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성경 진리를 나누는 곳^^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지방교회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하여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문제에 관하여

 

 

‘섭리’님은 ‘지방 교회측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두렵지 않은 복음을 만들어 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과연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신약이 증거하는 왕국(천국) 복음이 과연 두렵지 않은 복음일까요? 섭리님의 지적을 계기로 성경적인 두려움이 과연 어떤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함.


“(섭리)PROVIDENCE 2014.05.15 15:11:47 실제 지방교회 안에 성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실제로 적용에서 그러한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지가 중요하겠지요


오늘 아침에 말씀을 읽는 중에 마침 주제와 관련이 될 만한 성경구절들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돌려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보상이 클 것이고, 여러분이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눅6:35-36)


‘보십시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대해서 들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결말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다정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약5:11)


위에서 보듯이 신약에서 계시된 성부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할 면만 있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매우 인자하시고(kind), 다정하시고(tenderhearted), 자비로운(compassionate) 분이십니다. 특히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로서 아버지를 합당하게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에게 어떤 성부 아버지를 갖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잘못에 대해 가차없이 벌 주시는 성부 하나님만을 너무 강조한다면, 그 사람은 어느새 자신도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즉 신약시대에 살되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고 구약의 율법 아래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관하던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달리,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좋은 것을 거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다정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심지어 징계하실 때에도 우리를 아들처럼 대하시지(히12:7), 재판장이 죄인 다루듯 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성부 하나님을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처럼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한편 성부 하나님을 참되게 두려워하는 것은 외적 공포심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징계의 목적인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것”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인 우리가 거룩한 속성을 떠나 세속화 되고 종교화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나눠주심(요10:10하)에 반응하기 보다는 윤리와 도덕과 철학과 심리학 등 세상의 지혜를 설교에 섞고, 헛된 영광을 생명보다 귀히 여겨 그것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2. 심판장이신 주 예수님을 두려워함.


“(섭리님) 지방교회 등의 이런 식의 복음은 그리 기쁘지도 그리 두렵지도 않은 복음을 만들어 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은 받되 소위 이기는 자는 아니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대부분 가게 되는 그다지 기쁘지도 그다지 두렵지도 않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방 교회측이 증거하는 천국 복음은 어느 값싼 복음처럼 사탕발림의 복음이 아닙니다. 죄사함 받아 칭의를 이뤘으면 어찌하든 다 천국(천년왕국)에 들어 간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심판은 받되 큰상 작은 상만 결정하고 벌은 없다고 하는 이런 것이야 말로 “두렵지 않은 복음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신 인자(사람의 아들)를 무시하는 복음입니다.


