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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교회관」 비판에 대한 재반박(上)

 

교회론 비판에 대한 이의제기를 시작으로 원세호님과 그 문하생들이 펴낸 '지방교회 주장과 성경적 변증서' 책자(총 3권)의 교리부분에 대한 반박글들을 차례로 써 나가고자 합니다.


원세호님은 지방교회측 교회론에 대해 1. 현대 교회관, 2. 교회의 정의, 3. 교회의 사명, 4. 교회의 창조 목적, 5. 교회 직제, 6. 교회 위치와 단위, 7. 교회 이름 제정, 8. 교회의 하나와 합일, 9. 교회와 예배, 10. 죄와 교회와의 관계, 11. 교회의 영광스런 상태 등으로 세분하여 비판하였음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같은 제목으로 원세호님의 핵심적인 오류와 왜곡들을 지적하고 반박해 나갈 것입니다.

 


1. 원세호님의 소위 <현대 교회관> 비판에 대한 반박


원세호님은 워치만 니가 그의 저술 '사역의 재고'(한국복음서원, 1988)에서 성경상의 집회(예배)를 교회 집회와 사역집회로 나누고, 사도행전 20:7-11 에서처럼 혼자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듣는 형식의 집회는 예외적으로 외부에서 사역자(예를 들어, 사도 바울)가 방문하여 말씀을 공급할 때뿐이고, 고전 14장에서 보듯이 성경 안의 모든 교회집회는 피차 상호적인 성격의 집회의 성질을 포함한다고 하며, <원탁형의 집회>를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로, <강단이 있는 집회>는 다 사역의 성격을 띤 집회라고 설명한 것이... 비 성경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그의 비판은 마땅히 교회의 성격을 띤 예배가 한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듣는 소위 강단이 있는 집회 형식을 띠고 있었다는 성경근거들을 나열함으로 워치만 니의 주장을 반박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실패했다. 대신에 자신의 책자의 많은 지면을 이러한 핵심요점과 무관한 말들로 채웠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이단적인 교회관을 보여 주기까지 했다.


1) 원세호님은 '강대 예배는 생활화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는 자신의 주장근거로 히브리서 10:25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본문이 원세호님의 주장처럼 <성경적인 교회 예배는 곧 소위 강대(상) 예배> 였음을 증명하는 본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제 히브리서 10:25 본문을 직접 인용한 후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점검해 보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더 그리하자'(히10:25).


보다시피 이 본문에는 <강대상 예배>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믿는 이들이 모이기를 힘쓰라는 권면이 있을 뿐이다. 원세호님은 늘 성경적 변증을 주장하나 정작 자신은 이처럼 엉뚱한 내용으로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관련도 없는 내용이라도 성경에서 인용했으면 그것이 곧 성경적 변증은 아니다.


2) 원세호님은 예배당 건물도 교회라는 비성경적인 교회관으로 워치만 니 교회관을 비판했다. 그의 교회의 정의에 따르더라도 교회는 '부르심 받아 세상에서 나온 성도들'일뿐 그들이 모이는 모임장소까지 교회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래에서 보듯이 그의 변증서 책자에서 '건물교회'라는 비 성경적이고 심지어 이단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원세호님 주장: ② 신약 시대에는 고린도 교회와 같이 교회에 모였었다 (고전11:18). 그리고 분쟁이 있었다. 이 모임 장소는 건물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18의 영어 원문에서 '교회'는 'in the church'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어떤 모임장소 즉 건물이란 말이 아니다. 위 말씀은 교회인 성도들 안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며 원세호님의 이단적인 주장처럼 '건물교회에 모인 것'을 뜻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이며 주님의 몸이다. 어떤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될 수 없다. 이 점은 위 18절에 이어지는 22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라고 함으로 교회가 업신여김을 당하는 인격체로 묘사됨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엡1:23). 따라서 이런 성경적인 교회관과 달리, 건물교회를 주장하는 원세호님의 교회관은 매우 잘못된 교회관이다.


3) 원세호님은 강단 예배는 성경에 있으나 사역집회 성격이지 교회 집회 성격이 아니라는 워치만 니 주장을 워치만 니는 강단 예배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고 말을 바꾸어 놓고 이를 근거로 남을 이단시하고 있다. 부정확하고 정직하지 않은 일이다. <워치만 니는 강단 예배는 성경에 있지만, 사역적인 예배시만 행해졌다>고 말함에도 아래와 같이 말을 바꾸어도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지 묻고 싶다.


