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글을 모아 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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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하나에 대한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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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하나에 대한 공과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약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역을 보기 위하여 얼마의 시간을 들여 신약의 사역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신약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신약의 사역이 침례자 요한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사역을 분리된 개별적인 사역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침례자 요한의 사역은 신약의 사역의 일부였다. 그것은 신약의 사역의 봉사였으며 심지어 그 사역의 첫번째 봉사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중점을 붙잡기 위하여 이 사역을 특별한 방식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마태복음 11장에서 주님의 선주자의 사역에 대한 그분의 평가에 이를 때, 우리는 신약의 사역의 그런 첫번째 봉사, 그 첫번째 부분까지도 유일한 사역이었음을 볼 수 있다. 요한의 회개의 사역, 회개의 방식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획을 긋는 아주 두드러진 사역이었다. 그 사역은 하나님의 경륜의 경계표였다. 그렇지만 요한의 사역이 분리되고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사역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고려를 했다면 여러분은 복음서들에서 말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의 사역과의 경쟁

 

마태복음 9장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주 예수님께 질문하러 왔는데 그들은 그 질문 속에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을 포함시켰다(14절). 누가복음 5장에 따르면 그 질문을 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으며(33절), 마가복음 2장에 따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주님께 질문했던 것 같다(18절). 그때 이전에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파(派)였으며 또 다른 한 파는 사두개인들이라 불리우는 이단적인 파가 있었다. 그러나 마태복음 9장의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이미 또 하나의 파가 되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요한이 전파하기 시작한 후 아마 이삼 년이 못되어 그의 봉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주님의 사역과 경쟁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요한의 봉사가 분리된 사역이 되게 할 의도가 없으셨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요한의 봉사는 다만 신약의 사역의 시작으로 주님의 사역을 개시하는 천거하는 봉사였다. 요한은 그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했지만(요 1:23, 3:28-30) 그의 제자들은 잘못 이해했다. 그들은 그들의 선생인 침례자 요한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유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를 따랐으며, 또한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의도 없이 그들은 주님의 사역과 경쟁이 되었다. 결국 그러한 전파는 주님의 사역을 대치하는 무엇인가가 되었다.

 

흔히 우리는 침례자 요한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한다. 먼저 헤롯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리고는 정욕에 탐닉되어 요한의 목을 베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이 주님의 주권이었으며 심지어 그 목이 베어진 것까지도 주님의 주권이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물론 나의 말은 하나님께서 요한이 갇힌 것, 더욱이 목이 베인 것을 보고 기뻐하셨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믿어야 하며, 왜 하나님께서 요한이 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하게 하셨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한의 투옥과 사형 집행은 다른 또 하나의 사역에 대한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발생되었다. 요한의 사역과 그의 제자들은 어떤 문제를 일으켰다. 먼저 하나님은 헤롯을 통해 요한의 전파를 금지시키셨다. 그 후 감옥에서까지도 요한은 그의 제자들이 어떤 질문들을 주 예수께 가져 가게 했다. 그런 직후 요한은 순교를 당했다. 하나님은 그때 요한에게 있었던 것을 끝내는 데 주권자이셨다. 물론 그러한 종국은 좋거나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침례자 요한의 사례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사역, 참된 봉사를 받을 수 있으나 우리는 그 봉사가 끝나는 것을 기꺼이 보려 하지 않으려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핵심적인 요점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나를 사용하실 수도 있다. 그분이 그분의 목적을 위해 어떤 봉사에 우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분께 쓰임받은 후 아마도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봉사가 끝나는 것을 기꺼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원칙이 모세의 사례에서 적용될 수 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대한 이야기는 왜 모세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30-35절). 그러나 고린도 후서 3장 13절의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모세는 백성이 그의 사역의 종국을 보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모세는 백성이 그의 사역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사례에 있어서까지도 그의 사역의 종국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봉사에 있어서 주님께 쓰임받는 것은 기뻐하지만 우리 중 어느 한 사람도 그 봉사가 끝나는 것을 기꺼이 보려 하지는 않는다.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요한이 감옥에 갇히는 것과 심지어 그의 생명이 끝나는 것까지도 허락하셔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가 있어서였다. 우리는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더라면 분명히 요한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을 것이며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켰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과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역, 어떤 봉사도 그분의 신약의 사역과 경쟁 관계를 갖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침례자 요한의 사례에서 발생된 모든 상황은 주권적으로 일소됐다. 주님의 사역의 때 외에는 경쟁 관계는 없었지만 반대는 있었다. 반대는 비교적 다루기가 쉽지만 경쟁을 다루기란 아주 어렵다.

