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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을 오해한 가이슬러의 치명적인 문제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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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을 오해한 가이슬러의 치명적인 문제점(1)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과의 일곱 번째 토론글을 노먼 가이슬러 등의 학력과 경력을 거창하게 소개한 후, 그들이 작성한 영어 원문을 번역 소개하는 식으로 작성했다. 그러나 그의 “가이슬러가 지방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1)”라는 제목의 글에는 새로운 논점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김 목사가 그동안의 토론을 바로 이 ‘가이슬러 자료’를 가져와 거기에 자기 의견을 보태는 식으로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지방 교회측이 그동안 김 목사의 문제점으로 지적해 온 내용들은 노먼 가이슬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이들은 웨인 그루뎀(Wayne A. Grudem)이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을 가진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의 범주에 속한다. 또한 이들은 그 분야의 동료였던 CRI측이 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요8:16), ‘한 신격’(神格)(골2:9), ‘성경적인 상호내재 개념’(요14:9-10)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부족하다. 그 결과 이들은 어거스틴 등의 정통 신학자들이 고백한 것처럼,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 모두의 오심이다.’ ‘삼일 하나님이 (주기도문 상의) 우리의 아버지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는 치명적인 ‘구조적’ 약점이 있다. 그렇다면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는 지금처럼 심히 왜곡된 자료로 지방 교회들을 정죄하기 전에, 자신들의 심각한 이단성부터 먼저 해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우리는 이 글과 이어지는 글에서 기왕의 토론 자료들을 토대로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가 주장하는 내용들에 담긴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여 바로 잡고자 한다.

 


1. 가이슬러와 사도 바울 중 누가 정통인가? - 판단기준


김 목사가 아무리 치켜세워도 가이슬러는 주님께서 사도로 세우신 바울과는 비교 대상이 못 된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 진리 항목에 대해 둘의 견해가 다를 때는 사도 바울이 ‘정통’이고 가이슬러가 ‘사이비’ 혹은 ‘비정통’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먼저 가이슬러와 김 목사는 사실상 ‘분리된 세 위격들’을 고집하는 자신들의 잠재적 삼신론을 기준으로, ‘주는 영이시다’(고후3:17)라고 바울처럼 말한 지방 교회측을 양태론이라고 정죄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교파주의를 기준으로, 위트니스 리가 바울처럼 ‘몸의 하나’(엡4:4)를 강조하고, 주님 자신의 충만인 유기체로서의 몸(엡1:22-23)을 분열시키며(고전1:10-11, 딛3:10-11), 누룩으로 부풀리는 것(마16:12, 고전5:7-8)을 단호히 배격한 표현들에 대해 거듭 불만을 표출해 왔다.


그러나 가이슬러 혹은 김 목사와 달리, 사도 바울을 객관적으로 연구한 이들은 위와 같은 바울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한 예로 루이스 스미디즈(Lewis B. Smedes)는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여수룬, 1991)(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오광만 교수가 번역) 제 2장에서 현재 쟁점이 되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깊이 다뤘다(64-88쪽).


여기서 저자는 주는 영이시니”(고후3:17)라는 바울이 한 말에 대해 바울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이라고 표현되고 있다.라고 했다(65쪽). 그는 또한 위 본문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후 “성령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했다(70쪽). 저자는 이어서 위 책 74-75쪽에서 사도 바울이 주님과 성령에 관해 언급한 여러 성경 본문들을 길게 소개하면서 “이러한 두 위격들의 동일시”“우리의 체험”(76쪽)과 “구원 사역”(82쪽)의 방면에서 그러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제2장을 “결론: 성령은 우리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는 소제목과 관련 내용으로 마무리한다(81-88쪽).


이처럼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의 위격 간의 구별을 유지하되, 구원 혹은 체험 방면을 다루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것은, 바울과 위트니스 리 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건전한 정통 신학자들이 가지는 균형잡힌 관점이다. 우리는 박형용 박사(전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와 개핀(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교수)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점을 여러 차례 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러와 김 목사는 “위격 간의 구별은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 모두에서 늘 유지된다.”라는 자신들의 억지 주장(이런 주장은 고후3:17, 사9:6, 계5:6 본문과 상반된다)을 근거로, 위트니스 리 그리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을 양태론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무지를 스스로 드러낸 것이며, 실상은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이 정통이고, 그것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가 비정통이다. 아울러 바울과 같은 말을 하는 지방 교회측이 정통이다.


