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감별사 최삼경 목사(빛과소금교회)가 삼신론 논란과 월경잉태 이단사상 등으로 큰 물의를 빚고 있다.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 논란은 과거 최 목사가 이단으로 정죄한 지방교회와의 지상논쟁 가운데 촉발됐다. 최 목사는 90년대 말 그가 현재 상임이사로 있는 '교회와신앙'에 지방교회와 12차례 이상 신학적인 논쟁을 펼쳤고, 그 과정 가운데 삼신론자임이 들통나 논란이 거세지자 일방적으로 지상논쟁을 접었다. 본지는 당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 논란이 어떻게 촉발됐는지 이해를 돕고자 지상논쟁 전문을 개제한다. 마찬가지로 최삼경 목사가 자신에 대한 변론과 반론을 더 원한다면 본지는 언제든지 수용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방침이다.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1)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2)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3)

본 논쟁의 진행에 관하여

 

최삼경 목사와 당초 예정한 6회 논쟁이 이제 3회만 남았다. 우리는 독자와의 약속을 따라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 최목사의 글에 대해 반박한 후 기독론을 주로 다룰 것이다. 그 후에는 인간론과 교회론을 한 번에 묶어 다루고, 마지막으로 정리함으로 최삼경 목사와의 당초 약속을 존중하고자 한다.

 

I. 최삼경 목사의 삼위일체관에 대한 재반박

 

1. 시각 조정의 필요성

 

우리는 왜 위트니스 리의 신앙관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최삼경 목사의 삼위일체관을 밝히라고 거듭 요청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최목사의 말처럼 논쟁의 초점에서 빗나간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얀 종이를 보고 백지라고 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파란 안경을 쓰고 보면서 백지가 아니고 파란 종이라고 우긴다면 누구 말이 옳은가? 물론 주관적으론 둘 다 옳다. 그러나 둘 다 객관적으로 옳은 결론에 도달하려면 파란 안경을 쓰고 있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최목사는 자신이 ‘장로교신학’이라는 파란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장로교신학에 근거한 자신의 관점(몇 가지 경우는 칼빈과도 다른)은 소위 정통교회를 대변하는 것이고, 이 관점에 맞지 않는 가르침은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아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장로교신학은 개신교신학의 일부일 뿐 개신교신학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왜 그러한지를 보기로 하자. 고려 신학대학 교수인 이근삼 박사는 자신이 쓴 “칼빈. 칼빈주의”에서 개신교의 두 거장인 캘빈과 루터가 전자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후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형성함으로 1536년 이후부터는 성찬문제, 성경의 정경성, 예정론, 교회론, 기독론, 성경론에서 크게 다르다고 지적했다(1995년, 도서출판 엠마오, 52-53쪽). 더구나 같은 장로교단 내에서도 교리와 실행이 다르다는 이유 또는 기타의 명분으로 많은 분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김진복, 한국장로교회사, 1995, 쿰란출판사, 92-148쪽).

 

전 침례교 목사이자 America's Foremost Revival Weekly, The Sword of the Lord의 편집장인 Dr. Curtis Hutson은 장로교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캘빈주의의 5대 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자를 쓴 바 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교리에 있어서 장로교신학과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독단이며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만일 칼빈주의에 근거한 장로교신학만이 정통이라면 장로교신학과 다른 가톨릭과 동방정교신학, 루터교신학, 침례교신학, 형제회신학, 감리교신학, 성결교신학, 순복음신학 등은 정통(장로교신학)과 다르니까 최목사 편에서 보면 모두 이단이 된다. 그러므로 최목사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님을 인식하고 절대적인 성경적 관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최삼경 목사는 지방교회측이 지난 3월호에서 삼위일체에 관해 제기한 일곱 가지 질문에 피하지 말고 답변함으로 먼저 자신의 관점이 성경적임을 변증해 주기 바란다.

 

2. 불일치의 원인

 

최삼경 목사나 위트니스 리는 똑같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관을 이단교리로 배척한다. 또한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왜 둘 사이에 불일치가 있는 것일까?

