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변증자료를 나누기 위한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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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와 교파주의 ― 무엇이 몸의 하나를 추구하는 바른 방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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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와 교파주의
― 무엇이 몸의 하나를 추구하는 바른 방향인가?

 


지금까지의 교회론 관련 토론에서, 지방 교회측과 김홍기 목사는 주로 두 가지 점에서 대립해 왔다. 첫째는 ‘몸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엡4:3-4)는 교회의 단일성’(Unam Ecclessiam)에 대한 양측의 이견이다. 즉 지방 교회측은 몸의 하나를 적극 추구하고 그 몸을 나누는 교파주의를 단호히 배척하나, 김홍기 목사는 자신도 분열을 미워한다면서도 교파주의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강변해 왔다.


1) 그러나 그가 ‘긍정적인 사례’라며 제시한 미국 장로교단과 감리교단 그리고 윌리엄 캐리의 복음 전파, 제리 팔웰의 목회 성공, 한국 통합 교단의 미자립 교회 지원 등은 한 몸의 분열로 인해 교회가 잃어버린 엄청난 영적 손실에 비하면 ‘페니’(1원) 정도의 가치에 불과하다. 또한 김 목사가 소개한 그러한 “긍정적인 면들”이 반드시 분열된 교파이어야 가능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분열이 없는 한 몸(엡4:4) 안에서 주님이 그 방면에서 길을 얻으셨다면, 훨씬 더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음을 김 목사는 알아야 한다.


2) 김 목사가 위와 같은 소위 교파의 업적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한 것은 주님께서 홀로 받으실 영광을 특정 교파나 개인이 나눠갖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주님의 몸 안에서는 그리스도만 높여져야 하고, 우리가 얼마나 큰 일을 했든지 다만 무익한 노예임을 고백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이다(눅17:7-10). 우리의 수고에 대한 평가는 장차 주님께서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공의로 판단하실 것이다(고후5:10).


3) 김 목사는 또한 ‘성별’을 분열의 명분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제는 역사상 거의 모든 교단 분열이 ‘성별’과 무관하게 발생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성별’조차도 이스라엘 백성이나 고린도 교회처럼, 성경적인 ‘합일’의 범위 안에서 이뤄졌어야 했다. 초기 교회는 이런 이유로 교회 분열을 매우 두려워 했고, 오늘날 ‘교파 창시자들’로 지칭되는 본인들은 새로운 교파 창립을 결코 원치 않았다.


둘째는 위트니스 리가 교회의 순수성(聖性, Sanctam Ecclessiam)과 관련된 성경의 엄중한 가르침을 성경 대로 말한 것을 김 목사를 포함한 이단 감별사들이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내어 불필요한 적대감과 분노를 유도한 면이 있다. 이 점은 엘리옷 밀러처럼 원문의 전후 문맥을 살피고, 위트니스 리가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언급을 한 것이었음을 이해하면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오늘날의 개신교의 상태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유감스럽게도 김 목사도 이단시 한 로마 천주교와 분별 되기보다는 칭의론과 직제문서 합의 등을 볼 때 오히려 천주교 쪽으로 더 회귀하려는 면이 없지 않다. 이제 본론에서는 위 교회의 단일성과 순수성을 두 축 삼아 쟁점 부분들을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다.

 


1. 믿는 이들이 반드시 절대적으로 하나되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


“독일 퀠른에서 서로 다른 교단의 한인 교회 넷을 하나로 연합하는데 성공”한 바 있는 최용준 목사(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는 자신의 <하나됨의 비전>(IVP, 2006)이란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됨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근거: 삼위일체 하나님 -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2).


둘째 근거: 예수님의 사역과 중보기도 - “예수께서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요11:51-52).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17:11).


셋째 근거: 사도 바울의 권면들 -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 들이십시오”(롬15:5-7).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엡4:1-3).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빌2:2-3).


넷째 근거: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 -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따라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동시에 그 부활에도 연합하게 되었다(롬6:3-5).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제2의 성육신이라고 불린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한 몸이요 성령 안에서 하나된 지체이다.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고 섬겨야 할 의무는 있어도 서로 분쟁하고 분열할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없다.


다섯째 근거: 한 믿음, 한 세례, 한 소망 - “마지막으로 에베소서4:4-6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어야 할 근거를 좀 더 깊이 말하고 있다. … 우리의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신앙고백이다(마16:16). 아무리 교파가 달라도 이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분열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 즉 한 믿음, 한 세례, 한 소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가장 어리석은 자기 모순의 행위인 것이다(위의 책, 53-68쪽에서 인용).


긴 설명이 필요없이, 위에서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들 자체가 왜 우리가 분열을 피하고 하나를 힘써 지켜야 하는지를 웅변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더구나 위 책의 저자인 최용준 목사는 각기 다른 교단에 속했었고 오랜 분열의 역사를 가진 척박한 이민 교회들을 하나되게 했던 자신의 경험과 몸의 하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위 책에 담아 내고 있어서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비록 최 목사가 저명한 신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말은 지식과 교리로만 하나와 분열을 말하는 그 어떤 고명한 신학자들의 주장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김 목사가 많은 일로 바쁘겠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위 책을 꼭 일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2. 지방(city) 단위의 교회가 가장 성경적인 지역 교회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크게 두 부류, 즉 주 예수님을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하여 주님과 연합을 체험한 믿는 이들(요1:12, 요3:6, 고전6:17)과 그렇지 못한 불신자들(지식으로만 예수님을 아는 이들 포함)로 나뉜다. 성경은 전자를 교회(엡1:23), 후자를 세상(요3:16)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그리스도가 머리(골1:18)이신 빛과 생명의 영역(왕국)이고, 후자는 사탄이 왕(요12:31)으로 통치하는 어둠과 사망의 영역(왕국)이다(마12:26). 불신자들은 믿고 침례받을 때 한 영역에서 나와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진다(롬6:3-4, 골1:13).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교회는 성경에서 다시 ‘단수의 교회’(마16:1, 보편교회, 혹은 우주교회)와 ‘복수의 교회들’(계1:11, 지방 교회)로 표현된다. ‘단수의 교회’ 방면에는 쌍방간에 다툼이 없다. 그러나 ‘단수의 교회를 복수의 교회들로 나누는 성경적인 기준’인 지방 교회 개념을 두고 아래와 같은 공방이 있어왔다.


1)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소개하는 지방 교회 개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말한 ‘지방 교회’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장 2절의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혹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13:1)와 같은 것들이다. 즉 지방 교회란,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은 주님의 한 몸인 교회(엡1:23)인데, 그 몸된 교회가 특정 지역(city)에 출현한 것이 그 지역에 있는 교회(속칭, 지방 교회)”라는 뜻이다(지방 교회측, 반론글#2).


