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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글 6 - 이인규님 삼신론 확증, 지방 교회들이 양태론이라는 주장 반박(2)

 

이 글에서는 지난 회 글에서 약속드린 대로 지방 교회들이 양태론이라는 이인규님의 주장이 왜 거짓된 억지 주장인지를 중점적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도 아울러 다룰 것입니다.


1. 이인규님의 '정통교회' 혹은 이인규님의 '정통교회 삼위일체'는 카멜리온인가?


이인규님은 지난 글에서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토론도 막바지에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지방 교회들의 삼위일체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와 다르다는 것은 이미 증거 되었고...' 라며 은근 슬쩍 자신 혼자 이것을 기정사실화 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인규님이 이 토론에서 증명키로 했다는 위 주제는 아직 개념 정의조차가 안되어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토론 시작부터 지금까지 쉽게 홀로 판단하고 쉽게 홀로 결정하는 것이 익숙하신 것 같습니다. 출발도 안한 경주에서 이미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고 주장하시면 곤란합니다. "기준" 확정도 없이 어찌 "비교"를 하며 또 "결론"을 내리십니까.


이인규님의 소위 '정통' 기준은 사람 따라 달라지는 카멜리온 기준입니다. 한 마디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따라 잣대가 바뀌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의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세 가지만 제시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이인규식 정통삼위일체 기준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세분이시다' 라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는 장신대 김명용 교수는 이단입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이에 대해서 어정쩡하게 서 계십니다. 님은 김OO 교수는 삼신론 또는 일신론자라고 당당하게 말한 이(도)OO님만도 못하십니다. 이인규님도 아시겠지만 교단 신학교 교수를 아무나 못합니다. 교단교리와 다르게 가르치면 교수 계속 하기 힘듭니다. 이인규님 정통기준으로 볼 때 이단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신학교(장신대)와 그곳 출신 목회자들이 구성원인 장로교(통합)단은 당연히 정통교회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은 여전히 예장 통합 측을 정통교회로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님은 지금 '정통교회'의 '이단 삼위일체관'을 허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인규님처럼 사람 보아가면서 말을 다르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말은 신뢰성이 없게 됩니다.


또 있습니다.


미국 플러신학교 교수인 루이스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여수룬, 1991)은 사도 바울(성경)의 예수와 성령과의 관계를 소개하면서 결론적으로 '성령은 우리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4-88쪽). '이인규식 정통기준'으로는 명백한 양태론 주장이 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교계 보급시킨 장본인이 현재도 월간 교회와신앙지에 고정 글을 쓰고 계신 오광만 교수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위 책 내용이 정말 양태론 사상이라면 번역자인 오광만 교수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무 책이나 번역하지 않습니다. 번역가치가 있고 자기 사상에 부합해야 번역할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이인규님은 님의 정통 삼위일체 기준에 확신이 있다면 당연히 최OO 목사에게 양태론자인 오광만 교수가 쓴 글을 더 이상 싣지 말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인규님은 저희에게 하듯 오광만 교수를 대할 용기가 있으십니까? 지금처럼 "같은 말"을 해도 사람 따라 평가를 달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어거스틴의 상호내재 개념'이 양태론 시비가 있던 바로 그 부분인데 제가 그것을 인용했으니 지방교회가 양태론이라고 정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양태론 주장을 했지만 정통교부이고 "같은 말"을 하는 지방교회만 이단이라는 이인규님의 말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만일 이인규님이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이제는 '님이 말하는 정통교회 삼위일체관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있게 됩니다. 님은 지금 '어거스틴은 정통신학자이지만 양태론 이단이다'는 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안 되는 기준으로 무슨 결론을 내리셨다고 하십니까.


이인규 님은 위 주제에 대해 제가 스스로 시인했다는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계십니다.


한 가지 질문 드립니다. 님의 정통 삼위일체 기준으로 볼 때 위 김명용 교수, 오광만 교수, 어거스틴은 이단입니까 아닙니까? 이단이 아니라면 이인규님의 정통교리는 카멜레온에 불과합니다. 이단이라면 이인규님의 '정통교회' 기준은 이단과 정통이 혼합된 이상한 교회입니다. 답변해 주시지요. 무엇이 '정통교회'이며 무엇이 '정통교회 삼위일체관'입니까? 지난 번 처럼 독자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결론이 내려진 것처럼 의도하는 표현들 또 불리하다 싶으면 슬쩍 넘어가는 태도를 보이지 마시고 이번에는 위의 질문에 분명한 정의를 내려보시지요. 그 후에야 이인규님은 그 기준과 지방 교회들 삼위일체를 비교를 할 수 있으십니다.