<원세호님 주장 : ...그런데 도가 넘어 (워치만 니는) 기독교 강단 예배를 성경에 없다고...성경을 부인하니 문제가 되고 이단 시비가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4) 원세호님은 예배당 안에 앉아서 한 사람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시간만을 그리스도인의 예배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척 앉아 있다가 예배당 문을 나오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소위 이중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원세호님도 성도들을 잘못 가르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계 내에서 행해지는 예배모습이 성경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신학자들의 진단(http://www.rpress.or.kr/topnews/xinu_view.php3?CP=2&SN=120)도 있음으로, 현행 한국교계 예배실행을 기준으로 성경적인 예배모습을 규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아래에서 소개하는 장신대학에서 예배학을 가르치는 정장복 교수의 재세례파 예배 모습이나 영국에서 목회하는 신대현 목사가 제시한 소위 '강대 예배가 의미하는 예배시간만 예배가 아니라, 이에 이어지는 모든 경건의 삶을 예배에 포함시키는 예배 개념'이 성경적인 예배에 근접한 것은 아닌가? 원세호님의 소위 <강대상 예배 개념>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교해 볼 때 성경적인 예배와 크게 다르다.


자료1) 정장복 교수의 재세례파 예배 소개 http://wpa.or.kr/pass/worship/worship-07.htm


<...그런데 이러한 성경적 예배는 단순히 집회소에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자인 회중은 학교 교실이나 가정집의 거실에서도 주일이면 어느 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예전(Liturgy)이란 말은 본래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드리는 특수한 행위가 아니라 성도의 일상적인 행위를 뜻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전적 예배는 복음의 증인과 일꾼으로서 사는 것이었다. 후에 그는 우리가 주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예배'라고 부르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된다.(고전10:31)>.


자료2) 신대현 목사 http://www.otnt.net/otntnote/Supplement/Jesus/Jn040326-2000.htm


<하나님은 성령으로 모든 성도들 가운데 거하셔서 그들의 모든 생활에서 예배 받으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in spirit)...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예배할지니라".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으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히 10:24, 25).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예배 안에 있다가 예배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신령으로 예배하는 모습'이다. 모든 생활이 예배인 것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롬 12:1 산 제사; 롬 14:18 사람에게도 칭찬 받는 삶; 신 6:4-5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여호와께 대한 사랑; 미 6:6-8 공의를 행하고 인자(仁慈)를 사랑함,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


위에서 보듯이 원세호님은 자신의 교회관, 예배관도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워치만니 주장도 잘못 이해했음이 입증되었다. 이런 비 성경적이고 불성실한 자료가 어떻게 건전 기독교의 공익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원세호님은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건물교회' 등을 주장하는 자신의 비 성경적인 교회관부터 성경적인 교회관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2. 원세호님의 <교회의 정의> 비판에 대한 재 반박


원세호님은 소위 지방교회가 '교회를 재료이신 그리스도라고 정의하며 교회가 성도들의 모임인 것을 부인하고', '성경 상의 교회는 개 교회일 뿐 지방교회가 아닌데 지방교회라고 하며', '잘못된 교회정의를 통해 기존 검증된 기성 건전 교단 교회만 무너뜨리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세 가지를 차례로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은 자신의 <피상적인 교회관으로 워치만니의 본질적인 교회관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둘은 그 깊이에 있어서 다르므로 하나로 다른 하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교회라는 단어의 헬라어가 에클레시아이고 그 문자적 의미가 공적 임무를 위해 부름받아 나온 무리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워치만니도 교회가 에클레시아임을 부인치 않는다. 그러나 원세호님이 비판한 워치만 니의 글은 이러한 에클레시아 교회관보다 더 깊이 교회의 본질을 들여다 본 것이다.


과연 그런지 원세호님이 비판한 워치만 니의 본문을 다시 보자.


"이제 교회는 바로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런데 교회란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자체가 함께 모여서 생겨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취해온 바로 그 부분이다. 즉 다시 말하면 교회란 그리스도를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바로 그 사람이다. 교회란 흙에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다. 교회의 재료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가지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생존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15. p. 38, 16-25줄 워치만 니 주장).