2) 김홍기 목사의 억지스런 반론


지방 교회는 지방 명칭 외에 다른 명칭으로 교회 이름을 붙인 예가 성경에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반문하곤 한다. “성경에 지방 명칭을 교회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구절이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지방 교회는 늘 꽁무니를  빼곤 한다. 성경에서 그런 명령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방 명칭을 붙인 교회들(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을 사실적으로 기술했을 뿐이다. 성경은 교회 명칭을 어떻게 붙이라 혹은 말라 하는 명령을 내린 바가 전혀 없다! 성경의 기술적인(descriptive) 표현을 지시적(prescriptive)인 표현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순진한 성도들을 기만하고… .(김홍기, 재반론#2).


3) 지방 단위의 지역교회 실행은 왜 성경적인가? - 김홍기 목사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흥미로운 것은 김홍기 목사가 우리가 소개하는 ‘지역을 단위로 하는 교회 명칭(지방 교회)’이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묘사한 소위 “기술적인(descriptive) 표현”인 것은 인정한다는 점이다(이 사실만으로도 ‘지방 교회’가 비성경적이라는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단지 그는 “지시적(prescriptive)인 표현” 운운 하면서, ‘‘OO 지방에 있는 교회’라는 식의 이름을 붙이라고 성경이 명령하지는 않았다.’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김 목사가 교회를 피상적으로만 알고, 성경이 계시하는 교회의 본질을 깊이 보지는 못했음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다. 이제 왜 그러한지, 즉 ‘지방을 단위로 하는 지역 교회(지방 교회)’가 왜 성경적인 원칙인지를 여섯 가지 방면을 통해 밝혀보도록 하겠다.


첫째, 교회는 ‘에클레시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머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이시고(골1:18), 그 ‘몸’은 주님을 생명으로 영접한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로 구성된 한 새 사람이다(행9:4-5, 엡2:15, 4:24,골3:4).


이처럼 교회가 한 새사람이라는 말은 교회가 살아있는 ‘한 단체적인 인격체’라는 말이다. 따라서 지역 교회들은 이 한 단체적인 살아 있는 인격체가 그 지역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달(Moon)이 각각 서울과 미국 뉴욕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여러 개의 달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동일한 달이 그 지역에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지역 교회는 그냥 (그 지방에 나타난) ‘교회’이지 그 외에 지금처럼 다양한 이름이 필요하거나 그런 이름들을 함부로 붙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교회 이름을 놓고 “지시적인” 운운한 것은 바로 이 한 새사람으로서의 교회에 대해 무지한 결과일 뿐이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이름을 사람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작명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임을 김 목사는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은 바로 이 점이 교회론에 있어서 쌍방간에 이견을 낳은 핵심 원인이다.


둘째, 성경은 지역 교회를 ‘OO 지역에 있는 교회’라고 호칭하고 있다.


성경에서 교회에 관한 거의 모든 언급들은 요즘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OO 교회’가 아니라 ‘어느 지역에 ‘있는’ 교회’라는 형식을 취한다. 즉 장소와 수단을 나타내는 기본 전치사인 ‘엔(en)’(1722)이 교회 명칭에 붙어 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신약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원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the Church at(in) Jerusalem)이다(행8:1). 고린도 교회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이다. 또한 개역 성경은 ‘안디옥 교회’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안디옥에 있는 교회’(the Church at Antioch)이다(행13:1). ‘겐그리아에 있는 교회’(롬16:1)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성경에 언급된 이런 모든 지역 교회들은 모두 한 새사람으로서의 보편적인 (우주) 교회가 그 지역에 출현한 것을 가리킨다.


셋째, 신약의 서신서들은 한결같이 ‘OO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어졌다.


다음에서 보듯이 신약의 서신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들은 예외 없이 모두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어졌다. 그러나 특정 진리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교회에 보낸 경우는 전무하다.


- 로마서: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롬1:7)
- 고린도전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
- 고린도후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후1:1)
- 갈라디아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갈1:2)—갈라디아는 행정구역상 여러 도시들(cities)이 포함된 도(道) 개념임으로 ‘교회’가 아니라 ‘교회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됨.
- 에베소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엡1:2)
- 빌립보서: “빌립보에서 사는 모든 성도와”(빌1:1)
- 골로새서: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골1:2)
-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게 편지하노니”(살전1:1)
-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게 편지하노니’(살후1:1)
- 요한계시록: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계1:4), “너는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11절)


우리는 김홍기 목사가 위와 같이 성경에 드러난 개교회의 원칙을 지금처럼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를 내려 놓고, 분명한 성경적인 사실들을 바로 볼 수 있는 시력을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넷째, 개교회의 장로들을 임명하는 범위는 ‘OO 지방을 범위로 하는 교회’이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만연되어 있는 장로 선출 방식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특정 개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들을 임명할 때 한 곳에서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행14:23)라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나의 명령한 대로 각 도시(city)에 장로를 세우라’(appoint elders in every city)(딛1:5)라고 명령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구절들을 함께 놓고 보면, 특정 교회 장로들은 ‘도시(city)를 단위로 하는 교회’ 별로 세워지는 원칙(명령)이 성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때’(he sent word to Ephesus and called  for the elders of the church(행20:17)), 에베소에는 그 지역의 모든 참된 믿는 이들로 구성된 ‘그 교회’(the church)만 있었으므로, 청함을 받은 장로들이 누구인지는 바울도 알고 장로들 본인들도 익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도시별로 장로를 세우는’ 원칙이 무너짐으로써 장로들을 임명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잡음이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면, 위 디도서 1장 5절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각 도시별로 장로를 세우라’고 명령했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쓰인 ‘명령하다’라는 단어의 원문은 ‘디아탓소’(1299)인데, 이 단어에서 ‘칙령, 포고, 명령, 지령’이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타그마’(1297)가 나왔다. 따라서 ‘도시를 범위로 하는 교회 단위로 장로를 세우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김 목사가 말한 ‘지시적인(prescriptive)’ 것에 해당된다.


다섯째, 김홍기 목사가 웨인 그루뎀의 말을 빌려 ‘지방 단위의 교회’를 공격한 것은 오히려 ‘지방 단위의 교회’가 성경적임을 더 확증해 주고 있다.


김 목사는 지방 교회 개념을 반박하는 근거로 웨인 그루뎀의 책자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했다. 즉 그는 웨인 그루뎀은 ‘지방 교회’와 ‘보편적인 교회’(“전세계의 교회”) 외에, 1) 가정 교회, 2) 한 지역(region)에 있는 교회도 추가적으로 말했음으로,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오직 ‘지방(city)을 범위로 하는 교회’만을 고집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볼 때 그렇게 보였을 뿐, 아래에서 보듯이 그것들은 오히려 지방 범위의 교회가 성경의 원칙임을 더 분명하게 확증해 준다.


- 소위 가정 교회: 성경에서 어느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거듭난 성도들이 생기면, 그들이 주로 가정에서 모임을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 단위의 모임’을 ‘교회’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 지방의 모든 성도들이 그 집에서 모일 때만 그러하다. 신약에서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한 4번의 경우(롬16:6, 고전16:19, 골4:15, 몬2)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중에 두 번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관련되어 있다. 즉 그들이 로마에 거주할 때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그 집에서 모였고(롬16:5), 그들이 에베소로 이주한 후에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그 집에 모였다(고전16:19, 행18:18-19, 24-26). 따라서 이 두 집에 있는 교회는 사실상 초기의 로마에 있는 교회와 초기의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 외에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골4:15)는 라오디게아 지방의 교회를, ‘아킵보의 집에 있는 교회’(몬2)는 골로새 지방의 교회와 동일 개념이다(몬2, 골4:17, 몬10, 골1:2, 4:9 참조).


