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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와 김홍기 목사, 과연 누구의 교회론이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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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와 김홍기 목사, 과연 누구의 교회론이 성경적인가?

 

 

김홍기 목사의 이번 마지막 토론글 내용은 깊은 실망감과 추가적인 의혹들만 남겨 주었다. 지방 교회측은 김 목사의 마지막 글에서 전반적인 토론을 마무리하는 결론적인 내용을 기대했지만, 그는 뜬금없이 마틴 로이드 존스를 장황하게 소개하는데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 목사의 마지막 글은 워치만 니에 대한 판단 기준과 판단 대상 모두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지닌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먼저 김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분리와 일치’와 관련하여, 워치만 니를 공격할 절대 기준으로 로이드 존스를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다수에 의해 무시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라고 김 목사 본인이 실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절대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워치만 니를 비판하려고 소개된 “일치는 영적 생명에 기초해야 한다.”라는 로이드 존스의 말은 오히려 반대로 워치만 니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김 목사 자신도 워치만 니가 ‘영적 생명(중생)을 기초’로 일치를 말한다고 시인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영적 생명’에 근거한 워치만 니의 ‘일치’ 주장을 “편파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김 목사의 글은 판단 기준 자체가 자기 모순에 빠져 있고, 그 적용 또한 뒤죽박죽이다. 이것은 그가 절대 기준인 성경보다 상대 기준에 불과한 ‘유명 신학자들의 주장’과 교파주의처럼 ‘일시적인 현상들’을 토대로 논리를 펼쳐 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분리와 일치’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성취를 말하는 성경 본문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워치만 니의 입장이 오히려 그와 같다.


판단 대상에 대해서도 김 목사는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 낸 일부 내용만을 참고하는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인터넷(http://www.ministrybooks.org/)에 소개된 60권이 넘는 워치만 니의 저서들 중 단 한 권에서, 그것도 ‘신조’(Creed)라는 말이 들어간 두 세 쪽의 내용만으로 워치만 니의 교회론을 정죄했다.


그는 "종교 개혁가들의 원래의 의도처럼 성경으로 돌아가 ‘오직 성경’을 외칠 때 신조는 불필요하다."라는 취지의 워치만 니의 말에서 ‘신조는 불필요하다’라는 부분만 떼어낸 후,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신성모독적인 맹독성 교리”라는 등의 온갖 막말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정성과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김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던 종교개혁자들도 함께 비난되어야 하고, 그들의 구호 또한 ‘오직 성경’이 아니라 ‘오직 성경, 다만 신조는 포함!’이라고 고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도를 벗어난 후퇴일 뿐 결코 바른 길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아래에서 워치만 니의 합일과 분별의 기준, 워치만 니와 로이드 존스의 비교, 김홍기 목사가 인용한 원문의 전후 문맥의 바른 의미, 그외에 기타 남은 문제들을 좀 더 깊이 다뤄보겠다.

 


1. 그리스도인의 분리와 일치에 대한 워치만 니의 성경적인 견해


워치만 니는 자신의 책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한국복음서원, 2003) 제 6장에서 ‘합일과 분열의 근거’를 아래와 같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1) 일치: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근거에 대해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는 말씀을 기초로 설명한다. 즉 그는 위 책에서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이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된 사람이다.라고 정의한다(186쪽). 워치만 니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비밀스런 ‘합일’을 얻었으므로 하나 될 수 있다. 성경은 이 ‘합일’을 ‘성령의 하나’(엡4:3)라고 말했다. …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 자신의 하나와 같이, 내주하시는 주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라고도 했다(188쪽). 이어서 그는 우리는 보혈로 구속 되어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리의 형제로 본다.라고 했다(190쪽).


또한 워치만 니는 같은 책에서 우리는 사람에게 이 하나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 후, “바울은 (엡4:3절) 밑의 말씀에서 성령의 하나가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일곱 가지에서 우리와 같다고 말한다. … 이 일곱 가지는 사람에게 이 성령의 하나가 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일곱 가지가 성령의 하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191-192쪽).


2) 일곱 가지의 하나가 일치의 기준임: 이어서 워치만 니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에베소서 4장 4-6절이 말하는 다음 일곱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기준이 된다고 말한다(위의 책, 192-199쪽 참조).