2. 이인규님이 삼신론자라는 명확한 증거


'이인규식 상호내재 개념'은 말을 빙빙 돌려서 복잡하게 해서 그렇지 명백한 '분리된 세 하나님들 사상'입니다. 즉 한 마디로 말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 인격은 각각 떨어져 있으면서 편재성이라는 신성한 속성 안에서만 상호 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상호내재를 설명하는 성경구절을 제시해 달라고 하자 님이 사도 바울이란 한 인격과 빌립보 성도들이라는 또 다른 인격들을 언급하고 있는 빌1:30(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도 재차 확인됩니다. 즉 '이인규식 상호내재'의 정체는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떨어져 있는 복수의 인격들이 같은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함께 싸우는 식의 상호내재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분리된 별개의 인격들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셋을 구별하되 "세 사람들 식의 개념"을 갖는 '세 독립된 인격'은 삼신론 이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관계성 안에서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삼경 목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님 안에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이 없다고 주장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사상입니다.


삼위가 영원히 구별되어야 하시지만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사이처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별에서 지나친 "분리"입니다. 이인규님은 '독립'된 구별이라는 어정쩡한 표현으로 자신의 이단사상을 가리고 있지만, 그 실상은 '구별된 독립'이 아닌 '분리된 독립'입니다.


이런 이단사상을 가지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우리가 영접한 하나님이 완전한 신격의 하나님이 못되고 1/3인격의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 되어 이런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을 참된 믿는 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성경지식이 많아도 참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불신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무리들을 가라지라고 말합니다(마13: 25). '이단적인 이인규식 상호내재'를 따라 하나님의 구속, 구원의 역사를 간략하게 재구성하면 이런 것입니다. 즉


1)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 성령 인격이 한 신격이면서 독립된 삼위로 계셨습니다.


2) 그러다가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2/3)은 하늘에 남아 계시고 아들 인격(1/3)만 이 땅으로 오셔서 육신을 입으셨고, 아버지, 성령은 오직 편재성으로만 아들 인격(1/3)안에 상호내재 하셨습니다.


3) 아들 인격이 물에서 침례 받으실 때 아버지 인격은 하늘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성령 인격은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는데 그후 다시 하늘로 가셨는지, 어디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오셔야 하니까 하늘로 다시 올라 가셨을 것입니다.


4) 십자가에서는 아들 인격(1/3)만 달리셨고 아버지 인격, 성령 인격은 하늘에 남아 계신 채 편재성으로만 십자가 위의 아들 인격 안에 계셨습니다.


5) 삼위중 유일하게 하나님 사람이신 아들 인격이 부활 승천하여 하늘의 아버지 인격 옆에 앉아 계시고 이번엔 성령 인격(1/3)이 또 다른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편재성으로만 성령인격 안에 계십니다.


6) 사람은 아직 하늘로 갈 수 없음으로 사람 가까이 오신 성령 인격(1/3)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도 되고, 거듭납니다. 그런데 이 성령 인격은 아들 인격도 아니고 아버지 인격도 아니므로 엄밀히 말하면 성령 인격을 영접했어도 아버지 인격이나 아들 인격은 그 안에 안 계십니다. 다만 이분들은 하나님의 본성(인격은 아니고)중 하나인 편재성으로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 인격 안에 상호내재 하십니다.


7) 그러므로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 안에 "아들 인격은 없으며", 우리가 영접한 예수님은 아들 인격은 제외된 채 편재성으로만 성령 인격 안에 계신 분이시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아들 인격)과는 다른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들 인격은 '하나님 사람 '이신데 우리가 영접한 분은 '아들 인격은 제외된 편재성으로만 계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인규식 상호내재 교리를 따르다보면 다른 예수를 영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과 "끝"이 다릅니다.