(1) 참고로 윗 글은 창2장의 아담과 하와의 예표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 것이다(영광스러운 교회(워치만 니) 참조). 위 글을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원세호님처럼 마치 워치만 니가 에클레시아 교회관을 부인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생명도 없으며 생존하지도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라는 글 마지막 부분에서도 보듯이 위 글에서 워치만 니의 강조점은 교회의 내적인 본질이 그리스도임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에클레시아'만 성경적인 교회 정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정의도 있다(엡1:23).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전12:12).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을 핍박했지만, 정작 주 예수님은 나의 성도들 또는 나의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바울에게 '네가 왜 나(ME)를 핍박하느냐'고 하셨다(행9:4). 어떤 생명체이든 그것의 몸은 그의 일부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골1:18, 엡1:23). 교회는 다만 '어떤 무리' 그 이상의 영적 깊이가 있는 신비한 개념인 것이다(엡5:32).


엄밀히 말하면, 거듭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우리와 연합되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고전6:17)이 곧 교회요, 신부요, 새사람이요, 교회의 영적 실체이다. 에베소서 4:22-24에 의하면 부름 받아 나온 사람(에클레시아)도 여전히 그 존재 안에 새사람과 옛사람이 공존한다. 여기서의 워치만 니의 주장 요지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만이 교회이며, 옛사람은 교회의 실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더 깊이 보고 말한 것이다.


(2) 남의 말을 인용 비판하려면 말을 정확히 인용해야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워치만 니는 원세호님의 주장처럼 <교회를 재료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았다. 워치만 니는 <...교회란 그리스도를 재료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교회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연합된 사람이 교회라는 말이다. 즉 교회의 구성요소는 '그리스도와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좀 더 심도 있는 설명은 <건물교회>를 주장하는 원세호님 식 교회관이 비성경적 교회관임을 즉시 분별시켜 준다. 즉 (예배당) 건물은 성경상의 교회재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세호님이 영적 눈이 열려, 창세기 2:20-23, 에베소서 5:26-27, 30, 32에서 묘사된 것처럼 아담에게서 나온 것이 이브를 이뤘듯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명만이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이룸을 볼 수 있기를 주님께 기도할 뿐이다.


(3) 원세호님은 <주의 이름을 한 번(단수) 불러서(롬10:13) 구원된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날마다 불러야...라는 지방파의 주장은 거짓이다>라고 했다. 물론 우리는 주의 이름을 날마다 불러야 참된 교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이름 부름이 죄인이 구원받을 때 단 한번 부르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여러 번 부르는 것은 거짓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롬10:12는 주의 이름 부름이 주님의 부요함을 체험하는 길 중 하나로, 행9:14, 21은 주의 이름 부름이 예수 믿는 사람의 표식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원세호님은 무조건 부인만 하지 말고, 롬10;12, 사도행전 9장 내용을 차분히 읽어보기 바란다.


2) 원세호님은 <성경에는 교회라고 하는 용어가 114회나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94여 회는 개 교회이며 지방교회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또 다른 견해(http://magazine.wheel.or.kr/book/2001-11/26.html)에 의하면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115회 사용되었는데, 23회는 우주교회의 의미로 92회는 지역교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맞는가? 원세호님이 말하는 <개교회>의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00 침례교회> <00 장로교회> 등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처럼 장로교 침례교라는 개 교회가 성경에 94회나 쓰였다는 말이 되는데 그 구체적인 성경 근거를 제시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장로교회 혹은 침례교회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성도들이 사는 지역을 경계로 둔 지방(city)적인 교회 간증 즉 '지역교회' (local church)가 있었을 뿐이다(행8:1, 13:1, 계1:11). 그러나 이것은 서울에 있으면서 간판만 안디옥 교회라고 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교회는 <그 지방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이뤄진 하나님의 간증 곧 금등대들인 것이다(계1:11-12).


만일 교회가 원세호님 말대로 다만 성도들의 모임이라면 그 범위를 무엇으로 정하여 하나는 'A 교회'가 되고 나머지는 'B 교회'가 되는가? 즉 단수의 교회를 복수의 교회들로 나누는 성경 기준이 무엇인가? 원세호님은 이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할 수 있는가? 성도들이 사는 지역 또는 지방을 따라 교회와 또 다른 교회를 구분하는 것 말고 성경에 다른 기준이 또 있는가? 이 기준이 모호할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원세호님의 성경에 없는 교회의 실행과 기준으로 워치만 니의 성경적인 교회 실행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원세호님은 '(지방교회가) 잘못된 교회정의를 통해 기존 검증된 기성 건전 교단 교회만 무너뜨리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엔 많은 의문과 비판이 가해 질 수 있다.


