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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적인 신자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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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적인 신자의 경험

 

혼적인 신자의 생활

 

혼은 어쩔 수 없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 혼은 한마디로 "이런 것"이라고 못박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 독특한 개성 - 영원까지 연장될 특이성 - 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오는 영원한 세계에서의 우리의 삶은 무척 단조로운 것이 될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의 혼에 이와같은 다양한 차이가 있다면 혼적인 신자들의 생활도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여기 제시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술(記述)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중에 두드러진 양상을 제시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기들의 경험을 견주어 보도록 했다.

 

혼적인 신자들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호기심이 많다. 예를 들어 그저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이들은 철저히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여 호기심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의복이나, 말이나 행동에 자기들의 다른 점과 우월감을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서라도 자기들의 하는 일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물론 이들에겐 구원받기 전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도 이 타고난 성향을 정복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다.

 

설명과 이해보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추구하는 신령한 그리스도인과는 달리 이런 신자들은 마음의 이해를 추구한다. 이들은 변론하고 따지기를 좋아한다. 이들에겐 이상과 합하는 생활경험을 못한 것이 걱정이 아니라 이들을 번뇌케 하는 것은 영적 경험의 결핍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아는 것이 체험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것은 엄청난 기만이다.

 

얼핏 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혼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의롭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기의 사소한 의견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물론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성경의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나 부차적인 점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양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믿는 바"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것"은 전혀 하나님께 기쁨을 돌리지 못한다. 우리는 사소한 차이점을 젖혀두고 공통된 목표의 달성을 추구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혼적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악령의 공격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그의 생각은 혼동되고 흐려지고 때로는 추잡스럽게 된다. 대화를 하는데 이들은 종종 묻지 않은 것을 대답한다! 마음이 거세어 진다! 이들은 마치 자기들의 생각이 얼마나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가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토의 제목을 계속 바꾸어 댄다.

 

심지어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들의 마음은 멀리 방황을 하게 된다. 비록 이들은 보통 사전에 이에 대하여 한 가지도 깊이 생각하는 일이 없이 행동하지만, 자기들이 항상 원칙대로 행동한다는 것과 행동 하나하나를 얼마나 신중히 생각하는가를 남에게 말하는 데는 자신이 있다. 이 때 이들은 자기의 주장을 뒷바침할 만한 생활상의 실례까지 인용을 해가면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상스럽게도 이들은 두 세번 생각한 후에, 아니 열번을 심사숙고한 후에 행동에 옮길 때도 있다. 이들의 행동이야 말로 도저히 예측하기가 힘든 것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감동에 좌우된다. 한번 흥분하여 즐거워 하다가도 다음에는 낙담하며 슬퍼한다. 행복한 순간에는 세계가 너무 좁다 싶어 날개를 달고 하늘에 오르지만, 슬픈 순간에는 세상은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모양이다. 차라리 나를 없이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마치 마음에 불이라도 붙고 갑자기 보석이라도 발견된 듯이 마음이 뛰고 흥분할 때가 있다. 그런가하면, 어떤 때는 마음이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져 낙담과 실의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들의 기쁨과 이들의 슬픔은 주로 기분에 따라 좌우된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이들의 생활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혼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성향은 이들이 지나치게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들은 그들 주위의 움직임을 모두 자기 자신을 노리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소홀히 취급된다 싶을 때는 화를 낸다. 그들에 대하여 주위의 태도가 변한다 싶을 때는 마음이 상한다. 이들은 쉽게 사람들과 친해진다. 이들은 이런 친근감을 장기로 하여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서는 못 살것"같은 감정을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에 조그마한 변화만 있어도 이들의 혼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온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 사람들은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기만한다.

 

하나님께서는 혼적인 그리스도인이 영계에 조그마한 진보라도 이룩하기만 하면 스스로 특별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으로 삼는 혼적인 신자의 약점을 알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마치 주님을 직접 보고 만지기라도 한 것과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 뿐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즐길 수 있도록 특별한 은사와 초자연적인 경험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특별한 은혜를 사용하여 신자들을 낮추고 그들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가까이 하도록 하신다.