이러므로 인격 안에는 인격이 없으며 편재성 안에서만 상호내재하신다는 이인규님의 삼위일체론은 명백한 삼신론 이단이라는 증거는 그 끝을 보면 선명해집니다. 즉 이 분들에게 어떤 예수를 영접했는지를 말해 보라고 하면, '저는요...아버지 인격, 아들 인격은 제외되고 편재성이라는 신성한 본성으로만 상호내재하는 성령 인격을 영접했는데 이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사람이신 예수님과는 다른 분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또는 지금까지 주장하던 것과 달리 슬쩍 말을 바꾸어 곤란한 대목은 얼버무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삼신론 이단이 정통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오류를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하는 길 이외에는.... 저는 이인규님이 삼신론 이단교리를 버리고 순수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오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양태론인 것과 양태론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인규' 님에게 '어인규'라고 쓰여진 모자를 씌워주며 너는 내가 볼 때 '어인규'야 그러니 '나는 어인규다'라고 고백하라고 다그칩니다. 이 때 이인규님이 자기 성을 갈려고 하는 사람을 향하여 '나는 어인규가 아니고 이인규인데요'라고 항변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재차 '네가 이인규라고? 내가 볼 때 너는 이런 저런 면이 '어인규'랑 너무 흡사해. 만일 네가 '어인규'가 아니면 너는 적어도 '아인규'임이 틀림없어' 라며 계속 윽박지릅니다. 그리고는 항의하는 '이인규'님에게 어거지로 '아인규'라는 모자를 푹 눌러 씌운 후 보시다시피 '이 사람은 '아인규'입니다' 라며 자나깨나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상식이 있는 분들은 금방 이 사람이 지금 경우도 없고 예의도 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분별하실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저나 지방 교회들은 그것이 사벨리우스건 프락세아스건 그 누구건 어떤 유형의 양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무관하며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인규님은 앞 뒤 다 자르고 가져온 '예화'나 '성경본문 자체가 그러하거나' 지방 교회들이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만 계신다고 주장한다는 '자신의 거짓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지방교회측을 양태론자들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계십니다. 그러나 흑을 백이라고 우긴다고 흑이 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거짓말도 계속 반복해서 외치면 가끔은 별 생각 없이 듣는 사람들에겐 어느 시점에 가면 사실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습니까(마12:36-37).


이제 이인규님이 하도 사실을 왜곡시켜 억지 섞인 말을 하시므로 교회 역사상 나타난 양태론의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이며, 저와 지방 교회들이 양태론을 정죄하고 배척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자 합니다.


1) 교회 역사상 나타난 양태론 유형들


교회 역사상 나타난 양태론의 유형(사벨리안주의)으로 신학교 교과서에 소개된 것에는 성부 고난설(노에투스, 클레오메네스, 프락세아스), 성부속성설, 범신론적 계승설, 양태론적 가족설, 신지학적 양태설, 범신론적 과정설, 계시 양태설 등이 있습니다(차영배, 개혁교의학, 삼위일체론(신론) 74-83쪽). 그러나 여기서는 이인규님이 주로 언급하신 성부 고난설과 사벨리우스 이론 그리고 세 얼굴의 프로소폰을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소개해 보겠습니다.


-성부고난설 :


이 설은 간단히 말하면 유일신이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론입니다. 이들 주장의 이면에는 아버지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는 유대교적인 신념이 깔려있습니다. 노에투스는 '화육 이전에는 성부이지만 화육 이후에는 성자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성자는 다른 격위가 아니라 바로 성부 자신이며... 시대적으로 그 모양이 변한 것뿐이다'라고 함으로 위격을 구별하는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클레오메네스는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분은...하나님 아버지시다'라고 주장합니다(34쪽). 프락세아스는 '성부 자신이 동정녀에게서 났고...아들은 아버지의 모양(modus)에 불과하고...아버지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였다(34쪽)고 주장합니다.


이인규님은 지방 교회들의 신론을 이 성부 고난설에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해 지방 교회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 안에만 있었다고 한다'는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까지 동원하고 계십니다. 제가 근거 제시를 요청했지만 지금까지 답변이 없으십니다. 독자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 안에 구별됨을 상실치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늘 보좌에도 계신다"고 반복해서 밝혀왔습니다. 이인규님은 이처럼 자신의 양심을 속여가면서까지 애매한 다른 사람을 성부 고난설을 믿는 이단으로 만들 무슨 특별한 숨겨진 이유가 있는 분 같습니다.


