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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양식론, 삼신론,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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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양식론, 삼신론,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

 

 

이 소책자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즉 삼위 양식론, 삼신론 그리고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를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하고 단순하게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을 이해하고, 성경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계시를 봄으로써 주님의 백성은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이라는 이단적인 극단들을 분별하고 피할 수 있어야 하며,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전반적인 진리들을 이해하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삼일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보다 쉽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삼위 양식론

 

몇 가지 정의

 

삼위 양식론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이 용어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소하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양식(mode)」, 「양식의(modal)」, 「양식론(modalism)」, 「양식론자(modalist)」라는 네 가지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인 의미에 따르면, 「양식(mode)」은 어떤 것으로 꾸며진 외관이나 형태를 나타낸다. 즉 그것은 나타남이나 형태 혹은 정돈된 방식을 가리킨다. 형용사인 「양식의(modal)」는 그 본질 혹은 실체와 구별되는 사물의 양식을 특징 짓는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각각 구별된 세 인격이라기보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세 가지 양식 또는 행동 형태들이라는 신학 이론이다. 「(삼위) 양식론자」는 삼위 양식론이라는 신학적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삼위 일체에 대한 삼위 양식론적 관념

 

삼위 일체에 대한 삼위 양식론적 관념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영은 동등하지 않고 영원히 공존하지도 않으며, 다만 하나님이 세 번 연속적으로 나타나신 것이거나 세 가지의 일시적인 행동 양식일 뿐이다. 사실상 일원론의 한 형태인 삼위 양식론은 그분 자신의 속 존재가 삼일(三一)이신 것을 부인한다. 도리어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신성한 구속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채택하신 일시적 또는 연속적인 역할들이고, 그들은 신격의 궁극적인 본성 안에서 어떤 것과도 부합될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1] 삼위 양식론은 그리스도의 독립적인 위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육신을 아버지의 존재 혹은 나타남의 한 양식으로 간주한다. [2] 삼위 양식론자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다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계시하는 수단일 뿐, 그분의 속 존재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3]

 

삼위 양식론의 간략한 역사

 

이제 삼위 양식론의 간략한 역사와 그것을 신봉하는 몇몇 인도격인 인물들의 사상을 고찰해 보자. 2세기 말엽에 유일신론이라는 가르침의 형태가 출현했다. 삼위 양식론, 혹은 「양태론적 유일신론」으로 알려진 이것은 유일신론의 한 형태이다. 「유일신론」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의 통치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모나키아(monarchia)」에서 파생되었다. 유일신론자들은 신성한 연합 또는 「군주국(Monarchy)」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지배적인 원칙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셋이신 면의 계시를 설명함에 있어서, 유일신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세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사상을 배제하고자 했다. [4] 이러한 원칙을 유지하면서 양태론적 유일신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겠지만, 삼위 양식론자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독립적인 위격을 희생시켜 아버지의 실체 안으로 흡수되게 했다. [5] 삼위 양식론은 단순한 믿는이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신론, 삼신론(둘 혹은 세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타락에 맞서 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존해 주는 최선의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6]

 

삼위 양식론 학파의 초기 대표자들 가운데 프라케아스(Praxeas)와 노에투스(Noetus)는 둘 다 2세기 말에 소아시아에서 로마로 왔다. [7] 프라케아스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동일한 위격인데, 아버지 자신이 사람이 되사 그리스도 안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고통받고,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8] 이러한 관점은 또한 「성부 고난설」로도 알려져 있는데, 라틴어로 「아버지」라는 뜻의 「pater」와 「고난당함」이라는 뜻의 「passio」에서 온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을 실질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아버지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9] 교회 역사학자인 필립 쉐프의 말에 의하면, 프라케아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영과 육체의 관계로 생각했다. 영과 동일한 대상이 아버지요, 아들과 동일한 대상이 육체이다. 그는 카톨릭의 삼신론적인 교리를 생각했다.』 [10] 프라케아스가 지지한 삼위 양식론은 한때 로마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유행했었다. 3세기 초에 신격을 「세 인격 안의 한 본질」이라고 정의한 터툴리안은 「프라케아스에 대한 반박」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프라케아스가 성령을 몰아내고 성부를 못박았다고 반박하는 글을 썼다.

 

노에투스(Noetus)는 A. D. 200년 경에 프라케아스와 같은 견해를 출판했는데,[11 ] 그는 『그리스도는 아버지 자신이었고, 아버지 자신이 태어나셨고, 고난받으셨고,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12] 노에투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아버지와 동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노에투스에게 있어서 신격의 분할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고난받은 것은 아버지가 고난받은 것이었다. [13] 노에투스에 의하면 오직 한 하나님, 아버지만 계셨으며, 그분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분 자신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다만 하나님의 명칭일 뿐이며, 그때 그분은 자신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아버지는 땅에서의 체험과 관련된 일정 기간 동안만 아들이라고 불리셨다. 노에투스에게 있어서, 아들은 육신 안에 가려진 아버지이다. [14] 노에투스의 제자들인 에피고누스(Epigonus)와 클레오메니스(Cleodmenes)도 로마에서 그의 교리를 전했다. [15]

 

나중에 교황 칼리스투스 1세가 된 칼리스투스(Callistus)도 노에투스의 교리를 채택하고 지지하여 아들은 단지 사람의 형태로 아버지가 나타나신 것이라고 했다. 칼리스투스는 영이 몸에게 생명을 불어넣듯이 아버지도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가르쳤다. [16] 그의 반대자들이었던 이신론자(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칼리스투스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은 아들이라고 불리나, 육신을 떠나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가르쳤다. [17]

 