만일 어떤 분들이 거듭난 사람도 천년왕국에 못 들어 갈수 있고(마7:21), 우리 믿는 이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상뿐 아니라 심각한 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행한 것과 말한 것에 따라 그대로 심판받는다 라는 복음을 듣고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듣는 그 사람의 문제이지, 증거하는 쪽에 책임이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과 삼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사람들은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이 그리스도를 얻어 그분의 충만인 몸을 건축하라고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서 벗어날 때 내적인 두려움과 죄송함이 있습니다. 몸으로 행한 바 대로 의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안의 생명의 영의 법을 어기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21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07:11
섭리님은 지방교회측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특히 성부를 강조하신 것에 대하여 약간의 반론을 제기하자, 성부 대신에 삼위 하나님(삼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라고 고치셨습니다. 또한 그런 판단의 근거를 유 모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신약백성인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돌아 보기 원합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07:19
새예루살렘
어떤 사람은 권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매우 두려워 하고 아부하고 하지만, 그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매우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예배보러 가서는 경건한 척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분을 경배하는 듯하다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대화 다른 영역에 빠져드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일까요? 오늘날 교계 인도자들의 탈법 불법 위선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총회장 선거에 돈 봉투가 없이는 당선이 쉽지 않은 교단 풍토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 돈 봉투를 돌리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들은 모두 교단의 인도자급 분들입니다. 동성애자 목사를 허용하는 교단에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모습이 있다고 할수 있을까요. 저는 섭리 님이 어떤 교단 어떤 배경의 분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지방 교회측 안에는 설교 표절이나 이중적인 생활이나 돈봉투 돌리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고 구조적으로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07:23
새예루살렘
그럼에도 이곳에 토론하러 오셔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만일 토론하실 부담이 참으로 있으시다면 1) 진리 항목들에 대해서 2) 저희의 1차 자료를 먼저 읽으시고, 3) 하실 수있다면 이미 진행된 토론내용이나 반박내용을 읽으신 후에 4) 그래도 더 토론할 내용이 남아 있으면 간략하게 주제와 논점과 자신의 의견(대안)을 먼저 제시하시는 식으로 진행해 주시기를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PROVIDENCE 2014.05.17. 09:21
새예루살렘
돈 봉투 얘기는 세 번 이상 반복하시는데 본인이 토론에 불필요한 요소들을 끌어 드리면서 매우 페어하게 하시는양 토론 가이드라인 제시하는 것도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바쁘신 업무중에 글을 쓰시다 보니 그러신거라고 이해할까요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10:13
새예루살렘
더 이상 이런 류의 까십성 이슈를 언급하지 말아 주십사 하는 못박기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남을 공개적으로 나무랄 때는 최소한 자신의 진영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할 것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반론입니다. 제가 세번 이상 반복할 만큼 이 주제는 이곳에 토론대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섭리님이 개혁신학을 배경으로 이곳에 훈수를 두시려고 오셨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PROVIDENCE 2014.05.17. 12:22
새예루살렘
저는 돈봉투 돌리는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데 왜 가상의 적을 만든 뒤에 거기다 공격을 하실까요 저는 특정 교단 소속이 아니라고 두차례나 말씀 드렸는데요 배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ROVIDENCE 2014.05.17. 09:16
지금까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데 이 글을 보니 좀 답답해지는 군요 지금까지 싸워오신 분들에게 물드신게 아닌가 십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에서 삼위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걸로 고쳤다구요? 지방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는 전문가가 되야 된다는 강박 관념이 있으신거 같습니다 그게 아니고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부 하나님이 계시므로 경외하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성부를 언급했다고 충분히 설명 드렸지 않나요 상대가 설명을 하면 경청하고 수긍하는게 토론 매너 아닌가요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달갑지 않으시다면서 새로 장문의 글을 올리시는 건 왜 일까요 이런걸 이율 배반적이라고 합니다 유동근 목사님이 거기 오래 계셨나 본데 예민한 문제라서 그러신건지 모르겠네요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09:59
PROVIDENCE
역시 같은 문제입니다. '카더라 식' 문제제기는 곤란합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10:06
PROVIDENCE
그리고 유 목사님 언급 또한 토론의 메너를 따지는 분으로서 합당치 않다고 봅니다. 형제로 있다가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목사(님)로 가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목사로 있다가 형제로 돌아와서 목사로 있던 것을 회개하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길이 바른 것이었는지는 훗날 그분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오래 있고 안 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어 몸으로 건축되는 바른 이상을 보았는지 또 그 본 이상에 거스리지 않고 신실하게 이 길을 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든 지금이든 생명의 길은 좁고 대우 받기를 포기해야 갈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왔다가 또 거쳐 가기도 합니다. 들어오는 문도 열려 있고 나가는 문도 열려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면서 여전히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목사를 고집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마치 양복을 입고 머리에 갓을 쓴 것처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깨달을 때 함께 하던 지체들이 그 곁을 하나씩 둘씩 떠나가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예견될 일이었습니다.
PROVIDENCE 2014.05.17. 09:47
두려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과 반대되는 하나님인가요? 구약의 하나님은 두렵기만 하셨나요? 신약의 하나님은 자상하기만 하시나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토론의 수준이 실망스러워 집니다 하나님은 신약과 구약에 걸쳐 일관되게 두려우실 정도로 신자에게 거룩을 요구하시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사랑사신디는 증거 입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17. 09:57
PROVIDENCE
거듭 말씀드립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말이 들린다(들었다)"는 명제는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토론의 수준을 말 할 문제가 아닙니다. 섭리님이 이런 이슈를 들고 나오셔서 문제제기를 하시는 것에대해서 완곡하게(듣기에 따라서는 노골적으로) 자제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시면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PROVIDENCE 2014.05.17. 14:04
