니가 언급한 성령의 두 방면 즉 ‘사람 위에(‘upon’, epi) 임하는 성령’과 ‘사람 안에(‘in’, en) 오시는 성령’의 구분에 대하여 총 다섯 가지 세부 항목으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한글 번역은 이들 중 일부만 되어 있음).
워치만 니는 성령께서 구약에서는 사람 위에만 임했지만, 신약에서는 사람 위에 그리고 사람 안에 오신다고 말하고, 성령의 내적 임재는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과 성화에, 외적인 오심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관계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하여 Hui 박사는 주로 막스 터너(Max Turner)의 견해와 70인 역본을 토대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론 부분에서, “비록 자신의 워치만 니 성령론 연구 결과가 신약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주요한 불일치를 보여주긴 했지만, 워치만 니가 성령에 관해서 말한 것의 대부분―교회 사역과 세움을 위해서는 영적인 은사들이 중요하다는 주장 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밝힘으로 Hui 박사의 균형 있는 학자적 양심을 엿보게 합니다.
2. 지방교회 측의 반론
영국 런던 교회(the Church in London) 짐 배튼(Jim Batten) 형제님은 지방교회 측이 발행하고 있는 신학 잡지인 A&C 2005년 10월 호 서평란(http://www.affcrit.com/pdfs/2005/02/05_02_br.pdf 두 번째 글)에서 약 7쪽에 걸쳐 위 Archie Hui 박사님의 논문에 대한 반론을 실었습니다.
먼저 짐 배튼은 Hui 박사께서 “그 영의 구약에서의 역사와 신약에서의 역사의 특징에 차이가 있음을 부인함으로, 침례 요한 안에서의 성령님의 운행하심(operation)과 주 예수님 안에서의 그분의 운행하심의 본질에 차이가 있음을 보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 이어서 그는 Hui 박사께서 요한복음 20:22와 사도행전 2:4의 성령의 영접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과 회심 후에 믿는 이가 그 영의 채워짐(filling)을 추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그는 구약에서 그 영과 사람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세 곳(창 41:38, 민27:18, 단5:11)에서 쓰인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성령이 구약에서도 사람 안에 내주하신 것으로 보기에는 '매우 약한 근거'(very weak basis)임을 전후 문맥을 살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구약에서 그 영이 사람 ‘위에’(upon) 임한 사례들(총 26회)을 일일이 성경구절들을 열거하여 소개합니다.
반론자는 이어서 “워치만 니처럼 성령 충만(filling)의 내적인 방면과 외적인 방면을 인정하면, 요한복음 20:22와 사도행전 2:4에서 성령을 주심 사이의 ‘긴장’(tension)은 쉽게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렇게 할 때 “부활의 날에 일어난 사건과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은 서로 충분히 조화된다”는 것입니다.
짐 배튼은 결론에서 Hui 박사가 워치만 니의 ‘그 영의 두 방면’을 반대한 것은 엄격함(rigor)이 결여된 언어학 상의 논증과 요한복음 20:22에 대한 설득력이 없는(unconvincing) 신학적 논증에 근거했음을 지적합니다.
아울러 그는 Hui 와 달리, 생활을 위한 성령의 내주와 능력을 위한 성령의 부어짐을 구별할 때 비로소 다음 세 가지가 포함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여러 방면들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 율법 시대인 구약과 은혜 시대인 신약의 차이, 2) 선택되고 구속된 백성들 안으로 삼일 하나님을 공급(dispensing) 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의 그리스도와 그 영의 (경륜적-역자 주) 하나됨(oneness). 3)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 안에서 믿는 이들의 거듭남과 변화를 위한 성령의 내적인 역사와 하나님의 법리적인 구원 안에서 그들의 회개와 화해를 위한 사람 위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구별. (더 상세한 양측 주장들을 알기 원하시는 분들은 원 출처를 방문하여 관련글을 직접 읽으시기 바랍니다)
3. 결론
현재의 쟁점들이 포함된 성령론은 한국 교계에서 신학자들 간에 큰 폭의 의견의 불일치를 보여 주는 분야들 중 하나입니다. 특히 그동안 정통 교리 여부를 가리는 잣대로 간주되어 온 개혁신학도 이 주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 본문들, 이를 테면 요7: 39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 요20:22, 행2:4, 고전 15:45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등의 해석에 있어서는 신학자들마다 큰 편차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예로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문제>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변종길 박사님의 아래 글은 같은 범주의 신학자인 Hui 박사가 아니라 오히려 워치만 니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내주는 신약 교회를 특징 짓는 새로운 무엇이다. 왜냐하면 우리는…성령이 구약의 신자들 속에 내주하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구약 어디에서도 성령이 교회의 확고하고도 영원한 거처로 삼으셨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들 안에 내주하셨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없다…”하나님의 성전”인 신자들 안에 거하는 그러한 성령의 내주는 구약 시대 즉 오순절 성령 강림 전에는 없었다.’ (변종길, 성령과 구속사, 개혁주의신행협회, 2006. 218-219쪽)
그러므로 지금처럼 쌍방의 주장에 이견이 있을 때 개혁 신학자(Archie Hui)의 주장은 성경적이고, 그와 다른 워치만 니의 견해는 비 성경적이다 라는 식의 무조건적인 이분법적 사고는 경계 되어야 합니다. 그로 인하여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분별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양쪽 견해 모두를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 그분의 빛 비춰 주심을 앙망하는 것이 진리를 바로 알 수 있는 균형잡힌 자세일 것입니다. 끝으로 이러한 간접 대화를 통해 보수 신학과 워치만 니(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상호 이해가 더 높여지는 기회가 되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