3세기 초에 베릴루스(Beryllus)는 아들의 인격적인 존재를 부인하고, 사람들 가운데 오시기 전에는 그분이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갖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베릴루스는 또한 그리스도의 독립적인 신성을 부인하면서, 그분은 고유한 신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땅 위에서의 생애 동안 그분 안에 거했던 아버지의 신성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의미에서 베릴루스는 삼위 양식론의 초기 학파와 사벨리우스파 사이의 징검다리였다. [18]

 

사벨리우스(Sabellius)는 삼위 양식론자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근원적이고, 심오하고, 교묘한 자였다. [19] 그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노에투스의 이론이지만,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아들에게는 물론 성령에게도 명확한 위치를 부여했다. [20]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앞서 있었던 자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이 한 본질이실 뿐 아니라 한 위격이라는 것을 가장 가능한 방법으로 주장했다. [21] 사벨리우스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한 분이시고 동일한 분이시며, 자신을 환경에 따라 다른 식으로 나타내시는 한 하나님의 세 이름이다. 아버지이신 그분은 창조주요, 주관자요, 율법을 주신 분이며, 아들이신 그분은 구속주로 성육신 되신 분이고, 영이신 그분은 사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분이요, 거듭나게 하는 분이요, 거룩케 하는 분이시다. [22] 그러나 사벨리우스에게 있어서 그분은 유일하고도 동일한 하나님이시고, 유일하고도 동일한 신격이시며, 연속되는 일시적 표현들 안에서 나타나셔서 마치 한 개인이 다양한 역할에 따라 다른 칭호로 불리우듯이 이 모든 방식으로 행하는 분이시다. [23]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동시에 역사하지 않으시고, 그 필요에 따라 하나의 행동에서 또 다른 행동으로 이어서 전환하여 유일하고도 동일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결코 모두 동시에 존재하시지 않는다. [24]

 

사벨리우스의 근본적인 사상은, 하나님의 단일성이 세상에 펼쳐지는 과정 가운데서, 혹은 계시의 기간 동안에는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나나 구속이 완성된 후에는 다시 단일함으로 복귀되신다는 것이다. [25] 사벨리우스는 아들의 계시가 승천으로 끝나고 영의 계시는 거듭남과 거룩케 함까지 계속된다고 가르쳤다. [26] 그러므로 사벨리우스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속 존재인 본질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계시의 삼위일체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단지 한 신성한 본질이 그 자체를 계시하는 세 가지 다른 면의 명칭일 뿐이다. [27] 사벨리우스는 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자의 임무를 완성한 후에는 추상적인 실체로 복귀되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한 것에서 정통 교리와 다르다. [28]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의 속 존재 안에서 영원히 동시에 존재하심을 부인한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님의 한 인격의 일시적이고도 연속적인 나타남이라고 주장했다. 유명한 교리 학자 베튜운 베이커(J. F. Bethune-Baker)의 말에 의하면, 사벨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참된 성육신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던, 따로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 없다. 하나님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 역할을 수행하고 위대한 연극의 막이 내릴 때,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역할은 끝나게 된다.』 [29]

 

삼신론

 

삼위 양식론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삼신론은 세 하나님, 특히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셋으로 구별된 하나님들이라는 교리를 믿는 것이다. 삼신론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셋으로 분리된 하나님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가 한 하나님이고, 아들이 한 하나님이며, 영도 한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삼신론이다. 신격의 위격에 대한 구별이 강조될 때, 그 결과는 언제나 삼신론이 될 것이다. 「위격(Person)」이라는 용어를 말할 때, 달라스 신학교 창설자 중 하나이자 대단히 존경받는 성경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이 용어도 부적절하다는, 심지어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신격을 구분하는 의미로 그 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그것은 분리함과 같은 의미의 구분이 아닌, 본질적으로 상호 내재함 또는 포함함과 연관된 구분을 의미한다.』 [30]

삼신론의 한 형태는 아리우스(Arius)의 교리로 대표된다. 아리우스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인도격인 피조물의 신분을 지니고 있으며, 영은 아들보다 열등하다. 비록 아리우스가 아들과 영의 신성한 신분에 대해 불명확했다 할지라도, 그의 이론은 삼신론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31]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4세기 초반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이 너무나 심해서 제국 내에 있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의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논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A. D. 325년에 콘스탄틴 황제 주최로 니케아 종교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주된 논쟁은 삼신론의 형태를 주장하는 아리우스와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교리를 가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간에 있었다. 이 회의의 산물인 니케아 신조는 그 신조의 끝부분에서 파문령과 함께 아리우스와 삼신론의 이단성을 정죄했다. [32] 니케아 공회의 때에는 삼위 양식론, 특히 사벨리우스의 이론과 삼신론이 모두 패배했다.

 

그러나 세 명의 갑바도기아 인으로 알려진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과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A. D. 320-395) 시대로부터 삼신론의 경향이 있어 왔다. 이 때문에 니케아 종교 회의 이후 이백여 년이 지나서 또 다른 형태의 삼신론이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구별을 극단으로 몰아가서 신격의 한 공통된 본질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하는 요하네스 필로포너스(Johannes Philoponus)의 가르침이다. 이것도 사실상 삼신론이었다. [33] 마지막 헬라 동방 교부인 다마스커스의 존(John of Damas cus)은 신격 간의 상호 내재의 문제를 특별히 강조하여 신성한 단일성을 새롭게 강조함으로 이러한 삼신론을 바로 잡았다. [34] 다마스커스의 존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에게로 영원토록 흐르는 신성한 생명의 통로이며 또한 그분을 통하여 세 위격(hypostases, 신격의 위격들을 가리키는 기술적인 용어)의 결합이 중재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둘을 조화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35] 『그러한 초월적인 비밀에 대하여 사람의 생각과 인간의 언어는 완전한 진리의 분해된 조각들만 이해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36]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의 양 극단을 피하려고 시도함

 

