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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下)

 

5.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의 영론> 비판 재반박


소금이 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 할 수 있는가? 누가 소금이 짜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우선 과거에 소금을 먹어 본 사람의 증언을 듣게 할 수 있다. 좀 더 고상한 방법은 과학적으로 화학성분을 분석함으로 소금의 짠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소금을 직접 먹어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데 일단 소금을 먹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런 저런 이론을 들어 소금이 짜지 않다고 해도 그것에 쉽게 동의 할 수 없다. 이처럼 이미 사람의 영과 혼이 다름을 체험적으로 <경험 한> 사람은 이것을 부인하는 원세호님의 이런 저런 교리적인 말이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뿐이다.


생명의 말씀사가 펴낸 워치만 니의 <혼의 잠재력>(2000년)에 쓰여있는 다음과 같은 워치만 니의 말은 사람의 <영과 혼의 분리의 필요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24년에 내가 처음으로 영과 혼을 분리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을 때, 호의를 보여준 많은 사람들은...어휘논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투쟁이 어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실에 관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영과 혼은 전적으로 다른 기관이다. 하나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신자들은 영과 혼, 혼과 영을 혼동하거나 기만당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어지럽히는 악령의 위선을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5 쪽).


'모든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영을 통해 이뤄지고 모든 원수의 역사는 인간의 혼을 통해 이뤄진다. 성령은 인간의 영을 움직이는 반면에 악령은 인간의 혼을 움직인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의 역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에 의해 시작되지만 원수의 역사는 인간의 혼 안에서 시작된다.'(44쪽).


'영과 혼의 작용의 결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첫사람은 산혼(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여기서 바울은 첫째 아담이 산 혼이 되었다고 한다. 그 혼은 생명을 갖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일을 하게 한다. 이것이 아담이 차지했던 지위를 가리킨다. 바울는 계속해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영과 혼의 작용의 결과가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고 그들을 살릴 수 있다. 혼은 그 자체가 살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밖에 없다....우리는 이 두 가지 작용을 명백히 구별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점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만족스러운 사역을 할 수 없다...혼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아무 유익이 없다. 우리는 용어상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원리이다'(81-82쪽). 영적인 세계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위 말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는 영문자료는 다음 홈페이지들을 참고할 수 있다.


http://www.truthinlove.com/concise/parts_of_man.shtml
http://www.pbc.org/dp/dyingtolive/ch10.html
http://www.heavendwellers.com/hd_body_soul_spirit_chart.htm
http://www.aaronc.com/bodsoul.html
http://www.geocities.com/Athens/Acropolis/3087/
http://www.endtimesnetwork.com/antipas/ant_chp8e.html
http://www.cjf.org/pages/BibleQuestions/bq34ans.htm
http://www.valiantfortruth.com/html/sin06.html
http://threshingfloor.org/spiritsoul.htm


이제 원세호님의 비판을 항목 별로 간략하게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요한복음3:6을 설명하면서...소나 말로부터 태여 난 것이 소나 말이듯이 인간은 영으로부터 났는데 그 영이 하나님이시다(요4:24)라고 하면서 분명히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 안에서 하나님들이다'라고 주장한다...위의 주장은 그럴듯한 것이지만...그 때에(창2:7) 하나님으로부터 추가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네샤마' 이며 생기로 번역된 것이다. 이것이 '영'인 것은 사실이지만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일부분을 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영을 출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과 대등하게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본래부터 가진 하나님 되심의 고유한 특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인간은 피조물로 믿음을 통해 거듭나지만 양자의 신분이며 하나님은 아니다.> <② '위트니스 리'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영들(하나님 종류에 속한), 하나님들이 된다'고 주장한다.>


** 반박: 원세호님은 원문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① "요한복음 3장은 거듭남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육체이며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 육체로부터 난 육체이다. 소로부터 난 것은 소이다. 말로부터 난 것은 말이다. 우리는 영으로부터 났고 그 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요4:24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영이심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 영 하나님께로 났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 안에서 하나님들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영(Spirit)으로부터 난 영(spirit)이다">(27.(하나님-사람의 생활) p. 19).


원세호님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지금 창조 시 사람 안에 들어온 '네샤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사먀인 사람의 영 안에 <영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말하고 있다. 즉 네사마가 하나님의 일부라는 말이 아니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요3:6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신 그영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인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글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 종류에 속하는 <하나님-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재적인 연구이다...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종류에 속한 <하나님-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고 하나님의 종류에 속한 하나님-사람으로서 우리는 느슨한 방식으로 우리의 배우자에게 말할 수 없다. 남편은 반드시 하나님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하나님-사람의 생활, 19-20쪽).


하나님이 사람인 우리와 연합하셔서 한 유기체(그리스도의 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고전12:27, 요15:5).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사람이시라면, 그 몸인 우리들도 하나님-사람들이라는 말은 당연한 것이다. 포도나무 줄기만 포도나무이고, 그 가지는 포도나무가 아니라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거듭났지만 양자의 신분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라는 원세호님의 말은 하나님의 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음을 부인하는 듯한 말로 들린다. 이처럼 거듭남의 정의(http://www.regenerated.or.kr/whatisit/index.html)가 바르지 못할 때 정통교부들이 가르쳤던 '신화'(사람이 하나님이 됨) 진리를 소화하기엔 벅찰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③ 영이 힘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몸에 있을 때 중재자인 혼 즉 영과 몸이 접합으로 생긴 혼이 중재를 해야 힘을 낸다는 주장이다. 우선 혼의 생성 이론 자체가 성경 창2:7과 약2:26; 히12:9; 롬8:6-7절에 의하여 거짓인 것이 증명된다.>


** 반박: <워치만 니 주장: ③ "영은 직접적으로 몸에 힘을 행사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중재자가 필요한데, 그 중재자가 영이 몸을 접함으로서 생겨난 혼인 것이다">(24.(영에 속한 사람) p.41). 사람의 영 안에서 무엇을 원하더라도 사람의 혼에 해당되는 생각 또는 의지의 자발적인 도움 없이 우리의 몸이 그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는다는 위 주장은 성경적이다. 물론 우리의 체험도 이와 같다.