 

첫째, 우리는 삼위일체 진리 자체가 너무 비밀스럽다는 점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고 본다. 정통신앙을 가진 어거스틴도 때로는 양태론자로, 때로는 다른 극단인 삼신론자로 비난받았던 교회역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둘째, 최목사의 삼위일체관에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 최삼경 목사가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중 어느 한 쪽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96년 10월호에서 성경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위트니스 리가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을 모두 인정하는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음을 말했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우선 이러한 용어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부연하여 설명하면, 본질적(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경륜적(경세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말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1995년, 대한기독교출판사, 234, 257쪽).

 

가장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며 정통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체계화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내재적 또는 본질적 삼위일체’ 측면을 추구했다. 이레니우스도 “하나님은 자체 존재의 본질상 한 분의 하나님만 계신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의 경륜을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되신다”고 말함으로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터툴리안도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위의 책, 261, 264, 234쪽).

 

왜 정통신앙을 가진 교부들이 삼위일체의 이 두 가지 면을 함께 지지했겠는가?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합당하게 이해하려면 이 두 면을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삼경 목사의 글을 읽다 보면, 그가 이러한 정통교리에 무지하다는 것이 폭로된다. 위에서 언급한 정통교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같은 장로교 신학자인 이종성 박사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과 본질적인 면을 인정하고 자신의 ‘삼위일체론’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자신이 이러한 정통교리를 모를 때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바르게 판단할 수도 없거니와 본의 아니게 이단적인 내용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최목사는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제 최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이란 용어로 … 자신의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은폐하고 있다고 보인다. … 위트니스 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이란 용어가 필자에게는 감각이 맞지 않지만 … 본질적인 면이나 경륜적인 면이냐를 따질 필요도 없이 …”(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최목사는 같은 장로교 신학자인 이종성 박사가 위 책에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또는 본질적 삼위일체 개념은 초대교회 때부터 많이 논의되었으며, … 둘 중 어느 한 쪽만을 인정하고 다른 쪽을 부인하거나 경시하면 이단적 견해가 될 위험성이 있다”(643, 680쪽)고 경고한 말을 마음에 새겨보기 바란다.

 

최목사가 지난 호에서 위트니스 리의 글에 대해 질문한 세 가지는 전적으로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믿는 정통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고(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1991년, 한국복음서원, 35-41쪽), 이것은 양태론과 양립할 수 없는 정통신앙인 것이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64-165쪽 참조).

 

지면이 제한되므로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과 본질적인 면에 대해 더 연구하기 원하는 독자들은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 이종성, 삼위일체론, 234-237, 256-262, 604, 638, 643, 648-650, 660, 668쪽, *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3 p. 674, 680-681, Vol.2 p. 582, 583, * E.A. Litton, Introduction to Dogmatic Theology pp. 91-92, * Dr. H. Martensen, Christian Dogmatic, p. 106, * 교회와신앙, ‘96. 10월호, 165쪽).

 

2) 최삼경 목사가 하나님의 세 위격의 상호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말할 때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구별되심을 부인해도 이단이지만, 이 세 위격이 다른 본질을 가졌다거나(여호와의 증인) 분리되어 있다(삼신론)고 해도 이단이 된다.

 

특히 하나님이 한 분(약2:19) 또는 “하나"(unum)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본질의 단일성’을 말한다는 것이 칼빈과 위트니스 리를 포함한 정통적인 믿는 이들의 신앙관이다(차영배, 삼위일체론<신론>, 1986년, 227-228쪽).

 

이 ‘본질’이 ‘영’이라는 점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와 캘빈은 완전히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최목사는 지방교회측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지방교회측은) 죤 캘빈도 ‘한 하나님’은 주로 본질의 단일성을 가리키며 여기서 본질이란 ‘영성’이라는 것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함으로(차영배, 개혁교의학-신론, 227-228쪽) 위트니스 리와 완전히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교회와신앙, 97년 3월호, 142쪽)고 했다. 중요한 점이 있다. 영이란 말과 영성이란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최목사가 전혀 연구하지 않고 토론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영성’이라는 단어는 캘빈의 ‘기독교강요’ 원문에서 ‘하나님의 영적 본질’(The Entire Spiritual Essence of God)을 가리킨다(죤 캘빈, 기독교강요, vol.I, 13-20). 같은 책의 바로 다음 문장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하므로 삼위일체의 본질이 ‘영’이심을 재차 확증케 해 준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와 캘빈은 ‘삼위일체의 본질은 한 영이다’라는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이제부터 우리는 위트니스 리와 최 목사의 관점을 대비하여 설명함으로 과연 누가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돕고자 한다.