 

불행히도 신자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혼자 "누가 이런 경험을 가진 나 자신 보다 더 신령할 수 있겠는가?"라고 상상해 본다. 더군다나 혼적인 신자들은 감상적인 경험을 허다하게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이 육신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뿐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남보다 더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기분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종종 외적인 문제로 마음이 불안하게 된다. 주위의 세상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이 툭하면 속사람을 침범하여 영의 평안을 뒤흔들어 놓는다. 혼적인 신자를 (기쁨에 넘친) 즐거운 자리에 넣어보라! 그는 기뻐할 것이다. 슬픔에 넘친 상황속에 넣어 보라! 그는 슬퍼할 것이다. 그에게는 창조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혼적인 사람은 자기가 접하는 사람들이나 환경에 꼭 어울리는 안색을 한다(얼굴 모습을 나타낸다).

 

혼적인 사람들은 보통 감각에 따라 좌우되기가 쉽다. 주님께서 이들이 신령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주님의 임재를 실감하게 하신다. 그들은 이러한 감각을 최상의 기쁨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기분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영적인 성숙을 향해 굉장한 진보를 하고 있다는 "자기 환상"에 빠진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경험을 주셨다 빼앗으셨다 함으로써 서서히 신자로 하여금 감정에서 떠나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길을 깨닫지 못하고 주의 임재를 실감할 때 만이 그들의 영적 상태가 고조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영적 상태도 저조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육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말이 많다"는 공통된 도장을 찍고 다닌다. 말이 많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흥분된 감정 때문에 끝없는 토론을 벌인다. 그들은 말에 있어서 자제할 줄을 모른다. 일단 입을 열면 그들의 마음은 자제력을 상실한다. 말이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이제 혼적인 그리스도인은 말을 길게 늘어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들은 일단 대화가 고조되면 후회할줄을 모른다. 각가지 대화를 침범하여 화제를 계속 바꾸게 되고 말의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잠언은 말한다. 말이 많으면 자제력을 잃거나 논쟁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거나 비판으로 말미암아 사랑까지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은 은근히 수다스러운 사람을 정죄하고는 이렇게 남을 비판하는 것이 자기에게 극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망스러운 것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너절하고 경박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거칠은 농담과 익살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면, 마치 이런 열띤 대화를 어떻게 놓칠 수 있느냐는 듯이 이들은 활달하고 활기있는 대화를 좋아한다. 비록 때에 따라서는 불경건하고 무익한 대화를 증오할 때도 있지만 이것은 별로 오래 가지를 못한다. 감정이 다시 한번 자극되면 그는 자동적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 - 대화 - 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혼적인 신자는 또 "안목의 정욕"에 빠진다. 종종 이들의 태도를 지배하는 것은 현재 세상에서 유행되고 있는 예술적인 견해나 심미적인 견해다. 이들은 아직 인간의 예술적 관념에 대하여 "죽었다"는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예술가의 통찰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랑한다. 그 반면에 예술을 열열히 사모하는 신자가 아닐 경우에는 미(美)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해지는 극좌 노선을 걷는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뜻에서 걸래쪽 같은 옷을 걸치고 다닌다.