(1) <교단교회>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가? 없다. 성경엔 <교단>이란 말이 없다. 그러므로 교단 교회도 성경 개념이 아니다. 원세호님은 성경적인 변증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실만을 고려한 비 성경적인 주장을 일삼고 있다.


아래 내용은 손봉호 교수님이 이사장, 총신대 이재서 교수님이 회장으로 있는 장애인 선교단체 홈(http://www.milal.org/2000/0003/page7/page7.html)에 소개된 교회의 정의이다. 이 홈은 <교단>이 교회의 속성과 전혀 무관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둘 중 누구 말이 맞는가? 만일 원세호님이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려면 교단의 출처가 되는 성경근거와 교단교회의 성경 출처를 제시하기 바란다).


"교회의 정의 : 교회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집합체를 의미한다(고전1:2; 엡1:1; 골1:2; 살전1:1). 이것은 근본적으로 교회란 단지 어떤 조직체도 아니요, 건물도 아니요, 교단도 아님을 의미한다... 비록 밀알선교단이 조직적 의미로서 다른 교회 조직과 구분이 된다 할지라도 모두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영적 집합체에 속한다."


(2) <기존 검증된 기성 건전 교단>이란 주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누가 어떻게 검증했다는 말인가?


오늘날과 같이 개신교인들이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등등으로 나뉘어져 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은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의 현상이다. 초대교회 때는 교단이 없었다. 물론 개신교 이전에도 동 서 로마 천주교의 분열로 교단을 형성했으나 이것은 개신 교단의 그것과 함께 슬픈 교회분열의 역사이지 하나님이 건전한 것으로 검증해 준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각 개의 교단으로 나뉘어지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삼위가 하나인 것처럼 저희도 다 하나되기를 원하신다(요17:21-22).


이제 원세호님은 본인의 신앙양심에 근거하여 아래 질문에 답변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원세호 님 주장처럼 이미 검증을 거쳐 인정하신 교단들을 계속 고수하기를 기뻐하시는가? 아니면 궁극적으로 성경에 없는 교단들을 말끔히 청산하고, 믿는 이들이 한 몸(엡4:4), 한 새사람(엡2:15), 한 그리스도의 신부(계19:7, 21:9-10, 22:17)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이런 쌍방의 변증을 통해 과연 누가 성경적인 교회관을 말하고 있는지 독자들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3. 원세호님의 <교회의 사명> 비판에 대한 재반박


반복해서 느끼지만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교회론 비판은 상당부분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단지 '원세호식 교회관'에 기초한 비판일 뿐이다. 그러므로 객관성이 없다. 또한 비판 상대방의 본문 인용이 정확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 비판 또한 엉뚱한 부분이 많다. 만일 이것이 고의적인 것이었다면 신학자로서의 양심을 더럽힌 것이다. 만일 실수였다면 신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할 무책임한 처사이다. 이처럼 원세호님의 변증책자는 학문적 가치도 없고, 정확성도 떨어지며, 논리전개도 중복되어 어느 모로 보나 신뢰할 수 없다. 다음 글들에서도 위 부정적인 특징들은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글들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함부로 정죄할 수 있는지 그 동기와 의도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1) 원세호님은 비판 상대방의 본문을 왜곡 인용하는 부정직한 행위를 중단하기 바란다.


독자들은 아래 두 사람(원세호, 워치만 니)의 글을 비교해 보라.


<원세호님 주장: ① "교회의 사명이 이중적으로 마귀의 능력을 제압하고 마귀의 권세를 뒤집어 엎는 것이며 사탄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라고 워치만 니는 주장하지만 마귀를 뒤집어 엎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이것은 성도 개인이 믿음을 통해 대적하면 되는 것이지 교회가 마귀 권세 뒤엎거나 손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파가 기독교에 덤비는 것이 기독교를 마귀집단으로 보이므로 뒤엎으려는 행위가 아닌가? 그렇게 사료된다.>


<워치만 니의 원래 주장: 우리는 모두 마귀의 권세를 뒤집어엎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같이 사람의 타락과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선포하자. 그러나 동시에 영적 권위를 구사하여 마귀의 능력을 제압하도록 하자, 교회의 사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으로 유익을 얻도록 또 한편으로는 사탄에게 손해를 주어야 한다">(15. p. 28, 12-18줄 워치만 니 주장)