-몸이 오직 하나이다: 우리가 사람들과 하나되는 범위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선택적인 교통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은 곧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좋은 표징은 곧 주일 저녁에 우리가 떼는 그 떡이다. 떡을 쪼개어 다 먹었지만 떡은 모든 형제자매들의 뱃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합할 때 여전히 그 한 떡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연합함으로써 이룬 그리스도의 몸이다. … 모든 사람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인가에 있다.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면 우리의 형제이다. 이것 외에 다른 요구가 있을 수 없다.”


-성령께서 오직 하나이시다: “만일 그에게 있는 영이 그가 “예수는 주시라”(고전12:3)고 말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성령인 것이다. 만일 그가 받은 것이 성령이고 당신이 받은 것도 성령이라면 성령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단체이며 나누어질 수 없다.”


-부르심을 입은 소망이 오직 하나이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이는 곧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우리는 장래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살 사람들이고, 오늘 이 땅에서 나누어질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동일한 노정에 있어야 한다.”


-주께서 하나이시다: “주는 오직 하나이신데, 그는 곧 예수이시다. … 서로 시인하고 섬기는 주님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나누어질 수 없다.”


-믿음이 하나이다: “믿음이 하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신앙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신앙은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분의 오심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죄인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것임을 당신이 믿느냐는 것이다. … 우리는 이것 이하를 요구할 수 없다. 이것 이하를 요구할 때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을 그 안에 섞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이것 이상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을 문 밖에 두게 된다.”


-침례가 하나이다: “여기(고전1:13)서 볼 때 침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이 약세를 받았든 침례를 받았든, 한번 받았든 세 번 받았든, 위로 향했든 아래로 향했든, 영적 침례이든 물 침례이든 이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누구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 바울이 주의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만일 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면 우리와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신가? ... 만일 우리 믿는 이가 만유의 아버지시고 인격이 있고 초월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뉠 이유가 없다.”


이상의 일곱 가지는 신성한 하나로서 전체 교회가 공유한 분깃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사람에 대한 시험을 삼아 그가 그리스도인인가를 본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는 근거로 삼는다.


위 1)과 2)에서 본 워치만 니의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기준’은 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에서 지나친 것을 요구하면,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문 밖에 두게 될” 위험성이 많다. 반대로 위 일곱 가지 기준을 바르게 적용할 때, “가라지”(마13:26-30)로 대표되는 가짜 믿는 이들 그리고 참된 믿는 이들이 아닌 사람들이 섞여진 W.C.C. 같은 연합 활동들도 걸러질 수 있다.


3) 분리 혹은 성별: 워치만 니는 먼저 위 일곱 가지 기준으로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 섞여 있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걸러낸다. 그가 말하는 ‘지방 교회들’은 해당 지역(city) 내에서 일곱 가지 기준에 부합된 ‘참되게 거듭난 믿는 이들’로만 구성된다. 그는 또한 거듭나서 교회의 일원이 된 이들이 여전히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옛사람의 요소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다룬다.


즉 그는 성경의 가르침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60여권의 저서를 통해, 몸 안의 유일한 내용인 “주님 자신의 충만”(엡1:23) 외에, 십자가에서 이미 끝난 것들(죄, 죄들, 세상적인 요소들, 육체의 열매들, 자아, 옛사람, 종교, 윤리, 도덕 등)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를 깊이 있게 다룬다. 이 점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영광스러운 교회>, <교회의 정통> 등 워치만 니의 책을 한번이라도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억지로 꼬투리를 잡으려는 김홍기 목사 외에, 과연 누가 이런 점에서 워치만 니를 로이드 존스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 김홍기 목사의 워치만 니와 로이드 존스의 비교에 대한 반론 및 평가


김홍기 목사는 아래와 같이 네 가지 범주로 로이드 존스와 워치만 니를 비교 평가했다. 이러한 김 목사의 평가에 대하여 지방 교회측의 입장을 간략하게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 정통 개신교의 범주 안에서 사역을 했다. 반면에 니는 정통 개신교의 교파를 죄악시하여 지방 교회를 창시하고 사역을 했다.”