 

하나님은 비교적 오랫동안, 적어도 예루살렘이 훼파된 때인 주후 70년까지는 바리세인들의 반대를 참으셨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 예언하기까지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분을 반대하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집이 되었다고 지적하셨다(마 24:1-2, 23:38). 주님은 수년 동안 반대를 참으셨지만 경쟁을 참지는 않으셨다. 즉시 요한은 투옥되었고 그의 생명은 끝났다. 우리는 이 사례로부터 공과를 배울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주님의 주권에 속한 어떤 것이다.


베드로와 함께한 신약의 사역의 연장

 

침례자 요한 다음에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약의 사역을 계속하셨으며, 그분은 사역의 그 부분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그리고는 오순절이 임했다. 그 날 베드로는 강했으며 모든 면에서 순수했다. 사도행전 2장부터 5장까지에서 우리는 한 젊은이를 볼 수 있는데, 그는 아마도 아직 삼십 대였을 것이며, 모든 면에서 즉 의도와 갈망과 동기와 마음과 영과 견해에 있어서 깨끗하고 아주 순수했을 것이다. 그는 주님의 사역 이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생명까지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때 그에게는 어떤 면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베드로와 구약의 길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의 태도는 하나님께 문제를 일으켰으며, 그것은 그분을 어렵게 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은 천국의 열쇠들을 베드로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열쇠들이라는 단어는 복수이기 때문에 적어도 두 개의 열쇠는 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두 열쇠들 중 하나를 사용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신약 왕국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 이방인들을 위한 문을 열기 위해 두번째 열쇠를 사용하려고 하셨을 때, 이것은 베드로의 배경과 전통에 모순되었다. 오순절날 필요로 했던 것은 단지 성령이 베드로 위에 강림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을 위하여 두 가지 이상을 사용하셨는데 하나의 이상은 베드로에게, 다른 하나의 이상은 고넬료에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상과 꿈이라는 구약의 방법을 사용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께 어려움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신약의 길은 안의 기름부음을 따르는 것이며, 내주하는 영을 따르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 안에 내적으로 거주하는 그 영을 가졌지만 그의 배경과 전통 때문에 내주하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그 영의 외적인 쏟아 부어줌을 가졌고 또한 그 영의 내적인 내주하심을 가졌지만 그는 그런 내주하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핵심 요점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사람이 필요하다. 오순절날과 사도행전 2장부터 5장까지에서 베드로는 얼마나 깨끗했던가! 그를 가리는 수건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는 수정처럼 절대적으로 순수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사도행전 10장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 그를 가리는 수건이 있었다. 그 휘장은 그를 가리며 그로 신약의 길에 있지 못하도록 하는 전통과 유대교적인 배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이기셨고 정복하셨고, 심지어 그에게 고넬료의 집에 갈 확신까지 주어 이방인이 들어오기 위한 문을 여는 두번째 열쇠를 사용하게 하셨다.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사역의 종결

 

우리는 사도행전을 대할 때 충분히 숙고해 가며 읽고 또 읽을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두번째 열쇠를 사용한 후에 사도행전 12장은 그가 투옥되었다가 옥에서 풀려난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2장 다음인 13장에는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13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에 대한 것이며, 이제 사도행전에는 더이상 베드로에 대한 장이 없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약의 사역에서 끝마쳐졌다. 베드로는 좋았는데 나는 그가 그때 후에 두 서신을 기록했으리라 믿는다(베드로 전서의 기록 시기가 사도행전 13장의 때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실치 않다). 베드로가 그 두 서신들을 쓴 것은 아주 좋았다. 특히 두번째 서신에서 그는 아주 참되고 담대했는데, 이는 그가 그의 면전에서 그를 책망한 사람을 추천했기 때문이다(벧후 3:15-16).

 

우리는 사도행전 12장 이후로부터 15장 이전까지에서 베드로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에서 베드로는 더이상 사도들 가운데 첫번째가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예루살렘에 있는 장로들 가운데 첫번째도 아니었다. 그때 예루살렘의 분위기와 조류 및 영향력은 베드로를 위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야고보를 위했는데 그는 대부분은 신약이고 약간은 구약의 부분을 겸한 다소 「준(準) 신약의 사도」로 여겨질 수 있다.