증명해 보자. 마26:42 은 '영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the spirit indeed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라고 말한다(여기서 개역 성경에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이라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원문이 spirit(푸뉴마, 4151) 이지 heart(카르디아, 2588)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 말씀에서 영이 원하는데 왜 제자들은 실제로 입을 열어 기도 할 수 없었는가? 그것은 영의 원함을 따라 입을 움직여 기도해야 할 그들의 혼(자유의지, 생각, 감정)이 영의 요구보다는 피곤해서 늘어지는 육체의 요구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서 7장의 세 법에 대한 설명은 위 워치만 니의 주장을 지지한다. 즉 롬7:22-23에 의하면, 우리의 <영>을 가리키는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우리 <육체>인 지체 속에 있는 또 다른 법이 우리 <생각>의 법과 싸운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 안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간다. 즉 깊은 속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양심의 음성이 있지만 그 음성에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는 육체에게 영향력이 없게 된다. 대신에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육신의 욕구에 이끌려짐으로 오히려 영의 요구가 아닌 육신의 욕구가 실현되고 만다. 이런 일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자주 경험되는 일이다(롬8:6). 원세호님도 정상적인 믿는 이라면 이런 갈등을 충분히 겪어 보았을 것이다.


3) <원세호님의 비판: ④ '영'이 세 가지 중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양심, 직관, 영교, 라고 주장하는'워치만 니'는 성경에서 이탈하여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육신도(몸) 생각하며 영도 사유하며 생각한다. 이것은 혼작용이며, 영혼의 생명현상이다(롬8:6-7; 7:22-24).> <⑤ 인간의 영이 거듭나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는 영과 혼이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거듭나기 전에 영은 혼의 부속품처럼 보이도록 영이 잠식을 당해 영의 기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그러나 위의 주장은 거짓이다. 첫째는...추측에 불과 한 것...둘째는 성경 롬8:6:7절에 의하면 육신인 몸도 동물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며....따라서 거듭난 후에는 영의 생각과 몸의 생각이 구별되며(롬7:22-24)...>.


** 반박: 원문을 소개하고 반박해 보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영이 혼에 둘려 쌓여 너무나 침체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혼에서 발산되는 것인지, 어느 것이 영에서 발산되는 것인지를 도무지 구분 할 수가 없다. 영의 기능이 혼의 기능과 혼합되어 있다. 게다가 영은 하나님께로 향한 최고 주요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그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는 죽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은 혼의 부속품처럼 보이도록 영은 잠식을 당하여 영의 기능이 거의 나타나지 못하게 마련이다. 구원받은 후에는 영과 혼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4. (영에 속한 사람) p.55,)


우선 원세호님의 비판은 우리의 체험과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의 몸(body)은 오감은 가졌지만 이러한 신체 자체가 심리적 기능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몸(신체)이 생각한다고 말한 곳이 없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원세호님은 아마도 로마서 8:6의 <육신의 생각>이란 말을 <육신이 생각을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의 <몸>인 육신이 생각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주체)이 육신에 속한 것들(대상)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골3:2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롬8:6의 <육신의 생각>은 여기의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눈 코 입 팔 다리 등으로 이뤄진 우리의 몸 자체가 생각을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신체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의학도들에게도 금시초문의 이야기일 것이다. 생각은 심리작용이지 신체작용이 아니다.


4) <원세호님의 비판: 육의 율법에 관련해서 사람이 애초에는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설명은 모두 거짓 주장으로 사료되니 정신차려 확인하라, 성경 창2:7과 약2:26; 행5:59; 요19:30등 증거에 의하여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 말이며 성경에 대하여 부인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 반박: 여기서도 워치만 니 글을 우선 인용하고 이어서 반박해 보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⑥ "이와 같이 "육"의 용법과 관련해서 사람이 애초에는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혼은 사람의 인격과 인식의 자리이기 때문에, 혼은 사람의 영을 통하여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혼은 영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그의 뜻이 연합 될 것인가, 아니면 몸과 물질 세계의 모든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기화로 해서 혼은 영의 권위를 대적하여 몸과 그 정욕의 종이 되었다. 이리하여, 사람은 영적이 아닌 육적인 사람이 되었다">(24.(영에 속한 사람) p.118).


원세호님은 사람이 '영 혼 몸'(3분)이 아닌 '몸과 영'(2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세호님이 제시한 창2:7, 약2:26은 요19:30은 이분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도행전5:59는 성경에 있지도 않다. 성경을 이처럼 함부로 인용하면 안될 것이다.


이분설, 삼분설 관련 논의는 앞에서 이미 충분히 다뤘다. 생각해 보라. 만일 사람이 몸과 영만 있다면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만 있어야 옳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심리적인 정신세계가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독서는 마음의 양식> <책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살찌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일반 고전문학을 읽는 것이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신자들의 <영>의 양식이 되지도 못한다. 영적 양식은 오직 책 중의 책인 성경뿐이다. 그러나 고전문학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분명히 우리 <정신, 혼>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세호님은 이런 실증적인 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교리 안에서 사실과 다른 말을 반복하면 곤란하다. 원세호님은 자신과 워치만 니 중 누가 성경과 과학적인 증거들을 부인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5) <원세호님의 비판: ⑦ '위트니스 리'는 인간의 영이 해방될 때 성령이 우리 영과 함께 해방되며, 이것이 성취되려면 우리의 천연적 사람 곧 겉 사람이 폐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영만 죄에서 해방하는가? 아니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영의 해방을 말하는 것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특별히 성령이 영의 해방과 함께 해방된다니... 언제 성령님이 죄에서 얽매인 바가 있는가? 그가 부자유스러운 때가 있어 자유스럽게 된다는 것인가? 이런 말은 정신이 없는 소리이다.>


** 반박: 본문을 인용하고 원세호님의 비판을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 ⑦ "나는 '(자아의 파쇄와)영의 해방'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영의 해방은 성령의 해방이라고 생각할까봐 염려스럽다. 이것은 진리를 따른 것이 아니다. 영의 해방은 성령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해방이다. 우리 영이 해방될 때,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해방된다. 이것이 성취되려면 우리의 천연적 사람 곧 겉 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40.(교회의 역사와 지방교회들) p.63).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 뒤에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니 형제님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는 늘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파쇄 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 우리의 자아, 우리의 천연적인 조성은 파쇄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은 성령이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안배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을 파쇄시켜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의 영으로 해방되게 한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성령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영과 함께 해방된다'(위 책, 62쪽).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마16:24). 여기서 '우리 자신이 부인되고 십자가를 진 상태'가 천연적인 사람 곧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고 했다. 여기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생활 중에 표현되시는 것이 '성령이 우리 영과 함께 해방 되셨다'는 말과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이다.