반론: 이미 여러 차례 밝힌 것처럼, 워치만 니는 성경과 초기 교회가 실행했던 지역 교회의 원칙을 따른 것이며, 결코 “지방 교회를 창시”하지 않았다. 김 목사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호도한 채 지금처럼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워치만 니가 반대한 것은 주님의 몸을 나누는 분열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분열을 경계하고 책망하고 있다(고전1:10, 3:3-5, 11:18-19, 갈5:20, 딛3:10, 롬16:17). 한편 루터, 칼빈, 웨슬레 등 소위 개신교파 창시자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교파를 창시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2) “로이드 존스는 WCC를 진리의 타협 위에 세워진 운동으로 판단하고 강력히 반대했던 반면, 니는 중생한 자라면 어느 누구와도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론: 중생한 자는 주님의 한 몸 안의 지체들이다. 이러한 한 몸의 지체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다(요13:14, 요일1:3, 고전12:12-27). 그러나 워치만 니는 “믿는 이들은 주 안에서 연합해야 하며, 그것은 결코 일종의 ‘연합회’ ‘위원회’의 연합이 아니다.”(기독도보(3), 151쪽)라고 말함으로써 WCC를 포함한, 생명을 떠난 어떠한 연합 활동도 반대한다. 따라서 W.C.C.에 대해서 워치만 니는 로이드 존스와 차이가 없다. 김 목사는 사실을 왜곡하면 안 된다.


3) “로이드 존스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비진리와 타협하는 교파들에서 나와 진리 위에 굳게 세워진 복음주의 연합체를 만들기를 원했지만, 니는 정통 개신교인들이 분열의 죄의 상징인 그들의 교파들을 떠나서 자신이 창시한 지방 교회에 합류하도록 적극 추진했다.”


반론: 성경 어디에도 어떤 특정 주의(-ism)를 중심으로 연합체를 만든 사례가 없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제시해 보기 바란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하여,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한 ‘한 몸’(엡4:4), 그리고 그 한 몸이 각지에 나타난 ‘지방 교회들’(고전1:2)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점은 로이드 존스보다 오히려 워치만 니가 더 성경적이다.


4) ”로이드 존스는 역사적인 개신교 교파들 안의 죄들을 거부했으나 교파들 자체의 합법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니는 개신교의 정통 교파들을 죄악으로 간주하고 붕괴시켜야 할 악한 불법적인 조직으로 보았다.”


반론: ‘교파들 자체의 합법성’을 지지하는 성경 근거가 있는가? 있다면 제시해 보기 바란다. 작고한 장로교 통합 교단의 이종성 박사는 “개신 교회는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다. … 1517년부터 개신교회는 분열, 따라서 예수의 몸을 찢는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라고 했다(교회론 I, 152쪽). 칼빈, 루터, 웨슬리 등은 교파를 만들 의도가 전혀 없었다. 주님은 지상 사역 마지막에서 몸의 하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다(요17:21, 23). 김 목사는 이런 점들을 어떻게 보는가?


참고로 김홍기 목사는 위 네 가지 비교를 말한 단락에서 “로이드 존스가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원리를 신봉하고 가르치며 실천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비록 김 목사가 이 다섯 가지를 워치만 니와 직접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워치만 니를 정죄하려는 의도로 이러한 기준들을 소개한 것으로 보임으로 이에 대해서도 지방 교회측의 입장을 간단히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진리 위에 기초’해야 한다.”


지방 교회측의 평가: 당연한 말이다. 워치만 니 역시 앞에서 본 것처럼 일곱 가지 성경 진리들을 하나됨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데 과연 김 목사가 주장하는 ‘교파의 정당성’은 어느 진리 위에 기초하는가?


“둘째, 진리를 정확히 분별하고 공유하기 위하여 ‘정통 교리를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즉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하여 성경적인 정통 교리에 기초한 신앙고백 혹은 신조는 불가결하다.”


지방 교회측의 평가: 워치만 니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되게 믿고 성경대로 실행하기만 한다면, 신조는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은 워치만 니와 로이드 존스가 견해를 달리한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이 ‘오직 성경’을 외쳤던 그 심정과 자세는 로이드 존스보다 오히려 워치만 니의 견해에 더 가깝다.


“셋째, 정통 신앙의 보존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영적 생명 위에 기초’해야 한다.”


지방 교회측 평가: 당연한 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영적 생명’ 혹은 ‘그 영의 하나’(엡4:3)를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남긴 수백 권의 저서들은 아래 로이드 존스도 언급한 ‘생명에 기초한 신학’으로 분류될 만하다. 참고로 위트니스 리는 성경 66권 전체를 생명의 방식으로 강해했고, 그 책 이름도 ‘라이프 스타디’(Life- Study)이다.