 

혼을 따라 생활하는 이들중에 지성인들은 스스로 "보헤미안"을 자처하기가 쉽다. 이들은 산들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이나 은은한 달밤이면 감상적인 노래속에 자신의 혼을 쏟아 놓기가 일쑤다. 그들은 종종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 사람들은 문학을 사랑하며 문학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이들은 또한 (몇 편의) 서정시를 읊조리는 것을 즐긴다. 이것이 초탈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산과 호수와 냇물(강)을 찾아간다. 이 곳에서 그들은 자연에 더 가까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면, 이들은 "한적한 곳에서 속세와 격리된 생활"을 꿈꾼다. 얼마나 고상하고 깨끗한 생활일까! 너무나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고민에 쌓여 있는 다른 신자들에 비하면 얼마나 다른가!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에 있어서 얼마나 혼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아주 신령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태는 이들이 온전히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감정에 의하여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완전한 자기 만족"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영적인 지식에는 밝은지 모르지만 보통 경험에는 짧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사람은 판단할 줄 알지만 자기 자신은 고칠 생각을 않는다. 영과 혼의 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 이들의 마음은 이를 거침 없이 흡수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자신의 생활이 아닌 남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혼적인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고 분별하기를 시작한다. 이들이 습득한 지식은 남을 판단하는 날개를 달아 주었을 뿐 자신을 돕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려는 경향은 혼적인 사람들 사이에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양상이다. 이들은 지식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역량은 가지고 있지만 겸손해 질 수 있는 영적 역량엔 결핍되어 있다. 사람들과 접하는데 있어서도 이들은 남에게 "차겁고 냉냉하다"는 인상을 준다. 신령한 신자와 달리, 이들의 바깥 사람이 아직 부서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가 힘들고 동행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혼의 생명에 의존해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교만하다. 이는 그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혼적인 신자들의 마음은 자아 위에 고착되어 있다. 자신의 생활을 좋게 보건 나쁘게 보건 간에 이들의 생각은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들은 아직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상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할 때에나 남의 판단 가운데 스스로 따돌림을 당한다 싶으면, 크게 마음을 상한다. 이들은 아직 그들보다 더 신령한 형제들처럼 기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를 받거나 비판을 받으면 이를 참지 못한다. 무슨 큰 멸시라도 받는 것처럼 남앞에 조금이라도 열등하게 나타나기를 꺼린다.

 

육신적인 생활이 얼마나 부패하고 추잡스러운 것인가 - 육신의 실상을 깨닫는 주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도... 또 자신의 생활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다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난 후인데도, 이들은 아이로니칼하게도"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겸손하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은 자신의 겸손을 자랑하는 것이다! 교만이 뼈속 깊숙히 뿌리를 박고 있다.


혼적인 신자의 일

 

혼적인 사람들은 일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사람들이다. 이들은 적극적이고 열심이 있으며, 의욕에 차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할 수 있는 열심과 역량이 있기 때문에 일을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할 때에만이 칭찬이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의 일"을 하기만하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런 이들은 신뢰할 마음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다. 이들에겐 결코 진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적이 없다. 이와는 반대로 계획과 묘책으로 붐비는 마음으로, 자기의 "아이디어"에 따라 일을 한다. 이들은 분주하게 일을 하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한가한 형제들을 보면 자기들이 훨씬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후자가 전자보다 더 쉽게 신령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혼적인 사람들의 일은 주로 느낌에 따라 좌우된다. 이들은 일을 하고 싶은 기분이 날 때에만 일을 한다. 그러다가 이 기분이 멈추면 자동적으로 일을 놓는다. 마음에 표현할 수 없이 뜨겁고 즐거운 기분을 느낄 때는 몇 시간이고 피로한 줄 모르고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속에 냉냉함이나 메마름 같은 것을 느낄 때는 여간해서 입을 열지 않고 가장 필요한 때에도, 말하자면, 한 영혼이 임종하는 상황하에서도, 전혀 입을 떼지 않는다. 따뜻한 흥분이 발동할 때는 천리길이라도 단숨에 달려가려 하나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한발짝도 떼려하지를 않는다. 이들은 배가 비어 있을 때에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하고, 졸음이 와서 눈이 감길 때에도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까지... 기분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많은 일을 하는데도 이들은 마음에 평안을 유지하지 못한다. 이들은 신령한 사람들처럼 조용히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다. 많은 일이 이들을 불안케 한다. 외부의 혼돈이 내부의 불안을 야기한다. 이들의 마음은 외적인 문제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것이 모든 혼적인 신자가 하는 일의 특징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진력하는 일로 툭하면 실망하기가 일쑤다. 이들에게는 주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조용한 신뢰감이 결여되어 있다. 말하자면 내적인 감각과 외적인 환경에 규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믿음의 법"의 진가를 인식하지 못한다.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닌데도 기분에 실패했다 싶으면, 일을 집어친다. 주위가 어두워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들은 아직 하나님의 안식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혼을 의지하는 신자들은 원시적인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실망을 하게 된다. 이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볼 줄을 모른다. 순간적인 승리는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잠깐의 패배가 슬픔을 가져온다. 이들은 일의 시종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갈망한다. 그러나 일을 성취할 수 없을 때에는 일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어두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없다.