한편 성경은 예루살렘 교회 안에 수 많은 가정 모임들이 있었음을 말한다(행2:46). 따라서 만일 집에서 모이던 이러한 각각을 다 가정 교회라고 볼 경우, 성경이 그것들을 기록할 때에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처럼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복수명사)이라고 적었어야 했다. 그런데 성경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라고 단수로 표시했다. 따라서 가정 단위의 교회를 주장하려면 이 문제를 합당하게 해명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의 각 집에 있었던 모임들은 ‘개교회들’이고, 단수의 예루살렘 교회(행8:1)는 ‘노회’ 개념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억지일 뿐이다.


참고로 한국 장로교 모 교단은 교단 내에서 가정 교회를 둘러싸고 갈등이 있자 해당 현안에 대해 정식으로 교단 신학자들에게 연구를 의뢰했고 또 내부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안다. 즉 성도들은 가정에서 ‘모임’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모임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매우 타당한 결론이라고 본다.


- 한 지역에 있는 교회 개념(the church in a region): 김 목사는 또한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행9:31)라는 말씀을 근거로, ‘여러 도시들에 걸쳐 있는 성도들을 하나의 교회’로 말했으니 지방 범위 교회 개념은 틀렸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참되게 거듭난 믿는 이들로 구성된 신약 교회의 간증이 위 구절에서 언급된 지역에만 있었으므로 그 전체를 하나의 ‘보편적 교회’의 개념으로서의 ‘한 교회’라고 말한 것이다.


여섯째, 신뢰할 만한 신학자들도 성경적인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와 ‘지방적인 교회’(local church)로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자신의 전집 중 <교의신학 교회론>편(VI)(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에서 다음과 같이 교회를 ‘보편적인 교회’와 ‘지방적인 교회’로 구분하는 침례교 신학자 A.H. 스트롱의 교회론을 소개하고 있다.


침례교 신학자인 스트롱은 보편적 교회와 개체적 교회를 다 “중생된 인물들의 집단”이라고 정의한 후에, 이어서 “성경은 무형적 보편적 교회와 개체적 교회를 구별하는데, 개체적 교회에서 보편적인 교회가 지방적인 현세적인 형체를 취하는 것이며 이것에서 교회 전체의 관념이 구체적으로 전시 된다.”고 하였다. … 이 지방 교회만이 확실하고 현세적인 존재를 가진 것이니 금후 우리는 이것만을 논의한다(위의 책 32쪽).


에클레시아라는 명사의 이 용법은 이미 진술한 보편적인 교회지방적인 교회의 의미에서 새로운 어떤 의미를 추가하는 것으로 인정되기 불가능하다(this use of the term ‘ekklesia’ cannot be regarded as adding any new sense to those of ‘the universal church’ and ‘local church’ already mentioned)고 그는 단언하였다(위의 책, 32쪽,  A.H.Strong, Systematic Theology, 1979, P. 891).


장로교 합동 교단 심창섭 교수 외 3인 공저로 되어 있는 <기독교의 이단들>의 다음 내용도 ‘도시와 지방별 지역교회’(local church)를 ‘국가 단위의 교회’를 비판하는 기준이 되는 정통 교회로 보고 있다.


(2) 정통 기독교와의 교회관 비교... 'Ekklesia 라는 말은 신약에서 114번 나오는데 이중에 85번은 지역교회(local Church)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에클레시아의 근본개념을 ... 지방적인 단체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용어의 어원과 신약에서의 사용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에서는 도시와 지방별의 지역교회(local church)를 인정하기 보다는 국가 단위의 교회, 즉 '기독교복음침례회'에 소속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참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장로교 합동측 교육국 , 기독교의 이단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7, 304-305쪽).


총신대 교수를 역임한 고(故) 정훈택 교수도 ‘한 교회가 한 지역을 책임지는 형태’ 즉 지방 교회 원칙을 오늘날 만연한 ‘개교회주의’를 치유하는 대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를 ... 개교회주의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한 교회가 한 지역을 책임지는 형태이다. 이 제도가 정말로 정착되면 교회나 교단 사이의 대립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 우선 같은 교단 소속 교인들을 주거지역의 교회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 종교개혁 이후 불필요하리 만치 갈갈이 찢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재결합과 연합이 우리의 최대과제라 생각한다"(정훈택, 총신대교수, 교회와 신앙 96년 12월호, 99-101쪽).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교회들은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명칭을 가지고 난립해 있지 않고, 단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가 지방(city) 단위로 개교회들로 불리는 분명한 원칙 아래 세워진 것을 보았다. 더구나 성경에는  김 목사의 주장처럼 특정 교리나 특정 인물 혹은 ‘더 선명한 진리’를 내세워서 새로운 교파를 형성한 경우는 단 한 곳도 없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그런 교파적 조짐을 보이자 강하게 책망했다(고전1:11-12).


그럼에도 김홍기 목사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고 소위 교파 창설자들도 동의하지 않은(웨인 그루뎀 해당 책자, pp.878-879 참조) 교파주의를 절대 기준으로 삼고, 성경과 신실한 신학자들이 강력히 지지하는 <지방(city) 범위의 교회>를 지금처럼 ‘비성경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에게 위에서 인용된 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의 기존의 생각을 재고해 볼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3. 교파주의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 결코 변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성경에는 ‘교파’(denomination)라는 말이 없다. 또한 성경에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는 권면은 있어도 ‘몸을 찢는 분열’을 정당화하는 구절은 단 한 곳도 없다. 그럼에도 김홍기 목사는 교파의 장점을 거론하는가 하면 심지어 성별을 위한 분열은 정당하다는 식으로 교파를 적극 두둔하고 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그 어떤 성경구절이나 성경적인 사례를 제시한 적이 없다. 이것이 그의 교파주의 옹호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제 아래에서 1) 교파주의(분열)의 문제점들, 2) 교회 역사상 교파 분열의 핵심 원인들, 3) 김 목사가 제시한 교파 분열의 ‘긍정적인 사례들’에 대한 반박을 차례로 다뤄보겠다. 그 외에 김 목사가 주장하는 소위 ‘성별’을 빙자한 분열의 문제는 교회의 순수성(聖性, Sanctam Ecclessia)에 해당되어 별도 항목으로 다루고자 한다.


1) 교파주의(분열)의 문제점들


웨인 잭슨(Wayne Jackson)은 <교파주의 – 허용 가능한가, 아니면 비난의 대상인가>(Denominationalism – Permissible or Reprehensible?)라는 자신의 소논문에서 교파주의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분열(Division) - 종교적인 분열은 신구약 전체에서 정죄되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었을 때, 성경은 “여호와께서 여로보함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시니 이는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한다(왕상14:16). 사도 바울도 분열을 정죄했다((고전1:10-16, 롬16:17, 갈5:19).