심지어 16세기와 17세기의 자세한 진술들조차 믿음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당신은 종이 위에 쓰여진 진술들로 결코 신앙을 보호할 수 없다. 당신은 종이 선언문으로 정통을 지속시키는 것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 … 첫째로, 교제를 위한 소원을 창조하는 것은 영적 생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인 것이다(행 2:46). 이것이 초대 교회의 일치의 제일 요건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콜라주의 혹은 정통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생명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에 대한 관심은 위험하다. … 그러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입장이었고,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었다(Iain H. Murray, David Martyn Lloyd-Jones, The Fight of Faith 1939-1981, 545).


“넷째, ‘근본적인 진리(fundamentals)를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차적인 문제(secondary matters)로 인하여 분열하지 말고 일치해야 한다.”


지방 교회측 평가: 당연한 말이다. 워치만 니가 말한 위 일곱 하나(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침례, 한 하나님)가 여기에서의 ‘근본적인 진리’에 해당된다. 또한 워치만 니를 포함한 모든 지방 교회측 성도들은 자유주의를 배척하는 ‘근본주의의 5대 강령’(성경의 무오성, 처녀 탄생, 대속의 죽음, 몸을 입은 부활, 재림(혹은 기적의 인정)을 ‘신앙’(유1:3)으로 공유한다. 이 외에 ‘부차적인 문제’로 분열하는 것은 한 몸을 건축하시는 주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마16:18, 엡1:23, 고전12:12-25). 주님의 일꾼들은 주님의 한 몸을 세우도록 부름받았다(엡4:1-6, 12-16). 따라서 그 몸을 나누는 것은 책망받을 일이다.


“다섯째,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진리를 ‘타협하는 교파들을 떠나’ 진리 위에 서 있는 복음주의자들과 ‘연합’ 해야 한다.”


지방 교회측 평가: 성경에는 복음주의 등 특정 ‘주의’(ism)를 기준으로 연합하는 실행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가 말한 “진리를 타협하는 교파들을 떠나는 것”은 맞지만, 어떤 특정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끼리 ‘연합’하는 일은 ‘당을 짓는 일’이 될 수 있다.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있는 거듭난 모든 성도들과 <그 지방에 있는 교회>(고전1:2)의 간증이 되는 것이 성경적인 길이다(계1:11).


위에서 본 것처럼, 김 목사의 인식과 의도와 달리, 로이드 존스와 워치만 니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관한 원칙의 상당 부분에서 유사한 인식을 갖고 있다. 다만 로이드 존스는 1)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니 “신조가 필요하다.”라고 했고 2) 교파를 인정 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주장이고, ‘오직 성경’을 외치고 아래와 같이 ‘교파’를 만들기를 꺼려했던 초기 종교 개혁가들의 주장에도 어긋난다.


종교개혁자들은 대부분이 카톨릭 교회 안에서 세례와 교육을 받았고 성직자로 안수까지 받았으며, 처음에는 카톨릭 교회를 떠날 생각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교회를 깨끗케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들은 분파주의를 원하지 않았다(필립 샤프(박일민 편역), 신조학, 기독교문서선교회, 56쪽).

 


3, 김홍기 목사가 비판한 워치만 니의 신조 관련 언급들과 관련하여


김홍기 목사는 워치만 니의 수십 권의 책들 중에서 ‘신조’를 언급한 단 두 세 쪽을 근거로 마치 워치만 니가 무슨 심각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온갖 막말을 하고 있다. 한 예로 그는 ‘신조’와 ‘교파’ 관련 내용의 제목을 “성령의 역사를 죄악과 동일시한 워치만 니의 신성모독적 가르침”이라고 달았다. 바로 이런 점이 김홍기 목사가 실체적 진실을 놓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어찌하든 독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어 배척하게 할 나쁜 의도로 글을 쓰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구체적으로 변증하겠지만, 워치만 니가 신조를 언급한 부분은 신조를 성경의 권위와 대조하는 문맥 속에서 이다. 그러나 김 목사는 의도적으로 성경을 언급한 부분은 빼고 소개하여 저자의 취지를 왜곡시키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엘리옷 밀러가 말한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사냥”이다. 이제 김 목사가 워치만 니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들을 먼저 소개하고 그에 대해 평가한 후, 신조와 관련된 현안들을 추가적으로 검토하겠다.


신조 관련 인용과 평가: 김 목사가 인용한 것은 굵게 표시하고 전후 문맥을 이해하도록 본문 내용을 앞 뒤로 추가한 것은 고동색으로 표시했다.