저자는 위 책 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뤘다. 즉 저자는 바울은 그 기능에 있어서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듯이, 몸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라고 했다(250쪽). 사실 바울의 이런 말은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다가 “네가 왜 를 박해하느냐”(행9:4-5)라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음으로 얻은 계시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김 목사는 ‘주님의 몸은 그리스도 자신’(고전12:12)이라는 관점도 강하게 거부한 바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가이슬러와 김 목사의 삼위일체론과 교회론은 사도 바울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과 교회론 모두에 있어서 이들의 판단 기준은 치명적인 하자가 있음으로 비정통이고 비성경적이다.

 


2. 가이슬러와 CRI 중 누가 지방 교회측을 더 많이 연구했는가? – 판단대상


김홍기 목사는 가이슬러를 “지방교회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해 온 용기있는 학자요 변증가”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이슬러는 그의 명성과는 달리 지방 교회들을 제대로 연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오픈 레터’ 입안자들이 왜곡시킨 위트니스 리의 1차 자료만을 놓고, 자신의 잠재적 삼신론의 잣대로 판단한 CRI 저널에 대한 ‘답변서’(Response)(지금 김 목사가 소개하고 있는)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가이슬러의 글은 자기 쪽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위트니스 리의 말만을 판단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하자가 있다. 이 점의 심각성은 재판 과정을 대비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즉 아무리 학력과 경력이 화려하고 다른 사건들에서는 명 판결을 해 온 판사라고 하더라도 특정 사건에서 실체적 진실 파악에 실패하여 심각하게 왜곡된 사실을 근거로 판결했다면, 그 판결은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것이다. 그런 판결(결론)은 결정적인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뒤집어질 수 있다. 그런데 가이슬러가 지방 교회측에 대해 경솔하게 단정한 소위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이라는 결론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사실 ‘경륜적 양태론’이라는 표현 자체가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말해주고 있다!).


가이슬러는 위 답변서(Response)를 쓸 때 지방 교회측의 조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의 결론> 시리즈 책자들을 포함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백 권의 저서들을 직접 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그는 ECNR측이 양태론으로 보이도록 의도적으로 ‘가공한 사실들’만으로 판단했다. 또한 가이슬러는 그의 답변서의 문제점들을 심도있게 반박한 지방 교회측 변증서인 <Brothers, Hear Our Defense>(1-4) 책자를 우편으로 받아 보고도 4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가 여전히 ‘학자요 변증가’ 이기를 자처한다면 그는 무책임하고 ‘게으른 학자’이거나 ‘만용을 부리는 변증가’일 뿐이다.


이와 달리 CRI측은 6년간 지방 교회측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고, 초기 연구시 번역이 안 되어 접할 수 없었던 위트니스 리의 영문 자료들을 추가로 확보하여 읽었으며, 실제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지방 교회측 성도들을 직접 면담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지방 교회측 성도들(주로 중국 본토)의 삶 속에서 나타난 참된 믿는 이들의 빛나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 결과 1) 본질적, 경륜적 삼위일체, 2) 한 신격, 3) 성경적인 상호내재에 대한 지방 교회측의 가르침 등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CRI측은 자신들의 과거의 ‘판결’을 스스로 뒤집고 “우리가 틀렸었다”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바로 이런 것이 “용기있는 변증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와 대조적으로 가이슬러는 ‘사실 파악’에 실패한 사람이다. 따라서 가이슬러는 최소한 그 점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는 참된 용기를 CRI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3. 가이슬러의 답변서(Response)에 나타난 왜곡 및 지적 사항들에 대한 반론


지방 교회측은 이미 지난 여섯 차례의 반론에서 김 목사가 소개한 가이슬러의 글에 대해 반박해 왔다. 그러나 김 목사가 같은 내용을 지금처럼 재차 소개했기 때문에 우리도 요약하여 재차 반론하고자 한다.