 

혼적인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라고 남보다 나은 것이 아닌데도 남의 흠을 찾아내는 데 전문적이다. 비판하는 데 빠르고 용서하는 데는 느리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어 시정할 때에 이들이 취하는 태도는 일종의 자기 만족과 우월감이다. 때로 사람들을 도울 때에 이들이 쓰는 방법은 법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동기(motive)는 항상 올바른 것이 아니다.

 

혼을 따르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릴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급하게 전격적으로, 서둘러서 행한다. 이들은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이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열심과 정열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길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다리지를 못한다.

 

혼적인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그들의 노력으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모의하고 예언한다. 때로는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기쁨에 넘쳐 어쩔 줄을 모르다가도 어떤 때는 어두운 내일을 예상하고 즉시 각가지 비운에 마음이 쫓긴다. 그러면 이들은 이러한 일로 인하여 주님을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더 생각한다. 이들에겐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종종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주님"을 망각한다. 주님의 일이 중심이 되고, 일의 "주인"은 뒷전으로 물러선다.

 

영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는 혼적인 사람들은 갑자기 마음에 솟아오르는 생각들을 따른다. 따라서 이들의 말과 이들의 하는 일은 대중이 없다. 우선 이들은 필요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러한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동정의 말이 필요할 때 나무라는 말을 하고, 경고의 말이 요구될 때 위로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의 제한된 생각을 너무나 지나치게 신뢰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무익하다는 것이 증명된 후에도, 이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혼에 속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수한 계획과 허다한 의견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신자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든지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에 의해서도 좋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람과 함께 일하는 데 필요한 필수조건은 그의 아이디어와 해석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조그마한 해석이라도 과거 성도들에게 있었던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자기 해석이 옳음을 주장한다. 어떠한 다른 말씀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비록 신자가 의견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견이 무시당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는 내 의견만은 절대로 틀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둔다.

 

이런 신자는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이단의 교리라고 못박아 버린다. 분파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기가 속해 있는 파는 절대로 틀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와 같이 혼적인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믿음의 정당성을 꼭같이 부인하고 나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이 사람은 자기의 일에 깊이 빠져 있다. 그는 소위 자기자신이 속해 있는 조그만 써클을 사랑하는 나머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모임에 따라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분류되어야 한다고 우긴다.

 