(1) “우리는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개혁이 끝까지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자연히 국교회가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모종의 신조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었으며, 또 정치적인 능력을 교회의 배후로 삼게 되었다. 만일 신조가 필요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지혜가 틀림없이 오류가 없는 신조를 하나 예비해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그러한 것을 잊지 않으셨을 것이고 교회를 위하여 이루어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신조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그러한 신조가 쓸모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만일 개신교가 사람이 세운 신조에 따라 행하지 않고 전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지침으로 삼았다면, 완전한 일과 행위가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워치만 니, 기독도보 (3), 제1집 제 5권, 1993, 86쪽)


평가: 이것은 워치만 니가 요한계시록 3장 2절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 문맥이다. 즉 워치만 니는 하나님께서 오직 성경을 외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을 존중하시지만”(84쪽), 나중에 신조가 등장한 것은 종교 개혁의 취지가 훗날 후퇴한 결과로 본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의 최대 목적은 바로 성경 외에 달리 믿을 만한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84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맥을 무시한 채, 김 목사가 “니가 말한 것처럼 과연 개신교의 신조들은 무익하고 쓸모 없는 것들인가?” 운운한 것은 억지스런 반문일 뿐이다.


(2) “사람들은 왜 신조들을 원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고 분명한 교리들의 개요를 가지기 원하기 때문이다!”(위의 책, 86쪽).


평가: 김 목사는 "워치만 니는 신조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니의 후예들은 왜 신조를 책에다 버젓이 올려 놓았는가? 지방 교회는 … 창시자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못난 제자들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김 목사가 지적한 “지방 교회 신앙 요약”(교회성장신문 편집부, 지방 교회들 보도 편람, 24-31)은 소위 지방 교회 ‘공식’ 신조가 아니다. 단지 교회성장신문사의 필요에 따른 특별한 요청에 의해, 1회성 용도로 우리가 믿는 바를 간략히 요약 소개해 준 것 뿐이다. 지방 교회측은 이것을 성문화하여 모든 구성원들을 구속하는 신조로 선포한 적이 한번도 없다. 사실 다른 언어권의 성도들 대부분은 이런 보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3) “만일 믿는 이들이 위치와 행위에 있어서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다면 성경을 분명히 아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신조이다. 왜냐하면 신조는 다만 사람이 믿는 도리를 서술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몇 개 혹은 몇십 개의 신앙의 항목들로 결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성경은 영적 생활을 하는 이들 안에서 실제적인 생활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위의 책, 87쪽).


평가: 김 목사는 ‘도리’라는 표현을 문제삼았지만, 위에서 ‘믿는 도리’로 번역된 영어 원문은 the doctrines believed이다. 따라서 ‘믿는 교리들’이 더 정확한 번역일 수 있다. 그렇다면, 워치만 니가 ‘신조’를 ‘믿는 교리들을 언어화 한 것’이라고 정의한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김 목사가 보기에 ‘신조’는 무엇인가?


(4) 성경은 무한하고 신조는 획일적이며, … 교회든 세상이든 일단 신조를 읽으면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사람의 말보다 더 분명하며 이해하기 쉽고, 또 성경의 내용은 가장 포괄적이어서(most comprehensive) 모든 시대의 필요를 채운다. 개신교의 모든 신조들과 규약들과 헌법들과 조직의 헌장들은, 문서로 되었든 혹은 말로 된 것이든, 사람들을 성경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경향이 있다. … 그 중에 성경에 부합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사람의 말로 진리의 기준을 삼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위의 책, 87쪽).


평가: 위 본문에서 워치만 니의 의도는, 성경은 ‘포괄적’인데, 신조는 그중 일부만을 가져와 정형화한 후 사람들에게 ‘부분적인 것’(신조가 함의하는)을 취하게 함으로써 ‘성경이 전달하는 포괄성’에서 이탈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이러한 워치만 니의 의도를 간과한 채, ‘성경을 압축한 신조가 어떻게 사람들을 성경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꼬투리 잡기식 비판에 불과하다.