-사벨리안주의 :


한 '모나드'로서의 하나님이 승계적인 셋으로 나타나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부 고난설이 아버지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사벨리안주의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말하되 승계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말함으로 삼위의 영원성을 근본적으로 인정치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발전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먼저 아들로 나타내시고 그 다음 영으로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으뜸 되는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또는 율법 수여자로서 아버지가 된다. 그 아버지가 구속을 위하여 마치 태양의 광선처럼 세상에 나타났다가 본체로 돌아간 다음에 세 번째로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영감도 주고 은총을 부여하기도 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06-207쪽, Epiphanius, Haer., 62, 1).


따라서 사벨리안주의자들은 그 이론 구조상 절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영원하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삼위가 동시존재 한다든지 상호내재 한다는 말을 하면 그는 이미 사벨리안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이 점은 이인규님이 양태론 기준으로 제시하신 웨인 그루뎀의 글로도 증명됩니다. 아래 웨인 그루뎀의 양태론 기준은 성경 그대로를 진리로 믿고 있는 지방 교회들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누가 마태복음 3 장의 침례 장면을 부인하겠습니까? 또는 성경에서의 삼위의 개인적인 관계를 언급하는 부분들을 누가 환상이나 제스츄어로 보겠습니까. 이인규님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양태론의 결정적인 결함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 삼위 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혹은 그것들은 단지 환상일 뿐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가 함께 계셔서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한다. 또한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하신 모든 경우들을 환상이나 제스츄어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웨인 그루뎀, 조진신학, 347-348쪽).


-세 가면적인 존재? :


이인규님은 처음에는 지방 교회들의 신론을 '사벨리우스적인 양태론'이 라고 하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말을 슬쩍 바꾸어 '사벨리우스 + 프락세아스'라고 하시더니 그것도 말이 안되니까 이번엔 근거 제시도 없이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설명하시면서 저희가 '한 존재에 세 가면적 요소, 세 얼굴이 함께 동시 존재하는 식의 양태론'이라며 양태론이 될만한 것이면 물불을 안 가리고 다 끌어다가 연관을 지으려고 하시는 것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선의의 독자분들 위해 인내를 가지고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이종성 박사는 '페르소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페르소나'에 대한 이해는 세 가지(성서 밖의 용례, 성서적 용어, 현대인의 이해)가 있다. 현대인은 페르소나(인격)를 ...육체와 감성이 제공해 주는 자료들의 총체라고 한다...성서 밖에서는 1) 무대에서 배우가 사용했던 가면을 의미한다. 2) 조건, 신분, 기능을 의미했다. 로마법에 의하면 노예는 '페르소나'를 가지지 못했으며 동시에 로마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시민으로서의 신분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개념은 (위에서) 두 번째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어에서는 그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낱말이나 개념이 없다. 신약에서는 '페르소나'에 해당되는 '프로소폰'이 사용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96쪽).


위 설명은 '페르소나'에 가면이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세속적인 용례일뿐 성서개념으로는 세 가면이라는 의미가 쓰이지 않았고, 두 번째 개념인 신분(status)의 의미로 쓰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이 '어거스틴이 세 가면이라는 의미의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말은 이종성 박사의 위 증언과 다릅니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요?


이종성 박사는 이어서 '프로소폰'이란 단어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라틴어 '페르소나'에 해당되는 희랍어가 바로 이 '프로소폰'이다. 이 말이 신약에서 사용될 때 그 뜻은 '얼굴' 또는 '현존'이란 의미이다(살전2:7, 고후5:12, 고후2:10, 4:6, 고후1:11). 위 말씀들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로소폰'이다. 터툴리아누스가 사용한 뜻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 즉 하나님은 한 때는 창조자로, 한 때는 구속자로, 한 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프로소폰이 갖는 오해와 오용을 경계하여...동방교회는 구태여 '프로소폰'을 기피하고 휘포스타시스를 썼다.(위 책, 298쪽).


위에서 보다시피, '페르소나' 또는 '프로소폰'이 가면 또는 얼굴로 오용―삼위가 배우가 한 가면을 썼다가 벗고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이 번엔 제3의 가면을 썼다가 벗는 식으로 나타났다는 주장―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삼위의 영원한 존재 또는 동시존재 가능성을 부인한다는 것임으로 사벨리우스 양태론과 동일한 것이지 이인규님의 억지주장처럼 이와 다른 또 다른 유형이 아닌 것입니다.


