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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데시아-"양자" 에는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중적임

 

:휘오데시아-"양자" 에는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중적임|진리 탐구
김바울|조회 113|추천 0|2016.08.20. 04:36

 

위의 글을 보면

하나님의 양자(아들들)되는 것이 시작 단계가 있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갖는 마지막 단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되었는데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봅니다.

 

해명: '휘오데시아"란 단어가 성경에서는 시재에 있어서 이중적으로 쓰였습니다.

 

엡 1:4-6에 나오는 "휘오데시아(양자)"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믿는 자에게 현실적으로 단번에 일어나는 성령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데(요1:12), 그처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죠(요5:24).  여기서 "얻었고(에케이)"는 동사 현재형입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완전한 양자(휘오데시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명: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은 우리 안에 영접되는 것이 순간적으로 이뤄집니다. 즉 단번에 이뤄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라는' 과정도 함께 언급합니다.

주 예수님도 자신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신다'고 말씀하셨지요(요10:10하)

전반부 뿐 아니라 '후반부'도 믿어야 합니다.

 

거듭날 때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롬8:15), 성령이 이를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롬8:16).  완전한 양자가 된것입니다

 이미 양자가 된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후사가 되어(엡3:6)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이죠(갈3:26, 29).

그래서 양자된 아들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자라고 합니다(히2:10)

 

해명: 같은 논점입니다.

거듭날 때 '양자의 영'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맞습니다(요1:12).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전진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모두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위 구절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영적 생명의 성숙이 내포된 개념입니다.

 

더구나 롬8:23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라고 함으로

영자되는 것을 미래시재로 표현했습니다.

 

트니스 리(Witness Lee)의 교리

We become God(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라고 가르치죠.  그것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양자됨의 단계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성 인성을 교묘히 접목하여

크리스챤들이 나중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deification)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봅니다.

 

해명: 위트니스 리 교리가 아니라 성경 본문이 양자됨을 현재와 미래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속성은 혼합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 참 사람의 속성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닮지 못합니다.

 

해명: 속성의 '혼합'이 아니라 '연합'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뉴에이져들과 몰몬교도들도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the deity of man) 믿으며

로마 카톨릭의 교리문답 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도 하나님이 될지 모른다" 라고 하였죠.

이단적 사상 입니다.

 

해명: 정통 교부들인 아타나시우스나 이레니우스도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쳤지요.

이들의 가르침은 뉴에이저 몰론 카톨릭과 다른 것입니다.

 


 
김바울 16.08.20. 04:37
이 신화(神化) 주제는 조금더 열린 마음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고신 교단 유해무 교수께서 그런 접근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path 16.08.20. 04:57
롬8:23의 "우리의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다" 에서
"우리의 양자될 것" 과 "우리 몸의 구속"은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waiting for the adoption, (that is) the redemption of our body" 라고 했죠.
그러므로
"우리의 양자 될 것 = 우리의 구속" 입니다.
이것은 
부활 때 "영광의 자유"(21절)에 이르는 것이며 소망으로 얻는 구원(24) 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속과 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죠.
구원이 먼저 있고 나중에 구속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righteousness)가 주입되어야만
성도가 앞으로 완전한 양자에 도달하게 된다는 성경구절이 아닙니다.

 
 
  path 16.08.20. 05:18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완전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하나님 됨)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이 된다고 하죠(the deification of man)
구원받은 성도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벧후1:4)는 것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죄에서 자유로워져서 "영혼을 깨끗이 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벧전1:22)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고(히12:1), 지식에까지 새로워지는 것(골3:10) 이라고 봅니다

부활 때 예수님의 신성이 성도에게 주입되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가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사람으로써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김바울 16.08.20. 06:40
교리를 본문에 대입하기 보다는
본문 그대로 읽으면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양자될 것(미래시재), 곧 몸의 구속(미래시재)
 
  김바울 16.08.20. 06:43
path 말씀하신 것은 개혁신학 교리이지만
그것이 성경의 모든 방면을 다 담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개혁신학은 주로 죄 문제 처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성경은 그에 더하여 생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하심이라'(요10:10하)라는
말씀은 개혁신학은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것같아요.
왜냐하면 초월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와 간격을 강조하다보니
그 둘의 연합 부분이 애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초월과 연합을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path 16.08.20. 20:51
김바울 
롬8:23 본문을
간략하게 주해하였습니다.
헬라어 "구속"이란 단어 "아폴뤼트로신"은 대격언어입니다.

"양자 될 것" = "우리의 구속" 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영문에는 그 사이에 "that is"라고 주해 했습니다.

롬8:23 한 구절만 보지 마시고
롬8:18-25의 전체 문맥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양자된 신분이 부활 때에 영광중에 드러난다는 뜻이죠.
그 때 가서 완전한 양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김바울 16.08.20. 06:45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1) 위 요10:10하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2)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사람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지요?
3)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무엇이고,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path 16.08.20. 20:46
요10:10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란 말씀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성도들을 노략하는(골2:8) 거짓 교사들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거기에 반하여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욱 장성하도록 자라게 하신다로 이해합니다.
거듭난 자는 장성해야 할 어린 애로 비유했으니까요.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 새사람이 자라게 하십니다. 

 
 
 
김바울 16.08.20. 06:47
거룩을 죄없는 완전함이라는 웨슬리식으로 이해하면 거룩의 일부만 아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지요.
하나님의 성품이 거듭난 사람들을 통과하여 (거룩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입니다.
 
  path 16.08.20. 07:42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지혜,공의,인자,진실,거룩 등 . . .)을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인간이 취할 수 없는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속성과 권능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그러한 신의 속성을 소유해야 하는 것이죠.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속인 것도
"너도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 였습니다.

제가 위트니스 리에 동조할 수 없는 것은
그가 "You can be God"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활 때 드디어 완전한 양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여받아 하나님이 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죠.

 
 
  path 16.08.20. 20:50
path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해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죠(사63:18)
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성도(거룩한 무리)" 라고도 하고요 . . 

죄가 없기 때문에 거룩에 참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사는 동안 비록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바로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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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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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8.03.21. 07:55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인정하면서,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공유적 속성'이 가지인 우리 안에 흘러들어 오는 것은 부인하는 것은 초월자와 피조물의 간격을 너무 강조하는 신학의 한계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구원(롬5:10)의 첫 단추인 거듭남(요3:6, 고전6:17), 그리고 이어지는 변화(롬12:2, 고후3:18), 변형(빌3:21)이라는 핵심 진리 항목에 대한 이해가 겉돌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해에 따르면 포도나무에 있는 '진액'이 포도나무 가지를 통과하여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실재이지, 실재는 없는 관념의 세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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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작성자 2018.03.21. 08:02

예를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바로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죠"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데 유익하도록 징계하신다"(히12:10)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드리는 그 자쳬"가 징계에 해당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드린다는 말 자체"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개념입니다. '거룩함에 동참한다'는 말은 모든 속된 것들에서 분별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5-7은 그것을 믿음, 미덕, 지식, 자제, 인내, 경건, 형제 사랑, (신성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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