(5) “우리는 응당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일체의 사물을 판단해야 하며, 교회라 할지라도 응당 말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 개신교의 신조들은 복음의 근본적인 교리들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만 이것도 사람의 가르침이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신조들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 물론 처음에는 이 신조들이 처음 창시한 사람들의 믿는 바였다. 후에 의견의 연고로 부득이 또 다른 신조를 만들어야 했다. … 성경 외에 다른 신조를 만드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성경적이라 해도 담을 쌓는 것이고 다른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합할 수 없으면 다른 데로 가라고 하는 태도는 바로 다른 종파를 세우게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중생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 외에 어떤 신조들을 더한다면, 바로 하나의 종파가 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불러내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위의 책, 141-142쪽)


평가: 워치만 니는 위에서 요한계시록 3장 8절의 “나의 말을 지켰고”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맥이다. 또한 자기가 믿는 바를 ‘신조’로 절대화시키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때 정죄하게 되면, 부득이 또 다른 종파를 만들게 되는 ‘신조의 부작용’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며, 또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엉뚱하게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을 거론하고 “성경적인 신조들의 성경적이며 효용적인 가치를 의도적으로 부정”한다는 식으로 반응한 것은 문맥을 무시한 나쁜 이단 사냥에 해당된다.


(6) “그가 만일 (신조)를 믿지 않으면, 그는 응당 그 신조의 조직을 떠나야 한다. … 그러므로 여하튼 ‘몸의 분쟁’은 죄악이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죄악과는 분별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깨어 있기만 한다면, 그가 전에 있었던 교파와 합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스스로 심판하고 열심을 내는 것은 초기의 형세이며, 마지막에 가서는 교파(혹은 다른 조직)의 죄악을 보게 되고, 마음 속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자연히 이 죄악을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 이후의 실패는 대부분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정하신 특별한 길을 분명히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위의 책, 93쪽)


평가: 워치만 니는 위 인용문 앞에서 “지식과 견해가 달라도 성령의 합일이 지켜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예를 들어 유아 세례를 신조에 담을 경우 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그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생겨난 몸 안의 분쟁은 몸을 분열시킨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엉뚱하게 “(시카고 선언같은) 귀한 사역을 종파주의로 정죄하는 니의 이러한 극단적인 편견을 보라”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위 인용된 내용들은 워치만 니가 성경과 신조를 비교하는 문맥 안에 있는 것들이다. 즉 1) 만일 종교 개혁가들처럼 후대들도 ‘오직 성경’ 원칙에 신실했다면, 신조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2) 그러나 그 당시의 정치적, 역사적 배경상 부득이 절반에 그쳤던 종교 개혁이 국교회들을 중심으로 여러 신조들을 낳게 했고, 3) 그것은 교회 분열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라는 취지의 워치만 니의 지적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이런 문맥을 무시하고, 꼬투리잡기 식의 비판으로 일관한 것은 매우 유감이다.


신조의 위치: 김홍기 목사는 침례교 목사답지 않게 ‘신조’를 구실로 워치만 니를 공격하고 있지만, 아래와 같이 신조는 사람이 만든 상대적인 것이고, 항상 성경에 종속된 위치에 있다는 것이 공정한 평가이다.


침례교인들은 신조주의를 배척하는 사람들이다. … 성경만을 최종적인 유일 권위로 믿고 있는 침례교인들은 신조를 거부해왔을 뿐 아니라 … 신앙 고백이 신조처럼 사용되어질까봐 매우 조심을 해왔다(김승진, 침례교회와 역사, 침례교신학교 출판부, 2009, 210-211쪽).


프로테스탄트 체계 안에서 신조가 갖는 지위는 다른 모든 인간의 산물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고 한정적이다. 신조는 성경과 동등한 것이 못되고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무오한 규범인 성경에 항상 종속된다. … 성경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답변이다(필립 샤프(박일민 편역), 신조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10-11쪽).


웨스트민스터 신조: 통합 교단 신학교 총장인 김명용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일부 장로 교회의 신조로서 전 세계 교회라는 큰 시각에서 볼 때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는 그 권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라고 했다(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10월호, 134-135쪽). 그는 이어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웨신 제2장 1절)이라고 한 서방 신조는 잘못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정통 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따라 “하나님은 세 분이심을 선언”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136, 140쪽).


한편 고신교단 손성은 목사는 ‘고신’과 ‘합신’의 교단 통합과 관련하여 양측이 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조 제 35장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충분히 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정된 웨신 제35장을 수용한다는 것은 원래의 정신이 퇴색되고 알미니안주의화 되고 있으며, 이는 또한 오순절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했다(http://rpress.or.kr/xe/57350).


위 두 사례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혹은 그에 기초한 ‘한국 장로교단 헌법들’(통합, 합동 등)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 좋은 예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정통과 이단을 판별하는 절대 기준으로 보려는 시도는 신중한 재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즉 신조는 상대 기준임으로, 성경과 동등시 되어서는 곤란하다.