설교를 할 때에도, 혼적인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은근히 좋은 예화나 재치 있는 말이나 자신의 인격을 신뢰한다. 심지어 저명한 설교자들 가운데 몇몇은 완전히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말했으니 사람들은 반드시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자신을 의지한다. 따라서 모든 자상한 준비가 따르는 것이다. 이들은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것보다 분석하고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설교(멧세지)를 암송하여 열을 내어 외친다. 그들의 "생각"이 이러한 일의 중추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신자들은 자연히 주님보다는 그들이 준비한 설교(멧세지)를 더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필요를 계시하고 하나님께서 듣는 이들의 수요를 채워 주시리라고 믿는 대신 이들은 전적으로 자기가 하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 혼적인 신자들이 신뢰하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하는 말뿐이다. 이들의 말이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나, 성령의 찌름이 없이는 진리라도 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말을 의지할 때에는, 영적인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리 예리하고 정확한 진리를 외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는 미칠지 몰라도, 사람의 영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혼적인 신자들은 고상한 말과 굉장한 어구를 즐겨 사용한다. 이들은 적어도 이 점에서 많은 경험을 통하여 그들보다 먼저 간 성도들이 생각지 못했던 정확성과 깊이를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 참으로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들에겐 이것이 매우 큰 유혹이다. 그래서 이들은 설교에 각가지 놀라운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어느 기회에나 - 그것이 보행중이든, 대화중이든, 식사중이건, 잠을 잘 때이든 간에 - 놀라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종이를 꺼내 적어둔다. 앞으로 이용하겠다는 목적에서다. 이들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성령에 의해서 영에 계시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마음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지에 관하여는 의문을 갖은 적이 없다.

 

혼적인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남을 돕는 일에서 특별한 기쁨을 발견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음식을 대접할 줄을 모른다. 이 말은 이들이 지식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종종 이들은 너무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당한 요소를 발견하거나 남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들은 즉시 선배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제한된 통찰력을 가지고 돕겠다고 나선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경험을 무진장으로 털어놓는다. 이들에겐 자기가 아는 모든 것, 아니 상상력과 추측까지 동원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말해 주는 경향이 있다. 이 "선배" 신자들은 자기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한꺼번에 그와 같이 많은 가르침을 소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하나하나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들은 마치 자기의 창고와 모든 보물을 한꺼번에 개방한 "히스기아" 왕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때는 아무런 외부의 자극도 없이, 그저 내부의 감정에 흥분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의 세례를 퍼붓는다. 이런 가르침의 대부분은 단순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위의 특징은 모든 혼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 때로 심각한(절박한) 상황에 직면해서,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도, 이들은 입을 떼려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직 타고난 수줍음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저 수다스럽고 말많은 신자들 옆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이 신자들을 비판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은 이들을 조금도 덜 혼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 안에 뿌리를 박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숨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육신적인 사람들은 남에게 나타나 보이기를 원한다. 이들은 영적인 일(사업)에 뛰어 나는(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기를 원한다. 어떤 회의나 모임에 참석할 때는 말하기를 기대하지만 듣기는 원치 않는다. 이들은 남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혼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어구를 쓰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많은 (다수의) 영적인 어휘를 암기해 두었다가 편리할 때마다 활용한다. 이들은 설교할 때에도 이런 어휘를 쓰고 기도할 때에도 쓰지만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서 그리하는 것이 아니다.

 

혼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들이 "자기의 포부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대개 그들의 욕망이다. 이들은 주의 일로 헛된 자랑을 삼는다. 이들은 능력 있는 사역자로서 주님에 의해서 크게 쓰임 받기를 원한다. 왜? 한자리 차지하여, 어떤 영광을 취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자기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의 분쟁과 투쟁은 극히 심할 수도 있다. 영적으로 뒤진 사람들을 보면 너무 느리다고 멸시한다. 반면 영적으로 앞선 사람들을 보면, 이들을 격하시켜 자기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한다. 이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위대하게 되고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번창하여 남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욕망은 물론 마음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간해서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욕구가 거의 다 은닉되어 있고 다른 순수한 동기와 혼합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비열한 욕망은 논파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혼적인 사람들은 지독한 자기만족에 빠져있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셨다 하면, 이들은 기쁨에 넘쳐 자신을 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단 한번 성공을 했다고 해도 자신을 스스로 높인다. 조그마한 지식과 조그마한 경험과 성공이 이들로 하여금 대단한 성취를 한 것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혼적인 신자들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는 이 공통적인 특성은 쉽게 채울 수 있는 조그만 그릇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 그릇에 담고 있지 않는 대양의 물이 얼마나 방대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그릇이 가득차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아직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상실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 자신이 상실되었다면, 이들은 자신의 노력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공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눈은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에 초점이 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이득과 손실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된 역량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고 해서 이러한 교만이 따른다면, 천명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설교에 어떤 성공을 경험하고 나면, 한가지 생각이 혼적인 사람에게 남는다. 그것은 "내가 참 놀랍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생각하고 큰 기쁨을 느낀다. "다른 성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와 비길 정도로 이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보아주지 않을 때는 종종 마음이 상한다.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가 여기 있다고 인정해 주지 않을 때에는 이들은 사람들의 눈이 멀었다고 비탄해 한다.