혼합의 요소들

 

회색을 띠고 있는 어떤 것은 흰색을 띠고 있는 어떤 것으로든지 검은색을 띠고 있는 어떤 것으로든지 섞어질 수 있다. 야고보는 회색을 띤 어떤 것, 즉 두 편 어디에도 맞출 수 있는 어떤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베드로는 순백색에 속한 어떤 것에 비유되어야 하겠지만 그는 감히 그 자신의 어떠함 대로 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와 영향력과 조류하에서 베드로의 어떠함은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동시에 두 편에 맞출 수 있었기 때문에 환영을 받았다.

 

우리가 야고보서와 마가복음 라이프 스타디를 볼 때 우리는 사도행전 15장의 상황까지도 완전히 순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사도행전 21장에서 일어났던 것으로부터 사도행전 15장에서 내려진 결정을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성령은... 가한 줄 알았다』하더라도(28절) 그 결정은 주로 야고보의 영향력 아래서 행해진 것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순수하게 따른 것이 아니었다. 21장에서 발생한 것은 15장에서 내려진 결정으로부터 나왔다. 달리 말해, 우리는 15장에서의 약함이 21장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는 율법에 열심인 수만의 유대 믿는 이들이 있음을 담대히 선포했다(20절). 야고보는 바울에게 같은 길을 취하라고 충고할 만큼 담대했다.


바울 사역의 전환

 

우리는 바울이 사도행전 21장에서 약하여져 야고보의 충고를 따랐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될 만큼 그의 말을 지키는 데 약하지 않고 아주 강했다고 논박할지도 모른다(고전 9:20). 그들은 바울을 변호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에게 그러한 변명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울이 참여하기로 동의했던 서원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끝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바울을 변호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안다. 바울은 가난한 서원자들을 위해 비용을 지불했으며 단 하루만 있으면 그들은 서원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온 예루살렘에 소요가 일어났으며 바울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바울의 사역까지도 거기에서 어떤 연루됨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점에서 전환되었다. 우리는 자신을 이런 종류의 일들에 연루시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약화시키거나 흐리는 것은 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바울로 말한다면 그는 순수했기에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서신서들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쓴 에베소서, 빌립보서 및 다른 서신서들과 같은 서신들을 쓴 것은 아주 훌륭했다. 그렇지만 이들 서신서들을 쓴 것이 사도행전 21장 이후의 바울 사역의 전부였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들이다.


바나바의 사례

 

우리는 바나바의 사례에 대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신실했으며 바울을 데려온 형제였다(행 9:27). 그는 바울의 동료 사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의견을 가졌다. 우리에게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히 바나바는 유대교와 관련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의견 때문에 그는 소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길을 취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에 대한 기록의 종결이었다. 성경에서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이 시점 후의 바나바에 대한 어떤 기록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를 얼마나 깨이게 하는 말인지!


아볼로의 사역의 문제

 

그리고 사도행전 18장 끝에서 아볼로가 들어왔다. 그는 베드로의 근원으로부터 오지도 않았고 바울의 근원으로부터 오지도 않았다. 그는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왔다. 우리는 아볼로가 어떤 근원으로부터 왔는지 추적해 볼 수 없지만, 그는 18장에서 등장하여 성경을 가르쳤는데 요한의 침례만을 알 뿐이었다(행 18:24-28). 아볼로는 바울의 사역에 동화되어야 했는데 그럴 수록 더 좋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바울과 아주 많이 하나였다고는 할지라도 그의 사례는 문제가 되었다.

 

고린도에서 아볼로는 문제가 되었고, 베드로도 문제가 되었다. 나는 베드로 자신이 일찍이 고린도에 갔었는지 가지 않았는지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베드로 때문이 아니라 단지 베드로의 사역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문제가 되었다. 「나는 베드로에게」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으므로(고전 1:12) 베드로의 사역을 따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아볼로가 어려움을 일으키려는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는 믿지 않으나 어려움이 발생한 것은 아볼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역과 그것을 따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영 안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베드로를 정죄하지도 않았고 아볼로를 정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들을 소극적으로 말할 때 자신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고전 1:12).

 

우리는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을 직시하기 위해 이 문제를 주의 깊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에서 베드로의 사역과 그것을 따르는 것과 아볼로의 사역과 그것을 따르는 것은 거의 분열의 원인이 되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가령 내가 아볼로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에 당신은 주님이 나를 더 많이 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일 내가 아볼로의 사역과 같은 사역을 가졌다면 당신은 주님께 대한 나의 유용함이 항상 증가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울의 사역은 결코 그렇게 사용되지 않았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약의 사역 안에 있는 주된 항목이었다. 그러한 것은 아볼로의 사역에서와 같은 경우가 아니었다.