 

첫째, 위트니스 리는 구별된 세 위격의 ‘상호내재(coinherence)'를 믿으나, 최목사는 세 위격의 ‘상호내재’를 부인한다

 

교회 역사상 세 위격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한 분됨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것은 세 위격 상호간에 ‘구별되나(distinctio) 분리(separatus)되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되어 왔다(이종성, 위의 책, 114쪽, 차영배 위의 책, 208쪽, 기독교문사 발행, 기독교백과사전-단권- 742쪽, 1992년). 즉 ‘구별이 없다’ 하면 양태론이 되고, ‘분리된다’고 하면 삼신론이 된다.

 

그렇다면 세 위격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시는가? 서로 안에 거하심(상호 내재)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세 위격간의 상호 내재를 부인하면 곧 세 위격의 분리를 의미하게 되며 자동적으로 삼신론의 이단에 빠지게 된다.

 

‘상호 내재’(coinherence)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So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The Works of St. Augustine "On the Trinity", Book VI, p103). 위트니스 리는 이 점에 있어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가르침을 지지한다.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시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하신다. … 그러므로 그 분이 땅에 계셨을 때, 그 분과 아버지는 함께 존재하셨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08-311쪽 참조).

 

물론 그는 다른 면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동시에 하늘에도 계심을 믿는다(마 3:17; 요 17:1).

 

그런데 최삼경 목사는 지난 6월호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마태복음 28장 19절을 해석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교회와신앙, 97. 6월호).

 

여기에서 최목사는 세 위격의 상호내재를 부인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것이 ‘양태론적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최목사는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심을 부인함으로 정통 진리를 거부할 뿐 아니라 감히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불경스런 잘못을 범하고 있다. 결국 분리된 삼위의 관점만을 인정함으로 결국 최목사의 신관은 삼신론이 되고 말았다.

 

독자들은 누구의 관점이 성경적인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판단하기 바란다.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 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9하-11).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요 10:30, 31).

 

둘째, 위트니스 리는 세 위격 하나님의 한 본질(영)을 믿으나 최목사는 이를 비판함으로 결국 부인한다

 

최삼경 목사는 작년 12월 그의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삼일 하나님이 한 영(본질)안에 계심’을 말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영이시고 성령님도 ‘한’ 영이신데 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36쪽).

 

최목사의 이러한 주장은 위격과 본질을 혼돈한 비판이다. 만일 혼돈한 것이 아니고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정통신앙이 아니다.

 

최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삼일 하나님이 두 본질〔아버지 하나님이 한 본질(영), 성령 하나님은 또 다른 본질(영)〕안에 계셔야 한다. 삼위일체 안에 두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이단 사상이다. 우리는 이미 97년 3월호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142쪽).

 

참고로 최삼경 목사와 같은 노선 안에 있는 존 캘빈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부는 성자와 함께 동시에 한 성령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 및 성자와 다른 신일 수 없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전적으로 계시기 때문에(요 14:10) 옛 교부들은 삼위의 본질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했다”(차영배, 삼위일체론<신론>, 1986년, 229쪽). 최목사는 다음호 글에서 이 점을 반드시 해명해 주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지만 최삼경 목사의 글은 최목사가 명백한 삼신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사도신경의 내용구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삼위일체론의 표준이 된다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삼신론적 구조’라고 할 수 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머리말)는 이종성 박사의 지적처럼, 최목사가 적어도 잠재의식 가운데 이러한 잘못된 삼신론적 관점을 정통교리로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삼일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대한 최목사의 질의는 작년 10월호 (지방)교회측의 글(163쪽)에서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II. 위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성경적이며 정통적이다

 

최삼경 목사가 작성한 장로교 통합측 77차 총회보고서(1992년)는 위트니스 리의 기독론이 나실 때부터 승천하시기까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최목사의 이런 비난은 그가 위트니스 리의 사상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고, 자신의 신학적 배경에 묶여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1. 위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칼케돈 신조와 일치한다

 

위트니스 리는 칼케돈 신조가 정의하는 것처럼, “…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심과 … 양성(신성, 인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이장식 편저, 기독교신조사 1집, 컨콜디아사, 1993년, 20쪽)는 것을 믿는다.

 

이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자.