그러나 두렵고 거룩을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없었던 것은 신복음주의 계열 교회에서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신복음주의란 그리스도인을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분류하는 한편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내삶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둘로 나누어 전자는 처음에 믿고 후자는 뒤로 미루는면서도 입으로 시인한것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정확히 구원파 식이지요 정통 신학은 지속적으로 믿음안에 거하는 것(결단이 아닌 은혜로 믿어 지는것)을 확신의 근거로 삼습니다 확신이 없어지면 구원파 처럼 확신을 강조하지 말고 복음으로 돌아오면 확신은 자연히 뒤 따라 옵니다 그리스도로 멀어진 상태에서의 확신 자체가 애초에 틀린 신학입니다 봉투 얘기하시는 아르뱅주의자들과 세대주의 계열에서 나온 분파들이 여기 해당 됩니다 지방교회가 후자가 아닌지 묻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오래 계셨고 한국 지방 교회를 이끄셨던 분 중 한분이 인터넷 상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유력한 증거도 있고 해서요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0. 01:11
PROVIDENCE
신복음주의니, 정통 신학이니 하는 구분 자체가 교리적 분석적 접근일 뿐 그 실재 삶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 가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과연 어떤 두려움이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도 글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1. 제 눈에 비친 '정통 신학'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구약의 벌주는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두려움(비성경적인)일 뿐, 참된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을 판단 기준으로 보는 시각은 출발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참되게 두려워 하는 것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거스를까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교리든 신학이든 그것이 머리되신 그분의 허락과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면 다 그리스도의 대치물들이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갈리디아 사람들'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누림)에게서 끊어진 것입니다. 대신에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매사에 순종하며 그분을 살고자 하는 소위 지방교회측 표준이 참된 표준입니다.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의 불을 바라보고 산 분들입니다. 그 불로 소멸될 것들은 버리고 불을 통과하고도 남아 있을 금과 은과 보석만을 관심하는 "참된 교리와 신학"(정통 신학이란 말을 자꾸 쓰시니까..)을 정립하고 가르쳤습니다. 좀 노골적으로 답변을 드리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PROVIDENCE 2014.05.17. 21:59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백보좌 심판대와는 달리 신자만을 대상으로 하는것 까지는 세대주의 계열인 지방 교회도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쓰신 글에서도 보여지듯이 신자를 벌준다고 쓰셨는데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런점이 구원파와 지방교회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구원관의 결정적 오류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상급을 주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이상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방 교회 구원론은 신자와 불신자 구분에서 틀리며 신자의 범위를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 한 좁은 문 좁은 길이 아닌 넓게 잡다 보니 심판에서 까지 성경 전체를 오류 속에서 다르게 재구성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방교회 극소수의 이기는 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신자가 다시 심판 받고 공포스런 바깥 어두운 곳(대다수의 신자가 간다는 이 중요한곳에 대해 성경 말씀이 왠일인지 전무합니다) 내몰려서 울며 이까지 갈아야 하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것이 완전히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이 완전한 은혜인가요?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0. 01:20
PROVIDENCE
바로 그런 시각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1. 로마서 14장 10절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전후 문맥을 보면 심판대 앞에서 상급을 줄만한 분위기가 아닙니다. "왜 그대는 형제를 판답합니까"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라는 말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를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큰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너는 형제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여 실족하게 했으니 '작은 상으로 강등' 이런 식의 심판대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교리적인 섭인관에 잡힌 해석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해석입니다. 2. '불을 통과한 구원'..이런 성경의 언급들도 상급 주는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3. 구원받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체를 살고, 자아를 살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져 헛되이 율법과 종교를 추종하던 사람을 큰상 자격은 없으니 작은상이나 받아라 라고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신학이자 교리의 부산물입니다. 이런 사탕발림 신학과 교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종과 세속화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0. 01:25
PROVIDENCE
하나님은 우리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사함이나 거듭남으로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언약신학은 엄밀히 말하면 죄사함에 의한 칭의는 제대로 가르치지만, 그 이후는 어찌보면 두리뭉실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구원파적 복음입니다. 신약의 서신서가 말하는 생명의 성장 부분이 쏙 빠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신서를 윤리적로만 설교하거나 아니면 신약의 서신서는 뺴고 구약, 사복음서, 사도행전 정도에 설교주제가 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약의 서신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더 얻어서 생명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언약신학는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 결과로 산출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영과 혼은 같은 실체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0. 01:30
PROVIDENCE
완전히 기쁜 소식, 완전한 은혜는 과정이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최종완성인 새예루살렘 안에는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사함이나 거듭남 만으로 최종 성취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파에서 이 두과정을 거칠 때는 천하를 얻은 것 같고, 모든 것을 불살라 주님을 사랑할 것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십자가에서 끝났다는 세상과 자아 심지어 죄가 다시 스믈 스믈 기어나와 기쁨과 은혜를 갉아 먹습니다. 언약신학 개혁주의 신학이 대세인 한국의 주류 교단들이 오늘날의 구원파를 업신여기고 이단 삼단하며 비하하지만, 그 자신들은 매 순간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은혜를 누리고 있나요? 양심적으로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0. 01:33
PROVIDENCE
우리 안에 조성된 자아, 옛사람, 죄성이 말씀의 씻김과 거룩케 하심으로 온전히 해결될 때..비로소 완전한 기쁨과 완전한 은혜를 맛보게 될 것이고, 그 전에는 부분적인 기쁨과 은혜를 누릴 뿐입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또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안식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기쁨과 안식과 은혜의 실재는 우리의 거듭남 영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혼이 이 영에 의해 씻겨지고 점령될 때 그 만큼 실재는 증가할 것입니다.
PROVIDENCE 2014.05.20. 04:33
PROVIDENCE
신자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높은 수준의 신자에게 필요한 그 공의를, '오직 은혜'를 통한 속죄의 보혈과 '오직 은혜'로 대신하여 통과하신 십자가의 완전한 죽음과,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부활 생명으로 거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두렵고 떨리는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신 이 '은혜'를 하찮게 여기거나 이 '은혜'를 취하는 것에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 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소위 지방교회식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복음" 은 매우 반펠라기우스 적(인간의 공적이 결과적으로 작용) 입니다.