 

어떻든 고린도에는 베드로와 아볼로와 바울의 이런 세 가지 봉사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아볼로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바울과 최대한 하나 되어 처신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고전 16:12을 보라). 그는 분열적이지 않았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신약의 사역과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에서 아볼로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 있는 바울이 백 퍼센트 하나였다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개인적인 간증

 

워치만 니 형제님과 사역할 때에 내가 체험한 무엇인가를 간증하겠다. 나는 십 팔 년 이상을 니 형제님과 동역했다. 그 당시 거기에 있으면서 그 상황을 지켜 본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몇 명이 있다. 니 형제님의 사역이 시작된 이래로 유명한 설교자들이 된 많은 뛰어난 그리스도인들이 한동안 니 형제님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첫번째 만찬 집회에는 니 형제님과 또 다른 형제와 그의 아내가 함께 한 자리에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이 회복 안에서 만찬 집회를 시작했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 형제는 그 당시 중국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 안에서 니 형제님과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니 형제님과 문제가 생겼다.

 

그 이후로 뛰어난 한 형제가 들어왔고 나중에 또 다른 형제가 중국에 있는 회복 안에 들어왔다. 거의 그들 모두가 니 형제님과 문제가 생겼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동일한 태도를 취했었더라면 분명히 나도 형제님과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내가 니 형제님의 사역에 있어서 그와 천 퍼센트 하나였음을 인정했는데, 이는 나의 입지와 태도와 영이 전적으로 그와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니 형제님과 문제가 있었다고 말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러한 비방을 할 근거는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과 내가 하나인지 아닌지를 물을 수 있다면 그 질문은 여러분과 내가 전적으로 하나가 아니라는 암시이다. 만일 비가 올 때 지붕을 통해 물이 샐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붕에 어디엔가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 틈이 없다면 물이 샐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완전 백 퍼센트 나와 하나라면 우리는 비가 샐 틈이 없는 지붕과 같다. 비가 올 때 그 빗물은 지붕에 틈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해 주고 시험해 준다. 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거기 틈이 있다는 증거이다.


고린도에 있는 문제와 오늘날의 위험

 

우리는 다만 흑백 문자로만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사실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이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바울에게」라고 말했던 고린도의 문제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일 베드로가 바울과 절대적으로 하나인 분위기와 색깔과 맛으로 처신하고 행하고 사역했었더라면, 고린도에서 아무도 그가 베드로에게 속했다 하고 바울에게는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아볼로가 절대적으로 바울과 일치되는 맛과 색깔과 분위기로 사역하고 전파하고 움직이고 살았었더라면, 아무도 그가 아볼로에게 속하고 바울에게는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세 편이 있었다. 하나는 베드로에게 속했고, 하나는 아볼로에게 속했으며, 다른 하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여러분이 그것을 세 사역들, 세 인도자들, 세 가지 어려움들, 혹은 세 가지 다른 가르침들이라 부르든, 셋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가 샐 틈을 마련해 주었고 비는 새어 들어왔다. 어떤 이들은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바울과 상관없다.』라고 말했으며, 다른 어떤 이들은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나 바울과 상관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여전히 『나는 바울을 위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는 소위 사역자들 간의 서로 다른 맛과 서로 다른 색깔과 서로 다른 분위기로 인해 성도들 가운데 분쟁이 있었다. 만일 베드로와 아볼로와 바울이 하나의 분위기와 하나의 색깔과 하나의 맛으로 사역하고 움직이고 행했더라면, 사람들이 이 사람에게 속했다 혹은 저 사람에게 속했다고 말하게 하는 어떤 것이 애초 고린도에서 일어날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다만 그 셋 가운데의 분위기와 맛과 색깔과 영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이런 성경의 빛에 따라서 우리의 현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만일 니 형제님이 우리 가운데서 사역하고 계셨다면 내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 많이 말할 자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그는 나 대신 표적이 될 것이다. 지금은 내가 표적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자기 변명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므로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주의 회복 안에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주의 회복의 첫번째 특징은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를 잃는다면 우리는 끝난다. 우리가 하나를 잃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주의 회복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를 손상시키는 다른 가르침들과 다른 의견들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주님의 긍휼을 인해 감사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주의 회복이 시작된 이래로 나는 다른 어떤 문제도 이 한 가지 문제만을 그렇게 주의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23년 간에 걸쳐 교리들에 대해서나 의견들에 대해서 어떤 형제들과도 결코 논쟁하지 않기를 스스로 훈련한 것이 나의 실행이었다. 육 년 전 몇 가지 아주 심각한 문제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났다. 그 기간 동안 여러분은 아마도 이 문제들에 대해 내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교리에 대해 토론하는 데 열려 있다는 어떤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그런 의견과 교리에 동의했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나는 우리가 전진하면 할수록 더욱더 의견과 다른 가르침이 들어올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견들이 선할 수 있고 가르침들이 성경적일 수 있으나 그것들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조만간 이런 문제들은 감취어진 분열을 야기시킬 것이다.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회복에 흐르는 축복은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시 133편). 우리가 하나를 잃는다면 우리는 축복을 잃을 것이다.