교회 교부들이 삼위일체의 내적 본성을 논할 때, 한면으로는 삼위 양식론의 극단을, 다른 한면으로는 삼신론의 극단을 피하려고 했다. 그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공식화하려고 할 때, 그들 자신이 종종 삼위 양식론자 또는 삼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비난은 진리의 한 방면을 희생하면서 다른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들의 어려움은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때는 삼위 양식론인 주장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고, 세 위격과 경륜을 말할 때는 삼신론적인 주장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37] 『니케아 교부들의 많은 논쟁은 의심할 바 없이 삼신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스스로 사벨리우스의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에 의해 중립화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위치는 이 두 극단 사이의 중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8]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A. D. 330-395)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가 어떤 성경 구절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삼위 양식론자이기도 하며 삼신론자이기도 하다고 비난받았다. [39]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세 하나님을 전파한다고 비난했다 …. 그러나 진리는 우리 편을 위해 싸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이들에게 공개적으로, 우리와 대화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세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정죄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듣자마자 그들은 사벨리우스가 우리를 대적하는 편리한 무기이고, 그가 퍼뜨린 염병이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주제임을 발견한다. [40]

엔시라의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 A. D. 320-374)는 오해받아 잘못 평가된 사람의 대표적인 예이다. 아리우스와 삼신론을 반대하는 글을 썼을 때, 그는 삼위 양식론자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사벨리우스 주의를 다듬은 형태를 가르친다는 비난과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사벨리우스와 삼위 양식론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신앙 고백을 제시하였다. 『오해받고 부당하게 평가 받는 문제는 반대자들에 의해 잘못된 위치에 놓이지 않고 삼일 하나님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다시금 분투하게 만들었다.』 [41]

 

대단히 존경받는 주님의 종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 ds)는 삼신론과 삼위 양식론 둘 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삼위일체의 성경적 경륜과 구속의 언약에 관한 고찰」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한 저자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저자는 에드워드의 원고 속에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의심할 수 없는 권위를 알고 있다. 거기서 그의 관점은 아리우스 주의나 사벨리우스 주의의 방향에서 큰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 [42]

여기서 삼위 양식론이나 삼신론 혹은 그 둘 다라는 비난을 받은 교회 교부들의 또 다른 예를 드는 것이 좋겠다. 터툴리안(Tertullian, A. D. 160-220)은 삼위 양식론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인도자였고, 정통적이고 근본주의적이라고 평가되는 사람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어떤 사람에 의해 아리안 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에 몬타누스 이단에 빠진 적이 있는 터툴리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아리우스파 사람들과 같은 의견을 품고 있다.』 [43]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A. D. 190-265)는 삼일 하나님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오해받은 또 다른 예이다. 그는 사벨리우스를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그렇게 할 때 그는 또 다른 극단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삼신론을 가르친다고 정죄받았다. 그는 신앙에 대한 반역죄로 로마 주교 앞에 기소되었고, 주교 회의는 그에게 그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힐 것을 요구했다. 답변에서 그는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분리했다는 것을 부인했는데, 이는 각각이 필연적으로 나머지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44] 그가 「한 본체의(of one substance)」를 의미하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저술에서 충분히 자신을 변호했고, 니케아 신조의 옹호자인 아타나시우스는 디오니시우스가 삼일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로마 주교에게 한 그의 답변이나 아타나시우스가 그를 변호한 것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삼신론으로 비난하기를 고집한다. [45]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저술가 중 하나인 어거스틴(Augustine, A. D. 354-430)도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나님의 하나이심에 대한 강조는 그로 삼위 양식론자라는 혐의를 받게 했다. 세 분의 역사하심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어거스틴은 각각의 위격이 마치 외적인 행동들에서 구별된 역할을 담당했던 것처럼 말한 교부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46] 교리사의 유명한 권위자 아돌프 하네크(Adolf Harnack)는, 『우리는 어거스틴이 자기는 삼위 양식론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주장한 것과 각기 다른 사상들 사이에 있는 교묘한 구별에 의해서만 그가 삼위 양식론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47]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글을 썼던 2세기 경의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보다 정밀하게 그러한 논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던 중 그 자신이 성령께 사로 잡혔다. 삼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글은 순수한 말씀의 단순성을 반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몰아대는 한 가지 야망은 참된 하나님과 그분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갈망인데, 즉 아버지와 아들의 단일성은 무엇인가, 아들과 아버지의 교통은 무엇인가, 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며, 이 전능자들의 단일성은 무엇이며,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 및 영과 아들과 아버지로서의 결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48]

아테나고라스가 쓴 글을 논평하면서 불(Bull) 주교는 아테나고라스가 사벨리우스 주의와 아리우스 주의 둘 다에게 정죄받았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예수회 신학자인 페타비우스(Petavious, A. D. 1583-1652)도 아테나고라스가 아버지와 아들이 다만 한 위격이거나 한 위격이셨던 것을 믿은 것으로 여겨 그를 사벨리우스 주의자라고 정죄했다. 거듭 말하거니와 페타비우스는 그렇게 말한 그 단락과 여러 부분에서 동일한 인물 아테나고라스를 아리우스 주의자로 소개했다. 즉 명백하게 서로 반대되는 두 이단의 학식 있는 대부로 낙인찍었다.』 [49]

니케아 신조에서 소개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단어는 사벨리우스 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고 남용되었으며, 삼신론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50]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따른 문제점을 지적함에 있어서, 교회 역사학자인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커스(Socrates Scholasticus, A. D. 379-445?)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주교들]이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조사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들이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는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싸우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어느 쪽도 서로를 비방하는 근거를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모우시오스」라는 단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사벨리우스와 몬타누스의 이론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용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반대자들을 다신론주의자로 정죄하면서 그들이 이단적인 미신들을 소개하는 자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 이처럼 오해한 결과 그들은 서로 원수와 싸우는 것처럼 글을 썼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의 구별된 위격이요 존재라는 것과 세 위격 안에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양측이 다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서로 동의할 수 없게 하고, 화평케 되도록 인내할 수 없게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51]