즉 <사람의 영의 해방>이라는 말은 우리의 생각이 영에 두어짐으로(영의 일을 생각함으로) 영의 의도와 원함이 우리의 생각을 거쳐 우리의 몸으로 실행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롬8:6). 이와 반대로 굳어진 마음과 생각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 안의 원함이 좌절되고 실천되지 못할 때 우리는 속에서부터 답답함과 갇힌 듯한 느낌을 체험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우리의 겉 사람의 고집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제한되고 심지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자아가 부인되고 그리스도가 사셔야 하는데(갈2:20) 우리의 자아가 너무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대로만 함으로 그리스도가 부인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에 성령은 우리 영 안에서 근심(grieve)하기까지 하신다(엡4: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의 불순종이 계속되면 깊은 속의 성령의 역사는 잠잠해져서 마치 성령이 소멸된 듯한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성경은 이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성령을 소멸치 말라'(Quench not the Spirit)고 경고한다(살전5:19).


매우 고집스럽던 사람도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겉 사람이 깊이 다뤄지면 자기 주장이 줄어들고 매사에 주님께 묻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구약에서 광야 생활 이전의 모세와 이후의 모세, 신약에서 회심 전의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런 것은 영의 역사를 알고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마16:24)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공감이 되는 말들이다. 이런 당연한 주장에 대해 원세호님이 <이런 말은 정신이 없는 소리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런 성령의 역사와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이 아예 없거나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6) <원세호님의 비판: ⑧ '위트니스 리'는 영이 혼에 깊이 박혀 있고 혼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혼은 쉽사리 인지되지만 영은 알기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위 말은 어리석은 고백이다. 왜냐하면 '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혼은 생명현상으로서 정신이니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마음은 인지하나 보지 못함 같이 영혼의 생명현상 혼이 인지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근본이 성경에 맞아야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인데 근본이 틀렸으니 무슨 말인들 맞을 수 있겠는가!>


** 반박: 원문 인용 후 비판에 대해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⑧ "우리는 우리의 혼과 영을 분별해야 한다. 혼은 마치 뼈가 골수를 감추고 있듯이 영을 덮어 감추고 있다. 뼈를 보기는 쉬워도 속에 감추인 골수를 보기란 쉽지 않고...영은 얼마나 혼에 깊이 박혀있는지! 우리 영은 숨겨져 있고 혼 안에 감추어져 있다. 혼은 쉽사리 인지되지만 영은 알기도 어렵다">(7.(하나님의 경륜) p.41).


원세호님의 위 비판은 오히려 위트니스 리의 <혼은 쉽사리 인지되지만 영은 알기도 어렵다>는 말을 재 확증해 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혼인 심리적인 영역은 학문적인 접근과 체계화라도 가능하지만 영의 영역은 그보다 더 깊고 비밀한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영으로부터 나온 것과 심리적인 정신 세계로부터 나온 것들을 체험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고전2).


7) <원세호님의 비판: ⑨ 사람의 영은 영적 음식인 삼일 하나님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다고 요6:35;51;57; 요7:37을 인용 증거하고 있다. 우선 인용한 성경 요6:35절은 생명의 떡이라고(단수) 하셨고 목마르지 않겠다고(단수) 하셨다. 주리지 않는 것이나 목마르지 않는 것은 믿음(단수)과 관련 있으며, 단회적인 행동이므로 계속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는 실수가 아니라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영생을 얻은 자는 계속 먹을 필요가 없다...이 모든 예수님의 증거는 단회적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이고 계속 먹는 것이 아니다.>


** 반박: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안 먹어도 저절로 자라는가? 그렇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거듭날 때 단 한 번 영적인 양식을 먹었으면 그것으로 족하고 계속 먹을 필요가 없다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너무나 엉뚱하다. 목회자들은 죄인을 거듭나게 할 뿐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매 번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이미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행해지는 이 땅위의 모든 목회자의 말씀전파는 무익하다. 요6:31-35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먹었던 만나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함께 말하고 있다. 즉 만나는 참 떡(요6:32)이신 주님자신의 예표인 것이다. 따라서 만나를 날마다 먹어야 했다면 참 양식인 주님을 날마다 먹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원세호님의 주장은 일반 상식으로나 교리 적으로나 말이 안 된다.


즉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은 원세호님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요10:10은 예수님이 양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더 풍성하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원세호님 말 대로라면 한 번 생명을 주어 거듭나게 했으면 되지, 그후에 왜 더 풍성히 생명을 주실 필요가 있는가? 고전3:6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고 한다. 한 번 (생명의 씨)를 심어 거듭나게 했으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영적인 물을 또 주어 자라게 하는가? 요6:57하는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한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은 단 한번 먹은 것으로 평생을 살라는 권면의 말인가? 그렇지가 않다. 예레미야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받아 먹었사오며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라고 말한다(렘15:16). 이 말씀도 단 한번만 먹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 문맥대로 바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원세호님에게는 <영적인 생명의 성장>에 대한 성경적인 인식이 없는 것 같다. 또한 원세호님의 <영생을 얻은 자는 그후에 영적인 양식을 계속 먹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문제가 심각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엡4:16)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목회자들이 붙들고 있는 한 그들로부터 목양 받는 성도들의 영적 생명은 늘 갓난아이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다(고전3:1-2). 원세호님은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으로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의 증가하심으로 증가한다'(increaseth with the increase of God)는 골로새서 2:19 원문 말씀을 좀 더 깊이있게 연구해 보기 바란다. 영 육간에 생명의 성숙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먹음이 필요하다.