1) 지방 교회에 대한 CRI 저널의 방어의 배경


우리가 지난 회의 반론글에서 ECNR측이 지방 교회들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자체적으로는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묘한 편집 방식으로 지방 교회들을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이단처럼 만들어 매장시키려고 했다. CRI측은 그들의 이러한 변칙적인 변증 방식과 태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지방 교회측을 위해 법정에서 증언한 것이다. 가이슬러는 자신의 글에서 이 점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에릭 페먼트의 근거없는 거짓말을 빌려 지방 교회측을 소송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낙인 찍으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차례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반 세기 동안 단 세 번의 소송만 있었음을 밝혔다. 한편 엘리옷 밀러는 백과사전을 펴낸 ‘하비스트 하우스’ 출판사를 포함한 주류 복음주의 출판사들이 “자신들의 악성부채를 해결하려고” 서점 등 자신들의 채무자들에게 제기한 소송들은 훨씬 더 많았고, 이런 것이야말로 “고린도전서 6장이 금지하는 범주의 행위들”임을 지적하고 있다(우리가 틀렸었다, 46쪽).


2) CRI의 지방 교회에 대한 방어에 대한 평가


가이슬러는 이 단락에서 “지방 교회측을 반대하는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 “부정확한 것”이고, 그것은 “적대감”에서 비롯된 반대”라고 CRI가 말한 것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는 CRI측의 말이 근거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소위 “압도적 다수의 의견”은 CRI가 과거에 지방 교회들을 비판했던 자료 혹은 ‘백과사전 팀’이 의도적으로 가공한 위트니스 리의 ‘1차 자료’를 기초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경우 모두 ‘정확성’에 심각한 하자가 있다는 CRI의 지적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CRI나 풀러 신학교 외에 가이슬러를 포함해서 지방 교회측을 제대로 연구한 후 비판한 개인이나 단체는 한 곳도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방대한 작업이고 또 실체적 진실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절실한 필요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CRI와 풀러 신학교는 공정했고 또 용기 있었다.


또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반대’의 좋은 예는 현재 이런 왜곡된 글들을 올리고 있는 김홍기 목사 자신이다. 사실 예전에도 위트니스 리가 성경 본문 강해 과정에서 주로 로마 천주교를 겨냥해 언급한 ‘바벨론’, ‘배도한 이들’ 혹은 ‘음녀’라고 한 말을 일부 변증가들이 자신들에게 적용한 후, 우리가 바벨론, 음녀라면 너희는 양태론 이단이라는 식으로 반응했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동료 믿는 이들을 무조건 정죄하고 배척하지 않으며, 단지 성경 본문을 문맥을 따라 해석한 것뿐이다. 사실 과거에 종교 개혁가들이 로마 천주교나 교황을 향해 했던 말들은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할만한 것들이었다.


3) CRI가 지방 교회에 관해 인정한 것


가이슬러는 CRI가 예전에 “본질적인 교리들에 관한 그들(지방 교회측)의 어떤 가르침들은 기껏해야 모순된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 이단적이라고 확신했다”라는 말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과거에 그러했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그것이 틀린 확신이었다”라는 말을 CRI가 하고 있는 것이다.


4) 논쟁적이고 모순되는 진술들


가이슬러는 진술 #1에서 진술 #5까지를 열거하며 “이 진술은 … 하나님의 제 2 위격이 강생하셨다는 교리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가이슬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래에서 보듯이 위트니스 리 역시 성육신의 주체가 제 2격 아들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하여(히10:5) 성육신하시도록 보내셨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193 쪽)


그러나 가이슬러의 거짓 주장과 달리, ‘하나님 전체가 사람의 육체 안에서 오신 것’은 성경 본문과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말하는 바이다. 먼저 골로새서 2장 9절은 “신격(데오테스)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격은 웨스트 민스터 신조 2장 3절에서처럼, 삼위 모두를 포한한 개념이다.


또한 A. H. 스트롱 등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점은 가이슬러가 세 위격들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자신의 잠재적 삼신론 사상만 버린다면 모순도 아니고 논쟁거리도 아니다.


5) 교리적으로 부주의한 진술들


가이슬러는 “지방 교회의 수많은 진술들이 부주의하고 양태론적인 이해에 적합하며”, CRI나 그레첸 파산티노도 “지방 교회측이 논쟁적인 가르침들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거나 “어떤 가르침들은 외부인들에게 혼동을 준다는 점을 인정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자들이 위트니스 리가 집회에서 청중들을 상대로 말한 것을 편집한 것으로써 정교한 신학 논문처럼 일목요연하지 못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 바 있다. 그러나 CRI처럼 지방 교회측이 참되게 믿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양태론’ 등의 오해는 해소될 것이다. 엘리옷 밀러는 이와 관련하여 정통 교부들 역시 유사한 상황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그러한 언급들은 그가 이단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물’로 출판된 책자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엘리옷 밀러, 우리가 틀렸었다, 18쪽).