결국 교부들은 상호내재의 교리라는 것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신격의 위격들 간의 상호교통과 상호침투를 의미한다.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 [52] 이러한 교리는 세 위격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그들이 한 본질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사람의 시도이다. 다마스커스의 존은 「정통 신앙 강해」라는 책에서 『…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 안에 있다. 그러나 하나로 합침이나 상호혼합이나 혼동이 없다.』고 말했다. [53] 이 문제에 대한 논평에서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이 상호교통에 관한 성경의 제시들은 그들 사이의 분리를 내포하는 것으로서의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 부르는 구별의 개념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준다. 이 상호교통은 또한 「그 영」이신 그리스도의 명칭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명칭을 설명해 준다.』라고 말했다. [54] 같은 페이지에서 스트롱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은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했다. [55]

 

불(Bull) 주교는 고전적 저술인 「니케아 신조의 변명」에서, 『신성한 위격들의 상호내재(상호거주)는 참으로 매우 큰 비밀이다. 우리는 호기심으로 파고들기 보다는 경건하게 경배해야 한다 …. 그것은 다른 모든 결합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결합이다.』라고 말한다. [56] 그러므로 상호내재의 교리는 세 위격이 삼위 양식론의 하나님의 세 국면들, 단계들, 방면들로 융해되는 것을 막고, 세 위격이 세 하나님으로 결론 내려지지 않도록 보호했다. [57]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

 

어떻게 해서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이 생겨났는가? 그것은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이 둘 다 성경 안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진리의 양면 중 한 면만을 치우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삼위 양식론은 진리의 한 면, 즉 오직 유일한 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취하여 그것을 이단적인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반대로 삼신론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진리의 또 다른 면, 즉 그분이 셋 안에 하나(one-in-three)시라는 것을 취하여 그것을 반대쪽의 이단적인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만일 우리가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이라는 원칙을 본다면, 우리는 쉽게 이러한 극단들을 피할 수 있고,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총체적인 진리에 대해 신실한 간증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매우 지각 있고 사려깊은 연구가인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의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이란 글에서 몇 군데를 인용하겠다. 고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에서 우리의 관점에 전달된 진리의 양면성은 그것이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하나를 산출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영광이다. 미심한 점을 밝히며, 다양한 외형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의 법칙을 유지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다양한 결과들을 추적하여 하나의 원칙을 찾는다. 이러한 완전함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그는 회피하거나 부인한다.』 [58]

고벳은 계속하여,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본성상 그분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원칙으로 계속하여 역사하신다.』라고 말한다. [59] 그러므로 고벳은, 『만일 성경에서 외견상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원칙이 병행하는 것이 발견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복수 안의 단일성」, 「단일성 안의 복수」는 세상과 성경이 모두 기초로 삼는 중요한 원칙이다.』라고 말한다. [60]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명백하게 모순되는 문장에 관해 고벳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행동하려고 하기 전에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둘 모두를 명백하게 확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61] 고벳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는 근거는 우리가 그것들을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둘 모두를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62]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에 관한 많은 논쟁이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고벳이 말한 것처럼, 『진리에 대한 반대되는 관점들은 다른 시대에 고찰되었던 주제의 다른 부분들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63] 이 글에서 고벳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시는가? 그분이 그들의 기질과 지적인 편견에 상반되는 진리의 관점을 확증하실 때, 그들은 그분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편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것 중 한 가지를 무시할 것인가? 겸손하고 어린아이 같은 성도는 둘 다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류가 없으신 그의 아버지께서 각각을 차별 없이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64]

고벳은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이라는 원칙을 특별히 하나님의 본성에 적용하였다.

동일한 진리의 양면성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 진술할 때에도 나타난다. 그것은 그분의 단일성을 확증한다 …. 그러나 성경은 신격 안에 있는 위격 간의 구별 또한 분명하게 확증한다. 「복수 안의 단일성, 단일성 안의 복수」가 여기에서의 주장이다. 신격의 본성에 기원을 둔 이 지배적인 진리가 그분의 모든 역사하심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65]

이 「신격의 본성에 기원을 둔 지배적인 진리」라는 고벳의 말을 주목하라. 달리 말하면, 양면성을 가진 성경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본성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양면, 즉 그분이 셋이자 하나이심과 하나이자 셋이심은 성경 안에 있는 그분의 계시에 대한 진리의 양면성으로 증명된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성경에 담긴 삼일 하나님의 계시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요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삼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근거는 성경이며,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다. 잠언 30장 5절 상반절부터 6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것으로서 신명기 4장 2절, 12장 32절, 계시록 22장 18절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실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 예수님의 말씀이 분명한 답변을 제공한다. 마태복음 16장 6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누룩은 발효시키기 위하여 가루반죽에 첨가하는 어떤 것이다(마 13:33 참조).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분은,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11)고 하셨다. 다음 구절을 읽어볼 때, 주님의 추가된 말씀은 그들로 더 분명히 깨닫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주 예수님 자신이 고대의 근본주의자들이요 현대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누룩에 비유하셨다. 마태복음 15장 6절에서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가 이 모든 구절들을 함께 놓고 볼 때,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전통적인 가르침이요 사람의 계명임을 본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해지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취급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화되고 폐하여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사람의 의견과 관념과 전통을 거절하며, 적어도 그것과 주님의 순수한 말씀을 구별하는 데 신실해야 한다.