 

이 혼적인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일찌기 발견하지 못한 생각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의 놀라움을 알아채지 못하면 마음이 아프고 불안하다. 한번 성공을 할 때마다, 이들은 하루나 이틀 아니면 몇 시간을 자축(self-congratulation)하는 일로 보낸다. 이러한 "기만" 속에 빠져 있는 신자들은 얼마가지 않아 하나님의 교회에 자기들 중에서 위대한 전도사나 부흥사나 작가 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때 이들에겐 얼마나 큰 고뇌가 따르겠는가!

 

혼적인 신자들은 원칙이 없이 헤매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말과 행동은 "고정된 격언"(진리의 말씀)을 따르질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감정과 마음을 따라 생활한다. 이들은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것은 보통 자기가 정해 놓고 따르는 생활 형태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이 변화는 이들의 설교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가 최근에 설교한 내용대로 변한다. 예를 들어 인내에 대하여 설교하고 나서 하루 이틀 동안은 놀라울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한다. 사람들에게 주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했으면, 이들은 주를 찬양하고 또 찬송하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계속되지를 않는다. 이들은 기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감정을 움직여 이런 저런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일단 감정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다.

 

혼적인 상태에 오래 머무는 신자들의 또 하나의 특별한 양상은 이들이 유별난 재능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죄에 매여있는 신자들은 별로 재능이 없다. 신령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혼적인 사람들에게 풍성한 소질(재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자발적으로 죽음에 넘기고 또한 재능을 부활의 경험 가운데에서 새로이 영광스럽게 되찾게 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재능을 죽음에 넘겨 주기를 꺼려하는 반면, 이들을 최대한도로 이용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 그러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것을 자기의 것처럼 오인한다. 이들이 이런 마음의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한 그들은 계속 성령으로 자신을 인도하게 함이 없이 그들의 생각을 따라 자기 소질을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일이 잘될 때는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린다. 자연히 이러한 자기 영광과 자기찬미, 자화자찬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해도, 이들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다, 하나님께 - 그리고 나에게도 - 영광이 있을지어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 생각이 강하고, 감정이 풍부하며 - 재능이 있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따라서, 혼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매력적인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보통 쉽게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 이들에겐 영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들에겐 성령의 생명력 있는 자연스런 흐름이 없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무엇인가"가 사람들에게 영적인 생명력을 전해 주지 못한다. 이들은 아주 부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가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자는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위에 열거한 경험을 부분적으로 아니면 전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과 우리의 실제 경험은, 많은 신자들이 한편으로 몸의 지배를 받아 죄에 이르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혼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따라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성경은 이상의 두 가지를 다 "육에 속한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그들의 생활 가운데 "몸의 죄"를 따르고 "혼의 자기 의지"를 좇는다. 만일 우리가 많은 혼의 기쁨을 맛보고 동시에 혼의 정욕을 똑 같이 즐기고 있다면, 이와 같이 영의 많은 경험과 관련해서 혼적인 감각을 크게 즐기는 것도 꼭같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물론 한 국면을 끝내고 다른 국면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도 있다는 것을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한 신자의 경험이란 결국 아주 복잡한 문제이다. 우리가 비천하고 저속한 곳에서 해방을 받았는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이다.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우리가 신령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와 자아"에서 모두 해방되었을 때에만이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혼적인 신자의 경험",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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