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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역사와 한 교회주의


* 괄호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적은 제목입니다.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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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성경을 통해 본 ‘하늘에 속한 이상’(행26 :19)은 정확히 동일합니다. 그러나 같은 악보를 보고도 색스폰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각기 다른 음색을 내듯이, 워치만니의 색깔과 위트니스리의 색깔이 정확히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니 형제님은 같은 진리를 설명해도 예를 많이 들거나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함으로 읽는 사람이 쉽게 공감하게 하는 반면에 다소 장황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리 형제님은 주님 앞에 본 빛을 간결하고도 압축적으로 말함으로 이해가 쉽지 않은 면이 있으나 진리의 기초가 있는 사람들 중엔 더 간결하고 씹는 맛이 있어 좋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워치만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상을 보았고 본인은 그 실재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미처 다른 성도들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적용할 시간도 없이 감옥에 갇혔다면(20년간), 위트니스리는 그러한 워치만니의 어깨 위에서 그분이 본 것을 실행하고 적용하는 방면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력을 할애했습니다(예를 들어 주일 날 한 사람이 전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열국의 풍습이라고 강하게 비판한 사람은 워치만니였습니다. 그러나 대안이 되어야 할 일반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그 당시는 준비되지 못하여 생전에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워치만니는 성경에서 보는 1인 설교는 다 사역차원의 집회였고, 매주 모이는 교회집회는 고전 14장 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집에서 모이는 모임처럼 상호성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부담을 잘 아는 위트니스리는 성경 전권에 대한 주석을 씀으로 성도들의 진리 인식을 도왔고, 마침내 1980년 초반부터 그 동안의 1인 설교 실행을 그치고 모든 성도들이 주중에 설교를 준비해 와서 2-3분씩 말하는 소위 신언집회를 실행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한편 워치만니가 뛰어난 영적 지도자였음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그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워치만니 생존 당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구성원들의 영성이 높고 뛰어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니 형제님과 리 형제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소위 지방교회들 안에서 책에서 읽은 그런 높은 영성을 가진 모습들을 보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이 점은 인터넷에서 백 목사님 설교를 들은 분들이 총공회 내에 제2 제 3의 백목사님의 복사판들을 보기를 기대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워치만니나 위트니스리 혹은 백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들(gifts)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에게서 발견되던 높고 깊은 영성과 인격의 향기가 더 확대된 범위에게까지 나타나기까지는 적지 않은 세월과 순종과 또 헌신이 요구되는 문제이지요. 본 이상과 현실 적인 실천의 간격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로 1994년에 미국에 온 이후 골목 하나 사이를 두고 가까이 살면서 위트니스리 형제님의 마지막 3년 가량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토록 영육간에 균형잡히고 분별된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쪽에도 이 목사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몇분의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그 중 한 백인 형제님(20년간 이 형제님 라이프 스터디 문장을 다듬은)은 자신은 자아가 없는 한 사람을 보았노라고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형제님처럼 부당하게 오해받고 왜곡된 인상이 확산된 성경교사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은 풀러신학교가 발표한 선언문에서도 지적된 바 있습니다. 십대 후반에 거듭난 이후 약 70년동안 아침에 눈을 뜨면 성경을 손에 펴들고 하루를 시작하고 잠들 때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든 분을 고신대학교 졸업생 한명은 자신의 졸업 논문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기본진리도 모르는 사람으로 적은 것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이 극과 극을 이루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한 형제님입니다. 외부인들의 오해와 달리, 그에 대한 공식 명칭은 ‘Brother Lee’ 였습니다. 명칭에 걸맞게 그저 많은 지체들 중 한명으로 주님과 성도들을 노예로 섬기다가 1997년에 92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금은 LA 근교 한 공동묘지에 여느 다른 성도들과 똑같이 작은 공간에 평토장되어 있지요.


(지방교회의 이탈 교인)

...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소위 지방교회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에게는 ‘지방교회를 나온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생을 마감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지요.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 교회 남의 교회가 있겠지만, 몸의 머리이신 주님에게는 오직 하나, 그분의 교회가 있을 뿐이고 그 교회는 구성원들의 거주지역을 범위로 하는 ‘그 지역에 있는 교회’로 나타날 뿐입니다(예를 들어 the Church in Jerusalem, 행8:1). 물론 그분이 떠난다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는 워치만니 혹은 위트니스리 사역을 통한 공급을 거절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두 분은 신약의 사역(고후4:1)이 무엇인지를 아신 이후부터 최선을 다해서 생명을 공급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 이외엔 한 것이 없습니다.