 

성경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계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어떤 전통적인 용어나 관념이 아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붙잡기 원한다. 비록 언어가 부족하여 어떤 용어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그것들을 성경 말씀과 동등하게 여기거나, 더 나아가서 그것들로 말씀을 대치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추상적인 사색이나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계시에 관해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에든지 단순하게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다만 지적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을 소홀히하고서 자신의 지적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삼위 일체와 같은」 그러한 논점에 접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생들이지 학생들이 아니다 …. 만일 여기에서 이성이 당신을 자극하여, 「그렇다면 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야기한다면, 이렇게 답변하라.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이 계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겸손하게 「나는 모른다」고 말하라.』 [66]

신성한 계시가 우리를 인도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67] 청교도 저자 허만 윗시우스(Hermann Witsius)의 말과 「입문 성경」의 저자 불링거(E. W. Bullinger)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교리를 논하거나 성경에 없는 어떤 표현들을 사용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 이런 것들은 한 몸의 지체들을 하나 되게 하기는 커녕 나눈다. 이것들은 시기와 다툼의 씨를 제공한다. …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제한시킨다면, 저자나 독자 혹은 그 모두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계시하신 것을 함께 배울 수 있으며,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려고 하거나 어떤 신조들을 논하거나 개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 안에 있는 오직 성경의 증거들만 제공할 것이며 성경 용어만 사용할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이 의미하신 것일지도 모르는 것을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분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믿는 문제이다.』 [68]

그러므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서 삼일 하나님의 계시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듣기로 하자.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

 

성경은 삼일 하나님의 계시에 관하여 두 면―셋이 하나인 면과 하나가 셋인 면―을 보여 준다. 이 두 방면의 예로서 요한복음 1장 1절과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들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말하며, 또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구절에 따르면, 말씀과 하나님은 구별된 두 존재이다. 그러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선포는 말씀과 하나님이 한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들은 둘인가 하나인가? 이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이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또 그것은 「주의 영」을 말한다. 『주는 영이시니』는 주님과 영이 한 분임을 말해 주지만, 「주의 영」이라는 칭호는 주님과 영이 둘임을 가리킨다. 주님과 영이 둘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충분하거나 완벽하게 답변할 수 없다. [69] 그러나 이러한 성경 구절들이 하나님의 양면성을 증거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조화시키거나 체계화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말한 모든 것에 대해 단순하게 「아멘」이라고 말하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명백하게 상충되는 구절들을 조화시키려고 애쓴다면, 자신이 신학적인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유일하신 한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이신 것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계시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구약 성경 모두에 명백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6장 4절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말하며, 이사야 44장 6절은,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사야 44장 8절에서 주님은 질문하신 다음 스스로 답변하신다.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신약에 와서 우리는 고린도 전서 8장 4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하며, 로마서 3장 30절에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말하고,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말하며,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라고 말함을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의 계시에 따라 하나님이 유일한 한 분이심은 지극히 분명하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 그 밖의 것들은 이러한 근본 원칙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신격의 세 위격

 

고벳의 말을 사용한다면, 성경이 유일한 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는 반면, 『성경은 신격 안에 있는 위격의 구별을 명백하게 확증한다.』 [70] 이사야 6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면으로 자신을 「나」라고 하시고, 다른 한면으로는 「우리」라고 하신다. 이것은 「나」가 「우리」이고 「우리」가 「나」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수이신가, 복수이신가? 이것은 비밀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은 또한 자신을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신성한 말씀 안에서 유일하신 한 하나님은 종종 자신을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격의 세 위격―아버지, 아들, 영―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71]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고』(헬라어 참조)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세 위격―아버지, 아들, 영―을 본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영이 셋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은 하나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하나 안의 셋이심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유일한 한 분이시지만, 여전히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세 위격의 문제가 있다.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의 글을 인용해 보자.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삼중적 구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어에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생각하고 표현하기 위한 사람의 노력이며,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용어가 비밀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묘사임을 믿는다.』 [72]

신격의 삼위일체는 구약에 계시되었다. 그것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도 함축되어 있다. 히브리어에서 주어인 「하나님」은 삼중수(三重數)인데, 동사 「창조하다」는 단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 안의 셋이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열조의 하나님이 삼중수(三重數)이심을 계시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서 강조점은 아버지에 있으며, 이삭의 하나님에서 강조점은 아들에 있고, 야곱의 하나님에서 강조점은 영에 있다. [73] 비록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지만, 여전히 삼중이시라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아버지, 아들, 영이시기 때문이다. 신격의 삼위일체는 또한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 있는 삼중 축복과 이사야 6장 3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삼중 찬양에도 암시되어 있다. 하늘에 있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말한 것은 확실히 그들이 찬양하는 하나님이 삼일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6장 3절을 같은 장 8절과 함께 놓고 볼 때, 우리는 스랍들이 찬양한 이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라고 말씀하심을 보는데, 이것은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그분이 삼중 위격을 가지고 계심을 가리킨다. [74]

 

마태복음 28장 19절 뿐 아니라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하나님이 삼일이심을 분명히 계시한다. 베드로 전서 1장 2절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아버지와 영과 아들이라는 세 신성한 위격이 함께 언급되었다. 계시록 1장 4절과 5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유일한 한 분이시고, 이 유일한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이시다.