8) <원세호님의 비판: ⑩ 하나님의 영이 인간 영에게 들어 올 때에 인간 영이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이란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 인간 영이 거듭나며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이며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요3:6; 1:12; 엡2:8; 롬10:9-10)>.


** 반박: 워치만 니의 본문을 인용소개 한 후 반박해 보겠다.


# [생명의 말씀사 번역] <워치만 니 주장: ⑩ "하나님의 생명(하나님의 영이라고 해도 좋다)이 우리의 영에 들어 올 때 인간의 영은 그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던'것(엡4:18)이 이제는 다시 살아났다. 그러므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25(영에 속한 사람 2). 정동섭 역, p.15).


# [한국복음서원 번역] <하나님의 생명(혹은 '영'이라고 칭함)이 우리의 영속에 들어 올 때 곧 죽고 혼미케 된 우리의 영을 살렸다. 본래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으나'(엡4:18) 이제는 다시 살아났다. 이러므로 '육신으로는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영에 속한 사람(중국어 원문 직역), 260쪽).


먼저 원세호님이 비판하고 있는 <인간의 영은 그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다>는 생명의 말씀사 번역은 <죽고 혼미케 된 우리의 영을 살렸다>는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것이다. 해당 원문 내용은 진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원세호님은 다음부터는 비판대상 책자를 선정할 때 이런 점들을 잘 감안하기 바란다.


엡2:1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었다고 말한다. 2장 5절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골2:13도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다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는 방면뿐 아니라 우리 안의 어느 부분이 죽었던 상태로부터 살아나는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포함한다. 특히 위 워치만 니가 인용한 로마서 8:10에 근거해서 우리의 영이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거듭날 때 다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이 죽었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은 영구적인 사망으로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영의 주된 기능인 하나님을 접촉하고 대화하는 기능이 매우 약화되어 마치 죽은 상태와 같이 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분리할 수 없는 연합을 이룬다(고전6:17). 원세호님은 이러한 것을 비판하려면 <예수를 믿는 순간 인간의 영이 거듭난다>는 자신의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9) <원세호님의 비판: ⑪ 인간의 영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유일한 거처이며 사무실이며, 영은 혼의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워치만 니'는 주장했으나, 성령은 하나님으로 편재하시는 분이시다...성령님이 성도의 영에게 내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편재하시는 방법이며 몸 안에 있는 영 안에가 아니다>. <⑫ '영은 혼의 포위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지방파의 주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과 몸의 분리는..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혼은 몸과 영의 결합으로 된 실존체 영혼의 생명작용인데, 지방파의 이러한 주장은 영혼체의 죽음 곧 영과 몸의 분리인 육체의 해체이다(약2:26; 마10:28)>.


** 반박: 원세호님은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오해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어디든지 편재하신다면 불신자 안에도 생명으로 편재하실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을 생명으로 영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요일5:12 말씀은 하나님의 편재성을 부정하는 내용인가? 그렇지 않다. 워치만 니는 생명 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은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들만의 특성임을 전제하고 고전6:17 등에 근거하여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도 특별히 우리 영 안에 계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말이다.


또한 '영은 혼의 포위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우리의 깊은 속에 있는 연합된 영이 고집 센 우리의 자아(타락한 혼)의 속박을 깨고 밖으로 역사 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즉 자아가 부인되고 연합된 영이 밖으로 살아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워치만 니가 삼분설의 입장에서 영과 혼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쓴 글을 이분설의 입장에서 그것은 우리의 죽음 곧 육체의 해체를 가리키니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사무실' 등의 생명의 말씀사 책자의 번역상의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도 원문을 감안하여 이해하면 충분할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의 영론> 비판을 재 반박했다. 근본적인 이견은 원세호님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이 수건이 되어 워치만 니의 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도 지켜보았듯이 원세호님이 참고한 생명의 말씀사 번역본과 원문과의 차이가 원세호님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도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번 기회에 중국어 원문에서 직역한 한국복음서원 번역 <영에 속한 사람>(총847쪽)을 직접 일독 해 보고 판단해 볼 것을 부탁드린다(http://mall.kgbr.co.kr/).

 


6.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의 혼론>비판 재반박


아래 원세호님의 비판은 항목만 여러 개로 나누어 놓았을 뿐 '한 가지 논점'을 반복해서 말한 것이다. 즉 원세호님의 주장은 <혼>은 영과 몸이 연합되어 이뤄진 영혼(생령)의 '생명현상'일 뿐 실존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세호님은 이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이분설에 입각한 <자기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입장을 달리하는 다음과 같은 보다 성경 원문에 근거한 견해도 있다.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혼이 된지라'(원문참조)고 말한다. 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런 다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 이 생기가 사람의 몸과 접촉할 때 혼이 산출되었다. 이 혼은 사람의 몸과 영의 화합이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을 '산혼'이라고 불렀다...'생기'(the breath of life) 라는 말에서 '생명'이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chay로서 복수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두 가지 곧 영에 속한 생명과 혼에 속한 생명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가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영이 되었고 동시에 이 영은 몸과 접촉하여 혼을 낳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두 생명 곧 영에 속한 생명과 혼에 속한 생명의 유래이다....온전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 셋이 하나로 화합된 존재이다....영이 흙으로 만든 몸에 들어감으로 혼이 산출되었다. 혼은 영과 몸의 연합으로 산출된 것이다. 본래 몸은 죽은 것인데 생명의 영이 몸과 만남으로서 제 삼의 혼이 나왔다.'(워치만 니, 중국어 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2000년, 32-33쪽).


두 주장 중 어느 것이 성경적이고 또 과학적인가?


그 판단은 이 우주가 물질세계, 정신세계, 영적인 세계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단지 물질세계와 영적인 세계만 있는지를 돌아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위 두 관점의 반복적인 대립에 불과하다. 따라서 독자들은 약간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이와 같은 맥락에 따라서 양측의 주장들을 비교 판단하여 줄 것을 부탁한다.