... 소위 지방 교회는 들어오는 문도 활짝 열려 있고 나가는 문도 닫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90여 년의 세월 동안 적지 않은 분들이 ‘들어 왔고’ 또 ‘나갔습니다’. 보통 나가는 경우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저희는 세상 또는 교파 시절의 지위나 학력이나 경력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리가 좋아 들어왔다가 자신의 입지가 없거나 장래에도 그럴 보장이 없음을 알게 될 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나가는 경우입니다. 깊은 십자가를 거쳐 더 높은 부활에 이르는 길이 이런 분들에게는 맞지 않은 것이지요. 신학을 한 분들 중에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권신찬 구원파의 설교자 4인 중 2명이 들어왔다가 그중 한분은 지금도 그냥 형제들 중 하나로 겸손히 남아서 교회생활을 잘 하고 계시고, 다른 한 분은 본인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어떤 모임으로 다시 나가셨습니다. 침례교 신학후 단독 목회 19년 하시던 한 형제님도 재작년에 들어오셨는데 지금 형제들 중 하나로 섞여서 잘 생활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교회생활 중에 다른 성도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더 깊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생명이 성숙하는 기회로 삼기보다는 그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교회에 들어온 후에도 자신의 과거 습관과 기준(예를 들어 킹제임스 성경을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강요하다가 좌절되어 나가는 경우입니다. 넷째는 책을 통해 보았던 두 분이 가르쳤던 진리의 세계와 그 진리를 실행하는 교회 구성원들의 실제 삶과의 괴리를 보고 실망하여 나가는 경우입니다. 사실은 이 부분이 주님께 죄송하고 또 두분 형제님들께 죄송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 간의 교회생활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교회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몸의 머리이신 주님은 저희들을, 본 이상에 부합하도록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교회 안에서 금등잔대들을 간검하고 계시고 기름을 공급하고 계심을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계1:13).


(지방교회의 출발)

1.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표현력이 부족하여 제 설명이 혹시나 두 분이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실행한 것을 잘못 전달할까 염려가 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워치만니나 위트니스리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갈망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다 포함한 한 몸을 세우는 것>임을 밝히 보았습니다(엡3:6). 그후 워치만니는 실행에 있어서는 기존의 모든 실행들을 하나씩 하나씩 성경과 대조한 후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길을 갔습니다. 즉 성경 자체가 계시하는 청사진 내지는 설계도 대로 지어나가고, 설계도와 다른 기존 건물들 (교계 실행들)을 뜯어 고치려 하거나 덧 대어 짓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그렇게 할 여력도 여건도 그 당시에는 허락되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연관을 갖고 있었던 형제회에 이미 주님이 이루신 개혁의 유산들을 더 계승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개혁 교단으로 이어지는 노선과는 태생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 밖이다 안이다 말하기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교회를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워치만니가 본 주님의 몸인 교회는, 다마스커스에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본질적으로 머리이신 주님께서 ‘나’ 라고 할수 있을 만큼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즉 교회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몸의 표현인 지역 교회들은 오순절 이후 이 땅에 출현했던 초기교회들처럼, 다른 어떤 것으로 나눌 수 없고 오직 지역적인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분명한 조망은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교회가 본질적으로 왜 다른 지를 밝히 보게 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 시절에도 이 차이를 보지 못하고 할례나 절기를 지킴 등 구약 실행을 신약교회 안에 가져올 때, 몸 안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고(행15장), 바울로 하여금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를 쓰게 했습니다.

또한 초기 교회 때는 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에 수 만명의 성도가 있었으나 그들을 지금처럼 매주 어느 한 장소에 모아 놓고 한 두 명의 목사가 설교를 하는 식으로 양들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각 가정을 중심으로 모여서 가정 단위로 성만찬을 하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을 따라 교제하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를 유지해 보였습니다. 그대신 교회 인도자들인 장로들과 사도들은 교회 행정과 필요시만 특별한 영적 공급을 했습니다. 교회의 이 두 방면(본질, 실행)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이 소위 지방 교회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지도록 부단한 노력이 있어 왔습니다.