워치만니는 교회의 사명에 대해 <교회의 사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음에도 이것을 원세호님은 <"교회의 사명이 이중적으로 마귀의 능력을 제압하고 마귀의 권세를 뒤집어 엎는 것이며 사탄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라고 워치만 니는 주장하지만>이라고 인용 한 후 <마귀를 뒤집어 엎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원세호님은 자신의 신학자로서의 양심까지 버리고 이런 교묘한 속임수를 사용하면서까지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를 공격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교회의 사명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복음으로 전하여 죄인을 구원하고 다른 한 편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하여 대적을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워치만 니의 주장이 어디가 잘못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이것을 <복음과 구원부분>은 쏙 빼고 <마귀 쪽으로만 왜곡시켜 강조하여> 인용하고 비판했는가? 이것은 지방교회가 기독교를 마귀집단으로 보고 덤벼든다는 자신의 억지 주장을 합리화하여 지방교회에 대한 기독교계의 분노를 유도하려는 고도의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원세호님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


실제로 원세호님은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http://www.biblicaltruth.or.kr)의 '예장 통합측이 윤 모 목사에 대해 결정한 내용에 대해 항의하는 글' 에서 <지방교회에게 망신당하는 통합측 총회장님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지방교회의 주장과 성경적 변증서』를 집필하였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런 식으로 특정인을 위해 사전에 기획된 의도대로 억지로 꿰어 맞추는 식의 변증은 객관적인 신뢰성도 학문적인 가치도 없다. 다만 원세호님 본인의 인격과 평판만 더럽힐 뿐이다. 이런 일은 나무와 풀과 짚일 뿐이다(고전3:12).


2) 원세호님은 자신의 잘못된 성경이해를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원세호님은 자신만 성경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함부로 그리고 너무도 경솔하게 '성경에 근거가 없다'는 말을 남발하고 있다.


(1) 아래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이라는 워치만 니의 말은 성경에 근거한 말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성경 근거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고후4:7, 우리가 영광 받기로 예비된 질그릇이라는 롬10:23,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만물을 다스리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창1:26 등등 여러 군데의 성경을 직 간접적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성경 근거가 없다고 함부로 속단할 수 있는가? 원세호님은 본인의 좁은 시야에 보인 것만 전부라고 보는 교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2) 그리고 <교회가 죄와 상관이 없고 죄와 접촉하지도 않는다>는 워치만 니의 말은 <교회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오직 그 부분>이라고 정의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이다. 요일3:9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고 말함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의 영 부분(고전6:17)은 죄와 상관이 없으며 죄와 접촉하지도 않음을 말해 준다. 만일 원세호님이 고전6:17이 말하는 <주와 합하여 한 영 된 교회의 실제>도 죄를 짓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주님도 죄를 짓는다는 말이 되어 이단적인 가르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듭난 성도들이라고 해도 생각을 육에 두면 영적 사망에 빠지기도 하고(롬8:6), 원세호님 지적처럼 거듭난 후에도 자백해야 할 복수의 죄들을 범하는 것(마18:15)은 사실이다. 워치만 니나 지방교회도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린도 전서 6:17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인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된 우리의 영 부분>은 죄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원세호님이 오직 에클레시아 식 교회정의에만 몰두하고 이 둘의 차이점을 구별치 못함으로 혼돈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새사람이기도 한데, 만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엡4:24)도 죄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런 주장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주장이 될 것이다.


<원세호님 주장: ② 지방파는 교회가 그릇이라고 주장하나 성경 근거 없으며 .... 그리고 요한일서1:9-10절에 의하여 성도였던 사도 요한을 위시하여 복수의 죄들을 자백 용서될 인간들이 모임이 교회이다. 지방파의 교조인 워치만 니가 교회가 죄와 접촉도 안 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거짓이다.>


<워치만니 원래 주장: ②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오직 그 부분이다. 우리는 교회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죄와는 상관이 없으며 결코 죄와 접촉하지도 않는다">(15. p. 58, 1-9줄 워치만 니 주장)