다수의 몸들(Multiple Bodies) -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집”(사2:2-4), “한 백성”(겔37:22), “한 목자”(겔34:23), 주님의 “왕국”(단2:44)은 모두 단수이다. 초기 교회는 “하나”였다(행4:32). 바울은 “한 몸”을 선언했다(엡4:4). 탁월한 역사 기록에서 다수의 “기독교인” 교단들에 대한 어떤 제안이 있었는가? 전혀 없다.


전통(Tradition) - 인간의 전통이 신성한 법에 더해졌을 때, “기록된 것”을 넘어서는 과오를 범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교리)과 인간이 만든 전통들의 차이점을 분별할 수 없을 때, 교파주의가 일어나 창궐할 것이다.


경쟁 대 협력(Rivalry versus Cooperation) - 교파주의가 분열과 경쟁의 영을 극구 칭찬하는 것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범죄 행위이다.


다를 자유(The Freedom to Differ) - “교파주의 사고방식”은 다양성을 인정하다보니, 중요한 차이점들도 하찮은 일로 간주된다. 따라서 비진리도 쉽게 받아들일 여지를 줄 수 있다.


결론(Conclusion) - 교파주의적 타협의 영이 교회들 안에 점차적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왕국이며, 왕이 교회의 법의 창시자임을 인정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무엇을 결정하고자 할 때 교회는 “민주주의”라고 상상한다. 교파주의는 틀렸다. 이 점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교파) 조직을 반대할 수 있고 또 반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이다.


교인수가 현저히 감소하는 원인: 위에서 소개한 최용준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교파 분열이 교회 성장이 멈추고 심지어 퇴보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부끄럽고 한심한 상황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책임감을 느끼고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의 한국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심지어 퇴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분열’이라고 하는 아킬레스건 또는 암적 요소라고 주저 없이 외치고 싶다(위의 책, 30쪽).


그러나 그 어떤 이유들보다도 교파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모두 하나되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역행한 것이다. 또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뜻과 달리, 오히려 교회를 나누고 그 결과 이 땅에서 주님의 간증을 약화시키고 또 부끄럽게 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 항목인 ‘교파 분열의 원인들’에서 보겠지만, 분열에 연루된 사람들이 영적 분별력의 약함 때문에 대적인 사탄에게 속은 결과이다(마16:18 하).


2) 교파 분열의 원인들


김홍기 목사는 교파주의의 ‘장점’을 나열하고 ‘성별’을 위한 분열도 있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위 최홍준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교회 역사상의 분열의 원인들을 부정적으로 분석 평가하고 있다.


동·서방 교회의 분열 - 교회 지도자의 교만한 야심: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최초의 분열은 1054년에 발생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이었다. 이 분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적인 차이보다는 당시 로마의 교황 레오 9세를 질투하고 시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체룰라리우스의 교만한 야심이라고 보아야 한다. … 표면적으로 나타난 신학적인 차이는 소위 필리오케 논쟁이다.”


서방 교회 내의 재분열 - 교권 싸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된지 300년이 지난 후 서방 교회는 다시 교권 싸움으로 말미암아 교황이 두 명에서 세 명까지 나타나면서 1378년에서 1417년까지 분열과 혼란을 겪었다.”


종교개혁의 분열 -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 원래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분리시킬 의도가 전혀 없었다. 개신교단을 만들게 될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명백한 오류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결국 구교와 신교는 분열하게 되었다.”


서방 개신교회의 분열 - 부차적인 것을 절대화함: 개신교회의 교단 분열에 신학적 차이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은 분명히 신학적인 입장에서 차이가 있으며 침례교회와 오순절교회도 분명히 교리적인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신교회의 분열을 조장한 원인들을 요약한다면, 부차적인 차이들을 하나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만일 개신교회들이 부차적인 신학 논쟁을 지양하고 문화적인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다시 하나됨을 회복하는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노력한다면, 지금도 주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 - 명분 없는 교권 싸움: 손인웅 목사는 200여 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한국 교회는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제는 ‘하나’로 가야함을 역설한다. … 그 이후 가장 많이 분열한 장로교회의 경우, 분열은 거의 명분이 없다. 최초의 몇 가지 큰 분열을 제외하고, 수없이 분열한 교단들은 결국 상호 배타적인 자세 및 교권 싸움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탄의 주특기 - 분열 전문가: 대체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신이 절대 옳다는 거룩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분열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실은 분열의 영인 마귀에게 속고 있으며 시험 당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적이 될 수 없다. 유일한 적은 사탄이요 마귀들이다. … 아군과 적군을 혼동하여 자멸한 것이다”(위 최용준 목사의 책, 37-51쪽에서 부분적으로 발췌 인용함).


3) 김 목사가 제시한 교파 분열의 ‘긍정적인 사례들’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


김홍기 목사는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자신이 교파주의를 옹호하는 근거로 1) 침례교인인 제리 팔웰 목사의 목회 성공, 2) 미국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의 한국에서의 복음 전파, 3) 침례교인인 윌리엄 캐리의 인도에서의 복음 전파, 4) 장로교 통합 교단의 미자립 교회 지원 등을 그 예로 들었다. 이제 해당 부분을 필요한 만큼 인용 소개하고, 이어서 그에 대해 평가해 보겠다.


제리 팔웰(Jerry Falwell)이 ‘분리해서’ 나온 35명의 성도들과 함께 개척한 이 교회는 몇 주 안에 라디오 방송사역을, 6개월 후에는 텔레비전 방송사역을 시작하면서 일취월장으로 성장하여, 197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 하는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 … 그가 설립한 교회는 현재 7천 석을 갖춘 예배당에서 매 주일 오전 두 차례 예배를 드리며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 2007년 팔웰이 소천했을 때 뉴욕 타임즈는 팔웰을 특별 기사로 다루며 그를 미국의 ‘종교적 권리의 대부라고 칭했다(김홍기, 토론글 #10).


“지방교회의 교파주의 비판은 교파를 ‘분열의 악’으로 규정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떤 교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취할 때 그 교파와 그 행위는 악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장로교파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한 것은 악이 될 수 없다. 또한 미국의 한 감리교파가 아펜젤러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한 것도 악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조선을 복음화하시기 위해서 미국의 한 장로교파와 한 감리교파를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다”(김홍기, 재반론 #2).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1793년 4월 영국의 런던을 떠난 한 배는 전세계를 향한 현대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도로 가는 이 배에는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윌리암 캐리와 그 일행이 승선해 있었는데, … ‘칼빈주의적 혹은 개혁주의적 침례교회’들로 구성된 선교협회의 후원이 없었다면 윌리암 캐리는 인도로 갈 수 없었을 것이고 … 이처럼 현대선교의 시대를 열었던 이들은 바로 세계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헌신한 한 ‘교파’였던 것이다”(김홍기, 재반론 #7).