A. 지방교회 <인간, 혼 생성론> 비판 재반박


1) <원세호님의 비판: # ① 혼이란 영과 몸이 교합(저자 주 : 성교, 서로 뜻이 맞음)됨으로서 생겨났다는 사실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영과 몸이 완전히 혼 안에서 병합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주장한다...위의 주장이 거짓인 그 이유는 영과 몸이 혼 안에서 병합되는 것이 아니고 흙 사람 몸에 생기가 그 코로 들어가므로 호흡이 없던 사람이 숨을 쉬고 혼작용을 하는 생령 곧 영혼이 된 것이다. 무엇이 혼 안에서 병합되었는가 몸에 생기가 들어가니 그 몸 사람이 생령이 된 것이다. 혼에 대하여 '워치만 니'는 성경을 크게 변질시키고 있다>.


** 반박: 워치만 니 본문을 인용하고 비판해 보자.


<워치만 니 주장: ① 여기서 그가 '산혼'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영과 몸의 연합에 의해 혼이 생겨났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더욱 영과 몸이 연합되어 혼이 생겨난 후에 영과 몸이 다 혼의 일부로 병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말로 하면, 혼과 몸이 온전히 결합되었고 영과 몸이 혼의 일부로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그 당시에는 현재 우리의 육체처럼 매일 교전하지 않았다. 그의 온 존재의 세 요소는 완전히 융합되었다. 서로 연합된 이 세 가지 중 중간에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인격체로서 혼은 사람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혼은 영과 몸의 결합체요 사람의 요소들의 최종완성이다....이 혼은 다름이 아닌 두 요소가 상합한 총체요 사람의 인격이다">(24.(중국어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34쪽).


우선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원세호님은 생명의 말씀사 번역인 '교합'이란 단어에 너무 민감한 것 같다. 그러나 워치만 니 원문엔 그런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원세호님의 위 말은 <이분설 지지자들의 통상적인 주장>일 뿐이다.


원세호님은 살전 5:23의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혼(영혼)= 몸+영>의 개념이라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위 성경 문맥과 맞지 않는다. 위 문맥은 <전인존재= 영+ 혼+ 몸> 개념의 사람이 주님 오실 때까지 흠 없게 보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혼과 영의 융합은 우주 가운데 제일 특이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창2;7절에 의하면 영과 혼의 융합이 아니라 생기 없는 몸 사람의 코에 생기 '네샤마'가 불어 들어가 생령 곧 혼작용을 하는 생명체인 영혼(생령)이 된 것이다. 영과 혼이 융합되었다는 말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③ 영으로 변한 생기가 몸과 접할 때에 혼이 생겨났으며 혼은 인간 몸과 영의 화합물이므로 성서는 인간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성경에 생기가 없는 흙으로 만들어진 몸인 흙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때 혼이 된 것이 아니라 생령이 되었으며, 혼이 생긴 것이 아니므로(창2;7)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 반박: 역시 워치만 니의 글을 먼저 인용 소개 후 이어서 반박하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②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특별한 이유는 그에게 혼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이 혼과 연합될 때 사람을 이룬다. 이러한 연합은 우주 가운데서 사람을 특출한 존재로 만들었다. 성경에서 볼 때, 사람의 혼만 가지고 말하자면 사람의 혼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람은 영으로 하나님과 관련을 갖는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24.(중국어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79쪽).


스가랴서 12장 1절은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영을 지으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함으로 '사람의 영'(the spirit of man)을 하늘과 땅에 견주어 말하고 있다. 사람의 영이 그만큼 비중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흙과 생기가 만나서 <혼이 된 것이 아니라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이분론자들의 주장일 뿐 보편적인 진리는 아니다. 성경 '원문'과도 다르다. 즉 창2:7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혼'이 된지라(man became a living soul)> 라고 한다. 여기서 'a living soul'을 <혼(산혼)이 아니라 '생령'(산영?)이라고 해야한다>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어떻게 <soul>을 <혼>이 아니고 <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원세호님은 아마도 개역 성경의 오역을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오역은 바로 잡을 일이지 오역을 근거로 성경 원문에 따라 주장하고 있는 워치만 니를 비판하는 것은 더더욱 부당한 일이다. 원세호님은 비판대상 책자나 성경을 선택할 때 가능하면 원문에 가까운 번역본을 택하여 이와 같은 실수를 줄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3) <원세호님의 비판: ④ 하나님의 기운이 인간의 몸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사람의 영이 되었고 이 영이 몸과 반응했을 때 혼이 생겨났다는 지방파의 주장은 성경적인 듯 하나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생명 없는 흙으로 만든 사람(흙 몸)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흙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혼이 생긴 것이 아니다. 생령이 된 사람의 생명현상 중에 혼작용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⑤ 혼이 흙으로 된 인간 모형 속에 영이 들어갔을 때 생겨났으며 사람의 영이 죽은 몸과 만났을 때 혼이 생겨났다고 지방파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영과 몸이 만났을 때 영혼 곧 생령 사람이 되고 혼작용이 시작되었다. 혼은 영과 몸이 완전히 융합되는 기관이 아니다. 혼은 영혼인 생령의 생명현상 작용인 것이다.>


** 반박: 워치만 니 주장을 인용소개 하고 반박하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④ "이것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가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영이 되었고 동시에 이 영은 몸과 접촉하여 혼을 낳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두 생명 곧 영에 속한 생명과 혼에 속한 생명의 유래이다">(24(중국어원문 직역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33쪽).


원세호님은 새로운 증거제시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워치만 니는 창2:7의 '생기'(the breath of life)라는 말에서 언급된 생명이 원문상 복수명사인 chay 라는 것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설명한 것이다. 또한 living soul 을 (산)혼이 아닌 '생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번역상의 오류이다. '산혼'이라고 해야 옳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⑥ '혼은 영과 몸 사이에서 능력을 행사하며 인간을 통제하는 사고의 세계를 만들어 내며 영이 전 인간을 통제하려면 혼의 찬성과 동의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영은 혼과 몸을 규제할 힘이 없다. 그 이유는 혼에 인간 인격이 거주하기 때문이다. 혼은 전인격의 중추이다. 인간의 의지가 혼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다 '라고 지방파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혼이 일반적 의미로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현상인 일반적 의미의 혼, 그것은 인격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용어인 nephesh 가 특수 실존적 개념으로는 영혼 곧 생령인 인격체이다... 그리고 영은 인격체인 것을 명심하라(롬8:6-7; 히12:9; 고전14:14-15; 고전2:11). 혼이 인격으로 영에게 가면 무인격 영이 인격 작용을 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 반박: 원문인용 후 반박해 보자.


