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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사안에 대해 인터넷에서 뒤적여 쓴 글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사람, 이기는 자, 회복을 외치는 주의 회복, 지방교회가 개신교보다 복음을 더 많이 전하지도 않고 연보 헌금이 더 많이 걷히지 않고, 사회 구제 활동과 사회 참여가 더 활발하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해 볼 때, 단순히 실행 문제라고 생각 하시겠지만, 지방 교회에게 주어진 오랜 시간 동안 그  실행이 늦춰진 이유는 다름 아닌 신학일 수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구원론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의심해 보실 것을 그 안에 계시는 거듭나신 형제, 자매님께 권해 드립니다.

 

당초에 이 논의를 시작할 때는 신학적으로 교단화 된 지방 교회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회의감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회복이라는 모토가 주는 매력 때문에 진행될 수록 발전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글을 보며 이러한 기대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언의 혼합이 아르뱅주의이고 이런 것이 긴장감 없는 확신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 드린 작은 성의는 아무런 보람도 없이 성도의 견인을 오용한 구원파 따위가 개혁주의 신학과 같다는 이단 사설 수준의 방어적이고 배타적인 논리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과 믿음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구별하지 못하시는 듯  합니다.

 

애초에 주되심 구원과 개혁주의를 대하는 태도에서 오류는 출발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식은 뒤에 남은 교회론의 지방 입장과 하나됨에 대한 이상(?) 은 그 위험성이 심각합니다. 이러한 모토와 실상의 괴리는 이중성을 낳으며 구성원의 문화로 자리잡게 됩니다. '구세주' 로만 믿고 '주'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지옥을 면하기 위한 사후 보험으로 취급할 우려가 있는 현 세태하에서 복음의 진리를 공격하는 악한 자들에 대항하여 핍박을 무릅쓰고 주되심 구원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수호하는 개혁주의 형제들을 뜨거운  마음과 눈을 통해 바라보지 않는 이상 그들의 의도가 보일리 만무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순종' 마저도 '믿음'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참된 믿음'이 필연적으로 '순종'을 낳는 이유는 이 믿음이 사람의 결단이 아닌 '하나님' 께로 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얼마나 크게 주되심 구원과 개혁주의를 오해하고 있으며, 개혁주의와 주되심 구원을 사칭하는 자들에게 인터넷 상에서 얼마나 크게 속고 계신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완벽한 성화' 나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자'가 구원의 증거라는 이단적인 얘기는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실제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진행하시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direction 방향성을 perfection 완벽성과 혼돈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practical 실제적 positional 위치적인 의미에서 각각 다르게 '영적인' 과 '육적인' 이라는 표현이 쓰여진다고 누차 말씀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그 구분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positional 한 측면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practical 한 측면에서는 '100% 영적인 자이지만 깨닫지 못하고 마치 육적인 자들 처럼 행할수 있다' 는 뜻입니다. 이 구분이 매우 중요하며 특히 지방 교회식의 신학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말씀 드렸는데, 다 안다고 하셨지만 결국 흘려 들으셨거나 이해하지 못하신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에 있어 절반만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100% 영적인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이 있을 뿐이며 이는 우리안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핵심입니다. 지방 교회 신자들이 새예루살렘님 처럼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다면 소위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이미 부여되고 주어진 은혜를 선언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닌 - 비록 명칭과 용어는 영적이고 자기를 부인한다고 설명하지만 - 인간의 노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필연일 뿐 입니다. 

 

인간편의 역할에 있어서 수용적인 것과 효력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미묘하지만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구분에 대해 인식이 빠져 있으시니 계속 같은 실수를 저지르시게 되는 겁니다. 이런것을 신학용어로 '조건적'이라고도 하는데 개혁주의 역시 구원에 있어서 '조건적' 입니다. 물론 믿기 위해서는 귀로 들어야 되는 것도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유효적으로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는 원인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문을 닫는다면 그 행동은 실제로 문이 닫히도록 하는 결과를 낳는 원인으로 작동하지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수동적인 receive 수신입니다. 이 수동적인 수신이 즉시 선한 열매를 산출하는 능동적인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기여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행해진 무언가를 받을 뿐입니다. '조건'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 이렇게 커다란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 쏟아 놓으신 오해들은 전부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칼빈주의를 행위가 없다고 하셨는데 더 극단적인 표현을 쓴 워치만니의 '이기는 생명'에서의 '하나님이 대신 끊어 주실테니 담배를 끊으려고도 하지 마라'는 구절은 읽어 보셨나 또 어떻게 이해하셨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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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PROVIDENCE 작성자 2014.05.23. 15:02
반갑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쉬울까요? 아님 어려울까요? 둘 다 아니며 정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선택하시고 은혜로 허락하셔야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내 모든 것의 주인인 사실을 깨달아 믿게 됩니다. 성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는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 이루어지며 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정말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성화는 사람이 하늘의 일을 해나가는 전진하는 방식이 아닌 칭의의 원점으로 되돌아 오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신자의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신자안으로 들어오셔서 성취된 진리로서 실상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선택된 신자를 이기는 자로 이끄실 것입니다. 신자와 이기는 자는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는 이 견인 부분에 있어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24. 18:22
그래서 위트니스리 한명의 저자를 무오류의 사도로 생각하고 그 내용만을 절대 진리로 몰두하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열려 있으십시요 지금 이 시대는 무오류의 사도가 가르침을 주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해라구요? 그 분의 신학이 한군데라도 틀린다는 걸 지방 교회 신자는 쉽게 상상하실 수 있나요? 사데 교회 전체가 일단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잘못된 구원론이 이런 잘못된 신학을 낳습니다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한채 종말론에서 같은 오류를 낳습니다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구별된 자들은 영적 엘리트가 아닌 단순히 참된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사데 교회는 가라지인 거짓 신자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PROVIDENCE 작성자 2014.05.24. 18:38
지금 이러한 내용이 자꾸 혼란스러우신 이유는 믿음 때문에 사데 교회 전체는 최소한 법리적 구원을 받았다는 잠재의식 속의 관념 때문입니다 구세주로는 믿는 것과 구주 로 믿는 것을 분리하여 두 가지에 시간 간격을 두고 선후로 여기는 신복음주의의 영향입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중 다수가 구원 받은 자가 아닌 이유는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음 때문'이 아닌 은혜 때문에 '믿음으로' 받습니다 잘못된 성도의 안전론은 이런 구절에까지 영향을 미쳐 신학 전체를 망가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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