우리는 위트니스 리 동역자들이 외부인들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신학 논문 형식으로 발간한 신학 잡지도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http://www.affcrit.com). 문제는 읽는 사람들의 동기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6) 명백하게 비정통적인 진술들


가이슬러는 제목은 위와 같이 달았지만 어떤 부분이 “명백하게 비정통적인 진술들”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단지 CRI가 재연구하기 이전에 지방 교회들의 자료에서 다소 부정적인 ‘인상들’을 느꼈었다는 것만을 언급했다. 그러나 CRI는 지금 ‘과거에 지방 교회들에게서 느꼈던 그런 부정적인 인상들은 틀린 것이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이슬러가 ‘과거의 틀린 인상’을 근거로 지방 교회측에게 그것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CRI를 나무라는 것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7) 다른 종교 단체들에 관한 명백하게 유감스럽고 가혹한 진술들


가이슬러는 지방 교회측이 1) 다른 종교 단체들을 ‘바벨론’, ‘영적 음행’ 등으로 지칭하고 2) 또한 자신들이 ‘우주적인 교회의 유일하게 합당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CRI가 여전히 지방 교회들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서 항의성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엘리옷 밀러의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글 안에 이미 그 답변이 나와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제 제기에 대해 밀러는 위트니스 리 가 거절한 것은 교파주의 자체일뿐 기독교계 내의 성도들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와 그들을 향한 겸손과 그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일관되게 장려되고 있다.”라고 증언한다. 또한 다른 개신교 단체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위트니스 리만이 아님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트니스 리는 또한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교파를 차별화하여 가장 혹독한 비평은 로마 천주교에 대해 제기한다. 그는 또한 다른 개신교 단체의 적법성에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개신교 단체의 인도자는 아니다. 사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종교 개혁 초기부터 있어왔던 개신교의 부정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루터교와 다른 개혁 교회 지도자들이 알미니안주의 신봉자들과 재침례파들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비난한 데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형성된 교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나 많은 장로교인들과 루터교인들과 침례교인들과 개혁교회 교인들이, 창립자들의 분열적 진술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아왔던가?(위의책, 34-35쪽).


밀러는 또한 “위트니스 리는 종종 다른 그리스도인들 인도자들이나 단체들의 가르침과 복음주의와 선한 행실에 대해 칭찬하는 말을 했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례는 많다. 마르틴 루터, 요한 웨스리와 챨스 웨슬리, 죠오지 휘트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플리머스 형제회, 찰스 스펄전, G. 캠벨 모건, A. J. 고오든, 앤드류 머레이, D. L. 무디에 대한 좋은 평가, 특별히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 내지 선교회, 빌리 그레함이 포함된다.(위트니스 리의 장로 훈련 제4권 [2007년 개정판] 33쪽, 위트니스 리의 장로 훈련 제5권 [2007년 개정판] 27쪽, 위트니스 리의 장로 훈련 제7권 [2007년 개정판] 41-42쪽을 보라.(위의 책, 37쪽(각주2))


그는 ‘지방 교회의 놀라운 포용성’이라는 소제목에서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인용 소개하기도 한다.


우리는 배경이나 기타 여러 가지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그들은 일부 성도가 먼저 휴거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 반면 우리는 그 교리를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휴거에 관해 어떤 교리를 믿든지 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육체를 입은 사람이 되시고 우리 죄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을 믿는 한, 우리는 모두 구속받고, 의롭게 되었으며, 거듭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안에 신성한 생명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한 몸에 속한다. 우리가 서로 교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특정한 견해를 표명할 수 있지만 너무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논쟁에까지 이르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통의 근거를 오직 주님 자신에게만 두어야 한다(위의 책, 35쪽).