<워치만 니 주장: ⑥ "혼은 인격이 머무는 곳이다...혼은 영과 몸 사이에 거하면서 이 둘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혼은 이 양자 중간에 서서 영적인 세계로 다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세계로 다스리게 할 것인가를 판단력을 사용하여 결정한다. 때로 혼은 자신의 지혜력과 자극으로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리는데 이것은 이상적인 세계 안에서의 다스림이다. 혼이 영에게 다스리는 지위를 양보해 주지 않을 때 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혼이 영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결정 할 때 비로소 영은 혼과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혼이 인격의 산출지이기 때문이다. 혼은 한 사람의 주인인데 이는 사람의 의지가 혼의 이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영이 사람의 온 존재를 다스릴 때는 혼이 스스로 낮은 데 처하기 원할 때이다. 혼이 거스릴 때 영은 다스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자유의지의 뜻이다>(24.(중국어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37-38쪽).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위 워치만 니가 묘사한 내용을 거의 날마다 체험하고 있다. 즉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 깊은 속의 연합된 영의 요구를 거스리고 고집을 피우면 우리 안의 성령은 길이 없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을 근심케 한다 또는 성령을 소멸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엡4:30, 살전5:19). 새사람의 인격과 옛사람의 인격 두 인격이 우리 안에서 대립되고 있다. 즉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갈2:20)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니요 내가>인가(롬8:13상)를 우리 혼 안에 있는 의지가 좌우한다는 것이다.


6) <원세호님의 비판: ⑦ 창세기12:5절의 "얻은 사람들을" 할 때에...사람으로 번역된 구약 성경 원어는 nephesh이다. 영혼은 사람 자신이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번역되고 혼이란 생명현상을 쓰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므로 지방파는 '혼'이라는 용어의 일반적 의미와 실존적 특수 의미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성경에서 증거하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하겠다. 혼은 인격체도 아니고 영혼 곧 생령의 생명작용의 일부분이며, 실존체가 아니다.>


** 반박: 워치만 니 글을 인용하고 이어서 반박하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⑦ "혼은 우리의 인격의 기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성경이 때때로(마치 사람에게 혼의 요소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을 혼이라고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12:5은 사람을 혼이라고 부르고 있다(A.S.V)">(24. (영에 속한 사람1) 정동섭 역 p.57).


성경에서 '혼'에 대한 용례는 두 가지로 쓰였다. 하나는 살전 5:23처럼 '영과 혼과 몸'과 함께 언급된 경우와 창12:5처럼 사람 전체를 가리켜 혼이라고 부른 경우이다. 전자는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한 표현이라면 후자는 타락한 사람의 전체를 대표하는 인격적인 특징으로 혼이라고 한 것이다. 위 워치만 니 설명은 후자를 말한 것이다. 원세호님의 혼은 인격체가 아니라는 말은 창12:5에서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간 "사람들"(souls)은 인격체도 아니라는 말이 되어 부당하다. 원세호님은 성경의 용법을 무시하고 오역을 기준으로 자신의 신학을 세워서는 안될 것이다.


B. 지방교회 <인간 혼의 기능론> 비판 재 반박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인간은 생혼이라고 명명되었으며, 영과 육이 만나는 곳이 혼이고 영과 혼과 몸은 삼위일체라고 전구의 예를 들어 예증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 한 대로 잘못된 주장이다...그리고 인간은 영, 혼, 몸의 삼위일체가 아니다...그러나 성경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거짓된 인간 삼위일체를 전구에 비교해서 설명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설명으로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 반박 : 워치만 니 원문에는 <영과 혼과 몸은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단지 정동섭 교수가 번역한 생명의 말씀사 책자 내에서만 발견되는 단어일 뿐이다. 원문에 없는 표현을 번역서만 보고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전구비유는 다만 비유일 뿐이다. 비유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마13:12-13).


'영, 혼, 몸 이 세가지는 마치 빛을 내는 전구와도 같다. 전구에는 전기와 필라멘트와 빛이 있다. 사람의 몸은 필라멘트와 같고 영은 전기와 같으며 혼은 빛과 같다. 전기는 빛의 원인이고 빛은 전기의 결과이다. 필라멘트는 전기를 저장하고 빛을 내는 물질적인 몸이다. 영과 몸이 결합하여 혼을 낳았고, 또한 혼에는 영과 몸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혼은 이 두가지의 결합체이다. 전기가 빛의 근원이고 필라멘트는 빛의 매개체인 것처럼 영은 혼의 활동의 근원이고 몸은 혼의 표현이다.'(워치만니, 중국어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2000년, 35쪽).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성경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육으로 보고 있으며, 각 사람은 그 몸의 죄와 혼의 자아를 따라 육이라고 불리우는 몸과 혼의 혼합체에 의해 조종을 받고 있다고 지방교회는 주장한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육으로 보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몸의 죄들과 혼의 자아를 따라 육이라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영 (속사람), 지체인 육이 결합되어 영혼체가 된다. 영혼체인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육이란 몸과 혼의 혼합체가 아니다....그리고 인간(불신자)은 몸의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죄(요16:9), 육의 죄가 있는 것이다(갈5:19-21), 영의 죄는 단수이며 육의 죄는 복수의 죄들이다.>


** 반박: 우선 워치만 니의 육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이어서 <육신(flesh)>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 일부를 인용 소개해 보겠다.


먼저 워치만 니의 육체에 대한 이해를 인용 소개해 보겠다.


'<육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basar'이고 헬라어는 'sarx'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자주 발견되며 그 용법은 각기 다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용법은 바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바울이 한 말을 봄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그는 <내가 육에 속한 자>(롬7:14)라고 말했다. 그의 성품 혹은 그의 존재의 어느 부분만이 육에 속했다는 말이 아니라 '나'-나라는 존재- 바울의 전 존재가 육체에 속했다는 말이다....이것 외에 (1) 어떤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의 신체의 살 즉 피와 뼈를 제외한 사람 신체의 부드러운 부분을 가리킨다. (2) 어떤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 (3) 어떤 경우에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위 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90쪽).