이인규님은 우리가 양태론을 1)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하지 않다 2)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정의하자 아주 중요한 양태론 조건이 하나 빠졌다며 그것이 곧 '한 존재가 세 가지 양태적인 표현으로 타나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로 '하나님이 예수로 나타나시고, 예수가 성령이라고 하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양태론 유형이 결코 아닙니다. 삼위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사벨리우스주의와 다를 바 없고 위 1) 2)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유형입니다. 이것을 슬쩍 말을 바꾸어 새로운 유형으로 만든다고 속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방 교회들은 근본적으로 삼위가 존재 안에서 위격을 구별하는 방식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영원히 "상호내재" 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므로 사벨리우스 주장과는 "결코" "영원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벨리우스는 이러한 삼위의 존재에 있어서의 구별된 상호내재를 무시하고, 성경에서 계시된 경륜적인 방면만을 지나치게 치우치게 강조함으로 이단이 된 것입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삼위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믿는 지방 교회들의 신론'은 교회 역사상 어떤 유형의 양태론과도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양태론이 아닌 것입니다.


2) 지방 교회들의 신론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증거들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삼위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고백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어떤 형태의 진짜 양태론자들에게 든지 '당신은 삼위가 영원토록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토록 구별된 방식으로 상호내재함을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다 'NO'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계 모든 지방 교회들의 성도들은 이런 질문에 큰 소리로 'YES' 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이제 OO님이 관찰방에서 정리하셨던 부분들을 인용하여 이에 대한 증거들로 제시해 보겠습니다.


▶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형식화된 사도신경은 사벨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위 양식론과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신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단지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위 양식론에는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으나, 이단적인 극단으로까지 너무 멀리 나아갔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하나의 면을 보았으나, 셋의 면에는 실수를 범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끝난 뒤에는 오직 성령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격의 셋 가운데 있는 동시존재와 상호 내재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29-30p-


▶ 우리가 아버지, 아들, 영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어떤 소문들과 비난들이 있다. 나는 그런 비평가들과 비난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영이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며 선포한다.


아버지가 영원하심


이사야 9장 6절에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용어가 있다. 이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인 번역은 「영원의 아버지(Father of eternity」혹은 「영원한 아버지(eternal Father)」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아들이 영원하심


아들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아들에 관하여,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7장 3절은, 『그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이란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직선보다는 원이 영원한 하나님의 상징인 이유이다. 그분은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다.


영이 영원하심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한 영」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라 우리는 셋―아버지, 아들, 영―모두가 영원하시다고 선포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3p-


▶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시며 양식(modes)으로 있는 것이 아님


아버지, 아들, 영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7절까지를 보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우리는 이 두 구절에서 아버지께 그 영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시는 아들을 갖는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그 영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그분의 영으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 영, 아들 그리스도를 갖는다. 모두는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한동안 존재했으며 그 다음 아들이 왔으며 그 다음 얼마 후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영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이 구절은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으며, 그 영은 성도들을 강화시키며, 아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진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혹은 교제가 언급된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4절부터 6절까지는 은사(gifts)의 영, 행정(administrations)의 주, 역사(operations)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영, 주님, 하나님을 본다. 다시 한 번 그 영, 아들,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역사하신다는 것을 본다. 그 영은 은사들을 주시며, 주님은 행정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역사(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가 일찍이 존재하심을 그치고 아들이 그분을 대체하려고 오셨으며, 그 후 그 영이 아들을 대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어떤 비평가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요 그 영이라고 가르칠 때, 그는 신격의 세 위격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부인하고 삼위 양식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비평가들이 나에게, 아들이 서 있고, 그 영이 내려오며,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곳인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적어도 그들이 믿는 것만큼은 믿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완전히 믿는다.


나는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계된 모든 구절들도 믿는다. 예를 들면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아버지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며, 그 영은 일곱 영이며, 아들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영, 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승천 후, 오순절 후에도 존재하신다.