밀러는 위 두 번째 쟁점에 대해서도 지방 교회측이 풀러 신학교에 보낸 진술문에서 밝힌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지방 교회가 교회의 합당한 표현이라는 이러한 관점은, 결코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의 내재적인 방면을 문제 삼거나 축소시키지는 않는다. 물론 ‘한 도시 한 교회’의 원칙에 따른 모임이 교회의 합당한 표현이지만, 이러한 원칙은 참된 믿는 이라면 누구나 갖는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에 포함되는 자격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원칙은 그리스도인의 구원 여부를 좌우하거나,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를 결정하지도 않는다. … 다만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죄들에서 구원하시고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소재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에 충분하며, 해당 지방 교회의 교통에 온전히 참여할 자격을 얻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이상과 실행은 전혀 배타적이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실제적으로 받는 데 있어서 우리는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한다(위의 책, 35-36쪽).


따라서 위 내용을 종합적으로 볼 때 다른 믿는 이들을 향해 “유감스럽고 가혹한 진술들”을 했다는 지적도 교회의 빗나간 상태를 묘사한 성경 본문의 표현들(마13장, 계17장 등) 자체인 경우가 많고, 소위 지방 교회측이 다른 믿는 이들을 배타적으로 정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8) 명백하게 혹은 실제적으로 모순되는 진술들


가이슬러는 자신이 보기에 “모순되는 듯한” 진술이라며 몇 가지를 제시했지만, 가이슬러의 시각 자체에 문제가 있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다음에서 보듯이 결코 모순되지 않다.


(1) 성부와 성자 등 위격 간에 “구별이 있다”라고 하고, 또 어디서는 “동일하다”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수차례 해명했듯이 전자는 본질적인 삼위일체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말하는 본문들(사9:6, 고후3:17, 계5:6)에서 그러한 것이다. 특히 후자는 구원의 여정에서 ‘기능상’ 혹은 우리의 ‘체험’ 안에서의 동일시를 가리키며, 이것은 존재론적인 방면에서의 삼위의 구별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2) 신조들의 진술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미 칼케돈 신조 내의 ‘하나님의 어머니’ 부분을 제외한 모든 고대 신조 내용들을 성경적이라고 믿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설명했다. 단지 짧은 신조 내용이 삼위일체의 모든 방면을 다 포괄하지 못함으로 어떤 신조는 ‘삼신론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내용으로 보완하여 신앙으로 삼는다는 차원의 말이었지 그러므로 그 신조를 배척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사도 신조’가 삼위의 셋만 강조하고 하나를 말하지 않아서 삼신론 구조라는 이종성 박사의 말을 소개하며 그렇다면 이종성 박사도 이단인지를 물었지만 김홍기 목사는 묵묵부답이다.


(3) ‘인격’(페르소나)이라는 말을 꼭 써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 우리는 삼위가 구별되심을 확실히 믿는다. 그러나 ‘세 하나님들’을 가리킬 여지가 있는 ‘페르소나’를 안 쓰면 양태론 이단이라는 식의 가이슬러의 주장에는 반대한다. 왜 그러한지는 이미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며 반론한 바 있다. 특히 밀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본질 안에 계신 세 위격’이라는 간결한 정의에만 너무 많이 의존해 왔다며, “인간이 경험하는 영역에 다른 사람과 분리된 개체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고 반문한다(21쪽). 즉 ‘인격’이라는 용어는 ‘세 분리된 위격들’이라는 삼신론 사상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증거로 다음과 같이 달라스 신학교 창립에 기여했던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의 말을 인용 소개하고 있다.


“위격(Person)이라는 말도 가끔씩 반대를 당한다. 모든 인간의 언어가 그러하듯이, 그것이 부적절하고 심지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오류라고 비난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확실히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이를 것이다.”(밀러, 위의 책, 21쪽).


(4) “삼위가 서로의 활동에 참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부고난설이다: 이런 지적 자체가 바로 가이슬러가 성경과 정통 신학계의 동향에 무지한 잠재적 삼신론자임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가 서로의 활동에 참여”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고 대부분의 권위있는 정통 신학자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responses/Geisler-Rhodes/scholars-on-coworking-of-the-Three.html 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옷 밀러는 “성부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다는 암묵적인 믿음 때문에 성부 고난설 주장자들이라고 불리던” 양태론자들을 위트니스 리가 반대한다는 증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께서 육체가 되셔서 이 땅에 사셨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엘리옷 밀러, 위의 책, 17쪽).