이어서 성경에서 육체를 언급하는 구절들 중 일부를 소개해 보겠다.


(1) 타락한 사람 전체: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528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상).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1:3), 육신의 죄들의 몸(the body of the sins of the flesh)을 벗는 것이요(골2:11),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며...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할례당이라(빌3:3),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1:29), 육체의 지혜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고후1:12), 우리가 마케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란을 당하여(고후7:5),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10:3),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2) 타락한 몸(혼과 영 제외):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867)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육체>(the flesh)의 생명은 피에 있다(레17:11),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8:6),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롬8:9),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5),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3) 살(고기 덩어리)를 의미: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flesh)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고기(flesh)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롬14:21),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15:50),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위 성경 구절들 특히 요3:6(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은 타락한 사람은 다 예외없이 육이라는 워치만 니의 말이 맞는 주장임을 입증해 준다. 원세호님이 근거로 제시한 요16:9는 영의 죄를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사람의 죄를 사람의 영의 죄와 육의 죄로 나누는 것은 근거가 없다. 성경은 단수의 죄(롬5:12)와 복수의 죄들(벧전2:24)을 구분하기는 하나 이것이 사람의 영의 죄와 육의 죄의 문제는 아니다.


3) <원세호님의 비판: ③ 성령께서 사람의 영과 연합하심은 혼을 지배하기 위함이므로 혼의 독자적인 작용을 파괴해야한다고 '워치만 니'가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령님이 인간의 영에 내주 하시는 목적이 독자적 혼작용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증거 된 곳이 한 곳도 없다. 또한 이미 증거한대로 혼은 영혼의 생명현상 개념의 한 부분이며 인격적 실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인간의 영 내주는 우리를 선도하기 위함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위 내용을 정경사에서 나온 '자아가 죽을 때'(문창수 역)라는 책에서 인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워치만 니 사역을 잘 모르는 쪽에서 번역한 책은 번역용어 선정에 있어서 적절하지 못한 면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독자들는 한국복음서원이 번역 출판한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이란 책자(2000년)를 직접 읽고 판단해 보기 바란다.


위 책자의 제일 첫 단락 중 필요부분을 이곳에 소개해 보겠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그의 사역을 저지하는 요인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 자신의 겉사람이 영의 통제에 불순종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대로 행할 수 없음을 언젠가는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 언젠가 그의 사역에서 가장 큰 문제거리가 영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그의 겉사람임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일도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의 겉사람이 아직 기본적으로 다룸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치만 니,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한국복음서원, 2000년, 10쪽).


성경은 속 사람과 겉 사람(롬7:22, 고후4:16), 옛사람과 새 사람(엡4:22-24)을 대비하여 말한다. 사람의 영은 전자와 사람의 혼은 후자와 관련이 깊다. 신약 성경의 서신서의 핵심은 옛 나인 옛사람, 겉 사람이 부인되고(또는 파쇄되고), 새 나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영이 살아서 표현될 것을 말한다(갈2:20, 5:17, 25). 위의 '혼의 독자적인 작용을 파괴', '혼작용 파괴' 같은 <번역상의 다소 어색한 표현들>은 이런 근본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④ 혼은 자유 의지의 능력을 통해 환경에서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라고 그럴듯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소유한 것은 혼이 아니라 영혼이나 생령이며 이 인격체에는 하나님이 허락한 자유의지가 있다. 그것은 '육체의 일을 택할 것이냐, 영의 일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지만 혼이 아닌 영혼체인 인간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 반박: 자유의지의 소유주체가 혼이냐 아니면 생령이냐 에 대한 이견이다. 삼분설 지지자들은 자유의지를 인간의 혼의 작용 중 일부로 이해한다. 이것을 크게 보아 인간의 의지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5) <원세호님의 비판: ⑤ '워치만 니'의 혼의 기능은 영과 몸의 중간에서 혼과 영과 몸의 교제와 협조를 가능케 하며 혼의 일은 영과 몸을 제자리에 유지토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 주장은 성경의 근거가 없으니.... 혼은 영혼이며 생령의 생명현상이며 실체나 실존이 아니므로 중재는 불가능하다....다만 혼작용을 하는 영혼체는 몸의 생각(롬8:6) 영의 생각을 행하는 실존체이다. 그러므로 영의 인격적 의지를 택할 것인가, 육의 의지를 택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⑧ 영, 몸, 혼 중에 어느 것으로 몸을 지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의지이며 혼이 능력이 있고 인격의 기관이므로 성경은 생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위의 주장의 문제점은 영, 몸, 혼에 있어서 생혼이라는 증거가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 반박: 원세호님의 '혼작용을 하는 영혼체'라는 말은 개념이 모호하다. 영혼체의 무엇이 어디서 어떤 때 혼작용을 한다는 말인가? 혼작용에는 의지만 있는가 아니면 그 외의 기능도 있는가? <혼작용>만 있고 <혼의 실체>는 없다는 원세호님의 논리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원세호님이 영혼체라고 말함으로 전인적인 관점을 가지려면 차라리 2분설적인 관점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전인적으로만 말해야 할 것이다.


6) <원세호님의 비판: ⑥ '혼이 영과 몸의 중간에 있어 영과 몸을 함께 묶는다고 워치만 니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성경의 근거가 전연 없다. 또한 혼은 몸과 영의 중간에 있지도 않는 것은 혼은 실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 (속사람) + 몸 (지체, 관절과 골수) = 혼이 아니다. 더욱이 혼은 정신이며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인격체) + 몸(인격적 실존)= 영혼(인격적 실존체)이라고 증거 한다.> <⑦ '몸은 가장 낮은 것으로 혼의 외곽이며 혼은 영의 외곽이며 영이 생각을 혼에 전달하고 몸으로 영의 명령에 복종토록 부리는 기능이 있어 중매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인격의 본거지가 혼이기 때문에 혼의 능력은 영의 힘이며 영은 스스로 몸에 역사 할 수 없으므로 오직 혼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워치만 니'는 주장한다. 그러나 몸이 가장 낮은 것도 아니며 몸은 몸일 뿐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지은 것이다(창2:7; 1:26-27). 혼의 기능이 영의 생각을 몸에 전한다는 성경의 근거가 없고, 혼이 중매자라는 것은 그럴듯한 거짓 말이며, 혼이 인격의 본거지라는 증거도 성경에는 없다.> <⑫ 혼의 기능은 영과 육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이고 혼은 영, 몸 사이에서 연합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주장한다.>