“필자는 최근에 예장통합의 한 노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 흐뭇한 일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이란 그 노회에 속한 대형 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같은 노회에 속한 미자립 교회들을 재정적으로 적극 돕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나님께서 이 일로 말미암아 얼마나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겠는가!”(김홍기, 재반론 #7)


김 목사가 위에서 열거한 내용들 안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공의로 심판 하시는 주님께서 훗날 그들이 행한 수고에 대해는 보상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교파’가 없었다면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결코 하실 수 없으셨을 것임으로 ‘교파주의’는 정당하고 또 필요하다는 김 목사의 현재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성경에는 교파 없이도 활발하게 복음이 전해졌고 또 구제가 행해진 많은 사례들이 있다. 따라서 김 목사가 교파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제시한 위 몇 가지 궁색한 사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교파주의를 결코 정당화하지 못한다.


첫째, 분열된 교단이 없어도, 교회는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또 전해 왔다.


장로교단, 감리교단, 침례교단이 있어야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 사도행전은 복음 전파의 이야기로 넘쳐나지만, 그 어디에도 지금처럼 교파가 복음을 전해서 자기 교파를 여기 저기 확산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가 네 차례 선교 여행을 통해 얻은 열매들은 신약 서신서들에서 보듯이 각지에서 한 새사람의 간증을 짊어지는 그 지방에 있는 교회들로 나타났다. 두 사도들은 단 한 번도 특정 교파를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복음 전파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인들을 구원하여 각지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한 몸을 건축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며(엡4:4, 2:21-22, 16, 위 신약 서신서 수신인들 참조), 지금처럼 분열된 특정 교파의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둘째, 분열된 교단이 없어도, 교회는 구제를 실행할 수 있고 또 실행해 왔다.


사도 바울은 글라오디오 때에 유대 지역에 큰 흉년이 들자 아가야와 마케도니아 지역에 있는 여러 지방 교회들을 격려하여 물질을 모은 후,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전달했다. 이 미담은 고린도후서 8-9장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이에 관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디아코니아, 1248)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교파와 전혀 무관하며, 전적으로 한 몸 안의 지체들 사이에서 “평균케 하시는”(고후8:14) 머리이신 주님의 안배요 공급이다.


이 외에도 최초의 신약 교회였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내에서 ‘과부들을 돌보는 구제’의 실행이 있었고(행6:1-3), 이러한 실행의 흔적은 다른 지방 교회들 안에서도 발견된다(딤전5:16, 6:18). 이 역시 교파와 무관한 실행이었다.


셋째, 어떤 사람의 공적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의 불을 통과함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김 목사는 침례교 목사인 제리 팔웰이 비록 분열의 입장에 섰지만, 사람을 많이 얻어 교인의 숫자를 늘렸고, 신학교도 세웠고, 기독교인들을 격려하여 세속 정치에 적극 참여케 한 공로를 교파주의가 정당하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일”(work)은 장차 심판대 앞의 불을 통과한 후에, “금과 은과 보석” 혹은 “나무와 풀과 짚”으로 판명될 것이다(고전3:12-15). 특히 우리는 이 고린도전서 3장 내용은 사람들이 바울과 아볼로를 선호함으로 시기와 분쟁이 있던 상황을 책망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에 기여한 것만 인정받을 것을 암시하는 문맥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심은 자신이나 물 주는 바나바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 높였지만(고전3:7), 김 목사는 “제리 팔웰의 교회”라는 표현을 통해 그의 이름을 높이고, 그가 침례교단 소속임을 은근히 과시하여 하나님께서 홀로 받으실 영광을 나눠 갖게 했다.


따라서 위 세 가지 이유만으로도 교파주의의 소위 ‘긍정적인 방면’이 교파주의 자체를 정당화 하지 못한다 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유익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 결과적으로 주님의 몸을 분열시키는 행위가 얼마나 엄중한 문제인지를 알도록 두 가지 사례를 더 소개해 보겠다.


넷째, 여로보암의 죄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분별과 하나된 간증을 손상시키는 것은 다른 어떤 공로로도 면책될 수 없는 심각한 죄악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남북으로 분열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지만(왕상11:11), 그것은 솔로몬의 죄로 인한 징계였을 뿐,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분열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득이하게 허락하셨지만 그분의 원함과 기쁨에 따른 것이 아닌 사례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메추라기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민11:18, 32-33).


아무튼 이런 분열된 와중에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B.C. 786년에 왕위에 올라 41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이 번성케 되기를 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왕하 1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와 그로 인한 여호와의 격노하심을 반복해서 언급한다(왕상15:26, 30, 34, 16:2, 7, 19, 26, 31).


그렇다면 ‘여로보암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열왕기상 12장 25-33절에 표면적으로 나타난 그의 죄는 (1)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케 한 것, (2) 예루살렘 외에, 임의로 단과 벧엘에 경배처를 만든 것, (3)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 (4)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한 것 등이다. 그러나 그 숨은 동기는 정한 규례를 따라 백성들이 경배차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경우,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돌아가” 자기의 정치적인 입지가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권익과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됨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우선 삼고 민족의 분열을 고착화시킨 것이 그의 죄악의 숨은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파주의와 그 본질상 상당부분 유사하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다.”라고 하신 말씀을 교파주의 옹호자인 김 목사가 깊이 묵상해 볼 것을 권하겠다(왕상14:16).


다섯째,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영적 행위들은 훗날 그분 앞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거절될 수 있다(마7:21-23).


사도 바울은 자신도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 행”했지만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버림이 될까 두려워”했다(고전9:23, 27). 이것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것이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실제로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쫒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이들”을 향하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라고 말씀하실 것을 경고하고 있다(마7:21-23).


따라서 하나님의 뜻인 한 몸의 건축(히10:7, 마16:18, 엡2:21-22, 4:11-16)을 목표로 하지 않고, 자기 소견과 자기 유익을 따라 ‘주를 섬김’으로써 결과적으로 몸의 건축을 방해하고 하나의 간증을 훼손하고 있는 이들은 위의 경고를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죄악은 몸의 하나를 분열(교파주의)시키고, 또 몸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이다. 후자(교회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겠다.

 


4. 교회 진리의 성별(聖別)은 교회의 하나됨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김홍기 목사는 아래에서 보듯이 ‘성별’을 위해서는 분열하여 새로운 교파를 만들어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심지어 교파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성경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빈대 잡다가 초가 삼간을 태운다’라는 말에 해당 된다.


교파는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 때문에 생겨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새로운 교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교파는 없다. 그러나 성별(聖別)을 통해 시작된 교파가, 지방교회가 함부로 주장하는 바처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죄악시하는 것으로서 신성모독 죄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흉악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김홍기, 재반론 #4, #6).


김 목사의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비성경적이고 설득력이 없다는 점은 다음 세 가지로 알 수 있다.