 

셋 모두가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심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등하게 상호 존재하시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한 위격이 일시적으로 세 번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는 삼위 양식론의 교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의 분명한 구절들로 그 잘못이 쉽게 증명된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 셋이 모두 하나님이심을 계시한다.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것은 에베소서 1장 17절에 있다. 거기서는 영광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아들이 하나님이신 것은 아들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장 8절로 입증된다. 영이 하나님이신 것은 성령께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가 사실상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도행전 5장 3절과 4절로 증명된다. 삼위 양식론자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반면, 성경은 그 셋이 영원하시다고 말한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버지가 영원하신 것을 계시하고,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은 아들이 영원하신 것을 계시하며,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이 영원하심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신격의 세 위격이 영원하지 않다는 어떠한 주장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시에 존재하심

 

삼위 양식론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에서 아들이신 예수께서 침례받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그분 위에 강림하셨고, 아버지는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다. 이 구절들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동시에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삼위 양식론은 거짓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시에 존재하시는 것은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에서도 입증되는데, 거기서 주님은 아들이신 그분이 아버지께 기도하실 것이고, 아버지는 진리의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금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모두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시며, 동시에 존재하신다. 같은 내용이 에베소서 3장 16절과 17절에서도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는데,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으로 우리를 강건케 하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4절부터 6절에서도 「같은 영」, 「같은 주」, 「같은 하나님」을 말하며,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에서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즉 셋 모두가 동시에 우리와 함께하심을 본다. 계시록 1장 4절과 5절에서도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과 영과 그리스도로부터 동시에 임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삼위 양식론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하나님이시고, 모두 영원하시며,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장 2절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영원 과거부터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듯이, 그리스도가 영원 과거에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지 않고 하나님도 아니셨으나 어떤 시점부터 하나님이 되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시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이셨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분의 신격은 영원하며 절대적이시다 [75] 이것은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이 아니라는 아리우스의 가르침과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공존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벨리우스의 가르침이 모두 거짓임을 증명한다.

 

셋 모두가 하나이심

 

모든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이시고, 그분이 영원히 아버지요 아들이요 영이심을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셋 안에 계신 한 분이신 면은 강조하지만, 종종 그분이 하나 안의 셋이신 면은 소홀히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안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으므로 신실하게 믿고 선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입관의 정당성을 발견할 목적으로, 혹은 사람이 만든 전통적인 신학 체계를 보존할 목적으로 정신 분석적인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 안의 셋」이신 분임을 무시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삼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온전한 계시에 충실치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땅 위에서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인 교회를 갖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분배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좌절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에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 안의 셋」이신 분임을 보여 주는 말씀의 구절들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하나인 면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셋인 면을 강조한다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삼신론으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두 면, 즉 셋이 하나인 면과 하나가 셋인 면을 모두 단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의 극단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면을 증명함으로써 삼일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가장 정확히 깨닫게 된다. 우리는 결코 이 비밀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체계화하려고 하지 않은 채 성경이 말하고 증거하는 것을 다만 믿을 수 있다.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화시키거나 인간적인 공식을 통해 그 문구들을 일치시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단순하게 믿는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불리심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한 분이심을 선포한다. 이사야 9장 6절의 순수한 말씀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이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문구를 본다. 그것은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린다는 것과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첫번째 문구를 받아들인다면, 두번째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근본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첫번째 문구는 받아들이지만, 전통적인 용어와 이해 때문에 아들이 영존하는 아버지시라는 두번째 문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단순하게 이 구절을 읽는다면, 이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임을 의미한다고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부당한 어떠한 결론(성부 고난설과 같은)을 이끌어내지 않고, 또 아들과 아버지 간에 있는 구별을 명백히 가리키는 말씀 구절들로 그것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서 이 구절들을 읽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삼일 하나님의 비밀 중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지만 여전히 둘이시라는 것이다. 이사야 9장 6절은 그들이 한 분이심을 계시하며, 어떤 것도 가감하지 않고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인 우리는 다만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을 왜곡하려 하거나 전통적인 사고 체계와 일치하도록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으로 이 구절을 취할 수 없는 자들로 드러날 것이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비밀하게 보이는 그대로, 아들은 아버지시고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성경의 순수한 말씀이 말하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 따라 아들이 아버지이심을 믿는 것은 그들 사이에 구별이 없음을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구별이 있음을 가리키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했다.

 

요한복음도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아들의 손과 아버지의 손인 두 손을 말씀하신 후에, 주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장 8절부터 11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는 아들 안에 거하시고, 아들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임을 본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주님은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비밀을 분명하게 계시하신다. 그분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신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 역사하시는 분은 아버지 자신이며, 사람들이 그분을 알 때 아버지를 아는 것이요, 그분을 볼 때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이는 그분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76] 만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간의 구별을 계시하는 말씀의 부분들과 이사야서와 요한복음의 이러한 구절들을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고 또 그것을 증거할 수 있을 뿐이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영이심

 

성경의 분명한 계시에 의하면,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영이시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20절까지를 상고해보라. 16절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 오실 실제의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가 되시기 위해 그분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17절에서 주님은,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진리의 영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18절에서 그분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러면 17절의 「저」가 18절의 「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주님은, 『그가 올 때 내가 오는 것이다.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더 나아가 17절에서 주님은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 것임을 말씀하시고, 20절에서는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 주님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영이시다. 오직 한 영, 즉 성령이 계시므로 이것은 주님이 성령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로마서 8장 9절부터 12절로 확증된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77]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헬라어 원문)라고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마지막 아담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이고, 생명 주는 영은 확실히 성령이시다. 오직 한 영, 즉 성령만이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에 있는 생명 주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두 생명 주는 영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이다! 그것을 교묘히 다른 뜻으로 설명하려 하지 말고,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다만 믿도록 단순해지자. 한 저자는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해석하면서, 『여기에서 우리는 현저하게 친밀한 방식으로 동일시된 영과 그리스도를 본다 …. 믿음의 견지에서 영과 주님은 동일하시다.』라고 말한다. [78]

 

더 나아가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한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여기서의 주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영은 생명을 주는 성령이시다(고후 3:6). 금세기 초에 유명한 스코틀란드 신학자 제임스 데니(James Denne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주님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영은 바울이 이미 6절에서 말한 영이다. 그것은 성령이신데, 새 언약 아래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자는 그 영을 받는다 ….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둘은 동일시되실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체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에 차별이 없다 ….』 [79]