3) 원세호님의 소위 <구약교회> 인정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교회의 기원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간단한 주제는 아니다. 또한 구약성경의 교회개념과 신약의 교회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언약신학 쪽의 특징일지는 몰라도 세대주의 신학은 이와 다르다. 즉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라는 에클레시아식 교회개념으로는 신 구약의 교회를 동일시 할 수 있을 여지가 없지는 않다. 원세호님이 인용한 행7:38의 광야교회는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심을 내포하는 신약 교회개념의 다양한 모습들인 '그리스도의 몸'(엡1:23), '하나님의 집(성전)'(딤전3:15, 고전3:15), '새사람'(엡2:15), '그리스도의 신부'(계21: 2, 9-10)는 구약에는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것들의 예표나 상징들이 구약에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실체가 구약에도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성경을 뒤죽 박죽으로 푸는 해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편의상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면) 개념을 설명하는 위트니스 리의 교회 잉태 내지는 출생에 대한 설명을, 구약적인 교회개념을 기준으로 평가하여 교회 기원에 관한 지방교회의 주장이 비 성경적이고 심지어 거짓되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비 신사적이고 신학자답지 못한 처신이다.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치우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의 연구 결과를 그리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일 원세호님이 이처럼 엉터리 연구를 토대로 함부로 남을 이단 삼단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이시고 살아 계신 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원세호님 주장: ④ 지방파는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로 잉태되고 출생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가 제자들 안으로 들어왔을 때 교회의 잉태일 뿐인데 오순절 날에 출산했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거짓 주장이다. 그 이유는 이미 구약시대에도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 위와 같이 지방파의 교회 기원에 대한 주장이나 사명의 주장은 비 성경적이며 성경근거도 없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원래 주장: ④ "부활의 날에 교회가 잉태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다. 주님이 그분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을 때 그들은 교회를 잉태하였으나 아직 교회가 출생되지는 않았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잉태되었을 뿐이었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제자들 안으로 들어오셨을 때 그것은 교회의 잉태였다. 오순절 날에 승천한 그리스도는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 위에 그 분 자신을 옮겨 부으셨다...">(3. p.177, 11-20 ; 위트니스 리 주장)

 


4. 원세호님의 <교회 창조 목적> 비판에 대한 재반박


원세호 님은 지방교회의 가르침을 인용한 후, 그 말끝에 무조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자신의 변증 글의 대부분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나 왜 아닌지에 대한 이유 제시가 없다. 그리고 일부 제시된 이유들도 말이 안 되는 것이 많다. 또 어떤 때는 간혹 성경근거를 인용하지만 엉뚱한 내용이 많다. 이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경솔한 변증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진지하게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원세호님은 남의 글 일부를 여기 저기서 가져다가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함부로 단정하는 자신의 현재와 같은 변증방식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지금 같은 입체적인 접근과 체계적인 분석, 성경에 근거한 대안제시가 없는 비평은 결코 성경적인 변증이 아니다.


1) 원세호님은 경솔히 행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원세호님 주장: ① "지방교회는 그의 본성을 가진 참된 합일의 입장"이란 주장은 성경 근거 없는 소리이며 주의 회복이 교회 생활 안에서 예수의 간증으로 성취되는 것이란 주장도 성경 근거 없는 소리이다.>


위 인용문에서도 보듯이 비판자는 '근거 없는 소리'라는 말만 되풀이했지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 근거제시의 말이 없다. 이것이 성경적 변증은 아닐 것이다.


원세호님은 위 본문을 위트니스 리의 '주의 회복'(한국복음서원, 1990) 66쪽에서 발췌했노라고 인용문에서 밝혔으니, 그 앞 뒤 문맥을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위트니스 리가 '계시록에 있는 등대에 대한 두 세 가지의 중요한 방면들이 있다'(65쪽)라고 전제한 뒤 에 계1:12, 20에 나오는 일곱 금등대 곧 일곱 교회들에 대해 해설한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성경 근거가 없는 소리'라고 일축하는 것은 거짓되다. 또한 위 인용 책자 원문에는 '지방교회는 금의 본성을 가진...'으로 되어 있음에도, <금의 본성>을 <그의 본성>이라고 변조하여 인용 소개함으로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 이것을 우연한 실수라고 변명할 것인가? 어찌하든 이런 실수들은 님의 변증책자가 헛점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할 뿐이다. 독자들을 위해 원세호님이 비판한 위트니스 니 글 원문을 조금 더 소개하겠다.