1)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 우상 숭배나 배역 등의 일이 발생한 경우 그로 인하여 새로운 별도의 공동체를 세운 예가 전무하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금송아지 숭배(출32장), 아간의 범죄(수7:1-26), 미리암의 배역으로 인한 문둥병의 발병(민12:9-16), 고라와 족장 이백 오십인의 배역(민16-17장) 등 공동체의 정체성을 더럽힐 수 있는 수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서 ‘성별’을 위해 분열하여 별도의 공동체를 만든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그분께 절대 순종하는 리더쉽을 통해 ‘누룩’에 해당되는 당사자들을 치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의 순수성과 하나의 간증을 보존했다.


2) 신약의 원칙도 죄를 지은 자들을 권면하고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로 여기는 것이지, 분열하여 나가서 별도의 교파를 만든 예가 없다.


마태복음 18장은 이 점에 대한 큰 원칙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즉 만일 한 형제가 죄를 범하면 먼저 한 사람이 가서 권면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한 두 명이 추가하여 권면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가 개입하고, 교회의 말도 안 들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김으로 처리해야 한다(15-17절).


3) 성별을 위한 조치는 교회의 하나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


위에서 우리가 “교회의 하나를 존중하는 범위”를 언급하였지만, 이미 수천 수만개의 교파들로 나뉘어진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어떤 교회의 하나를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딜레마가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도 ‘교회는 우주적으로 한 몸(한 새사람)이며, 이 한 몸이 각지 지방에 나타난 것이 ‘그 지방을 대표하는 성경적인 교회’이다’라는 원칙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기 목사가 교회론 토론에서 지금까지 크게 의존해 온 웨인 그루뎀 박사의 조직신학 책은 현재와 같은 교회 상태에도 적용할 만한 몇 가지 설득력 있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불신자와 이단으로부터 분리는 가능: 웨인 그루뎀은 “많은 지체들이 한 몸이다”(고전10:17, 12:12-26)라는 점을 전제로, 성경이 말하는 분리(롬16:17-18, 갈2:11-14, 5:20-21, 유19, 고후6:17, 딤후3:4-5, 8, 고전5:11-13)가 유효한 경우는 불신자와 이단일 경우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신 명령은 언제나 불신자로부터의 격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동의하지 않는 신자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웨인 그루뎀, 노진준 옮김, 조직신학 하, 은성, 2009, 59쪽).


교회 연합을 다루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교리적인 차이(그와 같은 차이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부인하게 만드는 이단에 속한 것이 아닌 한) 때문에 분리하라고 하는 신약의 직접적인 명령은 없다. 교회의 하나됨에 관한 이 구절들은 유형 교회의 순결을 위해 최선을 다함과 아울러 유형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을 증거한다(위의 책, 59쪽).


둘째, 성별은 분열의 상처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 웨인 그루뎀은 교회사의 처음 100년 동안은 교회가 외형적으로 하나였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이레니우스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2세기 경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는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개혁도 그들의 분열로 인한 상처와 견줄 만큼 중요하지 않다(Against Heresy4.33.7)(위의 책, 60-61쪽)


셋째, 모교회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아닐 때 분리 가능: 이런 기준은 성경적인 교회의 간증이 보존 되던 때는 있을 수 없는 말이지만, 이미 교회의 타락이 한참 진행된 현재와 같은 교회 상태에서는 매우 설득력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참고로 이 기준으로 볼 때, 미국에서의 장로교단의 분열이나 김홍기 목사가 소속된 침례교단의 분열은 정당성을 상실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내의 교단 분열의 대부분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이나 혹은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는 근본적인 오류로부터 분리되는 원칙에 입각하여 한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새 교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모교회의 교리적인 오류가 너무 심각하고 커서 거짓 교회가 되어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아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 루터나 칼빈도 결국 카톨릭 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었다고 말했다(위의 책, 64-65쪽).


그런데 김 목사는 분열 전의 소위 모교회(미국 남침례교단)나 분열해서 나가 만든 교파들(예를 들어 성서 침례교 친교회, 지계석주의) 모두를 소위 정통 교회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원칙도 기준도 없는 억지일 뿐이다.


넷째, 참교회에서 떠나라는 명령은 신약 성경에는 없다: 웨인 그루뎀은 한 교회의 교리적인 입장이 성경의 기준에서 심각하게 벗어난 경우에, 분리의 필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교리적인 편향이 얼마나 심각할 때 교회를 떠나거나 새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가 아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한, 참된 교회에서 떠나라고 한 명령이 신약 성경에는 없다. 잘못하고 있는 교회의(교회 안에 있던 교리적, 도덕적 심각한 문제를 방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사도적 사역도 부인했던 고린도에 있던 교회조차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신실한 교인들은 그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때로 교회에서 출교시킴으로 권징을 실시하라고 명한 적도 있지만, 그런 권징이 즉각적으로 실시되지 않을 경우 교회를 떠나거나 분열시키라고 명한 적은 없었다(롬2:14-16, 20-25, 눅9:50, 11:23을 보라)(위의 책, 63-64쪽).


김홍기 목사는 “교파는 진리를 위한 성별(聖別) 때문에 생겨난 경우가 많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언급했던 위 제리 팔웰 목사의 교회나 ‘지계석 주의’ 침례교파의 경우는 소위 모교회(미국 남침례교단)가 ‘거짓 교회’로 변질된 경우가 아니었다. 따라서 김 목사가 소위 ‘성별’을 빌미로 분열된 교파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이 원칙에도 저촉된다.

 


5. 교회의 성별을 말한 성경 본문을 그대로 말한 위트니스 리에 대한 김 목사의 정죄는 부당하다.


김홍기 목사는 토론 중에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위트니스 리가 “선한 교파를 ‘영적 음행, 음녀, 배교자, 큰 바벨론, 사탄의 조직’ 등의 용어로 정죄했다”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반복 인용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분노를 유발해 왔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식의 공격은 김 목사가 처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여러 이단 감별사들이 위트니스 리 책 본문의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내어 흔들어 보임으로써 "화나게 할 만한 부분들"을 통해 위트니스 리 그리고 더 나아가 지방 교회측을 향한 반감과 혐오감을 부추겼다.


1) 배교한 로마 교회는 음녀이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딸들[개신교] 역시 음녀들이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594).


해명: 김홍기 목사는 자신도 로마 천주교가 “배교한 음녀”라는 점은 동의하나, 왜 위트니스 리는 개신교까지 동일하게 음녀 취급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것 같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자 한다.


첫째, 위트니스 리는 계시록 17장 1절의 “큰 창녀”를 “변절한 로마 천주교”라고 해석 한다. 이어서 그는 “그 여자의 이마에는 ‘비밀, 큰 바빌론,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5절)라는 본문에 나오는 “창녀들”을, “변절한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과 실행과 전통을 어느 정도 고수하고 있는 기독교의 여러 종파들과 단체들임에 틀림없다.”고 하고, 이어서 “순수한 교회생활에는 변절한 교회에서 전달된 악이 전혀 없다”라고 적고 있다(각주2).