(5) “삼위일체의 각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들 안에 있다는 것과 각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이라는 주장은 차이가 있다: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지방 교회 측도 둘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본질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방면에서의 ‘기능상’의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엘리옷 밀러도 “그러므로 지방 교회가 아들을 아버지와 그 영과 동일시하는 것의 대부분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운행을 말하는 문맥에서이고, 성경에 언급된 유사한 동일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확증해 주고 있다.


(6) 지방 교회는 삼위일체 안에 오직 “한 인격”이 계시다고 주장한다: 이 점도 이미 여러번 해명했다. 즉 여기서의 ‘한 인격’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단수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며, 이것은 세 위격들 모두를 포함한 ‘한 신격’(데오테스, 스트롱 번호 2320)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 위격들”을 부인하는 의미에서의 “한 인격”을 말한 것이 결코 아니다. 가이슬러나 김 목사는 골로새서 2장 9절과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이 말하는 ‘한 신격’(Godhead) 개념에 무지함으로 자꾸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이상에서 보듯이 가이슬러가 “모순된 진술들”이라고 열거한 항목들은 전혀 모순이 아니고 문제가 없다.


9) 지방 교회를 위한 CRI 주장들에 대한 응답


가이슬러는 CRI가 주장한 두 가지 논증들 즉 1) 문맥들을 이해한다면 지방 교회측을 비정통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2) 정통 상호내주론과 본질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바로 알면 지방 교회측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에 대하여 검토하겠다고 했다.


10) 잠재적 박해의 두려움


가이슬러는 ‘지방 교회측을 부당하게 이단시하면 그것이 박해받는 지역(예를 들어 중국 본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엘리옷 밀러의 말에 대해, ‘진리의 적법성은 박해를 가져오고 안 오고에 결정되지 않는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밀러는 백과사전(ECNR)측이 지방 교회측을 향해 교묘히 시도하고 있는 이단 정죄가 부당하다는 전제에서 위 말을 한 것인데, 가이슬러는 그 진의를 놓치고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


11) 풀러 신학대학원의 인정


가이슬러는 풀러 신학교가 지방 교회측의 교리들을 철저하게 조사 한 후에, “지방 교회의 가르침과 그 회원들의 행실은 모든 본질적인 면에서 참된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나타낸다.”라고 선언한 것을 애써 폄하했다. 그는 그 이유로 풀러 신학교 측이 ‘성경의 무오성’ 교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이슬러는 ‘미국의 복음주의 철학협회’(EPS)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협회’(ETS)도 동일한 이유로 등을 돌리며 절교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김홍기 목사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이슬러가 절교를 선언한 위 EPS와 ETS와 관련한 가이슬러의 경력을 자랑삼아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가 정직하다면 첫째, 가이슬러가 성경 이슈로 미국 복음주의를 사실상 대표하는 단체들인 위 EPS와 ETS를 비판하며 절교했다면 가이슬러가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한다는 식의 소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의 무오성을 이유로 풀러 신학교를 폄하하려면 한국교계 각 교단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홍기 목사는 현재 이 두 가지 모두에 있어서 정직하지 않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12) 더 많은 연구를 했다는 주장


가이슬러는 CRI가 그 주제에 관하여 더 많은 조사를 통해 지방 교회를 지지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는 말에 대하여 진리는 ‘더 많은 연구’보다 ‘더 잘 추론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식의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즉 CRI는 진리의 판단 기준 문제가 아니라 양태론인지 아닌지 등을 판단할 수 있는 지방 교회측의 1차 자료 즉 판단 대상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추가적인 ‘사실들’을 발견했다는 말이다. 가이슬러는 이런 사실 파악 노력은 하지 않고 ‘오픈 레터’ 팀이 건넨 왜곡된 문장들만으로 판단한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13) 하나님 안의 상호내주의 교리


가이슬러는 엘리옷 밀러가 ‘상호내재’ 교리를 위격의 동일시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엘리옷 밀러가 <우리가 틀렸었다>에서 강조한 것은 1) 삼위의 상호내재론은 가이슬러 등의 “삼신론의 경향에 대한 최상의 해독제”라는 점과 2) 삼위의 상호내재로 인해 “신격 전체, 삼일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라는 위트니스 리의 말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상호내재론을 위격 간의 동일시에 적용하는 것은 A. H. 스트롱의 글 본문에 나타나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항목은 아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위격 간의 동일시’는 주로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의 특징이다. 차례로 보기로 하자.