 

나는 비록 우리가 주의 회복 안에서 함께 움직이고, 함께 사역하고, 동역하고, 모두 함께 있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맛과 서로 다른 분위기와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볼로의 사례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볼로는 바울과 분쟁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역은 바울의 사역과 다른 색깔과 맛을 지녔다.

 

나는 우리 가운데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가 이미 발생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폭풍우도 오지 않았지만 일기 예보가 있다. 오늘날 주의 회복의 기후에는 만일 우리가 주의 깊음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어떤 폭풍들이 올 수도 있다는 몇 가지 표징들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여러분이 우리 앞에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실제적인 상황을 제시할 부담이 있다. 비록 우리가 아직 어떤 폭풍 속에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나는 우리가 부주의한다면 이러한 기후 속에 폭풍우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한 일기 예보를 제시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육 년 전 우리에게 불어닥친 폭풍우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가운데 그릇된 의도를 가진 어떤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도가 그릇되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들이 틀릴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한 가지 관심 -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경륜

 

내가 니 형제님과 함께 있었을 때 나는 원수가 어려움을 야기시킬 수 있는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행동하거나, 행하거나, 일하거나, 전파하거나, 가르치거나, 말하지 않았다. 부디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모든 가르침에서 내가 니 형제님과 백 퍼센트 하나였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 분명해지기 바란다. 예를 들어,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에 대한 내 해석은 오늘날에도 니 형제님의 해석과는 다르다. 나는 니 형제님이 펨버, 고벳, 팬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들은 다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에 근거하여 두 증인을 에녹과 엘리야로 해석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았던 유일한 두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계시록 11장에서 죽게 될 두 증인이 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비록 내가 결코 어떤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해석을 들은 첫날부터 나는 그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먼저, 하나님은 구약에서 모세로 대표된 율법과 엘리야로 대표된 선지자들, 즉 율법과 선지자들로 구성된 간증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유대교의 방식과 랍비의 방식에 따라서도 율법과 선지자들로 불리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주 예수 자신에 의해서도 그렇게 불리워졌다. 계시록 11장에서 두 증인이 주님 앞에 서 있는데, 그들은 간증을 짊어지고 있다. 이 우주 안에서 우리는 변형의 산 위에서 주님 앞에 서 있는 이 증인들-모세와 엘리야-을 본다.

 

또한 만일 우리가 히브리서 9장 27절에 근거하여 사람이 단 한 번 죽는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나사로의 사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번 죽었는데 부활했다. 그리고 그는 두번째 죽었다.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의 사례도 있다(눅 7:11-15). 죽은 그 아들은 관 속에 넣어져 들려 나오고 있었지만 주 예수께서 오셔서 그를 일으키셨다(눅 7:11-15). 그는 부활했지만 그는 분명히 다시 죽었다. 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 번 죽음을 맛보았다(왕상 17:17, 22, 왕하 4:32-35, 13:21, 마 9:24-25, 11:5, 행 9:40, 20:10).

 

물론 여러분은 내가 니 형제님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내 가르침의 모든 요점이 반드시 니 형제님과 일치한 것만은 아님을 암시한 바 있다. 여러분은 내가 소위 논쟁하는 방식이 논리적이며 성경적이라는 데 동의해야 할 것이다. 두 증인에 대한 주된 요점들은 요한 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제 27장(p.p. 326-332)에서 다루어졌다. 그런 요점은 매우 기본적이다. 사실은 사실이며, 진리는 진리이다. 그러나 나는 두 증인이 엘리야와 모세인지, 아니면 엘리야와 에녹인지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는다. 나의 한 가지 관심은 하나님의 경륜, 곧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것이다. 결코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앞선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그를 따르는 데 내 자신을 백 퍼센트 그의 발 밑에 두었다. 사실상 내가 그를 따르는 것은 주님의 경륜을 따르는 것이었다.