 

“…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다. 그 분은 완전한 인성뿐 아니라 온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 분 안의 두 본성은 혼돈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두 본성을 소유하고 계실지라도 여전히 그 분은 한 인격이시다. 그 분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고, 그 분의 본성도 혼돈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전체 안에서 보여진 합당한 계시이다. 이것은 또한 역대로 하나님의 교회의 정통적인 관점이다. 하나님이자 사람이시고,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고, 분리됨이나 혼잡됨이 없는 우리 주님은 참으로 비밀들 중의 비밀이시요, 영원히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Witness Lee, The Person of Christ, LSM, 1981, p.12, 진리의 변호와 확증, 1996년, 한국복음서원, 96-97쪽).

 

위트니스 리의 또 다른 책을 인용해 보자.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이다. 신약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도 여전히 사람이심을 분명히 계시한다. 마태복음 24장 30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 분이 인자로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여전히 사람이실 것이다. 오늘날 하늘에서 그리스도는 여전히 사람이시다. 찬송가(한국복음서원) 115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라 하늘 보좌 위에 인자 예수 앉았네

하나님이 높인 사람 영광의 관 쓰셨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께서 인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55-56절). 인자로서 그 분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분이다. 하나님으로서 그 분은 전지전능하시다. 사람으로서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 있다(히 4:15)”(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1993년, 83-84쪽).

 

위트니스 리의 글을 한 군데만 더 인용해 보자.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인자이시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여전히 사람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주님은 십자가 이전에 땅 위에서 인자이셨으며, 부활과 승천 후 하나님의 우편 하늘에서도 여전히 인자이시다. 더 나아가 구름을 타고 오실 때도 그 분은 인자이실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 그리스도가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셨지만 부활 안에서 인성을 벗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편, 1991년, 한국복음서원, 135-136쪽).

 

독자들은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기독론이 지극히 성경적이고 균형 잡혔으며 정통노선을 따른 것임을 인정할 것이다. 또한 위트니스 리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에 어긋난다는 최삼경 목사의 비판은 위트니스 리의 사상을 철저히 연구하지 않은 채 내린 부당하고 거짓된 결론임을 알았을 것이다.

 

2.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밍글링'(mingling)이란 단어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것이 정통 기독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한 격위 안에 어떠한 상태로 존재하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인간의 언어가 충분치 않다.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때부터 4세기까지 터툴리안 등의 교부들은 하나님이 육신 가운데 표현되신 비밀을 묘사하는 단어로 ‘밍글링’(min gling)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참고로 ‘밍글링’의 동의어로는 krasis, anakrasis, sugkrasis, mixsis를 들 수 있다(G.W.H. Lampe, A Prac- tical Greek Lexicon, Oxford, 1961, pp. 774, 107, 1272, 872).

 

위트니스 리도 동일 개념을 설명하는 용어로 ‘밍글링’(mingling)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의 책들이 한국에 번역 소개되는 과정에서 ‘mingling'을 ‘연합’, ‘혼합’ 또는 ‘섞임’ 등으로 번역함으로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혼합’ 또는 ‘섞임’ 등은 교회역사상 나타난 ‘이단 사상’을 암시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시사 영어사에서 출판한 ‘엘리트 영한사전’을 보면 ‘mingle'의 첫 번째 뜻을 '섞이다‘ ’혼합되다(mix, blend)로 번역하고 있다(1455쪽). 그러므로 이러한 혼돈과 오해는 어디까지나 번역상의 문제일 뿐이다.

 

원래 ‘밍글링’(mingling)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초대교부들도 사용한 건전한 신학용어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유티커스(Eutychus)를 거치면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다. 이는 그들이 이 단어를 ‘두 본성이 혼합하여 제 3의 본성을 산출하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산성과 알카리성이 섞여 산성도 알카리성도 아닌 중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 용어의 본래의 의미가 이렇게 변질된 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비밀을 설명하는 전통신학용어로 ‘본체적 연합’(Hypo-static Union)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는 ‘본체적 연합’ 대신 ‘밍글링’(mingling)이란 단어를 쓰기를 고집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밍글링’(연합, 혼합 혹은 섞임, mingling)은 레위기 2장 4절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을 예표하는 ‘소제’를 묘사하는 데 쓰인 성경용어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직접 인용해 보자.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주님의 인성을 예표함)에 기름(신성을 예표함)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이 구절에서 ‘섞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mingling'이다(unleavened cakes of fine flour mingled with oil, KJV, ASV 참조).