2.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의 교회 역사는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이미 2세기경 이그나티우스 때부터 조금씩 원 모습에서 벗어나다가 6세기경 확립된 교황제도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를 통한 ‘세계 교회’ 형태를 띄게 되었지요. 그후 영국 성공회 등 ‘국가 교회’로 그 범위가 조금 줄어들었다가 종교개혁 이후에는 특정 진리나 특정 인물 등을 중심으로 한 ‘교단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요즘엔 심지어 교단이나 교단 신학보다도 목회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든 가져다가 접목시키는 ‘개 교회 형태’로 가고 있습니다. 합동 출신이 순복음 신학을 하는 식은 교단의 고유 정서상 외도라고 할수 있으나 그런 사례들이 일어났습니다. 요즘은 이 교단 저 교단 다녀봐도 거기서 거기이고 실망과 상처를 끌어 안고 아예 자기 가정에서 마음맞는 몇 사람들끼리 예배를 드리는 소위 가정 교회 형태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가정에서 모이는 외적 형태는 같아도 그 본질은 예루살렘 교회 시절의 가정모임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교회다 라고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처럼 성경에서 본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이상과 그와는 멀리 떨어진 주변의 교계 현실 사이에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래야 한다 저것이 틀렸다 외치거나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들부터 전통이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성경적인 길을 따라 실행했습니다. 침레를 실행하고, 매주 성만찬을 실행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을 실행하고(니 형제님은 거듭난 이후 바로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방면에서 전적으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이런 와중에 많은 에피소드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어느 시기까지는 교계에서 강사로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갖기도 하고 양쪽 간에 교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모임과는 당신들이 교회 실행이 더 성경적이라는 것을 성경으로 입증해 주면 당장 오늘이라도 우리 교회의 집회소의 간판을 떼고 그곳으로 가서 함께 모이겠다 라고 진지한 제안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가 말하는 생명 방면의 진리는 깊고 풍성하여 환영하고 받아들이나 교회 방면의 진리는 선을 긋고 교제를 꺼려하는 식으로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 두분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성경적인 것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을 설득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따르겠다는 입장이지 너는 나와 다르니 틀려고 함께 할 수 없다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손봉호 교수 같은 경우는 장로교 헌법에 총회니 노회니 교단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적어 놓았으나 성경을 직접 찾아보니 문맥상 그것을 뒷받침 하고 있지 않아 근거가 없다는 말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였고 이 말이 책으로 나온 것을 저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을 남이 하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두 형제님에게도 동일하게 실행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게 되다보니 자연히 간격이 생긴 면이 있습니다.

4.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한국의 경우 장로교는 현재 수백개 교단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종윤 박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장로교를 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국에 장로교가 하나로 모아진다면 그 다음엔 침례교, 성경교 등 다른 교단들과도 합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듭난 그 생명 하나만 붙들고 자꾸 하나로 하나로 합쳐 가다보면, 결국에는 원래 대로 단 하나의 교회(마16:18)만 남을 것입니다. 여기다가 무슨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초대교회처럼 특정 교회가 그 지역 단위 명칭으로 불리는 단계까지 가게 되겠지요. 그럴 때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서를 쓰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쓰며,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로마서를 쓰던 원래의 그 단계까지 복원되겠지요.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 서로 교제하고 건축함으로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그분의 교회가 이 땅에 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분 형제님들이 본 교회관이고, 그분들은 먼저 그 입장에 가서 서 있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가 항간에서 불리는 것처럼 워치만니 교회도 아니고 위트니스리 교회도 아닙니다. 오직 한분 이 교회를 피값 주고 산 바로 그분의 교회일 뿐입니다.

실제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선교나가 본 분들은 그곳까지 가서 자기를 파송한 특정 교단 소속 교회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현지 사정에 도움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결국 성경으로 돌아갈 때 모두가 평강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과 원칙은 우리의 타락한 옛사람과 자아가 음부의 문들에서 나오는 대적의 공격에 이용당함으로 알면서도 잘 지키기가 어렵고, 현재 처한 현실을 고수하고 합리화 하려는 경향이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에 관한 입장은 다사다난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현재 형태로 굳어져 온 면이 있어서 어떻게 접근해도 모두가 통일된 견해를 가지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성공회 목사가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론에 대해서 30년 이상을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론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분 말이 니케아 신경이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 ‘교회’가 무슨 의미인지를 가지는데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말해 침례교회가 바로 그 교회라면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게 되고, 장로교회가 그 교회라면, 성결교는 그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즉 지금처럼 분열된 상태에서 그 분열을 전제로 교회를 정의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 케빈 길레스가 그의 학위논문인 <성경적인 교회론>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그 교회를 기준으로 우리의 현실을 스스로 바꿔가는 길이 가장 쉽습니다. 이것이 두 분 형제님이 택한 길이었습니다.

...개 교회에 중심인물이 없지 않지만 복수의 장로제도를 매우 엄격하게 실행하고 있는 편입니다. 또한 한 몸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 마치 우리 몸 안에 어떤 불균형이 있다가도 자가 치유력에 의하여 균형을 이뤄가는 그런 원리를 따르는 입장입니다. 쉽게 말해 치리권이나 공급의 근원이 최대한 지체들에게 분산되거나 상호의존하는 구조임으로 어느 한 두 사람이 좌우 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또 한가지 특징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대만 등 다른 나라의 영적인 분량이 있는 지체들이 서로 서로 교통가운데 한 몸 안의 교류 차원에서 공급하고 권면하고 또 머리이신 주님이 주권적으로 다루시기를 기다리며 인내하며 바라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몸, 하나, 교제(코이노니아), 생명률(롬8:2)..이런 부분들이 많이 강조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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