둘째, 위트니스 리는 무조건 개신교 전체를 음녀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변절한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과 실행과 전통을 어느 정도 고수하고 있는” 종파가 있다면, 그들 역시 음녀의 딸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으로 “음녀인 천주교의 실행을 따르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적으로 실행하는 개신교 단체들이 있다면, 그들은 “음녀의 딸들”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임의로 원문에는 없는 [개신교]라는 말을 끼워 넣은 후, 위트니스 리가 모든 개신교를 음녀 취급한다며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원문은 “The apostate Roman Church is a prostitute,and all her daughters are also prostitutes.”라고 되어 있고 ‘개신교’라는 말이 없다.


셋째, 참고로 널리 존경받았던 학자이자 미국 <복음주의 협회>(The Evangelical Foundation) 창시자인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는 해당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계 17장 5절에 나오는] 이 여자는 창녀들의 어미라 불린다. 어미 창녀가 있고 딸 창녀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 우상숭배의 기원이 되는 조직은 많은 하부 조직들을 만들어내며 발전해가고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활동하던 개신교 주석가들은 언제나 이 큰 창녀가 로마 교회라고 말했다. 성경은 개신교 단체들을 창녀의 딸들에 포함시킨다. … 하나님은 오늘날 모든 교파들 안에 참된 증인들을 소유하신다. 그러한 조직 안에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다(Revelation: An Expository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71, 1982, p 324).


김 목사는 ‘개신교 단체’가 ‘창녀의 딸들’이라고 말한 위 장로교 신학자의 지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모든 분열들과 [개신교] 교파들은 큰 바벨론 안에서 완성된다”(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463).


해명: 위 문장 역시 원문은 “모든 분열과 종파가 큰 바벨론에서 완성될 것이다.”임에도 김홍기 목사가 “개신교”라는 말을 삽입해 넣었다. 아무튼 자신이 이단이자 음녀로 정죄한 로마 천주교와 보조를 같이 하려는 최근의 개신교 진영의 움직임에 대해 김홍기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1) 천주교, 루터교, 감리교단의 칭의론 합의: 2006. 7. 23일 서울 금란교회에 모인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과 로마 교황청 발터 카스퍼 추기경 그리고 이스마엘 노코 세계루터교연맹 사무총장이 공동선언문(JDDJ)에 나타난 칭의론에 동의하며 온전한 친교의 공동체를 추구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한 것.


(2) 개신교 4개 교단들과 천주교의 세례협정문 체결: 미국의 주요 개신교 4개 교단(북미주개혁교회(CRC), 미국장로교회(PCUSA), 그리스도연합교회(UCC), 미국개혁교회(RCA))이 2013. 1월 텍사즈 주 Austin에서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Common Agreement on Mutual Recognition of Baptism)에 서명한 것.


(3)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 일치협의회: 2014년 5월에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가 출범되었다. 한국천주교회와 한국정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 루터교회가 함께 모여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구성한 것.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고, 하나의 교회를 원하십니다. 개신교뿐 아니라, 동방교회 등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교회들이 신앙을 확인하고, 같은 성사(聖事)를 거행하며, 주교직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입니다.”(발터 카스퍼 추기경)


3)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 우리는 큰 바벨론, 즉 배교한 기독교계 위에 임하는 심판을 본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 외에 주님은 기독교계, 즉 큰 바벨론을 특별히 심판하실 것이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22).


해명: 성경은 장차 큰 바벨론이 일시에 무너질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계18:2). 즉 요한계시록 18:8은 “그 여자의 재앙들, 곧 죽음과 슬픔과 기근이 하루 만에 닥쳐올 것이고, 그 여자는 불에 완전히 타 버릴 것이다. 그 여자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위 위트니스 리의 말은 이러한 성경 본문 그대로를 말한 것 뿐이다. 성경에 기독(그리스도의 한자음)은 있어도 기독교계는 없다. 대신에 ‘기독’이신 그분께서 사람 안에 충만되신 그분의 몸이 있다. 그리고 이 몸은 그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새 예루살렘은 불에 태워지고도 남을 금과 은과 보석만이 그 재료가 될 수 있다.


4) "우리는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독교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교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큰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언이다. 기독교는 무너졌다. 기독교계는 무너졌다. 카톨릭교는 무너졌다. 그리고 모든 교파들은 무너졌다. 할렐루야!”(Witness Lee, The Seven Spirits for the Local Churches, 97)


해명: 위에서 위트니스 리가 말한 기독교는 기독교 안의 믿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 심지어 천주교 안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거듭난 믿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여기서 말한 ‘기독교’는 ‘기독교 체계’(system)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독교 체계가 바로 특정 교파를 형성하는 울타리가 되고, 이것은 결국 한 몸 안에서 참된 지체들이 서로 교제하고 하나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주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담인 율법(의식적인)을 십자가로 폐하심으로써, 원수된 둘을 한 새사람이 되게 하셨다(엡2:15-16).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계, 카톨릭교, 그리고 모든 교파들이 무너지고, 대신에 참된 생명을 가진 주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이자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으로 건축될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할렐루야를 외칠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려고 위 말을 한 것이 아니다.


5) “로마 카톨릭 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파 안에는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속해 있는 교파들의 조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교파의 조직들은 적절한 교회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하는 사탄적인 조직을 세우기 위해 사탄에 의해서 사용되어 왔다”(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p. 464).


해명: 위 인용문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위트니스 리는 위에서도 구성원들인 거듭난 성도들(persons)과 교파 조직(system)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서두에 소개된 최용준 목사의 사례처럼, 거듭난 성도들은 비록 교파가 달라도 얼마든지 하나의 간증을 위해 연합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특정 교파가 교단 헌법을 들이 대며 하나된 성도들을 재차 분리시키려 한다면, 그러한 조직 자체가 하나를 깨는 도구일 수 있다. 그렇다면 몸이 하나되는 것을 훼방하는 자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그가 바로 건축된 교회를 훼방하는 음부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가 아니겠는가(마16:18하)!


최 목사도 “대체로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신이 절대 옳다는 거룩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분열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실은 분열의 영인 마귀에게 속고 있으며 시험당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라고 함으로써 같은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위의 책, 50쪽).


6) “주님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개혁교회는 ... 다양한 이름으로 자신을 교파화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은 배교이다. 주님의 이름 외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교회를 교파로 나누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188).


해명: 이미 여러 번 지적해 왔지만, 위 인용문은 ‘이단 및 신흥종교백과사전’(ECNR) 팀이 오픈 레터 서명자들에게 위트니스 리의 원문을 조작하여 제시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위 내용은 김 목사가 흥분하며 분개하는 것처럼 ‘개혁교회가 배교했다.’라는 문맥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명해 보겠다.