사역을 손상시키지 않음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내 요점은 우리가 교리를 위해 여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오늘날 이러한 교리적인 요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워치만 니 형제님의 사역에 전혀 손상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가 생존해 있는 동안이나 내가 그와 동역하고 있을 때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했었더라면 즉시 분열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니 형제님이 전파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전파하지 않았으며, 그가 다루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르치고 전한 모든 것이 니 형제님의 것이었다고 말하는 데에 조금도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이 땅 위에 내가 따를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영광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워치만 니 형제님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단점과 약함을 안다고 한다면 내가 그들 중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주님이 그분의 목적을 최대한 성취하시기 위해 그를 쓰신 것을 귀하게 여긴다. 나는 오늘날의 종교적인 실행들에 따른 경박한 일을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을 위해 내 자신과 나의 장래를 헌신했다. 나는 니 형제님 안에서 이 목적을 보았다. 나는 이것을 위해 존재하며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목적을 손상시키는 것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미리암과 아론의 배역에 관한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민 12:1-15). 분명히 그들은 모세의 약점을 보았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미리암이 배역했을 때 그녀는 문둥병자가 되었다. 그녀는 상을 얻지 못했으며 도리어 문둥병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모세에게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요점은 우리 모두가 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의(care)를 주는 것은 내 실행이며, 나는 주님의 손 안에서 쓰임받는 여러분의 존재를 손상시키기 위해 어떤 것을 행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보다 더 나는 여러분이 온전케 되어 주님의 손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우려는데 주의를 기울여 왔다. 소극적인 방식으로 주의 회복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말을 한다거나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나는 주의 회복을 손상시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라도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항상 인식해 왔다. 나는 이십 이 년 이상을 한 형제와 함께 지내 왔다. 나는 그에게 매우 솔직하며 우리는 아주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형제에게까지도 어떤 형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그렇게 자유가 많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 이것은 내가 다만 대리석 조각처럼 눈이 멀다거나 둔감하다거나 느낌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만일 여러분에게 느낌이 있다면 적어도 나 또한 느낌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말하지 않았으며, 어떤 것도 화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위해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십 오 년 전 나는 자신을 주님께 드렸고, 이 나라에 와서 나는 모든 역경들을 통과하며 전적으로 주님의 회복을 위해 지금까지 주야로 수고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손 안에 완전하고 온전케 되어 그분께 쓰임받으며 그분의 회복이 번창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을 보기 갈망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를 반복하거나 종교적인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의 회복을 위해 여기에 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위협하기 위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아신다. 나는 사실과 진실을 말할 부담이 있으며, 실제적인 위험이 있는 여러분의 실제적인 상황을 열어 주고자 하는 부담이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기에 있으며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라고 말했던 것처럼 주님의 경륜에 대해 그분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펴 본 네 가지 사례들로부터 여러분은 주님의 움직이심에 어려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살펴 본 네 사람들-침례자 요한, 바나바, 베드로, 아볼로-중 어느 누구도 소극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며 피상적인 어떤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견고하고, 옳고, 선하며, 도덕적이고, 영적인 분량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견고하고 분량이 있었지만 어떤 중요한 요점들에서 그들은 주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의 움직이심에 있어서 실제적인 상황을 충분히 돌봄으로 그들의 사역을 수행하지 않았다.

 

만일 아볼로가 모든 상황을 철저히 고려했었더라면, 분명히 그는 바울과 동일해야 하며 같은 분위기와 색과 맛으로 바울과 하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은 바울을 극도로 난처하게 했으며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해야 했다(고전 1:13, 9:1). 어려움을 일으키고 바울을 난처하게 했던 사람들은 반대자들과 비평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아볼로와 베드로와 같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엄중한 문제들을 보는 이런 기회를 가진 것이 얼마나 귀한지. 우리 모두는 우리가 있는 상태의 어떠함을 알고 실제적인 상황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갖기 위해 수정같이 맑은 관점으로 청명한 하늘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위트니스 리
[장로훈련(Ⅰ) 신약의 사역, "사역의 하나에 대한 공과",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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