헬라어로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는 둘―주님과 영―이 한 분이심을 보여 주는 「주 영(Lord Spirit)」이라는 복합적인 칭호가 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아들과 영이 구별됨을 가리키는 구절들과 말씀의 이러한 부분들을 조화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믿고 증거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진리의 양면을 관심을 가지고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영은 다르지만 같으시고, 같지만 다르시다.』 [80]

 

결론을 내리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실제적인 하나에 관해 두 가지를 더 관찰해 보자. 계시록 5장 6절은 사도 요한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보았다고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 어린양은 그리스도이시다. 같은 절에서 요한은 이 어린양이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인 일곱 눈」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이 「일곱 영」은 다름아닌 성령이신데, 그것은 계시록 1장 4절과 5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언급된 것으로 증명된다. 즉 오늘날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곱 눈이시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그의 눈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령도 분리시킬 수 없다. 우리와 우리의 눈이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도 하나이시다. [81]

 

복음서의 네 유사 구절들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고 관원과 종교 지도자들 앞에 끌려가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0:17-21, 막 13:9-11, 눅 12:11-12, 21:12-15). 각 경우에서 주님은,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마 10:1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 주님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13장 11절에서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12장 12절에서, 그분은 성령이 『마땅히 할 말을 …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약속하시고, 누가복음 21장 15절에서는 『내가 구재(口才) … 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구절들을 함께 둘 때, 우리는 삼일 하나님이 주 예수님의 핍박받는 제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물론 세 구별된 위격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 예수님을 위해 증거할 때, 즉각적인 말씀을 주시는 하나 안의 셋이신 삼일 하나님을 체험했다.

 

유일한 삼일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성경에 근거한 삼일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를 고찰한 후에, 편견 없는 생각을 가진 독자라면 삼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가 양면성―그분은 셋이 하나이며 하나가 셋인 분임―을 지녔다는 것에 대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 어떠한 비밀인가!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이 모두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치우친 방식으로 진리의 한 면을 강조하는 이러한 두 이단적 대안들 대신에, 우리는 조화시키거나 체계화하려고 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양면성을 선포한다. 삼일 하나님이 속 존재 안에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분석하고자 하여 그분을 객관적으로 고찰할 때, 사람들은 셋 안의 하나인 면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삼일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주관적으로 체험할 때, 우리는 하나 안의 셋인 면을 누리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한 분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엡 4:6, 골 1:27, 요 14:17). 삼일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고 때로는 필요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신약 성경의 강조점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 안으로 자신을 분배하시려는 갈망에 따라 하나님과 협력하는 최선의 방법도 아니다.

 

우리가 일단 순수한 말씀이 우리의 놀라운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확증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만 신뢰해야 하다. 헨리 바클레이 스웨트(Henry Barclay Swete)가 말한 대로, 『영은 홀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살피신다. 그 영이 침묵하시는 내용들을 사색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헛된 것이다.』 [82] 신학적인 사색을 경시하고, 그의 관심을 체험에 집중하며, 성경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꺼리는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A. D. 315-386)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그분의 본성 또는 본질을 조사하지 말라. 기록된 것은 우리가 말했을 것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모험하지 말자.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83]

순수한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우리를 다만 끝없는 분석과 추론과 논쟁의 덫 안으로 이끌 것이다. 이러한 노정의 결국은 지식나무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인 영적 사망이다. 청교도 저술가인 로버트 레이턴(Robert Leighton, A. D. 1611-1684)은, 『성경 안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우리의 체험을 위해 하나의 사실과 비밀로 간직되어야 한다.』고 증거했다.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의 비밀에 대하여 … 나는 항상 그것을 가장 겸손한 믿음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경배해야지, 결코 호기심으로 탐구하거나 신학자들이 주제넘은 의심으로 뒤얽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는 지식에 대한 오만한 야심으로 타락했고, 단순한 믿음으로 다시 소생되고 본래대로 회복된다. 다른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이 비밀은 실로 우리가 이 죽을 몸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금지된 지식의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 [84]

이와 동일한 겸손한 태도가 필립 쉐프(Philip Schaff)에게서도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니케아 교부들도 삼위일체의 비밀을 철저하게 연구한 척하지는 않았으며, 특별히 이 가장 깊고도 중심 되는 교리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지식은 그 자체가 단편적임을 증명한다는 것을 잘 이해했다. 신성한 것들에 대한 모든 사색은 비밀로 끝난다 …. 그러한 비밀 앞에서 생각하는 사고는 겸손한 경배로 굴복되어야 한다.』 [85]

삼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성경적 계시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인 우리는 그분께 돌이키고, 그분께 열어 드리고,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 누리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유일한 삼일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의도는 우리로 삼위일체의 교리들을 도식화하거나 그것에 관한 끊임없는 논쟁에 휘말리게 하려 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원한 갈망에 따라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길을 예비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의 이단적인 극단이나 경직되고 생명 없는 정통으로 이끌었던 정신적인 분석 방법으로부터, 성경의 순수한 말씀 안에서 삼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계시를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영 안에서 우리의 생명과 누림으로 소유하는 길로 돌이키자. 하나 안의 셋이시고 셋 안의 하나이신 놀라운 삼일 하나님이 지금과 영원토록 우리의 분깃과 누림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 바란다. 아멘.

 

1976. 11. 16.
위트니스 리의 동역자
론 캔거스(Ron Kangas)

 

참조문헌들

  1. HenryChadwick, The Early Church (GrandRapids: Wm. B. Eerdmans Pub. Co., 1968), p. 87.

  2. J. F. Bethune-Baker, An Introduction to the Early History ofChristian Doctrine (London: Methuen & Co., Ltd., 1929), p. 97.

  3. Frederick F. Bruce, The Spreading Flame (Grand Rapids: Wm.B. Eerdmans Pub. Co., 1953), p. 256.

  4. Ibid., p. 255.

  5.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Rapids: Wm. B. Eerdmans Pub. Co., 1950), vol. 2, p. 576.