신도게요서 제31장 제3항: 장로교 합동교단 헌법 부록에 수록된 신도게요서 제 31장 제 3항도 “사도시대 이후 모든 지방의회들과 총의회들이 세계적이든지 지방적이든지를 물론하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었고, 또 많은 회의들이 오류를 범했다. 그러므로 이들 회의들은 신앙과 본분의 규칙으로 삼을 수 없고 이 둘에 도움으로 사용될 뿐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신조’ 혹은 ‘총회 결의’로 이단을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https://www.localchurch.kr/20188).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김홍기 목사가 신조에 대해 워치만 니가 자신(혹은 로이드 존스)과 견해를 달리한다고 해서 온갖 막말을 퍼붓는 것은 균형을 상실한 변증이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던 종교 개혁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재각성이 필요할 때이다!

 


4. 성경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의 실지적인 적용


김홍기 목사는 신조의 유용성을 말하려고 ‘성경 무오성에 관한 시카고 선언’을 언급했다. 그러나 워치만 니를 포함한 전세계 지방 교회측 성도들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하심”(God-breathed)(딤후3:16)이므로 시카고 선언과 관계없이 ‘성경의 무오성’을 굳게 믿는다. 관련하여 지방 교회측은 ‘정통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김홍기 목사에게 김효성 박사가 지적한 아래 교단들도 정통 교회인지를 거듭 질문했지만, 김 목사는 묵묵부답이다. 로이드 존스도 “종이 위에 쓰여진 진술들로는 결코 신앙을 보호할 수 없다.”라고 했음으로, 김홍기 목사는 워치만 니를 판단했듯이 아래 단체들에 대해서도 자기 입장을 밝혔어야 했다.


“거기(한기총)에는 예장 통합측 같은 자유주의적 교단이나 기성과 기침같은 포용주의적인 교단들이 가입되어 있고, 그뿐 아니라 기장이나 기감같은 자유주의 교단들까지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 교회들은 NCC뿐 아니라, 이러한 타협주의적인 단체도 배격해야 한다. 보수 교회들은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보수 교회들과만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김효성, 현대교회제문제,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66쪽).

 


5. 김홍기 목사가 교파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에게 과연 사도 바울 그리고 워치만 니가 본 ‘유기체로서의 주님의 몸’(행9:4-5,엡1:23, 고전12: 12-27)인 교회에 대한 빛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ME)라고 동일시하신 그 비밀한 교회(엡3:3-6)를 참으로 보았다면, 부득이 한 사정으로 ‘교파’에 머물 수는 있어도 김 목사처럼 ‘교파’를 극렬히 옹호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가 이 점에서 참으로 주님의 긍휼을 입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참고로 워치만 니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한국복음서원, 2003)에서, “보혈로 구속되어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리의 형제”(190쪽)이고, “다른 것은 곧 그들이 거주하는 지방이  다를 뿐”(202쪽)이라며, 그와 다른  종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파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것이 종파이다. … 종파가 없을 때 구별의 행위가 없게 되고 완전히 포함시키는 심장이 있게 된다(208쪽).


장로교 통합교단 이형기 박사는 일치의 방해 요인인 ‘교파주의’의 폐해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교회 일치의 방해요인은 교파주의였다. 대량 학살, 화형, 죽기 살기의 신학논쟁 등은 교파주의적 절대주의를 증거한다. 1618년에 이르면 교파주의는 전쟁을 유발한다. 각 교파는 타 교파들과 공통 분모보다는 자신들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신앙고백서들을 작성하고 스콜라주의 신학을 발전시킨다. 따라서 각 교파들이 자신들이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의 한 부분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이형기, 세계교회의 분열과 일치추구 역사, 1994,166쪽).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레는 결코 자신들을 창시자로 하는 교파를 만들 의도가 없었다.


칼빈은 독립 교회를 형성할 계획은 추호도 없었다(오토 베버, 칼빈의 교회관, 33쪽). 요한 웨슬레 역시 한번도 자기가 영국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새 교회를 조직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이종성, 교회론, 221쪽). 16세기 종교개혁이 결코 기성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했거나, 하나의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려 했던 것이 아님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교회는 갈래갈래 찢겨지고 말았다. … 칼빈 사후, 베자와 제네바 동료들은 계속해서 루터교 사람들과의 일치를 추구했다(이형기, 세계 교회의 분열과 일치추구 역사, 1994, 121쪽).