<위트니스 리의 원문 글: ...(계1:12의) 등대에 대한 또 다른 방면은 그것이 예수의 간증이라는 것이다(계1:9). 우리가 금으로 만들어지고 참된 하나의 위치에 서서 빛을 비출 때 그것이 간증이 된다. ... "지방 교회는 금의 본성을 가진 참된 합일의 입장 위에 서서 이 세상의 어두움에 빛을 비추고, 예수의 간증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활동이나 또 다른 종류의 운동이 아니다. 이것은...예수의 간증을 지니기 위해 빛 비추는 등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새사람인 교회이다. 이것이 교회생활 안에서의 주의 회복이다.>(위트니스 리, 주의 회복, 한국복음서원, 66쪽).


교회가 이 어둠의 세상에 빛을 비추고 예수의 간증을 지녀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마5:14 -16, 계1:20)을 원세호님은 왜 비 성경적이라고 함으로 애써 부인하려고 하는가?


2) 원세호님은 자신의 단편적인 성경지식에 따른 경솔한 단정을 삼가하기 바란다.


<원세호님 주장: ② 지방교회가 창조의 목적을 교회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창조 목적은 예수님 자신을 위함이며(골1:16), ...창조 목적이 교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 목적을 실천하는 거듭난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이며 지방파 주장과 같이 창조 목적이 교회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성경 근거도 없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여러 각도의 답변이 가능하다. 우리는 창1:26, 엡 3:9-10, 1:4-5을 근거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사람도 창조하셨다>는 관점을 갖는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사람을 창조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로 만들므로, 그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만물을 다스리도록 계획하셨다. 그리고 이 계획을 따라 하나님은 시간 가운데 먼저 인간이 생존할 환경을 창조하시고 끝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창1:26).


관련 성경본문을 직접 인용해 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9-10).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에베소서2:15는 '십자가에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시고...이 둘(유대인, 이방인)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위 본문에서 사용된 동사 '크티조'(2936)는 막13:19, 엡3:9, 골3:10, 계10:6에서 '창조'로 번역되었다. 이처럼 새 창조까지도 교회가 초점이다. 새사람은 곧 교회를 의미한다.


(2) 어떤 이들은 주님이 오신 목적을 주로 죄의 용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죄의 용서는 중요한 항목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주님은 다만 죄사함 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구속받은 선민 안에 자신을 생명으로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마16:18, 요10:10, 엡1:23 본문이 이것을 증명한다. 심지어 엡5:26은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래의 워치만 니의 말은 전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것이다. 원세호님의 경솔한 말처럼 성경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워치만 니 글 인용: ② "그의 창조의 목적은 교회를 낳는 것이었다. 구속에 있어서도 그의 목적은 교회에 있었다. 사실상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 등의 모든 사역이 교회를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복음전파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성도들을 양육시키는 것도 양육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서 보면 모든 역사와 사역이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교회 건축을 위하여 구원받은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이다">(22. p. 69, 10-21줄, 워치만 니).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왜 이런 불일치가 생기는가? 그것은 원세호님이 성경을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뿐 성경 안에 내재된 하나님의 근본적인 갈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세호님은 에베소서3:2-11을 여러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묵상해 보기 바란다.


3) 원세호님은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셨지만 그러나 마귀가 교회의 발등상 될 때까지 교회는 마귀를 대적하여 영적 전쟁을 해야함을 부인하려는가?


<원세호님 주장: ③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해서 인간이 사탄의 모든 일을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교회' 라고 지방파가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이미 사탄의 모든 일은 예수님이 파괴했으며...>


예수님이 마귀를 멸하신 것이 이미 성취된 한 방면이라면(히2:14), 사도 바울의 간구처럼 사탄이 교회의 발아래 상케 되는 것(God shall bruise Satan under your feet shortly)은 또 다른 방면이다(롬16:20). 하나는 예수님에 의해 과거에 성취된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를 통해 현재와 장래에 걸쳐 이뤄질 일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로 마귀를 멸하시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히10:12-13).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뤄지고 이 땅에 왕국이 임하도록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로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한다(마6:10, 엡6:11-17). 그렇지 않은가? 이런 현재적인 교회의 영적 싸움(엡5:8-9)을 보지 못하고 심지어 부인하는 사람이 어떻게 한국 교회를 위해 진리를 수호한다고 말하는가? 한국 교회를 위하기는커녕 섣부른 이단 정죄와 자기주장으로 한국 교회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빛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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