  6. R. S. Franks, The Doctrine of the Trinity (London:Gerald Duckworth and Co., Ltd., 1953), p. 78.

  7. Bethune-Baker, op. cit., p. 102.

  8. Schaff, op. cit., vol. 2, p. 577.

  9. Bruce, op. cit., p. 256.

  10. Schaff, op. cit., vol. 2, p. 577.

  11. Ibid., p. 578.

  12.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9), p. 69.

  13.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New York:Harper & Row, 1960), p. 120.

  14. Bethune-Baker,op. cit., p. 104.

  15. Schaff, op. cit., vol. 2, p. 578.

  16. Ibid.

  17. Arthur C. McGiffert,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NewYork: Charles Scribner’s & Sons, 1931), p. 237.

  18. Schaff, op. cit., vol. 2, p. 589 andBethune-Baker, op. cit., p. 110.

  19. Schaff, op. cit., vol. 2, p. 581.

  20. Walker, op. cit., p. 69.

  21. McGiffert, op. cit., p. 238.

  22. Walker, op. cit., pp. 69-70.

  23. Ibid. and McGiffert, op. cit., p. 238.

  24. Walker,.op. cit., Pp. 69-70; McGiffert, op. cit., p. 238; and Bethune-Baker, op. cit., p. 105.

  25. Schaff, op. cit., vol. 2, p. 582.

  26. Ibid.

  27. Bethune-Baker, op. cit., p. 105.

  28. Schaff, op.cit., vol. 2, p. 583.

  29. Bethune-Baker, op. cit., p. 106.

  30. William Henry Griffith Thomas, The Principles of Theology (New York:Longmans, Green, & Co., 1930), p. 31.

  31. H. E. W. Turner, “Tritheism,” in AlanRichardson, editor, A Dictionary ofChristian Theology (Philadelphia:   TheWestminster Press, 1969), p. 351.

  32. Bill Freeman, The Testimony Of Church History Regarding the Mystery of the Triune God(Anaheim: The Stream Publishers, 1976), p. 19.

  33. Franks, op.cit., p. 119.

  34. Ibid.

  35. Freeman, op.cit., pp. 29-30.

  36. H. B.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Ancient Church (Mac Millan, 1912), pp.284-285, in Freeman, p. 30.

  37. Ibid., p. 13.

  38. Schaff, op.cit., vol. 3, p. 674.

  39. Freeman, op.cit., p. 25.

  40. Ibid., p. 13.

  41. Ibid., p. 14; see Schaff, op. cit., vol. 3, p. 651.

  42. Cited in Freeman, op. cit., pp. 14-15.

  43. George Bull,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vol. I, p. 203.

  44. TheWorks of Dionysius. The Ante-Nicene Fathers (Grand Rapids: Wm.. B. EerdmansPub. Co., 1971), vol. VI, pp. 92-94.

  45. Bull, op.cit., pp. 302-322.

  46. Edmund J. Fortman, The Triune God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2), pp.140-143.

  47. Adolf Harnack, History of Dogma (Peter Smith Publishers, 1976), pp. 129-131.

  48. Swete, op.cit., pp. 42-43.

  49. Bull, op.cit., vol. 11, p. 438.

  50. Ibid.,vol. 1, p. 56.

  51. Socrates’Church History, Nicene and Post Nicene Fathers, 2nd series, vol. II, p. 27.

  52. H. E. W. Turner, “Coinherence,” op. cit., p. 67.

  53. Cited in Freeman, op. cit., p. 17.

  54. Augustus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Phila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

  55. Ibid.

  56. Bull, op.cit., Book IV, chapter 14, sections 13 and 14, in Freeman, p. 18.

  57. Freeman, op.cit., p. 18.

  58. Robert Govett, “The Twofoldness of DivineTruth” (Harrisburg: Christian Publications), p. 3.

  59. Ibid.

  60. Ibid., p. 4.

  61. Ibid., p. 6.

  62. Ibid.

  63. Ibid., p. 5.

  64. Ibid., p. 11.

  65. Ibid., p. 12.

  66. Martin Luther, What Luther Says, An Anthology, vol. III, pp. 1387-1388, inFreeman, op. cit., p. 30.

  67. Hermann Witsius, The Apostles Creed, vol. I, p. 143, in Freeman, pp. 32-33.

  68. E. W. Bullinger, Selected Writings, pp. 44-45, in Freeman, pp. 36-37.

  69. 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 the Father, the Son, and the Spirit(Taipei: The Gospel Book Room), p. 4.

  70. Govett, op.cit., p. 12.

  71. Lee, op.cit., p. 6.

  72. William Henry Griffith Thomas, The Holy Spirit of God (Grand Rapids:Wm. B. Eerdmans Pub. Co.), p. 138.

  73. Lee, op.cit., p. 11.

  74. Ibid., p. 12.

  75. See note on John 1:2 in The Gospel of John, Recovery Version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75), p. 11.

  76. Lee, op.cit., p. 19.

  77. Ibid., p. 22.

  78. Neil Q. Hamilton, The Holy Spirit and Eschatology in Paul (Edinburgh: Oliver &Boyd, 1957), p. 15.

  79. James Denney,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p. 134.

  80. Thomas, op.cit., p. 144.

  81. 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Message Four (Anaheim: Living StreamMinistry, 1976), pp. 41-42.

  82. H. B.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pp. 301-302, in Freeman, op.cit., p. 35.

  83. Cyril of J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XVI, 4, PostNicene Fathers, 2nd series, vol. VII, p. 116, in Freeman, pp. 20-21.

  84. Robert Leighten, Lectures and Addresses, pp. 126-127, in Freeman, p. 6.

  85. Schaff, op.cit., vol. 3,.p.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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