 


6. “변질된 교파”를 나와서 또 다른 교파를 만드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김홍기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과 타협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부터 탈퇴하라”라는 로이드 존스의 주장은 “여러 긍정적인 실례들을 통해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곳에서는 윌리 크리스웰이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있던 남침례교단(SBC)을 떠나지 않고 안에 남아서 해당 교단을 “건강한 보수주의로 회귀시켰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 둘은 전혀 상반되고 모순된 주장이 아닌가?


거듭 지적하지만, 성경에는 교파를 나와 또 다른 교파를 만든 사례가 없다. 이것은 결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며, 미국 교회들의 역사로도 증명된다. 데이빗 F. 웰스(박용규 박사 번역)가 편집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과 화란 개혁주의>(엠마오, 1992)는 1) ‘미국 북장로교단’(PCUSA), 2) ‘정통 장로교단’(PCA), 3) ‘성경 장로교단’(BPS)의 생성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메이첸은 북장로교단(PCUSA)이 사도적 신앙에서 떠난 배도적인 교회라고 확신(38쪽)하여 새로운 교단인 ‘정통 장로교단’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칼 매킨타이어는 그 새로운 교단이 ‘전 천년설’, ‘완전 금주’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추가할 것을 거절하자 또 다른 교단인 ‘성경 장로교단’을 세웠다(61쪽). 따라서 김홍기 목사(혹은 로이드 존스)의 지론대로라면, 성경 장로교단이 가장 성경적이고, 앞의 두 교단은 정당성이 없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그후 위 ‘성경 장로교단’도 하락했다고 해서 1956년에 다시 ‘개혁 장로교단’(복음주의 총회)이 세워짐).


이것은 미국 침례교 사정도 비슷하다. 김 목사는 ‘미국의 남침례교연맹’(SBC)이 자유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분리된 곳 중에 ‘국제성서침례친교회’(BBF)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위에서처럼 윌리 크리스웰의 역할로 해당 교단이 ”건강한 보수주의로 극적으로 회귀”되었다면, 자유주의를 이유로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SBC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만일 그들이 ‘몸의 하나’(엡4:4)를 힘써 지킬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과 타협을 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부터 탈퇴하라”라는 로이드 존스(김홍기 목사)의 주장은 위에서 보듯이 분열의 구실만 제공할 뿐, 성경적인 대안이 아니다.

 


7. “제리 팔웰과 그의 교회?”


김홍기 목사는 ‘교파주의’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BBF(국제성서침례친교회) 소속 ‘제리 팔웰’ 목사의 예를 들었다. 즉 그가 분열해 나가서, 1)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정치 참여를 이끌어 내었고” 2) “세계의 개신교 대학 중 가장 큰 대학인 리버티 대학을 설립했고”, 3) 그가 설립한 교회가 “7천 석을 갖춘 예배당에서 매주 두 차례 예배를 드리고”, 4) “미국의 교회들의 종교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위와 같은 제리 팔웰의 ‘업적’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교파를 만든 명분으로 주님께 받아들여질 것으로 참으로 믿고 있는가(고후5:10, 고전3:12-15)? 만일 그렇다면 김 목사는 주님의 몸인 교회에 대해 참으로 무지한 것이다. 주님의 몸은 십자가를 통과하고도 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인격’의 충만(엡1:23)이며, 옛 창조에 속한 어떤 것도 그 안에는 입지가 전혀  없다(갈6:15).

 

 

결론적으로, 김홍기 목사의 교회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으로는 부족하니 ‘신조’를 더해야 한다는 타협적인 교회론이며, 주님의 몸의 하나보다 ‘교파주의’를 더 중시하는 비성경적이고 분열적인 교회론이다. 따라서 김 목사가 이러한 빗나간 기준으로 워치만 니의 교리는 ‘편파적이다’, ‘비성경적이고 위험하다’, ‘진리를 경시하고 진리를 위한 성별을 분열의 죄악과 동일시하여 신성 모독적이다’, ‘정통 교회를 타협과 위험에 빠뜨린다’라는 식으로 정죄한 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임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가 이번 토론을 통하여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 안에 있는 ‘성령의 하나’(엡4:3)를 귀히 여기고, 금촛대의 간증이 지방을 범위로 각지에 나타나는 성경적인 교회론(계1:11, 20)에 눈을 뜨게 되는 그분의 긍휼하심을 입게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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