(1) 삼위의 상호내재와 삼신론: 상호내재론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요14:10)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이것은 “동일한 신적 본질 간의 상호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 이상의 개체에나 쓰는 ‘상호’라는 말을 ‘본질’에 끌어다 쓰면 ‘두 본질’을 전제한 말이 되기 때문이다. 위 본문은 상호내재하시는 주체가 ‘내가’와 “아버지께서”라는 두 위격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옷 밀러는 바로 이런 점을 간파함으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이유는 그분들의 본성의 하나가 단지 동일 속성을 공유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실체로 존재함과 서로간의 상호침투를 포함한다.라고 했다(우리가 틀렸었다, 22쪽).


즉 삼위는 동일 본성을 공유하실 뿐 아니라 “서로간의” 상호침투를 통해 “한 실체”(한 신격)로 존재함으로 분리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의 오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적인 상호내주를 가이슬러와 김 목사는 단지 ‘신적 본성 안의 상호내주’로만 알다보니 ‘주기도문의 성부는 삼일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각각 분리되신 세 위격들이 계실 뿐이기 때문이다.


(2) 어느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의 오심이기도 함: 주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10-11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본성’ 혹은 ‘편재의 속성’상 그러하신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내주하심을 말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빌립에게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이 점은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요8:16)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참된 것인데 자신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두분이 증언하니 자신의 증언이 참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문맥(요8:16-19)으로도 확증된다. 한편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성경적인 상호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내재하신다. 삼일 하나님에 적용된 ‘상호내재’라는 용어는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 23절에서도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께서 동시에 서로 안에 계심을 가리킨다. 이 구절들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인 동시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구절이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위트니스 리의 위 말은 세 위격들은 서로 안에 계심으로 여전히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분리’되지 않으시며 어느 한 위격이 가는 곳에 다른 두 위격들도 가시게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 위격 간의 동일시: 거듭 밝히거니와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혹은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사9:6)라는 말씀 자체에서 볼 수 있는 위격 간의 동일시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을 일차적으로 경륜상의 동일시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상호 내주 혹은 상호 왕래를 위격간의 동일시의 근거로 삼는 신학자도 있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이 말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A. H. 스트롱도 양태론자인가?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지금 주는 영이시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A. H. 스트롱, 조직 신학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한편 주 예수님께서도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십니까?”(요14:9)라고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신 후에, 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14:10)는 상호내재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하셨다. 그렇다면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가 보기에 이러한 주 예수님도 ‘경륜적 양태론’ 이단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참람한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김홍기 목사는 자신의 글 서두에서, 가이슬러 등의 답변서(Response)가 “지방 교회를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를 밝히고, CRI를 ‘이단옹호자’요 심지어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배경을 설명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가이슬러는 위에서 본 그의 글 어디에서도 CRI를 ‘양태론’ 혹은 ‘이단 옹호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지방 교회측을 향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말을 했지만 그것 또한 절대기준인 사도 바울과 배치되는 자신의 이단적인 기준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가이슬러가 CRI와 지방 교회측을 향해 무슨 말을 했든지 그것들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둔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 혹은 가이슬러가 동료 믿는 이들을 정죄하기 이전에 CRI처럼 먼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실체적 진실’을 아는데 더 성의를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또한 주 예수님(요14:9)과 사도 바울(고후3:17) 그리고 A. H. 스트롱 같은 정통 신학자들도 “경륜적 양태론” 이단이라고 무책임하게 정죄하는 자신들의 비정통적이고 비성경적인 교리틀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성경의 지지를 받는 참된 진리 안으로 속히 돌아오기를 거듭 촉구한다. 이것이 주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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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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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6.03.21. 23:53
이러한 토론은 많은 분들에게 기존의 본인들의 삼위일체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주님은 영이십니다(고후3:17)이라는 성경 본문 말씀을 '경륜적 양태론'이라고 정죄하는 경우 그들의 신앙생활 어디엔가 큰 결함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부분 그리고 그분의 충만인주님의 몸에 대한 인식과 체험 방면이라고 봅니다. 예수믿고 죽으면 천국간다는 구도에서는 이런 면이 별로 문제가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마16:18) 라는 주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사를 자기 신앙의 목표로 삼는 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방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교회와신앙에서의 김홍기 목사님과의 토론이 한국교회들에게 이런 방면에서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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