여러 개의 다른 구절들도 같은 것을 계시한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 영의 교통하심을 본다. 더욱이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는, 『내가 ...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비노라... 너희를 ..... 그분의 영으로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가운데 거처를 정하게 하옵시고』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한다. 삼위 양식설은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며, 아들의 계시는 승천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친다. 아버지, 아들, 영의 영원성은 삼위 양식설에 의해 부인되었다. 삼위 양식설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5-306p-


▶ 그러나 우리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또한 마태복음 3장 16-17절과 고린도 후서 13장 13절과 계시록 1장 4-5절과 에베소서 3장 14-17절과 같은 구절들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31p-


▶ 아버지, 아들, 영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


어떤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한다.『마태복음 3장 16절부터 17절을 볼 때, 거기에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말씀하셨으며, 그 영은 아들 위에 임했다. 셋이 모두 동시에 행동했다. 분명히 이러한데, 당신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답은,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보다 더 많이 믿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순수한 말씀에 따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7p-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내재함이 모두 있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동시에 존재함은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서로 안에 거함은 정의하거나 이해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 용어가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안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가 그와 함께 왔음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이와같이 그 영이 왔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왔다. 더욱이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는 외적인 방법으로 아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주관적으로 아들 안에 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10p-


▶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자신의 뜻을 행치 않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주 예수님이 그분의 땅에서의 사역에서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셨음을 분명히 가리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594p-


▶ 신약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함께하신다고 말할 뿐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가 상호 내재하심을 계시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시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존재하시며 아들은 아버지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33p-


▶ 삼일 하나님은 영원 과거에 그분의 신성한 계획 가운데서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 성육신되시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영원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엡 1:7-9)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은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 되도록 창세 전에, 즉 영원 과거 (벧전 1:19-20)에 정해지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192p-


▶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히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193p-


▶ 특별히 베드로 전서 2장 24절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나무 곧 십자가 위의 우리의 대속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00p-


▶ 시편 22편 22절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회중에서 아버지를 찬송하실 것임을 예언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22p-


이번에도 이인규님의 거짓된 양태론 정죄를 반박하다보니 이미 지면이 찼습니다. 다음 편에서 저는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성경본문 자체가 위격의 혼동을 보이는 듯한 부분들, 예시의 한계...)을 중심으로 이인규님의 양태론 주장을 더 심도 있게 반박할 것입니다.


최OO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경륜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 안에 들어오심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수박비유를 가지고 저자의 의도는 무시한 채 말꼬리 잡는 식의 왜곡을 틈만나면 했습니다. 그런데 이인규님도 똑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두 분은 닮은 데가 많습니다. 소위 '수증기 비유'는 저자의 강조점이 무엇이었나를 파악하는 정도에서 이해되어야지 그 사람 전체의 신론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으로 과용될 것이 아닙니다. 무게 있는 신학자들은 그처럼 경솔하게 처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삼위일체론일수록 전체 골격 가운데 그 사람의 기본 주장을 파악하고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는 식이 되어야지 한 두 개 자기 생각과 다른 문장을 가지고 지나치게 과대포장 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부분들도 다음 글에서 다뤄질 것입니다.


끝으로,


이인규님의 반복된 질문들은 두 분의 아버지, 두 분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전제하에 묻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 자체가 분리된 위격을 보여주는 이단적인 증거들입니다. 그러나 계속 질문을 하시므로 제가 위 전제조건들에 대한 이인규님의 입장에 대한 답변을 듣고 저도 답변할 것입니다. 이인규님은 아래 항목들에 대해 솔직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1) 님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저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각기 다른 두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정말 믿으십니까?


2) 님은 예수님 안에서 제사를 받으시는 아버지와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각기 다른 두 아버지라고 정말 믿으십니까?


3) 님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영혼을 받는 아버지와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각기 다른 두 아버지라고 정말 믿으십니까?


4) 다윗이 본 하나님 안의 예수와 또 다른 예수가 있다고 정말 믿으십니까?


5) 님은 상호내재하는 보혜사와 구별된 또 다른 보혜사 즉 각기 다른 두 보혜사가 있음을 정말 믿으십니까?


6) 님은 중보자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과 또 다른 별도의 예수님 즉 두 예수님들이 계심을 정말 믿습니까?


7) 요12:28의 지상의 간구시 예수님 안의 아버지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각기 다른 두 아버지이십니까?


8) 님은 왜 주기도문이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다고 보십니까?


9) 상호 관계적인 면에서 구별된 인격(독립된 인격)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이것이 존재적(내재적인)인 삼위일체이며 님은 이 진리를 명쾌하게 이해를 못하시니까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지방교회가 삼위일체의 양 방면을 균형 있게 믿고 시인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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