 

둘째, ‘밍글링’은 교부시대에 신실한 주의 종들에 의해 사용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J. F. Bethune-Baker, An Introduction to the Early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Methuen & Co. Ltd., 1929, p. 243).

 

셋째, 웹스터 소사전의 ‘mingling’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신학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웹스터 소사전(Webster's Abridged Dictionary)은 ‘밍글링(mingling)'을 이렇게 정의한다.

 

“(한 가지를 다른 것과 혹은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을 함께) 결합하거나 연결하는 것. 특히 그 결합 안에서 원래의 요소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구별되도록 남아있는 상태“(to combine or join (one thing with another, or two or more things together), especially so that the original elements are not lost but remain distinguishable).

 

이와 같이 위트니스 리는 ‘밍글링’(mingling)을 ‘두 본성이 합해서 제 3의 본성을 산출한다’는 유티커스의 의미가 아닌, ‘두 본성이 연합하되 여전히 구별된다’는 정통적인 의미로 쓰는 것이다.

최삼경 목사나 다른 독자들이 이 점에 오해가 없기 바란다.

 

3.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한 최삼경 목사의 비판을 반박함

 

최삼경 목사는 지난 97년 6월호에서, 위트니스 리의 글(하나님의 경륜, 7-17쪽 참조)중 일부를 인용하며 비판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과 비판은 거듭 말하지만 최목사가 삼일 하나님이 사람 안에 들어오시는 구원의 과정인 삼일 하나님의 ‘경륜적인 면’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의문으로 보여진다.

 

그의 비판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서 반박하고자 한다.

 

첫째,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단계를 거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분이시다”라는 최 목사의 말에 대하여

 

이 말은 표현 자체에 모순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측면만을 말한다면, 세 위격의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전지 전능하시므로 ‘완성되셨다’는 말 자체가 그 분에겐 모독이다. 즉 최목사의 말대로, ‘이미 완성되신 분’이라면 그 전에 미완성된 기간이나 부분이 있으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단계가 있다’, ‘과정을 거치셨다’, ‘완결되셨다’, 또는 ‘그리스도에게 일곱 가지 성분이 있다’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삼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이 아닌, 구원의 역사를 위한 경륜적인 면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주로 삼일 하나님이 성육신때 입으신 인성에 관계된 표현인 것이다.

 

둘째, 위트니스 리의 신관을 따르면 하나님의 전능성도 불변성도 무너진다는 말에 대하여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의 어떤 글이 하나님의 전능성과 불변성을 무너지게 한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는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설명한 성육신의 단계를 하나님의 불변성을 깨뜨리는 것으로 본다는 말인가? 또한 하나님이 무능하지 않으시다는 최목사의 말은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구약의 아버지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와 사셨다는 주장인가? 그렇다면 최목사는 출애굽기 19장 18-21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또한 최삼경 목사는 구약의 성령 하나님이나 신약의 성령 하나님이나 다 사람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을 말하면서, 시편 51편 11절의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다위의 기도를 인용했다. 위 기도는 성신이 한번 임했다가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인데, 신약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라고 말씀하신다. 최삼경 목사는 위와 같은 차이점을 다음 글에서 해명해 주기 바란다. 또한 위트니스 리 글의 어느 부분이 하나님의 전능성과 불변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인지 분명하게 지적해서 비판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 완성되셨다는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1) 삼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과정을 거치셨다

 

영원히 구별되나 상호내재하시는 삼일 하나님은 어느 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33년 반의 인간 생활을 사셨고, 사람의 죽음을 맛보셨고, 사람의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고, 영화롭게 된 사람으로서 승천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기본 믿음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사실이다. 최삼경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는가?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삼일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우리 주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be came)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제 위트니스 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이러한 삼일 하나님은 오늘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셨다는 표시가 없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되셨을 때 시작되어 그 분의 인생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계속되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신다고 주장하면서[과정을 거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반대한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도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과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나 일련의 과정을 통과 하셨다. 그 분의 본성이나 본질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분은 과정을 통과하셨다”(위트니스 리, 성령, 1989년, 한국복음서원, 9쪽).