** 반박: 이미 앞에서 다 반박 또는 해명한 내용들이다. 원세호님은 몸의 작용과 영의 작용은 각각 몸과 영이라는 실존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혼작용은 영혼의 생명현상이라고 하며 마치 전인의 작용인 듯이 모순되게 말하고 있다. 위(몸)가 소화를 시키고, 우리의 깊은 속(영)에서 양심의 참소를 느끼듯이, 생각, 감정, 의지가 속한 정신세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원세호님은 인정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심리작용이 사람의 영과 신체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점도 솔직히 시인하기 바란다. 육신의 필요만을 따라 사는 사람보다는 정신세계의 고상함을 추구하는 사람을 더 가치있게 보지 않는가? 또한 다만 심리적인 고상함을 추구하기 보다 인생의 근본적인 해답을 찾아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 무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의 무게를 달아보시는 분이다. 이것은 다 상대적인 개념이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것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7) <원세호님의 비판: ⑨ 인간의 인격의 기관인 혼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으로 구성되었다고 워치만 니가 주장한다. 그러나 '혼'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존적 개념인 사람 영혼이 지성, 의지, 정서가 있는 인격체인 것이다. 그리고 영도 인격체이다(히12:9; 고전2:11; 롬8:6-13). '혼'은 인격체가 아니라 영혼과 영의 생명작용인 정신이며 실존체가 아니다.>


** 반박: 똑같은 말의 되풀이 일뿐이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 또는 반박했다. 참고로 원세호님의 인격체, 실존체, 생명 현상 같은 표현들은 성경에 입각한 개념정의가 필요한 용어들이다. 영이 인격체이고 영혼도 인격체이면 원세호님 주장에 의하면 생각까지 하는 몸은 인격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한 사람 안에 몇 개의 인격체가 있는가?


8) <원세호님의 비판: ⑩ '워치만 니'의 24. p.182,14-20줄의 주장하는 것은 모두 거짓 말들이다. 왜냐하면 혼의 기능을 성경의 근거도 없이 영과 몸을 상호 교통할 수 있도록 둘을 혼합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 인격이 아니고 실존체도 아니고 영은 살과 뼈가 없는 영적 실존이며 몸은 살과 뼈와 피로 되어 있는데 혼이 혼합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으며 성경의 근거가 없다.>


** 반박: 우리의 몸을 움직일 때도 머리의 지시에 우리의 혼인 의지와 생각과 감정이 동역해야 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할 때에도 우리의 믿음의 결단이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혼은 영과 몸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 순종하게 한다. 원세호님은 이것을 영과 혼과 몸의 물리적인 혼합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정신에 이상이 있으면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화 있는 인생을 사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래의 워치만 니의 주장은 이러한 관점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워치만 니 주장: ⑩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혼을 영과 몸 사이에 즉 신령하고 하늘에 속한 것과 육신적이고 땅에 속한 것 사이에 놓으셨다. 혼의 임무는 영과 몸의 적절한 위치에 따라 상호교통을 할 수 있도록 둘을 혼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완전한 조화를 통하여 사람으로 완전히 충만한 영의 생활을 하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24.(영에 속한 사람) p.182, 생명의 말씀사 번역).


9) <원세호님의 비판: ⑪ 혼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경 롬8:13;14절에 의하여 거짓으로 혼이라는 영혼의 생명현상인 정신은 실존도 아니고 인격체도 아님이 또한 위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반박: 이것 역시 번역(문창수 역, 자아가 죽을 때, 정경사)상의 표현에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경우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혼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진다>는 말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롬6:6)을 의미하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또는 그 결과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10) <원세호님의 주장: ⑬ 아담은 하나의 혼이며, 그 혼은 영과 육이 결합하여 생령 즉 혼이 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생령이 혼이라는 주장이다. 혼은 생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반박: 고전15:45은 '첫 사람 아담은 산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말하는 개역 성경의 '산영'은 <산혼>으로 원문대로 읽어야 한다. 혼은 생령이 아니라는 말은 '생령'이란 말 자체에 벌써 문제가 있다. 성경원문엔 '생령'(living spirit)이란 말이 없다. 산혼(living soul)이다. 원세호님은 성경에 없는 말로 성경을 부인하면 안 된다.


11) <원세호님의 비판: 이상 인용한 것은 많은 지방파의 자료 중에 일부분이지만 충분한 의사가 표시된 자료이다. 만일 지방파가 비성경적인 주장을 시인치도 않고, 성경에 합당한 내용으로 슬그머니 주장한다고 하면 그것 자체는 동정의 여지가 없는 이단인 증거가 될 것이다. 이단을 면하려면 먼저 거짓을 주장한 것을 시인 회개하여 새로운 것을 택하여야만 인정되기 때문이다. 지방파의 인간론이 무엇이 비성경적이며 거짓 된가를 기독교의 사역자들은 정신차리고 연구해야 할 것이며.>


** 반박: 이미 예장 통합 측은 원세호님이 창조론,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인간론>에 있어서도 이단적인 가르침이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처럼 원세호님의 판단 기준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또한 비판 대상 책자 선정에도 원세호님은 현저한 결함과 부족이 있었다. 사람의 몸이 생각을 한다느니, 단수의 영의 죄와 복수의 육의 죄가 있다느니 함으로 인간이해와 죄론에도 문제가 많음이 드러났다. 또한 영의 양식을 단 한 번 먹어야지 계속 먹는다고 하면 거짓이라고 말함으로 영적 생명의 성장 이해에 결함이 있음도 드러났다. 또 사람의 거듭남을 다만 법적인 양자개념으로만 봄으로 참된 거듭남의 체험이 의심스럽다. 연합된 영으로 타락한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는 성도들의 영적 진보를 가져오는 삶을 비 성경적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원세호님의 주장은 바른 성경 말씀에 의해 속히 바로잡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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