로마서 14장 10절의 심판대와 그 전후 문맥에서의 분위기를 인용하셨는 데 컨텍스트를 완전히 정말 완전히 놓치신 듯 합니다. 앞 부분은 로마 교회에서 율법적인 유대인과 이방 종교를 믿던 이교도 회심자들이 약한 자들로 묘사되며 복음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을 강한 자들로 설정하며 양자간의 용납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설명 드리지만, "왜 그대는 형제를 판단합니까"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라는 말은 로마 교회의 당시의 율법에 얽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 들과 이교에 물들어 있던 자들과 같은 연약한 형제들에 대해 없신 여기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무슨 심각한 분위기라고 오해하시나 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반대입니다.
4절의 내용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꼐 있음이니라" 약한 자들 모두 주의 종이므로 세움을 받는 다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컨택스트가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를 언급하는 것이 신자에게 벌 주는 심판대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심각한 분위기라구요? 설명드립니다.


로마서 14장 11절 "기록되었으되 주꼐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라" 구절은 아래의 사야 45장 23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플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위 이사야서의 또 한번의 인용은 빌립보서 2장 10절에도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본문에서 심판이라는 단어의 앞뒤 문맥이 심각하여 상급 뿐 아니라 벌주는 것이라는 근거로 제기하셨는데 그 정확한 해답은 13절에 나옵니다. 무릎 꿇을 자들인데 감히 '하나님 노릇' 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신성 모독적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대로 컨텍스트를 놓치시거나 성경의 평행한 구절을 놓치면 자의적 해석이 되어 버려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중대한 신학적 오류를 낳게 됩니다.