 

이러한 표현은 다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며, 소위 ‘과정신학’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참고로 밝혀둔다. 더 자세한 것은 지면의 한계상 (지방)교회가 발행하는 신학 계간지 ‘Affirmation & Critique, 1996년 4월호, LSM, pp.7-11 및 위트니스 리의 ‘성령’(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2) 삼일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을 따라 사람 안에 들어오시고 사람과 하나되시기 위해 인성 안에서 완결되셨다

 

‘하나님이 최종 완결되셨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부활시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로고스가 지금까지 없던 육신을 덧입은 것이며,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세계에,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연계에 개입하신 것’(기독교문사, 위 백과사전, 780쪽)이다. 즉 성육신은 '신격(Godhead)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것'(골 2:9)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이끌려진 놀랍고도 기이한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하).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육신때 입으신 육신을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을 때는 벗어버리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성육신부터 영원까지 참 하나님이시고 참사람이시다.

 

그렇다면 부활하실 때 그 분의 인성 안에 어떠한 역사가 있었는가?

 

이 점에 대해 언급한 개신교 신학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캐스윅 총회 연사로 활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수행했던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의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한국에도 그의 책들이 많이 번역 소개되었으며 정통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가 쓴 책인 <그리스도의 영> 제 5장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인성이 부활 안에서 완성되신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 38, 39): …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표현은 기이하게 보인다. 그래서 삽입된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한글 성경에도 원문에는 없는 ‘저희에게’가 삽입되었음-필자 주). 그러나 그 표현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서야 비로소 성령이 임하시리라는 사실의 참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끌 것이다. …“

 

계속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 아들이 하늘로 되돌아가셨을 땐 하나님의 독생자로서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이미 예전과 같은 존재는 아니셨다. 그는 인자로서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나신 자였으며 스스로 완전케 하시고 깨끗케 하신 영광스런 인성(clothed with that glorified humanity which He had perfected and sanctified for Himself .., 여기서 ‘humanity’는 겸손이 아니고 인성으로 번역되어야 옳다-필자 주)으로 옷 입으셨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 새로운 거룩한 인성을 완성하심으로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생명을 이제 전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인간이자 그 우두머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성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하나님, 사람)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임하실 수 있었다. 그는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으로 임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각 사람 안에 계시면서 예수님의 인격적 생명과 현존의 영임과 동시에 신자의 인격적 생명의 영이 되신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이 성취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예수님의 보좌에 앉으시고 새로운 실존의 단계, 즉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영광에 들어가셨을 때이다”(앤드류 머레이, 임석남 번역, 그리스도의 영,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년, 41-44쪽, Andrew Murray, The Spirit of Christ, Whitaker House, 1984, pp 81-88).

 

앤드류 머레이는 위 글에서 예수님의 신성은 전혀 변함이 없으나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이 죽고 부활하여 영광 안에 들어가셨을 때 ‘영화롭게 되셨다는 것’과, 믿는 이들이 영접한 예수님(생명 주는 영)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도 그의 책에서 빌립보서 1장 19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설명하면서 앤드류 머레이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위트니스 리,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 메시지 1-17, 한국복음서원, 1996년, 189-192쪽).

 

삼일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과정을 거치신 후 생명 주는 영으로 완결되셨다.

 

이 생명 주는 영이 믿는 이들과 하나되심으로 우리 안에서 성화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이러한 말은 전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와 성령의 성화 역사를 높이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삼경 목사의 신앙의 기초요, 장로교단의 교리의 기초가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원문을 보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하게 나오신 분이다’가 성령님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이러한 선언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성경의 깊고 풍성한 계시를 다 포함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최삼경 목사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린다.

 

최목사는 우리가 영접한 주님이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다는 앤드류 머레이의 위와 같은 관점을 부인하는가? 만일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최삼경 목사가 영접한 주님은 부활 후 인성을 벗어버리셨는가? 최목사는 우리의 이러한 진지한 질문에 회피하지 말고 반드시 답변해 주기 바란다.

 

아울러 최목사는 자신의 편협한 관점과 논리가 아닌, 성경의 사실에 기초하여 남은 토론을 전개시켜 줄 것을 당부한다. 이렇게 해야 독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신앙관과 최삼경 목사의 신앙관 중 어느 것이 성경적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처음에 쌍방이 약속한 진리토론의 취지에 맞는다.

 

Daniel Towle/ 캘리포니아 플러톤교회 목회자
조동욱/ 캘리포니아 플러톤교회 목회자

출처 : 믿음을 위한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