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경륜 안에서의 인도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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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경륜 안에서의 인도직분
인도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
성경 안에 있는 인도직분의 의미는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주님이 마태복음 20장 20절부터 28절, 23장 8절, 10절, 11절에서 인도하는 직분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인도하는 직분에 대한 사람의 생각을 깨뜨린다. 천연적인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인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다. 그러나 이 장에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크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인도하는 직분에 대한 주님의 관념은 천연적인 관념과 정반대이다. 그렇다. 오늘날 주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인도하는 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자들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인도직분은 노예의 신분을 의미함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주의 자녀들 가운데서 인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노예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되고 정직하다면, 우리는 인도하는 직분은 좋아하지만 종이 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심지어 젊은 자매들조차도 인도자가 되고 싶어한다. 만일 그들이 첫째가 되거나, 최소한 둘째가 될 수 없다면 그들은 실망한다.
성경을 읽을 때 인도직분에 대한 천연적인 관념을 가져오지 말라. 반복하거니와 성경에서의 인도직분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의 백성들 가운데 종이라면, 여러분은 기꺼이 화장실을 깨끗이 하고 마루의 먼지를 청소하고 의자를 정돈하고 안내 봉사를 해야 한다. 이것은 인도함에 대한 세상적인 관념과는 얼마나 다른지! 주의 회복에서 우리는 청소할 필요가 있을 때 관리인을 부르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관리인으로서 봉사해야 한다. 인도직분에 대한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을 내려놓고 순수한 말씀으로 되돌아가자.
유일한 인도자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그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오직 한 인도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있다.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 주의 회복 안에서 나를 인도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회 안의 인도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 인도자는 그리스도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답변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알고 진리를 실행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트니스 리가 인도자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위트니스 리는 우리의 종이다'라고 말해 줄 필요가 있다.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의해 지명된 유일한 인도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은 이와는 다른 것을 계시한다. 그렇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는 베드로가 첫째이고, 그의 이름이 첫 번째로 언급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9절은,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오순절날 열 한 사도와 함께 서 있었을 때 그는 사자같이 강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에서 그는 겁쟁이가 되었는데, 이는 야고보에게서 형제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그가 사도행전 10장에서 받았던 이상에 따라 이방 신자들과 함께 먹는 것에 대한 진리를 실행했었다. 그러나 야고보에게서 형제들이 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다. 바울은 베드로와 다른이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음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었다(갈 2:14).
그의 약함으로 인해 베드로는 이방의 믿는이들과 유대의 믿는이들이 동일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손상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의 영적 분량이 감소되었음을 가리킨다. 베드로가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적 분량은 야고보보다 적었다. 이러한 이유로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는 야고보의 이름이 베드로의 이름 앞에 언급된다. 더욱이 형제들이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대표했음을 가리킨다.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대표했음을 가리키는 또 다른 곳은 사도행전 21장 17절과 18절에서 보여진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여기에서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베드로 아닌 야고보에게 갔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장로들이 야고보의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 도시에 있는 교회를 대표하던 사람이었다.
이것을 더 분명히 가리켜 주는 것이 사도행전 15장에 있었던 회의이다. 사도들과 장로들의 회의에서 베드로가 첫 번째로 말했고, 다음에 바울이 말했다. 회의에서 인도하는 사람은 먼저 말하지 않고 마지막에 말한다. 이 회의에서 최종적인 말은 다음의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고보가 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행 15:13). 그리고는 19절에서 야고보가 결정을 내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원문 참조) 우리가 이 모든 구절들을 합하여 연결해 볼 때, 베드로가 신약의 유일한 인도자가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가톨릭이 베드로를 그러한 인도자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분명한 그림을 제시하기 위해 이에 관한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인도직분은 영적 역량에 달려 있음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서 그의 자녀들 가운데의 인도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인 것이 아니다. 인도하는 직분은 영적 분량에 달려 있다. 가장 큰 분량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인도자이다. 어떤 때는 그 분량이 어떤 형제에게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때는 그것은 다른 형제에게 있을 수 있다. 오순절날에는 가장 큰 분량이 베드로에게 있었지만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야고보에게 있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가 이 원칙을 더 설명해 준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서는 이같이 말한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의 이름이 바울(사울)보다 먼저 명명됨을 본다. 그러나 그들이 직분을 수행할 때, 바울의 영적 분량이 더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울이 인도했다(행 13:9).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갔고, 그들이 안디옥에 있었을 때는 바나바가 인도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이 직분을 수행하는데 앞장섰을 때 바울과 따지지 않았다. 바나바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바울! 뒤로 물러서라. 우리가 부름 받을 때 내 이름이 먼저 언급된 것을 잊지 말라. 왜 네가 인도하느냐?" 바나바는 바울의 분량이 그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인도하는데 대해 그와 다투지 않았다.
이 모든 사례에서 밝혀지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에 있는 인도직분은 공식적이거나 영구적이거나 조직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도직분은 언제나 영적 분량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인도직분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없애기 위해 이렇게 정하셨다. 구약에서 왕들은 서로 그 지위를 계승했다. 결코 세 명이나 네 명의 왕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은 한 사도가 아닌 열 두 사도를 임명했다. 후에 그분은 다른이들, 가령 바울과 바나바와 디모데 같은 사람들을 더하셨다. 나는 많은 사도들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 거짓 사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각지방 교회 안에는 항상 많은 장로들이 있다. 장로 직분이 복수임은 교회 안의 인도직분이 실제로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인도직분, 제1장 신약경륜 안에서의 인도직분,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