물론 이 심판은 말씀하신 대로 아래의 고린도후서 3장 12절~15절과 같은 심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러나 본문의 해석은 명확합니다. 불은 인간적인 재능이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면 불타 없어지고 그 속에서 구원을 받는 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명확합니다. '공적'이 어떠한 것임을 시험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원합니다. 이는 상급에 대한 것입니다. 또 다시 죄를 거론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과 완전성을 상쇄기켜 버리며 신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은 은혜도 기쁜 소식도 아닙니다.

언약신학의 한계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대체신학이요, 종말론이 약한 신학이요, 경륜이 빠진 신학이라서 교회론 마저 바로 설 수 없는 신학이며 그러다 보니 구속사 중심의 인본주의 신학으로 흐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 드렸듯이 언약신학과 세대주의의 장점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더 연구하셔야 할 것은 그렇게 약점이 많은 언약 신학도 구원론 하나는 지방 교회 보다 훨씬 더 견고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장 부분은 윤리적으로 설명하는 교파만 보셔서 그렇습니다. 그건 율법주의에 불과합니다. 맞습니다. 생명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설명과 적용이 다르다고 진작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 적용이 틀렸기에 지방교회의 신앙적 실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교회의 상태에 대해 자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은 천년왕국을 통과하여 최종 영화의 단계로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죄사함과 거듭남이 적용되는 신자가 누구인지가 정확히 정의되어야 참다운 교회의 범위가 설정되어 이 교회가 참다운 새예루살렘의 전단계로서 그 아름다움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제가 속하고 싶지 않은 타락한 거짓 교회들에 대해서 비판하시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십니다. 아니라고 말씀 드렸는데 다시 하시고 계신것을 보면 지방교회적 신념으로 외부인에 대한 사고가 고착되신 듯도 합니다.

완전한 기쁨 속에만 머물고 있냐고 질문하셨지요? 네 율법이 아닌 자발적인 종말론적 흥분을 맛보는 완전한 복음의 기쁨을 맛보지만 여전히 완전한 죄인의 상태 동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2분설자들도 성경이 이 영혼을 하나님과 가까운 것으로 묘사할때는 영이라는 단어를 더 높은 빈도로 사용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다만 날카롭게 분리할 수 없을 뿐이지요. 그러나 조심하셔야 될 것은 그 영안의 실재는 바깥의 말씀을 통에 내주하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타인에게 행할 때 느낌은 살아나지만 내적 느낌 만을 주목할 때 느낌은 약해지고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1. 02:57
PROVIDENCE
섭리님은 제 글을 제대로 읽으시고 계신지요?
profile image
새예루살렘 작성자 2014.05.21. 03:01
PROVIDENCE
"성경과 삼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사람들은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이 그리스도를 얻어 그분의 충만인 몸을 건축하라고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서 벗어날 때 내적인 두려움과 죄송함이 있습니다"(새예루살렘)..."신자가 두렵고 떨리는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신 이 '은혜'를 하찮게 여기거나 이 '은혜'를 취하는 것에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 입니다. "(섭리) 이 둘은 같은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선입관을 가지고 오셔서 신학용어를 사용하여 이상한 인상을 갖도록 모자를 씌우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인간의 공로로 몸이 건축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될 때 몸이 거축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더 누리고 얻기만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방교회측의 인간 편에서의 동역의 실체입니다. 반펠라기우스니 하는 이상한 신학용어를 함부로 적용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섭리님이 이곳에 글을 쓰시는 동기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음을 유념하셨으면 합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