첫째, 위트니스 리는 위 문맥에서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나의 말을 지켰고) 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계3:7-8)라는 본문을 주석하고 있다. 그는 해당 본문의 ‘빌라델피아 교회’를 영국의 ‘형제회’에 적용하면서, “그들은 주님의 이름 외에 어떤 이름도 취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위 내용에 바로 이어 문제의 인용문이 시작된다. 따라서 백과사전팀은 부정하고 있다. …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한 것은 배교이다.처럼 중간에 말줄임표를 넣거나 아니면 “회복된 교회 즉 형제회는 말씀으로 온전히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버렸다.”는 원래의 원문을 그대로 살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간 내용을 생략한 후 엉뚱한 두 문장을 끌어다 붙임으로써, 위트니스 리가 로마 천주교에 대해서 한 말을 ‘개혁교회’에 대해서 말한 것으로 둔갑시켰다. 김 목사는 우리 측의 강력한 항의와 해명을 통해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위 조작된 내용을 반복 소개함으로써 분노를 유발하고, 오픈 레터 서명자들이 저지른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에 본인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셋째, 그렇다면 원래의 문맥에서 위트니스 리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1) ‘배도한 교회’(로마 천주교)는 이단이다. 2) 신랑이신 주 예수님의 이름 외에 모든 이름을 버린 형제회와 달리, ‘루터, 웨슬레, 성공회, 장로, 침례’처럼 각종 사람, 국가, 혹은 특정 진리를 교회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은 마치 스미스(Smith)씨의 부인이면서 존슨(Johnson) 씨의 부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는 것(서구 사회에서 이것은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행위임)과 같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위 인용문 바로 뒤에서 “그리스도께 배필이 된 순결한 처녀인 교회(고후11:2)는 그녀의 남편 이외에 어떤 이름도 갖지 말아야 한다. 모든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6. ‘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다’라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모함에 대한 반론


지방 교회측이 사도행전 9장 4-5절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나타난 그분의 몸을 가리켜 ‘나’(Me)라고 동일시 하셨다고 하자, 김 목사는 자신의 재반론 글에서 뜬금없이 다음과 같은 모함을 여러 차례 했다.


지방 교회의 비성경적인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교회요 교회가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교회, 즉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교회, 즉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고린도 교회의 경우처럼) 당 짓는 일과 시기와 이방인들 중에도 없는 음행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 괴이한 이단자 지방교회여 답해 보라!(김홍기, 재반박#7).


김홍기 목사가 토론의 중점인 성경적인 교회와 교파주의에 대한 논의 외에, 있지도 않은 엉뚱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심지어 자신의 재반론글의 제목으로 삼는 것은 유감이다. 다소의 사울이 스테반을 포함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했지만, 주 예수님은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교회(성도들)와 자신을 동일시 한 것은 성경 자체가 말씀하는 바이다. 또한 지방 교회측은 한번도 그리스도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김 목사는 전에도 지방 교회측이 ‘칼빈을 이단으로 정죄했다’는 등 황당한 내용으로 자신의 글의 제목을 달아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사실 무근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독자들의 바른 이해를 위해 사실이 아님을 재차 지적해 둔다.

 


7. 소위 정통 교회와 성경적인 교회


김홍기 목사는 토론 과정에서 지방 교회측이 “정통 교회의 피를 먹고 성장했고, 정통 교회의 등골을 빼먹으며 몸집을 불려왔다”라는 등 ‘정통 교회’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우리는 김효성 박사가 지적한 ‘구체적인 교단들’을 제시하며 이들이 그 정통 교회에 해당되는지를 여러 차례 질문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한 답변은 끝까지 회피하고 있다. 또한 신학자들이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사용해 온 1. 바른 말씀의 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의 실행 등도 무시하고, 대신에 뜬구름 잡는 식의 설명으로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김 목사가 정통 교회라고 제시한 루터교 등 대부분의 개신교단은 정작 김 목사가 이단이며 음녀라고 강하게 정죄하고 있는 로마 천주교와 지속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점이다. 즉 위에서 본 것처럼 로마 천주교와 대부분의 개신교가 칭의 개념, 세례 문제, 직제 문서 등에서 일치를 공식 선포했다. 이것은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정통이거나 혹은 반대로 모두가 이단일 때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그 외에 김홍기 목사처럼 천주교는 이단이고 개신교는 정통 교회라는 구분은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모순된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정통교회’라는 개념이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의 관계에서 보듯이 시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정통 교회’라는 말 보다는 ‘성경적인 교회’ 혹은 ‘참 교회’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경적인 교회’ 혹은 ‘참 교회’인가? 그것은 1. 참되게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만이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고(보편교회) (마16:18), 2. 한 새사람이기도 한 그 보편 교회는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지방을 단위로 개 교회로 불리우는 것이다(계1:11, 마18:17). 우리는 성경 도처에서 이런 교회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소위 ‘정통 교회’라는 말이나 그런 개념은 성경에서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주 그리스도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된 바울은 자신이 본 비밀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을 통하여 …함께 몸의 지체들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엡3:3-6). 성경은 또한 주님의 일꾼들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건축하게 하는 것이 사역의 목표라고 말한다(엡4:11-12). 따라서 주님께 부름받은 모든 이들은 “모든 일에서 겸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고,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야”할 의무가 있다(엡4:1-3). 그것은 분열을 피하고 한 몸’(엡4:4)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한다면, 그 누구라도 분열을 전제한 교파주의가 한 몸의 건축과 양립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교파주의는 인간의 타락에서 온 약함의 산물일 뿐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님으로 언제인가는 청산되어야 할 대상이지, 그것을 정당화 하고 지향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최용준 목사의 귀감이 되는 사례처럼 그가 어떤 단체에 속해 있든지 참되게 거듭났다면 교파를 초월하여 주님의 몸의 참된 지체로 인정하여 받고, 사랑 안에서 서로 생명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갈망인 한 몸을 건축해 가야 할 것이다(엡2:21-22). 이것이 모든 사역자들(엡4:11-12)과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목표가 되어할 것이다(엡4:16).


우리는 끝으로 두 가지를 언급함으로써 이 교회론 관련 재재반론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항간의 오해처럼 결코 지방 교회들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지방 단위의 교회들이 요한계시록 1-2장에는 발견되지만, 끝인 21-22장에서는 오직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만 보인다. 즉 지방 범위의 지역교회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되면 사라질 것들이다(엡3:21).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부화되기까지의 계란 껍질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주님과 우리의 최종 관심은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의 출현(계21:9-10)이며, 지방 교회들은 단지 그 절차일 뿐이다.


둘째, 우리는 주님의 긍휼로 그분의 몸의 건축에 대한 이상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지방 단위의 지역 교회의 필요성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분명한 이상을 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이 길을 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 몸의 실재(고전12:12-27)를 사는 면에서는 많은 부족이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이 기회를 빌려 1) 우리만 교회라거나, 2) 우리에게 와야만 구원이 있다거나, 3) 다른 믿는 이들에게 배타적이라는 항간의 루머는 악의적인 이단 감별사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 결코 사실이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주님의 몸은 모든 참되게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되며 소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귀히 여기는 성도들만이 몸은 아니다.


우리는 아무쪼록 본 토론을 통해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바른 길과 그 건축을 훼방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 드러남으로써, 사랑 가운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서로에게 공급하여 분열이 없는 주님의 한 몸을 건축하는 소망을 가진 성도님들이 증가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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